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 27:33-34)
녹취자: 황인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지쳐서 자주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스펀지 같은 것에 끼워 갈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 드린 요한복음 19장 29절에 나오는 신 포도주 사건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건 아직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그 전날부터 잡수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 얼굴엔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인간의 몸에 지닌 많은 기운이 탈진하셨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많은 출혈과 함께 타는 듯한 목마름이 느껴지셨을 것이고 예수의 온몸은 상처와 채찍에 맞은 흔적으로 고통의 통증이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사형수들이 이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유대인들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잠언 31장 6, 7절에 나오는 교훈을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통의 통증을 잊게 하려고 독주를 제공하는 자비였습니다. 아마 이런 관습에 의해서 누군가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서 마시게 하였으니 이것은 포도주라기보다는 포도주에 탄 일종의 마취제 내지는 진통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푸시면서 마태복음 26장 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Nazirite)의 서원을 차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까지 율법에 매이실 필요는 없으셨지만,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표로 나실인의 서원을 할 때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아니하기로 자신을 구별한 것처럼 하나님께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표증으로써 포도 열매에 나는 모든 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헌신은 성취되지 않았고 이제 죽음으로서 일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지만 그 헌신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통증을 감소시키는 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죽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륜의 모든 죄를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 아래서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육체로서 그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셔야 하였고 십자가를 지시고 느끼게 되는 모든 고통은 오롯이 예수의 몫이었습니다.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몫이었습니다. 만약에 나누어지고 공통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 해 질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많이 원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상처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상처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의 배반할 것을 모두 아시면서 오히려 미리 용서하시며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고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분명한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진통제를 복용함으로써 육체의 고통을 더는 것을 경멸하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의 고통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없었다고 하면 누군가가 하나님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으로 성숙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당해야만 하는 모든 고통은 오롯이 예수 자신의 몫이었고 그래서 부활의 영광도 예수 자신의 몫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을 모두 거절하시고 오롯이 당신의 온몸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기꺼이 당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구속주로써 당신의 신실함을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를 이 사람들과 구별해 주셨지만, 그 구별됨을 지키지 못합니다. 세례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고 우리는 그분의 주되심 앞에서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랑으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이 받쳐졌으며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입술로는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예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삶으로써는 오히려 주님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종이 상전처럼 하고 상전을 종처럼 부리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온전히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롯이 당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고통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홀로 감당하시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앞에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 되실 수 있었고 십자가에 육체는 큰 고통을 당하며 지옥을 넘나들었지만,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과 교제를 더욱 돈독히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복을 받고 예수와 함께 은혜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고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실 때 그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릴 그에게 접붙이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가 일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제 교회라고 하는 언약 공동체적인 소명을 함께 받으며 언약의 공동체로써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소명은 결코 교회와 분리된 채 발견될 수 없고 자신 없는 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으며 살아가는 그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오직 주님만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이고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제자들도 나누어질 수 없는 십자가이었으니 당연히 우리도 나누어질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감당할 때 예수와 일치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난을 당신이 모두 감당하고 이제는 더 이상 고난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에 충분하도록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다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비롭게도 당신의 몸인 교회에 당신의 고난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구속을 위한 고난에는 우리가 일체 동참할 수 없지만,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이 세상에서 교회에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겨주신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와 일체된 것을 느끼며 그 고난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 해 전 여러분들에게 설교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한 몸으로써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해도 우리 모든 영적인 지체로써 그 고통에 참여하며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예수께서 교회를 참다운 교회 되게 하시기 위해 남겨두신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성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 사람에게만 예수의 생명이 강물처럼 흐르고 예수님을 위해 죽지 않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죽음이 무덤처럼 깊이 그들을 덮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너무 개인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나는 교회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와 언약 공동체로써 누리고 함께 살아가야 할 소명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었지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남다른 삶을 살 것 같지만 살아보면 매일매일 죄에 지고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결국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기는커녕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을 교회론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어지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분인 교회에 부어지고 우리는 그 신부인 교회의 몸에 한 지체로써 그 사랑을 받는 것처럼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겨두신 그 고난, 우리와 함께 참여하게 하여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시는 그 일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거룩해져 가고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순종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다시피 21살에 회심하였습니다. 그전까지 지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누구도 데려다 놓고 며칠만 데리고 있으면 무신론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의 시도는 여러 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마음은 교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핍절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이어갈 아무 힘도 내게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변절이었고 무신론의 신념의 깊이가 얕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도 자기들만큼 책을 읽었고 자기들만큼 고뇌했고 자기들보다 더한 목숨을 걸고 내 인생에 갈 길을 고민했습니다. 학자들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에 누구와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민했고 독서 했고 고통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빵 대신 조약돌이었고 그리고 나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 대신 온몸을 칭칭 감은 철조망이었습니다. 내 온몸은 그 철조망에 찢겨서 피가 흘렀고 자유를 얻으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내 살점은 철조망에 찢어져 나가고 피는 낭자하게 발아래 흘렀습니다. 신념이 약했던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그 철조망으로 칭칭 감겨 온몸의 살점이 뜯겨 나가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주님은 절 찾아오셨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눈물 흘리며 회개했고 난 구원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꿈꾸는 것 같았고 첫사랑다운 첫사랑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 가상되는 첫사랑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게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은 건 순간에 믿었지만, 진리는 잔인하리만치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그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방탕하게까지 타락하지 아니하였지만, 예수를 믿은 보람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처음 주님을 만났던 것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잊어버리는 동안에는 나는 세상 한복판에 있었고 그 십자가가 생각나는 동안에는 십자가로 돌아왔던 요한처럼 주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올 때마다 주님은 용서해 주시고 돌아올 때마다 주님은 나를 다시 소명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삶의 자리는 다르고 색깔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말씀드릴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당신의 소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통을 받을 때 일체 진통제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의 몫을 온전히 홀로 감당하시며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한편 강도에게 감화를 끼치기까지 하나님과 깊은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한번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세워준 자리가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이 교회에 와서 두 번 혹은 세 번째 생애적인 회심을 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에게 세워주신 자리는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분투하며 감당하려고 서 있습니까? 만약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늘 이 밤이 돌아올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위대한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열렬한 기도,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 아닙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두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 하는 울부짖는 기도보다는 주님이 세워진 그 자리에서 드리는 속삭이는 마음의 기도가 주님에게는 훨씬 호소력이 있는 기도입니다.
제가 우체국장을 했었습니다. 그전엔 우체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편물이 똑같은 것 같아도 그 당시엔 종류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빠른 것이 속달, 나중에는 스피드 포스트라고 해서 특별 우편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예 창구에서 따로 받았습니다. 보통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4일 정도 걸려야 하지만 스피드 포스트는 이틀이면 되었습니다. 급합 편지이기 때문에 모든 우편물에 우선으로 취급해서 가장 빠른 통로로 부산 같으면 아예 항공우편에 실어 부산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스피드 포스트와 같은 기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도 예수, 고통받으며 당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리에 굳건히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요새 코로나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에 펼쳐질 한국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 COVID 상황을 통해서 교회 전체를 키 위에 올려놓고 한 번 확 까버리셨으면 합니다. 쭉정이를 날아가게 하시고 알곡을 키 위에 다시 떨어지게 하나님이 한 번 흔드신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 미끄러져 가고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교회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떠나갈 이들은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에는 우리 교회뿐 아니라 다른 교회의 많은 목회자를 만나도 이 COVID 상황을 통해서 믿음이 돈독해진 간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영혼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모임이 차단된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축복이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살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육적으로 교회에 못 나오면서 절실하게 느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간증이 목회자들 모임에는 많이 오고 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관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실 때,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지만 일체 마취제를 거절하시고 하나님 앞에 구별된 서원을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시대가 어두우니 별처럼 빛나야 할 것이고 이처럼 사람들이 신앙이 불확실하니까 우리는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이기적일 때에 우리는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이고 이처럼 이념을 중심으로 나라가 심하게 찢어져 있는 이때이니 우리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며 예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의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입맞춤하는지를 복음으로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 1968년도 이후의 세계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발표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그 50년 사이에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어쩌면 역사의 필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역사를 읽고 공부하며 느끼는 것은 복음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야기로는 이 고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대안도 없습니다. 저는 지난 6개월 동안을 니체와 함께 지냈습니다. 아주 깊이 심취하였습니다. 결국은 많이 가르쳐주고 공감 주는 부분도 있고 우리가 참고할 부분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혼돈의 시대가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복음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오늘도 사람들의 영혼은 갈급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이론을 파하고 단숨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의 자녀로 살 생명의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도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고 유대인에게는 기적이 없는 종교라고 비난받았고 헬라인들은 지혜가 없는 무식한 종교라고 욕을 먹을 것이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이 복음에 희망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지금도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이 없는 진리로 우리에게 우뚝 서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맞이합시다. 희망차게 맞이합시다. 그리고 모두 이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낙심하고 실망한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에게도 예수의 생명이 넘쳐나도록 봉사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