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불씨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녹취자: 이은정
목회의 지도력에 관한 아주 천금 같은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교수가 되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이 에스라 10장에 깊이 감동을 받아서 학생들에게 여럿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규환 하게 됩니다. 에스라의 지도하에 돌아와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결국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 크기보다 작기는 하지만 성전도 다시 짓고 제사도 드릴 수 있게 되고, 이런 꿈 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20년을 한세대로 치면 삼 세대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일찍 결혼한 거를 계산 하면 말입니다. 3.5세대 내지 3세대가 흘러갔으니까, 여러분 할아버지때 가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미국에서 다 살다가 뿌리를 다 내렸는데,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얼 해서 먹고 살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은 그런 것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에스라에서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라고 그랬습니다. 느헤미야 때나, 스룹바벨 때나, 에스라 때나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좋게 얘기하면은 종교적인 열정에 넘치고, 애국심에 넘쳐서 고국 땅에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 하나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사에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제사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지대가 모여질 때 그렇게 젊은이들이 환호성을 지른 것입니다.
그런 감격스러운 포로 규환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너무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과 어느 정도 담을 쌓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거기에 빠지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세상을 전혀 모르는 것이 목회자에게 경건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기도 해야 하지만 뱀처럼 지혜롭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와서 고하는데 큰일 났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수한 신앙 하나를 가지고 포로 규환을 했는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태의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니까 이방 여자들을 첩들로 얻어서 시집 장가를 가고 애들도 그렇게 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들 때문에 사실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린 사람들이잖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이 와서 똑같이 그 나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그 일에 있어서 으뜸이 된 사람들이 지도자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에스라는 기가 막혀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속옷과 겉옷을 찢으며 머리털과 수염을 쥐어뜯으며 기가 막혀서 앉았는데 그 시간이 아마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전 시간이었다고 한다면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그러고 일어나질 못했다고 하니까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의 죄 때문에 ‘부끄러워서 하나님께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하며) 통회 자복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스라는 과거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과 지금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비시키면서 그 사이에서 자신은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에 분노하고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심정으로 중보자처럼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 하면은, 겉보기에는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와서 뭐 아주 좋다고 하고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거기까지 왔으니까 신앙의 무용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까는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면서 그렇게 온갖 악과 이방인들도 하지 않는 그런 끔찍한 죄악 된 일을 하고 그것이 백성의 대가리나 꼬랑지나 할 것 없이 온 백성이 썩은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에스라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이 반전을 보여주십니다. 그 반전이 무엇이냐 하면 그 큰 죄악을 이스라엘 백성이 단숨에 깨닫게 되고 그 자신의 죄로 인해서 크게 각성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도의 불씨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불씨가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런 죄악을 다 알고 있었지마는 근심하고 걱정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민족을 깨우는 불씨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에스라의 마음에 떨어졌을 때 불씨가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성전을 이야기하면 너무 길지만, 성전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신학들이 담겨있습니다. 결국은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에 위대한 통치자이시고 세계는 주님의 것이며 모든 인류가 주님의 것이되 특별히 이스라엘을 첫 열매로 삼으셨다고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성전 안에 모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물 많고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의 의식법입니다. 그 모든 걸 이해하고 있는 그 마음으로 에스라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찾는 마음의 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당신의 보좌를 두시고 통치하시겠다고 하는 장소적 임재에 대한 약속이 깃들여있었기 때문에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에스라는 이 죄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는 그런 비슷한 죄도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백성들의 죄가 자신의 죄로 느껴진 것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목회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잘 설교를 준비합니다. 수없이 외웁니다. 설교문으로 보면 모든 동료에게 칭찬받을만합니다. 그리고 아주 잘 전했습니다. 다시 해도 그만큼 못할 것 같습니다. 근데 왠지 커다란 감화는 없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설교 듣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보고 설교를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와 한 몸이라는 마음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의 성과가 없을 때는 방법만 고민하지 말고 내가 정말 저 영혼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울먹이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가?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청중 전체를 적군으로 보고 설교를 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도 아니고 이런 위대한 종들이 보여준 방법도 아닙니다. 때리고 야단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여기고 자기가 거기에 동참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가슴 아파하면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자복했다고 하는 말은 겸손히 엎드려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그런 마음이 결국 그로 하여금 기도의 불씨가 되게 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온갖 핑계와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당화합니다. 목회하기 너무 좋은데 교회를 그만두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A에 있는 교회의 목회가 너무 행복한데 크기가 크다는 이유로 B교회로 옮기는 목사는 없습니다. 모두 하다가 하다가 지치고 재미가 없으니까 옮기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너무 목회하는게 행복하고 기쁘고 보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러면 뭐가 그렇게 힘들까, 뭐가 그렇게 목회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둘도 아니고 딱 하나입니다. 힘든 게 힘들게 하는게 아니라 힘든 걸 힘들다고 느끼는 목회자 나의 영혼의 무게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거운 줄을 평상시 살 때는 모릅니다. 목회하다가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뜻대로 안 됩니다. 내가 여기서 별로 인정도 못 받습니다. 교인들이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다음엔 선배들이 특별히 칭찬해 주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때에 목회에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게 이만한 무게 추가되어서 갑자기 다니다가 밑에다가 쇠구슬을 5kg쯤 달고 걷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각반 같은 것을 채워서. 그 발걸음이 굉장히 무거워질 것 아닙니까.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거를 이러이러한 맘에 들지 않은 상황이 내 목회를 무겁게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목회의 무게가 무겁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 ‘봐라 이놈아, 니가 목회자냐 어려운 일이 좀 생겼지만 한번 봐라. 그게 네 영혼의 무게다.’ 그 영혼의 무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무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무게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손으로는 양떼들에게 꼴을 먹이고 일을 하지만 그것은 머슴도 할수 있는 것이고,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양 떼를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영혼의 무게입니다. 그런 사람이 목회나 하니까 그만큼 살아가는 거지 이 목회의 무게도 안 느끼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어떤 죄를 저지르고 미끄러진 인간으로 발견될지 하는 것은 우리가 성도들의 삶에서 늘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하고 말씀 사모하고 눈물로 살던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죄를 짓고 아내하고 법정에서 싸우고 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영혼의 무게입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우리가 목회해온 것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움이 많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던 때가 있는데 그렇게 어려움이 많았던 때에도 기쁨으로 목회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기쁨으로 목회하게 해준 것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어려움이 목회를 힘들게 합니까. 그게 아니라 이때에는 어려움이 작았으나 영혼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이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영혼이 너무 가벼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벼운 영혼을 가지고 사니까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신앙입니다. 에스라는 그 점에서 어마어마하게 엄청난 시련을 만났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영혼이 깃털같이 가벼웠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이 죄를 지은 것을 보는 즉시 그것을 자신의 죄라고 느끼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아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거기서 깊이 자복한 것입니다. 이때 에스라는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변할까 아니면 내가 이만큼 기도하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정신을 좀 차릴까? 그것은 외식입니다. 그런 외식 전혀 없이 하나님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의 죄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백성이 이렇게 죄를 짓기까지 지도자인 나는 무얼 한 겁니까. 그러고 하나님 앞에 죽고 싶은 심정이 된 것입니다. 그게 엎드려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뭐라고 그랬냐면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했습니다. 처음에 광고하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거룩하고 아주 인자하고 순결해 보이는 지도자가 단정한 차림으로 성전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옷을 찢으며 그렇게 울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죠. 누가 그것을 해설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며 괴로워했습니다. 이것을 백성들이 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토했으니 이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에스라에게 에스라의 성전 앞은 골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쏟아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에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저분이 왜 저러시지, 왜 저러시지 하고 가서 기도내용을 들어보니까 소리 내어서 기도하는데 아, 하나님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가증한 백성과 통하였단 말입니까?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칩니다. 그러고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면서 그 기도의 음성이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찌른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무엇이냐 하면 남녀의 무리가 많이 모였는데 어린아이들도 모였습니다. 아니 그럼, 어린아이들이 이방 여자들에게 장가들었습니까? 이방 남자에게 시집갔습니까? 애들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이 그 죄를 지은 사람들만 모인 게 아닙니다. 짓지 않은 모든 사람도 똑같이 에스라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슬픔이 전달되어서 같이 크게 통곡했다고 그랬으니 에스라는 울며 기도했는데 이 백성들은 그 메세지를 보면서 통곡하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구약 역사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대각성이 벌어진 것입니다. 커다란 대각성 운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그 죄에 억눌리고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한 사람의 기도의 불씨가 성전 앞에 떨어지면서 그 불씨가 횃불이 되고 모닥불이 되어 타오르면서 이스라엘이 지은 그 끔찍한 죄를 한 번에 다 불태워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큰 탈 없이 교회를 잘 이끌어가는 것, 그것은 목회자의 영광이 아닙니다. 크게 실수를 하고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죠. 그러나 여러분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부름을 받은 목회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지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을 통해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일은 매우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공동체를 잘 살피십시오. 그들의 죄와 허물, 고통과 시련, 모든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전수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나의 잘못 때문이옵나이다. 나를 용서하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며 지체들과 자신의 죄를 자복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흩어져 있어도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기도의 불씨고 사랑의 불씨입니다. 여러분들이 태도를 바꿔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에스라처럼 목회를 한다면 위기에 처한 공동체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생명과 바꿀 수 없는 목회, 그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다 쏟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더 큰 것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물러서면 안 됩니다. 굳세게 서서 모든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다는 각오와 결단 속에서 이것들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