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가 되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녹취자: 배미라
여러분들이 열린교회 와서 제일 먼저 배운 말씀이 아마 이 성경구절이 주는 말씀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뒤집어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저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지 않는 자들을 찾지 아니하시느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예배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예배에 대한 방식의 문제는 사실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과는 완전히 방향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분 잘 아는바와 같이 오래전에 국제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피가 외국사람들과 섞여버린 이 사마리아 땅, 앗수르 점령이후의 일입니다. 혈통을 유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아주 불결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지방 요단강 건너 유대지방을 그 이스라엘 지도를 이야기하면 유다가 있고 사마리아가 있고 그다음에 갈릴리가 있는데, 통과해서 가면 쉬운데 그 땅이 더럽다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그래서 빙 돌아서 그 갈릴리로 사람들이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루살렘 예배의 주류에 끼워주질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이 사람들은 모세가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신 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항상 그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원래 제대로 예배를 드리자면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되는데 우리는 갈수가 없으니 이 그리신 산에서 예배를 드린다”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믿었던 그 성경이 ‘토라’, 모세의 율법이었는데, 이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아람어로 읽었습니다. 아람어 성경을 ‘탈공’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보면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책이 나옵니다. 한번 학교 다닐 때 살펴볼 적이 있었는데 사마리아 오경을 보면 아람어로 되어있으니까 아람어를 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읽을 수 있는데 사뭇 다릅니다. 이 맛소라판 오경하고 사뭇 다릅니다. 신학적인 해석을 거기에다가 첨가해서 자기들끼리만 쓰는 오경을 만든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신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이 유대인 랍비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여자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하는 사람이 그 놀라운 생수를 받을 수 있는, 영혼의 생수를 받을 수 있는데,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이 아니라고 하는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저 산에서 예배하고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한다고 하는데 그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런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가 온다. 그런데 그게 바로 지금이다. ” 그러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제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너무 지나치게 해석을 해서 그러므로 모이는 것은 이제 아무 필요가 없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유대인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독특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 이루실 그 나라는 이제 육신의 혈통으로 된 그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육신의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이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새 백성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 올바른 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이것입니다. 이게 새 방식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새 방식의 예배와 대조되는 옛 방식의 예배가 있었습니다. 옛 방식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그리스어로 그대로 본다면 ‘엔토프니마 도 알레데이아’ 라고 했으니까 ‘영과 진리 안에서’ 그러니까 ‘그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진리의 예배라면 옛 방식의 예배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옛 방식의 예배는 이것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그 때는 말하자면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새 방식의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적인 교제였고 일시적인 죄의 용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다시 또 그 율법대로 또 그 제사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 한시적으로 교제의 길이 열렸고 그 문은 또다시 닫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주자주 제사를 지냈던 이유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재단을 쌓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고, 경건했던 욥이나 그리고 솔로몬과 다윗이 그토록 제사에 열심을 품었던 이유도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이 옛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예배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에 “여기에서 이 ‘영’이라는 것은 예배가 육적으로 드려지지 말고 영적으로 드려져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진실로 해석을 해서 거짓으로 마음 없는 헛 마음으로 예배 드리지 말고 진정심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경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하게’ 그리고 ‘형식적인 마음’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말씀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그 정도를 가지고는 전혀 새로운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에는 육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까? 당연히 신령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는 지어먹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받아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받아주십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신령과 진정’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것과 대조되는 ‘신령’, 그리고 거짓된 마음, 혹은 마음에 없는 것과 대조되는 ‘진정’의 뜻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영, 여기서 ‘영’이라는 것은 결국은 여기에 보면 ‘영’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그럼 이 ‘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고 또 우리 예배를 드릴때에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재하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영’이고 우리가 또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육신이 교회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통해 영혼과 교재하시기 때문에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여야된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의 영혼을 모두 포괄하면서 그러면서 영이신 하나님이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므로 우리의 영혼과 사귀는 일이 바로 이것이 올바른 예배 방식의 첫 번째 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세상 사람들의 모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파트 반상회나 예비군 훈련 정신 교육이나 민방위 교육이나 그리고 그 지루하게 계속되던 우리 중고등학교 시절의 종례시간하고 차이가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는 방식을 이야기 하는 거입니다. 그 모든 모임들은 그냥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이고 사람들이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정도가 아니라 여기서는 영이 교통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그런 예배가 새 방식의 예배고,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성령의 역사를 느끼십니까? 예배시간에 성령의 감화를 받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뭐든지 감동적인걸 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하다못해 만화책을 읽어도 받을 사람은 받고 하다못해 텔레비전을 봐도 눈물 흘릴 사람은 눈물 흘립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면 성령의 감화가 있느냐입니다.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개인의 예배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예배생활에 있어서 나 개인이 성령의 감화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이 뜻입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공적 예배라고 합니다. 공적 예배는 사적인 예배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예배는 어느 정도 자율에 속하지만 공적인 예배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피하고 그것을 안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기 싫어도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의무를 저버리고 나면, 의무만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지만, 의무까지도 저버리면 하나님을 향해서 “나는 이제 당신을 막보면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나 건드리지마시오”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화가 나면 엄마, 아빠하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막말을 하면 호로새끼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엄마한테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말을 하면 안 됩니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마음 속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반드시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재주 많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사회보다는 똑똑하지 않고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며 사는 사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능하고 똑똑하고 얼굴 예쁘고 돈 많고 그리고 인사성 밝고 재주 많은 사람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으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거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범죄자 앞에 수사기록을 갖다놓으니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런 인정이 아니라 높이는 것입니다.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고 하는 목적은 좌절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방식으로 예배를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예배 중에 오실지 말지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예배를 예배에 오실지 말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성령이 내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결국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사도행전 5정 30절에 보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지에 대한 답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신앙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새롭게 하소서’에 나오는 어느 스님이었던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절에서 목탁을 치다가 성령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수 십 만명 가운데 한명입니다.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의 충만한 감화를 받을 확률보다는 마음속으로 ‘저의 이 쇠약해진 삶이 성령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제가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한 결심은 끝까지 이어가기가 힘들고 예기치 않았던 악한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비는 그런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옛날에 직원들 보면 가끔 휴가를 내고 기도원도 많이 갔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을 내가 광림 수도원에서 만났습니다. “너 휴가 낸다더니 왜 그러느냐?”, “목사님 내가 마음이 너무 갈급해서 이틀 휴가내고 여기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래 열심히 기도하고 가라.”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분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일찍이 와서 단정하게 하고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아무런 감화도 없고 그리고 내 마음에 열정도 없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배드리러 올 때보다 예배를 끝나고 나니까 좀 더 피곤하다는 느낌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겨우 그따위 결과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입니까?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고 이제 더 이상 전해질 복음이 없습니다. 더는 보내질 장소가, 복음이 전해질 장소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회심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지구 상에 가득 차게 됐을 때 마지막 나타나는 장엄한 그림이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는 사람들이 가득할 때 마지막 펼쳐지는 모습이 뭔지 아십니까? 먹고 입고 마시고 놀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입니다. 예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림이 기쁨이 되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거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연습하면서 그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별로 없는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드려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무엇이 관계가 있느냐? 마음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마음을 사용하셔서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회심입니다.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킬 때에 사람들이 회심을 합니다. 회심을 할 때에 마음 속에서 3가지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인인줄 알고, 내가 죄인인줄 알고, 그리고 그다음에 그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불결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껏 살았던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되겠다라는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못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을 앞에 드리며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없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부터 좋은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어떤 식으로든지 성령의 놀라운 감화가 내 마음에 있어서 예배를 드리기 전보다 예배를 드린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었다는 은혜의 증거가 나타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일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죠.
마지막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심으로 라고 번역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알레데이아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래서 누가 증명해 줄 필요 없이 스스로 자명한 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헛된 마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드려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 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럼 이 진리는 결국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그리고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을 많이 찬송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찬송했으니까 이젠 균형을 잡는 의미에서 이제는 우리 성령님을 찬양하자라고 그렇게 하면서 찬송가를 많이 만들어내고 하는데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지만 성령님의 임무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해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해주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삼위일체 안에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영과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진리도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마음에 풀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고 깨달을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슬픔에 깊이 눌려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시편으로부터 시작해서 선지서에 이르기까지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성경이 예언했는지를 풀어서 설명해주기 시작할 때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뜨거운 사랑의 감동입니다. 그래서 실망과 낙심이 변하여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리와 성령은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역사하되 홀로 하지 아니하시고 성령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하나님편에서, 성령님편에서, 그리고 하나님편에서, 그리고 우리 회중들의 편에서, 설교자의 편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편에서 살펴보자면 예배를 드릴 때에 당신이 이 예배 드리는 사람을 만나주심으로써 예배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예배 방식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고,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진리에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뜻이냐하면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이지만 그 모든 순서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하면 이제 이렇게 예배의 산을 오르면서 최정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기서 성령의 큰 감화를 받고 예배의 산을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예배가 그렇게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야지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그러나 결국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내연 생활을 하는 사람이니 결국은 그의 삶이 그의 예배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릇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예배 하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 속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나고는 회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쓰러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미끄러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예배 드려야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편에서 보면 결국은 이 예배는 당신의 뜻 안에서 당신의 뜻을 알기위해 당신의 뜻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여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 편에서 보면 결국은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고 죽고 부활하신 사건의 입구를 통해서 들어감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그 모든 진리가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세상의 모든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 세계가 갑자기 질서정연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편에서 생각해봅시다. 성령편에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데 모든 예배자들을 성령안에서 예배 드리게 하심으로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도달하시고자하는 목표는 뭐냐면 그 성령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예배자들을 당신 안에서 예배드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설교자에게로 가져가 봅시다. 그러면 설교자는 예배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메신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됩니다. 그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헛된 것들을 전파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거나 혹은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해서 그릇된 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는 엄중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예배자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배자들은 예배에 나오는 궁극적 이유가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예배에 나오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닫지 않고는 결코 그가 진리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이 찾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을 향한 경청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가락에 취하지 말고 그 찬송이 전달하는 가사가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좀 거칠죠.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은 원천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설교는 파생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성경의 토대를 두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잘 깨닫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지지난주에 예배시간에 태도를 고치라고 제가 지적을 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집중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스며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 뚜껑 덮어놓은 항아리에 물이 가득 고이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하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의 말을 듣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땐 별로 의미도 없는 말인데 사랑에 빠지면 그 말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향기를 맡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 말 속에서 향기가 납니다. 그 시간이 너무 감미로운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개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짧으면 짧아서 불편하고 길면 길어서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설교에 있어서 경청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이 경청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표현입니다.
최근에 지금 뉴스에 시끄러운 거 보니까 어느 당 대표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들어오는데 4초 동안 손톱을 매만지고 있었다고 뉴스에 발칵 뒤집어졌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아니 사람이 손톱 좀 만지면 어떻습니까, 손장난 좀 하면 어떻습니까, 뭔 상관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만약에 자기 당사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에 그랬다든지 친구들과 차를 마시면서 손톱가지고 장난을 했다면 문제가 되겠습니까?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들어오는 예식시간 이였습니다. 그런 시간에 그러고 있다는 것은 결국은 봉환되어 오는 유해의 당사자나 심지어 나아가서 국가의 권위에 대한 하찮게 여김에 표시라고 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경청은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산만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산을 떨고 설교시간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끝없이 뭔가를 장난을 치고 그리고 쓸데없는 일을 하고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부작거리면서 계속해서 뭔가 일을 만들어내고 하는 것들은 이런 고백입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당신 별거 아닙니다’ 그 뜻입니다.
저는 가본적도 없지만 옛날에 독재시절에 대통령 만나고 온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네 시간 전에 청와대에 도착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 조사를 하고 교육을 받고 그다음에 수색을 다 하고 그리고 십분 대통령을 만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가 어땠을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날은 예배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극장에서 개봉영화 기다리는 사람들이 훨씬 경건합니다. 준비성이 있습니다. 십분 전에는 도착합니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중 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이제 영화 상영만도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
그렇게 진리를 깨달으려고 깊이 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가 지난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도저히 교회 나와도 은혜를 못 받던 자매에게 4주 동안만 예배에 나오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럼 너 고향으로 돌아가라 내가 그랬습니다. 2주 만에 회심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 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한 설교자,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진리를 깨달으려는 예배자, 그들의 만남에 축복해주시는 성령의 오심, 이것이 결합될 때에 그때에 한 번의 예배는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를 받으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건강도 더 안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좀 쉬고 챙기고 하십시오. 우리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서 마지막에 이루고자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같은 예배자들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김목사가 이렇게 28년동안 애쓰는 것도 나같은 예배자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 여러분 같은 예배자 만들고 싶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여러분처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먼저 훌륭한 일꾼이 되기 전에 아주 아름다운 예배자가 되야합니다. 그러면 어디가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매주 깨닫는 것이 있고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피의 펌프질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예전에 없었던 영혼의 활기를 넣어주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