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 교역자 기도회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녹취자: 백지영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말씀을 주고 계신데, 첫째는 선한 목자, 두 번째는 양을 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 그렇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유목사회의 배경을 이해해야지만 이 10장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목축을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곳에서 목축을 하는 게 아니라 유목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철따라 양떼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풀을 뜯기고 먹이면서 가축을 길러서 먹고사는 민족이었는데, 이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하면서 농경문화도 함께 겪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의 땅이라는 것이 지금은 놀랍게 개간이 되어서 중요한 농업 수출국이 되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들이 지나던 광야에 비해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뜻이지 이스라엘 땅이 그렇게 원래부터 농업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포도농사 같은 것들이 아주 잘 되는 골짜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목축을 하는 것으로 다 할 수가 없으니까 양을 키우면서 농업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규모로 양을 칠 수가 없는 사람들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전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몇 마리의 양을 데리고 자기가 거기서 전업해서 직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열 집에서 양이 한 오십 마리씩 정도가 된다고 하면 - 오십 마리, 여기는 백 마리, 여기는 칠십 마리 이렇게 내놓겠지요. - 그러면 양에다가 자기 양이라는 것을 다 표시를 달고 그리고 양을 모아서 한 사람이 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천 마리나 이천 마리쯤 모아서 치게 하고 그 사람은 월급을 받으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돈은 각자 양을 맡긴 수에 따라서 자기가 얼마를 내야 되겠다는 것을 현금으로 낼 수도 있고, 아니면 양이 새끼를 낳으면 몇 마리를 준다고 이렇게 약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삯꾼 목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삯꾼 목자라는 말 자체가, 그렇게 나쁜 짓하려고 일부러 교회에 들어온 사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 그냥 삯꾼 목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볼 필요는 없다 이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당신은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배경에 무엇을 깔고 있느냐 하면 삯꾼 목자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삯꾼들이 하는 행동은 선한 목자와 비슷합니다. 그냥 때 되면 걔네들 데리고 가서 꼴을 먹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밤이 되면 우리 같은 데로 다 집어넣고, 그리고 성경에 보면 양을 헤아린다는 말도 나오잖습니까? 헤아리고. 돌 같은 것을 쌓아서 양들이 점프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집어넣고 그리고 목자는 거기 앉아서 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양의 문"이라 하신 말씀은, 양의 문이라는 게 아니라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입니다. 당신을 통하지 않고는 양이 들어갈 수가 없다 그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양떼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런데 양떼를 기르는 모습에 있어서는 선한 목자와 차이가 없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한 목자는 양을 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양떼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는 다 길러서 그냥 늙으면 부축해서 밥 먹이다가 거기서 죽였겠습니까? 다 양을 길러서 털도 깎아서 팔았을 것이고 또 제사 지내러 가는 사람이 사자고 하면 팔기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그 양떼를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피붙이처럼. 그러니까 털을 깎을 때는 깎더라도, 팔려갈 때는 팔려가더라도. 여기 학익천 갔다 오는데 "강아지 찾아주시면 3백만 원 사례하겠습니다."라고 써 붙여있었습니다. 신통치 않아 보이는 개인데. 그런 마음으로 양떼를 사랑하는 사람이 선한 목자고, 삯꾼은 본질이 돈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는 그 순간 자기는 거기서 일할 아무 가치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가 거기서 여러모로 일하고 애쓰는데 그 궁극적인 것은 자기에 돌아오는 대가입니다. 그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비유를 하고 계시는지 알겠습니까? 그 삯꾼들을 누구라고 했느냐 하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여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황하게 방치했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양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당신이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선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 울타리가 쳐져 있고 양들이 가득 들어가 있습니다. 그 문은 예수님입니다. 양들이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목자도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양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양이 되고, 목회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 바울처럼 변화되어서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목회자 안 되면 사형시킨다든지 너를 괴롭히겠다든지 협박에 못 이겨서 목회자가 된 사람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회자가 실제로 되어서 목회자 길로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삯꾼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대우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넓은 의미에서 모두다 삯꾼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딱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이 종이가 무엇이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됐느냐 안 됐느냐, 그 차이인 것입니다. 그게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선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83년도에 내가 목회를 시작하고 그리고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백 명의 교역자들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사람의 능력이 똑같겠습니까? 여러분, 절대적으로 여러분들의 능력은 절대 똑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 열한명이 노래를 불러보면 제일 잘 부르는 사람 1번부터 12번까지 매길 수 있고, 시험을 봐도 1등부터 12등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또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1등부터 12등까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다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능력이 다 다릅니다. 어떻게 우리가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신이 빠릿빠릿해서 빨리빨리 알아듣고 잘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아주 잘합니다. 여러분도 보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다시 별로 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붙임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조지 윗필드의 매일 점검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붙임성 있게 행동했는가? 오늘.” 그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맡겨도 책임감이 강해서 딱 부러지게 일을 해 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능력이 좀 떨어집니다. 다른 방면에서는 뛰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잘 배열을 해서 잘 하는 것을 키워주고, (그래서) 이 사람 잘하는 것을 키워주어서 이 사람한테는 이 사람이 도움을 받게 만들고, 이 사람한테는 이 사람이 도움을 받게 만들면서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훌륭한 리더입니다. 그런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선한 교회가 큰 교회 목자입니까? 큰 교회도 나쁜 놈들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 작은 교회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까? 작은 교회도 엉터리 삯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작은 교회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규모의 목회를 하고 무슨 일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열린교회 와서 예수 만나고 신앙생활 잘 하는 모든 사람 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뭐든지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을 못해도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가 그 상태에 갇힌 상태에서 평생을 자기가 뭘 하든지 그 수준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증명해 볼까요? 사울이 삯꾼 아니었습니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양떼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사울에게서 읽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경외하는 도(道)도 모르면서 유대주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발전했겠지요. 신학적으로, 인격적으로, 목회적으로, 선교적으로 발전했겠지요. 중요한 것은 결국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벌써 한 15년 넘는 일인데. 언젠가 한번 “자네는 열린교회 오래 있고 내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정리가 안 돼 있나?” 그랬더니 대듭니다. “목사님은 늘 정리 안 됐다고 하는데 제가 뭐가 그렇게 정리가 안 됐습니까?” 모든 교인들이 압니다. 교구의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정리가 안 돼 있습니다.” 생각의 정리가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열린교회 교인들이 여기서 말씀을 먹고 몇 십 년씩 자란 책을 수십 권씩 읽은 사람들입니다. 신학적으로 벌써 딴 이야기를 하는지 아닌지 뻔히 압니다. 정리가 안 됐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됩니다. 그리고 교역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래서 뭘 하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 예배에 집중하고, 은혜 많이 받고, 펑펑 울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매일매일 내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자각하고, 그 속에서 주님과 만나는 기쁨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일 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연애할 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어디 갈까?”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호텔 레스토랑에 가자.” 아니면 “드러누워서 보는 극장에 가자.”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사랑에 빠지면 다 들 “나는 자기하고 어디에 가든지 좋아."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신앙도 사랑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렬하게 신앙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의 스트레스, 그 다음에 뭔가 자기는 잘 못해낸다는 찌그러진 마음, 그 다음에 자기는 뭔가 더 공부를 해야 된다는 이런 억압, 수많은 것에 눌리면서 신앙이 그 안에서 질식돼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생생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 한 번만 들어보면 모릅니까? 저 설교가 진짜 눈물에서 나온 것인지 대충 준비해서 나온 것인지 보면 모르겠습니까? 누가 모르겠습니까? 설교를 못해도 알지만 잘해도 압니다. 열린교회 있던 사역자가 친구 목사님 어느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는데 어느 날 사모님이 날 만나서 그랬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너무 깜짝 놀라울 정도의 설교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서 저 설교가 나 올수 없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왜? 그 날만 그렇게 잘했으니까. 그래서 나오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혹시 그 설교 목사님이 직접 준비하신 것 아니지요?” 뭘 보여주는 것입니까? 사람을 설교를 보고 아는 게 아니라 신앙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왜 그날만 매우 특별한 설교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게, 여러분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신앙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을, 모든 나는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하는 이 억압, 그리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는 좀 능력이 모자란다는 그러한 억압, 나는 정말 아는 게 별로 없고 신학교 때도 공부도 열심히 안 했다는 억압, 이런 억압들을 방치하지 말고 이것을, 두 가지인데 실제로 그렇게 억압만 받지 말고 구체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선배들보다 일하는 게 떨어진다고 하면 내가 어떤 면에서 그런가,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됩니다. 그리고 선배들한테 물어보고. 배우려고 힘쓰면 됩니다. 신학공부가 부족하다, 투덜대면서 세월 보내봐야 3년, 4년 눈 깜짝 할 시간에 지나갑니다. 그러면 2주일에 책 한 권이라도 읽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 되고. 그렇게 하고 자신의 인격이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반성을 하면서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씩 배워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쌓일 때 자신도 모르게 아주 발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만나주시지, 그렇게 놀고 있고 삯꾼 목자처럼 대우나 바라고 물질적인 대가나 바라면서 양을 치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가 된다는 것은 선한 신자에서 선한 목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단번에 목자가 되는 게 아니라(아닙니다.) 아니 기도제목 내라고 하면 다 선한 목자가 되고 싶지 삯꾼이 되게 해 달라고, 유능한 삯꾼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면 안 그렇잖습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좋은 신자가 되는 것만큼 좋은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얘기하는 게, 내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좋은 예배자가 아닌 예배 인도자, 좋은 설교 청취자가 아닌 설교자, 남이 설교할 때는 손톱이나 뜯고 책장이나 넘기면서 맨 산만하게 딴 짓하고 제가 올라가서는 강단을 내리치면서 호통을 치면서 상전 노릇하는 사람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기도회 인도자, 인도하는 시간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결국은 좋은 신자인 사람 중에서 일부가 좋은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배들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선배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인 여러분들을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서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신대원 졸업한 그 해서부터 엄청난 양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들 안 읽는 것 다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나는 거기서 항상 감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여러분 보기에는 성이 안 차도 그런 시간이 나에게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목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스펄전에 대해서 통독을 다해버렸습니다. 스펄전 것은 뭐든지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펄전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니까 큰 감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안 보입니다.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한 목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이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생각이 사람을 통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래서 그 원리도 똑같이 우리에게 그렇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참된 목자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존경하면서 여러분들 같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되어가는 것입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의 얼굴'의 스토리가 그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참된 신자가 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일 못해도 괜찮습니다. 배우니까 늡니다. 진짜 여러분 선배들 중에는 지금은 내가 너무 아끼지만 사실은 한 7, 8년, 10년 전에는 “아휴, 저게 어떻게 교역자가 될까?” 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 “아휴, 저거 큰일 났다. 자기는 저 설교를 설교라고 생각하나?" 매주 월요일마다 내가 나와서 설교를 듣고, 돌아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 날 모였을 때 그 사람의 설교를 이야기를 하고 내가 그 설교를 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 녹음되어서 보존되어 있습니다. 녹취도 되어 있습니다. 그랬는데 - 변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잘 하니까 변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 붙들고 은혜를 받으면서, 진짜 하나님 원하시는 신자가 뭔가 그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그렇게 되어가야 됩니다. 신앙생활 잘 하려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한 목자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열렬히 안 하고 은혜 받지 않고 그리고 그냥 일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삯꾼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삯꾼 목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일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 사람을 불러서 ‘우리 양 좀 맡아주시오’할 때에는, 그것도 선택 받은 사람만 삯꾼 목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삯꾼목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동의 안 되십니까? 청교도 한 사람이 ‘유사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인데 사실은 가짜다 이 이야기이지요. 이것을 읽으라고 주었더니 어느 형제가 왔더랍니다. “목사님 이 책을 제게 주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제가 유사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까?”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모님이 “너는 유사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높은지 아냐? 너는 유사도 안 돼. 비슷하지도 않아. 너는 카운터핏 (counterfeit)이야. 가짜야. 유사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지 유사가 되는 줄 아냐?”
삯꾼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여러분 보십시오. 엊그제 제가 목회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교회도 순식간에 부흥을 해서 한 3천명되는 교회인데 교역자 열다섯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30명도 모자라는데.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교역자들 심방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가면 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문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 가지고 교인들 신앙을 헷갈리게 만들고, 그리고 하여튼 문제를 자꾸 만들어서 심방은 지시 있는 때만 가도록, 그러니까 누가 돌아가시거나 결혼하거나 그 다음에 돌잔치나 회갑 때 그럴 때 가고 못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역자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심방을 누가 다니느냐고 하니까, 권사님들이 다니고 권사님들이 갔다 와서 담임목사에게 보고한다고. 권사님들보다도 못 믿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요즘 교회들은 그렇게 깊은 영적인 것을 요구하는 교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만 똘똘하게 잘 하지 않습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삼성이나 엘지 같은 그런 그룹까지는 말고 그냥 이류기업에서 그래도 '이 자식 일 잘하네.' 이런 소리 들을 정도 되면 모든 교회에서 환영합니다. 대우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리 그런 식으로 훈련을 받아도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양을 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내 양을 알고” 그랬습니다. ‘알다’라는 말이 ‘그노스코’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신비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그노스코' ‘그노시스',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야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래 그 단어는 구약에 처음 쓰일 때 성적인 결합을 가리키는 단어로 쓴 것입니다. 체험적인 앎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람을 안다'라고 할 때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겠어." 그러잖습니까? 그건 뭐냐 하면,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사실은 몰랐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하고 서로 서로 사랑을 받으면서, 혹은 일방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배신을 당하고, 사람 속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안다'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맥락에서 보면 ‘사랑한다'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고”,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두 유비를 말씀하시는데 “나는 양을 알고, 양들은 나를 알아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꼭 무엇하고 똑 같으냐 하면,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똑같다, 내가 양을 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아시는 것이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은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우리를 향해서는 구주의 위치에 놓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자신을 양의 위치에 놓으시는 것입니다. 아주 연약한 아들의 모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결국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핵심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라는 것 그리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냥 아신 게 아니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내가 그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하시면서(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아주셨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부어주신 것입니다. 아주 진한 사랑을 쏟아부어주셨고, 예수님은 일생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알았는데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았는지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면서 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기는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하고, 이런 열렬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일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것 상상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양떼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양은 목자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따르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타이틀은 목사인데 양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타이틀은 목회자인데 예수의 양이 아닙니다. 양은 인간친화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자를 의존합니다.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리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그게 양이잖습니까? 그런데 이름은 자기가 목회자인데 양이 아닙니다. 예수님한테 그렇게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목자 노릇을 하는 것 자체가 허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양의 문이고, 그리고 들어가는 양들도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고 목자도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양은 예수를 통해서 들어갔는데, 이 사람은 양을 치고 있는데 예수를 통과해서 들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문으로 안 들어갔으면 어디로 넘어간 것입니까?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갔다니까 뭔가 돌담 같은 게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그런 모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순이 완벽하게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게 결국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결국은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두 개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목회자여야하지, 자기는 목자노릇은 하고 있는데 양은 아닙니다. 양 노릇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결국은,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간 양들 중에서 목자가 나오는 것인데 이게 소명 자체가, 토대가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말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신학교 지망생들이 없는 때이지만 나 들어갈 때 총신MDV가 20대 1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신학교 있는 학생들 보고 신학교 떠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몰려들어오는 때였으니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읽고 수백 명이 신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그보다 잘 한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일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기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지를 않고 목회를 하면서 자꾸 딴 데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목회가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아실 때 예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면 예수가 우리를 아실 때에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양떼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결국 ‘양을 안다’는 뜻이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을 알게 하는 것도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그 사람을 보면서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보면 은혜 많이 받은 목회자는 은혜 많이 받은 교인들이 항상 옆에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이 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 그런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데 동기는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동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동기가 되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하는 감정 따로 인간을 미워하는 감정 따로 이렇게 나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 순수해지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거기 형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온전히 사랑해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유명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개가 나눠질 수 없는 한 덩어리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양떼들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릴 수 없는 목회자는 누가 대신 불쌍히 여겨서 울어주어야 할 목회자입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겨야 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라고 듣지 말고,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까지 애달프게 이야기해주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다 늙은 사람이 이 밤중에 여러분 열 명 놓고 이야기를 해 주는 게 단지 기도회 인도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앞을 이렇게 바라보면서 오늘도 기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앙과 목회의 일치를 이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목회 잘 하는 부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떼들을 사랑하는 목자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도 너무 좋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1989년도에 교수된 그 다음 해에 7월 달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것 아니었으면 내가 열린교회 목사 절대로 안 됐을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학교에 있었겠지요. 그때 그렇게 깊이 만나고 내가 3년 동안을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가장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수없이 들리는 그 영혼들의 울부짖음과 그런 것들입니다. 교회 가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부교역자로. 교육전도사였었으니까. 그러니까 열렬하게 섬기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목회하는 것이 일치를 이루어야 됩니다. 이렇게 잘하면 목회는 신앙에 도움이 되고 신앙은 목회에 도움이 돼서 두 개가 하나의 판이 되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일로서 따로 돌고, 그다음에 여기는 또 자기 신앙은 자기 신앙대로 도는 것은 가짜 신앙이고 가짜 목회입니다. 이 두 개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때문에 신앙에 도전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그러니까 다시 목회의 새로운 비전이 보이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이 우리 부서에 주시는 말씀은 이것이다”, 요즘 온 성도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 않습니까? 아직 그렇게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움직이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전심전력하려고 할 때, 그때에 그중의 일부가 성도들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움직이고,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겨우 땀을 흘리고, 목회자가 피를 흘리면 성도들은 땀을 흘리고, 목회자가 죽어버리면 그때야 성도들이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의 원리입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할지니라.” 당신 자신이 아낌없이 희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 가지 제목이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선한 목자가 되도록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두 번째는 양떼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에는 양떼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목회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한번 마지막으로 같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선한 목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양떼를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양떼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