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소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이재호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선택구절을 모두 설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보면은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는데 ‘소원’이라는 말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원’은 그리스어로 ‘이케이리아스’ 라고 하는 단어인데 적절한 번역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어떤 성경에서는 ‘supplication’ ‘간구’라고 번역을 했고 어떤 성경에서는 ‘petition’ ‘청원’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실제로 일반 그리스어 문학에서도 ‘간구와 소원’ 두 단어는 아주 짝으로 다니면서 사용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간구’라고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와 소원을 올렸고’ 했는데 ‘소원’ 그러면 뭔가 막연한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있고 한데 결국 이 두 말이 합쳐져서 기도와 소원, 기도가 따로 있고 소원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라면 소원은 자기 자신 마음속에서 불타는 바람입니다.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고 간절하게 타오르는 불길같은 바람입니다. 이렇게 바람은 여러 가지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많이 있지만 진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정도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여러 가지일 수 없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라서 못 가지만, 밤에 사우나를 갑니다. 밤에 가면 7시쯤 가면 안 들여 보내줍니다. 끝났다고 안 들여보내줍니다. 잠깐 샤워만 하고 하고 나올테니까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면 들여보내줍니다. 그리고 탕에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탕에서 일하는 사람이 와서 ‘손님, 죄송하지만 이제 물을 빼야 되겠습니다.’ 그러고 드레인을 확 뽑아 버립니다. 큰 구멍으로 물이 내려갑니다. 발을 한 번 쓰윽 대봅니다. 그러면 발이 막 구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어린아이 발이면 아마 다칠 것입니다. 힘차게 빨려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이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 한쪽으로 확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소원은 그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받아주는 것이고, 병들어 생사를 오가는 사람도 소원이 많이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쏠리는 것은 병이 낫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처럼 돈 버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자기 사업이 잘 되어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생을 불꽃처럼 사셨던 이유는 ‘이케이리아스’ 간절한 마음에 바람에 불을 품고 있으셨기 때문에 열렬하게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결국에 기도가 안 되는 이유는 소원의 크기가 작아서 안 되는 것입니다. 소원과 바람이 열렬하면 기도를 억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기도를 억제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억제할 수 없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주 있지는 않지만.그런 경우가 ‘이케이리아스’가 큰 것입니다. 이 소원이 굉장히 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교역자를 상대해 왔습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이 교역자의 역할이라는 것도 일입니다. 하다가 보면은 늘게 됩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데려다 놓고 6개월 있고 1년 있고 2년 있으면 점점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케이리아스’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선배들한테 배워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 늘긴 느는데 그것은 그냥 일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불러 일으키는 마음은 불타는 마음입니다. 심방 해보니까 마음이 돌덩어리가 아닌 한은 심방을 해 보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아! 내가 목자구나! 내가 진짜 얘네들 영혼의 목자구나!’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심방은 걔네들을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백스터가 토요일에는 항상 심방을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심방을 했습니다. 금요일까지 말씀 준비를 다 끝내고 토요일날 각 가정을 심방하면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꽉 채우는 것입니다. 토요일 밤에 눈물로 기도하고 주일을 맞이할 때 양떼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어야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됩니다. 소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마지막 남길 소원이 무엇입니까? 지금 딱 눈을 감는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빌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혹시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을 이엔바우드는 ‘영적인 질병 상태에 든 것 같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의문의 설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율법적인 설교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슴에 불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우셨다’는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오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마지막 기도의 광경을 그렸을 것이다라고 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의하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그랬으니까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만 육체에 있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간절한 바람이 있는 생애였던 것입니다. 그 소원을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 소원으로 간절한 열망을 품고 열렬한 소원을 품고 사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마음의 진짜 원하는 것이 없으니까 기도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자 기도할 때에 아무 힘이 없는데 이렇게 기도회를 인도할 때는 열렬한 척 해야되니 이것이 모순입니다. 열렬하게 기도를 인도하려면 자기 마음속에 열렬한 기도가 살아 있어야 되고, 열렬한 기도가 살아 있으려면 마음의 소원이 불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한 번 쭉 스크린 해보면 진짜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바라는 건데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거나 하나님 앞에 나쁜 일이거나 허무한 일일 경우에 그것은 타협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쁜 사람입니다. 악인입니다. 그것 말고,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선한 손,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목회를 하니까 ‘올해는 아이들이 진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많이 회심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우리 마음에 없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목회자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마음이 불타는 마음이냐 할 때는 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진짜 불타는 마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심리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크기입니다. 욕망이 큰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체중 조절하기 위해서 밤에는 간식을 먹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도 내게 있고, 옆에서 치킨을 먹으니까 치킨과 콜라를 먹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결국은 결정하는 것이 어디에 달렸냐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크게 쏠리냐에 달린 것입니다. 여전히 마지막까지 ‘안돼, 날 유혹하지마, 난 안 먹어’ 딱 끊고 이렇게 안 먹는 쪽을 선택한 순간에도 여전히 먹고 싶다는 마음은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훨씬 크니까 그것을 이긴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덥석 앉아서 ‘에라 모르겠다.’ 그러고 먹는 동안에도 ‘체중 조절을 해야 할텐데, 다이어트 중인데’ 내가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겠다는 의지가 훨씬 크니까 결국 이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이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원이 없을 리는 없습니다.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사랑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당연히 돈을 벌고 싶고, 연애하는 사람은 사랑에 성공하고 싶고, 목회하는 사람은 어쨌든지 간에 목회의 열매를 맺고 싶고,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의 성과를 내고 싶은 것이 그것이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한데 예수님의 마음에 타오르는 바람이 있는데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아뢨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서는 우라들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안 합니다. ‘공기를 주옵소서’라고 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을 주시옵소서’하고 통곡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없는 것을 갖고 싶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 것이고 통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 속의 바람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통곡과 눈물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당신은 죽으러 가십니다. 이 땅에 제자들을 남깁니다. 어리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목자를 치리니 양떼들은 모두 자기를 배반하고 제자들이 흩어질 것도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미래의 교회를 맡기십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바람과 현실 사아에서 그 격차를 느끼면서 예수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심한 통곡이라고 했습니다. 커다란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에게는 바람이 있긴 있는데 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을 본받을 정도가 안되는 것입니까? 내가 막 은혜를 받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혜를 받았을 때입니다. 멈춰야 했는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하나님 옆에 기도를 하기 위해서 퇴근을 하면 바로 동두천으로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를 하고 조금 자다가 새벽에 동두천에서 기차를 타고 명동까지 기차타고 전철타고 갈아타고 와서 출근을 했습니다. 지금 하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주일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새벽예배를 드리고 직장에 와야 하는데 목사님 한 분이 올라가시더니 설교를 하기 위해 올라가시는데 시편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시편을 펼치는데 시편을 읽으시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봤는데 성경 읽으면서 우는 사람은 목회자를 포함해서 아무데서도 못 본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새벽에 시편을 읽으시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은 ‘이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못 느끼고 있구나’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한 번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우는 적이 없는데 그것이 기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할 정도로 그렇게 간절했는데 나에게도 예수님 같은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봅시다. 나라가 임하는 것이 짜증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지 말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봅시다. 우리 모두 주기도문을 동의합니다. 그런데 차이는 주님은 늘 통곡과 눈물로 그 기도를 드리셨고, 우리는 예배 끝날 때 그냥 외운다는 차이입니다. 결국 이것은 왜 내가 목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원하는 희망사항은 있는데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동반할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정신이 산란하게 갈려져 있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를 기억해 봅시다. 연애를 하면 연애하는 동안에는 공부는 해야 합니다. 사역은 해야 합니다. 기도도 해야 합니다. 알바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이라는 것은 면별을 해서 앉아가지고 뚫어지게 하나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은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여기서 혼자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서 기도원에 앉았다면 그 기도원에 앉아있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미친듯이 일을 하고 작업을 하는데 그 때에도 순간순간 하나님이 떠오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일터에서 지금 일하는 그 사람이 마음으로는 기도원에 있는 사람이고 기도원에 있는 사람은 가장 세속적인 길거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레이저 기술이 발달해서 자를 때 다 레이저로 자릅니다. 예전에는 산소통에서 산소를 불러일으켜서 탄피 꼭지를 끼워가지고 관을 깨서 불을 붙이면 거기서 시커먼 불꽃이 나옵니다. 그것을 조절하면 쎄지고 약해집니다. 불꽃을 파란 불꽃이 나오게 해서 커다란 쇠를 데고 한참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쇠가 서서히 녹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줄을 그어 놓은대로 그대로 따라가면서 천천히 대고 있으면 금세 깨 부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쇠를 자르겠다는 사람이 그 산소용접기를 가지고 불꽃놀이를 하고 있으면 쇠가 잘라지겠습니까? 쇠를 다 녹일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안 잘라집니다.
집중입니다. 그것은 사역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중심이 이 사역에 기울어져 있어야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1년 하고 그만두는 사람은 1월달부터 그만두려고 결심을 한 사람입니다. 집중이 되겠습니까? 담임목사로 갔는데 이제 3년도 안 됐는데 또 옮기고 싶습니다. 1년 정도 하다가 그만둘 기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확 퍼져서 한군데로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육전도사나 전임이라는 것의 그 문제가 아닙니다. 전임이라는 것은 외적인 시간을 그렇게 쓴다는 것이지 담임목사 같은 구역장도 있고, 구역장도 못 하는 부목사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교육전도사 시절에 두 교회에 밖에 안 있었지만 내가 담임목사님보다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중하는 그 마음에서 ‘에스더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쇠를 자르는데 대면 잘라지고 대지 않으면 잘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몇 달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잘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쇠를 자를 사람과 못 자르는 사람은 그 용접기를 붙들고 있는 그 자세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길은 둘밖에 없습니다. 대충하다가 연수가 차면 그러면 너무너무 탁월한 사람만 열린교회 부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회의 진짜 징수는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징수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여러분들에게 잘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또 선배들이 여러분들에게 본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금강산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 표지판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고 금강산에 간 것이 아닙니다. 진짜 가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비로봉까지 올라가서 발 아래 산해만리를 내려다볼 때에 그것이 진짜 금강산을 간 것입니다. 금강산은 표지판이 데려다주지 않습니다.
나를 하나님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표지판도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까 문제입니다. 아예 표지판도 안 보여주는 목회를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못 배우고 고생만 하고 일만 하다가 떠날 것이고, 좀 더 나은 경우라면 일을 배워가지고 떠날텐데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일을 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엠바운즈에 의하면 그 일하는 것이 생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엠바운즈가 계속 경고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서 마음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선배들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거기에 자신의 마음이 깊이 사로잡히는 그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상이 통곡과 눈물의 일상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짜 사역다운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 명의 교역자를 만나도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열렬한 기도는 소원이 불타고 있다는 가장 증거인 것입니다. 영혼이 불쌍해서 우는 사람은 소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진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설교를 잘 하고 싶은 ‘이케이리아스’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사람은 진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계를 이해를 못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엠바운즈를 모두 읽었으니까 거기서 계속 이엠바운즈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결국은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기도회를 인도하기 전까지 자신이 그 기도의 소원에 열렬히 불타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하나로 딱 모아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자면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잠깐 과외를 했는데 선생님이 외대를 나왔는데 괴짜입니다. 과학에 아주 박식한 사람입니다. 추운 겨울에 옥상에서 태양열로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반짝이는 거울을 삼각형으로 잘라서 초점을 한군데로 모읍니다. 그러고 양은냄비를 저기다가 놓고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쫙 펼쳐 놓습니다. 태양 각도에 비추면. 안 끓을 것 같은데 끓습니다. 추운 겨울에 옥상에 있을 때 태양이 물을 끓일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초점이 맞으니까 물이 끓었습니다. 돋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초점을 맞춰서 먹지를 태우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목회를 해도 집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합니다. 심방도 하고 설교도 하고 행정도 하고 전도도 하고 다 합니다. 어느 것도 죽기 살기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늘 바쁩니다. 마음에는 그 물을 끓일 수 있는, 초점이 모아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목회는 목회자는 목회에는 목회하는 것은 말을 물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을 물가까지 데려갈 수 있지만 말에게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듯이 목회의 자리에 갖다 놓을 수는 있는데 그 사람이 진짜 목회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아주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들이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을 하다가 자기의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예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설교에 피가 묻고 기도의 눈물이 묻고 심방을 할 때 잠깐잠깐 영혼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해 줄 때 사람들의 영혼이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마음이 흐트러지는 사람들에게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일어날 때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간절히 하나님께 빌어서 그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보면서 간곡히 부탁하는 것은 일을 배우고 일을 잘해야지 배우는 게 있고 선배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말고 마음의 초점도 거기에 딱 떨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마음을 모아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목회 사역이 간절한 여러분들의 바람이 되게끔 그렇게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기도회 한다고 기도회 나오고 새벽기도 체크하니까 새벽기도 나오고 그리고 몇 시간 이상 기도하라고 그러니까 기도하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초점을 맞추면 감독이 필요 없습니다. 왜? 내 마음속에서 영혼을 심방하고 싶고 설교하고 싶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고 그 영혼들이 아무것도 못 받아 가지고 주일날 돌아가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창의적인 목회의 아이디어를 계속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런 모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불타는 바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창의성이 없다는 것은 ‘내 기질 자체가 창의성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애정이 없을 때 창의성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그것을 바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고 모르게 되면 누구한테 배워서라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마음속에서 간절히 생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그런 기도와 소원의 생애에서 그 소원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대할 때 심하게 통곡하실 수밖에 없었고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일을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은 여러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진짜 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는 그 일이 나에게는 있는가? 그것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멀리 바라보고 계획을 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일생은 그런 것입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기가 막히게 내 인생의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과거에 걸어왔던 길 하나하나가 없어서는 안 될 길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는 사회간접자본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리는 진짜 필요한 시장 있는 곳에 하나씩 놓고 동네에서 동네를 잇는 개울은 사람들이 물을 건너다니거나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큰 어른들이 들짐을 지어가지고 큰 돌멩이를 놓는 것입니다. 돌에 눈이 살짝 내립니다. 멀리 보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겨울에 물에 빠집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내 한 발자국을 어디에 디딜 것인가? 그리고 돌만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걸으면 결국 건너편으로 개울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있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보내셔서 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된다.’ 자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마음이 없으면서 영혼들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은 사기입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기도 속에서 그런 소원이 커지면서 우리의 설교에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눈물이 있고 거기에서 영혼 사랑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 점검을 해 봅시다. 노트를 펼쳐 놓고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은 소원은 무엇인가? 쓸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초점이 없는 생활입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하루 그냥 즐거운 것은 하고 싶고 힘든 것은 안 하기 싫은 상태에서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 모든 아이들 평안하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에 쓸데없는 기도가 그런 기도라는 것입니다. 성의도 없고 처음부터 그런 기도는 응답을 받을 방법이 없는 기도입니다. 응답 됐는지 안됐는지 확인도 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주일날 적어도 3분의 2 이상의 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물 흘리는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시옵소서.’ 아니면 명단을 올려놓고 ‘이놈, 이놈, 이놈, 이놈, 이번 주일 예배에 깊이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라는 이야기는 이엠바운즈의 의하면 소원의 진실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진짜 그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하나님이 하셨구나’하고 감사하는 것이고 안 이루어졌을 때는 ‘내 기도가 부족했구나.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었구나’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소원이 커야지만 기도가 열렬해지는데 기도를 간절히 하면 소원이 커집니다. 두 개가 순환관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아! 내가 저 회심하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해야겠다.’ 생각을 거의 안하고 삽니다. 그러면 소원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다 따라주지 않아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회심하지 못하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겠다’ 그러고 명단을 놓고 회심하지 못하는 누구인지 명단을 놓고 매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1번에게 얘가 주님을 아직 못 만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진짜 변화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마음을 실어서 진심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1번에다 진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야 겠다는 마음이 내 안에서 소원이 일어나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원이 더 일어납니다. 이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합니다. 이 소원이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소원이 충만해지니까 기도가 더 열렬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말하자면 절체절명의 바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 시켰을때에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교인들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죽기 살기로 바라는 건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죽기 살기로 바라는 것이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라고 그러는데 마음에서 소용돌이쳐야지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 기도가 막 뜨거워지는 영혼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언제 경험했는지 기억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소원, 제일 중요한 소원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설교를 해서 영혼들이 내 설교를 듣고 깊이 변화되도록 도와 달라고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계속 실패를 하면 자기에게 영혼이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아예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예배라는 종교적 서비스를 위한 의례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 나도 이런 설교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영혼들이 변화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해서 불을 토하듯이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잘하고 싶다는 소원이 커지면 설교를 위한 기도가 열렬해지고 설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토요일에 와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새벽에 일찍 나와서 주일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슴이 뜨겁게 타올라야지, 그래야지만 그것이 진짜 목회의 진수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회의 눈물을 선생님들이 배우고 아이들이 배우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진정한 목회자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한 가지 일,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자신을 쏟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심방 할 때잖습니까? 심방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냥 간다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기 전에 그 아이를 위해서, 갔다 와서 그 영혼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가 되면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해서 열렬하게 설교하고, 선생님들하고 기도할 때는 선생님들하고 기도회를 위해서 열렬하게 준비해서 뜨겁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의 사역 그 자체에 아무 사역도 마음을 거기에 쏟지 않고 하는 사역이 없습니다. 그래야지 목회를 하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사람을 안 쓰시고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쓰임 받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생각해 봅시다. 그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신령한 세계에 의해서 꿰뚫고 있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자기의 능력을 왕 앞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 전에 이미 보디발의 집에 집사를 하고 감옥에 총무일을 하면서 준비시키셨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난 가운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눈물을 흘려 열렬하게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로서 나의 영혼이 건강한가 묻는 것입니다. ‘정말 나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는가? 영혼을 위한 눈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눈물, 목회를 위한 눈물, 나의 부족함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마음을 흩어지게 하지 말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께 마음이 모아지게 해야 됩니다. 그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딱 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이 목회든지 선교든지 학교든지 어디에서든지 간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한 영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늘 마음에 ‘목회가 무엇인가?’, 그 마음의 눈물이 꽉 차 있는 그것이 목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영혼들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그것이 나에게는 명품보다도 더 소중하고 나에게는 값진 음식보다도 아름다운 의복이라도 나에게 더 소중한 것. 그런 눈물을 간직해야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영혼을 놀랍게 변화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눈치보지 말고 누구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깊이 느끼고 그래서 내가 예수의 그 사랑의 줄에 묶여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에게 영혼을 맞겨주신 것, 부족한 나에게 교회를 주신 것, 내가 설교를 할 수 있는 양떼를 주신 것, 할 수 있는 영혼을 주신 것, 내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겠습니다. 영적인 자녀들을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간절합니다.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놀라운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유년부부흥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유치부부흥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이라면 다 쓸모없는 기도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흥이 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받게 해 주시옵소서. 선생님들은 이렇게 변화되게 해 주시옵소서. 거기에서 감격이 매일매일 있는 것입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기한 것입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매주 보는 것입니다. ‘내 기도 때문에 저 선생님이 변화하고 아이가 변했구나.’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은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회 사역에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부흥하게 해 주시옵소서, 은혜롭게 해 주시옵소서.’ 응답을 확인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감격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에 수련회를 참석합니다. 최소한 100% 인원 모두 참석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열렬히 심방하고 편지보내고 전화걸고 그렇게 도전하는 사람에게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는 놀라운 간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간증에서 너무너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함께 해 주셨다.’
그런데 기도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없으니까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너무 뜨겁게 사랑하면 그 소원은 모두 구체적입니다. 모두 구체적입니다. ‘아! 저 사람 옷도 없는데,구두도 없는데, 건강도 안 좋은데, 눈도 나쁜데.’ 모든 생각이 떠오르면 기도가 구체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초점이 더욱 우리 마음속에서 불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조금 부족해도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는 교사들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를 느끼면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인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떠 올려 봅시다. ‘진실한 목회자’ 무엇입니까? 거짓말 안 하고 사기 안 치고 교회 돈 안 떼먹고 그것은 기본입니다. ‘진실한 사람’ 그러면 우리 마음에 딱 떠오르는 것은 겸손하면서 사람의 안목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늘 자기가 그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 인상이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항상 생기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고난을 당하지만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아무도 모르게 하는 선한 목회의 헌신이 결국은 알려지게 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게끔 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한 해 기도원에 올라왔으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에 소원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한 번쯤 나열해보십시오. 새해 말씀 사경회 때 아이들이 몇 명이나 나왔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말씀 전할 때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는지, 누가 얼마큼 변했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선생님들은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는지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열하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은 응답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목회 사역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아직도 너무 부족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더 많이 주려고 하시는 거죠? 나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하시는 것이죠? 아멘, 1년만 더 나에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새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은 여러분의 사역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기도해주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진짜 안 이루어지면 절대 안되는 소원이 있습니다. ‘얘는 변화 받아야 됩니다. 얘는 이렇게 가정에 어려움이 많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그래서 목회의 모든 것들이 애매모호하고 흐릿했던 것들이 또렷한 초점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지금 해야하고 무엇을 하나님 앞에 이루어야 할지 간절한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는 열렬해집니다. 젖은 장작에 아무리 불을 붙여도 불길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원에서 내려가서 선생님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간절히 하고 마음에 딱 뚜렷하게 떠오르면 그것을 적어서 선생님들한테 ‘열심히 올 한 해 이렇게 사역합시다. ’ 영혼의 변화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합시다. 한마음이 되어서 열렬한 소원이 타오를 때 그 때 여러분들이 기도는 심한 눈물이 나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가 있는 그곳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해 영혼들을 살리시고 설교를 통해 죽은 영혼들을 살아나게 하시고 병든 영혼들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일을 많이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도 소원을 가지고 제대로 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목회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한 해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정말 잊히지 않는 그런 한 해가 되도록 아버지 앞에 큰 목회의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