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0-11).
녹취자: 이새봄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도 알았으면 그 다음에 생각해볼 것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크게 둘로 나뉘는데 우선 인생의 허무함을 알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지혜자는 전도자는 제일 먼저 기쁨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말합니다. 기쁜 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쁨이 내일까지 가지 못하고 오늘의 즐거움이 끝나면 내일의 기쁨의 원인을 찾아야 될 터이니 그걸 찾는 것 자체가 인간의 피곤함이라는 것입니다. 웃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음, 기쁨, 기쁘니까 웃음이 나오겠죠. 그것들도 모두 다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는 또 다른 인생의 의미를 사업에서도 찾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크게 하고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고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리고 과목들을 심고 그리고 연못을 파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저수지 같은 것을 팠겠죠. 이렇게 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던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크게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말년에 이 전도자의 마음의 허무함을 달래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또 재산에서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재산을 불리고 또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노비들을 소유했는데 그에게 소떼와 양떼와 짐승의 소유가 엄청나게 많아서 일찍이 아무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재산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인생의 말년에 이 전도자의 마음의 허무함을 달래주지는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쾌락에 있어서도 으뜸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술에 취해 보았고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육체의 향락을 따라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볼 때 그 모든 것이 결코 자신의 인생의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리해서 말하기를, 눈이 무엇이든지 보길 원하면 난 뭐든지 다 볼 수 있었고 무엇이든지 내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만하면 결코 막지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해보았는데 이것도 불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손이 수고해서 얻은 소유를 가지고 했으니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이 합법적으로 돈을 벌고 합법적으로 재산을 불려서 합법적으로 노비를 거느리고 처첩을 거느리고 그렇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행하면서 살아보았지만 마지막에 이 전도자의 고백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웬 방이 그렇게 많습니까? 먹방, 멋방, 갈방… 먹고 싶은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방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옷을 입는지를 보여주는 멋을 자랑하는 방이 있고 어디로 가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갈방이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제시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삶의 고단함을 달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잘못 사용하면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그것에 탐닉하게 만듦으로써 점점 더 인생의 본질적인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끝이 어디겠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가 팔도의 짜장면 집 천 군데를 다녀봤답니다. 인천에서부터 마라도 끝에까지.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돈도 있고 다리에 힘도 있으니까 그러고 삘삘 대고 돌아다니면서 짜장면을 퍼먹는다고 칩시다. 돈 떨어지고 기운 떨어지면 그 다음에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뭔가를 찾아내겠죠? 그러나 토마스 왓슨이 말한 것처럼 결국 어느 순간에는 그런 죄가 우리를 버리는 때가 옵니다. 우리가 죄를 버린 게 아니라 죄조차도 우리들이 이용가치가 있을 때까지만 사용하지 더이상 자신에게 종노릇할 수 있는 육체를 갖지 못하면 죄도 우리를 버립니다. 그래서 멋방에 가서 옷입는 것을 배워도 갈 데가 없고 봐줄 사람이 없고 먹방에 가서 맛집을 찾았어도 갈 다리의 힘이 없습니다. 갈방에 가서 여행지를 찾아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건강이 안 됩니다. 그때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전도서는 허무주의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경 중에 ‘솔로몬의 지혜서’라고 하는 것을 보면 결론이 이상하게 갑니다. 너무 허무하니까 적당히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라,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빠져서 지친 사람의 푸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의 시간적인 사물들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허무를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는 데에 이 전도서의 뜻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이름이 전도서, 전도서.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코헬렛인데 설교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모인 사람 앞에서 이 전도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쁨도 웃음도 사업도 재산도 소유도 심지어 적절한 우리의 욕망도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 아래에 있을 때 그것은 목적에 굴복하면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에 방해를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인생에 힘에 활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침서부터 일어나서 너무 곤고한 일들이 생각나고 마음의 기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직원들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깔깔대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왠지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면서 뭔가 하루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아무런 힘도 없고 마치 간 맞지 않은 국을 억지로 퍼먹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때 뜻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쁜 소식이 들려서 그래서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얼마나 소수입니까? 내가 사업을 하는 데에 보람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해보니 이루어지면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얼마나 재밌습니까? 그리고 재산이 불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해볼 수 있는, 뜻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 없이는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얘기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라고 부정하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 다시 긍정으로 돌아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고 사는 사람이 일 년 내내 고통스러운 얼굴로 수도사처럼 산다면 과연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볼 수 있을까요? 쾌활하고 붙임성 있게 행동하면서 마음의 기쁨이 있고 이웃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좋은 사람입니까?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의미는 땅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인간의 정신은 진흙탕을 향하여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들은 땅에 있으나 그 사물의 의미는 하늘에 있고 사건은 지상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천상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정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보이는 사물의 우리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 때 이것은 일정하지 않고 요동치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빠졌을 때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매달려서 살고 이성에 빠졌을 때엔 그거밖에 없는 줄 알고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며 매달리고 삽니다. 그런 사람 안중에 하나님이 있을 리가 없고 안중에 하나님이 없으니 그 사람 마음에 모든 사물의 질서는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게 변덕입니다. 변덕. 그런 속에서 마음의 무슨 안정을 찾을 수 있겠으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자기가 의지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인간으로 창조하셔서 내게 부여하신 그 의미를 생각하고 내게 주신 모든 사람과 사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무 쉽고 그 질서를 뒤집을 때 구역질나는 것처럼 힘들고 살기가 싫은데, 일단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질서대로 사는 게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억압입니다. 결국은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그 질서를 뒤집고 마는데 거기서 인간은 끊임없는 영혼의 고통과 마음의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하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인생이 그렇게 허무한 것을 알고, 두 번째로 의미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하늘로 고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만물 중에 가장 소중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사랑스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때 우리의 정신은 내려오면서 모든 사물들에게 합당한 질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는 이것이니 많이 있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하고 적게 있는 것은 적게 사랑하고 위에 있는 것은 탁월하게 사랑하고 아래에 있는 것은 그 사랑 아래에 굴복하면서 좋아하는 것이 그게 정의입니다. 이것을 벗어남으로써 우리의 정신은 갈 길을 잃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믿는 바와 우리의 살아가는 바가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허무하니 그 자체를 사랑하며 좇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하게 대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데에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행복을 찾고자 할 때 인간은 결국은 더 크게 불행해지게 되니 이로써 인간의 모든 삶이 고통과 시련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첫 번째 수혜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안정된 삶을 살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이 질서로 돌아오기를, 이 질서로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