예비하고 모을 것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6:8-11)
녹취자: 박윤정
바느질을 할 때에 그 바느질은 한땀 한땀 그렇게 진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건너뛸 수가 없습니다. 잘한 바느질일수록 땀이 고르고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건너뛸 수가 없습니다. 오늘이 있기 전에는 어제가 있었고, 어제 전에는 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오늘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연결 고리를 매우 무시합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자신 속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현재는 과거를 보면 알 수 있고, 현재와 과거를 종합해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오늘은 내일의 예고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의 삶에 한번 적용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지혜자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말한 뒤에 즉, 감독자도 없이 스스로 일하는 개미에게서 근면함을 배우라고 말한 후에 그 개미가 여름 동안에 모으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평범한 상식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잘 반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성찰도 부족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사람은 미래에 대한 별 기대가 없기 때문에 성찰하지 않고, 낙관적인 사람은 덤벙대기 때문에 미래에 무조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스스로를 암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성찰해보면 내가 오늘 왜 이런 사람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현재와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미래에 정확하게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물건 가운데에 가장 잔인한 물건 중 하나가 아마 거울일 것입니다. 거울은 기분에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우리 자신의 얼굴을, 용모를 보여줍니다. 어느 아침은 거울을 보면서 기분이 상하기도 합니다. 너무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고, 유난히 주름이 많아 보이고,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얼굴이 푸석해 보입니다. 그러나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누가 앱을 개발해서 원하는 모습을 입력하면 거울로 보여주는 그런 거울이 나온다면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 구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울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꼭 필요한 어떤 것에서 궁핍을 느끼고 있다면 어떤 것들은 피할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파바로티처럼 노래를 부르지 못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궁핍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어제의 나의 잘못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아마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고 훈련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목소리가 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그 오랜 세월동안 탄산음료와 얼음냉수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목소리는 훨씬 더 잘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들은 이미 타고났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능히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못하는 그것입니다. 오늘 그래서 궁핍하게 느끼는 어떤 부분들은 바로 여름이었던 지난 날, 우리들이 열심히 모으고 거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만약에 우리 자신이 여름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거두지 않는다면,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다면 가을에는 거둘 것이 없을 것이요, 겨울에는 궁핍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한순간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그리고 오늘 내가 놓여있는 이 삶의 모든 상황의 의미를 깨닫고 이것을 끌어안고 삶을 살아가는 힘, 즉 사랑의 능력이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생겨난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모든 사람이 목회를 잘하고 싶지 망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결혼 생활을 잘하고 싶지 망가트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때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가슴에 칼을 꽂고 이혼하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으며, 한때 사랑해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증오할 정도로 미워하는 사이로 깨지기 바라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목회를 못하는 사람은 못하고,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못 이어갑니다.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나는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설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목회를 하려고 했는데도 안됐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귀담아듣고 이해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편을 들어주는 내 친구들은 나를 용납해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살려고 몸부림쳤는지, 그런데 결국은 왜 우리 가정이 깨어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해 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 관한 진실을 말해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묻어버리기 때문에 진실을 다 말해주지 않는데 원수들은 추호도 날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거울처럼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미움으로 얼룩져서 우리를 말하자면, 휜 거울처럼 우리를 보여줄 때가 있지만은 그 속에는 진실의 조각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건 불멸의 법칙입니다. 아무리 있다고 생각해도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아무리 없다고 굳게 믿어도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이라고 하는 날은 어제가 쌓인 오늘이고 오늘이라는 날은 미래의 나를 빚어가는 날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살 때에 나의 내일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찰입니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기로부터 이탈해야 합니다.
과장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영원이 못보고 죽습니다. 나는 지연 전도사를 쉼 없이 보지만 그러나 본인은 본적이 없어요.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빼내야 됩니다. 눈을 거꾸로 돌려서, 그 대신 쑥 빼면 안 됩니다. 기능이 끊어지니까. 눈을 잡아 빼서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놀랐을 때 튀어나오는 것처럼 눈이 튀어나와서, 반대로 돌아가서 날 들여다봐야 됩니다. 그래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튀어나온 눈은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니까. 눈 없는 자신을 보게 되겠죠? 그런데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이탈시키는 그 힘이 진리의 힘입니다. 상식이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현재에 있는 자신이 있는 아니라 마땅히 되어야 할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있는 자신과 있어야 할 자신 사이를 비교하면서 성찰하는데 보통 에너지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뇌는 200g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몸 전체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90,kg 어떤 사람은 80kg 이렇게 되겠죠? 60kg, 70kg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200g이라는 것은 얼마나 적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섭취하는 열량의 20%를 200g의 뇌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20%를. 그러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요만한 뇌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우선 진리와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이탈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게으른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는 자기를 성찰하는데 쓸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내일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삶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살 때에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베짱이가 여름 내내 노래나 부르고 놀 때에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각료들을 뽑아야 됐습니다. 그래서 인재 풀을 가지고 사람들을 선택을 하고 면접을 봤습니다. 그래서 면접을 딱 보는데 면접을 다하고 나서 그 사람이 나갔어요. 참모들이 “각하,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아휴, 난 저 사람이 싫어. 인상이 영 그래.” 그런데 참모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좀 합당하지 않은 이유죠. 각하, 그렇게 사람을 차별하고 그러시면 됩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성품의 여부가 40이 되면 얼굴에 죽 투영돼서 나옵니다. 온유한 얼굴이면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뭔가 날카롭고 무엇인가 전투적인 사람은 그렇게 험한 인생을 살아왔고 그런 인생을 살아온 상처들을 소화를 못해낸 흔적입니다. 그게 20대 때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안 져도 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왜냐면 빚어져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0은 이제 된 것입니다.
포도주를 담근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한두 달 정도 지나면 포도주가 되잖아요? 물론 몇 년 묵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묵히는 건 그냥 묵히는 게 아니라 해놓고 포도를 건지는 게 얼마 만에 건질까요? 한 한달? 한주? 담가놓고 그냥 포도주를 두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얼마간 일주일인가 한달인가 있다가 포도를 다 건집니다. 그리고 포도 국물만 발효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백년된 포도주, 이백 년된 포도주라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포도주는 둘 중 하나입니다. 상하던가 발효되던가. 둘 중에 하나지 중간은 없습니다. 상하던가 발효되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40세 될 때까지 겪는 모든 삶의 사태들을 소화하고 발효된 모습이 얼굴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발효되지 못하면 부패한 겁니다. 그럼 그 부패한 게 이 속에서 끌어 오르니까 얼굴에 그대로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아무리 화장을 치덕거리고 해도 심사가 편하지 않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얼굴이 울퉁불퉁해지면서 그 근육들이 긴장되어서 그 험한 얼굴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면 이것을 소화해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오늘이라고 하는 시기는 오늘의 나의 인격은 오늘 하루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오는 긴 세월동안 결국은 내가 나의 인격적인 온전함을 위해서 몸부림쳐온 결과 그 인격으로 오늘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태어날 때부터 훨씬 더 성격이 아주 원만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그것은 비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그것 말고 어딘가 찾아보면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반대편에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하고 훌륭한 좋은 점들이 있는 겁니다.
한번은 내 동생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참 사는 게 힘들다. 무엇하나 눈에 거스르지 않은 게 없다. 너무 작은 것에 예민하고, 색깔, 냄새, 모양, 이런 것에 특히 빛에 대해서 이런 것에 너무 예민하고 온도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참 너무 힘들다.” 젊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위아래 안 맞는 옷을 입고 다니면 내가 학대를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학대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지 않습니까? 교회와도 건물이 다 학대 투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데 그것을 유지해 가는데 비용도 많이 듭니다. 때로는 우리 집사람한테 사치하다는 걸로 정죄를 받기도 합니다. 그냥 쓰면 되는데 굳이 그렇게 바꿔야 되겠느냐,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데 꼭 칠을 해야 되겠느냐, 바지하고 윗도리하고 그냥 입으면 되는데 꼭 그 재킷을 해야겠느냐 이런 식의 이야기입니다. 일체 대꾸를 안 합니다. 그냥 자꾸 이야기해봤자 말만 많아지니까. 그러나 지금은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느낌이 조금씩 조금씩 덜해집니다. “참 힘들다. 뭐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으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랬더니 내 동생이 위로를 합니다. ”형님이 그건 맞는데, 우리도 힘든 건 사실인데 그런데 그런 예민함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형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파보면 그것 때문에 좋은 그 무엇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도 부지런하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대부분 땅 속에 묻은 달란트처럼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죽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오늘은 여러분들의 내일입니다. 지금 인생의 고민을 모두 끌어안되 포기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할 때 그때에 그 선함이 40세가 되었을 때 얼굴에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그렇게 살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고 남이 그런 삶을 살도록 도우면서 오늘이라는 여름을 살 때에 그때에 내일이라는 가을에 거두게 되고 겨울이 오면 여러분들이 풍족한 것을 누리면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나의 존재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신세지기를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을 성경이 허락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제1원리는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조차.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럴려고 애쓰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자기도 많이 갚은 사람보다는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삶이 사람의 삶입니다.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티끌만한 누도 다른 사람에게 나의 존재 때문에 끼치지 않게 하겠다 그렇게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의 자원이 있어야 됩니다. 살아야 하니까. 자원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가계의 대출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부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부채였겠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는 그 부채를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삶인데 그 부채를 지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낭비를 줄였더라면, 현실에 만족했더라면, 적절한 집에 살았더라면 괜찮았을 사람들이 더 많이 더 크게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하면서 빚에 허덕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자원이 있어야 됩니다.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우리가 살면서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을 만나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품고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인격적으로 그 사람들을 그렇게 품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지식적으로 일일이 이야기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모은 개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름에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에 거둬들입니다. 겨울에는 그것을 누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유입니다, 여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조금 돈이 들어오면 쓰는 즐거움에 목마르고 그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수입을 초과하기 때문에 결국 빚을 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빚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돈을 미래를 위해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저축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선하게 나누어 줍니다.
두가지 저축이 있는데 지상저축과 천상저축입니다. 지상저축은 자기가 자기 돈을 모아서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천상저축은 가난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하늘에 쌓아두어서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간절히 그걸 좋아하셨으면 꾸어주는 것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을 천상저축이라고 나는 부릅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지 않던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매한 사람은 쓰는 재미로 인생을 살지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그렇게 쓸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절제하면서 사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언제나 베풀어줄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60년을 살면 60개의 에너지를 매년 하나씩 쓰면서 사는 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에너지가 거의 안 듭니다. 어렸을 때에 철모르고 놀던 때에는 에너지가 거의 안들어가는 때입니다. 늙어서 이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조용히 아침 먹고 요양원에서 누워있는 처지가 되도 에너지가 많이 안듭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될 경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때에 자신이 모아둔 자원이 없으면 거덜이 나게 됩니다. 그 때를 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지식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항상 현실을 넉넉히 맞설 수 있고 불의의 사태가 일어나도 능히 그것들을 감당해나갈 수 있는 자원을 예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내일을 써가는 것입니다. 오늘 결국 여러분들이 오늘을 살고 있는 자세는 내일의 여러분들의 삶을 가져오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소중한 결단은 이것입니다. 오늘부터 내가 오늘 나 자신에게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내가 쌓여서 내일의 내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일체의 게으름을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그렇게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학문적으로 자기 자신을 준비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