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기도할 때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녹취자: 이은정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교회의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습니다. 헤롯왕의 박해는 교묘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부를 겨냥한 것이었으니, 영적 지도자인 사도들을 처형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이런 박해는 없었는데 너무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교회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커다란 영적인 위기 앞에서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어떤 깊이로 기도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구체적인 기도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냥 형식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새 기둥 중 하나의 지도자여야 했던 사도 야고보가 처형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의 형제인 그는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재판받았다는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마 거의 그냥 살해되다시피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야보고의 죽음을 두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헤롯은 계산했습니다. 아, 이것이 유대인들의 관심을 사는 길이구나 그리고 더 끔찍한 일을 계획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죽여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잡혀 온 베드로는 감옥에 수감 되었습니다. 이제 베드로까지 순교하고 나면 예루살렘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네 개 조 열여섯 명의 훈련된 간수들에 의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제 명절이 끝나면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질 것이고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손쉽게 처형할 요량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온 교회교인들의 기도는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살려주시옵소서 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그 상황은 추상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상황도 그러합니다. 이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 못지 않게 영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위기가 아닙니다. 100세의 노구를 이끌고 돌아가신 방재일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하신 말씀이 생생합니다.
“요즘 목사들의 설교에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아.” 우리의 앞선 세대들은 신학자이든 목회자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감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자기를 살려낸 능력이 바로 자기를 목사로 소명하였고 장로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의 피를 뿌리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바로 응답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목회의 간증이었습니다. 두 번 교회가 문을 닫고 나간 자리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해 28년 동안 목회한 목회자로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조국교회 상황을 보고 우리가 놓여있는 이 교회의 영적인 위기를 보십시오. 도대체 지난주에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예수의 이름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몇 명이었습니까. 그 눈물 때문에 예배가 끝나는 대로 자리를 뜨지 못한 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우리 목사들이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린 것이 도대체 언제 일입니까.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땀을 흘리고 목회자가 피를 흘리면 그때서야 교인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교인들이 피를 흘리기 위해선 목회자는 죽어야 합니다. 정치가 난무하고 온갖 모략과 그리고 이권과 정치적인 투쟁만이 살아있는 이 교회는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구체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 기도했습니다. 최고의 지도자 베드로가 이제 곧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조정에 올린 탄원서를 작성 하기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높은 사람들에게 줄을 대어 헤롯과 면담을 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수를 매수할 뇌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특수부대 출신을 고용하여 베드로를 탈옥시키는 계획을 짜지도 않았습니다. 교인은 답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온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에게 모든 기도를 미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에게 기도하라고 하고 목회자는 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회자와 교인과 모든 사람들이 온 교회가 이 구체적인 상황을 위해 아버지 앞에 기도하기로 선택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엄중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기도했고 그 기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개인의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모여 봐야 그 기도회가 능력 충만해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또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던 개인이 모였을 때 그 기도의 능력이 임하고 또한 능력이 있는 기도가 교회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 개인들도 기도의 능력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꺼질듯한 장작이 그 불길에 던져져서 다시 불붙여서 돌아가 또 다른 불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개인 기도와 교회의 기도의 관계인 것입니다.
온 산을 아름드리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밑에는 그 뿌리들이 서로 엉켜져 산을 사로잡고 있으니 이러한 산에는 결코 사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교인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투옥된 상황을 제일 중요한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남의 탓이나 하는 풍조는 기도하지 않는 교회의 확실한 증거이고 끝없이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절체절명의 교회의 위기 속에서도 교회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모여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물러 설 곳이 없습니다. 교인들은 떠나고 있고 그리고 개척교회는 되지 않고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팬데믹의 상황이 겹치면서 어려운 교회는 이제 존립의 위협을 받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들고 그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도대체 우리 중 누가 이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아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눈물로 적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와 핑계를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성전에 올라가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울부짖었던 세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길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선택하는 교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기도의 태도입니다. 오늘 성경은 기도의 태도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냥 기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단어는 ‘에크테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쭉 뻗어 나가는 이런 뜻입니다. 야구장에서 타자가 들어섰습니다. 한대 후려갈겼습니다. 공이 하늘 높이 솟구쳤습니다. 모두 홈런이 아닙니다. 아웃입니다. 왜? 높이는 올라갔는데 뻗어 나가는 힘이 없어요. 제대로 맞았습니다. 소리가 경쾌한 타군은 쭉 뻗어 나가면서 야구장 바깥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높이 오른 공이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쭉 뻗어 나가는 기도가 멀리 가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초대교부들의 기도에 관한 교훈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도 하늘이 삼층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1층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두번째는 마귀가 지배하는 하늘이고, 세 번째하늘은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있는, 하늘나라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늘로 쏘아올리는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화살을 쏘듯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기도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로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어떤 기도는 마귀가 지배하는 두 번째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마귀들이 방패로 치자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나 진짜 쎈 기도는, 쭉 뻗어가는 기도는 그 마귀들이 지배하는 하늘의 천장을 뚫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오늘도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 우리의 이 기도가 첫 번째 하늘과 두 번째 마귀의 천장을 뚫고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이르도록 오늘도 기도의 화살을 쏘자, 라고 노래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행사가 있을 때 잠깐 모여서 우르르 모이고 사진이나 찍는 그런 기도회가 아닙니다. 모여있는 그곳에서 두세 사람이 모이든 몇 사람이 모이든 아버지 앞에 쭉쭉 뻗어 나가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의 속된 생각에 의해 꺾이지 않는 기도, 마귀의 영적 전쟁에서 그 방패를 뚫고 그의 심장을 겨냥할 수 있는 힘찬 화살을 쏘는 그런 종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교인들이 그런 기도를 배우겠습니까? 누구한테 그런 기도를 배우겠습니까? 어디서 그 기도를 터득하겠습니까? 보지 않는 것은 배울길이 없고 배우지 않은 것은 실천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도의 화살을 이렇게 높이 쏘아 올리는 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기도의 깊이입니다. 예루살렘 온 교회가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오늘 표현하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드리는 기도가 도대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올리는 기도이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교리적으로 볼 때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느 작가가 자기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우리 우편물 수취함에 쌓이는 우편물과 비교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앞으로 일주일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옵니다. 대부분 광고, 선전, 그리고 도와달라는, 그것도 수없이 인쇄기에 돌려서 똑같은 문구로 그냥 수많은 교회에 뿌려보는 것입니다. 물론 다 애달픈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담임목사님 손까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행정직원들이 다 걸러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진짜 필요한 편지만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가 우상에게 기도했겠습니까. 우리가 이웃집 아저씨께 간구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 전상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편물처럼 천사들에 의해서 처리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 기도는 도대체 몇 통이나 될까요.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라는 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려지는 기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그 놀라운 순간이 기도에 있어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 문까지 들어가다가 우리는 도로 나오거나 혹은 출발도 하지 못한 채 기도가 끝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나 하늘 문이 열리고 신령한 세계로 쏙 들어갈 수 있는 목사님들은 매우 특별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매우 소수입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목회자들은 기도할 때 오만 산란한 생각이 먼저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것들을 거둬내야 합니다.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킵니다.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와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고 심지어 유혹까지 우리의 마음을 오갑니다. 그때 우리가 어떡합니까?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도저히 자신의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자기의 옛 신발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보좌에 이르도록 부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핏길을 맨발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오늘 용납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의로운 행실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흠뻑 뿌린 그 피 때문에 내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핏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대역 죄인이 황제 앞에 부복하듯이 엎드려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거기서 우리는 보좌 위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임재인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목사가 아닙니다. 장로가 아닙니다. 노회장이 아닙니다. 총회장이 아닙니다. 그냥 한 마리의 어린 양, 주님이 돌보아주시지 않으면 목회도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양, 그러면서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결점투성이의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양에 불과합니다. 그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목사로서가 아니라 한 양으로서 어루만지십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것이라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 앞에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는 하나님께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임재 앞에 드려지는 거룩하고 신령한 기도입니다. 모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복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복입니다. 성경에서 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교회가 신도시가 들어서서 교인이 많이 모이고 아들딸이 좋은 혼처를 만나 시집·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았는데 똑똑해서 일류대에 들어가는 것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고 세상 사랑하던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시는 복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을 칩니다. 상황에 핑계를 대지 맙시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 속에서 더욱더 맹렬하게 타오르는 우리의 신앙을 보게 될 것이며 주님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심어준 능력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날 세속의 파도는 높고 경건의 능력은 심하게 약해져 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은 위협받고 있고 이제 더이상 목회자들도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교인들에게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기도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령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분열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개인의 이익을 챙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나 혼자 믿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형식적으로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모든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모든 교회에 이 기도의 불을 붙이는 한 알의 불씨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