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확정될 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7-11)
녹취자: 황인준
이 시는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그렇지만 이 시는 그저 감격에 들떠서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는 아주 정연합니다. 우선 제목과 같이 나오는 것이 바로 첫 절입니다. ‘내 마음에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지금 노래할 상황입니까? 찬송할 상황입니까? 표제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자객들을 피해 굴에 숨어있던 때라고 되어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고 언제 원수들이 자신을 발견하여 체포하고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막연히 원수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구체적인 위기가 이 시인 앞에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확정되었다’라고 하는 뜻은 히브리어로 ‘굳게섰다’는 뜻입니다. 건물이나 혹은 나무 같은 것들을 굳게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흔들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원수들이 에워싸고 추격하고 바깥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는 굴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두려워 떨면서 그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휩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데 마치 그 믿음이 그의 재산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은사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심으로써 그 믿음은 간직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제목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영광에 대한 인식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겠는데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두 악기 모두 시인이 심지어 도망 다니면서도 들고 다니던 소중한 악기였고 도망생활 중 종종 연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깨어나라는 이야기는 내가 그것을 연주할 것이라는 이야기로 모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아 깰지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자신의 영광에게 ‘깰지어다’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두 가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여기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카보드’라는 단어입니다. ‘무겁다’, ‘의미 있다’ 혹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시인이 아주 비참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편 42편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해하는가’라 하면서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다윗으로 하여금 가장 다윗답게 만드는 훌륭한 것. 그것이 다윗의 영광입니다. 넓게 이야기하면 영광이고 좁게 이야기하면 다윗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다윗의 좋은 점. 장점, 훌륭한 것, 찬양에서 나오듯이 내 안에 있는 모든 훌륭한 것. 이러한 의미입니다.
‘깰지어다’, 왜 이 말을 했을까요? 현실이 너무 낙심스럽고 절망적이니까 자기에게 있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과 하나님이 주신 이름다운 것들이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늘 경험하는 바입니다. 절망이 엄습하고 삶이 두려워하자기 시작하면 내가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종이 되어서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나는 거기에 좀 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권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조바심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조바심하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부족, 자신의 영광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바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두려워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이 보여주었던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두려워하고 떨고 겁먹는 모든 것들이 깨어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그리고 그 깨어난 자신의 마음을 ‘비파야, 수금아’ 이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에 있는 신뢰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을 찬양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읽었을 것입니다. 6·25 때, 간신히 피난민 열차를 탔습니다. 두려움에 사람들이 떨고 있는데 한 사람이 축음기를 꺼냈습니다. 축음기를 틀고 레코드판을 얹었습니다. 내 생각엔 아마 전기도 없었을 테니 손으로 돌려 작동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 축음기에서 G 선상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습니다. 열차 승무원들이 소리를 지르고 조용히 하라고 해도 시끄럽던 기차 칸이 G 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조용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음악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입니다. 음악을 잘 모르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치우치게 어느 한 음악에만 도취한 사람들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할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찬양을 하게 됩니다.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불과 몇십 초 사이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음악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결국 시련 속에서 제일 먼저 깨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잠재된 영광, 그것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에 사로잡힐 때나 공포에 사로잡힐 때의 심리가 똑같습니다. 어떠한 그 하나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탐욕과 두려움 등이 가지고 있는 고도화된 집중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힘들어하고 가라앉은 사람들의 특징은 방에서 문을 ‘딸깍’ 잠그고 공간이동을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고의 약은 방문을 열고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치료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공황장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인은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결단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아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하고 뛰쳐나오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안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9-10) 이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 뜸을 많이 들이면서 밝힙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합니다.’ 이미 10절을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된 것입니다. ‘내가 만민 중에서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송합니다’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만민 중에서 감사하며 뭇 나라 중에서 찬송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만민’이라고 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백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뭇 나라’는 ‘열방’을 가리킵니다. 이 뜻은 이 시인이 깊은 상황에 억눌려 좌절하였을 때는 거기에 눌려 자신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용기를 얻어서 ‘네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미 깨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임성우 국장이 어느 순간 거울을 보면서 ‘성우야, 네가 이렇게 살아도 되겠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은 이미 다른 삶을 시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구 교육에서는 답보다는 질문을 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감사하는데 ‘만민 중에서 감사하라’라고 하는 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 위에 가득 있는데 내가 그 모든 사람 위에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그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백만 명 모인 집회에서 특별 찬송을 부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 하리이다’ 이것을 확장해서 모든 열방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와야 할 본보기이고 온 나라들은 어리석어서 주를 모른다고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이 모든 나라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을 찬송하길 원하나이다’라는 고백이 묻어나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자신의 영광을 깨우고 두 번째는 자신의 영혼으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악도 보면 모든 아름다운 음악은 그 자체는 아름답지 않은 마디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불협화음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노래들이 모두 아름다운 마디들로 이루어지면 그 음악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도 똑같이 그 자체가 아름다워 보이는 인생의 토막과 덜 그래보이는 인생의 토막들이 어우러지면서 한 곡의 아주 아름다운 찬양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이야기합니다. 영광을 깨우고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에 대해 그렇게 찬송할 수밖에 없게 된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뜬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10절입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주의 인자라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너의 인자’입니다. ‘당신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당신의 진리는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혹은 ‘도달하나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살펴보면 그렇게 감격했던 이유는 ‘주의 인자’는 헤세드인데 슬프도록 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큰지 그 크기가 하늘에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온 우주가 하나님의 슬프도록 아주 절실한 사랑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중에서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플라톤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이 있는데 파르메니데스와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영향을 줍니다. 그 파르메니데스는 이 온 세계는 ‘一’ 하나인 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의 한 분으로 꽉 차 있고 빈 곳이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자라고 하는 성품이 하늘에 꽉 찼기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닥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그 인자를 피할 수 없다고 이 시인이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격적이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크기에 있어 이 정도는 안 돼도 여러분과 저도 이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하나님, 그리고 내 인생을 A부터 Z까지 완전히 붙잡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어떠한 빈칸도 남기시지 않고 주님의 자비로 가득 채우셔서 그래서 내가 이 공간에서 이 공간으로 이동하고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바뀐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떠날 수가 없는 그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평안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시인이 본 것입니다.
‘주의 진리는 궁창에 미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궁창’은 히브리어로 ‘라키아(raqia)’입니다. 이것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Heaven’이 아니라 ‘Sky’라고 보시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파란 하늘이 주의 진리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라고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천체관이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바가지 같은 것을 엎어 놓은 것이라고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별들이 매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볼 때 궁창은 별보다 더 위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리적인 한에서는 첫 번째 하늘로 보고 그 너머에 두 번째 하늘이 있는데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다스리는 하늘이고 그거보다 더 먼 하늘이 있는데 거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이름다운 나라라고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여기서 쏘면 하늘 두 개를 뚫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행위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깐 두 번째와 세 번째 하늘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늘만 보이고 그 눈에 보이는 그 하늘 안에 주의 진리는 거기에까지 이르나이다. 땅에서 오글거리고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지지고 볶고 죽이고 복수하고 정복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진리는 거기뿐만 아니라 거기를 뛰어넘어서 궁창에까지 미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사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에매트’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Truth’, ‘진리’라고 번역할 것이냐 아니면 ‘신실함’. ‘Fathful’로 번역할 것이냐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떤 곳에서는 A로 번역하고 어떤 곳은 B로 번역합니다.그런데 ‘에매트’는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굳건한 것’ 이러한 뜻인데 그것을 ‘Faithfulness’로도 많이 번역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신실함은 궁창에 이르나이다’. 인간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사람이 사람을 배신합니다. 권모술수와 모략, 그리고 자신의 이권에 의해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면서 야비하게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인자하신데 신실함이 없다면 우리는 그 인자가 언제 복수로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에 변화가 없으십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어있던 때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굴에 숨어있는 동안에 당신은 군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죽음이 엄습하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어느 한순간에 이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현실을 돌파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며 그 성품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그것을 끊임없이 자신과 민족, 역사, 세계와 연결하며 살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인자와 신실하심을 맛보면서 요동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