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가지 소원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쓴 시입니다. 시인은 자기 인생에서 겪는 극한 고난과 시련의 가시밭길을 통과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31편 속에 흐르는 시인의 정서가 일관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시련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보고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토로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자기의 심경을 토로하며 왜 도와주시지 않는지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정서의 변동을 하나로 관통하듯이 정리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만 시편 31편을 읽는 묘미는 시편 31편 안에 있는 시인의 정동이 차라리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그대로 보고 읽는 것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보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시련을 만나서 매달립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아주 지독하게 나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왜 하나님은 저런 사람들을 징벌하지 않으실까?’ 정확히 말하면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지만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마음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게 됩니다. 특히 시련과 환란을 만났을 때 인간이 어떻게 그 마음이 요동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곳에는 의심이 없고 신앙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불신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공존하고 이리저리 쏠리면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31편을 읽으면서 그렇게 일관성 없는 시인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한 성인으로서 나에게 다윗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탁월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나와 똑같은 인간, 믿음으로 살려고 하다가 때로는 불평도 원망도 있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 겹치고 있는 시인의 내면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1절을 칭찬할 만한 올곧은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큰 환란과 시련을 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자신과 언약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향해 신실하게 선택하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마지막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칭찬할 만한 것은 큰 환란과 시련 속에서 기본적으로 그는 주께 피하기를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할만한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피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늘 다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상황이 불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간 곳은 산성입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파른 곳에 산성이 세워져 있고 그리로 피하고 굳게 문을 닫고 성 안에서 있는 것, 많은 병력을 동원해도 산에 있는 그 성을 공략하는 것은 적군에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란을 만날 때 여호와께 피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시련과 고난을 당한 당신의 백성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의 본성을 배워갑니다.
Ⅱ. 주께 피하는 자의 소원
이 시인이 그렇게 주께 피하면서 하나님께 비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A. 부끄럽게 마소서
첫째는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시련 속에서 많은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영광스러운 명예와 그리고 괴로운 수치를 함께 경험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이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사울은 자객을 풀어 다윗을 추격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추격하려고 하니, 다윗에게는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는 칭송소리를 들으며 사울은 엄습하는 두려움과 혀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 다윗에게는 커다란 죄가 뒤집어 씌워졌고 그래서 자객을 풀어 밤이나 낮이나 시인을 추격하였습니다.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끔찍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잡히면 처형당할 수밖에 없는 수배자의 몸이 되어 도망을 다녔습니다. 이 수치는 그 다음에 일어난 수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반란을 두 번 경험하였습니다. 두 번 모두 수치스러웠지만 아들에 의해 일어난 반란은 더 큰 치욕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다윗을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라 주장했고 그는 변명할 말도 찾지 못한 채 자기를 비난한 사람을 징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망명의 길로 올랐고 그리고 그 모든 수치와 욕을 뒤집어썼습니다. 여러 곳에서 그는 그의 수치스러운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백성 누구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고대 왕국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비록 하나님의 종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종보다도 못하게 여기며 그를 욕보였습니다. 한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그 희망이 끊어지지 않고 살게 하는 것은 존중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가치가 있고 여전히 의미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고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그 존중감이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러한 존중감이 짓밟히는 경험을 인생 속에서 수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온 것 밖에는 없지만 원수들은 그에게 온갖 누명과 추문을 뒤집어씌우고 그를 수치스럽게 하였습니다. 무슨 환란인지 알 수 없으나 큰 시련을 만나며 이전에 겪었던 기억들이 트라우마처럼 작용하면서 하나님께 피하면서 원수들을 박살내 달라거나, 아니면 도피한 가운데서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물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제일먼저 입을 열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옵소서”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잠시 부끄러울 수는 있나이다. 그러나 영원히 나를 수치스럽게 하지 마옵소서. 나의 정당함을 언젠가는 하나님이 밝히 증명해 주시옵소서.”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 다른 것은 제가 모두 할 수 있어도 간곡히 비오니 제 생애에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이 환란 속에서 나를 지켜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저는 전자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시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인간이 잠시 수치스러워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수치와 치욕이 자기를 온전하게 하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자의 해석이 사실 가깝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 해석이 훨씬 은혜롭습니다.
(찬양)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담고 행할 길을 다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중에 나아갑니다
그렇습니다. 며칠은 더 눈물 흘림을 당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불완전하고 인간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지혜를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의 해석을 택한다면, 시인은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을 것을 받을 줄 알지만 하나님은 나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놀랍도록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제가 며칠은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옵소서. 그것은 악이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련 중에 사람들이 종종 좌절합니다. 깊은 시련 속에 큰 영적인 침체가 올 때 우리 속에 무너지는 부분들은 자기 존중감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만나 영적인 깊은 침체를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걸어온 모든 일이 부끄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감정도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빛으로 우리를 비춰보았을 때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걸어온 인생의 많은 길이 실수와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하나, 그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 하는 믿음이 있을 때 그러한 자신의 결함을 발견하였을 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살아온 것이 수치뿐이고 걸어온 모든 길이 너무나 많은 잘못된 길이었고 나 자신도 하나님 앞에 깨끗하지 못한 불결한 사람이니,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향해 살고 싶사오니 나를 이대로 버려두지 마시고 나를 도와달라는 간절한 탄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자기 인식입니다. 그런데 시련과 환란을 만나서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서 미끄러진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몰입되어 들어갑니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빛으로 오는 자기 인식은 인간을 좌절하게 하나, 좌절하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육으로 살려고 하는 성품의 좌절이고 그 좌절은 영으로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는 간절함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후자인 경우 이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야기합니다. “나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그런 사람들을 그대로 한숨 쉬면서 받아주면 안 됩니다. 말하는 사람들 속에는 아주 강력한 부인을 요청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이 당신을 이제껏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삶에 죄와 허물, 그리고 무능한 어떤 부분들을 발견하며 그것을 괴로워하며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훌륭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은 자기를 사용해 오신, 자기를 붙들고 섭리해 오신, 자기를 선택하여 거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불신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자신이 말하는 결점과 모자란 점을 “하나님이 고쳐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간절히 매달리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러한 식으로 인생을 생각하게 되면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기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닙니다. 그게 성령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겠습니까? 기쁨과 감사, 이렇게 모자란 사람인데도 하나님이 사용해주시고,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오신 것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는 자신에게 돌리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의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스스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예절입니다.
시인은 시련 중에 자신의 명예를 짓밟는 험악한 대적자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 그가 잘못하여 하나님이 그를 때리시는 징계를 베푸시는 중에도 언제나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때리시고 책망하시지만, 언제나 시인의 자존감을 지켜주시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잠시 우리가 수치를 당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호해 달라는 간구,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살아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나를 건지소서
마지막, 두 번째로 “나를 건지소서” 시인은 말합니다.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공의는 ‘찌드카데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의롭다’라는 말에서 유래되고 이 ‘의’를 가지고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오늘 그것을 공의라고 부릅니다.
‘의’는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세우신 법에 어긋남이 없이 당신 자신이 정확히 맞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완벽한 동의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과 그의 행실이 그리고 말을 태어나게 한 마음이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사람을 향한 신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 스스로가 세운 우리의 법을 우리 스스로 어깁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모순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의에 반하는 행위나 혹은 결정을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사에 대한 최종적인 도덕적인 판단이 주님께 달려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주님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시인은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다. ‘주의 공의로’, 정확히 말하면 ‘주의 의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님이 당신의 정의로 판단을 내리실 때에는 자신이 혜택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해 그림자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써 판단을 내리시면 언제나 자신이 혜택을 입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람은 최소한 우리가 하는 말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판단을 내리시면 언제나 자신이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확실하게 이 세상에서 돌아가는 모든 모순된 일들과 도리에 어긋나는 수많은 일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시련을 겪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움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떠한 판단을 내려도 ‘나는 티끌만한 죄도 없나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올바른 의로써 판단을 내리시면 자기를 비웃고 도전하는 악한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내려질 것이며, 그리고 자신에게는 올바르다는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티끌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부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 공평한 판결에서 자신이 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일생동안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하였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완전하였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이러한 시련의 때에 단 한 번의 간절한 기도를 위한 준비운동과 같습니다. 시인이 그렇게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그리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일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련을 당하였을 때 ‘주의 의로 판단을 내리신다면 내가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결국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하고 삶의 품질은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그 품질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삶은 기도 속에 갇히고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둘은 항상 삼투압의 법칙처럼 균등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저앉는 그 결정적인 지점에서 어떤 사람은 온 마음을 실어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긴 세월동안 그 기도에 어울리게끔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모든 삶은 한 순간의 기도를 위한 준비이고 한 순간의 기도는 남은 모든 인생의 날들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큰 시련의 때에 구차하게 세상의 방법으로 이 시련을 피해보고자 너저분한 세상적인 방법을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시련 속에서 여호와께 피하기로 다짐하였고, 잠시 악인의 죄악 때문에 발생하는 수치스러운 시간들을 기꺼이 견디기로 각오하였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은 자신을 영원히 부끄럽게 하시지 않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호소하였습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여호와를 부를 때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시련과 환란을 만날 때 신자가 피할 곳은 어디입니까. 주님의 품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불결하고 더러운 곳입니다. 거기에서 신자는 신앙의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의 품격도 상실하게 됩니다.
시인은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이것은 시인의 위대한 믿음이 아니라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환란과 시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찾아야 할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가슴쓰리고 아픈 일을 경험하게 하시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꽃길만 걸어가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오묘한 섭리와 사랑, 은혜를 배우게 하십니다.
어제 목사님들 몇 분과 모여서 밤늦게까지 살아온 이야기, 목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공통적으로 도달한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좋은 것을 언제나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고 고백했던 시인처럼 말입니다.
시련과 환란이 와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피할 바위요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원수들은 독한 말로 우리에게 화살을 쏘고 그 입술에 독을 묻히고 우리를 향해 악담을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산성같이 거기 계셔서 당신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시고 그 날개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십니다. 악인이 범접할 수 없고 악인이 해칠 수도 없게끔 하나님이 산성처럼 자기를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여호와는 …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라고 자주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을 만날 때 주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부끄러울 수 있으나 하나님이 영원히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시련을 만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건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하신 모든 백성들을 향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련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