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
1.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옴(요1:6~8) ..................
2. 자기를 인하여(요1:6~8) .......................................
3. 다 믿게 하려 함(요1:6~8) ...............................
4.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1(눅1:15上) ......................
5.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2(눅1:15上) ......................
6. 포도주와 소주를 먹지 아니하며(눅1:15中) ............
<세례요한I>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요1:6-8)
지난시간에 말씀드리려고 계획했던 것에 사실 반밖에 못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간사님이 전부다 타이핑을 해가지고 녹음을 풀어서 실러버스를 갖다가 놨으니까 갈 때 하나씩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편의상 지난시간에 했던 것을 잠깐만 요약을 하고 후속 강의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1:6-7) 지난 시간에는 이 세례요한을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오늘날 설교자들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문제를 말씀을 드리면서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린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요한이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직무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분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인정 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육체 속에 보배가 담겨졌다.”(고후4:7)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그 사람의 영혼 속에 담겨져서 그 담겨진 진리가 그에 의해서 선포되어질 때에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바로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것이 설교자는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사람이다. 첫째는 “증거 하러 온 자다” 그것은 증거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본 바가 있어야지 보지 않고 들은 것 가지고는 우리의 참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말씀드리면서 호랑이 얘기를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증거 하는데 무엇에 대해서 증거 하느냐 하면은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요1:8)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드려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집회를 갔다 왔는데 목이 갔어요.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빛에 대하여, “그는 증거 하되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사람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은 그의 증거의 대상이 ‘빛’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그 빛’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증거 하려고 했던 것은 여러 가지 많은 증거를 세례요한이 평생의 사역을 통해서 했지만은 그러나 그 모든 증거의 내용은 대상은 한 가지에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이 ‘그 빛’이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유의하셔야 됩니다. ‘한 빛’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빛’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설교가의 직무는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말고도 세상에 빛처럼 생각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빛이 아니지만 빛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학생들이 달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달 어린 동심에는 그 달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전달할 뿐이지 그 자신은 빛일 수가 없어요. 오늘날 설교에 보면 무엇이 문제 인고 하니 뭐 수없이 문제이지만은 중요한 문제는 뭐냐면 사람들이 그 빛이 아니라 그 빛 비슷한 것에 대해서 증거 하는 설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설교가 아무리 울려 퍼져도 설교를 다 듣고 난 다음에 설교를 다 듣고 난 이후에 그 빛이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활하면서 반짝하고 깨닫게 된 어떤 깨달음, 사람들 속에서 보게 된 어떤 성공사례들, 사람들 속에서 보게 된 어떤 좋은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런 것들을 택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세례요한이 증거 하러 왔는데 그가 증거 하는 것은 빛 같은 것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그 빛’입니다. 다른 빛이 아니라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세례요한이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참으로 우리의 선포의 제목과 초점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설교자는 빛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온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비군 정신 교육장 가보신 적 있습니까? 민방위 훈련에 가보신 기억이 있지요? 거기서도 강사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 안 믿어도 좋은 얘기만 하다 갑니다. 그죠? 빛 같은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비군이나 민방이 훈련장의 강대상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의 설교단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 잘 알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서도 빛 같은 것들이 이야기 되고 빛 같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선전될 수 있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 교회의 설교단은 빛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 빛을 증거 하도록 세움을 받은 설교단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잠시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빠졌을 때 거기는 구원도 없고, 회심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왜 설교에 대해서 취미를 잃어버리고 설교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는가?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어저께 일이었습니다. 주일날 설교를 하고 내려왔는데 대학생입니다. 그러니 뭐라 하냐면 “저 말씀드릴게 있는데요.” “그게 뭡니까?” “저 원래 설교에 취미를 안 갖는데 당신은 꽤 열심히 하는 거 같네요.” “허” 저 칭찬하는 말인지 설교가 확신 있는 거 같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한참 쳐다보면서 오늘 아침에도 그 학생을 생각했어요. 이 친구는 듣는 사람으로선 굉장히 난감한 일이에요. “어 설교가 확신 있어 보이는데?” 그거 가지고 되겠냐는 말이에요. 확신이 듣는 사람 가슴 속에 들어와서 생겨야지 다시 한번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절망을 경험했어요.
(예화) 80년대에 어느 목사님이 서울시내에 있는 중간정도 규모의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어요. 설교가 자기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아, 대학생이 아니라 성도들을 대상으로 다 섞어서 각계각층. 설교가 자기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22%밖에 안됐어요. 나머지 78%는 설교와 자기 신앙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어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신앙이 자랍니까?”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같이 다락방에 모여서 성경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신앙이 자란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잘하든 저렇게 잘하든 잘하면 됐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선포되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나는 그 신앙과 자기네들이 성경을 펼쳐놓고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소위 얘기해서 성경 읽은 걸 나눈다고 하면서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자라는 신앙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요. 전혀 같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피상적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독서에요 독서. 여러분 꽤 깨인 대학생들 그러면은 목회자인 여러분보다 책을 훨씬 더 많이 책을 읽는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되요. 훨씬 많이 읽는 정도가 최소 한 다섯 배 이상은 많을 거예요. 일반적인 목회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래가지고 책에서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들을 다 듣고 그것으로 자기 틀을 다 형성하는 거예요. 설교해도 변화가 안 돼요. 웬만큼 강해에 가서 들부수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다가오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시중에서 범람하는 책들을 여러분 한번 보신 적 있습니까? 쭉 둘러보십시오. 다 이런 거 아닙니까? “제 여자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어떻게 데이트해야 하는가?”, “이 남자입니까” 다 여기 나오는 것들이 뭐냐면 전부다 얍삽한 내용들이에요. 다 읽고 나면은 무릎을 딱 치면서 “아하!” 그러는 책들. 사람의 영혼을 움직여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내용들이에요. 그러한 것들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포됨으로 말미암아 점점점점 더 강단이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그 빛’에 대한 증언으로 강단이 불타오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하나님께서 19세기에 사용하셨던 위대한 설교가 중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계셨죠. 그 분의 설교를 여러분 읽어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분은 다행이도 굉장히 많은 설교를 남겼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3400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그중에 어느 설교도 중복된 본문이 없어요. 성경 곳곳을 누비고 다닌 거예요. 우리나라 이런 말하면 이상하지만요. 한번 전국에서 설교되는 설교를 다 뽑아가지고 본문을 맞춰보세요. 하는 것만 계속하고 안하는 건 절대 안합니다. 오죽했으면 어떤 목사님이 “레위기도 성경이다” 그랬겠습니까? 레위기는 설교가 안 된다는 얘기죠. 또 한다 그래도 이상하게 신비하게 영해를 해가지고 말하자면 개혁주의적인 그 말씀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대로 흐르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다니는 길들만 부지런히 다닌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그 본문 딱 피면은 머릿속에 대지소지가 다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지를 못해요. 근데 3400편의 설교를 남겼는데 하나도 중복된 본문이 없는데 그가 살아서 전도해서 구원받게 한 영혼의 숫자보다는 죽어서 그 설교를 읽다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설교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두개의 커다란 타원형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스펄전은 무슨 설교를 하든지 마지막에 그리스도 예수로 핵심이 되어져 있고 그리스도 예수로 마치게 되어있어요.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빠져있는 그러한 설교들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될 수 있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은 따라서 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같은 것들을 알리고 또 그 빛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빛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빛에 대해서 사람이 알게 하려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는 내적인 깊은 갈망과 열망이 설교 시작서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그를 사로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의 모든 증언의 핵심은 항상 ‘그 빛’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 빛’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바로 그 빛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 강단이라고 하는 증언대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지난시간부터 계속 도전되는 건데 설교자는 ‘그 빛’에 대해서 목격을 한 사람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얘기하는 빛을 본 사람이라는 게 대체 뭐냐?’ 그럴 겁니다.
우리 모두는 주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죽겠노라 각오를 했습니다. 때로는 그 결심이 흐려질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한거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조지 휫필드 목사님이 이런 애통을 했습니다. 집사 때, 그땐 집사 때도 설교를 했어요. 지금 집사하고는 물론 틀리죠. 집사 때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설교한거 가지고 대주교가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래서 휫필드가 뭐라고 그러냐면 “대주교는 기독교에 대해서 불신자만큼이나 아는 게 없다.” 무슨 뜻입니까? 불신자보다는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 훨씬 많은 내용들을 알고 있지만은 그것들이 자기의 내면세계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돌고 있는 관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서 휫필드는 무슨 얘기를 했냐하면 “느끼지도 못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설교가 될 수 있겠는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증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당신이 하나님을 봤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명백하게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네가 보았느냐”라고 할 때에 우리는 명백하게 양보하지 않고 난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았습니까? 그리스도가 설교에 있어서 초점이 되고 그 빛이 말씀 선포에 있어서 핵심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설교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다 두고 설교를 해야 되겠다’ 결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새 구속사적인 설교니,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니 계속 하잖아요. 노력도 어느 정도 필요해요. 왜냐하면 설교를 작성하고 설교를 해 나갈 때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 해야겠다’라고 출발하는 것과 흘러가는 대로 설교를 하자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그거보다 한 단계 높은 단계의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을 해야 되겠다.’ ‘설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어떤 그런 전제 때문에 교리적인 전제 때문에 설교 작성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내적인 깊은 충동이 그의 삶 전체를 계속해서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한 시간에 여유를 주시면 우리가 무얼 하겠습니까? 교회 재산을 정리 할까요? 자녀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할까요? 사랑하는 아내와 작별 인사를 할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 소명 받은 우리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께서 우리들에게 단 한번 인생에 마지막 시간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내적인 소명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설교를 강단 아래 내려와서 한번 들어보십시오.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내용 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뜨거운 증언으로 불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쓰게 했더니 어느 학생이 하는 말이 “교수님 우리 교회에서는 일년에 한번 밖에 십자가 설교 안합니다.” 그것도 한번 설교하는데 설교하는 걸 들어보면 설교자가 서서 “여보슈 십자가 저기 있슈 한번 가보슈” 십자가가 남의 말처럼 설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일이 나옵니까?
설교는 질서 정연하고 논리정연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설교자들에 의해서 뜨겁게 증언되고 그 말씀이 성도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증언으로 와 닿지 않는 것 그래서 그 설교 속에 ‘그 빛에 대해 증언하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라고 확신을 받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설교하는 사람들부터 그 빛에 대한 확신에 불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화) 조지 휫필드도 역시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위대했던 설교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어요. 깊이 체험한 사람들 이었어요. 그리고는 그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위대한 사역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그 날까지 쉼 없이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조지 휫필드 목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되는 일이 없이는 설교하지 않았대요. 그러면서 캘빈도 마찬가지에요. 그 설교를 쭉 읽다 보면 그 책이 설교거든요. 설교를 쭉 읽다 보면 갑자가 설교가 뚝 끊어져서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쉽게 얘기해서 설교를 할 때에 그 심정과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깊이 들어갔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태와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에서 기도로 기도에서 설교로 바꾸어 가고 움직여 가는 것들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다 갑자기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다 그들이 그 빛에 대한 뜨거운 확신 그 빛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리고 그 빛을 자기는 많이 알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 빛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압박감을 느꼈고 부담감을 느꼈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소명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가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설교의 단에서 내려왔을 그때에도 우리가 주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고백하고 정말로 주님과의 더 깊은 만남, 그래서 그분의 광대무변한 성품과 그분의 인격을 더 깊이 우리의 영혼으로 깨닫게 해달라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들에게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캘빈주의자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뇌된 캘빈주의자, 두 번째는 경험한 캘빈주의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수주의자 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뇌된 보수주의자 두 번째는 경험한 캘빈주의자. 세뇌된 보수주의자, 세뇌된 캘빈주의자는 뭐냐 하면 신학교 다닐 때부터 다른 거는 학교에서 안 가르쳐주고, 가르쳐주면 큰일 나잖아요 그것만 계속 집어넣었기 때문에 자기가 시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것만 받았기 때문에 머리가 세뇌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다른 것이 머리에 들어오면 거부감을 일으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은 참 보수주의자가 아닙니다. 참 보수주의자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됩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 진정한 캘빈주의자들은 우리 시대처럼 이렇게 냉랭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그들은 뜨거운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 세뇌라는 건 아주 쉽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보십시오.
(예화) 이북으로 끌려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 세뇌교육 시키는 것이 옛날에 남노당 시절 같은 때
서울대학 나온 기가 막힌 지성인들이 하루아침에 바보가 되서 김일성 동지 그러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세뇌입니다. 세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 보수주의자, 그런 캘빈주의자는 이 시대를 바꿔놓을 수 없어요. 정말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보수주의자, 진정한 캘빈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 캘빈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됐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어요. 그 비범한 예 가운데 오늘 두개만 들겠습니다.
(예화) 하나는 마틴 루터 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죠. 우선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교회의 무슨 비리를 개혁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계획 했다기보다는 개혁은 내면 속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그가 에르부르크로 가는 길에 아시다시피 커다란 벼락을 만나죠. 사람들이 옆에서 쓰러지는 걸 보면서 수도승이 되겠노라고 엉겁결에 주님 앞에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요.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마틴 루터의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면 “내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근데 마틴 루터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고 수도원 원장님에게 물어보니까 그 수도원 원장님이 “끊임없이 네가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존재로 만들어 드리는 길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을 시키는데 정말 초인적인 고행과 금식을 했습니다. 침침한 동굴 속에 들어가서 사흘씩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입에 안대고 그 축축한 구석에서 사흘 나흘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그것도 성에 안차니까 나중에는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무릎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그렇게 고행을 할 때 미사를 딱 드리면 내가 다 복종된 거 같고 이제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사가 끝나고 밥을 다시 먹고 나면 마음속에서 죄악에 대한 욕망들이 다시 싹터옵니다. 다시 자기를 쳐서 복종 시키면 수도원에서 그 사람이 항상 그러니까 동료 수도사들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더군다나 계속해서 고행과 금식 끝에 생명의 위험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를 휘텐부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는 거예요. 유학을 보냈을 때에 마틴 루터는 그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가며 깨닫기 시작하는 거예요.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가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 하박국서 등등을 강의하면서 내면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변화에요? 진리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와 닿음으로 그의 영혼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어요.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뭘 깨닫게 됩니까?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복음에서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1:17)를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경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로마서 1장을 읽어가고 있는 동안에 하늘이 열리고 진리의 빛이 환하게 자기 영혼 속에 와서 비춰진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와 죄인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 당시에는 영광의 신학이었는데 영광의 신학을 포기하고 그는 십자가의 신학을 선택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티끌만도 못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에요. 그게 ‘만인 제사장의 교리’에요.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자기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이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굳게 믿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전해주셨던 사도적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 앞에 만인이 동동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에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다시피 여러분 예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19살에 그 학교 교수가 됐어요. 천재였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조상들은 자기에게 뭐라고 알려 주었냐면, 조상들은 퓨리탄들 이었거든요. 그 당시 캘빈주의자들 이었어요. 뭘 가르쳐줬냐 하면은 ‘인간은 죄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쳐줬어요. 이 천재에게 이게 이해가 갑니까? 무슨 소리냐? 인간에겐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인간보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하실 수 있다면 모르지만 인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엽을 감아 놓았을 때 가만히 움직이는 이 꼭두각시 인형 같은 존재냐 있을 수 없다.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알미니안주의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들판을 산책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의 말씀을 그에게 들려주셨어요. “홀로 한분이요, 썩지 아니하실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 권세와 영광이 세세와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들려주시면서 그는 천국의 광채가 그의 영혼에 비치는 그러한 깊은 영적인 체험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때 그가 고백한 말이 뭐냐면 “나는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그러므로 그는 엄격한 캘빈주의자로 신학적인 대 선회를 했어요. 그게 진정한 캘빈주의자입니다.
캘빈주의 보수주의면 뭐합니까? 체험이 없는 캘빈주의는 눈앞에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교리 포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역사를 읽어보십시오. 요새 순교에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죠? 한번 읽어보십시오. 교회 역사, 순교의 역사를 쭉 읽어 보면은 그 순교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에 순교를 했던 사람들은 머리로 알고 입술로 아는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어요.
폴리카베일을 기억하지요? 사도요한의 제자, 그리스도를 한번만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는 말했어요. “내 이제 86년을 살아서 그분은 86년 동안 한번도 내 이름을 부인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의 이름을 부인하고 죽을 목숨을 위하여 살겠느냐.” 화형 당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세뇌된 보수주의, 세뇌된 교리주의는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노회나 총회에서 싸울 때 목청은 높일 수 있지만은 진리를 위해서 죽겠느냐하는 칼날이 목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보지 못한 것을 위해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만지지 못한 것들을 증언하기 위해서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초대교회 순교했던 위대한 순교의 역사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크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란의 날이 혹시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그러면 누가 진짜 보수주의자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빛에 대한 설교자의 경험, 설교자가 그 빛을 만나고 더 높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광대한 인격을 더 깊이 체험하는 이런 일들이 매일 매일의 기도의 골방과 그의 섬김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는 항상 같은 폭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럽지만요. 우리 한번 냉정하게 같이 질문해 봅시다. 분명한거 하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가기 합당한 사람들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성화 되다 성화 되다 끝까지 성화됐는데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러주는데도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치 않아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영화”시킵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마지막 서장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젊은 사람들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재밌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우리 복음에 대해서 같이 공부합시다. 그러면 “복음은 다 띄었습니다.” 띄긴 뭘 띕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그 크기와 넓이가 얼마 납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광대하신 그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큰 태산의 귀퉁이를 잠깐 만지고 있는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설교를 계속 하다보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우리 함께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1년 전 보다 나는 확실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나? 전에는 몰랐던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고 변화를 받게 되었냐는 거예요. “허, 꽤 여러해 전이었어.”
(예화) 지금으로부터 한 7년 전인가 교회에 갔습니다. 나이어린 여선생이 있었어요. 근데 인사를 하는데 “일주일 잘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서로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한테 하는 말이 뭐냐면 “전도사님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 예, 참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잘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질문을 하냐 하면은 “전도사님 지난 일주일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롭게 더 마음으로 깨달은 것 있습니까? 나한테 좀 알려주세요.” 그런데 그게 교역자를 시험하려고 묻는 교만한 질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질문이란 게 마음에 다가와요. 너무 너무 당황했어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으면 우리의 설교는 새로워 질 수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 우린 설교하는 설교자들께서 그런 말씀 서로 주고받죠? “아, 목회는 한 교회에서 딱 3년만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3년마다 로테이션 한다면 날마다 신선하게 목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훌륭한 설교가들은 그리고 주를 위해서 살았던 정말 정직한 참 말씀의 종들은 끊임없는 생수의 샘을 길어냈어요. 끊임없이 흘려보냈어요. 성도들이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말씀의 샘은 마르지 않는구나!” 길어냈습니다. 계속 퍼 줘도 퍼줘도 속에서 끊임없이 고여서 마치 어머니가 그 철철 넘쳐흐르는 젖을 어찌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듯이 이 속에 고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퍼내고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의 샘을 그들의 영혼 속에 지녔던 사람들이었어요.
(예화) 저는 지는 주간에 존 길리스라고 하는 사람이 17세기 영국의 글라스글 교회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이 계세요. 제가 강의 끝나는 날 책을 몇 권 죽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만 그분이 1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일어났던, 물론 그분이 17세기까지만 하고 죽었죠. 그 다음은 후대에 되었는데 일어났던 모든 위대한 영적인 부흥들을 전부다 모아 놨어요.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생애를 이렇게 읽어볼 때 정말 눈물이 나요. 어떻게 학처럼 그렇게 고고하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을까? 한 교회에서 54년을 목회했어요. 그리고 다른 교역자에게 물려주고 그가 성찬 때가 되 면은 와서 성찬을 집례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하는 자기의 교우들과 둘러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사람은 뭘 얘기했냐하면 “여러분 이제 내가 매일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주님 앞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낙원에 여러분보다 먼저 가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가 그곳에서 만납시다. 주께서 곧 나를 부르실 것 같습니다.”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고 성도들은 흐느껴 울었어요.
무엇이 끊임없이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설교자의 인격을 고매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가 별겁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우리 속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과 똑같은 소망, 죄악을 향한 욕망들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그러한 욕망들이 우리 삶을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강단에 오점을 남기는 실패한 설교자들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붙잡아 주실 그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께서 손놓으시면 어마어마한 교회의 당회장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류 신학교의 교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날에 위대한 일을 일으켰던 이력을 가진 설교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금 수많은 사람을 눈물 흘리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 사람도 오늘 주께서 그 손을 놓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그의 설교의 초점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무엇이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본문을 택하든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느냐 그것은 그의 인생과 삶, 영적인 내면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예수를 만나는 것이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최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설교의 중심 자리에 들어 올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한 겁니다. 눈 뜨고 일어나서 신문 보는 사람은 설교 시작 항상 정보사 땅 투기 사건 그러고 항상 설교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펴는 사람은 항상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에 자기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은 무슨 설교를 해도 ‘기도하라’ 그러고는 설교를 끝맺습니다. 제자훈련 좋아하는 사람은 마지막 무슨 설교를 해도 끝날 때 훈련이란 말 한번은 해야지 속이 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저 설교하는 그 사람의 인격이 뜨겁고 열정적이면 설교도 뜨겁습니다. 사람이 냉담하고 흥분하지 않으면 설교도 냉담합니다. 그 사람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처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 그의 설교도 한 맺힌 듯이 나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무슨 방법과 재료들을 찾으러 다니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학생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설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변하는 것 밖에 길이 없다. 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자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하나의 소리 나는 관과 같이 때문이에요.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물론 방법이 도움이 됩니다만 그러나 삶의 중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그런 빛과 만나는 사건이 매일 되풀이 되지 않을 때 어떻게 주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에 핵심에 그분이 올 수 있겠느냐 사람마다 설교를 준비를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만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준비한 방법의 예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증언이 그의 모든 삶 한 가운데 오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화) 그는 원고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고설교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나 다른 훌륭했던 목사님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10년 정도내지 능력에 따라 틀리지만 10년 정도까지 설교준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년 정도까지는 죄다 원고로 준비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문장력이 붙고 표현력이 늘어납니다.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그 다음서부터 찰스 피니 같은 사람들 설교한 다음에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그걸 잊어버릴까봐. 성경 본문 말씀을 죽 읽은 다음에 내가 뭐에 대해서 설교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은 평소에 성경 읽은 것은 그냥 읽는 거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쭉 성경을 읽고 그리고 예를 들어서 ---- 그 다음에는 부인이 퇴장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서재에 엎드리는 거예요. 1장 6절에서 뭘 설교해야 될지는 뭘 뒤지고 막 카드를 만들어서 쓰고 그건 논문 작성이죠. 쭉 머릿속에 워낙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많이 만났고 그랬기 때문에 문제는 뭐냐 하면은 전해야할 메시지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그것을 가슴에 불붙이는 작업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깊이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언제 이뤄지느냐 하면은 토요일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토요일 날 저녁때 깊이 기도하면서 그 말씀이 성도들에게 뭐라고 해야지만 깜짝 놀랄까가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해주시길 원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을 쭉 묵상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시간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간이었어요. 기도하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 깨어질 건 깨어지고 그리고 회개할 건 회개하고 그러면서 기도하고 나면 마음속에 결정체가 되서 살아남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주일날 아침이 되면 아무도 안 만나고 새벽서부터 다시 한번 엎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떤 때는 그게 마음에 이 생각 저 생각 오락가락하고 그것이 가슴에 새겨지질 않는 거예요. 그 당시에 심정을 가지고 자기 부인에게 뭐라고 하냐면 “여보 나는 이 시간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데 도저히 주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덩어리가 되서 새겨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꼭 사냥꾼의 옆 총에 맞은 짐승이 계곡 사이에 쓰러져서 신음하는 거처럼 그 말씀 사이에 얼굴을 묻고 신음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시기를 기다린다. 그는 말씀이 자기의 가슴에 불이 붙은 거예요. 그 다음날 자신 있게 담대하고 능력 있고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랬었기에 그는 성경 속에서 늘 무슨 말씀을 만나던지 거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까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설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빛에 대한 경험으로 나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 그리스도에 대한 무엇을 설교하든지 그 증언의 핵심은 항상 ‘그 빛’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빛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목격한바 그 그리스도라는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지금 증인이 나와서 증언을 하는데 판사와 모든 변호인단과 검사의 관심은 이 사람이 피고가 범죄 하는 것을 봤느냐 못 봤느냐 그것을 말하라고 했는데 계속해서 열 두 시간씩 변호를 했는데도 그 현장에서 그를 봤다 못 봤다는 말을 안 한다면 그게 무슨 증언이냐는 겁니다. 그 무슨 필요가 있는 겁니까?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인데 이 한편의 설교가 한번의 증언인데 그리스도의 증언이 빠진 설교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가슴을 쳐서 그를 중신케 하고 죄를 책망케 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는 이러한 위대한 역사들이 교회에서 그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지만,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뤄지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뤄져야만 회개도 일어나고 변화도 일어나고 중신도 일어날 것 아닙니까? 아무리 논리정연하고 재치가 넘쳐도 그것이 그 빛에 대해서 아무것도 증거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증언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빛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빛에 대해서 증언하고 그 증언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그들의 가슴을 때릴 때 사람들의 영혼은 변화하는 거예요. 자유주의자가 변하여 보수주의자가 되고 방탕한 사람이 변하여서 절제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한편의 설교를 들은 다음에 우리는 무슨 설교를 들었든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야 됩니다.
판사가 재판을 하는데 그가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까? 그가 뭐 범죄에 전문갑니까? 그렇지 않아요 가본적도 없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안다는 것은 법을 많이 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무엇을 통해서 판결을 내립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판결을 무엇을 통해서 내립니까. 증언을 보는 거예요 증언, 증언을 통해서 그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증인이 증언을 하고가면 판사의 마음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증인이 결정적인 거예요.
설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번 설교를 들었을 때에 성도들이 ‘아! 내가 알던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구나!’ 자기가 잘못 알았던 오류가 뒤집히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았던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깊어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인식에 지평이 점점점 확장 되어져가는 일들이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그들이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운명이 달린 기로에 들어서게 되는 거예요.
보세요.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길이요, 그 빛이요, 그 진리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그리스도가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그리스도가 설교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설교 속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결단하라고 만날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무엇 앞에 결단해야 될지를 잘 모릅니다. 증언을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리스도가 길인 것에 대해서 선포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이제 것까지 걸어왔던 것이 길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두 양자 사이 선택에 서게 됩니다. 한쪽은 천국에 이르는 길이고 한쪽은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그 길목에 자기가 서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존에 자기 자신이 결단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때에 그때에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대한 증언이 설교 속에서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걸 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것은 빛을 본 경험이 희박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빛에 대해서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빛을 목격한 사실이 나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고 있을 때, 목격한 그 빛과 빛을 만난 사건에 대한 경험이 오래도록 남아서 그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뚜렷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까 얘기한데로 빛에 대해서 증거 할 때 그리스도가 저기 있으니 가보라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은 유능한 교회 정치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순 없지 않습니까? 그의 가장 큰 재산은 능수능란함도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설교자로서의 가장 큰 재산은 이 세상에서의 학벌이나 학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요즘 교회가요, 상당히 큰 교회가 강단이 많이 비어 있는 거 여러분 보시지요? 의외로 올 사람은 많은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금 큰, 꽤 규모 있는 교회들이 생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왜? 아주 유능하고 아주 학식이 높은 목사님들을 목회자로 영접할 때에 교회가 크게 부흥할 것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떠가고 있어요. 공부를 했기 때문에 목회를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외부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세웠던 교회들이 많이 실패를 봤기 때문이에요. 진실한 목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진짜 뭐 사람들 얘기할 때 몸 하나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저는 설교자를 가리켜서 ‘영혼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요. 영혼 속에 담겨져 있는 성도들이 깨닫고 느끼지 못하는 놀라운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광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설교자의 가장 큰 재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요즘 장로님들이 전도사 혹은 아니면 목사님들을 견제하고 줄다리기를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또 특별히 강권적인 독재 밑에서 숨도 못 쉬었던 그런 교회들은 목사님들이 자리를 뜨신 그 다음에 후임 교역자가 올 때에는 꽉 잡아야 된다는 논리가 유행되고 있어요.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심지어는 교회 운영은 당회 장로들이 하는 거고 목사님은 고용 사장처럼 월급 받고 자기 할일만 하는 그리고 기본적인 대우를 해주는 이런 관계가 되어있는데 이런 관계가 말입니다 강단이 능력 있으면 이런 관계가 지속될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을 그런 식을 생각해주고 마치 자기가 고용주가 되고 고용사장을 고용해서 월급을 주는 거 모든 월급을 주고 뭐 하는 것이 자기 손에 달린 것 같이 심지어는 거취문제까지 자기들의 결정에 달린 것 같이 그런 방자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겠어요?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자기 죄악을 심령을 쓸어 엎어서 통곡하게 만드는데 어떻게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들고 그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위대한 능력들이 사라져감으로 주의 백성들은 방자해져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간적인 논리와 인간적인 수단으로 대적할 때에 교회는 쪼개지고 그 속에서는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고 분쟁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 있게 살아서 가슴속에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그 앞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디 그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동역자로서 말합니다. 제 자신이 추어도 무슨 우리들을 교회가 대접 안 해주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대접 못 받으면 더 좋아요. 여기서 다 대접받으면 하늘나라 가서 뭐 받겠습니까?
(예화) 엊그제 집회를 갔었어요. 의대생 수련회를 갔었는데 거 돈 많은 사람들 아니에요? 돈 많은 사람들 한 350명 모였대요. 전국의 의대생들이 강사보고 아침 먹으러 오란 소리도 안 해. 할 수 없이 밖에 나가 사먹고 왔어요. 자기네들은 수박도 사먹고 참외도 먹고 그러면서 내 돈 주고 다 사다가 음료수까지 내 돈 주고 다 사다가 먹었어요. 나중에 슬리퍼 빌려주는데 나중에 그 슬리퍼도 도로 찾으러 왔어. 그런 거 하나도 안 섭섭합니다. 가서 귀빈대접 받고 오세요. 하늘나라 상급 가불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대접도 못 받았으면서 정말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눈물 흘린 것을 내가 안다. 상급 주실 것 아니에요? 이 땅에서 대접 못 받으면 우리 그만큼 상급 받는 것에요. 목돈 타는 거야.
그러나 제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정말 성도들이 선포되는 말씀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 진리의 말씀이 인격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그렇게 대접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서운한 것이 되서 또 설교하러 오라고 할 때 ‘아 그 교회는 뭐 사례금도 조금 주고, 슬리퍼도 뺏어가고 안 간다.’ 그럼 안 되겠죠. 이 문젠 뭐예요.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백성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삿21:25) 사사기의 마지막 결론이에요. 주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일들이 그쳤을 때에 백성들은 고개를 들고 각자 저 잘랐다는 겁니다. 말씀의 권위, 그러는데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가 인정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정말 교회 왕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 안 한지 오래됐습니다. 당회 할 때 장로님들이 핏대 세울 때 목사님들이 말씀을 탁 펴놓고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왜 얘기 못합니까?
(예화) 박윤선 박사님은 총신에 계실 때 교수회의 주제할 때 항상 성경 옆에 놓고 교수회의 주제하셨어요. 문제가 나오면 “성경을 봅시다.”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적인 왕 같아요. 왕관도 씌어져 있고 왕궁도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온통 싸워. 그리스도의 왕 되심 인정치 않아요.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설교가들 속에서 이런 ‘그 빛’에 대한 증언이 불꽃 튀기지 아니함으로 사람들은 설교자의 증언 속에서 설교자가 삶과 그의 인격과 그의 영혼과 성품과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서 오직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고 부복하고 있다. 라고 하는 엄숙한 삶의 현장을 못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성도들이 우리 앞에 방종한 것은 우리가 증거 하는 말씀 앞에 방종한 것인데 그것은 먼저 우리들이 깊이 돌아봐야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도들이 설교자를 볼 때에 저 사람은 다른 건 내가 모른다. 정말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하나 말할 수 있다. 저 사람은 그 빛에 붙잡힌 사람이다.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죽으라고 하면 정말 죽을 사람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너 이 성도들 사랑하지 말라고 그러면 야속한 얘기지만 우리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갈 사람이다. 그분에게만 묶여있다 라고 하는 것들이 성도들에게 느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그 빛만이 우리의 갈 길이라고 외칠 때 성도들의 가슴이 설득되고 변화되는 거예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성취코자하는 목표에 얼마나 묶여있는지 아십니까?
(예화) 우리나라에서 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뭘 얘기 하냐면 피를 두 사발을 쏟아야 비로소 창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폭포 속에서 노래를 불러서 목소리가 4Km를 가야 된다는 거예요. 피 눈물 나게 자기의 목표에 매어있습니다. 요 앞에 현대 자동차 있잖아요. 이렇게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니까 이따만 하게 현수막을 걸어 붙였어. 그게 뭐냐 “대전시에 수요자를 석권하자! 현대 자동차 만세!” 자동차 파는 일에도 이렇게 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매인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매인 사람들이라 말 할 수 있고 그 빛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큰 유익을 보았던 기도생활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기도를 할 때에 한 15분 정도는 기도를 안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그의 지상에서의 삶도 괜찮습니다. 갯세마네 동산에서 보리떡을 먹이시는 장면 그가 백성들에게 반대를 받으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장면,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십자가가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깊이 생각할 때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는 걸 경험했어요.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사는 날 동안 어찌하든지 나의 인생이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여러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 뜨고 일어나면 세속의 욕망이 제 가슴을 지배합니다. 정말 세속적인 생각이 내 영혼을 지배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옛사람의 소욕이 또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녁때 고요히 눈을 감고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내 생각 할 때에 붙었던 세상에 대한 욕심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때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한 여섯 달 정도, 일곱 달 정도 십자가에 대해서만 쭉 설교를 했습니다. 길거리로 차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려요. 그 이유는 뭐냐면 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까 왜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그리스도를 전해도 이 그리스도 밖에는 생명의 길이 없는데 사람들이 왜 그 빛에 대해서 알지 않을까. 가슴이 녹아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도 깊은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님이 우리 마음을 먼저 녹이시는 일들이 있어야지만 설교 속에서 성도들을 녹일 수 있는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설교한 후에 성도들과 함께 눈물로 얼룩져서 나를 용서해 달라고 고백을 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얼마나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겠습니까?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빛’에 대한 증언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시고 주님 우리는 그 빛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설교하든지 항상 우리의 증언의 핵심 속에서 그 빛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교만하며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교회당을 밟아도 그들은 회심치 아니하였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한편의 설교는 한번의 증언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먼저 주를 만나는 놀라는 신앙의 감격이 날마다 기도의 골방 속에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같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세례요한II>
자기를 인하여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요 1:6-8)
첫 시간에는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다.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는 사람, 그 다음에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사람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빛이 무엇인 가에 대해서,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서 빛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세 번째로서 그의 증거의 목표는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이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 보고자하는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7절에 보니까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랬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자기를 인하여’라는 말을 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 온 목적은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 목표에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왜냐면 누구든지 그 요한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생각을 좀 많이 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쉼 없이 설교 합니다만은 우리의 설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설교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대단히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의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에 대한 목표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생각을 좀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말씀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목표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거죠 목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시는데 설교를 할 때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설교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설교자의 일차적인 직무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어 그들이 구원받게 하는 데에 설교의 목표가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보면은 오히려 설교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목표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신앙을 북돋우어주어야 하겠다는 그러한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이 두 가지는 같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문젠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세상은 구원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약에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설교는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무슨 얘기냐면 365일 설교를 들어도 정말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자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영혼을 어찌하든지 구원해야 되겠다는 이런데 초점이 맞춰진 설교들이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전도 설교가 심히 약화 돼있다는 겁니다. 전도 설교가.
김진홍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대요. 한번 간증을 듣는데 이제 예수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서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 ‘주님 오늘 수요일 저녁인데 내가 교회 갈 텐데 정말 내가 예수 믿기를 원하시면 나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고 예배에 들어갔는데 성전 건축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더래요.
그런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계속 들어오고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교회 나옴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가운데 불신자, 형식적인 신자임으로써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신학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영혼을 염두에 두면서 어찌하든지 이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들이 십자가 앞에 결단함으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염원에 불타는 전도설교가 365일 계속 될 수는 없겠지만은 상당히 자주 교회 속에서 선포되어져야지만 교회가 바로 구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두 갈래의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즉, 다시 말씀을 드려서 하나는 전도설교를 안 하는 이유는 새 신자가 나와야 설교를 할꺼 아니냐는 얘기죠? 그렇죠? 그러나 여러분 설교를 바꾸면 새 신자가 나온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사람이 와서 구원을 받게 되고 그들이 거듭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된다는 소문은 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 시간과 둘째시간에 제가 세례요한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그는 광야에다 개척을 시작한 사람인데 도외지에서 전부다 광야로 나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역시 원리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고 능력 있게 선포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기뻐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에 능한 재능을 가진 설교자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보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구원에 관한, 구원에 관한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구원받게 만드는 그런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를 행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서 많은 성도들에게서 구원에 필요성, 그리고 뚜렷한 회심의 중요성,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점점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자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는 문제가 적을 수 있습니다 만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구원받고 못 받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운명에 차이가 이뤄질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그 설교를 수없이 들었던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겠느냐..
근데 인제 문제는 좀 심각합니다. 뭐가 심각하냐면 구원에 문제는 우선 차제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설교자들이 설교단 아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심각한 죄인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돌이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인이다라고 하는 긴박감, 이런 것들이 점점 약화되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1900 몇 년도대 얘긴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50년대, 60년대 얘기입니다. 그래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설교를 하셨답니다.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다 끝나고 내려 올 때에 거기 학장 사모님이 계셨답니다. 설교를 끝내고 내려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이 연세 많으신 사모님이 말씀하시는 게 뭐냐 면은 “목사님 제가 이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온 지가 한참 됐는데 매주 채플에 참석했습니다만 여기 앉아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설교하는 목사님은 당신이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설교하라고 초청을 하니까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곳 거기서 내가 꿇리지 않으려면 무슨 설교를 해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들이 차있는 거예요. 그런 곳에서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뭐냐면 사람이 내 설교가 다 실패한 것 같다고 믿더라도 정말 복음이 제시되면 구원은 거기서 일어납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제가 4월 달이었습니다. 이런 간증을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전 하도 인상 깊었어요. 4월 달에 연세대학교에서 설교를 하러 와달라는 초청이 있었어요. 거기가 뭐하는 무슨 모임이냐 그랬더니 선교단첸데 학교 안에 안 믿는 친구들 초청 해다가 예배를 드리는 자리래요. 그 뭘 설교해야 되나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뭐 새 친구들 초청하는 자리라니까 믿지 않는 친구들 예수 믿게 만드는 거.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하다가 정말 저로서는 큰 모험이었지요. 전도를 위한 설교를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뭡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했어요. 하기로 갔어요. 그런데 그 설교를 할 때 제가 몇 번을 했습니다. 한 4번, 3번 한 4번 정도했는데 설교를 갔는데 그 중에서 두 번 정도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 하셨어요. 정말 그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이 일어났는데 제 마음 속에 드는 회의가 한 가지 있었어요. 과연 지성인들이 지옥을 이야기를 할 때 믿어주겠는가. 갔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그 예배를 드리는 게 공대 건물이에요. 첨단 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도들이 공부하는 그 공대 건물이에요. 본문을 탁 피니까 사람들이 한 50명 정도 모였어요. 설교를 쭉 지옥에 대해서 하는데 막 일어나서 가요. ‘지금 계명한 천지에 지금 당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무슨 놈의 천지에 지옥에 불이타고 뭐,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와가지고는 뭐라고, 뭐라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거리더니 한 사람씩, 뭐 시간도 없으니까 설교를 하든 말든 자기들끼리 그냥 가요. 하나 둘 한 열명을 빠져나갔어요. 설교를 하는데 너무 너무 힘들어,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아요. 설교를 다 마쳤어요. 한 50분 정도 설교를 했어요. 그 지옥이 있으니까 예수를 믿으라. 그 결론이 그거였어요. 지옥이 캄캄한 곳이고 불길도 있고 마귀도 있고 다 있다. 그래서 지금 부자가 지옥에 가서 지금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지 않으냐 설교를 했어요. 그 받아드리는 사람이 없어요. 설교를 하고나면 자기가 잘 알잖아요? 그래서 ‘아 오늘은 죽 썼구나.’ 이러고 오는데 나를 초청한 자매가 쫓아와서 위로를 하는 거예요. ‘참 사람들이 아이참 거.. 어떠셨어요?’ 그래서 ‘ 아 난 집에 갈 면목이 없다.’그러니까 ‘그래도 일단 여기 와서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신 분은 당신이 최초일 겁니다. 일단 들었으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도 이 사람들은 핑계를 못할 겁니다.’ 저한테 위로를 하는 거죠. 2주일이 지났어요. 그래서 잊어버렸죠. 근데 전화가 왔어요. 아 꼭 만나 뵙고 할 얘기가 있대요.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대요. 다 안 들었는데 두 사람이 그 설교를 듣고 믿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를 영접했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뭐냐면 똑같은 지성인 학생들인데 자매하나가 있었는데 뭐라 그러냐면 자기는 그 설교를 듣는 순간 다른 학생들은 다 웃긴다. 그러고 나갔는데 자기는 그 설교를 듣는 순간 20년 동안 예수를 안 믿으면서 인생에 있어서 궁금했던 모든 모순점들이 한꺼번에 뻥 뚫리는 것 같았대요. 지옥이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열심히 나와서 바이블스터디 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해요? 말씀은 곧 성령의 검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뭐예요? 우리가 말씀의 칼을 계속해서 뽑아 놓으면 성령이 사용하세요. 그래서 필요한 사람의 영혼을 찌르사 그를 거듭나게도 하시고 회개도 하게 하시고 돌이키기도 하신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교인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설교자들은 마땅히 아주 자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설교를 반드시 해야 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비슷한 형편이라고 생각이 되어져요. 전도설교를 해야 되겠다 그러고 마음을 먹고 쫙 전도설교로 뭘 할까 할 때 정말 가슴에 절절히 붙이 치는 설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에 곰곰이 서재에서 눈을 감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앞에 3천명의 불신자들을 쫙 앉혀놓고 일단 그들이 1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어준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설교하겠는가. 정말 내 가슴 속에는 가슴에서 끓어올라서 이들에게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 그것을 듣고 저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메시지들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가를 검토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우리끼리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긴데 강단에서부터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찰스피니 목사님은 메나탄 거리를 걸어가다가 주일 아침, 아니 보통날 아침 출근 시간인데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되 뇌였냐면 ‘저 사람들 하나님 어떡합니까?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려서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는 우선 둘째 치고 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강단에서 사무치면 반드시 구령을 위한 설교가 터져 나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지 아시겠죠? 강단에서 구령을 위한 설교가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강단에서 외치고 있는 설교자 개인의 가슴 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들이 자꾸만 말라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뼈아프지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거라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주께서 생각하시며 길을 나서는 것이 주님의 심정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약에 구령에 열정에 불탄다면 그러면 반드시 우리들의 눈에는 구원받지 못한 형식적인 신자들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긴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열정들을 정말 회복시켜 주셔야 될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인하여’ 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빛에 대한 증거를 듣고 예수를 믿게끔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주를 찾는 자가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없던 그 시대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말할 때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말할 때, 요한 자기를 인하여 라고 말하는 대신에 왜 오늘 요한복음 1장은 성도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통하여, 혹은 간증을 통하여, 혹은 찬양을 통하여, 혹은 신방을 통하여, 혹은 교육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고 설교자이고 선지자인 세례요한 그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지 우리는 주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믿지 않는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씨앗을 뿌리게 하는 이 가장 중요한 역할들은 찬양이나 신방이나 교육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라는 겁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들을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선포를 듣고 회개할 때 즉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를 믿고 5년 10년이 지나도 전도를 잘 못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그들을 전도훈련이라는 것을 시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상당히 배울 만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 아시죠? 전도폭발 쓰신 분, 아시죠? 아세요, 모르세요? 아시죠? 그분의 간증을 들어보면 굉장히 감명 깊어요. 그렇죠? 100명 정도 목회하는 교회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로 부임을 했는데 몇 년 지나니까 다 떨어지고 17명 남았답니다. 어느 날 주일날은 사모님이 여보 “나 다음 주부터 이 교회 안 나올래.”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누구 교회냐?’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나오고 저 옆에 침례교회 나가겠다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러니까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는 내가 아무리 사모라도 답답해서 못 보겠대요. 그래서 사모님이 딴 교회로 가버렸어요. 그런 사모는 또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이를 악물은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 목장에는 양떼가 이렇게 줄어듭니까? 서재에 앉아서 이론서들을 보고 그걸 쓴 게 아니라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면서 가가호호 전도하면서 체험으로 그걸 쓴 거예요. 지금 현재 17000명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대요.
그런 방법도 써 볼만해요. 그러나 여러분 그게 궁극적인 해결은 안 된다는 거죠. 다시 말씀드려서 왜 평신도들을 그렇게 훈련을 시키는데 전도폭발을 하는데 성공하는 교회만 성공합니다. 아무 교회나 다 성공하지 않아요. 그 머릿속에 앉아서 가만히 숫자 계산으로 할 때는 기가 막히거든요. 새끼를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면 와 이거 뭐 오, 육천 명 교인되는 거는 잠깐이거든요. 사실 그렇게 안돼요. 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이 기술이나 훈련으로 되어질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한 겁니다. 내면적으로 큰 변화를 받아서 복음에 열정에 근본적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 방법이 유용한 것이지 그런 것들이 없이 무슨 회사에서 연수교육 시키는 식으로 교육을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전도해서 영혼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떤 순진한 발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전도하고 살아가는 이러한 선교적인 삶은 바로 영적인 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끊임없이 그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끓어오르는 구령의 열정으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는 일들이 결핍된다면 그것들은 방법으로써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냐면 ‘초대 교회에 그렇게 개인 전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너희 교인들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 개인 전도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까진 맞아요. 그러나 교인들이 그렇게 개인 전도를 해서 많은 영혼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휙휙 움직이지 않습니까? 마치 기차가 움직이듯이 움직일 때 맨 앞에서 기관차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물론 성령이시지만은 그러나 맨 앞에 기관차처럼 움직이고 있는 선두에 선 것은 역시 평신도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의 소문을 내어서 그들이 예수 믿게 만드는 그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였던 거예요. 사도들이 외칠 때 불신자들이 꺾어지고 그리고 지옥의 문들이 부서지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일단 사람들이 파송이 되어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할 때 예수 믿게 만드는 역사가 일어난 거죠.
그래서 헬라어 성경에 보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두 가지로 나와요. ‘켈리소’ 그 다음에 ‘유 앙겔리좁나에’ ‘켈리소’는 선포하는 겁니다. 설교로서 선포하는 거고, ‘유앙겔리좁마에’는 소문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수군수군 모여서 복음의 소문을 내는 거죠.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같이 만날 때에 영혼들이 변화되는 거죠. 쉽게 얘기해서 복음을 개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 그들이 데리고 온 사람, 그리고 또 그렇게 전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설교에 큰 권능이 나타났을 때 전도자를 통해서 확실하게 영혼에 와 닿지 않던 말씀의 권능이 모여온 모든 초 신자들 아니면 전도 받아가지고 온 사람들의 가슴을 때릴 때 그럴 때에 정말 편만한 구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평신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 정말 초대교회 때처럼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곤란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방법이 되는 교회는 되고 안 되는 교회는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걸 통해서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는 교회는 아주 소수에 불과해요. 그러므로 그러한 방법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평신도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훌륭한 방법이지만 그러나 교회 전체를 어거해가고 교회가 말하자면, 쉽게 얘기하면 이거죠. 특공대들이 적진에 투하 되가지고 소총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싸워서 한 두 사람을 쓰러트릴 순 있지만은 그러나 그 다음에 특공대들이 가서 지점을 알려주면 무슨 일들이 있어져야 되요? 집중 포격을 퍼부어가지고 융단포격을 해야죠. 그래서 중요한 말하자면은 건물이라든지 요새들을 폭파하는 일들이 있어져야 하잖아요. 무엇이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질 때 그런 일들을 하는 거예요. 보세요.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다가 벽과 난관에 가끔 탁탁 부딪칩니다. 그렇죠? 사도들이 크게 핍박을 받아가지고 복음 전파가 일단 정지하는 4장의 장면이 나오죠? 그때에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까? 사도들이 외치고, 그 외침을 듣고 사람들이 기도할 그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얘기하는 그런 사제주의 같은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강단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어거해 가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확신을 저버리면 정말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신방을 한다, 병자를 문안한다, 교육을 한다, 등등등등 많은 것들은 행정을 한다, 구역을 편성한다, 년도를 계획을 짠다. 등등, 누구누구 인물을 등용하여서 사람을 세운다. 이런 것들은 소명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훈련을 잘 받고 달란트가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에서 가장 신방을 잘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이 목사님이 가장 능하십니까? 목사님에게 신유의 능력이 없고 평신도에게 신유의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쉽게 얘기해서 병자에게는 목사님이 몇 번 가는 것보다 이 사람이 한번 가서 병 낫게 해주는 것이 더 유용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이 고린도서에서 말씀하기를 은사의 많은 것들을 얘기하면서 지혜의 말씀을 가장 첫 자리에 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나타날 때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들을 볼 수 있어요. 교역자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갖거나 ‘아 우리 목사님은 100번 신방해도 소용없어 내가 가서 안수해야 돼’ 또 교역자의 입장에서는 나는 못 고치는데 저 사람은 고친다. 그런 거 열등의식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뭐예요? 그 충만한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사모해야죠. 그리고 우리의 그러한 것들을 갈망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많은 은사들이 각양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세워줄 수 있어야 되요.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거의 훈련이 안 되어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쇼. 그들이 비록 어떠한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들이 선포할 때 그때에 그 말씀이 파도처럼 밀려가서 자기가 깨닫지 못하던 말씀의 뜻을 열어주고 그 말씀 앞에 자기들이 자복하게 되었을 그때에 그 무슨 은사가 하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지혜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고 말씀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외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건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선지자, 혹은 설교자인 요한을 통해서 주를 믿지 않는 세상에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반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교인들에게 믿음을 심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대답하지만 성도들이 과연 그렇게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죠? 80년대에 서울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을 각개각층 조사를 했는데 72%가 설교와 자기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자기 신앙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거는 이단 설교자들이 있는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위 얘기하는 보수라고 하는 교파 안에서 있는 이야기들 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평신도들이 상당히 의식이 컸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쪽으론 뭐예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강단이 아무런 권위가 없구나. 그래서 이런 통계치를 놓고 어떤 목사님은 고로 우리는 제자 훈련으로 가야 된다는 이거예요. 설교를 믿지 않으니까 제자 훈련으로 가야 된다. 그러나 우리는 첫날 제가 말씀을 드렸죠? 이 문제를 판가름 할 때에 판가름 할 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고 어느 것이 어느 정도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원리를 정확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들이 거기에 나타나느냐 거기에 매달릴 건 없어요. 왜 그러냐하면 세상은 시시로 풍조가 변하고 그 풍조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눈에 보이게 성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설교자를 통해서 내게 믿음을 심어준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22%밖에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뭘 말해주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믿는 성도들이 설교가 자기 신앙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때에 그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온다는 얘기거든요. 그렇다면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교회에 참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이 앙케이트를 조사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얼굴을 못들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 말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권위”의 문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설교단의 권위가 지금 높아져있습니까? 자꾸 떨어져 갑니까?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해 봅시다. 어떻습니까? 어때요? 연세 많이 드신 목사님. 옛날에 한 30년 전하고 비교해 볼 때 어떨까요? 교인들이 설교단상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죠? 그러니까 30년 전에 제가 주일학교 학생이었는데 일단 누가 올라가든지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말씀이라고 그렇게 받아드렸어요. 근데 지금은 교인들이 그렇게 대답 안합니다. 몇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토를 달아요. 그러나 와 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단이 자꾸 연단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럼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자꾸 생깁니까? 권위가 자꾸 상실되어져 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어떤 장로님들이 대놓고 그러더래요. 목사님 두고, 당신도 기름부음 받았고 나도 기름부음 받았는데 쌤쌤인데 뭘 그렇게 누를라 그러느냐. 이런 세상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권위가 점점점점 상실되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권위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제일 심각하게 한풀 탁 꺾이면서 상실되어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르네상스에요. 르네상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전적인 권위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참된 권위가 1세기, 2세기 까지는 3세기경 까지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그 말씀에 큰 능력을 소지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의 권위가 유지되었어요. 그런데 뭡니까? 점점점점 가톨릭화 되어져 가면서 말씀이 약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권위를 교회가 확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방책들을 연구했는데 우선 뭐냐면 사제의 복장들을 로마제국의 관료들의 복장을 따오기 시작했어요. 그게 지금 가톨릭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복식의 말하자면 시작이에요. 따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뭐냐면 고딕건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뭐냐면 교회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외소 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외형적으로 심리적으로 권위가 느껴지게끔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엄격한 권징을 가했어요. 그러므로 교회가 권위를 세운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뭐예요. 하나님의, 그건 권위주의에요. 그러니까 권위는 뭐냐 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진리를 주셔서 그 진리로 말미암아서 사람들이 인정해주게 되는 것 이것이 권위고 권위주의는 무엇이냐면 사람이 나는 이러한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는 그렇게 나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지요. 근데 그것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는데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들이 전쟁에서 여지없이 패배했거든요. 교황권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교황청에서는 각양 추문들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근대정신이 깨기 시작하면서 인간성이 심히 억압받고 있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반기를 든 거에요. 그게 르네상스의 출발이에요. 그러면서부터 종교개혁시대를 지나가지고 17세기, 18세기 접어들면서 이런 사상들을 더 크게 싹트게 됐지요. 근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이 발달되고 그다음에 두 번에 세계전쟁을 거치면서부터 사람들은 절대적인 도덕이라든지 선의 개념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극도의 회의를 갖게 되었어요. 허무주의라든지 그런 것들의 출현도 그런 거잖아요? 이러면서 사람들은 굉장히 권위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어요.
지금 보십시오. 국민 학교 애들도 권위 있는 사람이 없어요. 선생도. 국민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얘기가 뭐냐면 요즘은 전에는 선생님이 자기를 불러 주면은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선생님 앞에 찾아갔잖아요. 근데 요즘은 선생님이 “야 너 이거 가서 좀 가져와” 그러면 “선생님 싫어요. 전 지금 너무 바빠요.” 지금 그런 세상이에요. 선생이 쫓아다니면서 애들한테 뭐 좀 해달라고 사정하는 세상이에요. 권위가 없어요. 젊은이들은 대통령을 자기 친구 이름 부르듯이 합니다. 권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들에게 있어서 대통령이 권위가 있습니까? 아니면은 어른들 요즘 텔레비전 보세요. 텔레비전, 그 머리 허연 노인네들을 등장시켜서 우스개꺼리로 만들고 있잖아요. 이게 전부다 세기말적인 현상이에요. 그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것도 벌써 전부다 권위에 대한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그러니까 노인네, 죄송합니다만 노인네 그러면 뭐냐, 머리 회전이 빨리 안 되고 답답하고 엉뚱한 생각하는 이러한 대명사로 사람들이 자꾸 부각을 시키는 거예요. 그건 근절되어야 되요. 이러한 현상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계시니까 알겠죠? 젊은이들이 당회의 권위 인정하는 줄 아십니까? 진정 안 해요. 당회는 이기적이고 보수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이권, 뭐라 그래요? 기득권 확보의 계층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당회를 타도해야 될 대상으로까지 생각한다고요. 권위 있는 것이 없어요. 성경이 당회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장로의 직분, 목사의 직분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그런 거 상관없어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게 권위가 없다 그거에요. 비실비실하고 권위가 없다. 오히려 신앙 정신에 있어서 자기들보다도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권위 있는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이 교회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구약은 엄격하게 말해서 ‘권위의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좋았을 때 뚜렷한 특징은 뭐예요? 하나님의 권위가 철저히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신앙이 식어질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어요? 방자히 행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우습게 아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자기의 권위와 같은 유사한 것을 부모에게까지 물려주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오지 않습니까? 자식이 주 앞에 서원을 했는데 부모가 “안 지켜도 돼”그러면은 부모가 그 서원을 취소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어요. 이게 얼마나 막강한 권한입니까? 이러한 권위가 어떠한 역할을 했습니까? 여러 가지 불법과 타락을 보호하는 우산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좋은 면에서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권위에 대한 회의주의가 교회에까지 밀려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하는 생각이 이겁니다.
한번은 한사람은 성결대 계통이고 한사람은 장신대 계통인데 한분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오셨어요. 조직신학 교수로. 또 한분은 설교학 교순데 앉아서 셋이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공통된 이야기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설교를 가지고 뭘 하려고 그러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냐 하니까 이렇게 개명되고 민주화된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다 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입 다물어” 그래 놓고 한사람이 얘기 한다는 게 이제 지금 얼마나 전근대적인 방법이냐 이거에요. 어떻게 자기 생각만이 다 옳다고 말할 수 있겠냐 이거에요. 사람들 마음속에 다 진리의 요소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런 세상이에요. 이런 세상. 설교학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런 회의주의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 설교를 통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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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믿음을 심으시는 일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이렇게 정하고 있는 원리들을 받아드리면서 원리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기 보다는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현실상황에 약화된 강단을 그대로 인정하고 차선책을 간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은 몰두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위대한 복음의 능력에 붙잡혔던 위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누가 있습니까? 바울이 누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구였습니까? 베드로 누구였습니까? 크리스토 스톰은 누구였습니까? 오리겐은 누구였습니까? 어거스틴은 누구였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은 누구였습니까? 조지 휘필드는 누구였죠? 찰스 피니, 무디, 그 수많은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들이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만들었습니까? 성경만이 아니라 역사까지도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영혼을 심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과연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생활 속에서 앞집 뒷집에 복음을 전한 것을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의 물결이 확하고 쓸고 지나가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인하여 애통해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세상에 가득해 지는 날들이 정말 올 수 있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두란노 서원에서 나온 조지 휫필드의 자서전을 읽어보십시오. 원래는 델리모어라는 사람이 한 전부다 합쳐서 12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원서인데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걸 압축해서 찍어냈습니다. 번역이 됐습니다. 그걸 학생들한테 읽히니까 학생들이 읽은 다음에 독후감으로 얘기하는 게 뭐냐 면은 “교수님 뻥이 심하군요.” ‘뭔 소리야’ “뻥이 너무 심하군요. 어떻게 한번 설교를 하는데 1500명이 회개를 합니까?” 1500명, 얼마나 목소리가 컸는지 1마일 바깥에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대요. 1.65km 사람도 안 보이는 곳이에요. 우렁찬 음성을 주셨겠죠. 야외에서 설교하는데 수천 명이 모여서 설교를 듣는데 어떨 때는 휫필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설교를 잘 듣고 있는데 시간이 점점점점 흘러가는데 의자가 어디 있습니까? 서서 듣는 거죠. 근데 비가 막 쏟아지는 거예요. 빗속에서 설교하는데 울면서 회개하느라고 그 빗속에서 어디로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 이상한 사람들 입니다. 고민해야 되요. 주님이 우리에게 이 어두운 시대에 빛을 증거하고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요한을 보낸 것처럼 우리를 어둔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차적인 직무는 이 설교를 통해서 영혼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실 때 세 가지 사역이 동반되셨습니다. 가운데 자리에 “쾌를소” 선포하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들이 3중 사역이 있어졌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점점점점 멎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분명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분명하게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이것이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고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강하게 와서 붙이치지 않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간단한 것입니다.
1735년인가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휫필드가 북쪽지방에 초청을 받아가지고 설교를 갔어요. 근데 하나 마운틴이라고 하는 광산이었는데 탄광이었습니다. 그 탄광에로 설교를 하러 갔는데 한 1500명 정도 모이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설교를 들었어요. 그들이 전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이었는데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함이라”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막 말씀이 외쳐질 때 처음에야 뭐 수군수군 그랬지만 말씀이 막 외쳐질 때 이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역사가 일어났어요. 말씀 탁 마쳐질 때 탄광에서 나온 새까만 얼굴에 눈물이 흐르니까 이 하얀 줄이 두 줄씩 생겼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
여러분 오스갈도 스미스 목사님 같은 분, 금세기의 목사님이거든요. 그분이 소련 전도 여행 같은 거나 혹은 동부권 전도 여행한 수기를 읽어보세요. 거짓말 같아요. 말씀이 외칠 때 교회당이 쪼개질 것 같은 회개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우리가 섬기고 있는 강단에서는 잘 안 일어나고 있느냐는 거죠. 우린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죄인을 회개 시키고 그래서 주님을 알게 만들고 그래서 구원 받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이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우리 인생을 ‘아 난 참 보람 있게 살았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영혼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신다. 라고 하는 이 원리들이 권위를 점점점점 잃어버리는 세대가 됨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강단의 권위도 격하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힘 있는 강단의 메시지가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믿지 않는 거예요. 그건 뭐예요? 예배 인도하러 가면 “목사님 찬송은 열심히, 기도는 뜨겁게, 설교는 어떻게? 간단히”
몇 년 전에 신촌에 있는 어느 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어요. 올해 일인가, 작년에 일인가. 설교라고 사경회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저보고 강사로 오래요. 갔습니다. 예배시간이 됐는데 전도사도 없고 학생들도 없어요. 고등부였는데 정시가 되니까 한 열명 나왔어요. 하나씩 둘씩 나오기 시작해요. 그다음이 더 가관이에요. 설교를 하러 올라가려고 하는데 강도사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저 강사님, 설교는 몇 시까지 하십니까?” “내가 몇 시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설교는 저희는 시간 별로 문제없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시간은 많이 있지만 9시가 넘으면 애들이 지루해하니까 그 안에 마쳐주십시오.” 막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확 치밀어 올라가지고 말이에요. 우리 후밴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내려가서 기도나 하슈.”하고 올라갔습니다. 열시20분에 끝냈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목양을 합니까? 그러니 강도, 문자 그대로 강도 아닙니까? 강도, 도둑 그 위에 강도, 강도라는 사람이 강도, 도를 강론하기로 라이센스를 받은 사람이 강대에 올라갈 때에 ‘아 설교를 들으면 청중들이 지루해하겠구나.’ 이 생각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열시 20분에 마쳤어요. 7시에 시작해서 이튼 날 갔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없이 회개를 하더라고요. 그러니 이런 신념이 강단에서부터 약화되고 있으니까 이것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너를 들어서 불신앙의 세상에 믿음을 만들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씀의 비수를 꽂아서 그들의 더러운 영혼을 도려내고 말씀의 생수를 그들에게 부어서 구원받게 만들겠다 말했는데 ‘주님.. 세상을 구원할 뭐 좀 좋고 신기한 방법이 어디 없을까요?’ 방법은 없어. 너하고 내가 너를 통해서 그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근데 설교자들이 ‘주님이 나를 도구로 쓰셔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잘 안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총회가 있으니까 일찍 끝내야지. 이런 식으로 강단에 올라가니까 긴박감이 깃들이 않는 것이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한 목소리로 증거 하기를 주님이 믿음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 그 세상에서 빛이 나타날 때에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역할을 누가 했느냐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통해서 그 빛이 날 때 사람들을 믿게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닫혔던 선교의 문이 어떻게 열립니까? 캄캄하게 죄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영혼들이 어떻게 그 석탑을 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까? 어떻게 적막이 감돌고 분쟁만 일삼던 교회가 일제히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850년에 찰스 피니가 로체스터시에서 집회를 계획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우리 조국교회에서 꼭 한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우리 대전 지역에서 이런 일 한번 해보십시오. 무슨 뜻이냐 하면요.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교파를 초월해서 연합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찔끔찔끔 무슨 전도 집회, 부흥회, 요샌 부흥회라 그러면 오지도 않아요. 세미나? 그러고 뭐 사탕발림같이 뭘 해야지만 사람들이 옵니다. 부부초청 위로의 밤. 이런 거나해야지 옵니다. 뷔페식당에 모이는 거죠 이것도.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저 목회자들이 모여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기도하면서 대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해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기도하고 365일 전도 집회를 한 교회에서 여는 거예요. 중앙에 있는 큰 체육관 같은 것들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교회가 연합해서 주일에도 그 집회를 계속했어요. 유능한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말입니다. 목회자들은 전폭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찰스 피니가 보냄을 받았어요. 로체스터시에 세 교회가 있었답니다. 하나는 목사님을 내어 쫓았고 또 하나는 교회가 두 교회가 법정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 중에 한 교회는 목회자를 내쫓을 궁리를 장로들이 하고 있었어요. 갔습니다. 분쟁하고 도무지 하나님께 연합되지 않는 교회였죠. 피니가 말씀을 전할 때 교회가 엄청나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전도 집회에 축복하셨어요. 그 시대에 일년 동안 피니가 그곳에서 집회를 했는데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요. 할렐루야! 이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왜 그런 것들이 안 일어납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해요. 복음에 대한 이 구령에 대한 몸부림치는 애통함 이런 것들이 식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교파가 다 모여가지고 기념탑이나 하나 건립하고 건물이나 하나 건립하면 그게 뭐 그렇게 큰 도움이 됩니까? 십자가만 높이 하나 세우고 학교 안에다가 돌맹이 비석이나 하나 세워 놓으면 그거 보고 후손들이 잘됩니까? 중요한 것은 심각하게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열망들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은 열정을 잃어가고 있는 강단의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확인하고 믿으십시오.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는 최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은 설교입니다. 제가 오늘 최상의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정말 그런 것들이 아니고도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한창 타락했을 때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고 노는 그 소리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최상의 수단’ 가장 유능하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선포를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그것이 말입니다. 여러분 기울어져 가는 강단의 권위, 사라져가고 있는 목회자의 권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말씀의 권위가 다시 서는 것 없이는 말씀의 권위가 다시 서는 것 없이는 결코 강단의 권위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3층 4층이 아니라 5층 6층 꼭대기에다 강단을 만들고 그 나무의 재질을 인도에서 수입한 것으로 만들어도 그걸로 권위가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이 썼던 강단 보셨지요? 노트하나 올려놓을 수 있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고 그 권능의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때리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을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강단의 권위는 섰습니다.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다 떨어진 갓을 벗으며 말씀을 폈고 그들의 손에는 나달나달한 성경이 들려져 있었고 그들은 굶주린 몸으로 초췌한 얼굴로 말씀을 들고 나왔을 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올 때에 죄인들의 가슴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오만했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던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던 사람들이 뉘우쳤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로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순교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강단은 회복되었고 그리고 설교자의 권위는 섰고 그래서 목회자의 권위는 섰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의 권위가 섰다는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부딪치지 않는 한 말씀의 권위를 아무리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쇠뇌 된 보수주의자 밖에는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적서부터 교인들을 잘 훈련을 시키면 예배시간에 조용히 있을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지각을 하지 않게끔 훈련은 시킬 수 있습니다. 미리 미리 준비해서 헌금을 하게끔 훈련은 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되 뇌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끼지 못하는데 말씀의 권위를 느끼는 못하는데 어떻게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해 봅시다. 교계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당회장을 초빙합니다. 요즘은 뭐 학위를 받아야지만 어떻게 뭐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명함을 내미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받아 보았습니다. 증명서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뭐예요? 일류대학교의 일류대학원의 수석으로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석사학위를 받고 다 받았습니다. 수많은 책들을 냈습니다. 그거 가지고 교인들이 보지도 않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또 하나 생각해야 될 문제점은 뭐냐 하면 말씀이 외쳐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래서 말씀의 권위가 인정받는 그런 일들이 줄어들게 되자 목회자들은 점점 세상에서 사람들이 권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에 급급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에요? 쏟아져 나오는 진리의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성도들이 굴복을 안 해준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전도지와 주보에다가 담임목사님의 얼굴을 싣고 그 밑에다가 학력을 기재하는 이유를 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박사 모자를 쓰고 후드를 쓰고 들른(?) 사람이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어 달라는 겁니까? 아니면 적어도 교회에 와서 박사가 설교를 하니까 적어도 고졸 이하는 오지 말라는 겁니까? 미리 설교의 수준이 높으니까 각오를 하고 오라는 뜻입니까? 그래서 믿음이 잘 안 생겨도 그건 네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거니까 잘 새겨서 들으라는 뜻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명령에 설교자들이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잘 생겼으면 얼마나 잘 생겼습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와 보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다!”
메트로 폴리탄에서 찰스 스펄전이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보니까 대응 침례교(?) 교회를 그렇게 지었대요. 그게 스펄전 스타일입니다. 이 스펄전은 이 고딕식 건물에 대해서 아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도 좀 고딕식 건물은 좀 좋지 않다고 봐요. 건물이 우선 바리새적인 요소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앞에 짓는데 돈 다 들어갑니다. 근데 그 높은 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 몇에 못 만들어요. 뒤에 가면 홀쭉해. 거 딱 들어올 때 현관에서 사람 기를 질리게 만든 거죠. 들어가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스펄전은 체육관 같은 식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지붕은 반드시 평평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목이 쉽니다. 강단은 항상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해야 됩니다. 그것이 성대를 보호하는데 기가 막힌 효력이 있습니다. 근데 어쨌든 지간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라고 하는 거는 전부다 사람들이 뾰족탑만 보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둥그런 무슨 회교사원 같은 것이 있거든요. 십자가도 잘 안보이고. 그 지나가던 사람들이 물었어요. “여보시오. 저 뭐하는 뎁니까?”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저기 뭐하는 뎁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곳은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스펄전이 목회하는 교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할 때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그럴 때 사람들이 뭘 생각할까요? 혹시 수시로 친목회를 여는 곳이라고 불러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이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상 사람들을 요한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끔 만드시길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내가 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건데 너희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 보낸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는 일입니까? 실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설교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직분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신앙하는 세상에 영원히 죽고 사는 믿음을 심는 도구로써 설교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내가 그 빛을 증거 하기에 유능하지 못하면 나를 인하여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그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누가 이 불신앙하는 이 어두운 시대에 빛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사랑하여 그 빛을 사랑하지 않는 이 어두운 시대에 믿음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요한을 통하여 그 증거로 말미암아 이 일을 행하였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그 빛을 증거 하는 설교자들을 인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신도는 깨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평신도는, 평신도가 뭘 깨겠어요? 평신도가 잠들었다고 칩시다. 누가 잠재웠습니까? 한번 물어봅시다. 평신도를 누가 잠재웠습니까? 이 세대에 조국의 강단이 깨어져야 될 것입니다. 진실로 깨어져야 할 사람들은 평신도가 아니라 강단입니다. 강단이 잠들어 있는 한 평신도를 아무리 깨운다고 할지라도 평신도들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단이 깨어보십시오. “자는 자여 일어나라.” 한마디만 외쳐도 평신도들은 벌떡 잠이 깨어서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있는 평신도 그 한복판에는 깨어있는 강단이 있었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예루살렘 성 그 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성전 한가운데에는 기도가 멎은 그러한 교회의 모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고 고함소리는 교회당을 울리지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은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찢으며 ‘주님 우리의 소명을 어찌하시렵니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사람들이 되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고 말씀의 놀라운 쇄신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말씀이 능력으로 성도들의 가슴을 쓸어갈 때에 그 때에 교회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깃발이 높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엊그제도 평신도 한 사람을 만났어요. “교수님 요새는요 설교를 듣는 것이 고문입니다. 고문당하는 것 같대요. 물고문, 선고문, 이건 말 고문 이예요.” 저는 그 사람 교만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너무너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파도와 같이 밀려와서 내 영혼을 쓸어가 주길 원하는 거예요.
6월 달이 강남에 있는 교회 집회를 갔는데 나 그 장로님 말씀 잊을 수가 없어요. 교회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겠죠. “제가 설교하러 온 강삽니다.” 얘길 했더니 두 손을 꽉 잡으면서 “강사님,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그 얼굴빛을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녹이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을 정말 녹여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사랑, 자기의 인격으로 끊을 수 없는 죄의 짐, 자기의 결심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악 된 삶에 묶여있는 자기의 삶, 무기력해져버린 자기의 영적인 생활, 매일 결심해도 개선되지 않는 이 죽은 자와 방불한 생활을 한번 깨워서 자기의 마음을 물같이 녹여주기를 원하는 강단의 선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주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시여, 앞으로 면류관이 씌워질 내 머리와 복음의 신발을 신은 내 신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내 혈관 속에 흐르는 피 중에 주를 위해서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뽑아내어 주십시오. 내 살점 중에서 주를 위해서 찢기기를 거절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옵소서.’ 그래야만 우리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흘러갑니다. 사람의 생각 변하죠. 인간 풍조도 바뀝니다. 그래서 교회의 풍조도 바뀝니다. 성도들의 취향도 달라지죠.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고 역사가 바뀌어도 주님의 십자가는 갈보리 언덕에 우뚝 서서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과 함께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고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그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되는 최상의 방법은 주의 말씀에 사무친 설교자들의 절규하는 부르짖는 설교를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