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하는 방식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레 24:1-3)
녹취자: 배미라
레위기 24장은 성막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 성막 안에서 하나님께 등불을 어떻게 간수할까 하는 이야기들이 전반부에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성막은 직사각형의 텐트였고, 3분의 2는 성소였고 3분의 1은 지성소였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또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사명의 중요성을 잘 일깨워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21년 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내가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그 신학공부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은 생애의 잊혀지지 않을 커다란 감화를 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등잔불입니다. 아시다시피 성막은 물돼지가죽으로 되어있습니다. 바깥에 햇볕이 많은데도 하나님은 성막을 완전히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차단하셨고 별도로 등불을 밝혀 그 빛을 보며 그 빛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상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그분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는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인 특별계시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해석된 성경 계시는 올바르게 해석된 일반계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모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것을 집중하여 연구해서 변천하는 시대에 불변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신학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또 성경의 지식을 비빔밥처럼 섞어놓아서 도대체 세상의 지식을 말하려는 건지 성경의 계시를 말하려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그의 신학학문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구들이 생각했던바와 같이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 하고 그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신학이 아름답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탐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모든 학자분들, 교수님들은 자신의 사명이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 여기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그 불을 밝히게 하는 재료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감람유’ 혹은 ‘감람기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어 성경에는 세멘자히트라고 나오는데 문자 그대로 올리브나무의 기름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탐구하는 학자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학문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옥하게 할 만한데 이바지 못 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선배 신학자들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굳이 고대 교구들까지 넘어가지 않더라도 헤르만바빙크의 책만 읽어보더라도 그가 위대한 학자로서 얼마나 이 신학 연구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강조했는지는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심지어 그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오똑한 콧날의 날카로운 성격의 칼빈조차도 성령의 도우심과 그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잊지 아니하고는 그의 주석이나 설교를 넘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 역사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별난 학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학식이 하나님의 성령에 붙잡혀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잘 하는 것과 성령에 충만해 있는 것이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령충만한 척하는 사람은 책과 거리가 멀고 글줄이나 읽는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의 선생님으로서 신학을 탐구하고 조국교회의 신학을 밝히는 여러 선생님들은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돼서야 합니다. 충만한 성령 가운데서 주 앞에 인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 하워드 마셜 박사 아래에서 논문을 마쳤던 한 한국 목회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논문을 얼마나 잘 썼는지 그 지도교수인 하워드 마셜 박사께서 그 책에다가 추천서를 쓰기를 ‘the great masterpiece’라고 추천서를 썼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아무리 가까워도 영국사람들은 그렇게 극단적인 언사로 사람들의 작품을 칭찬하는 법이 없습니다. 진심이 아니라면. 그런데 그분 목사님의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박사 논문을 뭘 써야할지 고민을 했는데 책을 읽다가 모티브를 잡은 게 아니라 도저히 길이 잡히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아주 또렷한 주제를 주시더라는거죠. 또렷한 주제가 주어지고 수정같이 맑은 명제가 주어지고 고래 힘줄 같이 탄탄한 논리가 주어지더라는 거죠. 그래서 성공적으로 박사논문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학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이 기도 많이 하시고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가 그에게 나를 나타내보이리라. 주님이 자기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기뻐하는 선생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기 깨어짐입니다. 사실 이것이 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읽어보니까 이렇습니다. 자이트자크 까띠뜨라고 되어있습니다. 세멘 자이트자크 까띠뜨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멘 자이트는 감람유라는 뜻이고 그 다음에 자크는 순전함,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 단어가 눈길을 끄는데요 까띠뜨라는 단어입니다. 때리다 부수다라는 카타트의 피동분사 남성 단수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 감람유를 제조했던 방식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 감람열매를 절구에 빻아서 그래서 기름을 내었습니다.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자 멧돌 같은 데에다가 통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이 감람열매를 붓고 소가 빙빙 돌면서 그것을 깨뜨리면 그것이 기름과 깨진 찌꺼기들이 분리돼서 나왔던 것이죠. 유량을 많게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깨뜨려 빻은 그 감람재료들을 기계에 넣고 프레스로 누르는 것이죠.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참기름을 바위 같은데다 놓고 위에서 프레스로 눌러서 기름을 짜는 것과 같은 방식이죠. 근데 여기서 결점이 있었습니다. 양은 많이 나오는데 그렇게 짜서 눌른 기름에는 불순물이 섞여있습니다. 여러분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기름을 불을 붙이면 반드시 그을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멘자이트자크 까띠뜨라는 것은 구지 자크라는 순수한 퓨어라는 단어를 덧붙인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짠 기름은 성소에서 사용할 수 없고 그대로 깨뜨려서 짓누르지 않고 깨뜨려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기름을 채집해서 쓰라는 것이죠. 그러면 채집하는 양은 비록 적지만 거기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불을 붙일 때 그을음과 연기가 없이 불꽃이 피어나고 당연히 그 불꽃은 아주 밝고 환한 빛을 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런 기름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과 자기 깨어짐의 필요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잘 익은 감람나무 열매가 프레스로 눌러 짜면 찌꺼기가 나오지만 그냥 깨뜨려지기만 할때에는 순수한 기름이 나오는것처럼 여기서 성소에서 섬기는 너희들도 너희의 가르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가 깨뜨려져 순수한 마음을 가져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위대한 신학자들이 되었습니다. 자잘한 신학자는 남의 논문을 읽으며 밥을 먹고 살지만 위대한 신학자는 성경 자체를 읽으면서 위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발견하거나 재발견함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성경만 읽은 모든 신학자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그 성경 속에서 자기가 깨뜨려진 경험을 한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학문적으로도 철저히 준비된 사람들이었죠.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책속에서 신학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기도하고 명상함으로써가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신학자가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사도바울이 다 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 자신을 쳐서 복종 시키노라 예수 말씀에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예수죽음을 날마다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내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이미 기독교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정통인데 잠시 중세 신학속에서 잃어버렸다가 성경을 대하면서 성령의 순수한 역사로 이 진리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신학자이고 저도 목회자이자 신학자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테크니컬한 학자들이시고 저는 테크니컬하지 않고 그저 종합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쓰신 논문은 제가 무릎을 꿇고 읽어야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교회를 지식의 말씀으로 섬긴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 신학의 길을 가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같은 신학의 길을 가는 사람들로서 저는 겸손하게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신학 책을 읽으시면서 혹은 성경을 읽으시면서 마음이 깨뜨려져본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혹은 신학책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깨달으며 마음이 찢어지고 통회하게 된 때가 언제인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저는 직장을 다니며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야간 신학대학을 나왔습니다. 그 학교를 설립하신 분이 총신의 최초의 구약학 교수이셨던 김치선 박사이셨습니다. 납북되셨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부인께서 사모님이 자기 남편의 행적을 회상하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래 밤 늦도록 강의를 하시고는 같은 건물에 있는 사택에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사모님이 걱정이 되죠. 연세는 드신 분이 강의가 벌써 끝났을텐데 사택에 올라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내려가 보면 강대에 엎드려 기도하고 계시더랍니다. 얼마나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지 가까이 가서 건드려서 말을 건낼 수가 없었데요. 그 손에는 조금 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온 분필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가운데 무엇이 안타까운지 엎드려서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때로는 엉엉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살아계셨을 때 그분의 모토가 너희는 26000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당시 남한의 행정구역상 동네가 모두 26000개였답니다. 우물을 파란 말씀은 가서 교회를 개척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 메마른 모든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라는 뜻이였죠. 그래서 후일 후학들은 그분을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할 신학의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눈물의 기도를 잊어버리지 맙시다. 학자를 많이 공부할 뿐만 아니라 그 학자가 발견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합시다. 그래서 단지 일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주체가 되어서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인생을 보내든지 하나님 앞에 큰 상을 받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해야할 것이고, 부족한 것을 위해 연구를 위해 교회의 박사이신 여러분들을 후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힘껏 그리할것이니 여러분들도 최선을 다해서 진리의 빛을 밝히는 사람, 그리고 순결한 성령의 사람,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학자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번영하게 하는 선봉장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