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이란 무엇인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2-24)
녹취자 : 김지혜
I.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족과 우리의 인생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져서 하나 없이 또 다른 하나가 없는 그런 운명적인 결합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평가와 관련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전혀 색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제목은 과학기술은 무엇인가입니다.
II.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A. 인간과 과학 기술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과학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과학기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생뚱맞은 질문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치명적인 질문입니다.
1. 인간 필요의 두 측면
여러분들은 아마 20년 전에도 인생을 사셨겠죠. 지금 40대 되신 분들은 20세였으니까, 충분한 사회인으로 인생을 사셨을 것입니다. 또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저는 그저 14살에 내 인생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50년이 넘는 세월을 그 후에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10년 전의 인생과 지금 인생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죠? 쉽게 얘기하면 사는 게 사뭇 다르게 느껴져요.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왜 그렇게 사는 게 다르게 느껴질까요?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아니죠.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다른 시대가 된 거죠.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바꿔놓았을까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기술 문명입니다. 기술 문명이 삶의 양식을 엄청나게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철학이 앞서가서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기술이 발전되는 측면도 있지만 경험적으로 본다면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팽창을 하면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정해지고 철학도 그것을 설명하면서 잇따라가는 측면이 우리에게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2. 기술의 역할과 영향
이런 속에서 그러면 오늘의 주제는 과학기술이라는 무엇인가입니다. 인간과 과학기술이 먼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 이 말씀을 먼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인생이 20년, 40년, 60년, 80년 전과 다른 것은 우리의 기술 문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집도 제대로 지을 수가 없고 경제적인 여건도 되지 않던 시대에는 사실은 분가를 생각도 안 했지만 그렇게 많이 분가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렇게 분가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만약에 분가를 한다고 그러면 집을 새로 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모든 노동이나 작업이 밭이나 논을 중심으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던 1차 경제 시대에는 모두 집단적인 노동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분가를 해서 각자 나누어서 산다면, 일하자고 전달을 해도 온 집을 다니면서 전달을 해야 합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리고 한 번 하면 먹을 밥을 그렇게 여러 군데에서 나눠서 밥을 해야 하고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입니다. 그러니까 한데 모여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1차에서 2차 산업 사회로 넘어오게 됩니다. 2차 산업에서 공장들이 세워지고 산업기술을 통해서 물건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은 그걸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에 가면 그런 거 필요로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당연히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도시에서 그것을 만들어내려면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인프라를 갖춰야지만 이것이 생산 단가를 낮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낮춰지면 애덤 스미스에 경제법칙에 의해서 수요가 창출이 되는 것입니다. 수요가 창출이 되면 기술개발이 이루어지고 기술개발이 이루어지면 단가는 더 떨어지게 되고 품질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월급을 7만 원 받던 시대에도 자동차 그냥 우리로 말하자면 쏘나타급 되는 것이 1,300만 원이었습니다. 그게 우리 동네 목동에서 24평 정도 되는 아파트 한 채 값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아파트는 약 7억 8억 정도를 올랐고 차는 소나타는 넉넉잡아서 3,500만 원이면 삽니다. 이거는 그 당시로 보면 1200만 원짜리가 한 600만 원 정도로 값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게 어느 시절이냐 하면 약 40년 전 시절입니다. 그렇게 기술 개발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일단 2차 산업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서 살면서 이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거 정도 가지고 만족을 안 합니다.
그래서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뇌와 정신을 닮은 것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첨단과학기술이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인정할거냐 말거냐 하는 것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제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판단하고 결정하고 심지어는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아래에 두었던 기술들을 자기와 동등한 선상에 놓으면서 소통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우려를 하는 것은 그렇게 되어서 그것들이 끊임없이 스스로 진화하여 그걸 만들어낸 인간보다 훨씬 더 우세한 존재가 되어서 인간을 통제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우려들을 과학철학자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절제가 주어지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사회가 올 수 있다고 하는 것들이 이미 선구자적으로 여러분들이 보았던 터미네이터나 아니면 미래의 우주 인공지능 사회가 지배하는 사회에 우려와 염려에 대해서 이미 나왔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만들지만 항상 자기가 그 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적으로는 우위에 있습니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게 나만은 못하죠. 그러니까 인간이 그거를 모두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작동하고 어떻게 그것이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 모두 인간의 인식 범위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99년에서 2000년도를 넘어갈 때 세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소위 와이투케이(Y2K) 사건입니다. 1999년에 1000년도 이전, 999년도에는 무슨 과학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없었습니다. 디지털 숫자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전부 다 기껏해야 60년, 1970년도에 생겨났잖아요. 그러다가 이제 이게 99에서 2000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원자력 발전소가 멎고 그다음에 댐이 폭발하고, 등등등 무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아가 버리고 뭐 별의별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미국에서 수많은 보안업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와이투케이 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갈 때 문제가 안 생기도록 조치를 하는 업체들이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정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기업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그걸 방지를 하는 일에 헌신을 했습니다. 그때 쓴 돈이 260조 원입니다. Nothing happen.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안업체와 이 사람들이 사기 친 거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발전된 기술로 그렇게 미리 조치를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면 누가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저 관련 업체에서 언론사하고 짜고 뻥 쳐서 어마어마한 돈을 보려고 했던 거다. 그렇게 보는 학자들이 우세입니다. 그런데 그건 모르죠. 진짜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작동할 줄은 몰랐다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15년 전인데 제가 시애틀에 갔을 때 로쉬(LOSH)에서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박사급 연구원이 자신의 연구소에 3천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천 명에서 연구만 하는 것입니다. 아스피린 하나 안 만들고 연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이야기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 하나를 개발하는데 보통 예전에 20년 들었답니다. 그런데 약을 개발하는 것은 여러분 알다시피 프로젝트가 수십 개 출발하면 성공에 도착한 것은 불과 그중에서 서너 개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공장은 돌리다가 망하면 기계라도 남는데 이거는 그냥 문서만 남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아주 솔직하게 자기 연봉이 20만 불이라고 15년 전에 공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20만 불씩 3천 명이 줘야 하는데 대충 한번 계산해 보십시오. 연봉을 얼마를 줘야 하는지.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 붙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습니다. 계속 15년 내지 20년 정도 걸려야지만 약이 생산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십시오. 백신 생산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빨리할 수 있는 건데 늦장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게 축적된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회사를 안 갑니다. 나를 위해 의전한다고 나는 그런 거 너무 싫다. 그리스도인이 빛이 돼야지. 빨리 가라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저희는 출근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근무를 하냐고 물어봤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데 그건 가볍게 넘어가고, 한 달에 한 번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조금 긴장이 되고, 왜 분기에 한 번 하는 프리젠테이션은 진짜 잘해야 하고, 1년에 한 번 하는 프리젠테이션은 해고 여부가 달려 있을 정도로 피를 말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과를 내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재미있는 얘기는 개발하다 실패했습니다. 예전에 컴퓨터가 없고 이런 모든 개발 시스템이 안 되어 있던 때는 쓰레기처럼 다 폐기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서류만 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거를 만든 결과들을 활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시스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하면 탱크에 계속 들어가서 말하자면 데이터로 축적이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7년 8년이 안 걸리면 도저히 완성할 수 없던 프로젝트를 실패한 것들 속에서 찾아내어서 그걸 집어넣고 돌려서 그걸 다시 3, 4년으로 줄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학기술에서 보면 이렇게 우리들이 이걸로 쓰다가, 98년도 폰입니다. 98년도까지 쓰다가 갑자기 이게(스마트폰) 나옵니다. 이거까지 나오기에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일단 이게 딱 나오고 나면 그다음에 이것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발전하는데 이게 어느 시점에 오면 너무나 많은 데이터들과 개발할 수 있는 툴들이 다 축적이 되어서 점점 속도가 가속도가 붙습니다. 마차를 여기에다 이렇게 달고 다닌 때가 기원전 거의 3000년. 4000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자동차처럼 가는 데는 1905년이 돼서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타이어 없는 차도 나옵니다. 이렇게 이렇게 천천히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러다가 그다음에 이런 속도로 갈 수 있는 속도로 발전이 됩니다. 앞에 있는 기술들을 사용하고 사용하고 하면서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까지 딱 가면 그다음에 생각만 하면 즉시 신제품이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곡선으로 보면 이렇게 되다가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게 기술혁명에 있어서 인간이 신이 되는 시점입니다. 생각하면 즉시 만들어냅니다. 그걸 과학기술에 있어서 특이점이라고 합니다.
그런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바꿔놓을 거라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바꿔놓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농경사회에서 그다음에 1960년대, 우리나라 70년대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고, 그다음에 공장이 세워지던 그 시대에 과정과 우리의 의식을 생각하고 이것이 지금 2021년도에다 놓고 비교를 해보십시오. 여러분. 분명히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비교 안 될 정도로 변화가 있습니다. 그건 인정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과학기술이 거의 특이점에 이르게 될 때에는 인간의 의식이 그전에 전에 온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의식이 변할 거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근데 결국 이 과학기술의 정체가 뭐냐 하면 그것은 인간관과 관련이 됩니다. 인간은 결국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그가 이 세상을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의 정신은 진리 혹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그의 육체는 당연히 물질적인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청교도 시대 때 남자 평균 나이가 34세인가 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1940년대 일제시대 때 우리 남자들이 한국 남자들의 평균 나이가 41세밖에 안 됐습니다. 지금은 80세, 82세까지 근접하고 있습니다. 뭐가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때보다 지금이 마음이 편한가요? 공기가 좋아졌나요? 아닙니다. 순전히 과학기술의 발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으로서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자매들만 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결혼해서) 오면 세탁기부터 사야 하잖아요. 손빨래하는 세탁기.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빨래판을 보여주면서 남준아 이거 봐라 너 낳던 때에 산거다 하시면서 보여주는데 빨래판이 하도 빨래를 해서 3분의 1이 없어졌습니다. 세탁기입니다. 손세탁기. 그다음에 방망이들. 그다음에 다림질을 하려면 불 피워서 이거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는 건지 잊어버렸습니다. 인두라고 그러나. 인두는 조그마한 게 인두라고 그러고. 인도보다 크게 이만하게 프라이팬처럼 돼서 위에서 숯을 놓고 그다음에 이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옷깃은 인두를 집어넣어서 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체력을 사용하니 오래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냥 관절염인데 관절염인지도 모릅니다. 병원을 안 가니까. 여자가 40세만 넘으면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할머니 단계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무슨 새럼을 발라, 수분크림을 발라, 무슨 뭐 오일을 발라, 뭐 필링을 해, 에센스를 발라 그냥 기껏해야 세숫비누. 세숫비누도 돈이 비싸면 빨랫비누로 세수하면서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폭삭 늙어서 일찍 죽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상적으로 죽는 게 아니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밝혀낼 의료 시스템이 안 돼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할머니 얘기로는 동네에서 후딱 하면 1년에 한두 명씩 오줌을 못 눠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도가 막힌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그냥 한 번에 툭 하면 뚫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요독이 퍼져서 오줌을 못 눠서 가득 차고 가득하면 이게 속에서 부패합니다. 요독이 온몸에 올라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명이 그거밖에 안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이 발전됐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에너지를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아파서 매일 밤마다 유언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낫겠냐고 물어보니까 여기 로봇 청소기 하나 있어야겠어. 내가 도저히 청소기를 들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그걸 내가 못 해주겠냐. 105만 원이나 하는 비싼 걸로 사다 줬습니다. 지금은 더 세련되고 놀라운 게 나왔습니다. 여기다가 70만 가지 80만 가지 사물을 입력해서 예전에는 이게 가다가 걸리면 피했습니다. 이제는 이게 유리라는 것을 청소기가 압니다. 세게 부딪히면 안 되겠구나 합니다. 우리 부부가 잠깐 나갔다 왔는데 누가 화분을 쓰러뜨려 놓은 것입니다. 누가 와서 이랬지? 코코한테 혐의를 뒤집어씌웠습니다. 네가 사고쳤구나, 이 녀석. 그런데 그게 아니고 무식한 청소기가 가서 부딪히니까 꽁무니를 들면서 힘으로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만한 다이가 툭 쓰러지면서 화분이 거실에 확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소기는 안 그럽니다. 얼마만큼의 충격으로 부딪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 감지하면서 점점 지혜로워지고 놀라운 발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술 사회의 발전이 우리의 에너지를 저장해줍니다.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우리도 그렇게 맛있는 거에 대한 생각이 없었고, 편한 그런 것도 별로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들하고 가면 항상 불편하게 텐트 가지고 가서 치고 야 무슨 여관이냐 텐트에서 자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텐트에서 자면 병에 걸릴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약간 사치스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잖습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되면 부모님들이 달달 떨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 소비에 있어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게 심리적으로 두 가지 요인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철학적 자극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힘이 너무 없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제일 아까운 게 비즈니스 타는 돈이었습니다. 계산해 보니까 한 시간 내면 한 10만 원씩 돈을 더 줘야 하는 것입니다. 20만 원씩 돈을 더 줘야 합니다. 아꼈다가 미국 건너와서 맛있는 거 사 먹지. 왜 그렇게 사나. 젊은이들이 생각합니다. 나이가 드니까 갔다 오면 한 3일 동안 앓거나 아니면 병원에 누워 있거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에너지를 자력하기 위해서 많은 물질 문명들을 요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인생의 어떤 한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기술이 주는 역할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주고 또 우리로 하여금 에너지를 비축해서 다른 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습니까? 그리고 우리 시간을 엄청 아껴줍니다.
우리 집사람이 예를 들잖아요. 청소기를 돌려놔요. 로봇 청소기가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청소 다 하고 그다음에 설거지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없어요. 앞으로도 살 계획이 없어요. 그런데 나 아는 많은 집에 가면 설거지하는 기계도 있습니다. 어느 날 서랍에다가 거기에 설거지할 거를 넣어놓고 틀어놓습니다. 여기서는 자동 청소기가 돌아가고 여기서는 이게 돌아가고 그런 다음에 빨래는 집어넣어서 세탁기에다 넣고 눌러놔요. 그러니까 안 움직이게 되는 거죠. 배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이제 돈 내고 헬스장에 가서 미친듯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모든 걸 자동으로 해놓고 그다음에 그 대가를 가서 또 돈을 주고 아주 괴로움을 당하면서 살을 빼고 심지어 안 되면 주사까지 넣어서 지방을 분해합니다. 랩으로 칭칭 감으면서, 허리 얼마를 줄이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기술 없이는 살 수 없지 않지만 기술은 우리의 인생에서 주는 것이 참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청소기를 돌려놓고 그다음에 설거지 기계를 돌려놓고 다음에 세탁기를 돌려놓습니다. 그걸 돌리지 않으면 세 가지 일을 다 끝나고 성경을 읽을 텐데 세 가지를 돌려놓고 자기 방에서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모든 게 다 청소가 끝났다 그러고 제자리로 딱 돌아갑니다. 도움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남는 시간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별로 안 하고 기술 발전에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여기서 부산까지 이제 15분에 가는 하이퍼 루프가 나온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왜 거기만 나오겠습니까? 도보 해협을 뚫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그랬지만 뚫어서 기차들이 다닙니다. 일본과 우리 사이에는 왜 없겠습니까? 그리고 중국을 가로지르는 해저 전철은 기술이 없어서 못 만드는 게 아닙니다. 기술로 따지면 지금 그냥 세계를 바닷속을 휘감고도 만들 수 있습니다. 충분한 그런 기술이 있는데 경제성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순간 이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침 먹고 부산에 가서 아침 회의하고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부산에 가서 회의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침 먹을 수 있습니다.
화성이 이렇게 태양 주위를 돌고 지구도 태양 주위를 돕니다. 가장 두 개가 거리가 가까울 때 거기에 맞춰서 화성에 우주선을 착륙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황금시간대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때 6-7개월이면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1월에 출발해서 3월에 화성에 도착해서 놀다가 그리고 돌아올 수 있고. 잘하면 한 달 휴가 받으면 갔다 왔다 올지도 모릅니다.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발전하고 어마어마하게 발전을 해서 자동차도 이제 모두 내연기관이 없어지고 전기자동차가 되고 그뿐만 아니라 저는 전기자동차가 충전하지 않는 시대도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와이파이처럼 이미 실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충전을 충전기에 올려놔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와이파이 켜지면 와이파이가 들어오듯이 전기가 계속 한 번 켜놓으면 무제한으로 충전이 필요 없는 자동차도 가면서 그게 인공위성을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모두 올 수도 있고 일단 더군다나 우리가 만약에 솔라시스템이 완성이 돼서 플라즈마가 실용화된다면 자동차 안에다가 그냥 초콜릿만한 플라스마나 집어넣으면 폐차할 때까지 연료 걱정을 안 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B. 기술 사회와 내 인생
1.성찰-고독-진리
그러면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렇게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을 때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겠는가? 과연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똑같은 실존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어려움이 어디에 있냐 하면 기술 사회와 내 인생을 생각해 보면 이런 기술 사회의 발전이 나로 하여금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사단의 전략은 아주 훌륭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돌아다니고 정신이 이어져서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의 가족들조차도 버리며 쾌락을 좇고 헛된 것을 좇으며 산다는 것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말세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때 과학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이 한없이 찢어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고매한 철학자들이나 현인들이 과학기술을 마치 벌이 꿀통에서 꿀 빨아먹듯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벌이 예를 들어서 벌이 겨울에 먹을 것이 없는데 설탕을 갖다가 주잖아요. 설탕을 갖다 주면 10kg짜리 갖다 놓으면 뭐 잠깐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벌이 새카맣게 달려들어서 그거를 먹고 겨울을 지내는 것입니다. 성분이 뭐가 나오겠습니까? 이게 백설탕이지 이게 무슨 꿀입니까? 형태만 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문명에 대해서 그렇게 설탕 빨아먹는 벌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을 끊임없이 찢어지게 만들고 그렇게 돌아가게 합니다.
어제 파스칼에 대해서 1시간을 하자 그러는데 결국 하고 보니까 2시간 10분을 했습니다. 어쨌든 파스칼이 보는 인생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라는 전제가 아주 정직한 마음으로 우주 앞에 서면 미쳐야 정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우주 내가 서 있는 여기도 중심은 아니고 이미 벌써 그의 시대에 코페르니쿠스 그다음에 갈릴레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천동설이 폐기되고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모든 방면에 있어서 다 어마어마한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변화의 시대를 살면서 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우주를 한번 보라. 그러면 거기서 나의 존재가 무엇인가. 그래서 그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원한 우주에 무한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걸 보면서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존재이고 나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냥 손가락으로 모기 한 마리 이렇게 지워서 죽어버리듯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구나. 그래서 그가 팡세해서 얘기합니다.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얼마든지 멸망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우주를 바라보면 인간이 미쳐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그 사람이 미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치는 것입니다. 맨정신으로는 반드시 미쳐야 하는데 맨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안 미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똑바른 정신을 가지면 미치고, 안 미친다면 그 사람이 미쳐서 안 미치는 거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라는 건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러니까 오늘날 그렇게 똑바로 자신의 인생이 볼 용기가 없는 이때의 인간이 사용하는 기술이 디벡티스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회피입니다. 번역이 정확한 게 없는데. 나는 그냥 회피라고 그럽니다. 회피가 뭐냐 하면 정신 돌리기, 시간 줄이기, 그다음에 오락으로 때우기. 등등의 의미도 있습니다. 위락이라고 많이 번역을 하는데, 위락이라기보다는 생각 돌리기, 직면을 안 하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회피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게 뭐냐 하면 기술 문명의 발전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차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돈 벌면 지금처럼 똑같이 말 사고 싶었고 말을 사고 싶으면 그다음에 말 몇 피를 줘도 살 수 없는 장인의 집에 가서 장인이 만든 마차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마르텔 씨의 집에서 마차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쿠션이 좋아.. 무슨 소리야 마르땡씨 집에서 최근에 나온 최신형 마차가 있는데. 그건 놀랍게 뚜껑이 열렸다 다쳤다 해. 대화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신차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집은 이번에 아라비아에서 들어온 카펫으로 만들었대. 영국제 벨벳이래 이러면서 똑같이 우리가 볼 때는 그래 봐야 마차지.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어마어마한 사회의 지적인 신분과 이런 것들을 장식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이제 사회의 관심사들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의 과학기술의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이 대부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이 이 사회에 도덕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조금밖에 고려를 안 합니다. 그리고 이게 도덕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거나 심지어는 해로울 수 있는데도 돈이 되면 만듭니다. 그러면서 만들어 내어진 제품들을 보면서 이 제품을 내 가까이 두고 사용하고 하면서 결국은 이것이 나의 몸을 편리하게 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며 여기에 익숙해질 때 나의 정신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우선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만들어줘서 편리하고 그다음에 생각을 돌릴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기 로봇 청소기 같은 것들은 시간을 아껴주고 에너지를 아끼게 해 주는 거라면 오락 기계 같은 것들은 적극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도구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티파니에서 다이아 반지를 5부를 해서 떼왔다. 그게 뭘 나를 편리하게 하겠어요? 기분이 좋단 말이에요. 그냥 기분이 좋다. 그게 특별히 다이아를 낀다고 해서 손이 가벼워진다든지 두 번째 손가락 신경쪽이 낫는다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끼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몇백만 원씩. 몇천만 원씩 주고. 사서 끼고 다닙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의 영향들, 이런 것들은 생산하는 사람은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팔기 위해서 고려할 뿐이에요. 그런 것들이 들어옵니다. 거기서 우리의 정신이 분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의미나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들을 더욱 갖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진리에 관계가 있습니다. 외로움은 찬마루고 찬마루에서 내려가면 고독이라는 마당이 나오고 고독이라는 마당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리라는 대문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이 사람을 찾고 고독을 느낄 새가 없이 회피를 찾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정신은 거의 물질에 대해서 감각적인 쪽만 무지무지하게 발달하게 되고 그 감각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능력은 급격히 퇴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뇌과학자가 청소년들이 게임에 몰두하게 되는 사람. 그 순간에는 거의 곤충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오직 거기 그거 하나에 집중하면서 불빛 하나 점수 하나 거기에 매달리면서 뇌의 작용이 모든 다른 정상적인 자격이 멈춥니다. 대표적인 게 도박입니다. 도박을 하면 집안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안 느껴집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런 쾌락의 정신 작용 속에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의 경계선 자체가 없는 거예요.
2. 회피의 본성(divertisment)
스캇 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이고 신학자이고 과학자이고 어마무시하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한번 했습니다. 여자들은 안 그랬지만 남자는 창녀하고 하룻밤을 지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내뱉는데 진심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다음 날 되면 그 고백은 당연히 취소됩니다. 왜 그럴까요? 심리학자답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쾌락에 빠지는 그 순간 자아의 경계 선상이 붕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이거는 신학적으로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뭐라 그럽니까?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누구처럼 사랑하기를 왜 대답을 못 합니까?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누구를 사람 사랑한다는 하나님 사랑하듯이 한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온전히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 자아의 경계가 가장 뚜렷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당연히 사랑이라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있고 저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우리의 관계가 소중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게 되어야 되잖습니까? 근데 쾌락을 즐기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쾌락이 끝나면 진심으로 안 사랑하고 너무너무 더럽게 느껴지고 당장 도망치고 싶은 그거는 결국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거기에서는 절대로 안식을 못 얻게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시고 인간은 거기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학기술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결국은 이 고독의 문제라고 하는 것들이 본격적으로 제시가 된 것은 이미 옛날부터입니다. 이번에 내가 쓴 아사밤에 보면 아이아스 이야기도 나오고 이미 다 고독의 문제들을 아이스킬로스나 베르켈리오스 같은 비극 작가들이 다 다루고 이미 다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확실한 사실을 하나는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되면서 이 소외의 문제는 엄청나게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과제로 대두가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당연히 외롭고 인간이 고독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에게 다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 옛날에 무슨 마흔네 식구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로울 틈이 어디 있습니까? 밥 하는 것만 해도 외로울 시간이 없습니다. 외로울려고 하면 불떼워야 합니다. 고독하려고 그러면 빨래해야 합니다. 심심하려고 그러면 김치 담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대식구들을 다들 먹여 살리면서 매일매일 잔치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사대부에 몇십 명씩 집을 건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경영학적인 지혜가 그 과정 속에 다 배어 있습니다. 그걸 효과적으로 하는 조직과 모든 것들이 도리들이 짜져 있고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 되어서 그 룰을 따르면서 모든 가족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없습니다. 지금은 위에 사람이 죽어서 그래서 냄새가 아주 나니까 경찰에 신고해서 가보니까 고립사한 지 두 달. 석 달이 지나있었습니다. 내가 아파트 이사 간 지 2007년입니다. 나는 아직도 위에 사는 사람 아래 사는 사람 모릅니다. 옆집에 있는 아저씨는 잘 알아요. 할아버지, 우리 교회도 몇 번 나오셨고. 내 책도 좋아하시고. 조종사했다는 것 그 정도만 압니다. 그 집 아들 딸도 알고 기도도 해주고 그랬습니다. 위층 아래층이 있는 사람입니다. 몰라 10년 지났는데 그러면 나만 그렇게 해서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죠.
결국은 인간이라는 게 한없는 고독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무서우니까 끊임없이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를 옛날에 과학기술이 발전되지 않던 시대에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관계 속에서 이것을 풀었습니다. 가족 속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만약에 끊어지면 자기는 완전 고립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핸드폰으로 도망치면 됩니다. PC로 도망치면 돼요. 가상의 공간이 있는 AR이 있는 그 속으로 도망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가 안 됩니다. 죽도록 자기를 분산시키면서 회피하면서 살아서 결국은 자신에게로 못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방법이 아닙니다.
3.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하라. 한 가지 극단은 물질문명과 담쌓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기계가 해 주는 많은 일들을 자기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서 무슨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가도 괜찮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책 볼 수 있는 많은 시간을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로봇 청소기 대신 마루에 걸레질을 해야 하겠죠. 관절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책 읽어야 할 많은 시간을 또 다른 가사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양복조차도 내가 만들어 입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재봉틀을 들여놓고 디자인을 배워야 할까요? 그러니까 그런 금욕적이고 극단적인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기술문명에 대해서 설탕에 빠진 벌처럼 끊임없이 몰두해서 거기에 마음을 뺏긴 나머지 외로워질 시간도 없고 고독해질 시간도 없고 진리의 마당을 가로질러 진리의 댐으로 갈 시간도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업무적으로 과학기술 같은 데 밀접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엔지니어 과학기술개발자들, 그다음에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모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학기술을 접해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경쟁력에서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은 일들을 기계가 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녹취 간사를 뽑는다고 그러면 말로만 듣고 얼마나 빨리 타이핑을 치느냐가 결정했지만 이제는 기계가 다 해주니까 얼마나 그런 기계를 잘 사용하고 한 번 기회를 사용해서 손 볼 문장이 없는 완벽한 제품을 뽑아내는 노하우를 알고 있으면 자판을 못 드려도 사실 녹취 간사로 들어오는데 문제가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술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 자체를 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가 그것들을 공부하고 익숙하게 사용해서 자신의 사회적인 전쟁의 가치를 경제적인 가치를 높이면서 사는 것이 그나마 자신의 삶을 안정되게 영위하는 방법이기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딜레마는 이것입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집니다.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into sight, into mind.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의 견물생심이라고도 하잖아요. 보면 마음이 생겨납니다. 막 프레시가 터집니다. 여러분들이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임성우 씨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딱 나타나면 수천 개의 프레시가 막 터질 거 아닙니까? 외신기자부터 시작해서 열린 교회, 방송국 기자까지 다 터질 거 아닙니까? 그러면 세례를 받는 것처럼 기술 발전에 우리 자신이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걸 이용하면서도 언제나 내 마음은 거기에 빼앗기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외로움의 툇마루를 내려가 고독의 마당을 지나 진리의 대문을 향해 찾아가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인간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씨름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그리고 진리의 세계와 씨름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영양을 공급받고 그걸로 자기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에 갈 길을 잡고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강한 힘과 추동력을 갖고, 과학기술들을 사용해서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가는데 과학기술이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거스틴의 작품을 보면, 그는 인식론에 있어서 선구자였습니다. 우리의 몸에 오감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고 맛을 알고 하는 오감이잖아요. 그중에서 압도적인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시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거죠. 눈에 보이는 거니까 그것이 우리가 보통 마음의 방어의 기재를 단단히 갖고 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보는 것과 함께 그 만물들의 물상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정신세계를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어느 장로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5천만 원 주식이 투자했는데 2억 원까지 벌어봤습니다.” “잘했네.” 작년 9월쯤에 임국장과 어떻게 대화를 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주식을 해본 적이 없는데 주식을 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주식을 한번 사면 어떻겠나.” 그리고 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매일 경제지를 보고 이러는 사람으로서 촉으로 몇 개를 찍어줬습니다. “내가 만약에 산다면 테슬라, 아마존, 대한항공, 현대차, 아시아나 그 정도 사겠다.” 아시아나는 4천 원에서 1만 2천 원으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4만 8천 원이었는데 지금 8만-9만 5천 원까지 갔다가 8만 5천 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할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직장인들이 주식 투자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보던 횟수가 평균 하루에 349회입니다. 만약 내가 직원을 고용했는데 그 사람이 주식을 단타 매매하는 사람이면 몸은 여기 와 있지만 마음은 여기 없는 것입니다. 이걸 놓고 349번을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149번 정도는 출근 전 퇴근 후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200번은 근무시간 중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9시면 진짜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인데 화장실이 다 닫혀 있습니다. 거기서 개장하면서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주식을 팔 것 팔고, 살 것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200번이니까 9시간 근무 200번이면 3-4분에 한 번씩 들어가서 가격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임국장하고 의논했을 때 2천만 원 투자했으면 잘하면 4천만 원 되었을 것입니다. 더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2000만 원 벌었겠죠. 그런데 나는 그 시간보다 그 돈보다 훨씬 더 많이 벌었습니다. 왜 나는 핸드폰 400번 안 두드리고 그 시간에 다른 일하며 살았습니다. 내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입니다. 지금 오늘 비트코인이 무슨 1400만 원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머스크가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말이죠. 아 그냥 저 과한 것 같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말이죠. 일론 머스크 테슬라 주가가 8.9%나 빠졌습니다.
결국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그걸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에 두고 기술 문명을 향유하면서 사는 것은 거기서밖에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살고 그냥 그 주가 맨날 오르는 것을 보면서 핸드폰을 두드리면서 삽니다. 아주 훌륭한 회피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 가족 간의 의미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회피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그것도 하지 못해서 대출받고 영끌을 해다가 심지어 사체까지 끌어다가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폭삭하면서 주저앉을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정신의 모든 힘들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가르침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요한이 항상 그 사람들을 자녀들이라고 부르잖아요. 자녀들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거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의라는 속격은 대격적 속격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 거기에 없을 것이니. 파스칼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인간을 지으시지 않았다면 왜 인간은 신 안에서만 행복할까. 그리고 신 안에서만 행복하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모질게 신을 떠나는 것일까. 거역하는 것일까. 묻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우월해진 사람, 그 돈에 취한 사람 그것만 보지 마십시오. 이 사람이 주식해서 6개월 만에 5천만 원을 벌고 나는 할까 말까 그러다가 그냥 맹탕으로 있어서 이자 1% 받고 지금 은행에 누워 있다. 오늘 점심때도 자기가 밥을 사겠대. 그거만 보지 말고 이 사람은 6개월 동안 마음과 뜻과 성품을 핸드폰에 담았지만 그게 그렇게 바치고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보십시오. 그건 인생관의 문제입니다.
점점 경건의 능력이 약화되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다음에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이 진리를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여기에 불을 붙이면서 자기의 주체성 있는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걸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없어집니다. 힘들다고 힘들다고 죽을 것 같다고 교회가 사랑이 있는 곳인데 왜 나를 도와주지 않냐고. 몸부림치고 울부짖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의 원하는 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적인 번영과 개인적인 평안, 그리고 편하게 그걸로 먹고 싶어 합니다. 그 인생관을 버리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III. 적용과결론
여기서 가인이 벌써 그 당시에 성을 지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 얘기할 때 만리장성 같은 건 아니겠죠. 좀 큰 집이겠죠. 그렇지만 여러분 집 하나. 벽돌을 조그맣게 흙벽돌을 짓는 것만 해도 놀라운 과학기술과 구조 역할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무너집니다. 얼마나 놀랍게 건축술이 발달했는가 하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발가인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해서 기구를 만드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발전합니다. 그게 아마 아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지금 벌써 여러 대가 흘러갔잖아요. 물질문명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 앞에다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잖아요. 나무 사이에 숨는데 그때의 문명이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몇 대가 지나면서 성을 짓고 그다음에 분업화되어서 그다음에 악기 연주하는 사람, 그다음에 농사짓는 사람 가축하는 사람, 그리고 그다음에 기계 만드는 사람 다분업화되어서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예술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그런데 도덕적으로는 어떤 상황이 됐습니까? 그다음에 얘기합니다. 아내들아, 내 말 좀 들어봐라. 이미 일어난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사건을 얘기하는데 양심에 추호의 가책도 없이 자랑 삼아서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에게 상처를 내서 내가 죽여버렸어. 또 자기를 상하게 했는데 소년이에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나 알이라는 단어인데 소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청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어린아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아주 나이 어려서 실수 혹은 도덕적 판단 없이 나에게 상해를 입힌 것입니다. 애가 막대기 가지고 장난치다가 지나가는 아저씨를 틱 해가지고 여기다가 살짝 스쳐서 피가 나게 했는데, 돌멩이를 들어서 머리통을 쳐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하나님이 가인을 해치는 자에게는 7배 벌을 내리겠다고 그랬는데 나는 내가 직접 칠십칠 배를 내리겠다고 합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여기고 긍휼이 여기는 기본적인 가치 판단과 양심의 기능이 다 마비되고 무자비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무자비하게 만든 궁극적인 추동력이 뭘까요? 자기 사랑이에요. 파스칼이 이런 인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뜻이에요. 당신은 신을 안 믿는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안 믿는다. 논리적으로 증명이 안되니까 당연히 사랑도 안하는거죠. 그런데 파스칼의 이야기는 “그런데 너는 자기를 사랑하잖아. 논리가 있어서 너를 사랑하는 거냐? 자기를 사랑해야 할 논리를 찾아봐라. 무슨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냐. 그럼 너는 그런 이상의 논리 없이 자기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논리를 요구하느냐? 그건 너 자신도 이미 그런 이성의 논리로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이상의 논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너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