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감사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어진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승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시100:3下-4上)
교회가 어떻게 지워졌는지는 지난주로 끝을 냈고 추석 다 지다고 다 돌아오면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루가 남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은 저는 개인적으로 추수감사절을 10월 둘째 주 쯤으로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추석 그날하면 또 다들 흩어지므로 추석 조금 뒤 한주나 두주쯤, 그럼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11월 둘째 주나 셋째 주쯤은 추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국사람들이 거기 건너가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런 용기가 잘 안 납니다. 무슨 진리가 걸린 문제이거나 생사가 걸린 문제 같으면 남들이 하든지 말든지 난 한다. 그럴 텐데 다들 목사님들 만나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시고 그러시고 안 바꾸십니다. 좀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잘 협조를 안 합니다. 같이 좀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남들 다 안 해도 나는 한다고 하겠지만, 또 추석 때 추수감사절 지내는 교회는 또 썰렁 하더라 구요. “우리는 추수감사절이다.” 라고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은 “왠. 추수감사절” 또 그럽니다. 그래서 혼자만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것도 잘 안 맞고, 참 고민입니다. 어떻게 좀 도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도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좀 있으면 추수감사절이 되겠지만 오늘 한번 우리들이 한 해 동안의 하나님의 감사의 은혜를 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100편 이 시편 누가 지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여튼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느낌이 시편의 이름 없는 것은 다윗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워낙 우리들이 다윗의 시에 우리들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번역된 성경은 거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거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편 100편은 읽으면서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양을 언급한 시편 중에 몇 편이 다윗의 것이 있습니다. 시편 23편 같은 경우가 양의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뭐 그렇든 안 그렇든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건 뭐 추수감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조건이 세 개입니다. 첫 번째는 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자 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감사는 뭔가 하면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 이것이 첫 번째 감사의 조건이고, 두 번째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두 번째는 선택입니다. 그 많은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셔서 “너는 내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선택입니다. 마지막에 “우리를 기르시며” 그건 무엇입니다. 목양입니다. 하나님의 목양. 그 세 가지 감사조건을 발견하고 감사함으로 우리가 그 문에 들어가며,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우선 시인이 첫 번째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에 대해서 깊이 감사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만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때쯤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하고 여름에 뒷산에 올라가서 개구리도 잡고 여치도 잡고 그래서 개구리는 때려잡아서 풀을 꺾어서 형들이 거기다가 꿔어 답니다. 개구리도 끼우고 여치도 끼우고 나중에 구워 먹습니다. 그러고 놀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도 이 숲속에서 누군가가 나처럼 몽둥이 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개구리나 아니면 도망 다니는 여치, 그 때는 아이들이 그 잠자리 잡아서 뭐 하려고 그러는지 그 잠자리채를 가지고 그렇게 잠자리를 못 살게 하였습니다. 그 망을 피해 다니는 그 잠자리, 아이들이 그때는 고기가 없어서 그런지 왜 그렇게 새를 잡겠다고, 사실 잡은 아이들은 하나도 없는데 새총을 문방구에서 사서 거기다가 돌멩이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새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을 텐데 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환생은 믿지 않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뭐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토종 한우, 어때요. 추석에 가장 사랑받는 한우 어때요. 푸줏간 마다 소가 이렇게 웃고 있더군요. 날은 좀 지났지만 토종 황구 어때요. 복날 환영받는, 참 싫습니다. 그렇지요. 고뇌하고, 아파하고, 방황하고 그래서 역시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으시지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
사실 여러분!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꼭 동물에게 물어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물어보는 것처럼 물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아십니까?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가운데 하이데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존재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 얼마나 의미심장합니다. 존재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남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 없는 이 상황적인 고뇌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존재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늘 힘듭니다. 그래서 저도 회심의 언저리에서 막 방황하고 그럴 때에는 진짜 길가에 피어있는, 피어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길가에 그냥 이렇게 돋아난 잡초가 부러워 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아유. 얼마나 좋을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힘듭니다.
그럴 뿐만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웃깁니까? 이십 살 살다 죽는 사람 있고, 열다섯 살 살다 죽는 사람 있고, 삼십도 못 넘기고 죽거나 사십 오십 육십 칠십 넘어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십 사년은 준비를 해야지 겨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십 사년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는 대학원까지 군대까지 이래가지고는 인생의 반 가까이를 준비하는데 보냅니다. 어떤 사람은 준비하다가 죽습니다. 이러니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이 인간으로 창조해 주신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게 시인은 지금 창조, 선택, 목양 이렇게 하면서 차례대로 감사를 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거에 대한 깊은 감사가 앞에 있는 모든 감사를 창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만나기 전에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적 있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되죠. 있을 수 없죠. 그냥 태어났는데 뭘. 자기 나아준 엄마 아빠한테도 감사를 안 하는데 뭐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이게 거꾸로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 목양의 관계 속에서 정말 감격이 생겨나니까 그 다음에는 선택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나를 이 천지삼라만상만물 가운데 비록 유한한 인간, 파스칼의 표현에 의하면 수증기 한 방울로서도 죽일 수 있는 그 나약한 인간, 그 나약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거꾸로 인 마음.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 인간으로 이 세상에 창조 하신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 존재하는 것 그 차체가 불안의 덩어리인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말하자만 그렇게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 같은 사람은 아예 탈출구를 열어 났습니다. 비상구라는 것입니다. 자살할 비상구. 마지막에 집안에 불이 났을 때 찾다. 찾다 못 찾으면 비상구를 열고 도망치듯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권리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죽음을 통해 도피할 권리를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힘들면 사람들이 그렇게 길을 열어 놓겠습니까?
이 문제는 단순히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후진국에서는 자살이 거의 없습니다. 폭력이나 형사 사건 같은 것들로 인해서 죽거나 대형사고가 일어나서 다리가 무너지거나 아파트나 백화점이 무너져서 죽는 사람들은 많이 생겨나도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만하고 사람들이 여유가 있어 지면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정말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빗으사
그 코에 생기를 휴~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그 하나님이 특별한 손길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남의 얼굴 보고 잘생겼네, 못생겼네. 그러는 것 아닙니다. 그건 다 상대적입니다. 아프리카 가면 다 이렇게 되고 목이 긴 사람이 미인입니다. 이 갈고리 같이 생긴 것 아이들이 던지는 고리 같은 것을 아홉 개 열 개씩 낀 사람이 미인입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북한의 미인의 기준하고 남한의 미인의 기준이 벌써 다릅니다. 북한의 미인의 기준은 얼굴이 약간 동그랗게 생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쪽 세 번째 이가 약간 덧니가 나오고 약간 보조개가 덜어가야 예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개념 없습니다. 우리는 쌀 모양으로 이렇게 가름해야 됩니다. 첫 번째 조건은 이렇게 계란모양으로, 물로 길기만 하다고 다 예쁜 것은 아니지만 가름해야 됩니다.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까? 이게 상대적입니다.
그런데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그 손으로 그렇게 창조하셔서 우리를 이렇게 빗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실수 하셨다고 그러는데 그런 신성 모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 각자를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빗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빗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잘 빗으셨는데 후에 관리를 못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책임입니다. 하나님 책임이 아닙니다. 한없이 이렇게 붙는다든지 재대로 관리를 안 해서 해골처럼 된다고 하든지 이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적절하게 관리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빗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그 작품이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더랍니다. 호텔 앞에 조각이 하나 있는데 “세상에 이것도 조각이라고 해 놓았나? 내가 발로 만들어도 이것 보다는 났게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다가 좀 있다 누가 오는데 예술가처럼 생긴 몇 사람이 거기 서서 감탄을 하더랍니다.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릴 정도도 하며 “세상에 이 훌륭한 사람이 이 후진 호텔에다가 이 작품을 만들어 놓으셨다니,” 아 이거 보기 드문 작품이다. 고 하며 옆에서 두 사람이 아 정말 그렇다고 어쩌면 이분이 여기까지 와서 만들어 놓으셨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앞에 보고 간 그 사람은 얼굴이 이제 완전히 새빨개진 것입니다. 세상에 발로라도 만들 수 있다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너무 무식해서 그렇지 사실은 이거 만든 사람이 세계적인 거장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거장이 그 후진 그런 호텔하고는 상대할 조각가가 아닌데 그 호텔 주인하고는 친분관계가 있어서 거기서 그렇게 인간적인 관계에 의해서 그렇게 예술가적인 혼을 담아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무슨 비유인지 여러분들은 지혜로우니까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한사람, 한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신 그것을 여러분들이 보면서 이러니 저러지 그러는 것은 그 걸작을 감상하지 못하는 그 사람하고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상당히 여러 사람들이 지금 소망을 갔고 있는데 그 얼마나 감사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주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사람으로 창조하십니다.
그것도 감사한데 그 속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담게 하셔서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피조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 시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으로 만드셔서 당신과 함께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과 교재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이 시인이 한없이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참 추수감사절에 이런 감사한다는 것은 우수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을 기대고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구나! 아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니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보는 이 마다 주 생각 하리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무엇인데 나 같은 사람이 주님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나를 그렇게 만드셔서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여기에 버려두고 가도 우리의 영혼을 다시 취하실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사의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니” 선택이거든요. 자 보십시다. 이 시인의 시대에 세상의 많은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과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백성들과 나누어지게 되었고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로 이 세상은 쪼개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 속에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전수되어 내려갔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 속에는 이제는 근본을 잊어버린 삶이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세 들어 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우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그들의 나라는 번영했고 강력한 나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왕국은 점점 창궐했습니다.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의 사람들의 무리가 오히려 소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시인은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위에 한 가지 은혜를 더 입혀 주셨으니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고 자기의 백성으로 삶으신 것을,
우리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에
주 하나님을 사랑해
그것입니다. 주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가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주님을 몰라보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피로 구속하셔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을 당신의 아들의 그 의를 힘입어서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 가운데 주셔서 성실하게 주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고 자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의 신앙을 자라게 만듭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부패한 육신에 싸여서 살면서도 성결하신 그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면서 살구 있도록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으로 우리를 택해 주신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뭐가 행복합니까?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뭐가 행복합니까? 먹고 입고 살고 하면서 부유하게 살거나 넉넉하게 살면서 행복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만약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런 세상의 백성 가운데 한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는데도 그 사랑을 모르는 채 하나님을 해방하며 그렇게 살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감사는 본질적으로 두 번째 감사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무엇 때문에 주님이 우리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그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쓸모없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아들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그 고난의 의를 보시고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을 의롭다 여겨 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것인 것처럼 사랑하시고 당신의 것인 것처럼 인치시고 그래서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의 은혜는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믿는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이 가을 추수를 거두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땀을 흘리며 논에서 곡식을 거두어 알곡을 곶 간에 모아 두는 것과 같이 언젠가 하나님이 우리들도 이 세상의 밭에서 모두 추수해서 탈곡기에 터셔서 우리를 부대에 모두 담아서 천국 곶 간에 옮기실 그 날을 기대하면서 살 소망을 선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선택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주님의 자녀인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택하셔서 이렇게 주님의 자녀 삼으셨을까? 거저도 아니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나 한사람을 구원 하셨을까? 이것은 무슨 감사절에 한두 번 감사해야 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기도할 때마다 눈을 뜰 때 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셔서 이렇게 선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을까? 주님이 나를 선택하기 이전에도 선택해서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이전에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 같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 십자가의 피로 나를 구원하신 후에도 주님의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산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주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셨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합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그런 감사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에 시인이 진짜로 감격하고 있는 이진수는 무언가 하면 목양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기르시는 양이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 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그게 바로 목양의 은혜입니다. 이 창조는 사실 우리들이 경험한 것이 아니고 그리고 선택은 일회적이지만 이 목양은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돌봄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니까 선택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주님께 이런 사랑을 입으며 돌봄을 받았을꼬. 내가 만약에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주님이 어찌 나를 선택하셨을꼬.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예증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게 예수그리스도 만나서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 하신다. 라고 하는 그 현재적인 목양의 놀라움을 경험하고 나니 그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가 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참 많습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일이지만 가을이 되어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돌아보면 두길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함없이 은혜 주시고 우리를 돌보신 흩트려지지 않는 하나님의 그 신실한 발걸음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그 특별한 사랑을 많이 이루면서도 이리저리 비척거기면서 세상으로 또 교회로 하나님께로 또 자기중심으로 이렇게 비척거리면서 살아 온 일관성 없는 우리의 갈지자의 그 발자국들 그 두 개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을이 되고 추수 때가되고 감사절 때가 되면 또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그 은혜를 생각하고 우리의 그 신실하지 못한 삶들이 하나님 앞에 참 그런 것이죠. 그죠. 주님이 우리를 지키고 돌보아 주신 은혜는 한해가 짧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일관성이 있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실함을 지키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일 년이 왜 이렇게 깁니까? 일 년이 왜 그렇게 긴지. 어떻게 한 삼 사일이라면 이를 악물고 한번 해 보겠는데 성경읽기도 그렇고 새벽기도도 그렇고 하여튼 헌금생활도 그렇고 하여튼 뭐든지 초지일관 하면서 살기가 어려워서 일 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한 결심을 신실하게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긴 기관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셨습니까? 어제나 그리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동일하신 발걸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지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껏 하나님 앞에 살아오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인도해 오신 그 놀라운 사랑, 그 특별하고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들을 주시고 사람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게 하신 것,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우리의 가족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일관성은 없지만 그러나 아주 미끄러짐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의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에 다리는 좀 절어도 그래도 여기에 지금 이렇게 서서 우리의 신앙의 길이랍시고 하나님 앞에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끔 만들어 주신 것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영혼 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큰 하나님의 목자의 돌보심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해를 살면서도 우리는 곤고할 때도 있었고 죽을 것처럼 어려운 시련을 만나거나 혹은 한없는 슬픔에 잠긴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변하는 이 세상보다 불변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에게 새 힘주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어떤 상항에 있든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열렬한 애증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교만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낙심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사람들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아시고 항상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지체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돌보심으로서 우리의 많은 근심들을 면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감사는 더더욱 넘칩니다. 한해 전에 우리는 도대체, 잘 불렀던 찬송이 그것 아닙니까?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나를 갈길 모르니” 진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갈 길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갈 땅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제 설계가 모두 끝나고 그림을 아주 멋있는 조감도를 그려 왔는데 저기다 갔다 걸면 여러분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현관에서 졸도 할까봐 제 방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너무 환상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모든 설계도까지 설계도가 한 구루마입니다. 한 구르마.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딱 온 것입니다. 이제는 짖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은 짖기만 하면 되고 천사들은 이제 하늘에서 돈만 퍼 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한해 전에 노심초사 했습니까? 여기는 빨리 나가라고 하지. 우리는 갈 땅은 없지. 마치 철거민 촌의 엄마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철거민처럼 어디로 가겠냐는 겁니다. 이 추위에 이 지체들을 데리고 어디를 가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생각하면 참 면목이 없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신데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고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헌신적이신데 우리는 헌신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번 맺은 우리와의 관계를 변치 아니하시는 정절을 지키시는 주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도 이제 이 가을에는 다시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큰 사랑을 입었으면서도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서 죄인들을 값없이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임마누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들이 정결해지 그리고 우리의 참 소망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목양하시는 하나님의 그 돌봄의 은혜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백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우리들이 부흥회를 하는 것은 너무 의미 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이제 나이나마리아 릴케가 고백했던 것처럼 이틀만 더 남극에 햇빛을 주셔서 그 포도를 영글게 하시는 것처럼 이제 우리들이 아홉 달 가까이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때가 많았지만 그러나 다문 두 세 달이라도 하나님께서 은총의 햇살을 비춰 주셔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따라서 아직 덜 익은 우리의 삶의 열매를 다 영글게 만들고 하는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한해 남은 이 기간 동안을 하나님 앞에 더 큰 감사 속에서 주님 찬송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너무 의미 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시인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어떠한 염려와 불안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은 한 해 동안에도 우리들이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만들면서 격변하는 한해를 엮어 갔습니다. 남은 날들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여기서 이 시인은 이 고백 속에서 어떠한 불안이나 어떠한 근심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것이 불안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되고 그분에게 선택 받은 것이 부담이 아니라 찬송의 조건이 되고 그분의 돌봄을 받는 그 목양 안에 사는 것이 이 시인에게 있어서 한없는 축복의 감사의 제물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약하지 않습니까? 정말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실 때에만 우리가 주님의 자녀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저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목자의 돌보심의 그 은혜를 우리들이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주님의 마음에는 우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건강할 때나 연약할 때나 주님이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어느 정도 그 마음을 물려받은 교회도 여러분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목양의 은혜의 돌보시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러한 어린 양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시고 우리를 그 목자의 사랑으로 감화 시키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시고 쉼 없이 한 해 동안 공급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은혜에 빚지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주의 돌보심의 은혜에 감격할 것이고 그 돌보심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자기를 사람으로 빚으신 하나님의 그 창조의 은혜까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영역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에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고 입을 열면 하나님 자랑하고 그리고 입을 열면 주님이 자기를 향해 베푸시는 그 특별한 돌보심의 은혜에 목이 메는 그런 성도들로 이 세상에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든지 항상 우리들이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 이 주님께 사랑을 받는 이 목양의 관계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남은 생애도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주님 안에서 깊은 신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렇게 주의 백성답게 사는 참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들의 신앙도 잘 영글어 가서 그래서 올 한해도 우리의 이 성화의 있어서 깊은 진보의 열매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그래서 정말 주님 자신의 이름이 우리에게 한없는 깊음과 감격이 되는 그런 생애를 살도록 우리들이 다시 한 번 한 해 동안 주님이 주신 은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