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녹취자: 김경애
네 번째 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라고 했습니다. 오리겐은 2세기 때의 교부입니다. 이 오리겐 신학자는 이 팔복을 어떻게 보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각하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등등의 많은 이야기들이 가상의 어떤 사람을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팔복의 인격적 특징을 완벽하게 지닌 분이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자기 회고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해석하는데 저는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 번째 복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면 지상의 언어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배부를 것이요.’ 원래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똑같이 ‘배불러.’ ‘I am satisfy.’ 아니면 배가 꽉 찼다는 표현도 씁니다. 그렇지만 젊잖게 ‘I am satisfy.’ 라는 그런 표현을 씁니다. 실컷 먹었습니다.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배고프면서 배부르다. 목마르면서 시원하다. 이것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이 구절은 어떻게 보면 형용모순을 내포하는 구절이라고 봅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면 여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의라는 말에 들어가기 전에 주리고 목마른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욕망 가운데는 대체가 가능한 욕망이 있고 대체가 불가능한 욕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막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싶은데 그것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탕 먹고 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해소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내게 기쁨을 줄 수 없고 똑같이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욕구의 대표적인 것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고기를 갖다주면서 목마름을 해소하라고 말할 수 없고 배고픈 사람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면서 배고픔을 잊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인간이 아무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욕망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욕망을 예로 들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팔복이 나오고 팔복 뒤에는 보상이 나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위로를 받을 것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천국백성의 특징이 나오고 짝을 이루는 보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시차를 두고 주어진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배부르려면 끊임없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배부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떤 법적인 조건문과 결과문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한 인격의 동시적인 상태를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미 배부름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족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한 특성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고통과 기쁨이 함께 있는 것처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입니다. 그리스어로 ‘디카이오쉬네’ 라는 말입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사전을 찾아보아도 이 의는 엄청나게 많은 설명이 나옵니다. 사실 재미있는 것은 고전 그리스어에서보다 신약성경에서 이 ‘의’에 대한 개념이 훨씬 더 풍부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고전 그리스 사전은 옥스퍼드에 나온 것이 이렇게 두꺼운데 의에 대한 설명이 요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 헬라어, 교부들의 헬라어사전을 보면 아주 길게 나옵니다. 그만큼 의에 대한 풍부한 관심과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볼 때 이 ‘의’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의는 한 상태입니다. ‘Quality’, 스테이치 즉 자질과 어떤 상태를 가리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통틀어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의는 ‘허물이 없음’과 혹은 ‘올바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율법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율법은 좁게 말하면 십계명이고 좀 더 길게 말하면 모세오경이고 더 길게 말하면 성경 전체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율법에, 하나님의 법에 어긋남이 없이 딱 맞은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허물이 없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율법을 들이댈 때에 그 모든 것을 행하여 율법에 완전히 들어맞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그렇게 할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면서 의로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율법의 개념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은총의 덧입은 상태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제사입니다. 전혀 의롭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로운 능력은 가지고 태어났는데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는 지었습니다. 그런데 뒷감당이 안 됩니다. 애들이 사고치고 자기가 해결을 못 하듯이 자기가 죄를 지었지만 죄의 문제를 자신이 티끌만한 죄라도 그 죄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는 벌을 받거나 갚으면 되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그것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죄를 많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못 느낍니다. 죄를 깊이 생각하면 은혜 없이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사를 드립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설교에 의하면 제사를 드리는데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이 생각나서 가서 그 사람에게 용서를 빕니다. 잘못했다고 이야기하고 화해를 하고 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뭐냐 하면 비록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교제의 문을 여시는데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운가? 아닙니다.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의인데 그것 말고 두 번째는 그렇게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 같은 것으로 은총을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총을 덧입어서 그가 의를 입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거스틴이 자기의 삼위일체 속에서 이렇게 뜻깊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공과공부를 했지만 건성으로 읽었겠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밤에 이것을 공부하다가 펄쩍 뛸 정도로 감탄한 문장입니다. 읽을 테니 잘 불러 보십시오. 삼위일체 14편 12권 15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이 그분께 참여하여 의로워지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에 우리가 참여하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먹고, 입고, 놀고 그런 것에 온통 빠져 살 사람에게 인생이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고 영원한 것을 보여주시면 ‘인생이 이것이 다가 아니구나! 나는 영원을 향해 준비되어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지혜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여 지혜로워지는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지혜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지혜보다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지만 하나님 당신은 지혜를 이미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참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부터 중요합니다. 심오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정의에 관하여 말할 때는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정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불경건한 인간을 의롭다고 해주시는데 그때 그에게 정의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은 쉽게 읽을 수 있지 모르지만 내가 다시 쓴다고 해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당신이 한 공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이것을 통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염려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는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효과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랑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인간 속에서 정의를 이루어지게 하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정의를 이루는가? 하는 것을 최초라고 하면 웃기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내가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정의로우신 것은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전혀 정의롭지 못한 이 사람을 정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정의’라고 부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해서 지혜로워지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정의를 확장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의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정의에 매여야 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정의를 확장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주셔서 그 의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도 그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원칙이 아니라 사랑의 원칙에 맞는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에게 분여하심으로 우리가 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거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지만 그러나 ‘이신칭의’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지만 그러나 의이신 중간에는 통주가 들어갑니다. 주를 통해서 의신칭의가 된 것이지 나 혼자서 이신칭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그 구속의 의가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신이 칭의를 가져온 것이지 그것 없이 이신이 바로 칭의를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속의 구도를 만드신 이유는 구원에 관해서 생각하는 한 우리가 일체로 자신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의 정수를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는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율법적인 의’, ‘은총적인 의’, ‘구속의 의’ 이렇게 정리됩니다.
그러면 그의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주린다는 것, 배고프다는 것은 내가 이 속에서 허기를 느낍니다. 이 속에서 허기를 느낍니다. 내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배고픔입니다. 목마름은 내가 그것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한 목마름은 마시면 즐겁겠다는 뜻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생존의 느낌입니다. 달짝지근한 와인을 미시고 싶을 때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하지 목마르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목마르다고 할 때는 물입니다. 수돗물이냐 정수기물이냐 상관없는 물입니다. 물로 해갈될 수 있는 순수한 욕망일 때 그때 단일한 욕망일 때 그것을 우리들이 목마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속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무엇이냐 하면, 의에 대한 욕구입니다. 의에 대해서 욕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의가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까? 그런 율법에 부합한 상태, 은총적인 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의 이런 것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그런 의의 개념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다르게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그런 자신이 되기를 원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런 세계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 갈망이 너무나 크고 진실하기 때문에 숨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그렇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양식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먹을 것이 굶주리는 때가 아니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납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굶주린 사람이 수두룩했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생생하게 실감납니다. 그런 욕망을 여기에 투사시킵니다. 이 욕망은 멈출 수도 없고 해소될 수도 없고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대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연인의 원초적인 갈망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그렇게 의에 대한 열망으로 꽉 차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 의가 어떤 영역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느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향해서는 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 자신의 의는 훼손되지도 않고 언제나 하나님은 자족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염려는 하나님을 향한 염려가 아닙니다. 세 가지 방면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할 때 죄가 생각나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인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임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못 보는 것은 죄가 없어서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빛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그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살고 말씀이 자기 정신 속에 살아있을 때에는 아주 예민해집니다. 말을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염려하거나 옳지 않은 생각을 할 때 나의 이런 생각이 오고가는 것을 성령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예민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꽉 차있습니다. 감각적인 것들로 꽉 차있습니다. 꽉 차있으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은 마치 새카만 옷을 입고 온갖 더러운 것을 묻혔는데도 티 안 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제일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좀 더 온전한 사람이었으면, 순전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갈망이 이 속에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보면 그가 나오는 긴 자신의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처음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성령의 밝은 빛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 안에 이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가 그 마음에 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전도하는데 왜 합니까? 뭐하려고 합니까? 바보 같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천국에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은 우리의 관심사이지 사실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어차피 구원받은 자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있는 날 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공간이라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인가? 심심치 않은 논쟁거리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공간은 없는 것입니다. 빅뱅이론이 맞는다면 가장 근접한 이론이니까 빅뱅이론이 맞는다면 어쨌든 일조분의 35초 사이에 빅뱅이 일어나고 빅뱅이 일어나면서 폭발하면서 비로소 공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어떤 상태였는지는 모릅니다. 인간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지금 우주 밖에 무엇이 있는지 우주 밖이 어떤 상태인지 인간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블랙홀 상태도 알 수 없는 사람이 고차원적인 그런 세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빅뱅이 되면 공간이 생기니까 빛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가 옛날에는 150광년이라고 했는데 제임스 웹을 띄우고 보니까 더 먼 거리의 빛들이 발견됩니다. 결국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이 우주는 팽창되었다가는 다시 축소됩니다. 마지막에 축소되면 공간이 다 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공간이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뉴턴이 이야기했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는 도대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확장되는 공간에 있다가 어느 순간에 공간은 다시 축소되고 공간은 사라지고 우리가 모르던 것들이 공간이 된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공간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질이나 세계로 변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한없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앎이 거기까지 밖에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품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공간의 개념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전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이 의로운 삶을 이 세상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가장 정의로운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상태이고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똑같이 정의 없이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속에 이 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우리는 이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세계 안에 하나님의 의가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해도 하나님의 의로 넬라 판타지아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처럼 안식을 누렸듯이 우리도 똑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만큼 우리는 그 의가 확장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자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웃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에서 선교 안에서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모든 세상을 완성하셔서 그 의에 거침없는 상태로 만드실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만큼 그 의를 자신 안에서, 이웃 안에서, 사회 안에서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빛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세상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세상이 불의하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구속의 영광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충만하게 비추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의로워지고자 하는 갈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신교 역사에서 많이 반성하는 것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사람들이 그 교리 때문에 도덕생활이 허물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반성을 신학자들이 많이 반성합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은 굉장히 진지합니다. 간단하게 옛날의 훌륭한 신조를 허물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중의 상당사람들은 아주 진지합니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따르면 이신칭의의 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의 교리를 올바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적용할 때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도덕생활에 무관심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불의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표인 정의와 사랑의 표지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위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의롭게 산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의 삶을 산다. 그리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그 정의가 정의로 완성되지 않고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결론은 우리에게 그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 교회에는 세상을 향한 통곡과 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고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신과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이 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슴 아픈 통증과 눈물이 없는 만큼 그는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매일 매일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재해서 그래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닌 자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