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녹취자 : 김지혜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이 뭐였습니까? 직업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시간이 짧아서 많이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자기 직업에 불성실하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을 거의 못 만났습니다. 목회자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목회자가 자기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나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습니다. 직업의 영역을 월급 받기 위한 수단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에서 별도의 구획이고 - 거기서 번 돈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처럼 미친 인생관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결코 누구에게도 본받을 만한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직업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카치오 사상입니다.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런 뜻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것이 직업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여기서 설교하는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정상적으로는 6시에 퇴근한다고 칩시다. 집에 도착하면 7시 반입니다. 식탁을 치우고, 가족들과 마주 앉아 있으면 8시 반쯤 됩니다. 같이 텔레비전을 봅니다. 진정으로 같이 있는 시간 아닙니다. 그리고 10시만 되면 각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침에 저 같은 경우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교회 나옵니다. 오늘 5시 55분에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역이 단지 돈벌이 수단이고 다른 인생을 산다고 그러는데 묻고 싶습니다. "What is another life?" 뭐가 다른 인생입니까?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데 뭐가 다른 인생입니까? 그 번 돈으로 즐겁게 놀아봤자 몇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그게 또 인생의 보람과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 직장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직장의 구성원들에게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 이것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뿌리 없이 허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열매 맺은 아름다운 나무는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뿌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인생의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보편적인 인류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총체적인 큰 목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나의 인생의 목적은 인류 전체의 인생의 목적 안에 있습니다.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 있지만 무시되어도 좋을 정도로 독특성이 없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굳이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창조하셨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실존주의자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필요? 무슨 인간이 필요하냐? 그냥 태어났을 뿐이다. 어디로부터 그건 누가 아냐? 어디로 가냐? 그 누가 그걸 대답할 수 있겠냐? 그런 질문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잉여의 존재다. 남아도는 인간이라 이것입니다. 굳이 없어도 덜어내도 이 세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우연히 있게 된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의미를 묻지 말라 입니다. ‘가엾은 어머니 왜 낳으셨나요?’라고 탄식하지도 말고 그냥 낙엽처럼 떨어진 존재이고 바람처럼 불어온 존재일 뿐이고 사라진다고 해도 세계에 바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개뿔. 그런 게 어디 있냐? 이것입니다. 전혀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각자 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인생의 목적을 결혼하는 데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즐길 건 즐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도 웃깁니다. 아니면 아니지 무슨 계약까지 해서 또 결혼을 합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난봉꾼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자로 살았습니다. 행복했을까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건 나한테 묻지 마라. 그렇지만 나는(내가 볼 땐) 티끌도 부러워할 것이 없는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결국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비록 인류 안에 있지만 인류는 인류로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로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태어났습니다. 그게 enjoy하는 것입니다. 영어에 '즐기다'라는 단어가 몇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pleasure, happiness, enjoy. 그중에서 가장 낮은 차원이 pleasure, 그다음 정신적인 차원이 happiness. 그다음에 아주 높은 차원이 enjoy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 큰 차원에서 즐거워하기 위해서. 향유하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이 없는 사람이 결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들은) 그걸 찾지 못한 것입니다.
한혜성 원장이 내게 꽤 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서 나온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죽어라고 치료를 해 주는데 (환자가) 한사코 자살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의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건 신학생과 철학자들이 대답할 문제지만 나(의사)는 제발 좀 더 살아주시라고 말씀드리자 “선생님 제가 이렇게 자주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제가 죽는 걸 안 무서워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도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보다는 덜 무섭습니다.” 난 열네 살 때 경험했었습니다. 사람이 일정 한도를 딱 넘어서게 되면 죽음이 하나도 안 두렵습니다. 그 대신 삶은 어마어마한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를 떠나고 나서 실존주의 철학자 작품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철학자들의 글을 어린 나이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뜻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까 철학과 학생들도 힘겨워하는 책들을 손에 집었더라고요.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원론 같은. 머리를 싸매고 읽어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어쨌든 너무 궁금해했으니까 또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에 받은 인상은 그렇게 내가 격렬하게 박수치던 니체도 결코 행복하게 죽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끼고 다녔던 바이런도 행복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쇼팬 하우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귀 기울일 수는 있었는데 정말 행복하게 죽었다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게 고민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민이었냐면 죽을 때 그렇게 불안하게 죽었다면 여기서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든지 굶어 죽었다든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주관적이고 내적인 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가 행복이라고 외쳤던 수많은 삶에 있어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과 허위가 섞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인생에 대한 행복이 진실하다는 것은 마지막에 죽을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데리다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판에 정신이상자가 됩니다. 치매 같은 게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자신의 인생이라고 믿었습니다. 자기가 치매 걸릴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엉금엉금 기어가서 병원 창문은 열고 투신자살해서 죽어버립니다. 나는 그 죽음이 신념을 따라 죽은 거였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처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까지 포괄해서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견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가족의 이야기가 왜 나올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여기에 뭐라고 그러셨는지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특히 남성들이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아담만 만드시고 하와는 아담을 통해서 만드시잖아요. 그랬다고 할지라도 남자와 똑같이 여자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는데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라고 번역된 부분이 아담이에요. 어떤 사람은 저처럼 해석을 안 하고 아담에게 하나님이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해석을 예전에 많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참정권을 얻는 것도 그렇게 긴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지몽매한 해석이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중요한 이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미 결혼이라고 하는 것, 둘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예고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형상입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셨습니다. 성자 성령 없이 성부가 홀로 계신 때가 없고 성자도 또 다른 두 비 없이 계셨던 때가 없으며 성령 역시 성부와 성자 없이 홀로 계시던 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관계적인 형상입니다. 함께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관계적인 형상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형상과 관계는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이 관계를 이루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가 바로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뒤에 생육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 먼저 나오는 것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입니다. 여기에서 복은 ‘배라카’입니다. 영적인 복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에 이르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즉,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자연 세계와 관계를 갖고 있어서 더 이상 부족하기 때문에 결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그러한 상태가 바로 이 배라카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노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셔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낙원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당장 뭐라도 캐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이런 상태에서 인간을 창조했더라면 그게 무슨 낙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듭니다. 그러면 도대체 노동은 왜 해야 했을까요? 노동을 해야 했을까요? 어차피 불사의 몸으로 태어났는데 말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상정을 해봅시다. 과일도 따먹고 살아야 합니다. 일체 안 먹어서 굶어 죽었다 그런 일은 에덴동산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물론 먹었겠죠. 그러나 그것이 생존의 조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농사는 결국 밥 벌어먹기 위한 농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 있어서 노동은 무엇일까요? 김남준 목사의 글쓰기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나 책 안 써도 열린 교회에서 내쫓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 책 안 썼다고 독자들에게 테러당할 위협 없습니다. 내 마음입니다. 쓰든지 안 쓰든지 그리고 나는 내가 쓴 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읽고 있을 때 제 관심사는 벌써 그 책에서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아사밤. 제 마음 벌써 아사밤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런데 왜 쓸까요? 수입 때문에? 아니 여기가 에덴동산이라고 친다면 수입도 필요 없습니다. 왜 쓰는 것일까요? 예술작품이라서 쓰는 것입니다. 내 머릿속에 다 있는 것이지만 완성된 상태로 볼 때 "참 좋다"라는 느낌이 들잖아요. 영원히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닙니다. 조교가 리포트를 다 써서 아주 자랑스럽게 출력합니다. “지금 너무 기분 좋아요. 교수님. 그러니 교수님이 책 한 권 나왔을 때 기분이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좋지” 그래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노동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 예술작품으로서의 노동입니다. 이게 노동에 대한 타락 이전에 새로운 관점입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는 더 필요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복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결국 무슨 결론에 도달하게 되냐 하면 생육하지 않아도 번성하지 않아도 땅에 충만하지 않아도 땅을 정복하지 않아도 생물을 다스리지 않아도 아담과 하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거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일어나니라고 한 것처럼 행복에서 또 다른 행복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결코 구원이 모자라서 성화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그 마음으로써만 진정한 성화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행복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기에 더 큰 행복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이기적인 욕망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술작품으로써 밭을 일구고 하나님을 위한 예술작품으로 이름 없이 돌아다니던 짐승들에게 이름을 부여합니다. 아담에게 그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 그 기억이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고 그것 없이 이름을 되뇔 때. 그 짐승이 떠오르는 놀라운 기쁨이 생깁니다. 행복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그런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생육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남녀를 결합시키십니다. 혼인으로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족이 뭐예요? 아마 우리나라에서 나온 국어대사전 중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낄 만한 사전이 고려대학교에서 나온 한국어 대사전, 그게 한 권이 2,500페이지인데 3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격만 60만 원이 넘습니다. 한 권에 25만 원인가 합니다. 그러니까 75만 원, 30만 원이나 거의 100만 원 가까이 됩니다. 거기에 약 35만 표제어가 실렸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쓰는 단어는 한 5천 단어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렇게 66페이지에서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이냐?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가까운 혈육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구성원. 점 찍고 한마디 말을 못 했습니다. 대개 한집에서 산다는 것으로써 가족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비스무리합니다. 이것이 국어사전에서 이야기하는 가족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족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 정의는 굉장히 싱거워요. 그리고 그냥 현상적이고 평면적이에요. 그 가족이 어디서 왔다든지 그렇게 가족이 모여 뭘 위해서 사는 건지 이런 얘기는 안 나옵니다. 성경은 이것보다 훨씬 더 발생주의적이고, 기원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남자와 여자에게 가정을 이루어서 그들에게 생육하게 하는 게 첫 번째였습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는데 하나님이 아담은 직접 만드시고 하와는 갈비뼈를 취하셨으나 똑같이 자기 형상을 닮은 것처럼 생육을 통해 태어나도 똑같이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번성하게 하고 땅에 충만하게 합니다. 충만하게 한다는 이야기는 사람으로 뒤덮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명이 모여야 세상을 뒤덮겠습니까? 전 세계 인구 75억이 좌우로 팔 벌려 체조 대형하면 충청북도에 꽉 찬다고 합니다.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니 이 세상 전체를 가득 채운다면 수천억으로도 못 채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흩어져서 각각 자신에게 지정된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하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 그 당시에 무슨 대적자들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질서가 없는 그 땅에 가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라고 하는 것은 왕이 지휘봉을 가지고 저놈을 죽여라. 이렇게 명령할 때의 다스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임금은 어마어마한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누구를 편애하거나 누구의 목을 자르는 데만 그걸 사용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선한 질서로, 히브리어로 하면 ‘라다’입니다. 어떤 선한 질서들을 가꾸고 절제시키고 돌보아서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게끔 하는 것이 바로 다스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북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김정은이 책상을 치면서 대노하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로 말하자면 청와대나 중앙적인 국정원이나 이런 데서 끗발을 부리는 간부들을 향해서 민주인민의 원수고, 혁명의 원수라고 규정하면서 아주 사그리 없애버리겠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결국은 그 독재자의 마음속에도 뭔가 질서가 잘못되어 있으니 그런 질서를 올바르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스린다는 개념이 사전적인 개념과 워낙 다른 것입니다. 특히 성경적인 선의 개념과 관련해서 다스리다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남자가 험한 산을 가꾸어놓으면 아내가 가서 거기를 아름다운 꽃밭으로 혹은 채소밭으로 만든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명이 아담 개인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하와에게 함께 주어집니다. 생육하고 반성하는 모든 무리하게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가정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온 땅의 질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의 질서로 만들기 위해 같은 목적을 품고 독립할 때까지 함께 있는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러한 목적을 가정이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왜죠? 그런 부모를 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너무 희소합니다. 설령 부모는 그렇게 자랐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은 진공 상태에 있는 애들이 아니라 온갖 죄에 물든 애들이 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눈물겹게 그렇게 살아도 티끌만큼도 1도 감동을 안 받는 것입니다. 왜죠? 자기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환상이 부모의 그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조용기 목사님이 자기 아들들 때문에 너무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을 누가 아들들을 누가 회심시켜서 정말 예수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주고 싶다. 똑같은 이야기를 박윤선 목사님도 하셨습니다. 그 박윤선 목사님 큰아들이 끝까지 예수 안 믿었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이 그 옆에서 그 가문을 다 보았습니다. 당신이 조교로 있을 때 이름이 준호였던가? 매일 기도하시면서 우리 준호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누가 저 애에게 예수를 믿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면 모든 걸 다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본을 보이는 부모도 별로 없고 그걸 보여줘도 그게 그거라고 알아먹을 새끼도 별로 없으니, 가정이 진짜 성경에서 그리는 그 가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야망이 아니라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예술작품처럼 자신의 인생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 바칠 사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부모로서 부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는 못할지라도 “아들아, 이게 네가 살기를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삶이란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으로, 근사치로라도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족이 무엇입니까? 요새 나온 책도 있습니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합니다. 자의식이 생겨나면 모두 다 남입니다. 자의식이 생겨날 때 정신적, 심리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예전의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또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타자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저기 구로동 48번지 어느 아저씨를 생전 처음 만났는데 이 인간이 왜 이럴까? 정말 당신은 나와 타인이라는 걸 느낀다가 아닙니다. 예전에 의존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서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타자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으로 성숙하게 되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중고등부 아이들 가진 부모들이 있습니다. 딱 그 자식에게서 전화가 안 옵니다. 그전까지는 엄마 학교 갔다 오면 가방 던지고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언제 와?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전화를 안 합니다. 지극히 타인이기 때문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타인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릇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자식새끼가 저 모양이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인류 모두가 주님 오신 날까지 그대로 밟은 과정입니다.
어느 날 우리 형제 셋이 모였는데 “자식들은 말이지. 한 달이 돼도 저는 안 통하는 법이 없다고. 문자를 해도 답변도 안 하고 씹어버리더라. 그리고 꼭 지가 뭐가 필요할 때 되면 문제가 하나 띡 날라오는데 애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만할 때 아빠한테 수시로 연락했냐?” "안 했지, 그럴 리가 없지." 그런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시무시한 타자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걔네들은 지금 자기도 자기가 낯설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남이 어떻게 자기같이 느껴지겠습니까? 자녀를 그렇게 묶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미몽을 상태에 묶어놓아서 정신적인 어린 애 늙은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빨리 그런 시기를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기다려줘야 됩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하나님은 너무 쉽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생육이 그렇게 쉽습니까? 양계장에 닭이 계란을 낳는 건 쉬울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이 사람을 낳아서 생육하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공통적으로 기도 제목 올라오는 건 전부 다 자기 자녀를 위한 기도 제목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 제목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내 가정이 어떠냐와 구별될 수 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몸으로 함께 있었지만, 훨씬 그 전에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우하게 살았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인생에 있어서 올바른 길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렵고 남들이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수없이 돌아와서 결국 자기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불행을 딛고 행복해지는 사람의 확률은 불행해지는 확률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가족이 슬픈 비극의 역사를 또 자신에 대해 다음의 대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내수동교회에 다닐 때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정말 똑똑했습니다. 서울대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등감에 그렇게 시달렸습니다. 얼굴도 절세 미녀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귀여웠습니다. 괜찮아요. 성격 그냥 뭐 그냥 그 정도면 됐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합니다. 서두르지 않는 이유가 엄마가 그건 해서 뭐하냐고 자꾸 그러는 것입니다. 30이 넘은 딸에게 “야. 웬만하면 혼자 살아 절대 가지 마라. 혼자 살아라 혼자 살아” 왜 그러셨을까요? 어려서부터 집안의 모든 문고리가 남아나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하도 싸워서 엄마가 들어가서 방을 잠그면 아빠는 두드려 부셔서 문 여는 것입니다. 문고리마다 다 망가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엄마가 경험하고 자라니까 딸이 결혼해도 똑같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딸은 그것만 보고 자라오니까 결혼이 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추후에 기대감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건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 다 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가정 속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처음 가정에서부터 발견되고 형성되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부차적인 기관입니다. 가정이 그걸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인간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입니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대통령이 되어 비행기를 오르면서 손을 흔들어도 다 폼일 뿐입니다. 몇 년 지나가면 누군지 기억도 안 납니다. 지금 국무총리 이름이 뭡니까? 그전에는 누구였습니까? 그전에? 그전에? 그전에?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문을 도배하고 지나가도 10년 안에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전체입니다. 요셉이 그 나라를 그렇게 구해줬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을 알지도 못하는 왕이 등극했습니다. 누가 기억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한 사람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영적인 가족인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를 하고 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기억하시면서 나를 달리 생각하셨을 리도 없습니다. 그까짓 거 평균 수명이 2년도 안 되는 국무총리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도 아니고 아시아에서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그것도 반 쪼가리인 나라에서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기억하실 리도 없습니다. 결국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오늘 생각해 봅시다. 가족에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가족에게 누구입니까? 그 질문을 함께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신도 참다운 사람이 되고 가족들도 참다운 사람이 조금이라도 되어가게끔 하게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가족 안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렸고 성공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곁에 가족이 없다면 그러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사람도 그 가족을 버린 사람도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목적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족을 대할 때 타인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가족에게 너무 많은 기대도 갖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모든 괴로움을 함께 떠맡아주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외로움의 이유로 삼으면 안 됩니다. 왜죠? 그거는 하나님이 각자의 짊어지는 십자가의 몫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그런 현실이 우리에게는 풍랑이 되지만 그 풍랑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족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됩니까? 이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동떨어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땅에 있는 수많은 군중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박수를 받는 사람 그러나 가족에게는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대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둘 다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이 삶으로 선택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