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 3
다 믿게 하려함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6~8)
오늘로써 이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8절사이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차례대로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는 ‘빛에 대하여’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빛에 대하여...라는 그 말을 가지고 설교자의 증거의 초점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는가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지난시간과 지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들을 굳이 요약을 한 번 더 한다면 설교자는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사역의 전적인 책임은 오직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아울러 주는 것입니다.
어제도 어느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성도들이 자꾸 목회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그런다고 그러니까, 잘 못한다고 그러니까 너무 너무 심령이 상하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세례요한이 보냄을 받은 것처럼 이시대의 설교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면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한분 앞에만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을 기쁘시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을 기뻐하시고 나의 복음 선포사역을 인정하신다면 우리는 아무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사람이 우리를 인하여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패한 자요. 버림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증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증거하러……. 본 사람이 증거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소리와 강단에서 외치는 목회자들의 선포사이에 미묘한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냉랭한 강단아래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차가와집니다. 냉랭합니다. 자기네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큰 것을 깨달았다고 서로들 이야기를 나눕니다만 거기에는 아무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의 선포가 어떻게 그렇게 냉랭하고 차가울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는 차갑고 냉랭한 설교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의 증거가 차가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고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를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나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하나 사람들은 그를 등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냉랭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의 증거가 차가와질 수 있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빛을 보았고 그래서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면 그는 결단코 차가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빛의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포사역의 초점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설교는 한 번의 증언이며 따라서 그 증언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을 우리가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7절에 나와 있는 말씀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함이라’ 이 말씀을 오늘 이 시간에 다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습니다. 설교자의 직무가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진전해 들어가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언의 목표는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지만 목적은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구령이 없는 설교보다는 차라리 설교가 없는 구령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말이 번드르르 하고 모든 사람이 찬탄하는 설교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그 설교가 능란하고 기가 막힌 설교라고 할지라도 설교의 최고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 보냄을 받았는데 빛에 대하여 증거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설교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기 전에 믿을 수 없었던 사실, 믿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 믿을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계시, 믿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 이것들을 믿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기가 막힌 머리들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산에 능하고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상품 하나를 사기위해서도 수없이 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설교가 왜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데 실패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도들을 설득하려고 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설득을 하려고 할 때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능수능란한 논리로 저 성도들의 능수능란한 논리를 뒤집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성이 패배할 그 때에 논리에 굴복함으로 믿음이 창조된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설득이 곧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믿음을 창출해 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지식은 이 세상의 많은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지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지난주에 전국의대생 수련회를 인도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전국의 내놓으라고 하는 수재들이 다 모였습니다. 의대생 들쯤 되니까 학교에서는 다 수재소리를 듣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대학원생도 있었습니다.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아이큐와 그 다음에 공부, 지식, 이성의 판단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기를 서러워하는 수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설교가 흡족하지를 않아서 설교가 끝나고 제 방에 찾아와서 니고데모처럼 상담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상담을 좀 들어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궁금해서 물어보는 내용들이 얼마나 유치한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해대는 것입니다. 믿음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역과 이성의 판단, 이성으로 아는 지식의 영역이 얼마나 다른가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아무리 학벌이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주눅이 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공부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뛰어나지 못하고 정말 성도들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학벌을 가졌어도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을 보십시오. 초등학교, 소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들이 평양신학교 다다미방에서 무릎을 꿇고 갓 쓰고, 망건을 쓰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개화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믿음이 심겨지게 될 때에 정말로 사람들은 그 선포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이것은 결코 니고데모도 알 수 없는 지식이었고 서기관도, 바리새인도 인간의 지식의 축적으로는 알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을 다루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설교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에 대하여서 증거하는 목표가 그것이 설교의 목표라면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하는 것입니다. 군사학에서 목표가 잘못 설정되면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목표는 큰 목표를 따내는데 반드시 기여해야 되고 목표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익해야 되는 것이 모든 작전의 기본원칙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제가 먼저 목표와 목적을 나누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목표는 목표 그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새벽 4시까지 저 고지를 탈환하라.’ 고지를 탈환하는 그것이 목적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부대의 목표는 주어졌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지를 탈환해야 합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그 고지에 아무리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승리를 주는 그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희생을 무릅쓰고 고지를 탈환해야하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대는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저 고지를 탈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대 전원의 생명과 바꾸는 목표로 설정을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안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스데반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역사상 그보다 훌륭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설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회심자도 없고 그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돌에 맞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 아니고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참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도 동시에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외치는 사람들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외치는 천둥소리를 낼 뿐이지만 그러나 번개 불을 번쩍이게 하시고 낙뢰를 떨어뜨리어 불신앙인 이 세상의 바벨탑을 부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낙뢰를 보고 믿음을 창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설교가 행해집니다. 성도들 중의 72%가 설교는 자기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강론과 수없이 모일적마다 성경을 피고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누가 말을 해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인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되어졌고 수많은 성경의 강론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기 힘들어진 세대가 된 것은 바로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설교가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만들려고 합니다. 믿음을 창출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들의 노고를 기필코 허사로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노래를 부르는 세대입니다. 찬양집회를 한번 가보셨습니까? 한번 가보세요! 찬양 집회하는 데를 한번 갔습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많이 모입니까? 주제는 무엇이냐? ‘찬양의 물결로 이 도시의 부패를 쓸어내자!’ 얼마나 멋있습니까? 밴드가 울려 퍼지고 찬양을 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찬양을 합니다. 찬양을 하고 찬양이 끝났을 그 때에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에 순서가 모두 마쳐지기 위해서 하얀 양복에 하얀 넥타이에 하얀 구두를 신은 어떤 분이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무슨 나이트클럽의 밴드마스터같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소개하는데 목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하나님께로 기름부음을 받고 말씀을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은 목사를 우리 성경과 그리고 믿음의 위대한 위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시대 앞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켜보고 싶어 합니다. 어떤 때는 뭡니까? 교회에서 큰 사업을 시작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도들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큰 사업을 벌입니다. 헌금도 하고 집회도 하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였을 때는 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흩어져 집에 돌아가서 골방에 고요히 눈을 감으면 왜 다 무너지는 것 같습니까? 진리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주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분깃을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견고하게 만드는 신앙의 터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인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은 말씀의 선포가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로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할 때에 그 믿음은 항상 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예수 믿고 축복이라고 하는 이러한 말에 현혹되어서 자기의 믿음을 지탱해나갑니다. 성가대도 합니다. 주일학교도 합니다. 건축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가지고 그들의 믿음이 제법 잘 믿고 있다는 스스로의 착각에 빠지게끔 우리들이 그들을 인도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단지 빛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빛을 증거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한은 죽은 자와 방불하게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그가 선포할 때에 다 나아와서 형식적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싱글싱글 웃으며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죄를 자복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자신들이 못 박히는 표로 세례를 받을 마음까지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말하기를 그의 증거가 참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증거가 참되니 그 참된 증거를 주님이 축복하실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참된 믿음이 불러일으켜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구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드리블은 기가 막히게 하는데 왜 슛은 못 쏩니까? 쐈다하면 노골이에요. 이런 선수들은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창조되는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믿음을 인하여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 목적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지 아니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들을 인하여 먼저 우리는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 설교자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예민하게 살아있고 그리고 사역자로서의 신앙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사람들이 그것을 인하여 믿게 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고 고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흔히 따라오는 유혹은 이런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신실하게 외쳤지만 저들의 심령의 상태가 비뚤므로 저들이 내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가장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복음의 선포를 들으면서도 설교를 향하여 대적하던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선포는 주님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더할 나 위없이 축복해주셨는가? 그리고 나는 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마음껏 축복해주시도록 자신 있게 주 앞에 간구할 수 있도록 나는 이 말씀에 붙들렸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를 비롯한 찰스 휘니 등등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의 사역에 붙들린바 되었던 위대한 종들은 말씀의 선포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굉장히 오랜 날 동안 자기가 증거한 말씀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그리고 그 뿌려진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해달라고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설교자 속에 찾아오는 또 하나의 위험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에게는 증거한 말씀을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야 된다고, 기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자기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자기를 붙잡고 주장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칼날과 같은 양심위에 서야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는 후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고 주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나의 설교에 축복해주시기를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교 한편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반대했습니다. 복음의 증거에 배척했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설교도 그러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광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아울러 기억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편만을 보고 우리 스스로 위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고민하며 그 말씀의 결과들과, 그 말씀의 열매가 신통치 않은 것들을 인하여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말입니다. 오늘날 말씀을 증거하는 선포의 사역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선포할 때에 믿음을 불러일으켜야 되겠다고 하는 타오르는 열망이 설교자들이 가슴속에 불타오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외치는 말씀의 내용에 회의를 품고 설교를 한다면 듣는 성도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외칠 때에는 정말로 자기가 확신할 수 없는 내용은 증거하기를 미루어야 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증거하기 위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증언해 주시기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자기가 먼저 증언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설교 속에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대로 생각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추레한 말들은 설교 내용 속에 깃들여져 있는 설교자의 회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들에게 증거되어서 마음속에서 외치는 선포의 내용이 될 때에는 요지부동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끊임없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증거가 돼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적인 설교는 반드시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에 서있는 설교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설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봐야 될 것은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믿음, 즉 증언하는 내용에 대한 믿음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왜 사람들에는 믿으라고 증거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믿지 못하는 내용들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증거하는 것은 처음서부터 직업적으로 볼 때도 잘못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이상구박사가 온 적이 있었지요? 뭐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언젠가 신문에 ‘이상구 신드롬’ 이렇게 났어요.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감자가 좋다’고 얘기를 했더니 시장에 감자가 씨가 말랐대요. ‘고기가 나쁘다’ 했더니 갈비 집에 사람이 안와요. 그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일부러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평범한 건강 특강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푹 빠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가지고 지금 강의를 하는데 그 정도의 강의를 누가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다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건강특강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킬 수 있었느냐하면 자기 자신이 몸이 아파본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런 것들을 극복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사람이 무엇보다도 더 자기가 택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만 증명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확고하게 믿고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 흰머리가 변하여 까만 머리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증언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믿음이 있고 확신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고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확신과 믿음을 가질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한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불타는 확신이 나를 계속해서 강하게 주장해 줄 때에 그 때에 우리들은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기본적인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억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전 존재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주신 그 말씀에 위탁하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먼저 주관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세 번째로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보십시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믿음을 불러일으켜야 되는 사람은 도시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장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성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모든 사람……. 나이든 사람이나 어린사람이나 어린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성인이나 무학자나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그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요한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경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목회자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느 부흥회에서 증거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름만 대만 다 아시는 분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의 성장전략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가용은 타고 오는 교인을 붙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자가용 안타고 온 사람 10사람이 낼 헌금을 한사람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붙잡아야지만 교회가 탄탄해진다는 것입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요한을 세상에 보내면서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때로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목회자들에게는 자가용을 타고 오는 교인이 걸어서 버스타고 오는 교인보다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이 느끼시는 영혼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장년부에 사람이 더 모이는 것, 그것을 가지고 교세를 판가름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교회학교는 교회에서 서자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모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고난을 받는 자나, 평화롭게 사는 자나, 모두가 다 주를 떠난 자들이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비천한 영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우리 모든 사람들이 연민하고 불쌍하게 여겨야할 대상이며 끊임없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동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 앞에 불쌍한 영혼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나 촌에 있는 자나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은 실로 설교자들이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는 영혼들입니다.
오늘도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고 행락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개중에 보면 말입니다. 그랜저 같은 훌륭한 자가용에다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아주 예쁜 아가씨를 태우고 어디 행락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 그렇게 상상을 안 하려고 하지만 제 마음이 워낙 죄성이 많아서 그런지 그것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아요. 여러분 그들의 영혼도 사실은 불쌍한 것 아닙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렇게 부러운 것이 없이 이 세상의 향락을 위해서 살아갑니다만 그러나 잠시 잠깐후면 우리의 인생은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홀연히 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입니다.
요즘에 제가 아침마다 타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이 세상은 죄가 많고, 슬픔이 많은 곳입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이 세상에 살면서 기쁨을 누리고 사랑을 줄만한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누가 뭐라고 그래도 세상은 그런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는 영혼을 타이릅니다. ‘내 영혼아 조금만 참자. 잠시 잠깐후면 우리의 인생이 불현듯 끝나고 우리 모두가 주 앞에 서야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이 죽음, 모든 영혼이 회피할 수 없는 이 하나의 심판,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한발, 한발 그 심판 앞으로 다가오고 그 죽음 앞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설교자들이여! 설교자들이여! 이 들의 길을 막아서라고 우리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불린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예민하게 훈련되어져야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영혼으로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으로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일부러 박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좀 낫게 대접을 해줘야 될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일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이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선배들은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민하게 끊임없이 주 앞에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일 수 있도록,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정말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간절히 다가오도록 우리의 심령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함으로 이 빛을 증언할 때에 이 증언을 듣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의 증거를 듣고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이 계신데 아마 칠순을 바라보시는 목사님이 유치부 설교를 하시는 분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을 것입니다. 첫째 주는 고등부, 둘째 주는 중등부 셋째 주는 유년부, 넷째 주는 유치부입니다. 유치부에 내려가서 설교하는데 60이 넘으신 노인네가 유치부 설교하는 시간이면 유치부는 숨소리도 안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쥐 죽은 것같이 조용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조용해지는 것이 다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떠드는 속에서 무슨 설교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에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간에 수많은 성도들의 시선을 한 손에 움켜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모두 다 설교자가 빼앗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그 빼앗은 시선의 줄을 타고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설교의 현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에 수많은 성도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쁜 주보를 만지고 있습니다, 광고를 읽고 있습니다, 성경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믿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시선이 설교자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까지도 휘어잡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누구, 누구의 마음을 잡아야 된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증거될 때에 고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은 그 말씀에 주목할 수 있고,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은 졸아야 한다면 그 설교는 분명히 잘못된 설교인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셨던 방법들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 부요한 자, 많이 배운 자, 무식한 자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며칠 씩 그 말씀에 빠져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몰려다녔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다녔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인하여 믿게 하는 일들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설교자들이 먼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린 유치부 어린이로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을만한 나이가 된 아주 연로한 어른들까지 모든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을 수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저는 훈련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깎고 다듬으면서 훈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이 일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사역임을 인정하지 아니하고는, 확신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이러한 훈련을 감당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째 시간인가에 훈련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또한 훈련으로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동일하게 인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고기를 아무리 기가 막힌 것을 떠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이 이것이었죠? 고기볶음인데 고기볶음이라고 해서 한상을 받았는데 젓가락으로 아무리 휘저어도 한 숟갈 떠먹어보니 맛은 기가 막히게 입에 착착 붙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양념과 야채덩어리지 고기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설교 이해가 쏙쏙 되는 설교인데 그 속에 설교자가 말씀으로 깊이 들어가서 거기서 자기의 영혼이 녹아지고 그래서 거기서 이것이 주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 원래 덩어리를 떼어오지 않은 설교가 바로 그런 설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교자가 아무리 기가 막힌 것을 그렇게 떼어왔다고 하더라도 어린아이에게 생고기를 가져다주며 ‘먹어라’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을 갈고 변화시켜서 죽을 원하는 자에게는 죽을, 구이를 원하는 자에게는 구이를, 국을 원하는 자에게는 국을 줄 수 있는 능수능란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훈련으로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그대신 모방하지 마십시오. 읽으십시오. 읽으시는데 부디 말씀드리는 것은 요즘 설교를 읽지 마시고 적어도 100년이나 200년 혹은 300년 500년 전의 설교를 읽으시기를 권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역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회심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였던 그 때에 했던 조상들의 설교를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속에는 정말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설교의 내용, 그 흐름들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 요한이 보냄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존 번연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 분은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땜장이였습니다. 땜장이……. 땜장이였는데 그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단골로 들으러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영국의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의 존 오웬 박사였습니다. 국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존경해마지않는 대 석학 존 오웬 박사님이 땜장이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고……. ‘야! 그건 뭐 잘못 들은 얘기한 것 아니냐?’ ‘정말입니다.’ 만났습니다. ‘오웬 박사님 아니 박사님같이 고명하신 분이 어떻게 그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들으러 가십니까?’ 존 오웬은 말했습니다. ‘국왕폐하 저는 말입니다. 땜장이 존 번연과 같이 설교를 해서 그 사람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이 박사학위 같은 것은 100개라도 집어던지겠습니다.’ 그는 땜장이에 불과했지만 자기와 같은 땜장이들에게도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국왕폐하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 석학의 마음속에도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성인이 뭐 별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지성인이면 뭐합니까? 바닷가에 나가보십시오. 모래성을 이렇게 쌓아놓지요? 파도가 찰랑찰랑 치면 모래성을 살짝 건드리죠. 그러나 폭풍이 일어서 파도가 길길이 뛰어서 휘! 하고 나면 이만하게 쌓았던 모래성이 어디로 갔습니까? 지성인? 지성인!……. 그러므로 내가 저 사람들에게 무식하게 보여서는 안 될 텐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텐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파도처럼 밀려가서 그들을 뒤덮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조지 휘필드가 설교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치가들도 그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했습니다. 탄광의 광부들도 그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온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네가 거듭나야 되겠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떻게 엄마뱃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의 수준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내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켜 급기야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세워주며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결국은 구원 받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져야 할 텐데 우리가 훈련받기에 게으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듬어지기를 게을리 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실 때에 어린아이의 영혼을 칠 때에는 명중을 안 하고 큰 사람의 영혼을 칠 때에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충성된 종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증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믿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이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믿어야 될 필요에 대해서 그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을 했고 아주 외국어에도 능수능란한 아주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학자의 길을 안가고 시골에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것도 부목사로서 목회를 했지요. 결국은 나중에 그 지방에서 커다란 신앙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 말입니다. 실화입니다. 우리나이로 한 다섯 살쯤 된 아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이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니까 이 아이가 자기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장 어린아이가 그 많은 어른들이 듣는 그 설교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말씀이 선포되기를 기다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몇 번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에 목사님 설교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럴 때에 세가지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첫째는 목사님 설교는 도무지 맥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어렵다고 말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어! 수준이 높습니다.’ 그 얘기가 아니라 왜 말씀이 증거될 때에 활시위를 당겨서 획 쏘면 화살이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면서 갑니까? 공기를 가르면서 과녁을 향해서 쉬지 않고 날아가서 딱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는 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합니까? 그러면 요약을 해서 말할 때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딱 요약해서 목사님이 무엇을 우리 가슴에 딱 찔러주고자하는 그것이 안 들어올 때 성도들은 설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설교가 왜 그렇게 해맵니까? 라는 이야기를 듣기 좋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야 하면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말이 너무 어려운 것이에요. 초등학교 학생들을 데려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인 사역과 중생과 회심과……. 이것을 알아먹겠습니까? 어렵다는 것이죠. 용어를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성도들의 아주 교묘한 회피입니다. 수준이 높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그 설교대로 쫒아가서 살거나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에요. 자기키가 너무 작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죽으러 갑시다.’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설교는 똑바로 알아듣겠는데 자기의 마음이 그것을 용납을 안 해요. 그 때에 성도들은 설교가 어렵다는 교묘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하나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관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지금 니고데모가 거듭난다고 하는 말이 참 나로서는 생소한 용어다, 나로서는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알겠다. 그 뜻이 아니거든요.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거든요. 아주 쉬운 이야기에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지금 막 헤매고 있어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듭나지 못했으니까 그 거듭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예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나?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오셔서 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마음이 녹아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설교를 하는데 십자가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이에요. 그것이 참다운 수준의 문제에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이 한번 탁! 일어나면 그 다음에 그 수준은 탁 뛰어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주 초등학교밖에 안다니는 이런 아이들도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고 설교가 그렇게 주어지게 될 때에 그들은 한 시간, 두 시간 요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어린 학생들이 180분 동안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을 본 일이 있어요. 그게 진정한 수준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할 때에 사람들이 그 빛을 경험하고, 그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러므로 그를 믿게 되는 영혼의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