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데서 강함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제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녹취자: 장미연
사도바울에게 이 고린도후서는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구약의 예레미야서의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만났는가, 자기에게 주신 그 영적인 지식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것인지를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거를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세 번을 간구했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셨다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뭐냐를 가지고 많은 이론들을 펼칩니다. 도틀리안 사람같은 사람은 아마 두통이 아니었을까?, 크리소스톰 같은 사람은 알 수는 없지만 모종의 육체의 고통이었을거다.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들이 설득되어 왔던 많은 이론 중 하나는 아마 이거는 안질일 것이다. 다른 안질이 아니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잠시 눈이 멀었다고 했는데 아마 그때 눈을 떴지만 그러나 문제가 여전히 생겨서 힘들어하고 사단의 가시처럼 자기를 괴롭혔고 그래서 세 번을 기도했는데 안 고쳐주셨다. 이렇게 많이 설득되어왔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그냥 이론을 그렇게 잡아볼 뿐이지 실제로 사단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육체에 관한게 아니라 마음에 관한 거다라고 하면서 로마서 7장하고 연결시키면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정욕. 그 놀라운 계시를 받는데 매일매일 육체라고 하는 것은 그냥 ‘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Fresh. ‘육적 자기를 뜻하는 것이다’라고 봐서 하나의 정욕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루터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이 많이 반영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확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루터의 이야기도 상당한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나 육체의 연약함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육체의 어떤 질병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병자를 고치고 그 큰 기적을 일으키고 그러면서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고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서 자기 자신은 여전히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고 그것이 사단의 가시처럼 자기를 찌른다고 할 때에 그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찌르는 그 어떤 모종의 질병 혹은 연약함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괴로웠음 그 표현을 사단의 가시라고 했겠습니까? 정말 온몸이 자신의 질병에 대해 저향하고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 대목입니다.
그런데 불쑥 그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그렇게 연약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고 사단의 가시일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갑자기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그랬습니다. 왜 그렇게 사단의 가시라고 했던 사람이 그거를 기뻐하는 마음이 생겼을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고쳐주신게 아니라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너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줬는데 그것으로써 너는 충분하다.’ 그렇게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그런 식으로 다루셨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는 왜 안고쳐주셨을까? 왜 안고쳐주셨을까?에 대해선 우리가 답을 다 내릴 순 없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 다루셨을까?에 대해서는 사도바울 자신도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 답이 너무 자기를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이렇게 육체 아픔을 영적인 깨달음으로 연결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육적인 아픔이 질병의 고통이 영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것입니다. 그것은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영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기술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문자를 받았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좀 도와줬는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그냥 긴 사연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들겠지. 그래서 내가 그래도 믿음으로 살기 바랍니다. 그런데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아무개도 난치병으로 시달리면서 일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이 편지를 받는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가 과연 이 체력으로 오늘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을 뜹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하는 일이 마음을 모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내가 답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해석입니다.
육체가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을 때에만 하나님을 의지하는게 아니라 진짜 은혜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든 불쌍한 형제, 자매들을 보든 감사한 일을 만나든 큰 축복을 받든 아니면 큰 불행을 만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자기가 다치든지 혹은 심지어 자신이 병석에 눕는 때조차도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늘 강조하는게 아프면 그 아픈 거를 자기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가족들은 염려해주지만 그러나 내 아픔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가슴으로 아파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한 번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새벽기도 나가는 소리가 들려요. 새벽기도를 나갔나? 새벽기도가 아니고 저녁예배. 수요일인가? 금요일인가? 하여튼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금방 들어왔어요. 도대체 뭘 두고 갔나? 그랬더니 “여보” 그러고 들어오는데 피가 줄줄 흐르는 거예요. 주머니에 손 넣고 가다가 엘지 앞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제대로 안 한 걸 툭 치고 넘어졌는데 손을 주머니 넣은 사이로 보도블록 모서리에다가 얼굴을 그냥 친 거예요. 확 까지면서 피가 났어요. 아우.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거예요. 솔직히 얘기해서 ‘차라리 내가 넘어졌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느끼고 어쨌든 치료를 하고 그러고도 다시 교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심정적으로 느끼는 거지. 내가 아픈거 만큼 육체적으로 느끼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내 얘기는 무슨 이야기면 자신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애정을 가져야 된다. 적극적으로 아프면 적극적으로 찾아서 그래서 고치고 너무 못 견디겠으면 진통제 먹고 그래도 못 견디겠으면 어떻게하든지 쉬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몸을 친화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나는 50대 초반까지는 적대적으로 다루었던 것 같아요. 그런 증거들이 게으름 같은데 보면 나오잖아요. ‘아우, 나는 너무 힘들어.’ ‘너 맞아 죽을래.’ 이러잖아요. 물론 그거는 영적인 거지만 자신의 몸을 이렇게 친근히 다루고 아플 때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겪는 연약함이고 나이가 들면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면서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러고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거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이 망가지고 신앙이 망가지고 마지막에 우리 육체까지 망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프기 때문에 능력이 왔고 능력이 임했겠습니까? 그런 거는 아닙니다. 아플 때 능력이 임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심히 일하고 살았는데 강할 때는 자기가 한 줄 아는 것입니다. 너무 약해지고 나서 비로소 아, 내가 강했을 때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에 강했던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거 아닙니까. 그거를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연약했기 때문에 이런 연약한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을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약한 것이 오히려 자랑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다. ‘머물다’라는 이 말은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는 표현인데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 육체 에스케머스라는 단어인데 ‘장막을 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장막을 쳐서 내가 그 장막 아래 거하는 것 같은 그 능력에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 같은 그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읽을 때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연약한 몸으로 한편 설교하고 한 사발씩 피를 쏟으면서 선교를 했던 그 젊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보면 결국 그렇게 자기는 약한데 그리스도가 강한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할 때는 우리의 힘으로 한다고 자만해지기 쉽지만 연약해지고 나면 정말 내가 나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리고 숨 쉬고 내가 기도하는 모든 것이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그분을 기동하여 숨 쉬고 움직이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속에서 결국 우리에게 드는 생각은 한가지 생사간에 우리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감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게 되고 참으로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우리의 인생을 살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우리가 이중에서 함께 이렇게 만나서 같이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다른 삶을 살고 싶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이제 어떤 의미에서 끊임없이 좌절시키시면서 그러면서 꺾으시는데 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나를 쳐서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우리 인간의 마음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러분 기도카드를 가지고 항상 기도를 하는데 보면 참 근심 없고 걱정 없어서 숨기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겠구나. 말로만 한 줄. 아버님이 아프십니다. 외할머니가 암투병중이십니다. 한줄로 쓰였지만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가족들의 고통과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의 마음에 찌르는 아픔이 있겠습니까. 모두 그렇게 연약한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바로 그런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자기가 산 것 아니요 주님이 자기 안에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적고 보면 정말 우리의 육체는 사단의 가시에 찔려도 우리의 영혼은 그럴수록 더 자유로움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