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1. 서론1:벧브올 맞은편에서 선포된 율법(신4:44-47) 1996.1.28 주일오전 1
2. 서론2: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라(신 5:1-3) 1996.2.4 주일오전 14
3. 하나님만을 섬기라(시115:4-7;신5:4-7) 1996.2.11 주일오전 27
4. 우상을 버리라(신5:8-10;출32:1-6) 1996.2.25 주일오전 41
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살라(신5:11) 1996.3.3 주일오전 49
6.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신5:12-15) 1996.3.10 주일오전 59
7.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5:16) 1996.3.17 주일오전 67
8. 살인하지 말라(신5:17) 1996.3.24 주일오전 77
9. 간음하지 말라(신5:18) 1996.4.14 주일오전 87
10. 도적질하지 말라(신5:19) 1996.4.21 주일오전 98
11. 거짓증거 하지 말라(신5:20) 1996.4.28 주일오전 106
12. 탐하지 말라(신5:21) 1996.5.5 주일오전 112
1. 서론1: 벧브올 맞은편에서 선포된 율법(신4:44-47) 1996.1.28 주일오전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이 이러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증거하신 것과 규례와 법도를 모세가 선포하였으니 요단 동편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라 이 땅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에 거하였었으며”(신4:44-47)
오래 전부터 마음은 먹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설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주가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 주에 걸쳐 서론을 하고 1계명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 오늘은 첫 시간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이상한 느낌이 하나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이 하나인데 이것이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신명기에도 또 나옵니다. 왜 두 번씩이나 나오느냐하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과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이 다른 것은 아니고 같은 것인데 모세가 두 번을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한 번은 시내 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생명을 건 기도를 하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주셔서 돌비에 새겨진 말씀을 주시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였고 그리고 또 한 번은 오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은 광야생활을 시작하기 직전이었고 두 번째는 광야생활을 끝나갈 무렵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운명하기 직전 이것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 번 보십시오. 44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이 이러하니라. 4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나온 후에 증거하신 것과 규례와 법도를 모세가 선포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라는 말에서 신은 거듭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십계명은 이미 돌 판에 새겨져서 이스라엘 법궤 가운데 보존되어 있었고 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고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모세가 운명하기에 앞서 이것을 다시 한 번 세세하게 알려주는 이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어도 잊어버리거나 혹은 마음에서 떠나가 버리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그 말씀이 그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고 마치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늘 돌지만 지구와 한 번의 부딪침도 없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전혀 알지 못했던, 평생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도대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던 일들을 새롭게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의 거룩한 계획을 보이시고 우리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반복의 연속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훌륭한 신앙도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반복을 사람은 다르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반복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올바르지 못한 불신앙의 행위도 반복됩니다. 거기에 대한 평가도 역시 반복됩니다. 그렇게 구약이 끝나고 신약은 구약을 회고하면서 반복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또 들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방법으로 이런 일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을 나온 후에 증거하신 것과 규례와 법도를 모세가 선포하였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그 율법 하나 안에 이미 증거와 규례와 법도와 같은 많은 내용들 히브리 원문에는 이것들이 모두 복수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중심으로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말합니다. 수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일러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언제 일어났느냐 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온 후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도록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무슨 의무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워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돌아보사 너희를 불쌍히 여겨서 너희를 이 억압받는 비참한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모든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엄청나게 기쁜 감격이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하는 것은 땅이 없기 때문에 왕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어주시고 그 땅을 가나안에 정해주시고 거기서 심지 않은 과일과 포도나무와 감람나무 열매를 따게 하고 그 땅에서 이제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거나 종살이하지 않고 완전하게 정착된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귀가 훤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번의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만이 진짜 하나님이시구나. 그렇게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모든 애굽 백성의 환송을 받으며 유유히 애굽 땅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미래를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고 있을 때 애굽에 날라 온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는 이 소식은 어둠 속에서 찬란한 희망이었고 빛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예수를 믿기 전에 죄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행복에 들뜨고 더 이상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없고 그냥 가만히만 내버려두면 나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도 자기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는 직전에는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면 자신의 육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심각한 영적 삶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노예 되고 포로된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영적인 상태 그러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있고 진정한 삶의 기쁨과 의미도 모른 채 살아가는 생의 무 목적함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의 인생의 그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된 구원을 받기 전 우리는 깊이 마음속으로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 속에 진정한 변화가 필요하고 구원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구원의 경험 없이 자신도 모르게 거듭나서 주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철저하게 부인하며 신앙은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몸부림치며 살아 왔는데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고통이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의 빛이 비췰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불현듯 눈을 떠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치하에서 노예살이를 하면서 오랜 동안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원 그리고 너희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이 있다는 것과 가나안의 축복에 대해 말해주시기 전까지 그렇게 애굽의 고기 가마 옆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고기를 다 퍼주고 자신은 국물이나 먹는 것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나서 자신이 이렇게 포로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듯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기 전에 그러한 일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각성시켜 주시자 자기의 이런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고 죄 가운데의 삶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 위해 부활하신 능력으로 오늘도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나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큰 기쁨과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계속해서 누리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손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 감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이었는데 자기를 430여 년 동안이나 억압하던 애굽의 군대를 다 쳐부수고 애굽의 위풍당당하던 군대를 바다에 다 쓸어 넣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광야 길을 나설 때 그 감격은 여러분들이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일제 강점기 때 해방되어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울며불며 땅을 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겨우 36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430년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가 받은 피해와 만행이 엄청나게 큰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학대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 막판에 가서는 어떤 일까지 일어났습니까?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것이 법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고 배가 또 부르면 산모들은 근심합니다. 이 아이가 여자아이여야 할 텐데……. 낳아보면 남자아이입니다. 얼굴도 보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다가 단지 잠깐 휴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를 속박하고 구속했던 이 애굽의 땅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결별만 하고 정처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입주할 아파트를 가나안에 다 지어놓고 그것을 분양해 주시겠다고 지금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동네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두 종류입니다. 그냥 신이 나서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은 많은 평수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숨을 내리쉬면서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은 쫄딱 망해서 삭 월세로 이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간 곳이 홍해를 건넌 후 시나이 반도로 들어갔습니다. 시내 산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 들어가서 9개월간을 머물면서 하나님이 행군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하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가지고 있었던 더러운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털어 버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세가 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것은 겁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오라 오기만 하면 내가 너희에게 아직 미분양 상태에 있는 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리라 할렐루야하며 뛰어 나왔는데 모세가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더니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하나님의 축복과 칼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젠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점을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물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해서 저주를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감격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 구원의 기쁨을 속히 잊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을 숙명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번 좋았다가 그 다음에는 다 털어먹고 ‘손들고 옵니다.’를 되풀이하며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공식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감격을 누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즉시 만나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자녀라는 사실들을 놀라운 기쁨과 은혜 속에 감격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이 그렇게 구원받은 다음 즉시 알아야 할 사실은 이제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규칙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에 행복과 하나님의 자녀된 분복에 대해 언제나 감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구원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들을 너무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부르셨고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그 피로 여러분들을 빼내셔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과는 다른 사람들로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전에 믿어질 수 없었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게 되었고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냐 그럴 수 없어 내가 구원은 받았지만 내가 신앙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 이것은 지금 신앙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 생겼을 때 그 때 내 삶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는 그 덕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 아버지의 말에 전혀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며 불순종한 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마디로 아버지가 있으나 아비 없이 살아가는 자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의사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아간다 해서 하나님이 무슨 체면이 깎이거나 아니면 손해를 입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규례를 주시고 증거하시는 것들을 주셔서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반복되고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제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그래서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온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규례와 규칙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교훈과 가르침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저버리고 내 맘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무겁고 억압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방종한 학생들에게는 학교의 규칙이 한없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범생에게는 학교의 규칙처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죄라고 하는 이 세계로부터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광야에 나오자마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명을 받고 그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계명을 지킬 힘이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 얘기할 것이 아닙니다. 나중 문제입니다. 다 살고 난 다음에 내가 정말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지만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을 터인데 이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면 살아라.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너희들의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너희에게 원하는 뜻이 이것이었다. 그리고는 십계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십계명의 반복된 선포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한 번 보십시오. 46절입니다. 요단 동편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일어난 일이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벧브올이라고 하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아니 그 전에 앞서서 이전에 선포했던 십계명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 모두 앞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흘러가서 첫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습니다. 죽었지만 그러나 그 설교를 조상을 통해 들었던 후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했습니까? 이 반복된 선포를 들으며 지루하다고 하품하며 도시락 먹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두려움과 엄위하심 속에서 이제 가나안을 정복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선포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교훈을 향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따로 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한 장소가 어디였느냐 하면 벧브올 맞은편이었습니다. 이 벧브올이라고 하는 곳을 여러분들은 기억이 잘 날지 모르지만 이곳은 바로 무엇을 하는 곳이냐 하면 바로 바알브올의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바알브올의 사건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 발람 선지자와 관련되어 나타난 모압의 왕이 발락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발락이라고 하는 왕이 발람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찾아와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이미 소문이 많이 나 있는데 요단강이 흘러가고 이쪽에 암몬이 있고 가운데에 모압이 있고 밑에 에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야 합니다. 어느 길을 택했냐 하면 위에 암몬이 있고 모압이 있는데 그 사이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이 땅을 지나면서 이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잘 타협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에돔과 암몬과 모압을 통과하게 되는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모압과 암몬이 있는 그 사이의 헤스돈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그 때 헤스돈 땅의 시온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요구했습니다. 이곳을 건너가게 해 달라 그러면 건너가서 가나안을 점령하겠다. 그랬더니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온 땅과 위로 쳐 올라가서 바산의 왕 옥까지 완전히 피 비린내 나게 진멸을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준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기 직전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일이 일어납니다. 마지막 큰 시련이었습니다. 모압 땅을 향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모압 왕이 발람에게 사람을 보내서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면 좋겠다고 그럽니다. 싫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더 많은 재물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발람이라고 하는 이상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힘으로 저주해서 진멸할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묘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와 간음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해서 그 죄에 빠지게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아마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너희들은 어부지리 격으로 승리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바알브올이라고 하는 곳에서 이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들이 이 바알브올이라고 하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축제를 엽니다. 거기에 말하자면 미디안 사람들을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령에 속하는 사람들을 초빙하는 것입니다. 오라고 해서 와서 함께 우상 숭배하는 곳에서 커다란 음행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우상 숭배하는 예배의 순서 속에 음행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상했던 대로 엄청나게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면서 결국 24000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칼날에 피 흘리며 쓰러지는 심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동편 벧브올 맞은편에 딱 서서 벧브올이 보이는 곳을 바라보며 그 십계명의 선포를 다시 한 번 듣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하나님이 왜 그 수많은 장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벧브올 맞은편에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러한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계명과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이적의 역사를 보며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전쟁을 경험하며 이렇게 가나안 땅 앞에까지 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역사적인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벧브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곳이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심판하셨고 우리의 백성은 그 진노의 심판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기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의 계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능가하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 시대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 아무도 자신의 의와 공로로 구원 얻은 사람이 없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리신 그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와 허물과 죄악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가 진정 사죄의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 죄인중의 괴수라도 받으시는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같은 죄인 부르셔서 자녀 삼으시고 후회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오늘도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거나 간음을 하거나 혹은 이웃의 물건을 도적질한다고 해도 구약시대처럼 이렇게 누군가 칼을 들고 나와서 사람의 목을 베고 지나가거나 땅이 갈라져서 그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거나 불 뱀이 와서 우리를 물어서 광야에서 죽어가게 하거나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징벌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놀라운 영적 의미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십계명을 해설하면서 여러분들이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이제 아주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속에 담겨진 보다 심각하고 깊은 복음적 의미를 끌어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영적인 형벌이 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죄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어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곤고함이 있습니다. 사죄를 받지 못하는 영혼들의 그 고통, 여러분, 죄로 말미암는 그 곤궁함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즐거움과 기쁨은 죄로 말미암아 박탈됩니다. 계명을 어긴 사람들은 오히려 옛 시대의 사람들이 받았던 것 보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 견디기 힘든 영적인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받았지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믿고 방종하게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에는 이전에 구원받기 전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찾아옵니다. 영적인 아픔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자유하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지만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대의 행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두 갈래의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마주서서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명을 들으면서 오직 두 개의 선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이 율법을 전심으로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이 율법을 버리고 벧브올에서 죽어갔던 바알브올의 참여자들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삶을 살 것인가? 두 개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태도를 분명하게 해보십시오. 신앙의 태도를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한 번 정해 보십시오. 새롭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모든 교훈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을 빌어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강 건너 저편에서 너희들이 섬기던 그 아모리 족속과 이방의 많은 원주민들의 신을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둘 다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오늘 똑같이 모세로부터 선포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런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늘날 너희 자신이 누구인가 나에게 분명히 말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냐 세상의 자녀이냐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이제 너희는 택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내게 말하든지 구원은 주님 맘대로 하셨지만 살아가는 것은 이제 내 맘입니다. 하고 불순종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 주님 꼭 그렇게 흑백논리로 나가셔야 되겠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흑백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결단을 하라 만약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준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구원은 당신 맘대로 하셨지만 살아가는 것까지는 참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맘입니다. 너희들이 만약 그렇게 살아간다면 너희는 벧브올을 기억하라. 바알브올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애굽 땅을 나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 맘대로 하셨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제 내 맘입니다.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너희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너희는 바알브올을 기억하라. 그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은혜의 시대에서 율법의 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방종하고 태만합니다. 자기 맘대로 입니다. 규칙도 없습니다. 그리고 규칙이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만화책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 오늘 다수결로 합시다. 손을 듭니다. 주님이 저기서 얘들아 그러는 것이 아니란다하며 손을 드시니까 사회자가 하는 말이 주님 좀 가만히 계셔요. 당신도 한 표입니다.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세상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무엇인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의식이 없는 사람이고 무엇인가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규칙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체성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고 거슬리고 규칙을 깨고 변칙을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개성과 주체성이 있는 인생이고 의식이 있는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풍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물려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찮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교통법규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나는 너희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을 교통순경이 떼는 삼 만 원짜리 딱지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맘속에 되풀이되는 변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누가 다 그렇게 살아가겠는가. 세상을 봐라 누가 그렇게 살아가는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방종하고 막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 위에서 즉시 시내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를 깨달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값싼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그 구원 속에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이러한 구원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마다 이렇게 옛날의 습관대로 방종하게 살아가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며 살아가기 좋아하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다시 한 번 못 박고 우리를 위해 자기의 기뻐하는 바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편한 길을 포기하고 불편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길을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힘으로 구원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주 앞에 고백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주어졌지만 그 은혜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방종하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소속된 친교 단체의 회칙을 지키는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이 시대의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근동의 세계에서 충격적인 계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형상을 만드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너희는 만들지 마라. 무엇을 보여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형상을 놓게 자기 신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형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렇게 형상화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를 통해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남의 아내를 빼앗고 노비를 탐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너희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 시대에 바르게 살아가는 한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이 우리에게 너무 무겁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이미 애굽 땅을 떠나왔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맘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안은 두 개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설교되는 이 율법을 들으면서 선명하게 두 가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축복된 가운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방종하게 살다가 바알브올의 사건을 통해 징계를 받은 조상들처럼 그렇게 비참한 길을 갈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이 없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살아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방종한 사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법을 지키는 것만큼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하철을 오르내리며 교통순경 하나만 있고 지하철 직원 하나만 있어도 질서정연하게 좌측통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거리에서 신호등 하나 깜박거리는 것에 따라서 수천 대의 자동차들이 섰다 가는 것을 보며 일정한 방향으로 물줄기처럼 흘러가고 있는 질서정연한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 질서는 놀랍게 흘러가고 있고 무질서는 오히려 부분적인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우리 인생을 본다면 그런 것이겠습니까? 분명히 안 된다고 율법이 빨간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격 앞으로 하지 않습니까? 사고가 나서 차가 뒤집힌 다음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을 만났다고 자랑하며 다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역사 속에서 율법을 통해 좌회전 신호를 켰을 때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직 그 신호 때문에 좌측으로 통행하고 있습니까? 파란 불이 들어 왔을 때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백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직진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살이가 높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 다 보실 때에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멋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에 세상에서 배웠던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질서와 규칙을 따라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방탕하게 방종하게 자기 맘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고는 이제 더 겁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하여 이전보다 더 자기 맘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축복하시고 은혜를 주실 수 있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더 심각하게 갈라놓고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고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굳어진 심령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시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계명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여건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환경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직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방종한 옛 성품 때문에 주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신앙의 삶을 돌려 드리지 않는 불신앙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요단 동편 벧브올 골짜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낭랑하게 들려오는 이 모세의 권능 있는 십계명의 선포를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하찮게 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맞은 24000명을 우리가 이 벧브올에 묻었거니와 우리는 이제 다시는 저들과 같이 다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이 율법을 지키며 살자. 그들은 우리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살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데 누가 우리에게 그 계명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줄 것인가 어느 때 그러한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계명을 지키게 만들어 줄 것인가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율법을 지키게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받은 구원받고 주님 앞에 구별된 백성이니 우리는 옛 백성들의 모습을 따라가다가 칼에 맞아 죽은 240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명예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 우리의 즐거움은 그 말씀대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심각하게 결심하게 하신 다음에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벧브올 골짜기 맞은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10장에서 고린도교회의 모든 음행과 악행들을 소개하면서 역사를 회상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많이 죽었으니 우리는 다시 이와 같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옳도다. 역사를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 마음을 다짐하고 오늘 이후로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신앙의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내가 그 두 편 가운데 한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러나 내가 주님을 버리고 어떻게 바알브올의 사건에서 징계를 받은 그 징계를 받고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나는 그 편에 서서 모세에 의해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심각하고 엄숙하게 듣고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를 지키며 살아서 주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지만 구원해 주실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거셨던 그 계획을 온전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며 이 벧브올 맞은편에 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이 어떤 땅이냐 하면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온을 쳐서 멸하고 이어서 바산의 왕 옥을 쳐서 멸한 그 땅 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벧브올의 그 땅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로 심판하신 피 비린내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던 곳임과 동시에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당대의 강력한 나라인 헤스본의 시온과 바산의 유명한 왕 옥을 쳐서 멸망시킨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곳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간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정말 그렇구나.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율법을 지키도록 초청하고 있지만 그러나 칼날을 들이대면서 안 지키면 너는 죽음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 이렇게 협박하며 여러분들을 만약 십계명으로 부르신다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겁나서라도 십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그렇게 심판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이 헤스본 왕 시온과 바산의 왕 옥, 자신들의 힘으로는 넘어뜨릴 수 없는 이 거대하고 강력한 나라의 왕들을 모두 꺾고 강건하고 견고한 도성들을 초토화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경험한 바로 그 땅에서 이 십계명이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십계명을 우리는 두 가지 각도에서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지키려고 노력을 하다가 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놀랍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인생을 살아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한없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로 시온과 옥을 깨뜨린 이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상되는 의미 깊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말할 때마다 역사가들은 언제는 이 헤스본 땅에 있었던 시온과 옥과의 전투를 떠올렸고 바산왕 옥을 깨뜨렸던 위대한 역사는 가나안 땅에 숨어있던 여리고성에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흘려 기도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찢어 우리를 구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땅에서 여러분들을 죄의 사슬에서 건져주시고 사망의 올무에서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찬송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때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2. 서론2: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라(신 5:1-3) 1996.2.4 주일오전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言約)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5:1-3)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십계명에 들어가기 전에 두 번째 서론의 시간입니다. 오늘 읽은 부분부터 십계명 바로 앞 절까지는 이미 44절에서 모세가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선포하였다고 하는 말씀을 반복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면서 살아야할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교훈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이 장면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온 이스라엘을 불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겠다고 목숨을 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이롱 신자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누군가의 권유와 강요에 의하여 어찌할 수 없이 끌려온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느끼는 것이 없이 그렇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주일이면 자동적으로 교회 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러한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세상살이에 바쁘고 피곤하고 시련과 환난이 겹쳐서 말씀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율법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키며 살만한 사람에게만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에게만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심의 수준이 어떠하든 그들이 놓인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팔로 구원을 얻고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가나안이 보이는 요단강 맞은편에 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그 모든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오랜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연로한 사람들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까지도 불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셨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주인노릇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믿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나라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것도 철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 와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우리에게 패역이요 불순종이요 하나님을 향한 배반이요 악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얼마 되지 않는 광야 길, 한 달이나 한 달 반이면 지나올 수 있는 그 광야 길을 지나며 숱한 사연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모세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쯤 되어서는 모세가 맨 처음에 애굽에서 출발하여 시내 산으로 갔다고 그랬죠? 호렙에서라고 했는데 호렙과 시내는 어떤 관계이냐 하면 학자들이 생각하기를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시내산은 넓은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렙은 그 중에서 바로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한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율법이 선포되고 있지만 첫 번째 원판을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렇게 몇 사람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모세까지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출생한 신세대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던, 애굽을 감격적으로 출발하고 홍해에서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하던 병거들이 모두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놀라운 역사적 광경을 목격했던 그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못 들어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고도 복된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했던 유일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시고 지금 이 시간도 인생의 생과 사와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야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무는 여러분들의 돈독하거나 돈독하지 않거나 혹은 여러분들이 교회의 훌륭한 직분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그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안 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도 주님의 놀라운 손으로 구원을 받고도 구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법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규칙대로 인생을 살지 않을 때 그 인생에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쁨도 없습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고달픈 인생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값지고 고귀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빈 손들고 앞에 나아갈 때에 그 하나님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음의 진정한 평강을 잃어버리고 기쁨과 진지한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우울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언제나 평강이 없고 곤고한 고통이 깃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감히 자신이 욥과 같이 무죄하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평안이 깨뜨려진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불안과 고통과 번민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규칙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주님을 잘 믿었던 사람을 단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라고 말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랑했던 깊이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깊이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준행하며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말씀대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를 교훈하시고 나를 바꾸시고 내 인생을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 모세가 다시 한 번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새로운 세대들을 유서 깊은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12000명이나 죽었던 생생한 역사의 추억이 서려있는 현장 맞은편에 이스라엘 백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도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단다.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목사님 아버지의 취미-목사님을 데리고 고향의 선산을 다니시는 것-목사님은 너 무 싫어했음-살아있는 사람도 못 돌보는 처지에 8대 9대조 할아버지의 묘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음-효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 해 달라는 대로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닌가. 라고 생각-종중의 회의가 있는 날 임시 서기를 맡았음-산소를 돌아다님-뵙지도 못한 분인데 아버지는 내력을 줄줄이 소개하심.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놓고 이 계명을 다시 한 번 들려주는 이야기는 옛날에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단다.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것을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왜 저를 여기 세우셔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주일마다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 그런 것이 있구나. 하나님이라는 할아버지는 그런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한 번 여러분에게 알려 주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 외에 이런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계명을 주시는 것은 그러한 계명도 있고 삶은 또 따로 있어서 우리에게 그 계명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법이 따로 있고 단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것은 그렇게 살면 좋겠다. 그런 뜻이지 우리 모두를 향해 살아라.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에게 이러한 생각이 있고 하나님이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너희들이 이랬으면 참 좋을 텐데 못살아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켜서 너희는 이대로 살아라. 이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가만 두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해도 좋으십니다. 우리에게 그 정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풍성한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는데 이 계명을 지키며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 말씀을 순종하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하나 받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쉼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가르쳐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유익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너무 둔하고 딱딱해져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들려도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공지사항보다도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활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자주 들리기 때문에 이제는 이미 그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들을 포기하고나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이 따로 있고 살아가는 삶이 따로 있듯이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세상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의 모든 욕망에 이끌려 삶을 살고 자신의 모든 인생의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골똘한 나머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할 강한 도전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데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삶 속에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실 때 가장 불효한 자식의 눈에도 때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여러분은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더니 자기가 너무 불효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불효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살아생전에 아버님은 이런 것을 원하시고 어머님을 저런 것을 바라셨는데 내가 인생 살기에 바빠서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산 것이 후회가 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는 그것이 바로 유언입니다. 그래서 유언을 지킴으로써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마지막에 부모를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을 유언을 지킴으로 자기가 부모를 사랑하고 여전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부모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법도를 알려 주시는 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말씀이 있다. 아 하나님은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까 아 하나님은 참 말씀도 잘하셔 어쩌면 이렇게 우리에게 이 귀하고 놀라운 말씀을 한없이 들려주실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에 능하시다는 사실을 칭찬 받기 위해 이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동의를 표하고 박수를 치고 아 계명이 훌륭하도다. 기독교 말고 어느 종교에 이런 훌륭하고 고상한 계명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들을 환호성과 찬사를 받기 위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백성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 애굽에서 살던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었고 너희의 땅은 이제 억압받는 애굽의 땅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며 새롭게 세워야 할 새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독특한 나라를 세워갈 때 하나님이 그 나라를 통해서 온 중동의 땅에 하나님이 누구인 것을 알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모세가 그들에게 전해 준 율법을 동일하게 전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들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듣고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 출발은 율법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구원을 받고 광야를 출발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을 바라본 예표였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 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는 우리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교리 하나에 하나님을 제한하며 우리 맘대로 살아도 좋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 내실 때에 그 은혜는 거저 주신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진정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삶의 계획과 우리의 인생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 인생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면 흔히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나이 좀 드신 분들은 맨날 뭘 해다 주면 드시고 이 맛이 아니야……. 이 맛이 아니었어. 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음식이 옛날만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미각의 모든 세포들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래서 옛날에 어머니가 살아나셔서 옛날 된장가지고 다시 찌개를 끓여드려도 지금 먹으면 그 맛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세상이 신나고 즐겁고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유쾌하고 행복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다음 어쩌다 욕심에 이끌려서 한 번 세상에 나아가서 옛날에 살던 대로 세상 연락을 즐기면서 살아 갈 때 그 맛이 옛날 맛이 납니까? 그렇게 가고 싶지만 옛날 맛이 안 납니다. 옛날의 그 고깃국 맛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으로 돌아가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독특성을 잃어버리면, 독특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맘대로 살아도 나는 하나님 맘대로 살 것이다. 세상에서 누가 내 인생 너 맘대로 하세요. 누가 그럽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주님 맘대로 내 인생을 사용하시옵소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엔 죄를 쫓아다녔으나 이제는 죄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거절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 죄의 넓은 길로 가도 외로워도 좁은 길로 걸어가고 즐거움이 없어도 죄의 길보다는 의의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세상에서 번영하는 길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고난의 길을 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게 될 때 주님 말씀하시기를 소금이 만일 그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에다 쓰겠느냐 그리고 밖에 버리는데 밖에 가면 환영을 받을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밖에서 사람들의 발에 의해서 철저히 짓밟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이미 세상은 옛날의 세상이 아닙니다. 돌아가도 옛날의 고향이 아니듯이 이제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맛을 잃어버리고 옛날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독특성을 잃어버리면 세상에서도 밟혀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인생의 진가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배우고 행하면 행할수록 우리는 우리를 그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키며 살면 살수록 주님이 얼마나 고귀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우심을 받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감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뜻을 세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결심하십시오. 이제 내가 이 세상의 음성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귀에게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는 어리석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그 말씀을 지켜 살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봐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결심하기 위해서 뜻을 세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깨달아 알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생생하게 들려 주셨던 이 거룩한 율법이 선포되던 하나님의 동산에 다시 한 번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면서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살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는 내가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하는 이 놀라운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드리겠습니까? 이 놀라운 증거를 무엇으로 입증해 보여 드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의 품에 있는 백성에게 이렇게 살라고 간절히 원하고 가르치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여러분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또한 자녀로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아픔과 사모함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고쳐진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정확히 번역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만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도 세우신 것이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주님의 손으로 친히 쓰셔서 십계명을 주신 돌판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고 온 모세의 얼굴은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는 광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주신 열 가지 계명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처음 그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왜?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신 임재를 백성들 가운데 드러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못 봤습니다. 그런데도 그 율법은 거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받고 내려온 모세의 율법을 받는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 율법이 구속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그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가서 네가 어찌하여 내 뜻대로 안 살았느냐? 몰랐습니다. 교통순경은 가끔 봐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열린 교회에 보내서 거기에서 내 말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는 주의 일꾼들을 세워 내가 너희에게 열심히 전하였거늘 네가 그 말씀을 배웠느냐? 하나님, 오후에는 놀러가느라고 못 나왔고요 수요일엔 밥 벌어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갈 수 없었습니다. 몰랐는데 알면 내가 지켰을 텐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이라고 그러시겠습니까? 네가 전심으로 내 말이 무엇이고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애를 썼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뭐 꼭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거기에 갔고 설교를 하니까 들렸고 성경을 펴서 눈에 들어오니까 읽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증거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 시내 산에 있지 않았던 모든 백성들을 그 말씀으로 이끄시고 다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늘 들려졌습니다. 오늘도 이 현장에서 다시 들리게 하셨습니다. 태어나면 그 계명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공부했습니다. 알고 싶어 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이 들어간 사람들은 너무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이럴 경우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하나님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습니까? 주님 제가 사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까? 이렇게 살면 주님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계속 물어보고 싶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담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그 자체가 너무나 부담이 되고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지만 그러나 그 부모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그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얘야, 너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네 앞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된다. 그러면서 다 가르쳤습니다. 그때에 신앙이 있는 자녀들은 아멘, 그럼 어머님,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까? 부모를 사랑하되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공경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죠? 알고 싶어 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이외의 법도가 필요했습니다. 규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부모님을 공경하라 했더니 부모님보다 하나님을 더 공경해야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미명하에 부모를 섬기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는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때만 되풀이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대언자로서 시내 산에서 모세로부터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쓰신 그 놀라운 돌비를 가지고 와서 양손에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십계명을 웅장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모세로부터 그 원판의 계명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언약을 맺을 때 자기들과만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후에 태어날 모든 후손의 대표로서 그 언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의무를 우리 모두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관계가 없는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주님이 택하시니까 이스라엘이 독특한 백성이 된 것이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밥 벌어먹고 사는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이 되게 너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눈만 깜빡거렸을 것입니다. 왜? 그 당시에는 이방의 신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이 모두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람들은 불안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왜? 신이 언제 심통을 부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가끔 잘 안 되는 집에 가보면 돈으로 부적을 사서 붙여놓고 돼지머리 앞에 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재앙을 면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재앙은 왜 일어납니까? 신들이 변덕을 부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신들이 그런 식으로 변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복 주겠다고 말한 다음에 즉시 앙갚음을 하는 그런 신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로 훅- 불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이 아브라함이 마음에 굳게 믿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 중동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쓰던 약속을 맺는 방식입니다. 둘이 약조를 합니다. 이제 너는 내 부하가 되고 나는 네 주인이 되어서 내가 너의 모든 생계와 행복을 책임지마. 그 대신 너는 나한테 충성을 다하고 나만 섬겨야 한다. 이렇게 약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안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큰 소를 잡아서 반을 쪼개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를 반을 쪼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현장은 끔찍한 것입니다. 피가 몇 도랑이 흐를 것입니다. 그런 후에 둘이 약속을 하고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질퍽한 피 위를 걸어서 말입니다. 소는 반쪽으로 쪼개어져서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둘이 맺은 이 약속을 우리 중 누군가가 깨뜨리면 이런 큰 재앙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리기를 신께 비나이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엄숙한 언약의식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 주겠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삼겠다. 너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게 만들어 주겠다.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백성들이 많게 되리라. 그것을 약속하신 다음에 믿지 못해 주저주저하고 있는 아브라함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불길의 임재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대단히 실례가 되는 말씀이지만 그 의미는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아 주겠다. 그리고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주마.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럼 내가 보여주마. 그 다음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만약 내가 너와 맺은 약속을 어기면, 우린 흔히 약속을 맺을 때 야 내가 이것을 어기면 성을 간다. 성은 못 갑니다. 이복형제라도 딴 성을 가지고 한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혹은 이것을 못 지키면 내가 너 자식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은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안 지키면 저 소가 저주를 받고 쪼개져서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이 내가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설령 그 약속을 어기신다고 해도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보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으실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무조건 찾아오셔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자. 내가 복을 주마. 정말이다. 이 약속을 안 지키면 하나님인 내가 저주를 받는다. 누가 저주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내 자신을 저주해서라도 너와의 약속을 지킨다. 이렇게 언약관계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거기에 있는 백성과만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도 맺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거기에 여러분이 동행했습니까?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우며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따라갔습니까? 비겁한 제자들은 도망갔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 못 박혀 살과 피를 찢으시며 십자가의 뜨거운 태양볕 아래 죽어가고 계실 때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했던 여인들은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기 서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십자가상에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까?
여러분, 우린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과 동일한 사랑으로 오늘 우리들을 언약으로 묶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그 사람들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팔복 산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산상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교훈의 말씀을 듣고 함께 감격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직접 만나셔서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동일하게 우린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 주신 것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이러하다면 복음에 있어서는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를 위해 운 사람도 안타까워 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들려주실 때 우리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하고 예수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열조와만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언약관계 속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걸었던 두 길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과 부요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결핍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았고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시련과 위기를 능히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특권과 은혜와 한없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베푸시고 평강을 잃어버리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율법시대에 베풀어졌던 이러한 끔찍한 심판이 우리에게 되풀이되지 않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은혜의 초청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 우리를 위한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인생의 번민과 고뇌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말합니다. 방종과 우리의 모든 육체의 욕망들과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계명을 거추장스러운 것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기를 원하지 않고 그 말씀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사람들을 부르셔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우리를 권고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네게 나타냄은 나 여호와는 하나님이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고 땅에서는 큰 불을 보이시고 너는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이 교회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핑계할 수 없도록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삶이 무엇이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 무엇이고 어떤 삶을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고 어떤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장 대견해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게 문제가 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관심이 없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도 나는 해야겠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육체의 방종이요 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성경은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의를 계속 좇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 내실 때도,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실 때에 가지셨던 그 고민이 여전히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장엄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광야의 길을 행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남다른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없었고 이방 나라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변덕스러운 하나님, 능력 없는 하나님, 성질이 고약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율법과 교훈을 따라 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들을 용서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서 내 백성답게 만들까 아니면 쓸어버리고 다른 나라를 다시 세울까? 이것이 광야길 내내 하나님의 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구원해내셨습니까? 이제껏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기까지 여러분들을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인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 오셨겠죠? 그러나 여러분들의 인생의 사연이 고달프건 행복한 것이든 그 사연 갈피마다 깃들여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라 그가 어떤 사랑으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여러분들이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악된 세상에서 어떻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설복이 있었습니다. 녹아지지 아니하는 돌 같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하나님은 다가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고 때로는 어루만지시고 때로는 눈물 섞인 음성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양심에 호소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썰렁한 삶인지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멩이같이 굳었던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사랑이 믿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비참한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열매 맺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살아오면서도 끊임없이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한 성품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오늘도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들을 겨우 애굽의 땅에서 구원해 내시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 나라를 여러분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신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열망은 계속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의 고집과 하나님의 인내 중 어느 것이 더 강한가를 시험하고 주님의 사랑의 농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불순종을 계속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이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심으로 오늘 이 시간에도 눈물겨운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구원했으니 이제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내 교훈을 배우며 내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하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이 말씀을 들려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 말씀을 건성으로 듣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서 율법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시지 않은 피 냄새를 벧브올 골짜기 그 평지에서 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살므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들을 여전히 그들이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 말씀 하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칼로 새기는 것같이 다가왔었겠는 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동일한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죽어야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는 생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불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혔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삶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그 품에 안겨서 그분의 젖을 먹으며 광야의 곤고한 골짜기에서도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려 우리에게 먹이시고 우리를 길러 주시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고 너희는 그 품에서 내 말을 들으며 배우며 지키며 살라 이것이 내가 너희를 구원해 낸 뜻이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의 교훈을 지키며 살기를 특별히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인 것입니다.
3. 하나님만을 섬기라(시115:4-7;신5:4-7) 1996.2.11 주일오전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시115:4-7)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대면(對面)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재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引導)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 외에는 위하는 신(神)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5:4-7)
캄캄한 밤바다를 어떤 사람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서 항구를 찾아가는데 캄캄한 바다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었고 한 사람은 종이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난 이제 잘 테니 너는 계속 노를 저어가거라. 종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 캄캄한 밤바다에 어디로 노를 저어 가야지만 항구로 갈 수 있습니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얘야, 저 북쪽 하늘을 봐라.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니? 예. 보입니다. 그쪽을 향해 계속 노를 저으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항구가 나온단다. 예, 알았습니다. 주인님. 주인은 뱃고물에서 잠이 들고 종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한 숨 푹 자고 난 후 주인이 종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이제 거의 다 왔느냐 하고 물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북두칠성은 어디에 있느냐 종이 말하기를 북두칠성은 벌써 지나갔나 봐요. 안보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노를 저어 가는 작은 가랑잎 같은 배가 북두칠성을 지나서 항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이라고 다양하게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너희는 살아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3500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 이것을 여러분에게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이 십계명 안에 오늘날도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영원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여러분들 가운데 열 가지 계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외우실 수 있는 분이 몇 분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계명과 4계명의 순서를 헛갈리고 7계명은 이해를 하는데 8계명과 9계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잊혀 가고 있는 계명이지만 그 계명의 능력은 오늘도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속박하는 사악함과 우리를 멸망시키는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모세가 백성에게 들려주고 있을 때 우선 그 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도 나오고 신명기 5장에도 나오는데 5장의 계명은 역사가 많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계명이나 뒤에 있는 신명기 5장에서는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계명에 대해 약간의 해석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이 우리가 유의해야할 대목입니다. 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던 때에 백성들이 이 십계명을 듣게 되던 때에 놀라운 광경을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시내 산에는 시내 산이 생긴 이후 최초로 온 땅이 구름으로 가득히 덮이고 우뢰가 일어나고 번개가 치고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나팔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장엄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 열 개의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열 가지 계명인데 처음의 네 계명과 다음의 여섯 계명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십계명이 두 돌비에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 돌비에 네 가지 계명이 다음 한 돌비에 여섯 가지의 계명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네 가지 계명, 하나님만을 섬기라, 네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 또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이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나머지 여섯 가지의 계명, 그것은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먼저 오늘 십계명 가운데 일 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 십계명이 신약시대에 와서 보다 풍부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첫 번째 계명으로 네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주신 그 명령을 오늘 여기에서는 다시 약간의 변경이 가해져서 나 외에 위하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약간 말이 바뀝니다. 이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40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얼마나 우상을 쉽게 위하고 우상에게 헌신하고 우상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에 특별히 위하여 라는 말을 주님이 덧붙이셨습니다.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이 선포될 때에 이스라엘이 어느 땅에 있었는가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중동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결 같이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우리도 다신교 아닙니까? 부뚜막에도 신이 있고 처마 끝에도 신이 있고 화장실에도 신이 있어서 가끔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고혈압으로 죽어 가는 것도 화장실의 신이 역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이런 다신교적인 원시사회에 있어서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나머지는 너희에게 신일 수 없다고 하는 이 선포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모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선포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승부를 하지 하나님이 얼마나 불안하기에 나 말고 딴 데에는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실까? 공정하게 신들의 세계에도 경쟁을 해서 당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시면 사람들이 믿고 따를 텐데 하나님이 나만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간을 향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요구를 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독점적인 영광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지키면 행복하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편단심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이 시내 산에서 만나는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장엄하게 들려오는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첫 번째 계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선 이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경배를 받으실 만한 가치가 그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에는 가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인간을 대단히 존중하게 여깁니다. 엊그제도 시장에서 엄청난 불이 일어났습니다. 몇 십억 원 어치를 태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모두 퇴근했기 때문에 사람이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왜 사람들이 그렇게 경악했습니까? 물건 값 때문에 경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큰 소는 수없이 죽고 피 흘려 여러분의 식탁에 올라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소보다 작고 나귀보다 힘이 없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것은 신문지상의 떠들썩한 뉴스거리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가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매를 맞으며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을 배웁니다. 오랜 동안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데 그것은 어떻게 그 사회에서 사람을 존중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뛰어난 미덕으로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우리는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갑니다. 법을 만들고 사람을 존중하게 여기지 않고 가치를 짓밟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라도 벌을 주고 심지어는 사형을 통해 생명을 빼앗는 법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 모든 존엄과 가치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 위에 인간이 뛰어난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치 있게 하셨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주님만이 가치를 정하실 수 있고 그 주님만이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가치의 원천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완전하고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이 훌륭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도 모든 인생을 가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살아가는 삶을 가치 있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드시고 우리의 모든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시는 가치의 원천이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생명이 그에게 속해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운명이 그분에게 속해져 있습니다. 삼라만상과 모든 피조물이 그분에게 속해져 있고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하늘의 별을 생겨나게도 하시고 소멸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고요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두려울 정도로 억겁을 흐르고 있는 이 세월과 우주의 영원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만이 이 모든 만물을 보존하고 통치하고 섭리하고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들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거두어지고 있습니다. 숨 쉬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죽어서 실려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이 세상의 어떤 과학의 기술로도 모방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어떤 것도 모방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만이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신 유일하고 참된 창조주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라가 서고 무너지고 한 역사가 굽이치며 인간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죽음과 고통도 여호와의 장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생명을 주시는 일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역사와 나라가 서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인생은 더더욱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므로 오늘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힘차게 설교하는 저를 오늘 저녁에 거두어 주시기 위해 온 세상을 무장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면 한 순간의 손길이면 내 생명을 거두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붙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여러분을 먹게 하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온 땅에 식물을 주시고 그 곡식으로 무르익게 하지 아니하시면 여러분 통장에 들어있는 돈과 여러분 손에 움켜쥐고 있는 금과 은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생명을 주장하고 누가 여러분에게 자녀를 주시고 누가 여러분들을 불행과 좌절의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누가 여러분을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구해주시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도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시면 여러분의 몸부림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려고 하면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으며 누가 우리를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축복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인생의 남은 날이 축복되고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습니까? 불행할 것 같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여쭤보십시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그 고통에서 여러분, 언제쯤 헤어 나오게 될 것 같습니까? 오늘 헤어 나올까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혜나 생각으로 여러분들이 거기에서 벗어나게 될 날들을 예측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시간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여쭤보십시오.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언제 하나님을 믿고 돌아올 수 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버리고 침륜에 빠져 믿음을 부인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으로 인생을 마치는 대신 육체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까? 아니면 마지막 죽는 순간에 살아서는 아벨과 같이 죽어서는 에녹과 같이 그러한 신앙의 삶을 살게끔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이어질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그분께 여쭤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며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런 것을 잘 못했는데 아부하는 사람을 보면 닭살이 돋습니다. 간도 없고 배도 없습니다. 돌아서서는 침을 튀기며 욕을 하다가도 나타나기만 하면 김밥 싸느라고……. 세상만 이런 줄 알았더니 기독교 세계도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왜 평범한 사람에게 아부하면서 비굴하게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며 사는 사람 없습니다.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은 겸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첨하고 아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아첨과 아부를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정말 실세에게 가야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쥐고 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분에게 곱게 보이지 않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심보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실세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붙들고 계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십계명은 또한 구속받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서두를 붙이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멘 먼저 열 개의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열 가지 계명을 애굽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을 시온과 바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언제까지는?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 주시기 전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첫 번째 계명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그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들에게 먼저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 로라. 하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종이 되어본 적이 우리는 없으므로 종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던 감격을 알 수 없습니다.
(예화) 목사님 자신이 요즘 매우 바쁘게 사심-육체적으로 몹시 힘이 듦-한없이 해방을 느낌-학교에 있을 때는 도둑질하는 것처럼 목회를 해야 했음-그러나 우선순위 가 학교에 있음-집회를 열어놓고도 수업시간이 끝나야 올 수 있게 되었음-사직 후 자유가 주어짐-경제적인 어려움에 비할 데 없는 자유함이 주어짐.
한 신학교의 교수가 되어서도 그러한 해방감을 느낀다면 이 사람들은 종으로 살았습니다. 종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여러분은 상상이 갑니까? 여러분,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한 번 여러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학대받으며 근로하고 있는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도 하루에 열두 시간 가까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들은 오래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남아돌아서 그것도 잘리지나 않을까 근근덕신으로 직장을 다니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했을 때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24시간 중 20분 동안 식사하는 시간에 먹었던 국물이었습니다. 그것도 매일 먹었을 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소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절이면 한 번씩 얻어먹던 애굽의 고기국물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기국물을 먹기 위해서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루 종일 수고하며 벽돌을 짓이기고 짚을 잘라 넣어서 벽돌을 굽고 찍어야 했습니다. 햇빛에 말리고 등에 허물이 벗겨지도록 쌓아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일하고 난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있게끔 허락해 주는 것이 뼈가 빠지도록 일한 노동의 대가였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변소를 청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개같이 기어 다니며 마당을 쓸고 애굽의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다해야 했을 것입니다. 까다롭고 힘들고 더러운 모든 일들을 도맡아 했을 것입니다.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을 때는 아마도 채찍으로 휘갈겨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고 어쩌면 마지막에 노동력을 상실할 때는 밥만 축낸다고 창에 찔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의 운명이었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것은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찢겨서 팔려가는 이러한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종 된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구원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너희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어도 너희에게 나만 섬기라고 말할 수 있거니와 그러나 너희는 회상하라. 너희는 종 되었고 너희의 친구는 죽음이었고 너희의 인생은 비참하였으되 내가 너희에게 나타나서 너희를 구원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살라고 명령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전에 그들의 상황은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참한 처지에 버려두지 아니했습니다. 바로 왕이 많은 세월이 흘러도 저절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 천지인 애굽의 한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례로 열 가지의 지축을 뒤흔드는 위대한 재앙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애굽 온 땅에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애굽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고백으로 받아 내셨습니다.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갈라 인도하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볕을 가려주시기 위해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고 밤이면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도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목마를 때 반석에서 터 쳐 나오는 샘물을 마시고 해갈을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싸움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조상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의복은 낡지 않았고 신발은 해어지지 않았고 한 끼도 주린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땅에서 종 되었지만 우리는 애굽의 땅이 아니라 이 죄악된 세상에서 죄의 종이 되고 사슬의 멍에를 메고 우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조건 없이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때 흥정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누가 여러분 가운데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가 너를 구원해 줄 테니 이제는 무엇 무엇을 해주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푼 대가로 너는 나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금전의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 계십니까?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지도 않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제는 주님 없이 살기에는 허전하고 헛된 삶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강퍅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감동 받을 줄 모르는 목석과 같은 마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감동시키시고 감화시키시고 결국은 우리의 이 강철과 같은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손을 들고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나의 참 하나님이시고 주님만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옵나이다.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속도로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때는 홍수로 다리가 끊긴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산사태로 말미암아 끊겨진 길 한 가운데 서서 좌우를 돌아보며 의지할 이 없을 때를 지난 적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외로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한 순간이라도 버려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던 그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시고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희망도 보이지 않는 미련하고 우둔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수시로 감화주시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마치 목자라 지팡이로 양을 인도하는 것처럼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재앙을 만나 고통하고 홍해와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에도 하나님의 팔로 우리 앞에 길을 내셔서 우리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영적 싸움을 거치며 세상과 싸웠고 마귀와 싸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인생 가운데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기고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죄를 범했을 때라도 오 예수님, 내가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너 같은 놈이 내 자식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 집안은 너 같은 놈 둔 적이 없다. 문전에서 여러분을 쫓아내셨습니까? 지치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시련의 계곡을 지나고 풀 한 포기 없고 물 한 모금 없는 광야와 같은 길을 지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잠깐 잊어버리고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시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오셔서 우리가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을 내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지팡이로 우리를 위로하셨고 우리를 향해 도전하는 맹수의 세력 앞에서 우리는 그저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여호와의 이름만을 불렀을 뿐인데 우리의 싸움을 그가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가 굶지 않고 오늘날까지 먹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육시켰고 우리가 입었고 우리의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살아 계셔서 수시로 죽음과 같은 위기를 지나는 그래서 사망의 위협을 당하며 곤고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 인생을 끝내고 싶은 위기와 그리고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갈한 심령이 목말라 죽을 것 같을 때 말씀의 샘을 우리 앞에 터뜨리셔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을 훔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쥐고 오주여 내가 살기를 원하옵나이다. 결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 하나님만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의 끝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은 세상의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처와 사랑을 동시에 주고 병과 약을 겸하여 주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존귀하고 어떤 때는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세상의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호의가 아니라 시종일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 거룩한 하나님의 놀라우시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이것을 힘입어서 오늘 우리가 살아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번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애굽 사람들을 죽이셨습니다. 우습게 생각하셨습니다. 온 애굽의 처음 난 장자를 모두 죽여서 애굽의 온 땅에 곡소리가 메아리치게 만드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하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구원해 내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를 구속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둘도 없는 독생자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속을 입은 이스라엘인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건물을 지을 때 고사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자고 신우회에서 그렇게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슨 사고 가 나면 책임을 지겠다고 해도 고사는 지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 한 간부를 만남-빙긋이 웃기만 함-복음을 전하니까-태어나서 살 다 죽으면 되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누가 보았느냐 자기 일에 성실하게 하면 성실한 대로 결과를 보며 사는 것이라고 대답-창사관리업무취급-땅을 팠을 때 토목공사 전에 고사지냄-정부예산으로 고사지냄-그 간부가 대표로 절함.- 믿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절함.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의 우상은 은과 금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도 소리를 못하느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와 고통, 여러분의 인생이 문제가 있고 좌절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비극을 만날 수도 있고 여러분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자신의 지혜를 자랑해도 혼돈 가운데 여러분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비극과 좌절과 고통과 혼돈 가운데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도움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건져내실 수 있고 거기에서 인도해 내실 수 있습니다.
절에 오르다 보면 우상이나 망부석들이 서 있는데 기가 막힌 것 하나는 절 앞에 있는 석상은 에누리 없이 코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들이 없는 사람들이 그 코를 잘라다가 물에 푹 삶아서 먹으면 아들을 임신한다는 수천 년을 거슬러 내려오는 이 비방 때문에 코가 수난을 당한 것입니다. 처음엔 지나쳤는데 지나다니면서 유심히 보면 100퍼센트 코가 없습니다. 그래도 왜 내 코를 베어 가느냐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거기 그렇게 수백 년을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혼돈과 어지러움 가운데 인생의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몰라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주여 어느 길이 내 길이옵나이까? 부르짖고 간구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위기와 역경과 고난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그 때 여러분의 모든 처지가 사람들에게는 숨긴 바 되었지만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고 여러분의 처지를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이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들으실 뿐 아니라 여러분들이 행하는 모든 일과 모든 말들을 들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냄새도 맡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에 없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와 선의 그리고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충성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의 냄새를 맡으실 수 있는 코가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의 손을 펼쳐서 그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사실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어루만지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낙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홍해와 같은 어려움들을 앞둔 사람들을 그 앞에 손을 펼치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앞에 길을 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변화 받기 전-직장에서 낭패를 당하게 됨-큰 근심과 좌절 속에서 고통 받을 때 누군가 기도를 많이 해 줌-상황은 고통스러운데 어디에선가 손이 나타나 내 자 신의 몸을 감싸주심. 체온을 느낌-하나님의 인격적이심을 느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그것을 원하고 또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안아주실 수 있습니다. 넘어지는 여러분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실 수도 있습니다. 믿습니까?
(예화) 부산 집회-부 목사님 말씀-강대상이 매우 좋음-220만원-설교자가 쏙 들어가게 되어 있음-기분이 아늑함-보면대의 각도가 조절가능-부 목사님이 기도도 아직 안한 상태-속으로 강대를 바꾸면 좋겠다―누군가 들어옴-재일교포-강대를 새 것 으로 바꾸라고 220만원을 줌-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미리 앞서가셔서 내게 혹은 교회에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신 적이 많았음.
하나님이 우리 앞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발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인생에 앞서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제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인생이 사망의 계곡을 지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정말 예배할 때입니다.
지난 번 제가 가장 모인 수가 적은 집회를 갔었습니다. 처음엔 보충수업 받으러 나온 학생처럼 입이 부어 가지고 가만히 앉아있더니 넷째 날이 되니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편23편을 강해하는데 아무래도 1절을 가지고 두 시간을 했거든요 가만히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니 3절 하다가 집회가 끝날 것 같으니까 목사님, 우리가 밤새워서라도 들을 테니까 6절까지 끝내고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저녁7시부터 새벽1시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는 추호도 배려가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보고 안볼 사람이라 그런지…….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는 이 십계명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만 섬기며 살고 계십니까? 십계명이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최후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으로 끝나기를 원해서 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을 펼 때마다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약적인 의미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난 주 절에 가서 돈 놓고 절하고 있는 사람이 계시면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없죠? 그렇다면 굿판에 가서 돼지머리 앞에 절하고 오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의 우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삶의 절대적인 권위를 하나님만이 쥐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에 눈이 떠지던 처음 시간이 생각나십니까? 침상에서 잠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던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의식의 마지막 끝에서 여러분들은 누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계십니까?
(예화) 집회인도로 그 쪽 차를 타고 감-앞자리에 나침반을 달았음-차가 달리면서 바늘 이 움직임-신호대기 시간에 차가 섬-바늘이 북쪽과 남쪽을 정확히 가리킴.
여러분, 마음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루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아이를 학교 보내고 하다보면 아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 갈 때는 직장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직장을 갔는데 교회 생각만 하며 그 사람 직장에서 곤란한 사람입니다.
어제 밤에도 책을 읽는데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크리스천이면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을 보니까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직장을 팽개치고 다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냐를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직장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애인과 데이트를 할 때는 애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놀러가서는 노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차가 달릴 때는 나침반 바늘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정지해 있는 동안 고요히 그 움직임이 멎을 때는 정확하게 북과 남을 가리킵니다. 가리키지 못하면 그 나침반은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낮에는 직장에서 직장의 일과 목표로 분주해져서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앉아서 조용한 시간에 여러분들은 누구를 생각합니까?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아무 일도 없이 움직임도 없이 고요히 침잠한 가운데 무릎 꿇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직장입니까? 돈입니까? 애인입니까? 휴가입니까? 아니면 오락입니까? 결국 진정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관심의 초점이 마치 나침반과 같아서 잠시 상황에 따라서는 흔들리지만 그러나 그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하나님께로 집중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가슴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따라서 우리들이 이 십계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 십계명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삶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게을렀던 사람들은 변화를 받아 부지런한 사람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게으름은 최대의 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부패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목표를 성취하고 목표를 성취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일어나기 싫지만 새벽에는 눈을 비비고 일어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감동시키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그러한 삶을 삽니까?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즐거움과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만족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그것을 스스로 대견해하고 목표를 성취한 모든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생의 신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로 자신들의 인생의 신이고 자신들의 목표가 자신들의 인생을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좀 더 나은 사람 중에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가족의 행복을 짓밟고 자신만 행복하면 되기에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이런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엊그제 신문에 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킬러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미제 킬러를 한국 사람이 고용해서 부인과 이혼을 하면 위자료를 주어야 되겠으니까 2300만원을 주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눈을 쓸기 위해 마당에 나와 이혼을 앞두고 이제는 의지할 곳 없는 그 여인이 돈 3만 불에 눈이 멀어서 칼로 난자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에 자기의 모든 인생을 건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편 한 사람을 위해 청춘을 바친 사람들은 많습니다. 혹은 친구의 유익을 위해 불행한 길을 기꺼이 걸어가며 그들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유익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의 생각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의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첫 번째 계명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이 첫 번째 계명에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자녀와 남편과 친구를 사랑하고 그들을 섬깁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할지언정 섬겨야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그들은 이 일을 인하여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기뻐하신다면 내가 어떠해도 좋고 하나님만 좋아하신다면 내가 어찌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며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무서운 선생님 댁에 감-늦장가 가셨음-선물-정력제로 결정함-아이를 낳았음-근엄한 선생님이나 아이를 얼르시는 모습이 동물원의 원숭이 저리 가라 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주님 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나보고 벙어리 삼룡이라고 해도 좋고 개그맨이라고 놀려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제가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고난 받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내 인생이 아무리 평탄해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질문은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삶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자기네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마음대로 결정하고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마음대로 어려운 일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경솔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힘이 있고 여건이 닿고 그러므로 나는 걸어간다는 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걸어가는 좋기 때문에 난 이 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유일한 여호와로 모시고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뜻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이심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수많은 백성들의 뒤에 줄을 서서 따라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왜 그리 하셨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다 이루었도다. 예수님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 사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 이 1계명을 범하지 않고 1계명에 있어서 정결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단지 먹으로 칠하고 사람들의 수공물로 세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으로 여러분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삶이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고 삶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가는 삶인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삶의 아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2년 전-순복음 신학대학원개강집회-몹시 추운 겨울-차를 몰고 감-강대에 엎드려 설교원고를 읽어봄-엎드려 기도함-설교가 세례요한-마음속에서 세례요한의 모습이 생각남-30년 광야생활로 외모는 지저분하지만 그 눈은 불타오르는 그의 모습이 생각남-외로운 광야에서 그 시대를 향한 외침-한 사발의 피와 같은 외침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광야에 서있는 처절한 모습이 생각남-마음이 물같이 녹음-하나님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직하게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하나님만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생각, 여러분들의 모든 의식 세계를 하나님이 지배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도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여러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만 감동을 드릴 수 있다면 할렐루야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첫 번째 계명이 성경의 가장 두드러진 계명일 것입니다. 작고 자잘한 계명을 순종하는 것 가지고 의를 세우지 마시고 두드러지고 뛰어난 이 압도적인 계명 앞에 먼저 승복하셔서 이 첫 번째 계명을 들을 때 오 주님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4. 우상을 버리라(신5:8-10;출32:1-6) 1996.2.25 주일오전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偶像)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戒命)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8-10)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引導)할 신(神)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刻刀)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公布)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32:1-6)
오늘은 제 2계명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강해를 들으면서 분명히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둔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진정한 우상, 다른 신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으로 1계명을 어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1계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우리가 불교 신자가 아니거나 혹은 다른 우상을 섬기는 제3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만 우리는 1계명을 준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의 중심의 경배를 받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모든 삶은 1계명을 범하고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살려고 결심했다고 하면 여러분은 이전에 없던 놀라운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주어지는 참다운 평강과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2계명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계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두 번째 계명이기 때문에 제 2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2계명을 우리도 역시 1계명을 들을 때와 똑같이 아니 우리가 무슨 우상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나는 결코 제사를 지낼 때에도 절할 때가 없었고 법당에 들어갈 때도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으니 나는 우상을 섬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32장에 나와 있는 시내 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 번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 산으로 올라갑니다. 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에 상당한 날이 지나도 모세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지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신의 히브리말이 엘로힘인데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 부분은 우리를 인도할 하나님을 만들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지만 적합하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아론은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주도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든지 모세 곁에서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세의 영적인 지도력에서 언제나 보고 배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이 아론이 왜 백성들에게 우상을 만들어 주었을까 하는 것이 이 32장을 볼 때마다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의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론이 송아지를 만들도록 허락한 것도 사실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송아지를 통해 그것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증거가 송아지 우상을 만든 후에 아론이 선포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내일은 특별한 날이다. 그러므로 그 날 이 송아지를 가지고 여호와께 경배하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송아지가 만들어졌는데 아론은 말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송아지는 건강한 송아지, 힘 있는 송아지를 통해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지금 모세가 없어져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만든 우상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힌트는 애굽에 호르스라고 하는 신이 있습니다. 그 신이 소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를 통해 강한 힘, 왕성한 생명력 이런 것들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힌트를 바로 애굽의 호르스 신상에서 얻어냈습니다. 지도자도 없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인도도 없는 망막한 상황에서 그들은 이처럼 강하고 힘 있는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형상을 통해서 이전에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 가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면서 여기까지 이끌어 오게 하신 거룩한 능력의 하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처한 것과 같은 지도자도 없고 갈 길도 망막한 언제 모세가 내려오겠다는 기약도 없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야말로 자신들에게 간절히 요구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또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튿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렸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나와 있는 그리고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번제요 또 화목제였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그 현장이 먹고 마시고 뛰노는 현장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애굽의 종교의식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워한 나머지 그것을 형상화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형상화되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은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도덕적인 성품이 무시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형상은 예배에 쓰이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한 형상의 문제는 또 기도를 돕는 형상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대한 많은 성품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주위에 있던 모든 백성들은 한결 같이 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우상이 없는 신앙생활이다 이것은 대단히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종교생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상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 전혀 우상이 없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우상이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이 자신들의 사고와 생각과 형상화를 통해서 가두어 둘 수 없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예배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신학교에서의 강의-종강 때-선물-이태리제-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서 피 흘리시는 장면을 총천연색 도자기로 만든 것-황당했음.
여러분, 성당 앞에도 보면 성모 마리아 상이 있고 촛불이 항상 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수건을 쓰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가냘픈 여자의 모습은 파란 풀밭과 하얀 마리아상 그리고 빨갛게 타오르는 촛불 하얀 수건 모은 예쁜 손 그런 것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너무 서정적이고 멋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그러나 유혹 받지 마십시오. 제임스 패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고 있는 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능력은 드러내 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인간적인 약함만을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다 이렇게 지적을 했습니다.
가톨릭에서 성상을 숭배하는 동기는 선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결코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리아 뿐 아니라 그들의 성당에는 베드로 상 바울 상 수많은 상들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수많은 형상이 있습니다. 동기는 선합니다. 왜? 베드로와 같이 죽기까지 거룩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순교를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했던 그 베드로의 거룩한 믿음을 본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버리며 이방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하였던 바울의 선교적이고 거룩한 열정을 본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간증하던 일에 매여서 밧모 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를 받던 사도 요한의 성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모든 성상을 만들다가 부족해서 흠이 있는 인간 말고 인간보다는 보다 완전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천사와 천사장의 형상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동기는 순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결국 우리 삶의 중심 자리에 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거룩하고 참된 하나님을 신앙의 세계에서 직접 만나고 그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그 하나님과 직접 사귀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형상과 성상에 만족하고 그러한 것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그렇게 위로하고 그러한 성상과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위안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바로 우상숭배로 연결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은 우리가 그러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언제나 교회의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랑을 표출해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의 마음이 그 사랑에서 떠날 때에도 형상을 옆에 두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사귀는 것과 같은 그러한 교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그러한 형상으로 만들고 성경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에 관한 성품을 형상으로 성상으로 만들어서 이것들을 가지고 진리를 대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기보다는 보이는 형상을 붙들고 살아가고 급기야는 하나님께 올려야 할 거룩한 경배를 그러한 우상들에게 올려 보내는 이런 어리석은 일로 연결되는 사실을 언제나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외심이나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성상으로 연결되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예배의 중심 자리에 오는 것을 우리는 미워하고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상이나 우상이나 전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인간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 속에 보여주어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깨닫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교회는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진리가 있고 깨달음이 있는 예배와 말씀이 있어서 그로 말미암는 교회는 이러한 형상과 성상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함께 자신의 삶이 항상 변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은혜로운 영적인 체험과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뵈옵는 신령한 은혜가 없는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을 보이는 육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보고자 하는 그러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들의 영혼으로 직접 만나게 하여서 신령한 자와 신령한 생각과 신령한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만이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자신의 삶이 변하여 자기 안에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가 영적으로 체험하고 확신하게 됨으로 형상과 우상 같은 것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해 주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형상을 통해 일부분 보여주지 않아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를 때 그때에는 얼핏 생각하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보고 그것을 섬기면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진리를 깨닫고 우리의 죄의 무거운 껍질을 회개하고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화) 어제 강서구의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음-전철로 감-사람이 터질 것같이 많았음.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렇게 짐짝처럼 취급받는 우리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라고 생각하니까 예배드릴 때도 쉽게 느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졌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진리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어디서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전철 안에서나 만원버스 안에서나 직장에 늦어서 바쁘게 뛰어갈 때나 계단을 오를 때나 혹은 설거지 할 때나 세탁기를 돌릴 때나 어디서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느꼈느냐고 말하면 우리는 한 마디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느꼈습니다.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을 부르면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이러한 삶이 없으면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느낄 수 없습니다. 교회 와서도 느낄 수 없습니다. 수십 억 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거룩한 곳에 그 사람을 데려다가 겟세마네 동산에 세워 놓아도 느낄 수 없습니다. 빈 무덤,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빈 무덤 앞에 세워 놓아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는 신령한 방식으로 나를 찾으라. 마음을 다 해 너희는 은혜로운 방식으로 신령한 방식으로 거듭난 방식으로 나를 찾으라. 너희가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방식으로 나를 찾지 말라. 나는 너희와 만날 수 없다. 신령한 방법으로 나를 찾으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우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 밖에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이 사라진 뒤에는 바로 그곳에 우상에 대한 관심이 싹트고 우상이 있는 곳에 신령한 예배는 사라졌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러한 우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와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를 사모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더 큰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보이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하나님께 더 잘 예배하기 위해 만든 이 형상이 하나님께 미움의 대상이 된다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우상에게 절하고 그것을 만들거나 경배하는 일, 이교도의 풍습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절하여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신상에 절하는 이러한 일들은 얼마나 더 커다란 문제가 되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우상에게 절하고 불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것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교묘한 모든 형상과 우상숭배의 위험들이 우리 도처에 널려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점 보러 가끔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다녔던 사람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있습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슬프게 하는 죄입니다.
목사님, 별자리 점도 점인가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별자리는 통계이지 점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 죄입니다. 심지어 손금 보는 것도 죄입니다. 컴퓨터로 보는 것도 죄입니다. 새해 토종비결 보는 것도 안 됩니다. 그것을 보고 낙심하고 좋아하고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심지어 여러분, 신문에 나온 오늘의 운세란을 보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누가 압니까? 하나님 이외에 너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그것을 보고 무엇을 참고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는 것을 점쟁이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해보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마지막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기고 그런 그릇된 가증한 풍습에 자기 몸을 던지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미워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너희 대에 이르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3-4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책망하시는 저주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팔자라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십니까? 그런 개념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운명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우상이 없습니다. 우상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교도의 풍습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의 집사라고 하면서도 애 낳고 이름 지을 때 점쟁이 찾아가고 그럴 바에야 저에게 오십시오. 그렇게 하고 또 복 받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이중생활 하면서 남편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심각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더 커다란 죄악이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다 심각한 우상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입니다.
(예화) 언젠가 설교 중-사람들이 회개를 함-그 중 한 사람-걸어 나와서 당신이 설교하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틀리다고 말함.
우상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사람은 너무나 하나님을 자비롭게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이 죄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의로우시기 때문에 언제나 명령만 내리시고 형벌만을 선고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기에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어느 한 쪽 단편을 붙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나 언제나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자비로우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하나를 어떻게 깨닫게 된 것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거리로 들먹거리고 하나님을 훼방하여도 하나님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무시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언제나 잘못했을 때 나타나셔서 재판을 하시고 검찰관같이 자기를 추궁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며 오늘도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두 자신 속에 왜곡된 편견이 만들어 놓은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말미암아 자신의 왜곡된 편견과 그릇된 신앙의 견해가 부서져야지만 거기에서 바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우상이 깨뜨려지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잘못된 생각과 그릇된 편견이 깨뜨려지는 역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우상이 가득한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이 저에게 당신이 설교하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틀리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허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것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붙들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섬기기를 원하는 한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와 신령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부흥이 없습니다.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교파 가운데 유니테리언이라는 교파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단위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 부흥이 없습니다. 가톨릭에서도 부흥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교에서는 더더욱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진리, 하나님을 참으로 바르게 아는 그 곳, 거기에 진정한 부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마음의 편견을 굳게 붙들고 이것을 허물기 싫어하는 그 사람들의 집착은 엄청나게 강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왜 그렇게 박해를 받았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는 신주를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주를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오늘날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을 하는 것은 조상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성자로 떠받들고 있는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쓸데없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가당착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절하는 것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6.25 때 그 신주단지를 이고 피난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심각합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커다란 사과 궤짝 두 보따리를 매고 다니면서 피난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집착이 강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만 우상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까?
(예화) 서울의 어느 절-절 전체를 금으로 도금-30억 원 어치-어느 기자의 질문-중생을 구제해야할 절이 법당만 치장해서야 되겠는가?―이 절도 넓은 의미에서 부처이기 에 부처님도 가상하게 여길 것임.
우상을 만들고는 사람들은 우상을 위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 우상이 있으면 떠받듭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딱 맞는 설교를 하면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수가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들이 깨닫고 나서는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나는 마음이 아닙니다. 저 말씀이 내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구나 그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난 다음에는 기도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갈망이 속에서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집을 시중에서 보더라도 읽다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읽다가 박수 치고 싶은 책을 읽지 말고 읽고 나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우상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가로막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잘못된 마음의 편견이 만들어 놓은 형상이야말로 하나님께는 금송아지나 불상처럼 가증한 것입니다.
(예화) 전주 집회-어느 집사님과 어느 목사님의 대화-목사님 갈등생깁니다.―갈등은 무 슨 놈의 갈등…….―건축업자-변화 받기 전 절을 몇 개 지었음-교회는 짓고 나서 돈 받기 어려움-피를 말림-절은 일체 그런 것이 없음-절은 통장에 돈을 넣어 두고 시작함-이번에 30억 짜리 공사가 들어옴-불교회관공사-결국 친구에게 넘김-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양심에 걸림.
신앙의 정조를 팔아먹고 몇 억 남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보고 일당 50만원씩 줄 테니 절 짓는 데 가서 벽돌 나르라고 하면 여기서 갈 사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만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형상을 버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있는 그릇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옛사람의 구습, 이방인들의 구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더욱 신령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과 함께 하고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도록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신앙 생활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살라(신5:11) 1996.3.3 주일오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妄靈)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신5:11)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선포된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으로 오늘 우리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열 가지의 계명을 주신 것은 이것이 신앙생활의 최고봉이 아니라 기초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 다른 백성들로서 구별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이 십계명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해 드린 바와 같이 오늘 우리는 이 세 번째 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즉각적으로 벌하시거나 책망하시거나 손해를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는데 사용해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을 교통법규 하나 어기는 것만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방종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오늘 내가 이 계명을 지키며 살아서 즉각적으로 물질적인 보수로 갚아 주시거나 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계명 하나 지키는 것이 오늘 나에게 당장 물질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의무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자녀를 기르면서 자녀가 여러분들을 인격적인 부모님이 아니라 자기가 장성할 때까지 뒷돈이나 대주는 물주로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런 자식들을 전혀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인생의 난관에 부딪칠 때에 여러분들에게 그 인생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버틸 수가 없게 될 때 더욱 큰 힘을 주고 더 능력을 주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환난과 시련을 이기고 믿음으로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곤고하여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도울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 여러분들이 기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뒷돈을 대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이상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뒷돈 대주시는 물주라고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시냐 물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요 내 찬송 제목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의무를 주셔도 우리는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계명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첫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차례로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앞에 네 계명은 약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다서 번째 계명은 이 땅에서 네가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있지만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약속이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약속이 없습니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약속이 없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약속이 없습니다. 그것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계산에 넣어서 하나님만 섬길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내가 다른 신을 두지 않을 테니 주님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면 주님은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사는 동안 전심으로 네 부모를 공경 하겠사옵나이다고 말하면 주님은 네가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철저한 복종 그리고 완전한 의무 그리고 이 의무를 거절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 두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나는 우상에게 절할 것이며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지시하시든지 나는 당신의 이름을 마음대로 망령되이 일컬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주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나는 일요일에 돈 벌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파괴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막 보면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 사람의 인생에서 축복과 재앙과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나의 계명을 마구 어기고 그러면서도 네가 아무 것도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네 맘대로 살겠느냐? 그러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에 대한 관계는 여러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훌륭한 유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와서 아버지 어머니 내가 학교에 가서 우리 엄마 아버지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내가 부끄럽지 않게 얘기할 텐데 대가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일이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교묘하고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그럴듯한 이유들을 대면서 계명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합리화를 꾀하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변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설득 당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여호와 이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중심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환경으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며 사는지 혹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둘러대며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는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마음껏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에게는 무릎 꿇지 않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향해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자기가 세운 잘못된 하나님의 상을 향해 절하고 그러한 편견들을 우상시하며 살아가는 이런 모든 방종한 세태에 대해서 우리는 종지부를 찍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계산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어서 거룩하고 신성한 의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래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혹은 쓸데없이 혹은 잘못된 방법으로 그 이름을 들먹이는 일들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금지된 계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이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주술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마음에도 없으면서도 그 신들의 이름을 자꾸 부르면 무엇인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런 주술적인 의미에서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복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에 대한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서 신들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에 대해서 신실하게 그 말을 지키는 대신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신뢰를 기초로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 치는 수단으로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풍습이 그 시대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그 신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면 하나님의 축복이 저절로 임할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도 다분히 영적인 방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식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모함과 갈망과 진실 된 인격적인 접근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엘리야가 도전하던 바알의 우상들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모두 모여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신의 긍휼을 자아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오히려 몸에 상처를 내고 울부짖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이고 신앙적이고 영적인 접근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좀 덜합니다만 미국에서는 무엇을 하다가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지저스 크라이스트!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정확히 번역하면 제기랄!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기분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오 마이 갓! 아뿔싸! 그런 뜻이겠지요. 세상에…….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무엇인가 꼬이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로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만나고 싶은 것입니까?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도움을 원하는 마음으로 오 마이 갓! 그러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주 웃고 떠드는 농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개그의 소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농담하고 웃고 떠드는 일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경박한 데서 들먹이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한 마디로 여러분들의 많은 이유와 핑계 말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들먹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할 때마다 하나님이 하고 들먹이기 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약에서 숙제로 남아있는 중요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명이 네 글자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모음을 안 찍고 자음만 썼습니다. 그래서 자음만 네 개를 적어 놓았는데 하도 부르지 않아서 그 하나님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가 사람들에게는 숙제였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이지만 정확한 발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유대인들 중에서도 누구도 그렇게 추측할 뿐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네 글자를 써 놓고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로 말하자면 그 분 혹은 주님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 진실한 이름이 무엇인지가 비밀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베껴 쓰다가 여호와라는 네 글자가 나오면 붓을 빨고 다시 씁니다. 그리고 1년에 꼭 한번씩 이 네 글자를 써 놓고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오늘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다. 그분의 이름은 오 하나님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다. 하고는 밤새도록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러한 가벼운 언급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이 살아가는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 마구 끌어들이면서 그 이름으로 농담하고 웃고 떠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결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물론 이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잘못 부른 것은 문제가 되니까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의미에서 세 번째 계명을 여러분에게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 번째 계명을 주신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싶으신 것 첫 번째는 우리가 모든 언어생활 속에서 경솔하게 들먹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농담의 소재로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입에 붙어서 무슨 일만 할 때 주여 이렇게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도움의 요청과 간청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주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그 맹세를 지키지 않는 이러한 일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 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 번째 계명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욕을 하든지 어떤 사람은 소설을 썼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라 이렇게 썼습니다만 인간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든지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비난을 퍼붓든지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쓰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고, 비가 와야 먹고사는 우산 장수 그리고 나막신 장수 또 우비를 파는 장수들이 주먹을 쥐고 하늘의 빛나는 해를 향해서 저놈의 해가 왜 떠올라 가지고 우리 장사를 망쳐 놓느냐고 소리 지르고 주먹질 해봐야 여전히 해는 거기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모욕을 하며 살아가든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인간들은 땅에 있는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이름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높아지고 낮아질 수 없지만 그 이름은 더럽혀지기도 하고 혹은 높이 여김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의 찬송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결혼을 하지 아니한 미혼 남녀들에게 어떤 명사가 주는 충고가 있었습니다. 주례를 부탁할 때 역사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갈 때 그 사람의 이름에 대한 평가가 환경에 의해서 쉽게 바뀔 것 같은 사람에게는 주례를 부탁하지 말라 그 한 예로 옛날 어느 시대 때에 한참 끝 발 날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주례를 받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세월이 지나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그 집안에서 결혼식 사진이 치워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때는 높아지던 이름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평가가 달라지니까 그 이름이 부끄러운 이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인 가운데 이육사라는 시인이 일제 강점기 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이육사입니다. 그런데 그 이육사는 자기 죄수 번호였습니다. 264번이 죄수번호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 이름이 참 치욕스러운 죄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새로운 세상이 되어서 모두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이름은 바로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워질 수 있고 더러워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그러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이러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만족스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그 백성들의 신앙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높이 여겨지는 이러한 세상이 되기를 사모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고 또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높이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지도록 여김을 받았고 그 이름을 마구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세 번째 계명은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대치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열망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이름 그대로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갈망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가장 사모하는 덕망이요 열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때마다 제가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한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예화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가서 형들이 어떻게 있나 좀 보고 와라 그리고 형들이 싸우고 있는 전선에 갔습니다. 칼과 칼이 창과 창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동네별 싸움도 아니고 양쪽에 두 나라의 군사들이 마주 서 있고 중간에 키 큰 사람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는데 키가 9척이라고 했으니까 거의 3미터 가까이 되는 거인이 한 쪽 손에 베틀 채만 한 창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소리 지르면서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들어보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례를 받은 마구 모욕하는 발언을 그 더러운 입으로 폭포처럼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저 놈의 목을 벨 테니 나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든 투구와 창칼도 집어치우고 날렵한 차림으로 물맷돌을 들고 그 싸움의 현장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서 그는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너를 죽이기 위해서 전쟁터로 뛰어 나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계가 있다 이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못한 족속으로서 여호와와 그 백성들을 능욕하는 너를 처단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한다는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다윗이 그 싸움의 자리에 뛰어 들어간 것은 이 때 한 건 올려서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아서 다가오는 대선에 다수의 득표를 하겠다고 하는 정치적인 계산이나 암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싸움에서 이기건 지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너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처단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그 뜨거운 열망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성경은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그때에는 골리앗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았습니다만 지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죄악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은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나라에 세 들어 사는 나라입니다. 더군다나 세상 나라도 하나님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도 하나님이 세웠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노래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세상 바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이름에 먹칠을 당할 때가 없다고 여러분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빛답게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분들을 통해 업신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소금답게 살지 못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진리의 빛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그 교회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시대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비웃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받는 도다. 사도는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유익, 하나님께 커다란 기쁨을 드리는 것 이것이 삶의 중심의 초점에 놓여 있느냐고 오늘 세 번째 계명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면 우리는 한없이 즐겁고 기뻐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만족해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이 세 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새롭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틀린 이유 하나를 이야기한다면 세상의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옛날 직장 생활 할 때-일에 있어서 지혜로움-능력도 많음-그런데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림-공무원 중에서도 기능직만-우편소를 하시던 분-딸 같은 사람이 승진해서 자기의 상사로 옴-견디면서 직장을 다니심-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아들이 서울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함-높아지는 아들의 명예를 보며 만족함-변함없는 인생을 살게 하는 원동력.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나거나 뜻하지 않은 오해를 당하거나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쓰면서 원하지 않은 비난을 당하거나 혹은 고통을 받거나 혹은 쓸데없는 오해를 받거나 구설의 다툼에서 고통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시기를 받을 때 나를 통해 높아지는 이름이 여러분들의 위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지 위로를 받고 기뻐할 수 있다는 이러한 희망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아들로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아들의 행복보다는 여러분들의 구원을 더 그리워하셨기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의미에서 볼 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열등감과 무기력함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함으로 극복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 때 참된 극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여러분들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지만 이 세상에서 구원해야 할 수많은 백성들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하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들보다 사랑하고 우리보다 사랑하고 우리보다 하나님에게 더 귀한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 교회를 통해 도저히 높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기도 합니다. 한 나라를 사랑과 인내로 돌보시면서 그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시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이 나라가 역사 속에 존재함으로 도저히 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되실 때에 하나님은 그 나라를 폐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2장은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각오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그 이름의 존귀함을 앗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핵심적인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런 소극적인 계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네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느냐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인생의 관심을 우리의 이름의 높아짐과 우리의 행복에서 다시 한 번 돌려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는가. 거기를 향해서 우리의 생각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도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말라는 말을 크게 읽으면 안 되고 망령되이 라는 말을 크게 읽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시로 말하고 그 이름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이야기 가운데 들먹이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들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존경한다면 친구를 만나서 부모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 가서든지 부모를 자랑하고 부모의 이름을 말하기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망령된 동기나 그릇된 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 속에 있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한없는 기쁨과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신앙의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이름을 자랑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충만히 받을 때는 입만 열만 하나님 자랑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이름이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나의 삶이 보람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않는 것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고 경배하고 세상이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현실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 이름이 이 세상에서 높아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은혜 받고 싶어 합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뜻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에 묻혀서 주님의 이름이 우리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휘장 뒤에 숨어서 높아지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런 마음 이것이 바로 세 번째 계명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십계명을 들으면서 그 충격적인 간음의 사건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하나 되어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거절하고 타락한 그 현장에서 주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았고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그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칼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 백성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세상의 백성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유명한 코미디언의 간증-팬들이 많았음-팬레터를 뜯어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이 옴-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나감-죽고 싶은 생각-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음-인기 연예인 중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 여럿 있음.
무엇입니까? 인간은 약간은 히어로 적인 그런 기질을 타고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의 이름이 높아질 때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높아진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서 실추되고 더렵혀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절망을 갖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한 존재도 아니고 더욱이 영원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말해도 찬송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에 합당한 피조물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영과 경배와 찬송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한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은 얼마나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그러한 경배와 찬송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암시가 바로 복음서에서도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할 때 바리새인들은 욕했습니다. 예수여 말리시옵소서. 어찌하여 당신이 인간이면서 저런 찬송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나둬라 저들이 찬송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를 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의 크신 이름이 경배 받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나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쇠잔하고 주님이 예정하신 삶의 구간이 끝날 때 우리는 퇴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인생의 무대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져가도 영원히 빛나는 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자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면 어떻게 우리의 부주의하고 불경건하고 잘못된 언어생활 속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이 함부로 들먹여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계명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부주의하고 경박한 언어생활을 청산하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언제나 영원히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스러운 울림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게 하옵소서! 자주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하오나 주님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고 있는 이 세상이 변화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런 소원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로까지 나아가도록 세 번째 계명은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신5:12-15) 1996.3.10 주일오전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安息日)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이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들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5:12-15)
언제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낡은 자동차를 한 번 탄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차가 유행하던 시절이 70년대 초인 것 같습니다. 차가 아주 잘 나갑니다. 이게 망가지면 부속품이 있으려나 속으로 생각하다가 물었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서울에 이런 차가 없는데 어떻게 여태 이 차가 이렇게 잘 굴러갑니까? 그랬더니 주인 하는 말이 가능합니다. 이상하면 안 갑니다. 그리고 즉시 정비를 합니다. 아직까지도 새 차입니다. 남은 벌써 두 대 세 대 씩 갈아 탈 지경이 되었는데 이 차는 여전히 잘 가고 있습니다. 정비를 하면서 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인간이 이렇게 정비를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정비 계획표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1일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6일 까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것이 전부 쉬운 일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첫 날 창조도 기가 막힌 것이고 둘째 날 창조도 마찬가지이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신 일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점점 세미한 부분까지 간섭하셔서 고등한 동물들을 창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날 빛이 있으라. 빛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뭍이 드러나게 하시고 바닷물과 육지를 나누시고 짐승을 만드시고 공중 나는 새를 만드신 후 마지막에 인간이라는 가장 고등한 피조물을 만드신 후 영혼까지 부여하시는 고난도의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곱 째 날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 같으면 일곱 째 날이 온 세상 창조 기념식 한답시고 밴드를 동원하고 축하파티를 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신 일이 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도 사실 우리에게 이해가 안갑니다. 하나님이 피곤하시기를 합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굳이 하나님이 쉬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유한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6일까지 창조하신 후 7일에는 아무 일도 안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히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곤하셔서 쉬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위대한 창조를 다이내믹하게 성취하신 다음에 마지막 순간에 고요히 쉬심으로 말미암아서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당신이 몸소 행해 보이심으로 인간에게 모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쉬실 필요가 없었는데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쉬심으로 창조된 모든 물건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가다가 엄마 저 빛을 하나님이 언제 만드셨어? 첫 날 만드셨지 엄마 이거는……. 해와 달은 언제 만드셨어요? 마지막 날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쉬시는 것이었단다. 쉬는 것 자체가 일입니다. 하나님은 쉬실 필요가 없지만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쉬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식일이 단순히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이 기다려져야 합니다. 그날은 쉬는 날이다라고 하는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푹 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누군가가 저에게 새벽기도를 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의를 할 때 제가 6개월 동안 고민했습니다. 마지막에 쉬는 것이 좋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쉬어 보니까 정말 안식일의 정신을 잘 반영했습니다. 새벽기도 주일날 나와 가지고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챙겨서 주일학교 중고등부 다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쉬어 봤습니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쉬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제껏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주일 하루가 제게 있어서 늦잠 자는 날입니다. 건강하고 맑은 마음으로 교회로 옵니다.
여러분, 쉬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제일 먼저 여러분들은 쉬는 일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요일 밤 늦게 까지 명화극장 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보면 일은 토요일에 이루어졌지만 영향은 주일날 미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주일을 구별되게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비일이라고 불렀습니다. 토요일은 예비하는 날입니다. 불편 없이 모든 성도들이 와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교회 일꾼들이 교회를 준비하고 성도들은 다른 날보다 좀 더 일찍 잠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쁘고 고단할 때마다 주일이 생각나야 합니다. 주일이 오면 좀 쉴 텐데……. 우리의 육신이 주일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일을 그렇게 하지 못하고 토요일 밤 늦게 까지 데이트를 한다든지 심야 영화까지 보고 잔다든지 눈을 비비고 교회를 다음날 나오지만 벌써 예배는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주일을 바로 지키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조는 것입니다. 육신을 푹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강하게 명령하시냐 하면 너만 쉬는 것이 아니라 네 아들도 딸도 종도 심지어는 소나 나귀 네 모든 육축 문안에 들어와 묶고 있는 식객까지도 우리 집에서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각자 믿음을 따라 쉬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가장에게 권위를 부여해서 모든 가족을 쉬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있으면 혼자 불안해서 못 쉬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교역자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월급쟁이도 아니고 9시에 출근해서 6에 퇴근해야 된다고 당회에서 결정해 놓으니까 새벽기도 나왔다가 빨리 들어가야지 한 숨 자고 나올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피상적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교역자들은 1시에 출근하라. 아침 동안 성경 읽고 기도도 충분히 하고 가족들과 식탁도 함께 하고 그리고 나서 1시에 나와라.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그 자리에서는 교역자들이 와 우리 목사님 최고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나와 보니까 그 사람들이 똑같이 다들 9시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불안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1시에 나가면 불안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격상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의 자녀나 주의 객이나 주의 나귀나 자기가 데리고 있는 수하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사실임을 여러분은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이렇게 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그날이 그리워지는 쉼이 있는 주일을 여러분들이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저 같은 사람입니다. 또 지하철을 운전한다든지 경찰서의 당직으로 주일날 근무를 서야 한다든지 회사에서 일을 한다든지 만약 그 사람들이 모두 쉰다면 아마도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을 것입니다. 전력회사에서 다 쉬어버리면 주일에 전기가 들어오겠습니까? 이런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이 주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주일에 근무하고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직업을 바꿔서라도 쉬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는 괜찮지만 오래도록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 우리의 몸이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젊은 시절 바쁘게 이 것 저 것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가 중풍에 걸린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 때 하는 이야기가 나는 너무 교만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건강을 너무나 과신했습니다. 이제야 내 불찰을 깨닫게 되었는데 때는 너무 늦고 젊은 시절 벌어 놓은 수많은 돈이 이제는 내게 의미가 없습니다. 쉬어야 합니다. 주일날 푹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피치 못하게 일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집사님이 되었는데도 주일에 교회를 잘 안 나오니까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허셀 포드라는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나온 예화입니다. 아니 집사님 주일에 왜 이렇게 못 오십니까? 이 집사님은 목장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아유, 목사님 말 마십시오. 주일이라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쉬어야죠. 주님의 날인데 아니 성경에도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너희가 건져내지 않겠느냐 그랬는데 우리 소가 어제 시궁창에 빠져서 어깨가 부러졌는데 교회 오라고 종은 치는데 목사님 그 불쌍한 짐승을 내버려두고 교회에 가야 되겠습니까? 이 질문에 목사님은 꺼내셔야죠, 그런데 집사님 주일날 자꾸 빠지거든 팔아버리세요.
주일날 피치 못하게 사회가 돌아가는 일들을 위해서 일해야 될 때 무조건 난 못한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두 번 정도면 괜찮지만 주일날마다 나오라 그러면 그 직장 옮겨야 합니다. 직업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육신을 혹사하면 반드시 일반섭리의 차원에서나 특별한 신앙의 차원에서나 우리는 손해를 입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쉬기만 하면 되느냐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두 개의 십계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와 있는 것이고 하나는 신명기 5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이 안식일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신명기서에서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안식일에 쉬는 이유를 창조와 덧붙여서 하나 더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5절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처음에 십계명을 줄 때는 하나님이 쉬셨으니까 너희도 쉬라고 말씀하시다가 두 번째는 너희가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있는데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어야 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이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의 땅에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너희를 건져내셨기 때문에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결국 나중에 우리가 지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 단지 창조의 6일과 관계된 마지막 한 날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 내시는 구속하시는 행동과 관계되어 있는 날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와서 안식교 사람들이 주님이 쉬신 날이 토요일이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한 날이 아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까? 해가 떠 있어도 이쪽에는 주일이고 다른 쪽은 토요일인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날을 정할 것입니까?
초대교회 때도 날 때문에 쓸데없이 씨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부 이단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미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출애굽기 20장의 안식일에 대한 계명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 똑같은 십계명이나 벌써 의미가 다르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큰 능력의 팔로 그들을 애굽 땅 한 가운데서 구원해 내셨으니 이것을 기억하며 한 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시고 나니까 이전에는 주님이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쉬라고 명령하시며 자신도 쉬신 그날이 최고의 의미였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은 재창조입니다. 재창조는 구속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이제 더 큰 의미는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죄 가운데 그 사람들을 새롭게 구속으로 말미암아 재창조하실 때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이기 때문에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원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해보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는 낫다. 당연합니다. 돈을 한없이 많이 갖고 기가 막히게 은과 금으로 짠 관에 누워있는 것이 살아가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전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는 최대의 사건입니다.
(예화) 우체국 시절-보험 막대그래프-영혼의 생명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그렇게 보험에 열 올릴 수 없었음-자전거 포-보험 들라고 함-젊은이 대답-내가 죽는데 1 억이 나오면 뭐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최대 사건은 태어난 사건이고 미래의 근심스러운 사건은 죽는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은 이전에는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태어났으나 죽은 채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깨닫게 된 것은 예수 안에서 내가 태어난 이 구원을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일은 대충 넘어가는데 아예 자기 생일을 세례 받은 날로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 날을 깊이 기억할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 우리는 애굽에서 소망 없이 종으로 살아갔는데 여호와의 크신 편 팔, 이 편 팔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관계되는 의미입니다. 그 편 팔로 우리를 건져 내어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구나. 그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니까 그 하나님이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할 때 우리를 구원해 내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아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대학원에서 구약 수업 시간에 조직신학 선생님이 안식일엔 쉬어야 된다. 그 안식일의 개념이 신약에도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에 무엇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우리 목사님은 오후 예배까지 설교하고 밤에 집회까지 나가는데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그러면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어떻게 했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 했냐 하면 하나만 보면 안 된다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예배도 드리지 말고 퍼 자야 합니다. 허리가 쑤실 때까지 자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이 뒤에 더 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날이 되게 하라. 그러니까 쉬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거룩한 날이 되게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옛날에 제가 직장에 다닐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월급봉투를 갖다 드리면 할머니가 먼저 봉투에서 돈을 꺼내 세어 보신 후 갈라놓기 시작하십니다. 우선 십일조를 떼어놓고 믿음이 적으실 때는 항상 그러셨습니다. 얘야, 이거 꼭 해야 되나 갈라놓는다는 것은 이미 이렇게 된 것이라고 확정해 놓고 남은 돈 가지고 살림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떼어놓고 못살아도 하는 수 없다. 거룩하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히브리말로 카도쉬인데 잘라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떼어놓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는 주일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6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날을 하나님 앞에 떼어놓고 그 날을 계산해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 것입니다. 그 날은 손댈 수 없는 날입니다. 시간이 부족해도 그것 가지고 해결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다른 엿새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평일에 몸이 아프면 하는 수 없지만 몸도 안 아프면서 주일도 아닌데 뒹굴뒹굴 굴면서 노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육 간에 해악이 옵니다. 주일날 육신을 푹 쉬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원기와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 멀쩡한 사람이 주일날도 아닌 평일에 쉬는 것은 부패와 안일, 타락과 죄악을 가지고 옵니다. 열심히 1주일을 사는 사람들만 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이 말은 그의 속에서 다른 날과는 다른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날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달력에 빨간 글씨가 나왔다고 해서 그 날이 구별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일이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 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그 날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주일에 청년들이 자꾸 무엇을 사먹으니까 그게 젊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덜 되는데 옛날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분들의 눈에는 너무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해도 안 들으니까 청년은 청년대로 불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백 명이라 교회 식당에 가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줄을 서는데 그래서 앞에 나가 칼국수 먹고 앞에 찻집에 가서 서로 교제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들어오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심포지엄을 벌렸습니다…….결론-주일날 될 수 있으면 사먹지 말라 -사먹으려면 교회로부터 먼 데 가서 사먹어라.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대안이 무엇입니까? 주일날이 다른 날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넘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시간 가까이 제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 주 내내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내 영혼의 은혜를 위해서 1시간씩 기다려 본 그런 시간이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일을 이렇게 구별시키신 것은 단순히 이 주일이 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를 우리가 받아서 우리의 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지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화) 지난 주 세 군데 신학교 집회 인도-약국에서 피로회복제를 구입-유리병 같은 것 을 줌-섞어서 먹으면 피로가 빨리 회복된다고 함-선생님, 이제는 너무나 피로할 때는 영양분을 몸 안에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을 몸에서 빼내 는 약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로회복이 더 빨리 됨.
여러분, 무엇인가를 보충함으로 육신의 힘을 보충함으로 우리의 육체가 새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일주일을 살면서 잘못 들어온 영혼의 독소가 되는 죄악, 세상적인 생각, 세속적인 욕망,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만든 쓸데없는 생각들을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통해서 그 영혼의 독소들을 빼내는 것입니다.
(예화) 한 번 이유 없이 몸이 너무 아픔-500미터도 못 감-신장이 안 좋음-식구들은 모르고 영양분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소꼬리-녹용-전혀 도움이 안 됨-약사의 말-구정물 통에 생수를 부어본 들 소용없음-빼내야 신선해지는 것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신이 그렇게 새 힘을 얻는 것과 함께 영혼의 잘못된 독소들을 빼내는 신령한 은혜의 역사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날 적당히 쉬고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세속적인 친구들과 함께 교제를 하고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일에 서로 함께 형제자매들이 모여 식사를 하며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세속적인 교제에서 묻은 때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오후에 다시 모여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잘못된 정서적인 찌꺼기들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더러웠던 찌꺼기들을 솎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또 가끔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면서 모든 잘못된 요소들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역시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볼 가치가 있구나. 이런 꿈과 용기와 신념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돌아가야지만 주일이 살아있는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일이 풍성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일이 풍성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일에 저녁예배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이유만 있으면 주일 예배에 빠집니다. 하나님 앞에 충만하고 풍성한 주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도록 한 교회를 다니면서 풍성한 주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풍성한 주일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로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도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화) 어떤 설교집-빌 하이벨스 -윌로우 크로윅의 목사님-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서 풍 성한 주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깊이 기도하고 옮기십시오. 어느 교회에 가서든 지 풍성한 주일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의 6일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게 할 것입니다.
6일이 문제라기보다도 이 하루가 문제입니다. 이 하루가 풍성하지 못하니까 6일의 삶이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일 동안의 삶이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니까 주일을 지키고 싶은 사모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난적으로 이것이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의 신앙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주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런 주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지겨운 주일 예배가 이제 끝났구나.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갈 때는 가슴속에 뭔가 선명하게 새겨져서 맞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하나님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싶으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가슴 깊은 곳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다르게 살아보아야 하겠다. 라고 하는 강한 결심이 치밀어 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6일을 담대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모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유념해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6일을 살아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내려 올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라고 어떤 사람이 그분에게 물었더니 언제나 주일이 다시 오려나 그 생각을 한답니다.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분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주일날 교회를 떠나가면서 여러분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물을 때 언제 수요일이 다시 오나 어떻게 3일씩이나 기다려야 되나 그러면서 가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와 그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예배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친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풍성하게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이것들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을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중에는 저녁예배 참석 안하시고 수요일에도 거의 안 나오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약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요일에도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배나 빨리 자랄 것입니다. 수요일 날 오히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적게 나오고 다른 교회 교인들이 더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주일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성도들과의 참된 교제가 있는 은혜로운 주일이 될 때 우리는 6일 동안 승리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승리하고 6일을 살았으니 7일에 교회 오는 것이 신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초등학교 때 서울에서 공부함-아버지는 시골에 계셨음-아버지 오신 날-시 험 본 것 가지고 와-시험 잘 본 학기에는 아버지 오실 날만 기다림-칭찬이 있음.
우리도 6일 동안을 형편없이 살아가면 주일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하며 감사하며 간증을 남기며 살 때에는 주일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주일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 앞에 매우 기쁜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토요일에 준비해 놓았다가 주일에 가족들과 함께 거하게 먹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주일이 기다려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좋은 옷을 사도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가 주일에 개봉을 하는 것입니다. 선물할 것 있으면 주일에 주는 것입니다. 남편의 용돈이 부족한 것 같아 넣어 주고 싶을 때 주일날 넣어 주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도 간직하고 있다가 주일에 터뜨려서 모든 사람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주일을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교회에서도 주일에 잘 먹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뭔가 설레는 일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일에 부부싸움을 하는 것은 최악입니다. 친구와 다투거나 교회 회의 하다가 싸우는 것도 최악입니다. 지체가 잘못해도 주일이니까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이런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주일을 지낼 때마다 아 주일이 영원히 계속되면 천국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것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5:16) 1996.3.17 주일오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에 관한 의무를 기록하고 있는 네 개의 계명을 끝내고 다섯 번째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오늘 다섯 번째 주신 부모공경의 십계명을 생각하기 전에 다섯 번째 계명부터 시작해서 열 번째 계명까지 이 여섯 개의 계명이 모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한 의무 네 가지를 차례대로 말씀하신 다음에 인간에 관한 의무 여섯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헌금을 드리고 찬송을 하는 이것만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생활이 아니라 나아가서 부모와 이웃과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는, 몸으로 부대끼는 모든 삶이 바로 신앙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섯 번째 계명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 계명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네 개의 계명은 약속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 이외의 우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 생활을 잘 한 결과이지 약속은 아닙니다. 부모공경의 명령은 부모를 잘 공경하면 이러이러한 축복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토록 약속까지 주시면서 인간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관계에 앞서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규정하고 계신 사실을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이 십계명 속에 끌어들여서 규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령하고 계신 것은 오늘날 신앙의 세계 밖에서 생각하는 부모공경의 이유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바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서 우리를 이 땅에 생산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드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결합을 통해 우리를 이 땅에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를 향해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이의 법칙을 저버리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자녀를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잘못된 삶을 가진 부모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예외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굽어진 인간의 타락한 성품을 드러낼 뿐이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성품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베풀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모의 정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양식이 귀하던 시대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자녀들을 위한 양식을 아끼기 위해서 부모가 미리 목숨을 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쪽 에스키모 인들의 경우에는 부모들이 나이가 많이 먹어서 가족을 위해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짐승을 잡는다든지 아니면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등의 일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밤에 벌판 얼음 위로 보내집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고요히 앉아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슨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맹수가 와서 잡아먹기를……. 이유인즉 그렇게 그냥 죽는 것보다는 맹수에게 자기 몸을 잡아먹히면 그 맹수가 자기 몸을 먹고 그 짐승들은 자기의 자손들이 사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자기의 몸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후손들을 위해서입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옛날 할머니를 통해 들은 것으로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하던 옛날 시대 때 아마도 고려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이 부모가 나이가 들면 업어다가 깊은 산 속에 갖다 버리는 것 이것을 고려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려장을 지내러 가는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므로 깊은 산 속으로 가는 것입니다. 연로한 어머니를 업고 가는데 이 어머니가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꺾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 간 다음 “어머니 고려장 지내러 가는 판에 무엇 하러 나뭇가지는 꺾습니까?”라고 물으니 “얘야 우리가 지금 너무 깊은 산 속으로 들어 왔단다. 네가 어떻게 집에 갈 길을 찾을 수 있겠니 가면서 나뭇가지 꺾어지고 그 밑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서 숲을 빠져나가면 안전하게 우리의 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사랑해 봐야지만 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 때문에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추스를 수 없는 어린 아이 적부터 시작해서 필요를 모두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그가 인간성을 형성하고 교육을 받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이 세상 속에 홀로 독립해서 한 세상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하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는 대부분 부모를 통해서 공급되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이 신성한 의무를 우리가 저버린다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축복 받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생물학적인 이유, 부모가 단지 자기를 낳아 주었고 길러 주었다고 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만 부모를 공경하라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 대해서 우리는 눈떠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민 간 어느 부부-맞벌이 부부-두 세 직장 가지면서 돈을 모음-그 사이 아이들 이 막 자람-한국에서 배웠던 윤리와 도덕을 잃어버림-아버지가 몽둥이로 때림- 아이의 말“부모에게는 만18세까지 자녀를 양육할 의무만 있지 때릴 권리는 없다”
지금도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오면 철저하게 교육을 시킵니다. 엄마나 아빠가 너희를 때리고 그것이 너무 아프거든 즉시 911에 전화해라 그래서 전화하면 5분 안에 경찰이 출동하는데 자기 자식을 때렸는데 그것 때문에 부모가 철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신고가 되면 자식이 우리 부모를 풀어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질서가 얼마나 무너졌으면 인간과 인간,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젠 법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모든 무너져 가는 가정의 질서와 도덕적인 모든 오류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계명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계명을 주신 것을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평범한 자연의 질서가 인간 속에 깃들여 있는 죄성과 사악함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규정하는 첫 번째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사회 속에 난무하고 있는 죄악과 우리의 타락한 마음속에 들어있는 우리 마음대로 마구 살려고 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마구 파괴하며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 타락한 성품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배받고 고침 받고 속박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회개하고 새로워지는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생물학적이고 일반적인 우리의 삶의 행복을 위하고 가정의 질서를 위한 그 이상의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방법을 가정 속에서 배우게 하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학교는 바로 가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정 속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은 단지 한 피 받아 태어난 사람들이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장소에 어울려서 잠을 자는 그것이 곧 가정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가지 기관이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 두 기관의 공통점은 모두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참된 가르침이 없는 가정은 진정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왜 가정이 이렇게 비참하게 파괴되고 자녀들이 가출하고 부모들이 가정을 버리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인성을 의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가정이 철저히 파괴되어 나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안에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그 가정이 자녀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고 육신을 자라게 하고 학교를 보내고 쓸 용돈을 주고 미래에 그에게 누리고 살 수 있는 기업을 물려주는 그것이 가정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없으면 그 가정이 가정답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가난해서 불행하거나 부요해서 행복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많이 배운 아버지가 가장 노릇을 하고 있어서 그 가정의 규율이 서는 것도 아니고 완력을 센 아버지가 그 가정을 지킨다고 해서 그 가정의 질서가 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 바깥에서도 아버지가 분명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분명한 처신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인생에 대한 모종의 교훈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가 있는 그 가정은 질서가 서 있고 계통이 서 있고 철학이 서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관을 의미합니다. 보편타당한 가치를 의미합니다. 신앙세계 바깥에서도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정을 어거하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키는 대로 살아가고 육체의 방종한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부모가 있는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가정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도 누가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 것들을 챙기고 단속할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정은 이미 가정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그 가정으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령하신 이 이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당신을 믿는 경건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이 십계명은 하나님을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방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구속받은 이스라엘의 백성들, 그리고 두 번째로 주어진 십계명은 구속의 은혜를 애굽에서 놀랍게 경험하고 4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경험하고 오늘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받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이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부모, 그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의 도리가 자녀에게 전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가장이 확실하게 예수를 믿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가정을 어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인이 가정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자식들이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대들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집안에서는 결코 선한 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장들이 되지 않으면 가정의 진정한 행복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자녀에게 말씀하실 때 그 부모는 하나님을 깊이 존경하고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부모를 자녀들이 깊이 존경하고 순종할 때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도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버지가 너무나 훌륭한데 자녀들이 개판이 되어버린 집안이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는 한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인 동시에 또한 부모에게 부여하신 가장 중요한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경건하고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어거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신앙이 자녀들에게 물려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유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아사였습니다. 뛰어난 임금이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는지 제사장들로 하여금 율법 책을 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율법 공개강좌를 열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평가하기를 전심으로 여호와를 일평생 추구한 왕이었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는 가정의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실패하자 그 다음에 왕이 된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다스려진 유대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당신의 경건한 왕들을 통해 파괴한 우상을 다시 세우는 패륜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경건한 신앙이 자녀에게 물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인 우리들을 공경하고 경외하면서 살도록 만들지 못한 교육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가 되고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고 부모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꺾으며 살아가는 것을 훈련받을 수 있는 이러한 삶을 우리들이 그들 가운데 만들어낸다면 좋은 신앙이 바로 공경하는 관계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물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만약 정반대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는 전혀 신앙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끊임없는 폭력과 구타로 자녀들을 꼼짝 못하게 굴복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삐뚤어진 자아상을 가진 자녀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시라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치가 떨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또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시다.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뜨거운 사랑, 애틋한 사랑을 느끼며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기를 원하게 되는, 시종일관된 약속에 신실한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셔도 우리에게 그렇게 뜨겁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하찮게 생각하고 친구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방만하고 방종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생각들을 자녀들에게 창조해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부모가 경건한 신앙이 없이 자녀들을 폭력과 위협 등으로 압도하고자 할 때 자녀들 속에는 권위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을 공경케 하는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로 공경케 하시는 방법은 우리를 끊임없이 감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다섯 번째의 계명을 말씀드리면서 특별히 부모인 여러분들, 가장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제가 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똑바로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진정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본 자녀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인 그 부모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따라 부모로서 공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그 부모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도를 배우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이 자녀들, 자신 앞에 착하게 순종하고 자신을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그러한 은혜로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가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도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의 부모는 이렇게 우리가 깊이 무릎을 꿇고 존경할 만큼 인격이 훌륭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신앙을 이어가는 도에 있어서 우리가 깊이 존경할 그러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감화력을 가진 부모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불행하거나 완전한 인생을 살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뭔가를 요구하면서 우리는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부모 앞에 부모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면서 그렇게 살아왔는가? 그러나 얘들을 야단칠 때는 그것을 잊습니다. 아이들을 야단치고 혼낼 때는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잊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공부는 안하고 딴 짓만 하는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야 이놈아 아브라함 링컨은 너 나이 때에 통나무집에서 빌려온 책으로 공부하느라고 밤을 새웠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맞아요, 선생님만 할 땐 대통령이 되었죠.
우리는 우리가 그 부모의 요구에 온전히 부응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을 부모의 결함, 존경할 수 없는 인격 그리고 도저히 일관성 없는 인생관, 여전히 신앙 밖에서 살아가려는 고집 이런 것들을 보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우리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부모의 마음에 합한 적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에 합하지 않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를 통해서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우리들이 주님을 공경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바로 믿으며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부모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깊이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그렇지 못한 부모들, 자식 앞에 자신의 인생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부모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 자녀들조차도 부모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한다는 이 사실, 이러한 가정에서 살아간다는 그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보면서 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은 집에서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일이면 교회 가라고 손목을 이끌고 야단치고 혹은 구슬리고 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소원과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갈 수 없고 신앙생활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여러분의 부모가 그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하지 못하도록 핍박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경험을 못해보셨으니까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너무 비참합니다.
(예화) 목사가 된 어느 형제-부모님과 형제들까지 핍박-불교집안도 아님-성경책 찢어서 아궁이에 집어넣고 아들을 교회 나간다고 개 패듯이 팸-좋던 가족관계가 갈라짐.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신앙을 포기할 수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을 포기할 수 없고 복음을 붙들고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주어야 할 부모와 가족들이 자기를 그렇게 핍박합니다. 심지어는 호적을 파 가지고 가버리라고 합니다.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하는 극단적인 얘기를 퍼붓는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에 올라타서 성경을 폈는데 이사야서가 나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눈물이 쏟아집니다.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우는 것을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 서있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여러분의 부모가 부족하지만 회심해서 예수를 믿고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손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아마 바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러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없기 때문에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그러한 가정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우리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우리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고 그분들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만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경외하며 살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대한 최대의 공경은 그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가져다주는 좋은 음식, 아름다운 의복,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아름다운 의복 몇 년 입으면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십 년 길어봐야 이십 년……. 필요하지만 그분이 참으로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런 효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부모를 둔 사람에게 의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퇴원하셔서 먹고 싶은 거나 실컷 잡수시게 해 드리십시오.” 뭡니까? 기왕 죽는 것 잘해 드려라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방법의 효도만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방법, 부모님이 예수 믿게 해 드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자녀들은 최대의 사랑으로 최대한 노력을 해서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부모가 아직까지 그러한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혹은 일관성 없는 삶을 살아오고 만약 여러분의 자녀였더라면 많이 야단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삶을 부모가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경건한 부모를 공경하라 혹은 너희 부모가 경건하다면 공경하라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기대처럼 완전하고 경건한 부모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그 부모를 공경해야할 의무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지혜자는 부모로서 자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질이나 그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것도 훌륭하지만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모든 선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노인대학에 모여서 제법 그래도 젊었을 때 한 가닥 했던 노인들이 모여서 서로들 그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한결같은 이야기가 “요새는 절대 빨리 물려줄 것이 아니다” 유산을 빨리 물려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유산을 가지고 분배를 안 해주고 쥐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분배될지 절대권한이 부모에게 있으니까 긴장이 있는 동안에는 며느리도 잘하고 자식도 잘하고 경쟁적으로 잘합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상대로 사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자는 세상의 모든 부귀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로부터 받고 싶었던 최대의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여러분,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아니고서 라도 결국 부모와 우리와의 관계는 그 부모가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관계를 끊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공경하며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환경마다 모두 다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부모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경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기도하면서 마음을 부모에게 주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것이 정말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부모에게 마음을 주지 아니하면 우리의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배우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십일조를 두둑이 가져오고 감사헌금, 건축헌금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음을 드렸으니까 사랑의 왕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마음을 줄 때 부모의 허물이 오히려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을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오늘 그분이 나의 아버지요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에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 이렇게 부를 때 가슴 깊이 밀려오는 그런 그리움은 완전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허물이 많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놀라운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공급해주시고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이 우리의 인생을 스쳐갔지만 아무리 부족해도 그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이름 세 글자는 기쁨이었고 동시에 슬픔이었습니다.
(예화) 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의 할머니와 고모님들이 계셨습니다. 그 중 딸 하나가 지방에 내려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니고 있었습니다.―잘못된 소식-죽은 것 같다-당신의 마음을 아프게만 한 딸-죽었다는 소식 에-확인도 안하고 온 몸의 경련을 일으키며 떪-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으나 그 분만 떠심.
이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 눈에 보기에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오고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그분들의 마음의 세계 속에서는 우리 이름의 석 자를 외울 때 그것은 기쁨이었고 서러움이었고 눈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이름 석 자만 부르면 가슴 깊이 밀려오는 목 메이는 사랑을 느꼈던 유일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모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가지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오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허물들이 자녀들에 의해서 용납되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약 부모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에 비례해서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모로부터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한없이 사랑만 받아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회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들이 우리들을 대할 때 우리가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했거나 건강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 주거나 우리를 귀여워 해주고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닐 때 꼭 같은 지점에서 버스를 타는 어느 아주머니를 무려 3-4년 가까이 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휠체어에 있던 아이가 3-4년의 세월이 흐르니까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중학생이었을 때 처음 봤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커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로구나. 그는 결코 자기의 자식이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하거나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정도에 비례해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무너져가기 쉬운 이 가정의 모든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한 첫 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거룩하고 신령한 의무를 기쁘게 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수식어도 없이 그가 바로 너희를 낳았고 그가 너희의 부모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너희는 그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느니라. 그것은 내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하나님이 인간 세계를 향한 첫 번째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들이 때로는 여러분이 보기에 형편없는 삶을 살 수 있고 지금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그 부모에게로부터 가슴 아픈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자매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며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커다란 은혜가 있습니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면서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녀로서 이렇게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와의 관계가 상처 난 관계라면 우리의 사랑과 믿음으로 그 상처의 관계가 치유되는 일들을 우리들이 친히 이루어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위대한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음 깊이 부모를 먼저 용납하는 일들을 공경하는 일들 이전에 먼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모를 마음에 용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와도 영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부모를 용납하지 못해서 그 마음을 부모에게 줄 수 없는 이런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심히 곤란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공경이 문제가 아니라 용납이 문제가 되는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부모님을 마음 깊이 용납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납을 넘어서 공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들이라면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박해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쓸어안고 사랑하며 치유하며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이 하나님을 이미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이 계명 앞에 새롭게 우리 자신을 세워서 부모들이 자식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새롭게 세우고 가정 전체가 치유 받고 새로워지는 이런 은혜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세월이 흘러가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8. 살인하지 말라(신5:17) 1996.3.24 주일오전
“살인(殺人)하지 말지니라”(신5:17)
지난 시간에는 인간 세상을 향한 계명 중 첫 번째 것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강론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두 번째로 살인하지 말지니 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십계명 중 이 여섯 번째 계명만큼 여러분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계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한 여러분 가운데는 아무도 살인 전과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첫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 십계명은 신약의 빛을 받아서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이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밖에 없었던 깊은 의미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희는 이것을 하라 이것도 하라 이것도 행하거라 그럴 때 나는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다 하시지 못할 텐데 여기에서 쓰인 히브리어는 강한 금지 명령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이 계명은 결국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더 깊이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이 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가 계속 갑니다.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가다가 아직 살인이라는 라인에는 닿지 않았지만 그 길로 행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에게는 대단한 진노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 선을 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어긴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살인을 성경에서는 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은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책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찬미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살아있는 짐승을 혹은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을 죄악으로 보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런 훌륭한 의사나 불교인들이나 이런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자비심이 뛰어나다면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부득불 죽여야 했던 수많은 병균체들 그리고 지금도 끝없이 인간을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여기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모양과 형상을 가지고 창조하신 인간을 살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에서는 인간을 살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도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고는 신문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살인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팔도에서 살인이 한 번 일어났다 하면 보름 동안 나라 안의 뉴스거리랍니다. 세상에 함경도에서 누가 사람을 죽였대 그러면서 제주도에 있는 사람들까지 벌벌 떠는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만약 신문에서 지난주에는 살인이 이 땅에서 한 건도 없었습니다. 라고 신문에 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뉴스거리가 될 만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살인이 일반화되어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살인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영혼의 피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한 사람을 만나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살인한 즉시 그 사람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인은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충만한 은혜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가 무엇인가 죄를 범하게 되면 즉시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슬퍼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가 그만 두어도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 살인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담 하와의 가정입니다. 그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성장했습니다. 한 아들은 양을 치고 한 아들은 곡식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육식도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물가에 아름답게 열매 맺은 과일을 따 먹으며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가인과 아벨 사이에 미움이 있고 나서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잠시 후 아빠와 엄마가 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금 전까지도 따뜻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한 아들이 차갑고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인을 하고 난 다음에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끊어지는 큰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를 비롯한 그의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타락과 불순종과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살인들은 지금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운데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무나 자주 쉽게 그리고 별로 살인할 이유가 없는 그런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수많은 살인행위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돌아가는 세태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도 살인의 영향을 암시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살인으로 유명한 곳은 시카고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살인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에서는 신문에 시카고 스타일의 살인이 자행된다고 합니다. 천불 내지 삼천불만 주면 언제든지 살인을 청부맡아 주는 업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카고 슬리퍼라는 유명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다음에 콘크리트로 만든 커다란 슬리퍼를 신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바닥에 깊이 잠기게 하는 이런 수법을 시카고 슬리퍼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어디 시카고만이 그렇게 살인으로 이름난 도시이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 마음대로 처리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이 끔찍한 일들이 놀이 삼아서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 이런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고야 마실 것입니다. 왜 살인하는 것이 그런 극도의 미움이 되는가? 극도로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우선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손에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나물을 베어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아침에 육류를 드시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어느 소 어느 돼지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필요를 따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죽어가기도 하고 사육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 너희의 생명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태어나고 한 사람이 죽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각자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하시겠지만 인간이 타락하고 죄 가운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지만 그러나 참으실 수 있는데 문제는 사람을 죽이는 것 생명을 앗아가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 권리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수 있고 하나님 홀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취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마치 인간을 처단하고 인간의 생명을 끝내는 그런 주권들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학대하고 살인하는 이런 일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는 커다란 범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엄위와 영광을 나타내시고 시내 산에서 보여주셨고 이제 이 계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듣고 있는 사람들은 사십 년 동안 애굽의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의 온갖 은혜와 자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의 땅 가나안이 눈앞에 보이는 이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들을 다시 한 번 들어야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이런 살인이 얼마나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살인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이 지워지지 않게 깊게 아로새길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을 하는 이유는 반드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앞에서 죽어 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끼는 대가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의 극단적인 발동이 곧 살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렸고 또 한 사람은 곡식으로 제사했습니다. 제사 드리기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앞에서 자기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자기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는 것을 보는 그 순간에 미움이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사소한 유익을 향한 집착이 엄청난 살인으로 빚어지기도 합니다. 여러 번 신문에 났습니다만 공중전화 박스에서 여러 사람이 맞아 죽었습니다. 전화 좀 빨리 끝내면 좋겠는데 계속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전화 좀 빨리 끝내라고 하니까 내가 먼저 왔는데 당신이 뭐냐 아니 이 자식이 하면서 한 대 갈겼습니다. 그리고는 공중전화 부스는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로상에서 앞지르기를 하려고 하는데 계속 못 가게 가로막는 자동차를 몰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개인차를 몰고 있는 경찰관이었습니다. 뒤차가 와서 앞차를 가로막고 불러 내렸습니다. 이 자식 운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몇 대 때렸는데 피범벅이 된 채 죽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죽음을 불러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살인이 하나님 앞에 회복될 수 없는 파멸을 몰고 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살인은 낙태를 통해서도 처절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년이면 수십만에 해당되는 어린아이들이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처참하게 기계로 살아서 움직이는 그 아이를 기계를 집어넣어서 머리부터 박살내서 그 찌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살인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 문명의 거리 한 구석에서 버젓이 그것도 돈을 받고 간판을 내걸고 행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인 당할 기회를 피해서 출산한 아이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아주 어린 아이 적부터 인간을 죽이고 파괴하는 일들을 재미로 생각하며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대로나 총 같은 장난감들을 만들어 주지 말자 그러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지각 있는 사람은 이런 반론을 재기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린 아이 적부터 대포와 총을 가지고 노는데 프랑스 어린아이들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인형의 옷이나 입히면서 자라면 이 나라의 미래를 누가 지킬 것이냐 말했습니다. 이미 어린 아이 적부터 인간을 살인하는 그 일과 그런 일들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5,6년 전에 처음으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끔찍한 살인 장면입니다. 사람을 끌고 가서 두들겨 팬 다음에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면서 벽이 핏빛으로 물드는데 나무를 자르는 기계톱을 가지고 인간의 다리를 자르는 장면입니다. 이런 것들이 버젓이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고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아이를 화장실에 데려가서 혓바닥을 자른 사건은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끔찍하게 린치를 행하는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암시를 받은 것입니다.
생각은 언젠가는 행동을 낳고 행동으로 옮겨진 그것이 누적되면 그것은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속에서 먼저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의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다시 한 번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땅에 사람들을 만드시고 그 위에 특별히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몇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미움과 살인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에 뭘 훔쳐갈 것이 있다고 칼을 가지고 들어오는 어리석은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생각에는 월요일에 오면 뭐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주일에 헌 금을 걷어서 교회에 넣어 두었을 것이라고 어수룩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데 어느 교회에 대단한 사모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사모님이 실질적인 당회장처럼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짓는 땅 자체를 사모님이 내놓으셨 습니다. 대장부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문을 열고 복면을 한 강도가 들어왔음.―칼을 들고 있음-사모님이 방문을 열고 내려오면서 하얀 고무신을 손에 쥐어 듦-야 이놈들아 이리 와 봐라-그러니까 도둑들이 도망감.
어떤 교회-권사님들이 모여서 철야를 하고 있었음-도둑이 칼을 들고 들어옴-이 보게 젊은이 얼마가 필요한가? 이까짓 몇 푼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날이 새면 은행에서 찾아줄 테니 말해보게-복면을 풀고 칼을 내려놓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도 사실은 주일학교 때 교회 다닌 적이 있다고 고백함 그래서 그가 예수를 믿게 됨.
여러분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방법으로 살인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면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과 창을 펴서 보습과 쟁기를 만드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까지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사람이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살인의 칼을 버릴 뿐 아니라 살인의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그 살인을 그만두게 만드는 데까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사람을 죽이는 영화들을 어린아이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충만한 사랑과 화해와 용서로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백주에 수많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이런 상황을 우리는 개탄해 마지않습니다. 미국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42%가 총을 휴대하고 다녀야 할 판이라고 하니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이런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는 10만원만 들고 가면 권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이 실렸습니다.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의 테러용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하려다가 적발된 폭력 조직배들도 드러났습니다. 만약 우리가 경고하고 경계 받고 기도하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는 총에 맞을 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안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살인의 원인이 어디에서 나는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계명을 풀면서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에게 이르되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의 원인이 미움에 있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피 묻은 칼을 보기 전에 피 묻은 마음속의 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가 결국은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이것들이 살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우리 속에 있는 그 미움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삶에 대단한 어려움들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 살인의 계명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는 감사하옵나이다. 나는 아무도 죽인 적이 없고 나는 낙태를 한 적도 없나이다. 나는 누구의 생명을 앗아간 적도 없사옵나이다.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네 가슴에서 칼을 맞고 죽어 가는 수많은 나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살인이 있고 난 후에 비로소 한 살인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에덴의 낙원과 같은 마음에서 살인의 칼을 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수없이 미워하고 수없이 질투하고 시기하는 가운데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그 사람의 시체를 묻고 나서야 비로소 살인이 행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하는 사람 치고 인격적으로 정말 고매한 사람을 만난 적이 저는 없습니다. 내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래도 나는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자기나 뒤끝이 없지 당한 사람은 계속 뒤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수많은 마음의 살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입을 통해서 그 미움을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교회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황폐해지고 있을까? 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분노의 마음들을 우리는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살인은 독소와 같이 우리의 영혼에 피를 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할 때 누군가를 사랑할 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만 생각하면 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액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 몸에 퍼집니다.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속에서 미움이 솟아날 때 그것도 똑같은 영향을 정반대의 의미로 우리의 영적인 삶에 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원망과 미움의 쓴물이 솟아날 때 그 쓴물이 우리 속사람에 골고루 퍼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던 입술이 굳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기뻐하던 우리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주와 동행하며 살고 싶었던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속에서는 그 큰 분노가 일어나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풀어진 실타래처럼 혼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주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지킬 만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킬지니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도로 상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욕설들과 사소한 일로 치고 받는 엄청난 폭력들…….인천을 가다보면 톨게이트가 있습니다. 영락없이 하루에 한 건은 봅니다. 점잖은 신사에 차도 새 차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이 새끼 하면서 싸우는데 어린 아이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 보실 때 얼마나 유치하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모든 미움은 살인으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별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이 미움을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습니다. 피 묻은 칼과 욕하는 입술에 묻은 침은 같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그 사람을 죽인 칼을 닦아내고 또 다른 사람을 찌르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었습니다. 그런 칼을 우리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를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우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로 하여금 그 관계를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분을 품되 해가 지기까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옳은 일 때문에 분을 내거나 노를 내지 않을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분노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분노가 너희를 살인죄로 데려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시체를 쌓아가면서 풍요로운 영적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연구대상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기를 원하는 극단적인 분노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매일매일 시체를 쌓아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인 그 칼을 깨끗이 씻고 주일에 교회에 옵니다마는 그러나 신령한 은혜가 그의 마음속에 깃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짧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다양한 삶의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것이 상처로 남아서 그 상처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이런 일들을 얼마나 많이 자행하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선택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려고 할 때 우리를 끝까지 미워하며 살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멀어져서 동물적인 삶으로 나아가든지 다시 말하면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죽이든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든 내 자신을 죽이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진노하는 이 마음의 작용이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기까지는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공연히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 인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끊임없는 살인을 내 안에서 자행하기까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 누구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미움을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살인을 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용납하셨습니다. 마음속에서 사람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그 사람을 찌르며 그 피 묻은 칼을 안고 살아가는 이런 한 사람의 삶이 있기까지 이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살인하고자 하는 내 자아를 죽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인범이 서울 시내에 나타났다 하면 온 시민들이 두려워하고 거리마다 경찰차들이 몰려들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복잡하게 심문하고 검색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이 작은 마음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죽게 하고 살인하려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사람을 찾아다니는 그런 살인하려고 하는 자아가 우리 속에서 살아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있겠느냐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살인 대상자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우리는 몇 사람의 시체를 우리 가슴속에 묻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그런 총알과 같은 말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속에서 사람들을 미움으로 살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를 묻고 우리는 피 묻은 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가인에게 물으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 다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워함으로 죽여서 우리 가슴속에 미움으로 묻었던 그 수많은 이웃과 가족들과 사랑하며 살아야 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너희가 그들을 어디에 묻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만 이렇게 물으셨던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화목케 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벗어나서 끊임없이 마음속에 사람을 죽이고 그것으로 위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 수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부모님이라면 네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내요 남편이면 너의 짝은 어디 있느냐고 물을 것이며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여러분의 이웃이라면 너희의 이웃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해 물으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그는 말했습니다. 난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나이까? 분명 피 묻은 돌멩이를 한 손에 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마음속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죽여서 피 묻은 시체로 묻으면서도 네가 미워해서 죽인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여러분이 나는 사람을 살인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얼마나 더 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인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감추며 항변하는 가인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 울부짖는구나. 우리의 가슴속에 묻어둔 수많은 사람들의 피 소리가 고통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며 울부짖을 때 진정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높은 윤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 율법 아래 칼과 축복을 두었을 때는 너희가 단지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되었지만 이제 내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 너희를 향한 내 사랑이 무엇이고 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은 바 된 너희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이제 너희는 너희의 시체를 가슴에 묻는 것 그것부터 고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내 마음속에 살인하려고 하는 자아를 죽이는 것보다는 한 번 죄를 범함으로 살인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살인행위를 그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람이 내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미움을 이미 먼저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내 삶의 소중한 것을 수없이 빼앗기고 나로 하여금 이렇게 그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 장본인이 그 사람 그 관계 그 이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변색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피 묻은 돌멩이가 교회 안에 가득하고 피 묻은 칼이 교회에 잔뜩 쌓여 있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드려지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 중이라도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 들어올 때 총과 칼을 풀어놓고 들어오는 법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이 미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 미움의 쓴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 계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슴속에 살인으로 묻어 두었던 수많은 미움과 그로 말미암는 범죄를 오늘 고백하며 살인자요 폭행자였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수많은 미움과 살인은 하나님 앞에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는 살인과 미움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으로 살인하고 속사람으로 사람들을 살인하며 피 묻은 영혼이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살게 하신 한 방법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이렇게 숙명적인 살인과 미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은 죄를 범한 우리들을 죽여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게 하심으로 화해와 용서의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받아야 했던 하나님 자신의 그 처절한 고난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했던 고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미움이 그치지 않고 있다면 누군가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미워하는 가족들 속에 그 미움이 화해로 바뀌기 위해서 누군가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물과 피를 쏟고 그렇게 마땅히 죽어가야 할 살인자들을 위해서 대신 살인을 당하시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늘날 그 복음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화해의 역사를 만드는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까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속에 있는 이 모든 미워하는 자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일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 자신이 깊이 죽어질 때 우리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의 불로 피 묻은 칼을 들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며 마지막에는 그 칼로 자기를 찌르며 죽어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살인자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칼을 그 불로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호미와 괭이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장엄한 영광의 임재 가운데 시내 산에서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복락의 땅 진정한 우리 영혼의 가나안에 우리가 들어가 하나님의 놀라운 부요한 축복을 누리기 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십계명을 들으며 이 살인과 미움의 문제를 정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9. 간음하지 말라(신5:18) 1996.4.14 주일오전
“간음(姦淫)하지도 말지니라”(신5:18)
우리는 이제 일곱 번째의 계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었고 그 전 시간에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계명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서는 이 열 개의 계명 가운데 가장 크게 와 닿는 계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유교사회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교훈들을 받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문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옛날에 이 성경이 쓰였던 문맥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쓰였던 15세기 당시 문맥에서 본다면 간음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독특한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여행하면서 만나고 경험했던 모든 종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종교 생활 중심부에 이 간음의 문제가 들어와서 자신의 신들에게 경배하면서 함께 성적인 환락을 즐기는 이 일이 조장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두 성적인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숨 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그 광경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해서 노출되어 있고 자유롭기 때문에 이제 새삼스럽게 간음하지 말라 심지어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이런 식의 논리는 이제 성경 속에나 고요히 들어 누워있는 것이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이런 것들에 대한 경계심은 모두 무너져 버리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는 수많은 광고들은 모두 성적인 묘사와 성행위에 맞춰서 사람들의 성감대를 자극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판매고를 올리는 유익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탄복할 정도로 인간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성에 대한 심리를 자극해서 물건을 구매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기법들이 바로 상품을 판매하는 광고에 도입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모든 문화가 개방되고 성적인 삶들이 자유로워지고 있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들으면서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렵고 이 계명 자체가 개방된 이런 시대에 얼마나 낯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시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적인 관대함에 대해서 분명하게 쐐기를 박으면서 너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다른 살인하지 말라는 문제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는 문제라든지 거짓증거해서 죄 없는 사람을 벌 받게 한다든지 하는 이런 문제에 개입하시는 것은 하나님다워 보이지만 간음을 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만약 강간하지 말지니라. 고 한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좋아서 누구에게도 물질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이러한 인간적인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까지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위엄을 깎아 내리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말초적인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너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주님은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간음하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오늘날 서울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서울에는 피 묻은 돌멩이와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할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치워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체만이 가득 찬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엄격하고 지나칠 정도로 단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러한 죄악들이 깃들이는 것을 안 된다고 못 박으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여러분들이 그 당시에 이런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두 관대한 종교, 관대한 사회 속에 이스라엘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도 이러한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간 후 가나안 속에 있던 원주민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사상은 풍요신앙이었습니다. 풍요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농경문화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풍요로움입니다. 풍성한 수확입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솟아나는 수많은 나무와 곡식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이런 것이 농경 사회에서의 최고의 가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이 모든 종교와 절대적으로 끊도록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남김없이 진멸하도록 말씀하셨던 이유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이 문제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는 최고의 방법이 남아있는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쓸어버리는 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남김없이 진멸하라 라고 하는 그 말은 사람들을 죽임으로 그들 가운데 유행하고 있던 사상이 이스라엘 가운데 유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쐐기를 박으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풍요신앙 뒤에는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출토되는 농경문화 속에서의 바알 종교 아세라 종교를 비롯해서 이러한 많은 이방 종교 속에 나타나고 있는 여성의 신상들은 대개 젖가슴이 크고 몸집이 좋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유는 그것이 풍요로움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많이 낳고 낳은 많은 아이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여인의 모습들이 풍요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런 풍요로운 번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는 성행위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결코 이 문제에 있어서 이방의 사상이나 생각을 좇아가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의 모든 사고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독특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러한 풍요의 신들을 섬기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희는 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은 그런 종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성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통해서 일어나고 일이라는 사실들을 못 박아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여있는 삶의 상황 가운데서 성적인 삶이 인정되고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지키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인간 속에는 그렇게 간음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쳐 가는 유혹을 통해 우리는 간음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자극 받지 않으면 훨씬 죄를 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는 자극이 주위에 계속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도시를 정복하고 들어가도 그 중심자리에는 그러한 문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계명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이 계명을 지키는데 연약한 이 시대 이제는 이러한 마지노선들이 교회에서 조차도 무너져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타락의 성품도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그러한 물결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덴마크를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어떤 집의 딸-남자친구가 찾아옴-밤11시가 넘도록 가지 않음-우리 올라가서 잘게요-그래 잘들 자라-위층 방은 하나-물어보니 같이 잔다고-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저 남학생의 건강진단서를 확인해 봤음
이렇게 이미 성적인 물결이 세상에 관영한 가운데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이것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회적인 통념과 윤리의식을 붙잡고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간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해악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그 죄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고백하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용서하셨어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그의 영적인 삶을 괴롭힙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마치 줄이 끊어진 화현과 같이 소리를 발할 수 없는 악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졸지에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빈정거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교통하고 그 감각을 잃어버린 이런 육체로 변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간음의 죄만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겠습니까? 모든 죄가 다 이렇게 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간음의 죄에 대해서 깨끗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영적인 교제를 깊이 나누며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우리의 신령한 삶을 파괴하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파괴하고 좌절시키고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 커다란 고통과 좌절을 안겨다 줍니다.
모든 죄가 다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히 이 계명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의 단순한 윤리의식이 아니라 왜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시기 원하셨던 주님이 왜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해서 간절하고 엄격하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되다 주님의 마음과 그 심정과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붙들고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러한 계명을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가 하는 것을 깊이 알며 하나님 앞에 이 계명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명의 심각성과 함께 주님이 이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 이유를 우리가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이 이미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아셔야 합니다. 영화나 TV나 혹은 잡지책을 보면서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상품화되어 있는 그 사람들은 그런 순간부터 그 아름다움은 찬사를 받을 만한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성(性) 개방을 물결을 대항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국회에서는 간통죄를 폐기해야한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제 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 된다고 논의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이제는 성이 왜곡되어서 남성과 남성이 여성과 여성이 함께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성경에 예언된 대로 짐승과 더불어 사람들이 부끄러운 일들을 하는 이 끔찍한 성적 타락이 오늘날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런 물결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거룩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자신들의 환경 속에서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일들이 너무도 힘들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에게 커다란 세상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안겨주는 이 계명을 우리로 하여금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실 가정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교회요 또 하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세우시고 왕을 세우시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하셨지만 가정을 세우실 때 하나님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인간의 창조 즉시 한 가정을 세우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가정은 결혼 적령기에 이르고 생식의 능력을 가진 남녀가 함께 살아있는 것 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정이 아닙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동기가 되어서 결혼하는 것은 이미 출발부터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정 속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나의 주인이요 내가 그의 소유라고 하는 남녀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오는 고백이 정신적인 결합을 지탱해주지 못하는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이 계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성적인 생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순히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성적인 삶은 하나님이 한 인격과 한 인격을 정신적으로 깊이 결합시키고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 때의 성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받을 때쯤 이미 온 이스라엘 주위의 나라와 세상이 다 타락해 버려서 그 타락한 가운데서 백성들은 성을 신을 숭배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된다 것입니다. 이 성적인 삶을 마치 자신의 소원을 비는 데 사용하거나 자신 속에 깊이 묶여있는 성적인 억압을 해방시키고 푸는 데 이러한 성행위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올바른 성의 사용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 성의 문제가 가정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이라도 그 시대 유행하고 있던 사조의 영향을 벗어나서 원래 하나님이 성을 창조하시고 그 성을 누리면서 살아가게끔 만드셨던 창조의 원리에 부합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하나님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소 버거운 계명을 주신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정의 정신적인 결합을 위해 이러한 성행위가 사용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신적인 결합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성적인 만족을 위한 부부의 생활도 엄격하게 보면 성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시고 그 가정에 이러한 성적인 삶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성적인 결합을 통해 한 사람과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사람과만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그 속에서 그 한 사람만이 내가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하나님은 확인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정에서의 성생활은 예배와 다름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작은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한 인격에 매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한 사람의 인격과 결합합니다. 나눠지던 사람들이 그러한 성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삶에 문제가 온 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일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정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의도와는 다른 방법으로 성이 사용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파괴로 보고 막으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타락하고 범죄하고 성적인 죄를 짓는 이유 그래서 소중한 가정이 파괴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매우 타락해서 심하게 말하면 죽기 위해 태어나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예외적인 정신세계를 제외해 놓고는 대부분 타락한 가정들을 보면 타락하기 전에 먼저 육체의 타락이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합의 파괴가 먼저 왔습니다.
그 한 예를 여러분들에게 성경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부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이야기한 다음에 말을 확 돌리면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부의 관계를 얘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 깊은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다가 부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에베소서에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다가 보십시오. 신앙이 타락하고 세상과 짝하는 영적인 간음 행위가 있기 전에 먼저 어떠한 일이 있습니까?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타락이 먼저가 아닙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이웃집 여인과의 잠자리에 뛰어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면서 창녀의 소굴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정신적인 풀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세상과 더불어 짝하고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영적인 간음의 행위가 있기 전에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멀어집니다. 교회생활이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는 교회에 나와서 늘 눈물 없이는 기도할 수 없고 진실한 마음의 기쁨 없이는 하나님께 섬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격적으로 드리던 예배가 시시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허리를 숙이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며 섬기던 진정한 기쁨이 이제는 시시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렇게 교회에 묻혀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궁상맞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내 인생이 좀 더 찬란하고 빛나는 인생이 없을까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틀림없이 이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마음이 멀어지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문제가 덜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는 것만큼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영적인 가정입니다. 그 가정 속에서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기쁨을 주고 그 속에서 매일 앞에 우리들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결합하는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배 속에서 확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 속에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주님과 결혼한 신부라는 사실을 예배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혼인관계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 눈길을 주었던 우리의 마음의 부패를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이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 이외의 다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치 내가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어떤 남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눈길을 준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면 주님은 더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배 속에서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없이 정말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그러한 희망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고 세상과 짝하고 간음하는 완전한 타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 큰 죄에 빠져 살아가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스도 예수의 혼인관계 속에서 부어주시는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며 가득하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이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감격해하는 여성이 타락한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있고 나서 그들은 세상과 짝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성적으로 타락하지 아니하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두 사람 있습니다. 하나는 타락한 본인 자신 그리고 두 번째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내나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 한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해서 이혼하게 될 때 상대방도 평생 그 죄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깨어진 가정을 가진 사람이 가정을 그렇게 해서 날려버린 그 사람이 이혼을 하고 목회자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적으로 타락했던 사람 그래서 가정이 날라 간 사람이 분명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또다시 사역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한 가정이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문제가 그 가정에서 발생하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은 둘 다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도 물론 하나님이 치유하시지만 둘밖에 없습니다. 죄를 범한 자기 자신과 자기의 남편 혹은 자기의 아내입니다. 요즘은 상대방 중 하나 살기 싫은 사람이 상대방이 타락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타락하면 얼씨구나 하면서 잽싸게 재혼해버리는 사태가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간음하면 한 쪽 상대방이 그 이유를 제기해서 결혼을 해도 좋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지 하여야만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성적인 타락이 먼저 있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가정 속에서 부부와의 결합으로부터 먼저 멀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이 함께 살다가 남자나 여자가 타락해서 문제를 일으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혼자가 아니라 즉시 둘 다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계명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가정의 실질적인 결혼 생활이 파괴되기 이전에 벌써 정신적인 결합의 파괴가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은 가정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적인 사용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허락한 한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들을 일으키거나 어려움을 느끼게 될 때 서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적으로 결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맺어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오직 그 사람과만 하게끔 만드셔서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을 막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은 결코 한 여인과 정신적인 결합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깨끗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가정을 우리들이 지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모두 깨어서 서로 깊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문제가 인간이 온전히 지키면서 살기에 어려운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청난 죄의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죄 가운데 우리가 가장 변명의 여지없이 예민하게 느끼는 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끊임없이 데리고 가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 앞에 그 모든 문제를 치유 받고 용서받기까지는 자유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죄만이 아니라 모든 죄가 다 그러합니다. 다른 죄에 대해서 우리들이 예민하지 못한데 이 죄에 대해서는 특별히 예민하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가 가져다주는 그 무서움과 비참함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모든 죄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해서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그것만이 정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이 계명을 해석하면서 우리에게 이 계명의 의미하고 있는 복음적인 의미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러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계명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궁극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이 계명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해석해 주신 이 복음을 통해서 이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삶을 주관하고 있는 우리의 모든 영혼의 세계 우리의 모든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지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풍성한 영적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풍성한 영적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간음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풍성한 영적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도 음욕이 지배할 수 없도록 오직 하나님 앞에만 드려진 사람들 가운데 풍 영적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지 이 세상에서 간음만 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 계명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일은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음욕을 품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억압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묵상과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바치며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너희의 삶 뿐 아니라 너희의 모든 것을 다 나의 것으로 삼기를 원하신다는 그 주님의 마음을 오늘 이 일곱 번째 계명을 통해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일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악행들을 잘라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면에 있어서는 의로운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오늘날과 같이 유혹이 창궐한 이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 모든 악한 유혹들로부터 우리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 앞에만 우리의 마음이 드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변화를 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요구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이렇게 주일에 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헌금 몇 푼하고 아이들이 가져오는 가정환경 조사서에 우리 집안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적어주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닫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 어려운 우리의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 바쳐지는 이런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갱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의 소유로 삼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과 마음과 뜻과 성품 모든 것을 다 드렸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누리는 실질적인 영적 삶의 변화가 없이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에 율법 시대와 같이 누가 우리를 쳐서 죽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돌무더기에 쌓여서 죽는 것보다도 못한 수많은 고통이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 젊은 남성이 유서를 써놓고 자살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마지막 고백은 나는 두 사람 다 사랑한다. 그리고는 죽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범죄에 빠진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이 은혜의 시대에도 이 문제에 있어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고통을 주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화) 통나무가 쌓여있는 어느 도회지의 한 공사판-75세가 넘어 팔순이 다 되는 어느 노인-두 손을 떨며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담배를 달라고 애원함-젊은이는 목사님 임이셨음-자기는 담배 안 핀다고 하며 얼굴을 드려다 봄-감리교에서 뛰어난 영 적 지도자였음-모든 목회자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그런 사람-타락하고 나니 회복이 안 된 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담배를 구걸하는 처지.
보다 이 계명을 범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형벌은 무섭습니다.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셨고 당아새와 같이 수많은 밤을 고통과 눈물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도 눈물도 이 사람의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지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해결 받지 못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여전히 그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년에 죄를 범한 그 범죄가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않아서 노년에도 그 실패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 전쟁터에서 한 숨에 퇴장시키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모르지만 악한 세력들은 우리의 약점을 압니다. 희랍의 신화를 읽는 가운데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예화) 죽지 않는 장수-용기를 가지고 붉은 용과 싸워 이김-용이 죽으면서 붉은 피를 용사의 온 몸에 다 쏟아 부음-어디에 칼을 맞아도 죽지 않음-문제가 생겼음-온 몸이 다 피에 젖었는데 버들잎 하나가 등에 붙어 있었음-거기만 피가 닿지 않음 -그 비밀을 부인만 알고 있음-정적의 관계에 있던 사람이 부인에게 물음-전쟁이 나도 걱정 없겠습니다―부인이 말하기를 사실 버들잎 때문에 피가 묻지 않은 그 곳에 창을 맞으면 남편도 죽을 수 있다고-정적은 말하기를 제가 장군의 등 뒤에서 끝까지 그를 보호하겠습니다. 실밥으로 그 부위를 표시해 주십시오―그래서 그를 죽임.
우리의 약점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단의 세력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부분을 향해 결정적으로 날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책 없이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고 향방 없이 휘두르며 영적 싸움을 싸우는 적이 많지만 사단의 세력은 무지하게 영적 전쟁을 치루지 않습니다. 세력이 밀리면 도망갔다가 세력이 약해지면 다시 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 번째 계명을 범하고 깊이 고통 하는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자살하거나 아니면 불행해지는 모든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이 열 가지 계명을 모두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산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계명이 얼마나 심각한 계명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이러한 잘못을 범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에게는 가차 없는 형벌만이 남아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에게 사도는 말했습니다. 이제는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한 자였더니 성적으로 이와 같이 타락했던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너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윗은 커다란 범죄를 능가하는 위대한 회개로 다시 어두운 영혼 속에 햇살을 받으며 더 찬란한 계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해결이 되겠지 아닙니다. 그 죄는 여러분을 무덤까지 쫓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죄를 범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가 앞으로 커지면 그런 것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이 문제 뿐 아니라 심각한 범죄로 말미암아 혼자의 힘으로는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범죄한 사람 그런 사람들만 모아놓는 좋은 수용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신앙적으로 새롭게 회복시키는 일들을 교회가 감당해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풍성한 용서와 자비를 약속하십니다. 위대한 회개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일곱 번째 계명 하나를 어길 때 커다란 고통과 좌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과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질에 있어서 얼마 정도의 차이가 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이 온 땅을 바라보실 때 죄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않고는 안 된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린도교회에게 주셨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미 이런 문제가 일어났다면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은 자기 갱신의 결핍이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열심히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계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롭게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 계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의 심각성을 보고 경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와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자신의 형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기필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해결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깊은 영적 삶을 살며 우리의 인생을 사는 날 동안 이렇게 죄로 고통 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화목케하는 자들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10. 도적질하지 말라(신5:19) 1996.4.21 주일오전
“도적(盜賊)질하지도 말지니라”(신5: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제 8계명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계명을 보면서 우리들은 얼핏 생각하기를 절도나 강도나 사람 몰래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그런 악질적인 도둑들을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보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예화) 초등학교 때-아버지가 시골에서 사업을 하셨음-방탄조끼에 돈을 넣어 가지고 오시는 아버지-어느 날 돈 가방에 돈을 넣어 가지고 오심-전철 타고 오겠다고 조름-집에 와보니 가방을 면도날로 찢고 누군가 돈을 꺼내 감
이처럼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전문적으로 도둑질하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은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도둑질과 같습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는 거액의 돈을 도둑질해 가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아주 작은 돈을 도둑질해 가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살던 집이 있던 동네가 산과 마주 붙어 있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잘 사는 집이 많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사이렌을 울리며 올라가는 경찰차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도둑이 자주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번창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는 컴퓨터나 각종 무인 장비를 동원해서 도둑을 지켜주는 일이 성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더라도 얼마나 우리 사회에 도둑질이 만연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러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둑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살아서 좋은 날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십계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율법의 최소한의 요약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의해 정죄 받고 있는 범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칼을 들고 누구의 돈을 빼앗아 본 적도 없고 남의 재물을 탐하기 위해 월담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도적질하지 말라 이렇게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 성경이 남의 재물을 털어 오지 말라 남의 재물을 너의 집으로 옮겨오지 말라 사람을 위협하여 돈을 빼앗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대신 도적질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이 세상의 법률도 도적질이라고 정죄하는 죄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합법을 가장한 도적질과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도적질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 터무니없는 이익을 남기는 것 이것도 도적질입니다. 자기가 노력한 대가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받고자 하는 것도 다 도적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가능해지지 않아 법의 힘을 빌고 재판하는 사람을 매수하고 뇌물로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서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다 도적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형벌이 이미 도적이라고 못 받은 그것은 이미 최악의 도적질이고 그것보다도 훨씬 더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것 같아 보이면서도 더 잔혹한 일들이 백주대낮에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부당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부당하게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도적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내어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모든 기대들은 도적질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피해를 받는 사람이 없는 도적질은 비교적 합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소유권을 행사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이 도적질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적질하려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합법을 가장하고 때로는 힘으로 찬탈합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자기에게 옮겨오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재산을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합법을 가장한 도적질이 이 나라에 횡행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지내면서 모은 돈이 무슨 돈이냐고 논쟁을 하지만 다 도적질입니다. 자신의 돈이 아닙니다. 자기의 소유가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혹은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서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성경은 오늘 도적질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치나 혹은 그릇된 권력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재물을 손에 넣고 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도적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것만이 도적질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활하면서 종종 우리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회사의 물건이나 돈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회사가 우리에게 준 차를 우리의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적은 없습니까? 직장에서 슬쩍 의식 없이 가지고 오는 종이 연필 여러 가지 문구품 이런 것들이 돌려지지 않고 있지요? 이런 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다 도적질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회사가 회사 일을 하기 위해서 회사에 비치해 놓은 것입니다. 왜 우리 것이 됩니까?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빌려오고 돌려주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도적질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로채는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정당하게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거나 올바른 일을 행하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그 사람이 칭찬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업적으로 우리가 대신 가로채려고 하는 것도 역시 도적질인 것입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의 삶을 도저히 좇아가지 못합니다마는 우리 국문학계에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분 밑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스승을 늘 기리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공과 사가 얼마나 엄격하셨는지 학교 교수 연구실에 오른쪽 책상 서랍에 그리고 왼쪽 책상 서랍에 똑같은 문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쪽 책상 서랍은 공적인 일을 할 때 사용하고 왼쪽 서랍에 있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일을 할 때 사용하고 오른쪽 것은 학교에서 공급을 맡은 것이고 왼쪽 것은 자기 돈으로 사다가 넣어 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의미에서 온전해지지 않으면 커다란 의미에서 온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할 때 우리가 더 큰 것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웃에서 빌려온 물건을 며칠이 지나도록 혹은 몇 년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못하고 결국 돌려주려고 하면 이사가버리고 없어서 우리의 소유가 되어 버린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든 작은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돈을 꾸고도 갚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 도적질인 것입니다.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돌려지지 않고 있는 이것도 도적질입니다. 빌려 올 때 고마운 마음으로 빌려 왔지만 왠지 돈을 갚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 이런 것도 다 도둑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속에서 이렇게 많은 작은 의미의 도적질이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분명히 직장에서 일해야 할 시간에 사람들이 근무지를 이탈해서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고 목욕탕에서 세월 보내는 사람들도 바로 도적질인 것입니다. 그는 그 시간에 신실하게 직장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이름에 명예를 걸고 자기를 고용한 회사와 자기를 고용한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가 거기를 버려두고 당구나 치고 차나 마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이런 의미에서 부단히 도둑질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만 신실할 뿐 아니라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매우 신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자신의 도둑질을 합리화시키고 그리고 자신의 도둑질을 미화시키거나 혹은 이것들을 덮어두기 위해서 더 많은 거짓들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계명 뒤에 나오는 것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영적 삶에 심각한 피해들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참된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볼 때 자신의 재물을 매우 아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워낙 알뜰하고 아껴서 교회 살림을 맡겨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적인 재물을 맡기면 개인이 자신의 재물을 관리하던 때와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의 재물을 관리할 때는 그렇게 신실하던 사람이 공적인 재물을 맡고 나더니 마음씨 좋은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재물을 관리하고 사람들과의 돈 거래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공적인 재물을 맡기면 안 됩니다. 반드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매일 교회의 장부를 검토하고 전표를 쓰고 사실 목사가 그런 일에 깊이 관여하면 안 됩니다. 영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몇 억 씩 교회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갑니다. 이렇게 해서 큰 시험에 든 교회를 많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공적인 물질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선임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작은 도적질도 많이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공중전화 카드만 사기를 한 사람이 걸렸습니다. 공중전화 카드 구멍 속에 성냥개비를 집어넣어서 들어가면 안 나오게끔 만들어서 사람이 가고 난 다음 핀으로 그것만 빼내는데 청량리 일대에서 그것만 전문적으로 해서 200장을 뺐습니다. 전화국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청량리 일대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직원들이 잠복근무를 하다가 결국 붙잡았는데 200장을 꺼내서 이제껏 번 돈이 20만원이더랍니다. 그런 사람이 들어가면서 그럴 것 아닙니까? 진짜 도둑놈은 바깥에서 잘 다닌다. 맞습니다. 진짜 도둑놈은 감옥 바깥에서 잘 먹고 잘살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것도 결국 도적질입니다. 그러면 이런 도적질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도적질 이런 것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입니까? 바로 탐심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텔레비전 보는 것 절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절대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오면 아마도 치워버릴 것 같습니다. 광고를 보면 광고의 목표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면 자기의 제품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 골이 아프다 그러면 저절로 진통제 이름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면 6개월 정도를 물 붓듯 광고를 내어야만 그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히게 만들면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까? 당신 이런 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다면 인간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것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는데 광고를 보니 그것을 사고 싶습니다.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하니까 살아가는 삶이 한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가지가 아니라 수천 가지의 상품과 서비스를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빗발치듯 우리의 욕망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화장품 선전이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 이런 거 바르십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어느 립스틱은 단숨에 20만 개가 팔렸다고 합니다. 똑같은 색깔인데도 말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게끔 자꾸 자극을 하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용차도 새로운 모델이 나오고 나면 옛날 차가 그렇게 보기 싫고 그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후져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세련되어 보이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구매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욕망을 부추기고 거기에 타락한 인간의 욕망은 놀아나면서 우리의 욕망이 더욱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며 더 많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더욱 욕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쓸 것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잘못된 방법으로라도 재산을 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도적질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 이것은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사람들은 더욱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이 물질적인 가치가 최고인 것처럼 그렇게 선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좋은 문화를 누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칩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비교적 그런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야 뭐가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부를 탐하게 되고 그런 욕망의 충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을 훨씬 능가하는 그런 부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도 편지가 수없이 옵니다. 저는 혹시 제 우편물이 다른 집에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전에 살던 집 것 옆집 것 골고루 다 봅니다. 그런데 몇 집 모여 살지도 않는 그 집에 가져가지도 않는 신용카드 대금 청구서가 한 줌 씩 쌓여 있는 것을 봅니다. 어느 날 전보가 날라 왔는데 형사고발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뜯어진 봉투를 보니 200만원 300만원씩 긁어 써서 결국 적색 고객으로 등록되고 형사고발까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두 무절제한 삶은 탐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극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극 받지 않으면 그래도 좀 낫습니다. 기도원 같은데 여러 날 가 있으면 욕망이 사라집니다. 밥이나 한 상 먹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금식기도 가운데 솟아날 뿐입니다. 궁극적인 선한 삶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이렇게 추레하게 다니는 사람이 없구나. 자꾸 비교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우리 청년들 만나서 대화하는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극을 받으면 우리의 욕망이 자꾸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이 인천으로 이사 감-안양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있는 교회를 다님 -목사님의 심방-차를 사라고-바쁘게 다니시려면 중고라도 하나 있어야-그 후부터 차만 눈에 들어옴-그 순간부터 계속 차 생각만 하게 됨-결국 중고차 한 대 사게 됨.
여러분, 지나다니다 아 저것을 사고 싶다 하면서 일단 마음의 도장이 찍히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사고는 불행해서 견딜 수 없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능력이 모자라서 도전을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만 있으면 언제나 이런 소유를 향한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이 부분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들이 살아가다가 좀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달라고 그래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의 유익이 되나니……. 지족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자라고 불편하지만 족하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번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비쳐서 바라볼 때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유익이 되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빈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 데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족하는 마음입니다. 주님 이 정도면 정말 족합니다. 이런 지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욕망에 불타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개 직장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챙겨서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을 보면 이런 문제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물질을 과다하게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살려고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결코 순결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왜 이것이 경건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지를 한 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몸부림이 있어서 그것을 손에 넣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잘못된 욕망이 불타오르고 급기야는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까지도 손에 넣어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가 없게 됩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고 나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이대로 충분합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한 삶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만족스러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 불만족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인간 사회에서 불법을 제하고 도적질 당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사람들의 눈물을 씻겨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부를 쌓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면 그 욕망을 하나님도 채우실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보더라도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고 싶은 것입니까? 하나님 자리를 나와 바꿉시다. 이렇게까지 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유엔본부를 기증한 록펠러는 미국의 대재벌입니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올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작년보다 조금 더 내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올해보다 조금 더 죽을 때까지 그 소리입니다. 조금 더 부를 모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하루가 행복하려거든 이발을 하십시오. 그리고 일주일이 행복하려거든 결혼을 하십시오. 한 달을 행복하려거든 집을 사십시오. 일 년이 행복하려거든 말을 사십시오. 단칸방에서 보따리 싸들고 17평형 아파트로 갔다 그러면 이 끝부터 저 끝까지 한없이 멀어 보이는 것입니다. 6개월 정도 살고 나면 좁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큰집으로…….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채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기의 육신을 위한 이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위한 신령한 욕망은 반비례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신의 육신을 위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망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그 충만해져 가는 것과 함께 하나님을 위한 신령한 욕망은 점 점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이면서도 헌금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보다 재산은 두 배가 많지만 우리보다 욕망은 세 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말이 맞습니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길은 돈을 벌어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수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물질로 인해서 더 많은 고통을 받고 마음에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이든지 물건을 살 때 1분 이상 그 자리에서 기도해보고 산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돕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남아야 됩니다. 왕창 벌면 남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이 한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넉넉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우리의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분지족하는 삶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순결한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재물에 여분이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돕고 교회를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결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이 문제를 반드시 넘어서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물질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있다면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도 여러분의 물질을 너무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불신앙과 염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질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 상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왜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질에 대해서 그런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서 상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새로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만질 때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지갑에 돈이 들어와도 그렇게 대견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나가도 아깝지 않는 그런 변화된 삶을 우리가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이 많은 사람들만 그렇게 탐욕에 가득 찬 삶을 사느냐 물질이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대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물질에 대해서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범죄하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순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정리되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정확히 보았습니다. 집회에 나가서 사람들이 울고 불며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다. 그만큼 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서 다시 태어나면 우리가 물질에 대한 이런 사랑과 탐심 때문에 범죄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수많은 부분들을 이 세상의 마귀가 가져다주는 염려와 근심으로 찢기고 할퀸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염려의 가시나무와 근심의 엉겅퀴들이 우리 마음에 한없이 돋아나서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에 깃들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이 황폐하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적은 사람은 적은 대로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한없이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말 깨끗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분의 일만 교회에 내면 나머지는 여러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 큰 일 납니다. 자기의 영혼도 팔아먹고 자기의 인생도 파멸로 가기 쉽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든지 이것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관리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돈이 들어오고 올바른 방법으로 돈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입에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좀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부자들은 자기의 힘으로 그런 부자들이 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물질이 많으면서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낭비가 몸에 배인 사람들은 결코 영력이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면 가난을 친한 친구로 삼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영적인 능력이 솟아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정말 영적인 삶을 능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여덟 번째 계명에 대해서 깨끗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그 안에서 누리는 보다 크고 넘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물질의 문제에 대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너에게 주어 그 피로 너희를 값 주고 샀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물질의 문제를 인하여 나를 멀리하고 나에 대해서 상한 마음을 잃어버리는가. 이런 마음들을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의 은사-탁월한 삶을 사심-교회 퇴임 시 큰 분쟁이 있었음-오천 명의 교 회-42년 목회하심-유아세례 준 사람을 자기 손으로 장로 장립까지 시킴-장로들 이 서로 의논-퇴직금을 드리고 원로목사님으로 추대하고 45평 아파트를 사드리 자-목사님이 반대하심-목양의 길을 부끄럽게 하지 마라-장로님들 말하기를 목사님은 존경받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겠습니까?―고민하다 가 15평 미만의 집을 받겠다고 함-장로들이 32평으로 설득함-결국 20평형 아파트로 이사 감-이사 가던 날 교인들이 다 울었음-그 집에서 가장 큰 가구가 40년 전 이사 올 때 가지고 왔던 일제 철제 캐비닛이 가장 값나가는 가구였음.
우리의 영적 본성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마치 영원히 살 사람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주께서 부르실 때 곧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사는 삶이 바로 여덟 번째 계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오늘 기억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11. 거짓증거 하지 말라(신5:20) 1996.4.28 주일오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도 말지니라(신5:20)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정치와 신앙이 일치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종교적인 법이 따로 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라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법이 곧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었고 나라는 다스리는 법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이 곧 성경이었고 율법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고 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 백성들 가운데 악이나 죄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것인지를 율법에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범죄하게 되면 그 형벌을 주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재판만큼은 정말 공정한 재판이 되길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백 명의 죄인을 놓아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놓아준다는 사법의 원리는 성경에서 그 기원을 자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자가 잘못 형벌을 받고 재산의 피해를 보고 신체에 피해를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아홉 번째 계명은 일차적으로는 법정에 관련된 계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증거라고 하는 것은 법정에서의 증거를 우선적으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때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3심 제도를 거치기도 하고 수사기관이 동원되어서 그 사람이 범죄한 증거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지루할 정도로 긴 변호인의 신문과 변론과 과학적인 수사의 기록들을 거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한 사람이 사형되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한 사람이 범죄 하였을 때는 그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와서 재판에 중요한 요건이 되고 판결을 좌우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물증이 없이 목격자만 있을 때 결정적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두세 증인이 그 사람이 범죄 하였다는 것을 증언하면 범죄한 사람의 생명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율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비인도적이고 여호와 법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긴 자를 처벌함에 있어서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써 한사람의 생명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얼마나 믿고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고 진실만을 말하는 신실한 백성인가를 보여는 주는 것이 법정에 관계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충격적인 사실, 두세 사람의 증언으로도 한사람의 생명도 멸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안에서는 이 세상과는 다른 신실한 믿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상호간에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거짓말과 사기와 그리고 자기에게 유익한대로 이말 저말을 뒤집고 이렇게 저렇게 변명을 하며 거짓을 밥 먹듯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런 윤리가 통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그것을 말할 때 그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실하게 믿어주고 그 믿어주는 믿음의 삶을 그 공동체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다른 윤리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통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을 다해서 신실하게 살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 가운데 거짓을 행하는 자들이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함께 정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보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인 삶만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먹고 입고 마음에 담는 모든 삶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입술로 부정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성경이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피고로 끌려온 한 사람의 범죄를 입증하는 두세 사람의 증인에 주목하면서 그를 믿어주고 그 증언을 기초로 이 재판을 해도 그 재판에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다고 여겨지는 이러한 삶, 목격한 것은 분명히 목격하였다고 말하고 보지 못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비록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라도 진실만을 말하는 사회를 위해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불신이 생겨난다면 거기에서 오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말의 권위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말을 서로 믿어줄 수 없는 사회에서 선지자의 말을 어떻게 믿어지게 되며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말을 진실하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 증언함으로 말미암아 한사람이 죄 없이 형벌을 받거나 죽을 때 반드시 그 피 값을 증인에게 찾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법치주의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매수와 협박과 공갈 등을 통해서 위증을 하고 사악한 위증을 통해서 사악한 자들이 놓임을 얻는 이런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십계명을 범하고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그 말씀과 법도를 따라 우리는 올바르고 정직하게 이 세상에서 의와 신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재판장에서 위증을 하는 것처럼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법정에서 아홉 번째 계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계명이고 특별히 법정에서 준수하여 야 된다고 말할 때 이 계명만큼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계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판을 받아본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고 증인으로 선적도 없고 위증을 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상당수는 한 번도 재판에 서본 적이 없이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될 것은 계명은 단지 법복을 입은 재판장이 있고 죄지은 채 수갑을 찬 죄수가 있고 피고를 겁주는 검사의 논고가 있고 그 사람을 변호하려는 변호사가 있는 그런 전형적인 재판장에서의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사용하는 찬송가를 열어보았는데 그 첫 페이지에 자신의 친필로 써 놓은 것을 보면서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써놓은 글은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하는 세상의 법정에 서있는 증인이다. 내가 일평생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누명을 벗겨 드리리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바로 법정입니다. 보다 큰 법정은 이 세상이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증인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각자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법정에서 피고처럼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법정에 서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그럴 권한이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에 세우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결이 얼토당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판을 우리가 그 판결을 주목함은 사람들이 그 판결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마귀의 자식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판결을 내릴 때 자기가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식으로 판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법복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피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법정에 앉혀드리고 그 자신들이 그분의 판결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판에 서시는 그 때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서 증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이미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그 사람의 의하여 이 세상의 법정에 죄수처럼 서시고 이 사람이 생각할 때 2000년 전 나무에 달려죽은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이 사람을 믿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재판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 앞에 유일한 증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그가 얼마나 재판장에 서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재판하는 이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사랑하신가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친히 목격하였고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야말로 죄 없으신 분이고 당신이 믿어야 하는 분이고 그분이 오히려 당신의 재판장이 되어야 하고 당신은 그 분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함으로 그분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의 어리석은 육신의 지혜로 예수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판단할 때 그 사람들은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기로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잘못된 증인이 선 잘못된 재판을 통해서 한 사람의 육신적인 생명이 사라졌지만 이제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복음의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올바로 증거하지 않고 혹은 그것을 기피한다면 이 세상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의 생명도 앗아가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을 사람들이 돌로 쳐 죽었다면 만약에 잘못된 증언이나 증언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리지 않음으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을 받아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의 잘못된 증언이 얼마나 큰일인지를 성경은 오늘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법정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 큰 법정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 드릴 때 그 때 사람들은 감히 그리스도 예수를 판단하고 재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를 하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도 우리는 종종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한데 증인들은 끝까지 법정에서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살인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하던 사람이 법원 정원 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 후 이제 폭력 사건에 대해서 증언대에 서려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서 증언을 하면 끝까지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끝까지 보호해 주겠습니까? 그 사람의 증언으로 법정에서 유죄로 판단된 사람, 그 사람의 증언만 아니라면 무죄라고 판단 되었을텐데라고 생각하고 그 하수인을 시켜서 그 사람을 살해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피고로 묶여있는 이 세상의 법정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올바로 증언하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무죄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이 세상의 백성들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자유와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고자 할 때에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증명하는 삶을 포기 할 때 세상에서는 박해도 없고 시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말로 증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튀는 존재들이 되고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주목받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이 그렇게 동족에게 이방인에게 유대인에게 헬라인에게 간교를 당하고 시련을 당하였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동족을 위해서 무슨 나쁜 일을 하였습니까? 쉼 없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가 이 백성들과 이방을 구원할 하나님의 구원할 자임을 말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열망에 불타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을 처음으로 만나 주셨던 말씀이 내가 너를 사환과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첫 번째 주신 사명은 증인 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투사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이념적인 이론가가 아니라, 헬롯 당원들과 같이 열심당원과 같이 그렇게 주장하고 봉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증인을 삼는 것이 바울을 만난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평생의 관심은 유대인들이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나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다스리는 것에 있지 않고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자유인에게나 종에나 공회에서나 시장에서나 길거리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증거하고 이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세상의 법정에서 증거 하는 그 바울의 말을 통해서 세상이 바울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은 사람들은 바울을 존경하고 아버지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증인을 향해 돌을 들었습니다. 그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증거를 마음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법정에서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옳은 일을 증거를 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증인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건을 본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피고석에 세우고 판단하고 재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용감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못 박힘을 보았거니와 그래서 우리가 증인이 되었고 그분은 죄 없으신 분이고 당신이 예수를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무릎을 꿇고 그 분을 믿는 것이 옳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로 증거 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는 삶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 증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증인석에서 살아가는 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법원에서 있었던 비화를 방송하는 가운데 택시 강도를 하고도 무죄를 선고받았던 사람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비록 택시 강도를 하여서 사람의 돈을 빼앗았지만 그가 평소에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고 잘살았는가가 라는 이웃의 증언이 재판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피고 고백과 그리고 증인의 간절하고 목메는 증언을 들은 재판장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사상 유래가 없는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눈물로 증거 하는 사람이 될 때 그 때 사람들은 감히 그리스도 예수가 죄 있다고 정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을 인함이니’ 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말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어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세상의 법정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증언을 써나가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법정에 섰는데 이말 하였다가 저 말 하였다가 횡설수설하게 증언한다면 그 말을 듣고 피고를 무죄 석방할 재판장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이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때는 예수가 하나님인 것처럼 살고 어떤 때는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것 같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믿는 것 같다가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시고 아버지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사는 우리의 일관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보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의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증거 하는 삶을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명을 쓰고 이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려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예수가 누구인지 밝히 보여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누명이 벗겨졌습니까?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일 주일동안의 삶과 말을 통해서 예수가 과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재판하던 사람이 오히려 예수 앞에 내려와서 무릎을 꿇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증인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세상의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주시고 기꺼이 당신께서 피고가 되어서d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향한 태도를 결정하게 만들어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더더욱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르게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증거가 거짓된 증거가 되면 우리는 입증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욱더 커다란 재앙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가 잘못된 예수를 전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잘못된 지혜와 생각에 따라 이 거짓 증거를 함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잘못된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교와 증거를 추종하면 살아가는 것은 거짓 증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 증거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성경은 죄 없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이 9번째 계명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세상의 법정에 서 있는 증인임을 인식하고 이 세상의 법정에서 우리들이 일관되게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증거해서 예수로 이 세상에 구주되심이 드러나게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2. 탐하지 말라(신 5:21) 1996.5.5 주일오전
내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신5:21)
오늘은 십계명 마지막 계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열 개의 계명 중 가장 어색해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계명입니다. 일 계명부터 구 계명까지는 한 계명 한 계명 지시하고 있는 바가 매우 뚜렷하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 계명은 마치 지금까지 말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주워섬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분명히 간음하지 말라고 이미 말씀 하셨고 도적질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으며 거짓 입증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다시 아내를 탐내거나 그의 밭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쩌면 이 십계명이 이미 칠, 팔계명의 반복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 번째 계명이야말로 이 십계명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계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열 번째 계명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도 아울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도 않았고 이런 범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이런 범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금하게 되어져 있을 때에 이런 범죄를 행동으로 옮기면 그것은 즉시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너그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열 번째 계명은 유혹과 자극을 받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지 그것은 단지 정신적인 투쟁의 문제라거나 단지 갈등의 문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십계명이 쐐기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 말씀드리는 이 계명 자체가 너무나 무겁고 중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원하는 바는 이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든지 원망하며 살아가든지 이 세상의 법은 이런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이 중요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입니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고 법에서 금한 어떤 재산상의 손실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명예를 손상케 했을 때에 법은 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열 번째 계명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죄,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들이 십계명에 위반된다고 우리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강령이 무엇인지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과 목숨과 이 모든 것들을 다하라고 요구하셨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가 단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요구하신다는 의미를 갖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려고 갖는 마음의 범죄도 죄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여기에서 하게 되는 생각은,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겠는가?’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수 없이 많이 죄를 범합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하루 동안에 인간의 마음을 스쳐 가는 생각이 십만 가지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만일 그중 90퍼센트는 선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일만 번의 생각만 악한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의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내지 말라, 탐심을 갖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탐심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 눈앞에 마주 앉기만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영상 매체들과 신문의 광고들과 라디오의 소리와 눈에 비치는 텔레비전의 수많은 광고들은 우리의 탐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광고의 목표는 결국, 이것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고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온갖 탐심을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없는 재화와 명예, 여러 가지 이익에 대해서 이번에는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역사하는 곳에 유혹이 있고 유혹과 욕심이 만나면 기가 막히게 궁합이 맞고, 그 둘이 만나는 곳에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열 번째 계명을 보면서 한 사람 바울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이 열 번째 계명을 보면서 무너진 것입니다. 이전에 그는 자기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며 살 것인지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계명은 이 십계명이었습니다. 이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총화입니다. 모든 율법의 정신이 이 십계명에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는 굉장히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엄격하게 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주님의 계명을 바울은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하지 말라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는 계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을 미워할 정도로 그는 이 계명에 대해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 세상에 십자가 매달려 죽은 그 하찮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울로 하여금 다메섹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볼 때 그가 가장 어기는 사람에 대해 분노하였던 계명이 세 번째 계명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다섯 번째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켰습니다. 물론 그는 살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 하지도 거짓 증거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완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리스도예수를 만나고 나서 열 번째 계명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의 부록처럼 생각했던 그 열 번째 계명이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는, 이제 바울의 겉모양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 깃들여 있는 죄의 심각성을 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속에 있는 수많은 탐심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였고 안식일을 지켰고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 적이 없지만 그러나 이 속에서 솟아나는 부패한 인간의 수많은 욕망이 그럴싸한 종교적인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보니 속에 있는 이 탐심 때문에 지금까지 지켰다고 믿었던 일 계명부터 구 계명까지 하나도 지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열 번 째 계명을 깨닫는 순간에 아홉 개의 계명이 요구하는 바가 단순히 우리의 외면적인 삶의 모양이 아니라 그 아홉 개의 계명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의 영혼 깊은 곳 우리의 내면 세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복종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하면서 탐심이 내안에 있고 탐심을 따라서 탐심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되니까 그것이 곧 나에게 있어서 내 영혼 속에서 경배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율법을 배우고 종교적인 삶을 살았지마는 그러나 자신의 마음으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그는 일 계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우상을 섬기고 속에 있는 수많은 탐심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탐심을 따라 살아 온 수많은 날들이 우상에게 절한 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자신을 말로는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적이 없지만 말보다 더 귀한 삶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금지한 것을 안식일에 행한 적이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이미 율법이 정한 그 규례를 넘어서서 자신의 욕심껏 안식일에도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될 일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는 손으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만 그러나 미움으로 수없이 살인했고 그리고 간음했고 도둑질했고 거짓 증거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십계명이 모두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되어서 자기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것이 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느냐 하면서 율법과 자신의 구원 사이에서 몸부림쳤던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예수를 붙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전에는 나를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던 이 율법이 펴면 펼수록 소리치는 것입니다. 너는 범죄자다 너는 율법을 어겼지? 너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면서 율법 전체가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십계명이 끝나는 시점에 여러분은 즉시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우리가 그토록 깊이 의미를 깨닫도록 힘써야할까?’ 아주 좋고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십계명을 모두 보면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십계명을 지키는 이유가 옛날의 구약의 성도들이 잘못 생각해서 율법을 지켰던 이유와 같은 동기에서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분들에게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는 이것을 구원을 받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살아갈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구분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가이드가 있어야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죠?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그 표준이 바로 이 십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 계명부터 십계명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지만 우리가 결국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고 하나님보다 탐심에 굴복하는 그런 경지에 빠지게 되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이. 돌려드리지 못하는 잘못에 빠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은 결론이지만 그렇게 살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이 계명을 지킬 수는 없지만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이제는 찬송을 부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내주 예수 주신 은혜가 참으로 놀랍고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한 번 자선 사업하는 것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획 던져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헌신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할까 라는 지혜가 우리 속에 없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헌신이 있어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허공 치는 것과 같은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의 표준을 따라서 우리들이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결국은 못 지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면 그 속에서 우리가 바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해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에게 부어주는 은혜도 소중하지만 은혜를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는 요즘도 식당에 가서 보면 사람들이 밥을 먹고 일어날 때 의자를 밀면 물러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종업원들이 그 의자를 다 정리하는 것을 봅니다. 군부대에 있을 때 군 밖으로 나와서 20여명이 앉아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부대도 아니데 그 행동이 몸에 배어서 일어나 그 의자를 다 갖다놓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정말 훈련이라는 것이 참 무섭구나.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한 5-6년 풀어놓고 살면 다시 옛날하고 똑 같아집니다.
그래서 군에 있는 아들이나 동생들을 면회 가면 늘 어깨 툭툭 치고 웃고 떠들던 가족을 만났는데도 ‘충성’이라고 구호를 외칩니다. 효도나 잘하지……. 그런데 군대 제대 후 5-6년 지나 회사 갔다 와서도 그렇게 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훈련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도 교회 생활하면서 이런 것들을 많이 보는데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으로 우리를 훈련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 지키면서 ‘내가 다 지켜서 구원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틀림없이 ‘내게는 십계명 외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렇게 말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지키려고 애쓰며 살면서 우리가 이 계명을 따라 갈 때 우리가 변화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이 열 번째 와서는 우리가 깊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강해한 열 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나 주에 어기지 않고 온 계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 그 배운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해서까지 요구하는 이 열 개의 계명에 깊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우리가 온전히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그 계명을 범했는데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될 백성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하여 노력하다가 그 깊은 부분까지 인간의 연약함으로 지키지 못한 것과 우리가 의식 없이 아무렇게나 살면서 이 계명을 범하는 것 사이에는 실로 쉽게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자의 죄가 이 세상에서 내세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에 관한 교리를 신앙 생활하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인과 화해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깊이 애통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있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회개조차도 용서의 조건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만약에 모든 용서가 회개에 달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논리가 성립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죄라고 해서 우리가 모두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회개할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부지불식간에 범죄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을 때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 것이 그 예수 믿기 이전까지 모든 죄만 용서해주셨다면, 눈물 닦고 회개한 후 그 다음부터 우리는 다시 죄를 짓기 시작하는데 살아오면서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또 생각했다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응답 받고 용서를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를 믿은 다음에 단 하나의 죄라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못 받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죄 있는 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 분을 영접하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할 때에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짓게 될 모든 죄까지도 하나님의 용서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오늘과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습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내려다보시면 과거에 살아온 인생과 지금 살고 있는 인생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인생까지도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시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는 현재의 죄나 과거의 죄나 미래의 죄나 하는 죄의 시점 같은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용서해주시는 목표 자체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죄가 현재에 일어난 일인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인지 미래에 일어날 일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다 용서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짓는 죄는 용서받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은 사람 신자들이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짓는 죄를 징벌하십니다. 어디에서? 여기에서, 이 땅에서 징벌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생각보다 혹독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부산에 내려가서 집회를 했는데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우리의 고집대로 살고 불순종하면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결국은 매 번 마다 나타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모아두었다가 어느 시간에 한꺼번에 계 타듯이 모아 사람들을 큰 고통 속에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깨닫게 하신다는 내용을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피아노를 치던 어느 집사님이 한없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우리 마음대로 죄짓고 살면 결국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승복시키기 위해서 계를 타듯이 우리에게 어느 한 순간에 우리를 징벌하셔서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이 자기에게만큼 마음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자기가 그렇게 살았다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자의 죄는 하나님께서 넘어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징벌하십니다. 용서는 해주셨는데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 믿을 때에 용서해주셨다고 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심판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옛날의 죄와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입고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범죄하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정결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탐내며 살아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우리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죄입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이나 혹은 예수를 잘 믿는 지체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박박 깎고 양복 걷어 버리고 회색 옷 입고 절로 들어가서 오늘부터 중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절로 간다고 말할 때 여러분들은 아마 심각한 위기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명을 어긴 것이나 이 열 번째 계명을 어긴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심각성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이 계명을 모두 보면서 깊이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겉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목표도 하나님께 고정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열 번째 계명을 보면서 깨끗이 씻겨져야 할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십만 가지의 생각이 오고 가는데 그 중에서 무슨 생각들이 오고 가는지 한 번 분류를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모든 사고가 하나님만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십니다. 일어나서 눈뜨는 그 순간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생각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걸어가고 행하고 오가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그 임재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느끼며 우리의 마음 구석에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하나님이외에 다른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이 세상의 욕심에 바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다 드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나의 입술의 그리고 내 마음의 묵상조차도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깨끗이 하여야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병과 같습니다. 그래서 병균이 몸에 침입해서 관절과 골수와 모든 곳에 침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암환자를 보면 곳곳에 암세포가 퍼져 그 부분을 절단해야만 합니다. 어디든 파고 들어가면 암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거듭난 우리 자녀들의 마음과 혼과 그리고 골수와 관절과 모든 뼈마디 사이에 주님을 생각과 마음이 배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유혹과 자극을 받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것을 쫒아버릴 수 있는 단호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겉사람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의 마음과 의식까지 주께서 다스려 주시도록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굳게 이 모든 악을 미워하고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우리에게 탐심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경배의 자리를 다투는 우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철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몇 해 전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목사가 권총으로 살인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뺏어 교회를 건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은 그 아름다운 교회의 건물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십계명을 어기니까 즉시 육 계명을 어기게 되었고 육계명을 어기니까 십계명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제하는데 숙달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고 마음이 거기에 굴복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유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것도 그것도 야단맞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도 우리가 연약하게 사는데 그 때마다 연약한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까지도 딛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우리의 모든 삶이 겉모양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속사람이 그렇게 영적으로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십계명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을 하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자신의 겉모양이 삶이 그럴듯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의식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어서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사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겉모양은 멀쩡한데 자꾸 비슬대고 졸아서 진찰해보니 속에 큰 병이 걸려 며칠밖에 살 수 없다면 그것이 제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교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우리의 교회 다니는 목표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은혜가 우리의 피부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폐부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우리의 머리를 스치고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깊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죄들을 보게 만들고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로 말미암아 씻어내고 징벌케하는 일들이 우리 속에 일어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깨끗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리고 신령한 은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기를 원하는 높은 영적인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 속에 하나님 대신 자신을 다스리고 왕노릇하려고 하는 악한 죄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와 그리고 본질적인 회개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에 미쳤다고 말하고 교회를 위해 충성한다고 말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리고 내 마음과 너의 모든 뜻이 나에게 바쳐졌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참 신앙생활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말씀을 전하면서, 열린 교회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너무 아파서 어떤 때에는 면도칼로 사람의 속살을 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을 보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내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져서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물러서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마음 아파하신다고……. 왜? 그 아픈 마음을 내가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에 있어서 문제는 교회는 잘 나오고 헌금도 하고 다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그 모든 영혼의 밑바닥이 움직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눈뜨자마자 자명종을 누르며 교회로 달려와서 늘 찬송하면서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직장 마치고 교회 들러서 애통하고 기도하며 집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겠습니까?
또한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깊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나 같은 죄인이 그 선하신 주님 앞에서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나 같은 이렇게 더러운 존재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습과 사랑가는 삶을 보며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자기의 너무너무 부족한 점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하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시기에는 교만해지려야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눈감고 기도하면 자기의 밑바닥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밑바닥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그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사는 것 이외에는 내 신앙생활에 참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그렇게 애통하는 그 자리에서 확실히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혼 깊은 곳을 움직이는 말씀과 은혜의 감화가 사라지고 나자 설교도 머리만 움직이고 강한 경고의 말씀도 귀만 때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 예배, 기도, 헌신, 이런 생활이 이 피부에만 부딪히며 흩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화장품일수록 살 속 깊이 스며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파고들어서 우리의 피부 깊은 곳을 와서 본질을 움직이고 그 본질 속에 깃들어 있는 더러운 물들을 퍼내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서 새 샘이 터져야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피부에 와서 다 튀기면서 스쳐 지나가고 있는 사이에 교회와 자기가 맡은 직분과 심지어 강인한 목회자는 그 삶의 겉을 쪼아서 돌을 쪼듯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각양 탐심이 하나님 앞에 들어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어느 그릇점에서 예쁜 그릇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더 예쁜 그릇을 고르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마음에 드는 금박을 칠한 그릇을 골랐는데, 그 그릇을 꺼내오자 마자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습니다. 이유는 그 속에는 쥐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박 칠한 멋진 그릇이면 뭐합니까? 속에 쥐가 죽어 있는데……. 열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다듬어져라 내 백성답게 살아다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너희의 속마음까지도 변하여 겉과 속이 온전히 아름답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순결하게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와서 우리의 속을 청소해줄 때에, 우리는 옛날의 모든 탐심이 싹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쉽게 섬기기 쉬운 것이 이 세상의 소유물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탐심이 우리에게 왕노릇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범죄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매일 나와도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간 곳이 없고 이 세상의 물질과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다른 사람의 부만을 탐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탐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징벌은 그들의 영적인 삶속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금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혼 깊은 것에서 우러나오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쳐진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가 좁아서 운동장이 미아리에 따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축구장 반만한 학교에서 우승했다고 축구관계자들이 칭찬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너무 축구를 못했습니다. 가보니 그 비밀이 발견되었는데 다리 하나에 커다란 모래 자루를 두 개를 매달았습니다. 그러니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합하기 전까지 그렇게 하다가 시합하러 가는 날 그것을 풀면 순식간에 날라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그런 탐심과 탐욕의 모래주머니를 매달고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자유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갖고 그것에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다른데 있으니까 그리고 기도해도 그 기도는 공허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영적인 삶이 무장해제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탐심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잠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광고를 듣거나 아니면 쇼윈도를 지나가다가 물건에 대한 생각을 정해보십시오. 그러면 점점 그것이 크게 눈에 들어와서 그것만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생각의 반복은 반드시 개념을 형성하고 개념의 반복은 행동을 낳고 행동의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의 반복은 인격화되어 버려서, 그것과는 떼어놓고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 목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머리끝까지 발끝까지 흐르고 있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주님을 위해 흘리기를 싫어하는 피가 있다면 뽑아내어 주시옵소서. 내 몸의 살 중에 단 점이라도 주님을 위해 찢어지기를 거절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어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마음 모두를 바치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결한 우리를 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갈보리 언덕에 이러한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짜기 맞은편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이 십계명을 지나며 우리는 다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며 결국은 그 속에서 이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그리고 그 모든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들이 자신을 죽이고 그리고 죄를 복종시키며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게 되기를 애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구속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깊이 순결하고 정결하게 영적인 정화 속에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우리의 모든 것을 몸 바치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결국은 자기 의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결국 만세반석되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 살아 있는 동안에 영원히 져야할 영속적인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 와서 왕노릇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그런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를 붙들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세상이 보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이 세상을 나그네로다 객이라 일컬음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백성들과 다른 삶을 사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