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여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레 24:1-4)
녹취자: 이솔
성막은 직사각형 크기의 방이었습니다. 큰 방은 12평, 작은 방은 6평짜리 네모난 방이었습니다. 주위에는 성막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죠. 작은 방은 1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방이었고 큰 방은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 성막에 있는 등잔불을 어떻게 간수할 것인지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감남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그 등불을 밝히라는 것이었고 레위 자손들은 세세토록 이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간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히브리어 성경으로 레위기를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눈길이 멎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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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그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이 한 6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목회자로서 본질적인 사명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큰 각성이 제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전에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았지만 이때 그때 이 말씀을 읽은 그것은 나에게 더욱 공부하도록 채찍질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예 논문으로 써서 한 번 횃불 신학교에서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를 여러분들과 함께 인터넷으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약하면 여기서 크게 주목해야 될 것은 세 가지 단어입니다. 등잔불, 불빛 그리고 깨뜨려진 감남 세 가지입니다. 자 그럼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것입니다. 등잔불이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식양을 개시해 주실 때에 창문을 설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성막을 덮고 있는 재료는 물돼지 가죽이었습니다. 가죽이었으니 그 가죽이 덮어버리고 나면 일체의 어떤 빛도 회막에는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돼지 가죽이라고 하는 것은 수없이 비바람을 막고 추위와 더위를 견뎠으니 처음 했을 때야 세탁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무틱틱한 낡은 가죽 지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그 내부는 아주 화려했습니다. 금으로 된 그릇들이 있었고 기명들이 있었고 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꼬아 만든 아주 화려한 문양들이 있었습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었겠죠. 그래서 그 안에서 밝힐 등불에 관한 규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일체의 바깥에 햇빛이 없이 오직 등잔불에 켜진 그것으로서만 성막 내부를 밝히고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은 그 불빛에 의존해서 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의 진리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바와 같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격언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반계시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특별계시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막 안에서는 오직 등잔불로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목회자로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대한 상식, 견해 세상에 있는 학문들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에 인접한 신학 신학에 인접한 인문학 인문학에 인접한 다른 모든 학문들까지 끊임없이 지평을 넓혀가며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작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진짜로 필요한 지식은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계시의 빛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렇게 예표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연속성 불연속성 같은 주제가 아닙니다. 모든 지식이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성막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계시의 빛침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등잔 불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학이 무엇입니까?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한 사람인 페트루스판 마스트리어트는 신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페올로기아 에스트 비벤디 페를 크리스톤 데오’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신학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지혜와 지식이 혼돈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단어의 번역이었다라고 하는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종현 교수 같은 철학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철학은 ‘필로소피아’였습니다. 그 필로소피아가 나중에 사람들에 의해서 라틴어로 그리스어가 번역될 때 우습게도 ‘스키엔띠아’ 라고 번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론이죠. 원래 이 기독교 신학은 그 이름이 기독교 철학이었어요.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기독교 가르침의 총합을 그리스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라고 부르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서에서 복음의 지혜를 소피아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이 소피아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 특정한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수한 이성만이 아니라 판단을 포함해서 실천 이성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일치하게 ‘신학은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일에 대한 지식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다분히 그리스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적인 개념이 아니라 히브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사유에서 이 지식은 단순히 이렇게 이론과 지식으로 구별되는 것 혹은 오성과 구별되는 단순 추론의 이성에 속하는 것 이런 식으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인의 맥락에서 이 지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트’예요. ‘다트’. 그리고 그것은 ‘야다’라는 동사에서 오고 ‘야다’가 처음 쓰인 것이 창세기 2장에 ‘동침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사상을 이어받아서 호세아서 4장에서 호세아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정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지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행복에 이르는 절대적인 덕목이 바로 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 불빛이 찬란하게 교회에 비치도록 만들어주는 사명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말 수단이 좋을 수도 있고 사교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고 키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가 지식의 사람이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것인데 그 지식은 학교나 학원에서 습득할 수 없는 지식이며 그 지식의 본질은 바로 네 가지 대상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얻으면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위탁받은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신학교 다닐 때 공부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나는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 읽는 것이 싫으십니까? 아마 당신은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명을 가진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소명이 요구하는 일에 대한 기쁨과 재능이에요. 그것이 소명이 입증되는 비결이에요.’ 같은 말을 헤르만 바빙크도 말합니다. ‘소명은 재능에 의해 증명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소명에 꼭 필요한 어떤 일이 끝까지 하기 싫을 때에는 그건 소명 아니에요. 소명 아닙니다. 소명은 소명과 관련된 그 일이 즐거워야 돼요.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공부를 너무 안 해요.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오죽했으면 제가 10년 전에 2008년과 2012년에 제가 두 번을 개강수련회를 인도를 했어요. 그리고 그때 제가 어느 학생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학생회장이 찾아왔어요. 두 사람이 공부하다가 암에 걸렸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없냐 그랬어요. 열린 교회가 모두 책임질 테니까 보내라 그랬어요. 그리고 내가 한 마디 덧붙였어요. 그건 이 자리에서 공부하다가 쓰러지면 모든 치료비는 열린 교회에서 부담한다. 실제로 그 수련회에서 학생들이 큰 충격을 받고 거의 폐강 위기에 있는 라틴어 강좌 일곱 명씩 들어오던 라틴어 강좌에 칠십오 명이 지원을 했어요. 문병호 교수님이 그 방에 들어갔다가 자기 방이 아닌 줄 알고 딴 데로 가셨대요. 학생들이 왜 가시냐고 아 나는 라틴어 수업하러 왔는데 여긴 내 교실이 아닌 거 같아요. 아 여기 교실 맞다고 칠십오 명이 수강을 했어요.
내가 말하는 건 뭐냐 하면요 공부를 잘한 사람이 진실한 목자가 된다. 그런 거 없어요. 공부를 못한 사람이 진실한 목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워요. 있긴 있어요. 근데 너무 소소해요. 모르면 거짓말도 해야 되고 넘겨짚기도 해야 되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거잖아. 공부하도록 부름 받았으니까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럼 꼭 이렇게 묻겠죠. 목사님은 그럼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네 여러분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부끄러움 없이 대답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3년 동안을 다시 여기 양지에 갖다 놔도 내가 하나님한테 기도했어요. 그 이상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두 번 기도 공부하다가 절도였어요. 영양실조였어요. 일 년에 한 번씩 총신과 전국에 있는 신학교에 밥을 한 그릇씩 사는 이유가 그때 내가 이 다음에 교회가 된다면 내가 이렇게 배고픈 학생들을 위해서 밥을 줘야 되겠다. 그 결심을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15년째 오는 겁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예요. 공부를 해라. 공부를.
제가 총신의 엠드브에 들어올 때 20대 일이었어요. 1200명이 원서를 내고 60명을 뽑았어요. 지금은 부끄러울 정도로 경쟁률이 없는 때가 됐죠. 그러니까 학생들의 질이 점점 떨어지죠. 여러분들은 주위의 학우를 보면 거기에서 공부의 수준을 결정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돼요. 여러분들의 경쟁 상대는 이런 데 아니라 최소한 웨스트민스터나 고든 코넬이나 트리니티나 아니면 뭐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생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돼. 필요하면 그런 계통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방학 때 만나서 대화를 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일 거예요. 어쨌든 공부해야 됩니다.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하느냐? 치열하게 공부해야 돼요. 거의 신학교 다니는 동안 이거 가지고 안 되고 최소한 10년 정도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요? 덜 먹고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고 덜 게으름을 피우고 공부해야 돼요. 모두에게 24시간 주어졌어요. 덜 자야 돼요. 저는 단호하게 얘기했어요. 아프지 않은 사람 6시간 자는 것은 죄다. 나는 네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을 했어요. 평생을 공부해야 돼요. 열렬히 공부해야 해요.
무슨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는 이번 총신 원보에 제가 글을 실었어요. 교회학을 중심으로 교회학과 역사를 중심으로 그렇게 공부해야 된다는. 그래서 학교 공부는 그냥 학기 안에 모두 끝내는 거를 원칙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학교 딱 종강하면 일주일 안에 모든 레포트를 다 쓰고 다 끝낸다. 그리고 방학 때에는 그 다음부터 개학할 때까지는 나의 독자적인 계획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된다. 철학, 역사, 인문학 그리고 성경신학 그 다음에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이런 것들 중에서 반드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지식을 광범위하게 섭렵해가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독자적인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공부도 안 한 사람이 졸업시켜 놓으면 신학교 공부 아무 쓸데없다고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야. 아니 교수님들이 여기 이렇게 많은데 기껏 가르쳐놨더니 신학교 공부 아무 쓸모 없더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뭐냐 하면 쓸모없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내가 묻는 거예요.
제가 88년도에 교수가 되어서 열렬하게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이 열렬히 따라왔어요. 그래서 한 학생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교수님 강의를 2년 들었는데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모든 책을 제가 다 읽었습니다. 1년에 한 키였습니다. 이렇게 세워 놓아서 한 키가 아니라 눕혀놔서 한 키 1년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봐야 그거 얼마 안 돼요. 한 학기에 한 키 정도는 읽어야 돼요. 뭘 아는 게 있어야지 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도 되지 않는 설교 설교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공부를 안 했는지가 훤히 드러나요.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열렬하게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공부해서 쓸데없다’라는 생각을 선배들에게 많이 주입을 받은 나머지 아예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근데 ‘공부해서 쓸 데가 없다’라고 정도라고 말하려면 공부 이상의 무엇을 발견한 사람들만 그 얘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공부 이상의 무엇도 없고 공부도 없는 거예요. 둘 다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 교회에 가도 쓸모가 없고 더더군다나 누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더더욱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열렬하게 공부를 하고 그다음에는 그 공부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이렇게 공부를 하라고 얘기를 하니까 그 학생들이 내가 수련회를 하고 가가지고 엄청나게 공부를 했대요. 진짜. 그래서 나는 이게 실화예요. 기숙사에서 여러 사람이 쓰러졌어요. 열린교회에서 열린교회로 연락이 왔으면 링거라도 놔줬지. 근데 어쨌든 쓰러졌어요. 6개월 후에 다들 하는 말이 이거는 김남준 목사님에게는 가능하고 우리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다시 풀어졌어요. 그리고 3년 6개월 후에 와서 다시 한 번 불을 질렀죠. 근데 내가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뭐냐 하면 공부하다가 쓰러지는 것 정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죽으면 순교예요. 순교. 학교 교자 순교예요. 학교에서 죽어. 윌리엄 포사이스의 말과 같이 말이죠 설교자는 설교의 결과에 의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거예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열렬하게 해야지. 그거 요즘도 그럽니까? 생전 가까이도 안 하던 학생들이 다가와가지고 갑자기 라면 사주고 빵 사주고 그러면서 마지막에 김전도사 혹시 그 기말고사 노트 정리한 거 좀 있으면 좀 복사할 수 없어. 그게 뭡니까? 그게. 선비가 가오가 있지. 그게 뭡니까? 차라리 백지를 내고 말지. 열렬히 공부해야 돼요. 열렬히 치열하게 공부해야 돼요.
지난 한 학기 동안에 원서를 한 권이라도 읽으신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 들어보세요. 포기하죠. 그렇게 해서 이 글로벌 시대에 어떡하려고 해요. 영어를 뛰어넘어야지만 지식의 세계가 펼쳐져요. 독일어 하나만 더 하면 그 지식의 세계는 더 크게 확장이 되고 거기다 불어 하나만 얹으면 완전히 새로운 지평이 열려요. 난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알아요. 웃기지 마십시오. 현실성이 없는 얘기 하지도 마십시오. 저는요 열정의 문제예요. 열정. 초등학생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열렬하게 일어를 공부해요. 일본 망가를 보기 위해서 만화를 보기 위해서 한대요. 그 정도의 열정도 없이 어떻게 하겠어요. 열렬히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해요. 그 얘기하면 한이 없어요. 이제 넘어가겠습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건 그런 학문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영적인 지계 이게 그러니까 일반적인 신학 학문과 영적인 빛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갈멜산에 쌓아 올린 장작에 비유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많은 장작을 갈멜산에 쌓아두어도 불이 안 붙을 수 있어요. 근데 만약에 아무리 불이 떨어져도 그 장작이 없었더라면 그게 불이 붙을 수가 없어요. 쉽게 얘기하면. 그래서 결국은 이 이성으로 아는 지식과 마음으로 아는 지식 팡세를 쓴 파스칼은 말하기를 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자기의 지식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는 이성이 모르는 논리가 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여기 오신 것은 바로 마음의 논리가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소명을 받은 것이고 그리고 여기 와서 지금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은 그 마음의 빛 마음이 가지고 있는 논리 그것은 일종의 지혜예요. 그래서 많은 지식들을 쭉 엮으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게 만들어주는 그 어떤 초자연적인 지식의 빛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하다고.
졸지 마세요. 졸음이 와요? 지금 이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부동산 투자 설명회에서 빛나는 복덕방쟁이들의 눈빛을 비교하면 여러분의 눈빛과 비교할 수 없어요. 열정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찬란한 지식의 빛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 빛이 바로 영적인 빛이에요. 그 빛을 많이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하고 은혜의 빛을 받아도 옳고 그름에 대한 이성의 판단과 지식이 올바로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잘못 사용해요. 그래서 이단에서 이단에 속한 사람일수록 강력한 체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 체험 안에서 아예 묶여버린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마음대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을 끼치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신앙의 지식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연마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며 철저히 성경과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에 대해서 충실하게 하지 않고는 결코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열렬히 공부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신학교 시절에 학생들이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요. 나는 그런 모임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노닥거리는 것 자체를 저는 별로 싫어했어요. 근데 그 우연히 하여튼 그 모임에 끼게 됐어요. 그때는 한 학생이 얘기하는 거야. 제가 나이가 많아서 “형 난 참 신기해.” “뭐가?” “우리 담임 목사님이 밥 먹고 사는 거 보면 참 신기해요.” 그래서 “왜?” “아니 어떻게 그 설교를 하고 월급을 받아?” 난 그 목사님 모르니까 “그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사례금도 필요 없어.” “왜?” “난 그냥 내가 아주 존경할 수 있는 목사님 밑에 담임 목사님 밑에 들어가서 배울 수만 있으면 나는 알바를 해서라도 그 목사님께 오히려 갖다 드리면서 배울 용의가 있어.”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이름을 부르면서 “야 아무개야! 어. 그런 훌륭한 목사님이 너를 왜 전도사로 쓰시겠냐?” 그랬더니 고개를 툭 떨구면서 “형 허긴 맞어.” 그런 분이 왜 나를 전도사로 쓸까? 정신 차리십시오. 잠깐 지나갑니다. 제가 1995년도에 총신 수련회에 와서 특강을 할 때 학생들이 큰 감동을 받으면서 샛별이 나타났다 그랬어요. 근데 그게 벌써 30년 전의 얘기에요. 인생 살 게 없어요. 너무나 금방 지나가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말해요.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평소에는 열렬히 공부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세요. 우리는 겨우 영어 읽는 것까지 공부했지만 여러분들은 쓰는 것과 말하는 것까지 자유롭게 공부하세요. 반드시 쓸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서들을 읽으세요. 그리고 지식의 세계를 넓히세요.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세요. 그리고 열렬하게 신학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과 교통하면서 68혁명 이후에 일어난 세계적인 문화의 대변혁을 읽어내세요. 그리고 현대인들이 왜 오늘 다시 프리드리 니체에 열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실존주의자들이 왜 아직까지도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좌파 우파라고 하는 이 심각한 갈등들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역사를 읽으세요. 이러면서 눈이 열리면서 여러분들이 비로소 현대인과 접촉성을 가질 수 있는 설교를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신자들이나 겨우 모여서 박수를 치는 그런 설교하지 마시고 여기에 가득 불신자를 모아 놓고도 그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깨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하기에 능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보통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공부하고 열렬하게 공부하세요. 여러분은 할 수 있어요. 왜냐면 우린 너무나 열악한 시대에 살았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좋은 학습 방법과 수많은 선생님들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서부터 공부하기 시작하면 여러분들은 능히 그것을 따라올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이것과 함께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지식의 빛에 불이 붙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태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신앙의 빛이 되는 것이에요.
아들이 여러분 선배예요. 총신을 공부하고 웨스터민스터 거쳐서 지금 트리니티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데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매일 매일의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능력 있는 말씀의 종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없어요.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간절함이에요. 공부를 하든, 교회를 섬기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간절함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어야 돼.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열정 가운데 핵심이 기도 생활이에요. 기도 생활. 열렬한 기도 생활이 필요한 거예요.
사실은 이 총신이 합신과 다 갈라지고 난 다음에 우리는 입학을 했어요. 근데 그 갈라지기 전에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 여기 없었잖아요. 사당동만 있는데 사당동 뒷산이 숭실대 쪽의 그 뒷산이 밤이면 거의 기도원을 방불케 했대요. 그 골짜기에서 수많은 신학생들이 엎드려서 밤을 새우면서 기도 소리가 거기를 가득 메웠대요. 학교가 갈라지고 나서 급격하게 그 소리가 사라지고 지금은 그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 없어요. 이게 문제예요. 열렬한 기도 생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바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부르짖는 아무리 내가 공부를 해도 이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할 수는 없고 이것으로서 결코 교회가 변화될 수 없고 그리고 오직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그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지 내가 그 손에서 놓여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죠.
뭐 어떤 사람은 그때는 가난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는데 그때 가난한 학생들도 기도 안 하는 사람 많았고요 부유한 학생들도 금요일마다 그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물로 기도하는 학생들 많이 있었어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이 문제인 것이죠. 그렇게 그런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학생들이 이 학적부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전도사로 취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 가니까 가자마자 선생 노릇을 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위선과 허위 과장 이런 것들을 먼저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도대체 공부에 전념할 시기가 없어요. 그리고는 맨 교회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는데 결국은 공부하기 싫은 감정이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 거예요.
누가 교회 섬기지 말래요. 우리도 아니 나는 교수 생활하면서도 교육 전도사로 섬겼어요. 교회 봉사를 쉰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봉사하세요. 열렬히 봉사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열정을 품고 그 일을 하라는 얘기예요. 열렬히. 교회 신학생들이 우르르 모여오는 거 목회자들이 싫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말만 많아요. 투덜대고 말만 많고 판단하고 아까 그 학생처럼 담임 목사는 밥 먹고 사는 게 신기하다고 이런 얘기는 하고 다니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안 돼요. 열렬히 교회를 섬겨도 거기서 반드시 부흥을 모아야 해요. 거기서 영웅들이 변화되고 괘심하고 주님을 만나고 깨뜨려지고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 아이들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몸부림치고 피 흘리며 그렇게 교회를 섬기고 그 정신을 가지고 와서 피 묻은 손으로 신학 서적을 넘기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예수의 정신이 자신 속에 가슴 깊이 박히는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한 사람들이 있어야 되잖아요. 교회 사역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절대 안 하시는 일이 있어요. 준비된 사람을 사용 안 하시는 것 하나님이 절대 안 하셔요. 혹시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사람들이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만들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보기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을 사용 안 하시는 법은 없어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열렬하게 준비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야 해. 그 진리의 빛이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어요. 여기서 제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 바로 감남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는 표현이었어요.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세멘 자이트 자크 까띠뜨’라고 나와요. ‘세멘’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감남’이에요. 올리브고. ‘자크’는 ‘순결한’이라는 뜻이고 ‘까띠뜨’는 ‘깨뜨리다’의 수동 분사예요. 이걸 알기 위해서는 당시 감남유를 짜내는 역사적인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돼요. 감남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굉장히 소중한 열매였어요. 그 감남을 기본적으로 기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거를 찍어야 돼요. 그래서 연자맷돌 같은데다가 감남을 잔뜩 쏟아 붓고 그 다음에 사람이나 혹은 소를 이용해가지고 이렇게 돌려요. 그럼 이렇게 다 부서지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이렇게 막 곤죽이 된 것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그것들을 이렇게 모아서 프레스에다 넣고 압착을 해요.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와요 근데 그 기름은 순수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그 기름은 그저 허드렛 용도로 쓰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 보면 그 기름이 ‘세멘 자이트 자크 까띠띠’예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감남을 절구 같은 데나 혹은 연자맷돌에 찌으면 그걸 쥐어 짜지 말고 가만히 기울여 놓으면 가상자리에 파인 홈으로 기름이 저절로 모이면서 흘러요. 그 기름은 압착하지 않은 기름이기 때문에 양은 적게 나오지만 매우 순결해요. 이 기름을 짜내서 등불로 쓰면 거기에 이 불순물이 들어갔기 때문에 검은 그을음이 나와요. 근데 이렇게 찌어낸 기름을 사용하면 빛이 그을음이 없이 아주 밝은 빛이 나와요 그 기름으로만 이 성전에 등잔불을 켜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무엇일까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치열하게 공부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성령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내가 여러분들에게 좋은 그 방면에서 좋은 방법 하나를 알려드리겠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공부하고 책을 읽다가 너무 힘들 때 그때 휴식 시간에 책을 읽으세요. 그 책이 뭐냐 하면 위인들의 전기예요. 역사상 위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훌륭한 인물들의 일기나 전기 혹은 자서전 같은 것들을 읽어요. 그리고 거기서 ‘내가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용솟음치는 거예요. 그렇게 읽으면서 자기의 마음속에서 높은 기준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매달려서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것은 내가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받아본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요. 충만하게 그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면 놀라운 일이 펼쳐져요.
며칠 전 돌아가신 수영로 교회 목사님 정필도 목사님이 개인적인 사석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너무 목회사역 해서 힘들던 때에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기도를 했는데 성령을 경험했다. 그 후로는 자신은 마치 예전에는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쪽배와 같았었는데 어느 날 눈을 뜨고 나니 자신이 항공모함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라고 고백을 하셨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요.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세요. 공부 어림도 없어요. 높은 기준을 세우세요. 영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우세요. 그리고 거기에 도전하세요. 간절히 기도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들로 준비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