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소원
“그는 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 오희열
성경의 역사는 사람을 이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준비하실 때 방법과 제도들을 먼저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먼저 준비하시고 그 준비한 사람들이 또 사람들을 기르게 하심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이 히브리서 5장 7절의 유명한 본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말해주는 성경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진액을 쏟으시며 기도하실 때 그 광경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고 다들 해석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만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아온 일생동안의 기도가 과연 이렇게 고혈을 짜내는 기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의 오늘 임무는 이 5장 7절 전부를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여기 한 단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목회의 기도와 소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소원이란 무엇입니까? 이 한 단어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어로 “히케테리아스”인 이 단어는 “간청, 탄원”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성경에서 “기도”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성경이 아닌 그 밖의 그리스어 문헌에서도 이 소원이라는 단어는 기도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면서 아주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간구가 따로 있고 소원이 따로 있다기 보다는 똑같은 간구를 어느 측면에서 보았느냐 하는 관측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원이라는 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닙니다. 너무나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도저히 끌 수 없는 불처럼 마음에서 타오르는 그 어떤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끌 수 없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때문에 자신이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불, 이것이 소원이고 이 소원이 기도로 토해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고 하는 간단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 댐에 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물이 많아져서 홍수가 날 것 같아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수력관리소에서 댐의 수문을 엽니다. 웅장한 수문이 열립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이 한참 기다렸다가 천천히 쫄쫄 나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수문이 열리자마자 감당할 수 없는 세기의 엄청난 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수백 미터 높이의 댐 저 아래로 커다란 낙차를 그리며 이 물은 쏟아져 흐르기 시작하고 계속에는 무지개가 떠오릅니다. 어마어마한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그 무엇이,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 한 순간에 토해져 나오는 것이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기도를 어느 한 순간 열렬하게 쏟아져 나오게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목회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잘 될 것입니다. 모두들 어렵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만 어렵습니까? 경제하는 사람도 정치하는 사람도 심지어 운전하는 사람들 모두 다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설 때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섰습니까? 모든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고 뜻대로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희망을 가지고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이 길에 들어설 때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꽃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어려움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해도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길을 못 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스펄전 목사가 말했듯이 목회의 소명이 있습니까? 도망칠 만큼 도망쳐보십시오.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은 거의 부르지 않는 찬송을 우리 때는 손뼉을 치며 열렬하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라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치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리이다” 이것은 이미 목회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시대가 변했고 환경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면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 전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면, 우리 선배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굶주림도 있었습니다. 핍박도 심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많았습니다.
35년쯤 전에 신학교를 다녔지만 저는 아침에 너무나 부러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컵라면 하나와 김밥을 사먹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저걸 꼭 먹어보리라!”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거기서 3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보십시오. 60년 전의 선배들은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이제 막 6.25가 일어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아마 더 심각하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거기서 시계를 다시 30년 뒤로 돌리면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교회가 폐쇄되던 때였습니다. 도대체 우리 목회의 일생에 어느 시대에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없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좋은 일들만 일어나고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간절한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총신의 교수였고 대한신학교를 세우신, 총신 최초의 구약학자 가운데 한 분인 김치선 박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결국 북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분이 설교시간에 외치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2만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그 당시 행정구역상 우리나라 남한 전체는 2만8천 개의 동네로 이루어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만8천 개의 동네 어디든 가서 생수의 샘을 파라고 설교했고 그 설교를 할 때 설교자도 울었고 설교를 듣는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타는 소원이 없습니다. 소원의 깊이만큼 기도는 열렬해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치 댐에 가둔 많은 물처럼 그렇게 불타는 소원으로 가득할 때 어느 한 순간 기도의 수문을 열자마자 우리의 기도는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그 어려움은 더욱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우리를 타오르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불꽃처럼 살게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설 때 존귀와 영광을 받기 위해 들어선 것이 아니고, 모든 육체의 편안함을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고난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고난을 당해야 하고 그 고난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교회를 세워 온 것이 우리 조상들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역사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소원이 기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 소원이 없습니다.
소원이 가장 뜨거웠던 사람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환경적으로는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시위대 뜰에 갇혀서 죽을 신세가 되었는데도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타오르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불이 무엇이었습니까?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서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불멸의 소원이었습니다. 몸은 시위대 뜰에 갇혔으나 마음은 누구도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불타올랐습니다. 그 타오르는 불꽃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 안에 있는 이 불같은 소원이 나로 하여금 이것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똑같이 짝을 이루는 한 사람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비로소 어둡던 마음에 밝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 연합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한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창조와 하나님의 마지막 종말의 사이에 우뚝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찬란한 빛이 종말과 태초를 함께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왜 이렇게 이어져 왔는지 깨닫게 되었고 왜 이 복음이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에 얽힌 비밀들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 모든 세계의 경륜의 접힘이었고 이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의 펼침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이제까지 배운 수많은 세상의 학문과 성경의 이야기들, 이스라엘의 역사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놀라운 빛을 그에게 선사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뜨거운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엾은 사람들인가?” 생각하며 그는 마음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뜨거운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로 하여금 복음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아니면 그들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든 저주를 다 받아서 그리스도에게 끊어진다 할지라도 자기의 골육지친 중 얼마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원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그를 이길 수 없었고 핍박이 그를 삼킬 수 없었습니다.
이 불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설교자로 불러주시고 목회자로 불러주신 것은 바로 이 불을 가지고, 이 소원을 가지고, 이 소원을 따라서 변화되지 않는 이 세상을 바꿔놓는 한 줌의 불꽃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나는 묻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함께 묻습니다. 저에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이렇게 타오르는 불, 무엇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는 불같은 소원, 이 소원 때문에 통곡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분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왜? 그분이 기도하신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니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도 사람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주셨고 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생을 기도하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도 아버지의 능력을 필요로 했고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렇게 기도하며 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열렬한 기도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죄 때문에 통곡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분은 순결하신 분이었습니다. 뉘우칠 만한 아무 죄도, 회개할 잘못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냥 흐느낌이 아니었습니다.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셨다는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심한 통곡”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깊은 고통이고 에여내는 것과 같은 깊은 아픔이었습니다. 마치 심장을 커다란 꼬챙이로 찔러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아픔이었습니다. 그런 통증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아버지 앞에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에게 주어진 환경이 좋은 환경이었습니까? 목회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까? 복음 전하기에 그럴싸한 상황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결국 복음을 전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고 십자가에 목 박았습니다. 소원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한 가지입니다. 만일 그가 육적인 인간이라면 그의 소원은 많이 있겠지만 방향은 자신의 육신으로 쏠립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소원이 이 많이 있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쏠리게 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예수께 나와서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이외에 무슨 소원이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아이를 고쳐달라고 하는 것 이외에 무슨 소원이 있었겠습니까? 예수께서 차갑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거기서 기가 꺾일 만 합니다. 예수님을 욕하고 발길을 돌렸을 만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막히면 막힐수록 이 여자의 마음은 더 활활 타올랐습니다. 소원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목회의 소원이 있기는 있습니까? 바라는 것이야 뭐든지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큰 교회가 되고 싶고, 더 많은 교인이 나오게 하고 싶고, 이런 저런 것들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정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을 것 같은,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목숨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라는 기도가 나올 만큼 유언으로 남기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의 강대의 눈물이 마르는 것입니다.
목회의 일생은 자기 죽음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마음의 소원으로 품고 그 품은 소원이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데 자신을 비롯해 모든 환경은 이 소원대로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실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안타까워하며, 예수님이 하신 기도,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그 기도를 눈물과 간구로 하나님께 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까? 전도사들이, 교역자들이 와서 1년을 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갑니다. 그 얘기는 무슨 얘깁니까? 1월에 임명받고 12월에 그만뒀으니까 6월쯤에는 딴 교회 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목회가 있겠습니까? 부임한지 2년, 3년 밖에 안 된 목회자가 또 다른 교회에 원서를 내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 그 교회에서는 이미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마음이 떠났는데 그 교회를 향한 소원이 마음에서 불붙을 수 있겠습니까?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나 언제나 떠날 것처럼 그렇게 목회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목회적으로 품어야 할 간절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칼빈은 말했습니다. “교회의 가치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 교회의 가치가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함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순결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여주지만 아무리 커도 순결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빛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생각해보십시오. 배들이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 수만 발의 조명탄을 쏘아 바다를 대낮같이 밝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등대 한두 개만 제 자리에 있어도 배는 안전하게 항해합니다. 보십시오. 정말 목회자인 우리가 품어야 할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목회자의 소명이 두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성도들은 회심하게하고 회심한 성도들은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불신자들에게는 전도하는 것이고 믿은 신자들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돌보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라면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마음속에 가장 불타오르는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나아오는 영혼의 구원,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간절한 소원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영혼이 변화되기 위해 간절한 눈물의 기도로 강대를 두루 적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항상 우리 마음에 안타까움을 가져오고 항상 우리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누가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씀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입니까? 그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값지고 고귀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사랑이 만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간절히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진짜 소원이 있다는 증거는 그 소원을 기도로 아뢸 때 눈물이 쏟아집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우리는 현대 사상도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현대를 이해하는 일은 더더욱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현대를 아무리 많이 알고 현대인과 교통한들 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갈 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 교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간절히 타오르는 이 소원이 우리 목회자들 속에 불길처럼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M16 소총의 최대 사거리는 3600m입니다. 그런데 유효 사거리는 550m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550m 안에 표적이 들어와야지만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3600m 밖에 안 나가는 M16 소총의 총알이 3590m 에 있는 사람에게 맞으면 죽지 않습니다. 철모나 뚫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0m 가다가 떨어질 총알인데 되겠습니까? 그러나 앞에 서너 사람을 세워놓고 그 거리가 10m 나 20m 밖에 안 된다면 총알은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갈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는 유효 사거리 안에서 발사되는 총처럼 강력합니까?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더 많은 교인이 예수를 믿겠다는데 싫어할 목회자가 누가 있겠으며, 주님을 더 사랑하며 살겠다는데 그것을 마다할 목회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것이 정말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온 것처럼 강력한 소원이냐, 아니면 간신히 도달하는 소원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생각해보십시오. 루터는 멜랑히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는 설교할 때 설교 듣는 사람에게 화가 나든지 설교하는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줄에 하나가 되도록 설교하십시오.”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오늘 우리와 제 자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인도하는 모든 목회자는 예배를 드리는 교인에게 화가 나든지, 예배를 이렇게밖에 인도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줄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코로나 사태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저는 이 중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하나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으레 있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코로나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밖에 예배할 수 없느냐?” 하나님이 경종을 한 번 울려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극장 구경을 가도 15분 전에 가는데 교회에는 15분이 아니라 10분 전에도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지만 많은 교회의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주보에 빨간 줄을 긋는 사람,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옆 사람과 필담하는 사람, 낙서하는 사람, 멍하니 딴 생각하는 사람, 성경 읽는 사람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예배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거룩한 불길,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는 지나갑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회자들은 뒤에 나가서 인사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뭐가 감사합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감사합니까?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와서 자기에게 없는 어떤 소원이 목회자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 속에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리차드 벡스터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가엾은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인 우리에게 기도의 눈물이 없는 것은 간절한 소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원이 너무 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사람 E.M 바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는 설교에도 진리는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다. 성령이 그 위에 부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십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기름붓듯 부어서 그의 설교가 달라지게 만들고 기도가 변하게 만들고 목회의 소원이 불타오르게 만들고 난관과 시련을 이기게 만들고 아버지 앞에 모든 걱정과 염려를 내어 놓고 자유로운 영혼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기도입니다. 성령도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이지 공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절한 소원을 가집시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이 목회의 본질적인 것에 고정되도록 온 마음을 다 합시다. 하나님이 오늘도 살리실 영혼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실 영혼들에 대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목회의 기도가 여러분의 소원이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소원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을 위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타오르는 소원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소원의 강렬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입니다. 그 사랑과 열정이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던 사람들이 선교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그 마음에 타오르는 불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타오르는 마음의 불길이 핍박을 견디며 주님 앞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소원의 강렬함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입니다. 목회의 열정이 없다는 것은 목회의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라 목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타오르는 소원이 없는 것은 결국 영혼의 질병입니다. 영혼의 질병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이 불길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한 구석에 우리도 모르는 시간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든 교회의 문제든 개인의 문제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간절히 불타오르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져 제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기 원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기 때문에 무명의 성도이지만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소원이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조건입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세상 사랑에 마음이 불탔고 열렬히 세상을 사랑했고 육체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매였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남의 탓을 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시대에 복음이 보편적이 된 때가 있었습니까? 어느 시대에 이 세상 사상이 교회와 일치된 적이 있었습니까? 어느 때에 참된 진리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들이 대중적인 환영을 받은 때가 있었습니까? 언제나 그들은 거치는 돌들이었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언제나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음에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붙는 소원이 없는 우리는 정말 우리의 영혼이 질병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약을 팔아도 열렬하게 파는 사람의 약이 팔리는데 하물며 성경을 설교하는 사람이 열렬하지 않다면 이미 그 자체가 질병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난하던 시절에 산불이 납니다. 헬리콥터도 없고 장비도 없습니다. 불을 도저히 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맞불을 놓습니다. 이 산에 불이 나면 저 산에 불을 질러서 아예 줄을 그어서 한 산을 다 태워버립니다. 더 이상 불이 못 건너오게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것을 가르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회가 어렵습니까? 세상에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맞불을 질러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열렬한 마음으로 기도의 불을 질러야 합니다. 온 교회를 산으로 보십시오. 그 산이 모두 산불에 삼켜지기까지 한 성도 한 성도 마음에, 가슴에 불을 지르고 그들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삼으시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저들의 마음에 불이 되고 그 불이 저들의 마음에 타오르는 불길이 되고 충천하는 화염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먼저 목회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마음으로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 생활에 게으른 성도들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은 목회자라면 그는 자신이 이미 기도생활에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 성도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다면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서 멀리 떠난 사람입니다. 모든 교인들에게 원하는 삶을 자신이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도 인도가 어렵습니다. 설교가 어렵습니다. 그 자체의 행위가 힘들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를 토하듯이 외치기 위해서는 강단에 올라오기 직전까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온 몸과 장기를 뒤흔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외치게 됩니다.
성악가 조수미는 말했습니다. “나는 노래할 때 온 관객이 내 노래를 듣고 뒤로 쓰러지기를 기대하며 노래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마음 그런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노래하는데 하나님 앞에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쓰러지고 거꾸러지도록, 하나님 앞에 통회하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도록 설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의 사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온 교인이 울든지, 아니면 그렇게 설교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목회자가 울든지 둘 중에 하나를 매주일 매주일 선택한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기도와 설교가 어려운 것은 그 자체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기도에 바쳐지지 않았고 말씀에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이 간절하지 못하기에 소원이 줄기차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그런 기도를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선 채로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싶다는 김소월의 시처럼 말입니다. “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든지 아니면 산채로 이 자리에 내가 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산산이 부서지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이 기도를 들어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이 간절하지 않기에 소원은 줄기차지 않고 소원이 마음에 가득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에서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피맺힌 기도와 쏟아지는 눈물, 가슴을 찢는 통곡과 탄식, 그리고 울부짖는 신음소리들이 우리의 목회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잃어버린 이 소원을 우리의 마음에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돌이켜 회개하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런 상태가 하나님 앞에 바람직한 상태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면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인들을 향해 마치 내가 어머니처럼 간절히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소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이 불쌍한 영혼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때를 회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눈물 흘리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기를 통곡으로 기도했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감화시켜서 주님 앞에 살게 했던 때를 기억하고 눈물로 목회의 일지를 쓰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마음이 산란할 때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순교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읽어보십시오. 당신의 종들이 그 핍박의 불길 속에서 어떻게 순결하게 믿음을 지키다가 죽어갔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돌에 맞고, 채찍에 맞고, 칼에 찔려 죽고, 손톱이 까이고, 불태워 죽임을 당했던 기록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소원이 다시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도록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 죄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는 미끄러지는 사람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소문난 죄는 없지만 은근한 죄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솔직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는지, 그리고 내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날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찾아오셔서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시고 나에게 이 목회의 소명을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순결한 종으로 주님의 복음을 위해, 천대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착한 때를 회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은퇴를 몇 달 앞두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간증이 제 가슴을 쿵 울렸습니다. 자고 있는데 꿈을 꾸었답니다. 총천연색으로 생생한 꿈이었답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 웬일이십니까?”, “내가 바로 널 위해 못 박혀 죽은 예수다. 내 대신 교회를 사랑해줄 수 없겠니?” 목사님은 잠결에 깨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셨답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목회해 왔나?” 그 새벽에 당신의 교회에 갔답니다. 그리고 강대에 엎드려서 “내가 그렇게 목회했느냐고 주님께 물으며 어린 아이처럼 통곡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 목회자를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남보고 회개하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그 마음을 그대로 교인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이 열렬한 소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회개한 후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목회의 기도가 웅얼거리는 기도가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여야 하는구나! 내가 매일 이 기도를 드릴 수는 없어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목회구나!” 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무릎 꿇고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아야 합니다. 매순간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이 교회가 그분이 피로 사신 교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우리를 위해 흘리셨네
우리의 젊음도 지나가고 늙음도 지나가고 우리는 불현듯 질병으로 혹은 사고로 혹은 돌연사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삶의 이 강을 건너 주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은 매우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때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어린아이 같아져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생각하며 어린아이처럼 눈물 흘릴 수 있는 장로,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생각하던 목회자, 이들에게는 가벼움이 있습니다.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모두 버려도 주님을 이미 소유한 사람이니 세상은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을지언정 주님을 누가 빼앗아간단 말입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금년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사탕발림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금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목회의 파도를 헤치고 믿음으로 굳게 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는 설교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이름 없는 목회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