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13)
녹취자: 백지영, 김정호
자, 이제 어느덧 이번 주 수업을 하고 나면 다음 주 수업이 있고, 그게 1일 날이고, 그 다음에 8일 날 기말고사를 보면 모든 것이 종강이 됩니다. 그래서 기말고사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아서 먼저 여러분들에게 안내를 하고 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원래 다 모여서 시험을 봐야지만 제대로 테스트가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 해서 인터뷰로 기말고사를 해보기도 하고 또 아주 짧은 문제로 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했는데 다 그렇게 썩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C채널의 팡세를 여기서 보여줄 수 있습니까? 유튜브에 나온, 찾아봐주십시오, 여러분들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영상) “안녕하세요? 성경을 기초로 한 명서 읽기 프로젝트 서재의 재발견의 아나운서 박여명입니다. 1956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명문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이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창과 도끼로 무참히 살해를 당했다는 그런 소식이었는데요, 당시 유명 일간지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글쎄요. 세상이 말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6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음이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복음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 작품의 저자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의 선택을 두고 안타깝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를 그 작품 속으로 안내해 줄 메인 스피커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네,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네, 목사님 반갑습니다.” “자, 오늘 서재 재발견 오늘 드디어 목사님 모시고 2시간을 진행해 볼 텐데, 오늘 특별히 열린교회 진짜 아름다운 공간으로 저희를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또 이 시간이 사실 기대가 되는 것이 녹화 전에 또 기도를 목사님께서 해주셨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찾게 되는 그런 강의가 되기를 바란다는 이런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시간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하면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고 계신 것이 책을 워낙 많이 읽으시고 또 많이 쓰시고 잘 알려져 있잖아요? 목사님께서는 책을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하시게 되셨습니까?” “책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들어갈까, 그 직전일까? 그때부터 좋아했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책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네, 그 사람들은 또 그 사람들의 세계가 있겠지요.”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시고 많이 읽으시고 또 많이 쓰시는데, 이런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은 자기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해 주는....” “자기가 보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자기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힘에 있어서 책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한정적인 그런 세계관?, 그런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군요.” “내가 모든 사람의 삶을 다 살 수 없으니까 그 책을 통해서 달리 살았던 삶, 나 아닌 다른 입장에서 나를 보는 삶, 이런 것과 함께 소통하면서 자기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책이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시는군요. 오늘 사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정말 목사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어려운 책이기도 하고 목사님께서 좀 쉽게 풀어주시면 훨씬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함께 좀 읽으면 좋을 만한 책들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책들이 어떤 것인지 먼저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서 간단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면, 우선 ‘팡세’ 있으니까 읽어야 되겠고요, 그다음에 파스칼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몽테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많은 구절들을 이 팡세에서 바로바로 인용합니다. 그러나 인간관에 있어서 인간을 심도 깊게 보았던 면에서는 파스칼과 몽테뉴가 매우 닮았는데 그런데 두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매우 다릅니다. 그러니까 몽테뉴는 인간은 유한하고 비참하고 무지에 쌓여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알아 가면 된다.” “긍정적인 해석이네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고, 이 파스칼은 (인간이) 이렇게 비참하고 아무리 알아가 봐야 소용없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이성으로 찾아갈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찾아야 된다, 이렇게 갈림길로 갈리게 됩니다. 이것은 파스칼의 책에 나오는 기도만을 모아서 나온 책입니다.” “예, ‘하나님께 부르짖는 파스칼의 기도’" “그리고 제 책도 하나 살짝 끼워 넣었습니다. ‘염려에 관하여’, 인간의 실존문제 그 다음 고독의 문제, 존엄의 문제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팡세’와 상당히 많이 결을 같이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제가 추천서로 올려놓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또 이렇게 세권의 책을 함께 소개를 해 주셨는데, 저희가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팡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또 해 봅니다.”(영상 끝)
자,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마 근대에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가장 훌륭한 해석을 내놓았던 철학자중 한 사람이 파스칼입니다. 그리고 파스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물론 개신교 화된 가톨릭의 교인이었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다음 주에 기말고사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문제를 잘 읽고,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미 가르쳐드린 강의 그 다음에 책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공부하고 오셔서, 그래서 그날 이렇게 자기 자리에 일체 모든 것들을 치우고 앉으셔서 여러분들이 직접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컴퓨터로 작성해서 송고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예제를 내 드리고 예제 중에서 여러분들에게 시험을 내서 6월8일 날 여러분들이 온라인으로 기말고사에 임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50분짜리 두 개 강의인데, 이 강의를 들으시면서 깨끗이 잘 정리해서 하나의 리포트로 내시면 됩니다. 분량은 50분짜리 두 개니까 A4 용지 한 세매 정도를 기준으로 약간 덜 되어도 되고 좀 더 많아도 되는데 될 수 있으면 5매는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3매에서 5매정도로 해서 기말고사 오실 때에 같이 내시면 됩니다. 두 편이나 되기 때문에 미리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로 기말고사 성적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기말고사에 대해서 안내한 것에 대해서 궁금한 것 있으면 질문하셔도 됩니다. 없으십니까? 그러면 계속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안 40쪽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만약에 여러분들이 팡세 두 개 강의를 잘 듣게 된다면 그러면 저의 한 학기 동안의 이 강의하고 연결이 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아주 훌륭하게 정리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잘 집중해서 들으시면, 그리고 팡세가 이런 내용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서 팡세가 읽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여러분들에게 이 기회를 드리는 것이고, 제가 직접 수업시간에 강의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과제로 내 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 대한 탐구를 여기서 멈추지 말고 팡세를 시작으로 해서 좀 더 심도 있는 마음에 대한 탐구를 그런 철학자들을 통해서 하면서 성경 속의 이치들을 알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40쪽의 2번, ‘은혜와 선한 의지의 조화’라고 하는 것인데, 이게 아마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이 의지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단일한 인격을 가진 주체성 있는 존재인데 이유는 그가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결코 우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하나하나를 다 개별적으로 창조하셨고, 또 창조하실 때에는 그가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있으셨기 때문에 만드신 것입니다.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똑같은 영혼을 가진 복사하듯이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이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는 똑같은 것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동시에’라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창조하시는 이유는 서로 다른 것들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아름다움을 연출하게 하시기 위합니다. 자연의 모든 세계를 보면 결국 서로서로 의존하는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가 산소를 뿜어내면 그 산소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또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심으로 공기를 정화합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서 나오는 각종 영양분들을 통해서 이 생태계를 비옥하게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음식 삼아서 동물들이 먹고 동물들이 배설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생태계 모든 전체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산이 수분을 머금고 수분을 비오지 않을 때 쏟아내면 그것으로써 생태계가 유지되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위로 올라간 수증기는 다시 위에 물이 되었다가 그것들이 다시 비로 내리고, 이렇게 순환을 하면서 자연의 모든 세계가 자신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나님이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절대적으로 어느 한 사람이 베푸는 위치에 있고 나머지 사람이 모두 혜택을 받는 위치에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회가 되게 하셔서 서로 다름 속에서 그 다름이 하나의 커다란 질서 속에서 같음을 추구하게 하심으로서, 그래서 서로 다름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악하고 어떤 사람은 선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죄인이고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부패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볼 때에는 더욱 심한 악인이 있고 더욱 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는 이것입니다.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원인이 무엇인가,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또 원인이 무엇인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신론자라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때에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요? “내가 좋으니까 내가 사랑한 거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결국은 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결국은 사랑했으니까 결국은 사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석들도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과학의 이론에 의하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물리적 원인에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보고 사랑에 빠질 때는 먼저 화학적 물질들이 분비가 됩니다. 그래서 도파민, 노르에네플린, 페닐에틸아민 같은 화학물질들이 몸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신경물질들을 제대로 생산해 내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면 사랑에 빠지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파민 같은 게 그런 예인데, 도파민이 정상적으로 분비가 되지 않고 과다분비가 될 때 정신분열증 - 조현병이라고 하지요? - 조현병 같은 무서운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현병 환자들은 절대로 약물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매우 매우 위험합니다. 반드시 의사의 통제 하에 있고 약물 복용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파민 같은 것이 보통사람의 몸에서 생성된다 할 때 유효기간이 평균 18개월이라고 합니다. 길면 36개월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누군가를 열렬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한계치가 18개월에서 36개월 정도, 보통 18개월 정도의, 18개월이니까 1년 6개월 정도에 결국은 무엇인가 그 사랑이 새로운 스테이지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유효기간이 종료되고 이제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따라다니지 않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도파민, 노르에피린, 에닐 에틸아민 등 화학물질이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격렬한 연정이 바뀌게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들이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 작용으로 대치되면서 그 다음에는 친구 같은 편안함, 가족 같은 안정감, 그리고 진짜 출렁거리는 인간의 이성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어떤 편안함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시기가 잘 전환이 될 때 결국은 연애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설명의 함정이 뭐냐 하면, “그러면 ‘나’라는 것이 과연 주체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랑을 못하면 내가 도파민을 맞으면 되고, 에닐 에틸아민 같은 것을 맞으면 내가 결국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어떤 여자도 사랑해 본 적이 없고 또 무슨 동성애적인 경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성에 특별히 마음이 끌린 적이 없다면 결국은 이런 것들이 나에게 부족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결국은 사랑하지 못한 건 내 책임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이 이성간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왜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그렇게 가족을 따뜻하게 여기지 않느냐, 왜 가족들과 함께 잘 융합하고 이해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지 않느냐고 그러면, 나는 바소프레신이나 옥시토신이나 엔도르핀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고, 그런데 내가 스스로 모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내 몸의 구조자체가 그게 안 나오는데 그래서 내가 엄마 아빠가 그렇게 잘 해주어도 영원히 타인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은 뭐가 불만이 있느냐 그러지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나는 혼자 있는 게 더 좋고 가족들과 함께 따뜻하게 어울리는 게 나에게 늘 어색하니, 나 때문이 아니라 이런 물질들이 내 몸에서 안 나오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어려운 문제는 그러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는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어떤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잘 나오는 사람이라는 이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버리기까지 그렇게 사랑한 사람들을 칭송하고 문학의 소재로 삼는 것을 허락하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극단적으로 유물론적으로 해석한다면 거기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이론과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하게 되면 도덕철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많은 숙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주 나쁘고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도 주사한 대만 맞았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과연 우리는 악인이라는 비난이 어디까지 가능하게 되는가라는 도덕적 질문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들어볼까요? 임하은?
“네, 교수님. 좀 어렵기는 한데 신경물질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의 감정이 조금 변화가 있는 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분명히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까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악인하고 선인을 그 물질이 나오고 안 나오고 이것만으로 구분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고 그런데 그것 말고도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셨는데, 신학교 2학년 김재원B?
“네, 너무 어려운데... 좀 더 생각해봐야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승찬?
“네, 교수님 말씀 들어보았을 때 정말 사람들의 선과 악이 그런 신경물질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악인들을 잡아넣는 교도소에다가 그런 화학물질을 풀어놓으면 다 교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저도 결국은 교수님과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과학적인 것을 넘어선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우?
“네, 교수님. 제가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물론 물질적인 것이 인간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시선이나 한 가지 이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때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이상의 영혼을 가진 존재인데. 하여튼 물질적인 문제로만 설명을 하다보니까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좀 해보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빙빙 도네요. 오래간만에 수업에 나온 김해원 학생, 한번 이야기해 보십시오.
“네, 저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그런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사실 저는 도덕적인 것을 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게 옳은가를 판단했을 때. 그래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도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배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선과 악을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것은 옳지 못한 일인데 하나님이 생각할 때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가지고 약간 그런 생각이 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파스칼이 아주 기가 막히게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하면, 이성에는 논리가 있습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에는 나가기 전에 먼저 창문을 열어봅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비가 오나 봅니다. 비가 쏟아지면 당연히 나갈 때 우산을 가지고 나갑니다. 논리적이지요. 왜냐하면 우산을 안 가지고 나가면 비를 쫄딱 맞아야 되고, 그러면 감기에 거릴 수도 있고, 화장이 지워질 수도 있고, 머리모양이 망가질 수도 있고, 실내에 들어갔을 때 옷에서 축축한 기운이 밸 수도 있으니까 불쾌하기 때문에 당연히 우산을 쓰고 가는 것 아닙니까? 이성적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야기하는 게 이것입니다. “이성은 이성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마음은 마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논리로 저 논리를 재단하면 안 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불신자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너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니?”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그러면 논리를 댑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한 것을 보면 신이 없는 게 분명하다, 있지도 않는 신이기 때문에 나는 사랑할 이유가 없고, 있지도 않는 사람이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선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받으실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게 이성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응답하는 사람에게 파스칼이 한 펀치를 날립니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데,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그 말에 “나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신주애? 질문해 볼께 대답해 보십시오. 두 남녀가 있는데 너무 사랑합니다.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합니다. 남자가 운전을 하고 여자는 조수석에 탔습니다. 그런데 깜빡 졸다가 마주 오는 차하고 부딪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면충돌을 했습니다. 남자가 죽을 확률이 많을까요, 여자가 죽을 확률이 많을까요? “보통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더 많이 죽는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충돌을 하는 그 순간에는 사랑이 작동이 안 하는 것입니다. 서서히 충돌을 하면 작동을 할 텐데 순식간, 불과 0.0몇 초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핸들을 자기를 피하는 것을 기준으로 꺾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수석에 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죽는 것입니다. 오히려 운전하는 사람이 죽을 확률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여기 머리로는 이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몸 전체의 본능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 결국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런 식으로 펀치를 날리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참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런데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는 무슨 논리가 있어서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냐?”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할만한 가치도 있어야 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뛰어나야 되는데, 때로는 자신이 자기의 이성도 인정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하는데도 자기는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무한히 용서합니다. 일흔 번의 일흔 번도 용서합니다. 자기 자신을. 그래서 이미 자기 자신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것을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펀치를 날리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데 무슨 논리가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날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고하경?
“네, 전혀 그쪽으로 그렇게 생각을 못했는데 나 자신이 그렇게 당연하게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많이 찾잖아요? 필요하다든지 아니면 뭐 해야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 두 개가 이렇게 연결되면서 그러다보니까 나는 나를 그렇게 당연히 사랑하면서 이유를 찾는 것이지 하고 깨달음을 찾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만큼 논리가 없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파스칼이 보기에는 그냥 논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이성이 탐지해 내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마음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정’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꼬르 생띠몽, 이것(꼬르)은 마음, 이것(생띠몽)은 심정,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꼬르) 라틴어 꼬르하고 똑같고 하트(hart)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논리는 마음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띠몽은 심정입니다. 그러니까 라 레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라 레종) 이성이고, 생띠몽은 심정입니다. 이것이 각기 서로 다른 로직(logic)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논리를. 그런데 이것 하나를 가지고 마음을 모두 재려고 하는 것은 마치 고체를 재던 자로 기체를 측정하려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파스칼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내 해석입니다. 어떤 것은 이성의 잣대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물리의 법칙 같은 것들. 이런 것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여기에 있고 내가 아는 똑같은 사람이 동시에 내 앞에 있으면 한 사람은 가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똑같은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은 이성의 법칙을 가지고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인간이 무엇을 발견하고도 사실은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용도 자체가 물리적이고 자연적이고 측정 가능한 물질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물론 형이상학적인 것들도 있지만 어쨌든지 이 이성의 논리로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이 분야가 있는데 마음으로만 측정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것으로서 측정하려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를 재던 자로 공기를 측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측정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체는 부피로 재야하고 막대기 같은 것들은 길이나 혹은 무게 등등으로 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측정수단이 바뀌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된다고 하는 것들은 라 레종, 이성의 논리에 의해서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심정의 논리에 의해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어느 인간이 여기에 나오는 이런 것들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이것만 가지고 살 때 유물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물론자도 자기 가족은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 이성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진짜 제대로 인간으로서 판단력을 갖추려면 마음의 논리와 이성의 논리를 동시에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비롯해서 사랑, 그 다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성품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이것이(이성의 논리) 아니라 이것(마음의 논리)으로 파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악된 것들을 이것을 이용해서 정확한 틀들을 만들어 놓을 때 이것이 하나의 기독교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제 강의 두 개를 듣고 나면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것은 일단 한두 장 정도에다가 그러니까 한 강의에 A4용지 하나씩 강의 내용 자체를 정리를 하십시오. 요약을 하십시오. 그냥 여러분 소설처럼 쓰지 마시고 강의 내용을 따라서 강의 들을 때 노트하듯이 그렇게 메모를 하셔야 됩니다. 아주 뚜렷한 논리나 이런 구성 같은 것들이 잘 돼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강의를 정신 차리고 들어서 모두 메모했다는 것을 알 수만 있으면 됩니다. 컴퓨터로 쳐도 되고 아니면 연필로 써서 A4 용지에 다가 써내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1강, 2강을 듣고, 마지막 세 번째 장에다가 여러분들이 자기가 이 강의를 듣고 느낀 점들을 질문과 그 다음에 여러분의 대답으로 그렇게 써서 그 강의에 대한 리스펀스(response)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를 보고 얼마나 성실하게 강의를 청취했는지, 그리고 강의를 들은 여러분 자신이 어떤 것을 충분히 느꼈는지 하는 것들을 보고 평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교과 내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은 그러한 수반 물리학적인 해설, 유물론적인 해설을 전적으로 따른다면 그러면 인간은 도대체 주체성이 어디 있나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이고, 결국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런 물질에 의해서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하나의 통로 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러면 무엇인가 덕스러운 일을 해도 그 사람을 칭찬할 이유가 없고 또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해도 굳이 그 사람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은 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회학이나 법학의 흐름을 보면 근대가 지나서 지금 현대로 이르면 이를수록 인간 자체가 주체적으로 자기를 형성해 온 존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 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이 현대 철학과 근대철학을 갈라놓는 아주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1968년도에, 60년대에 있었던 유럽의 학생운동 사태들을 통해서, 그것이 프랑스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영국, 독일 같은 나라로 다 번져서 하나의 유럽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68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거의 오십년 지나간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그래서 오십년을 맞으면서 68혁명의 반성 같은 것들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때 이후로는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를 안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주체보다는 어떤 가정에서 어떠한 사회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으며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요인에 의해 영향 받았는가에 의해서 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람됨은 결국 사회 모두가 다 함께 책임을 져야 되는 문제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보면 인간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을 때에 엄격한 판단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아주 흉악한 죄를 저질렀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뜨악할 정도로 벌이 너무 가벼운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죄를 저지르고 살인을 했는데 기껏해야 한 5년, 10년입니다. 15년 정도 형을 받으려면 너무너무 잔혹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성폭행이 동반되거나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여도 웬만하면 그저 5년에서 10년 사이면 풀려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몇 십 년 전과는 법원의 판결도 완전히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고 그리고 실제로 사형도 집행이 안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문을 보면서 한번 그런 의문을 가지고 한번 재판의 결과들을 보십시오. 살인이나 범죄에 대해서 사회가 굉장히 관대해 져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사기를 치면, 예를 들어서 6억 원을 사기를 쳤다고 하면 몇 년쯤 감옥살이할 것 같습니까? 김민수? 자, 김민수 재판관 말해보십시오. 6억을 사기 쳤습니다. 몇 년쯤 징역을 살까요? “한 3년 정도 살 것 같습니다.” 잘 아네요. 한번 해보았습니까? “아니요.” (웃음) 왜 이렇게 잘 알아요? 6개월에 1억입니다. 3년 살면 6억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억이 넘어가게 되면 특별가중처벌법이 적용이 되어서 연도가 확 증가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하여튼 일억에 6개월 정도를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사회를 과연 도덕적으로 만들 의지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범죄에 대해서 관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범죄에 대해서는 아주 또 처벌이 엄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고 그때그때마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우발적으로 죽인 것보다 성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힌 죄들이 훨씬 더 많은 형량을 받는 것입니다. 조주빈 같은 경우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40년인가 45년 받았습니다. 일반적인 살인에서조차 있을 수 없는 형벌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죄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20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 안 했고 또 삼십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법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될 때 인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 하면, 아주 복합적인 사회적인 작용의 소산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신주애가 태어났고 내가 태어났는데, 신주애는 신앙심이 너무 뜨겁고 너무너무 좋으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완전 불신자이고 굉장히 이상한 사람들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신주애는 아주 돈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친구 것 무엇을 탐내본다든지 빼앗아본다든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학교가면 다 가난한 애들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맨날 보따리 보따리 싸가지고 가서 애들에게 나누어주기만 했습니다. 나는 학교가 보니까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갖고 싶고, 그래서 가끔 때리고 빼앗기도 하고 훔치기도 하고 그랬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20년을 자랐습니다. 결국 신주애는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아주 신나게 의과대학 2년차 학생으로 다니고 있고, 나는 청소년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몇 년 후에 신주애는 어느 병원에 아주 잘 나가는 외과의사가 됐고, 나는 감옥소를 계속 드나드는 전과 오범의 범죄자가 되어서 취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단순하게 모두 신주애가 잘 해서 신주애는 그렇게 된 것이고, 김남준이는 김남준이가 잘못해서 다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접근하는 그런 법학이나 사회학 계통에서 인간의 존재를 그렇게 사회적인 소산으로 보면서 접근하는 측면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는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일리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은 굉장히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사회적인 책임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 청소년은 없고 문제가정만 있다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 문제 다루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항상 문제아가 있으면 가정을 가보면 얘가 왜 문제아였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엄마아빠가 도덕적으로 너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아이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애가 아주 끔찍한 범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신주애는 그렇게 훌륭한 가정에서 의과대학까지 다녔는데 그런데 그렇게 된 시나리오가 아니라 모든 게 다 있고 그런데 또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설명할 수 없는데 하여튼 신주애는 비뚤어진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부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혹은 공부 안 하고 마지막에 어떻게 불행하게 되는지를 부모님을 통해서 보면서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공부밖에 없다 해가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시나리오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또 이것이 사회적으로 설명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어떤 자매는 무척 공부를 못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매우 (공부를) 못했습니다. 한 반에 한 35명쯤 되면 한 30등 바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아이에게 자각이 생겼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은혜를 받았다기보다도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뭐냐면 그렇게 공부 안 하고 계속 자신의 인생이 진행될 때 자기 인생이 부모님의 인생처럼 불행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부모님이나 일가친척이나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 도달한 유일한 결과가 그래도 공부하는 것이 이 가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유일한 해결책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하면서 엄마, 아빠가 야단도 안 치는데 어느 때부터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교 들어갔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정도는 한 인간이 사회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인정하지만 모든 책임을 사회가 져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동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개인의 책임이냐 할 때 그것도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그 사이 어디에선가 우리는 조화점을 찾아야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결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여기서 주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결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한 인간이 부도덕에 빠지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 때 거기에서 결국 개인의 의지의 책임을 면탈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면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나는데 가장 이상적인 자기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 사랑과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일 경우에는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게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에게 이것이 별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때를 제외해놓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의 밝은 빛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습니다. 어느 정도 일치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건 내가 싫고 내가 좋아하는 건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심정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벌써 오류에 물든 심정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거나 필름이 끊어지면 이성의 논리가 없어집니다. 치매나 이런 것들은 논리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딸을 보고 누구냐고 묻고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냐고 묻습니다. 이성의 논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마음의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가 필름이 끊기게 되면 마음의 논리가 있었을 때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파악을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대답을 하게 되는데 마치 치매에 걸렸을 때에 이성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면 결국 인간이 불행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그렇게 놓고 보면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파스칼이 대변을 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희망을 갖되 자기 자신에게서 희망을 갖는 방식으로 인생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로부터 무엇인가 좋은 것이 올 것이라는 그런 기대로 희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은 더 많이 속으면서 비참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함으로써 자신 속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희망의 가능성을 신에게로 옮아가야 된다고 보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파스칼의 답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면 그 불행의 원인은 죄에 있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에 있는 것이고 죄는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한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아주 다양한 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실 뿌리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이외의 많은 대상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모두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초점은 딱 두 개밖에 없습니다. 자기냐? 하나님이냐? 세상 사랑도 결국 자기가 좋아하니까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거지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소비함으로써 만족을 누리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돈을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게 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고 그냥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단, 이걸 억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힘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막는데 그 은혜는 특별 은총에서의 은혜만이 아니라 일반 은총의 은혜에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처벌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죄를 못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함의 논쟁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돈을 너무 훔치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누가 고급 정보를 줬습니다. 5억이 들어 있는 가방 두 개가 지금 임자도 없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훔쳐야죠. 그런데 그게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거기 훔치러 갈까요? 안 갈까요? 문주빈 (학생), 훔치러 갈까요? 안 갈까요?
“진짜 많이 고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고민 안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에베레스트에 그 가방을 가지러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수백 명밖에 안 됩니다. 8,884m인가 그렇잖습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은 4,000m 올라가면 필름이 끊깁니다. 저는 3,800m인가 두 번 올라갔습니다. 융프라우라는 곳에 올라갔는데 한 번은 아주 크게 필름이 끊겨서 그냥 계단에 졸도했고 두 번째는 아주 살짝 한 30초 동안 필름이 끊겼습니다. 그게 그렇게 무섭습니다. 5억이 아니라 500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올라가겠습니까? 문주빈 (학생)은 올라가 본 제일 높은 산이 몇 미터인가요?
“저도 융프라우 갔었습니다.”
거기 케이블카 타고 올라갔잖아요?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걸어서 올라가야 됩니다.
“근데 또 요즘에는 같이 관광객들이 많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올라가는데 그냥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문주빈 학생이 돈이 많고 어떻게 하든지 에베레스트에 가서 두 팔 벌리고 고글 쓰고 사진 찍고 싶고 가문의 명예로 한번 삼고 싶다면 지금 돈으로 한 2억 5천만 원 정도 주고 세르파들에게 그냥 업혀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운동을 좀 하는 사람이 업혀서 갈 수 있습니다. 산소호흡기 끼고 올라갔다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그런 곳을 등산하는 사람은 등산화 하나에도 거의 1억 원 가까이 가는 고가의 등산화를 신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결론은 거기 돈이 있어도 남산이 아니라 에베레스트 산이면 안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억제하시는 것입니다.
트럭이 비탈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여기(타이어 밑)에다가 나무나 벽돌을 놓습니다. 그러면 딱 멈춰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힘은 엄청난 힘이 아래로 쏠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나무나 벽돌)을 싹 빼버리면 이것(트럭)은 그냥 그대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억제하시기 때문에 죄가 그렇게 심각하게 번성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우리들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절망적인 인간이 다시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느냐는 문제로 우리의 관심이 모아지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답을 크라티아, 은혜에서 찾습니다. 성경이 은혜라고 이야기할 때 은혜는 크게 성경에서 세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길을 가르칠 때 그 자체를 은혜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가치 없는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호의, 좋은 뜻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용도가 있는데 사랑의 감화입니다. 사랑의 감화 혹은 사랑의 감동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3번을 사용을 합니다. ‘너 요즘 은혜가 떨어졌구나’ 또는 ‘오늘 그 말씀이 정말 은혜로 왔다’고 할 때 한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화가 가득할 때 우리가 이걸 은혜 충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은혜롭다는 이야기는 말씀을 들을 때 그냥 이성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는 그것을 아주 절실하게 경험하게 될 때 우리들이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주어지면 이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선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한다고 했을 때 무엇이 이렇게 만들어내느냐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랑이 없을 때 인간은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를 작용인이라고 부르고 가우자 에피키엔스, 작용인이라고 부르고 사랑이 없는 것, 죄를 가리켜서 리 카우자 디펙티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함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어떤 일이 생기는데 작용을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결함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 악입니다. 원래 인간은 악에 물들어 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선을 행하고 자기 자신을 칭송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은혜로서 그 마음을 감동시켜서 사랑하게끔 하셨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계처럼 참여한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칭찬하실지 모르지만 인간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반대로 죄를 짓고 악을 행했을 때에는 결국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운 자기 의지(를 가진) 자기 결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자유롭게 선택해도 자기가 실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악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으로 죄를 짓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앞서시는 은혜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 악을 행하고는 자신을 탓해야 하고 선을 행하고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배운 내용이지만 텍스트 40페이지로 들어가겠습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은혜와 의지의 조화다. 타락한 인간은 선한 것을 향해 무능하고 악한 것을 향해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중생했다고 할지라도 무능과 부패성은 하나님이 의지 자체 안에서 극복하게끔 회복하신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역사하시는 은혜의 전용적(75:14) 작용으로 그 무능과 부패성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나기 전 악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영원과 마음 안에 역사하셔서 그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바꾸신다. 성령의 능력으로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선한 뜻이 있다. 성령의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도 은혜 없이는 의지를 새롭게 하지 못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창조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결심을 갖게 되고 지속하는 데 있어서도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 없이 불가능하며 은혜에 의해서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 의지를 행사하게 하신다. 영혼과 본성을 아시는 은혜 때문에 선한 의지를 행사하게 된다. 자유 때문에 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형벌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의 부패다.
우리들이 죄라고 이렇게 한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라틴어에서는 포에나, 팩카툼 이렇게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이 팩카툼은 우리가 말하는 죄입니다. 죄를 지었다거나 어떤 나쁜 행동을 해서 결국 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에나는 우리말에 적당한 번역이 없습니다. 이것은 가톨릭에서는 죄, 벌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누구나 사람들에게는 폭력을 행하고자 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너무나 안 좋은 상황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려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 사람에게는 폭력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이슨 같은 사람하고 감정 상했다면 때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한번 겨뤄볼 만한 사람입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사람을 때려서 피가 흐르게 함으로써 이 사람은 폭행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죄는 어쨌든 책임을 져야 될 죄입니다. 그게 팩카툼입니다. 그런데 한번 때려서 눕혔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시원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 사람 머릿속에는 어떠한 성향이 생기냐면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면 이렇게 때려야 되겠다는 버릇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에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에는 훨씬 더 쉽게 폭행을 가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버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포에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배운 것이 죄의 경향성이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디스포지션 그다음에 인클리네이션입니다.. 결국은 이런 성향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 자리 잡을수록 그는 더욱더 속박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패는 자유를 노예의 상태로 바꾸니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죄를 따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인데 자기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서 자신은 더 속박당해서 선택지가 좁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아주 쉽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들 중 사람만이 자유롭다. (이것은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고 정신과 영혼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의 개입으로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선천적 자유는 박탈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의지로 하는 일이 또한 자유로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의지는 어떤 추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자체의 필연성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필연성은 의지의 필연성이면서 의지를 변명하지 못하며 그릇된 길로 이끌리면서 필연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 필연성은 일종의 자기 스스로 택한 자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노예 상태는 강압에 의한 노예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한 노예 상태이다. 그래서 영혼은 이상하고 악한 방법으로 자원적이며 자유로운 필연성에 지배된다.
그래서 노예이면서 동시에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술을 계속 먹으면 알코올 중독이 됩니다. 중독이 되고 나면 여전히 자기가 자유롭게 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서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유로우면서도 완전히 속박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기를 속박하는 것을 마음속에 안 가지고 있는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이 어떤 것을 욕망하게 되면 그것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스캇 펙 같은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세계와 자기 자신이 동일시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노트북이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냥 갖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갖고 싶으면 세상에 노트북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 노트북을 사야 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나 통장에 있는 돈도 내 돈처럼 여겨지고 내가 꺼내서 빌려서 쓸 수 있는 돈으로 여겨지고 책을 팔아서라도 노트북을 사고 싶다고 생각되면 서가에 꽂혀 있는 책도 노트북을 위해서 존재하는 걸로 느끼는 것입니다. 진짜 커피숍에서 알바하기 싫은데 일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욕망이 강하게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를 물들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자신과 세계 사이의 구별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쾌락에 빠지지 말아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자기 사이에 주체적인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성인 잡지나 성인 방송이나 이런 거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이유의 타당성에 대해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미성년자 알아서는 안 되는 일들도 있다. 나이 들면 괜찮지만 어려서는 알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은 자기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것이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할 수 없는 어른일 경우에는 아이들에게서와 똑같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쭉 중간쯤 내려가겠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선한 마음을 위한 선행 조건이다. 이걸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 은혜의 결과이다. 중생을 통해 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바꾸신다. 이 역시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중생한 후에 신자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마음을 품는 것도 은혜의 결과다.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다. 중생했을지라도 은혜 아니면 부패하게 되고 생명과 성령의 원리는 약화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이다. 은혜 없이는 그렇지 않은 삶을 살 수 없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설정하신 것은 거듭난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정신으로 사랑하던 것은 불신자 때고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둘째로 선한 목적을 향한 결심도 성령님이 하시는 거지만 지탱하는 것도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된다. 중생을 통해 선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선한 결심을 품게 되는 잠재태다. 그래서 은혜가 선행하면 선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심을 지탱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선한 것을 결심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면 지탱하는 것은 더더욱 인간의 의지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 오늘날 선한 결심을 했던 신자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라. 뜻과 결심이 모자란 것이 아니다. 결단하고 결심하지만 허공을 휘두르며 남발된다. 헛된 결심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신자의 특성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들의 결심과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되어서이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찌 그 결심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창조 목적을 향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순종의 삶은 인간 안팎의 많은 장애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러한 장애는 인간 내면의 세계에 무한한 힘을 요구한다. 인간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자력적 능력이 없다. 은혜가 필요하다.
셋째로 창조 목적을 지향하는 결심이 지탱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은혜가 필요하다. 너희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곧 가지니 나를 떠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뿌리로 올라오는 땅의 습기와 양부는 싹이 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목이 된 후에도 그러하다.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해서 뿌리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일관적이고 지속적 은혜의 작용 안에서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선한 결심들이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마음을 고치시는 성령의 작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묵은 마음을 기경하고 새 마음을 심으심으로써이다. 성령의 작용은 순종이 뒤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도 아니며 그렇게 된다면 신자는 순종의 공로로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이 된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이 그런 결심을 품는 것 자체가 은혜 때문이다. 성령의 은혜는 순종과 함께 있는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은혜의 작용은 순종과 함께 있는 것이지 그것 없이 그것을 거슬러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주목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 스스로는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또한 그 마음을 고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명하시는 것을 내게 주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하소서. 그러니까 은혜를 내게 먼저 주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신자의 망가진 마음을 치료하시는 과정이 있고 나면 어루만지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함께 경험된다.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과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영적 감각들이 회복된다. 세 가지인데 하나님의 영광, 사랑, 용서에 대한 감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만져주심은 자아를 변하게 하고 감추어졌던 죄와 위선, 우리의 악한 상태를 자각하고 사랑을 알게 한다. 마음을 통해 거기로부터 흘러나올 미래의 삶이 어떤지를 생각하게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경험할 때 그 안에서 신자의 통회하는 경험은 초시간적 성격을 갖는다. 즉 이러한 참여의 경험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초시간적 성격을 갖는다. 과거의 삶의 기억으로서 마음과 현재의 상태 그리고 그 마음에서 비롯될 어떤 점에서 필연적인 이후의 삶을 시간적으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 총체적인 자기와 자기 자신에 의해 펼쳐진 삶에 대한 회개이니 하나님의 존재의 초시간적 성격의 반영이다.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면 과거의 죄도 현재처럼 느껴지고 미래의 죄도 현재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의 죄도 나의 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시간성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고치심을 통해 내면은 질서를 되찾게 된다. 영원의 순일성을 회복하고 지성과 욕망, 의지의 작용들이 조화를 이룬다. 마음 안에서 외부 세계로부터 전달되어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신령하게 해석하고 적용한다. 기억 속에서 상념들을 불러오고 또 그것들을 들여보내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마음은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통일성 없이 흩어지고 나누어졌던 삶의 질서도 일관성을 회복하고 이 모든 질서들을 되찾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묵상과 마음의 틀에 대한 성경 강론을 듣고 오셨는데 한 15분 동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누가 먼저 할까요? 원형섭
“저는 묵상의 중요성을 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기도나 성경을 읽는 거나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듣고 하는 것에 좀 더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묵상은 그것보다 좀 더 하위적인 개념의 QT 정도라고 이렇게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성경 읽기나 기도나 설교 적용의 그런 것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만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제가 진지하게 신경을 쓰면서 묵상을 해 나가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 안에 있는 이런 무너져 있는 지정의가 제대로 관리될 수가 없고 내가 거룩해지려면 묵상의 도움 없이는 절대 수월하게 그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형섭 형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마음에 열을 받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게 될까요? 참게 될까요?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친구하고 아무리 사이가 나빠져도 이 말은 내가 하면 안 된다고 머리는 생각하는데 화가 나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를 지배하는 게 이성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요? 감정이 먼저라는 게 되는 건가요?
“감정(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데카르트를 아주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데카르트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배경은 이전에 사람들이 너무 비이성적인 종교 생활, 그 속에서 포괄적인 교회의 역할 같은 것을 보면서 짓밟히는 인간성 같은 것들을 눈으로 보면서 그런 미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세운 게 이성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방법서설에 보면 명석 판명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심할 때까지 의심하고 쉽게 믿지 말라. 그리고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너의 인생의 논리를 쌓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본 인간관에 대해서 파스칼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로 인간이 살아갈 때에는 무언가를 모든 것을 다 끝까지 의심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과연 우리 엄마, 아빠의 자식이 맞는지 조사하고 내가 2000년 1월 2일생이라 그러는데 이걸 누가 조작하지 않았을까? 의심하면서 그것을 증명한 후에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인간의 정신 작용과 너무 동떨어진 해석이라고 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결국은 심정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그래서 결국은 이 심정이 어떻게 올바른 길을 찾을 때 생띠멍 혹은 인간의 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자신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마음을 올바로 지도하는 사람이 결국 바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 파스칼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훨씬 더 파스칼의인간관이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범위한 호응을 얻게 되고 17세기에 나온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묵상은 머릿속에만 있는 이 지식은 절대 우리의 삶에 주된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속에 흘러들어서 정서와 함께 융합될 때 그것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정서 속으로 흘러들어오지 않으면 결코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문주빈.
“저는 방금 전에 말씀해 주신 묵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이 좋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요즘에 헤시스, 하비투스 같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강론을 들으면서 한 번 더 이야기를 해 주셔서 기독교적인 관념으로 깊게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죄나 기질 같은 것에 대해서 잘 연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의 죄의 경향성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이 죄도 경향성이 있고 이것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묵상 부분이 참 좋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허윤.
“강론을 듣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루터 같은 사람도 본인의 몸을 많이 때려가면서 수양을 하고 죄된 기질을 고치려고 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사실 그 어떤 방법보다도 말씀 묵상이 가장 실제적이고 효과가 있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실제로도 말씀 묵상하기 전에 계속해서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머리로는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마음에서 원하여 충돌이 일어날 때 말씀을 묵상했더니 분명히 말씀을 읽기 전, 깊이 묵상하기 전에는 내가 오늘은 이것을 반드시 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말씀을 묵상하고 났을 때는 그것이 말씀에 의해서 일치가 되는 뭔가 씻겨 내려져 가는 다시 질서를 찾는 그런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말씀 묵상이 여러 가지 방편 중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저희의 마음의 질서로운 틀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생성시키는 그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을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깔때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깔때기가 돼서 부으면 마음으로 내려오고 마음으로 내려와서 움직여야지만 그것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개념만이 머릿속에 난무하게 되면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김민아.
“시편 119편 36절 말씀을 보면 그 기자가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는 모든 증거에 대해서는 알고 싶고 자그마한 탐욕에 대해서는 멀리하고 싶다는 자신의 신령한 경향성, 마음의 틀을 보여줬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묵상이 우리에게 신령한 영향을 끼치고 마음의 틀의 질서를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경향성을 잘 알아서 내가 어떤 상황이 있을 때 좋은 영향을 받고 악한 영향을 받는지 그래서 내가 어떤 좋은 영향에 나의 의지를 계속 두고 어떤 곳을 피해야 하는지 의지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묵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네. 임승현 (학생).
“저는 그냥 설교를 듣기만 할 때랑 제가 진짜 말씀을 보고 깊이 묵상하고 그런 시간을 보낼 때 둘이 확실히 뭔가 제 삶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자세하게 이성에만 머무는 것과 그것이 마음으로 내려와서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들을 자세하게 알려주신 것 같아서 속 시원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속 시원하게 듣지만 말고 실제로 계속 묵상을 해야 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거의 묵상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 알아도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색입니다. 사색은 자기 자신을 익숙해진 관점이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자기는 항상 자기 관점에서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닫고 나면 다른 관점과 진리의 관점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자기 깨어짐」에서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인식하고 처벌하고 가책을 받고 하는 과정들이 일어나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신주혜.
“저도 강론을 들으면서 묵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시편 묵상을 하려는 것을 삶을 목표로 항상 하고 있습니다. 묵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많이 와 닿았는데 중간에 ‘깨어 있다’라는 부분에 되게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교수님께서 설명을 해 주신 부분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사실 깨어 있으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 있어야 내 안에 있던 혼란스러운 것들이 질서가 잡히고 하나님 말씀 안에 그렇게 질서를 잡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프레임 그레이스라고 해서 내 안에 은혜의 프레임이 있는지 마음의 틀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저한테 굉장히 많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지식의 빛을 가지고 그것을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자로서 살아가야 된다는 게 참 많이 와 닿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쯤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 있어야 내 안에 있던 혼란스러운 것들이 질서가 잡히고 하나님 말씀 안에 그렇게 질서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성화에서도 그렇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오히려 이번 주 강론을 들으면서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다시 실천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은혜가 되었던 강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최주헌.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묵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말씀을 자꾸 생각을 하고 깨달음을 얻고 회개를 하는데 그 하루 동안에 지속적으로 계속 그 말씀에 대한 생각을 깊이 있게 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회개가 많이 필요했다는 것을 느꼈고 그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붙잡고 하루를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묵상을 안 하게 되면 정신이 산산이 분산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생각할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결국 인간의 마음은 온갖 눈에 보이는 것들에 신경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들 중에서도 혼자서 절대로 못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혼자서 못 있는 것은 진짜 혼자 못 있다는 게 아니라 사람하고 섞여서 정신을 팔든지 놀든지 혼자 놔두면 휴대폰 같은 것, 컴퓨터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이 홀로 고요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묵상이 거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사색하며 사는 사람들은 사색하지 않으면 혼자 있어야 될 갈증을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혼자서 게임을 하고 그러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서 혼자 자신을 조용히 성찰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도의 어떤 정신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이 바로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생각하면서 이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 도의 질서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그 도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마지막 강의시간에 교과를 끝까지 다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여러분들이 마지막 강론을 잘 읽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