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녹취자: 남궁지선
이 팔복의 구조를 보면 너무 감탄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여덟 개의 복, 어떤 사람들은 일곱 개의 복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그 하나하나의 복의 순서가 아주 정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잖습니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 뭐냐면,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위험은 그 불의에 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해 말씀하신 후 바로 여기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복이 바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모든 인간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나는 아무의 긍휼이 필요 없다.’라는 사람은 없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럼 여러분들이 이런 모순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늘 하던 당신의 말과는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됩니까? 그게 뭐냐면 가장 최고의 우리의 성화의 상태는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신은 누구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성화의 경지입니다. 그 말과는 어떻게 관계가 됩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사위와 딸에게 “아빠는 너희의 효도가 필요 없다. 너희에게는 필요할 거다.” “뭐가?” “아빠에게 효도하는 것이.” 뭐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긍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고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은 의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 이면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긍휼이 여기는 그리스어로 ‘엘레몬’이라는 단어입니다. ‘엘레오스’에서 왔어요. 그게 ‘엘레오스’의 희브리어 동치어가 ‘라하밈’입니다. ‘라하밈’이 ‘레헴’에서 와요. ‘레헴’은 창자 혹은 태입니다. 자궁 특히 자궁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면 긍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 뭐냐면 엄마의 자궁입니다. 엄마의 자궁에 있는 아이가 엄마의 무한한 불쌍히 여김을 받고 사랑을 받듯이 그게 바로 긍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원래 이 ‘긍휼’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적으로 보면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다.’ 이런 뜻입니다. 이게 신학적으로 보면 삼각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삼각형으로 된 뿔이 있는데 그게 다이아몬드입니다. 삼각형으로 깎았어요. 그래서 삼각인데 그 다이아몬드의 이름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세 면이 있어요. 한 면이 자비, 한 면이 긍휼, 한 면이 오래 참음입니다. 세 개가 모여서 사랑이 되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처럼 긍휼도 사랑이고 오래 참음도 사랑이고 자비도 사랑인데 그런데 긍휼은 자비가 아니고 자비는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사랑의 세 국면이라고 얘기합니다. 똑같은 다이아몬드인데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비, 오래 참음, 긍휼 이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긍휼은 뭐냐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의인은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불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불의는 죄야. 죄와 불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그것을 몰두하다 보면 사랑을 잃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뭐냐면 긍휼의 대상은 한 사람이 처한 현재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레스토랑을 크게 경영한 적이 있는데, 레스토랑이 괜찮은 레스토랑이었는데 애들을 데리고 왔는데 애들이 미친 듯이 뛰더라는 겁니다. 정중하게 이야기했답니다. “얘가 이렇게 뛰면 다른 사람한테 방해되는 것은 고사하고 반드시 얘가 다칩니다. 조심하세요.” 그래서 두 번을 너무 심해서 손님에게 주의를 줬는데 드디어 얘가 뛰어가다가 테이블에 부딪혀서 옥수수가 우수수 나간 것입니다. 완전히 난리가 났습니다. 울고불고 그러면 “그렇게 하지 마세요.” 말한 종업원들 입장에서 “싸다 싸. 내가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뭐라 그랬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가 부러져서 피가 줄줄 나고 있는 자식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큰일 났다 너무 불쌍하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게 긍휼입니다. 사태가 누구 책임이냐? 어떻게 되었나?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긍휼에는 초 논리성이 있는 것입니다. 논리를 배제하고 상태 자체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게 인도주의입니다.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혀 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를 돌로 치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이 여자의 죄는 미워하셨지만 이 여자는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가 막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어떤 대안을 내놓으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살려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더냐?” “없습니다.” “그게 네가 죄가 없어서 정죄를 못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너를 불쌍히 여긴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게 어디서 그런 놀라운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까? 지혜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시랑하면 놀라운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진나라 시대 때 환혼이라는 장수가 초나라를 쳤습니다. 배가 양자강을 거슬러서 이렇게 올라가는데 원숭이가 되게 많습니다. 중국에는 대만에도 많습니다. 길거리에 떼거지로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에 배낭에까지 올라가서 바나나를 꺼내는 녀석들입니다. 새끼 원숭이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놀고 있으니까 병사들이 포획을 한 것입니다. 데리고 놀려고 배에서 무료하니까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기서 있다가 어미가 쫓아온 것입니다. 양자강은 굽이치지 않고 똑바로 되어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똑바로 가로지릅니다. 황하가 뱀처럼 굽이칩니다. 강변길을 수백리 길을 따라 온 것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드디어 가다가 포구에 정박을 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 어미가 미친 듯이 날아들 듯이 달려와서 배에 올라탄 것입니다. 올라타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그니까 병사들이 이렇게 미친 듯이 몇 백리를 따라오다가 어떻게 이렇게 죽나 그래서 배를 한 번 갈라보자 하고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요. 깜짝 놀랐습니다. 창자가 다 토막이 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단장의 슬픔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장은 창자고 단은 끊는다는 것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라는 단장의 슬픔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그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재밌는 게 열린교회 설립 동기이기도 했지만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니’ 할 때에 그게 우리말로 말하자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라는 것입니다. ‘에스프라크니스데’ 인데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창자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영혼의 좌소입니다. 우리같이 심장이 아니라 그들은 영혼의 좌소가 창자였던 말입니다. 거기가 떨리도록 움직인다고 하는 것과 아까 얘기한 ‘엘레몬’ ‘라하민’ ‘레헴’ 히브리말이 의미하는 것이 다 한통속입니다. 그렇게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자어에 애이불비가 무엇입니까?. 슬프다 할 때 ‘애’를 뭐라고 발음하죠? 아이 이는 어조사 이, ‘아이이부배’ 이렇게 읽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슬픈데 슬프지 않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뜻입니다. 슬퍼하되, 앞에 나오는 ‘아이’는 슬퍼하는데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배’는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아이이부배’ 라는 것은 ‘슬퍼하면서도 자신을 잃을 정도로 비탄해 하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뭐냐면 감정에 매몰되어 이성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 ‘비’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게 아니라 자기 주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어떤 슬픔이 성경적으로 우리에게 권하는 슬픔이겠습니까? ‘비’의 슬픔이 아니라 ‘아이’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불비’라는 말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게 한국 교회사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물아의 사랑을 주장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용도 목사라고 감리교 사람인데 제명되었다가 몇 년 전에 복권되었습니다. 약간 신비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게 뭐냐면 나는 그 사람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나는 그 사람을 물아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말할 때는 이기적인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랑을 이야기한 건데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너무 건너간 것입니다. ‘애’와 ‘비’를 혼돈하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고 하는 사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사랑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긍휼은 그런 사랑은 아닙니다. 자기의 어떤 경우라도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할 때조차 우리를 팽개치고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격한 슬픔은 슬퍼하실수록 예수다운 사람으로 슬퍼하시는 거였고 우리는 슬퍼할수록 우리다운 사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을 졌습니다. 당시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이었고 1데나리온은 장정이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일해서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계산기로 두드려 보니까 주5일 근무로 23만 년을 근무해야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요즘 일당을 15만 원으로 잡으니까 9조 원입니다. 그게 일만 달란트입니다. 종으로 일해서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왕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줬습니다. 오다가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1500만 원 정도의 액수죠. 그런데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하다가 능력이 없으니까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끝내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면서 왕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삶은 우리 자신에게서 자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는 이 긍휼의 깊이입니다. 오늘날 너무 무자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거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게 가인의 후손인 라멕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자기 아내를 향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내서 내가 죽여 버렸고, 누가 나를 아프게 해서 내가 그 소년을 죽여 버렸다.” 교만에 가득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의 위해서는 벌이 7배지만, 나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77배로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불과 몇 세대 안에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황폐한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깊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깊이입니다. 특히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 아주 충일해야 합니다. 이 안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항상 가엽게 해석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줘야 합니다. 중요한 건 공감입니다. 그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고는 결코 간절한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공감하지 않고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우리가 사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을 받아서 우리의 삶에 대한 주권을 내려놓고 주님께 돌아온 거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긍휼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깊은 긍휼의 경험, 그게 우리에게 사실은 소망을 준 것입니다. 위로를 주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한 때는 주님을 멀리 떠났지만 주님 앞에서 살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기신 그 때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은 정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그분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 번 반성을 해보십시오. 팔복을 여덟 개를 원으로 그려놓고 가운데다 자기 이름을 쓰고 한 번 입체형으로 그래프를 그려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나는 의를 위해 얼마나 박해를 받고 있는가, 점을 찍고, 마음이 온유한 자 나는 얼마나 온유한가, 점을 찍고 점들을 이어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내가 팔복의 사람이 되었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리겐은 누가복음 설교 제28번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팔복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의 사람으로 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팔복의 사람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되기를 원하셨는데 결국은 뭐냐면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뭐를 닮을 것입니까?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팔복의 모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팔복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자기 선언입니다. 자기선언. 그러면서 자신은 이미 그렇게 되었지만 끊임없이 그렇게 머물러야 할 인격의 표준으로서 팔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팔복 바깥의 사람으로 자기를 얘기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는 팔복을 가지고 팔복을 얘기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을 때 예수님이 진짜 하시고 싶은 얘기는 ‘너희는 나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라. 너희는 나처럼 애통하는 자들이 되어라. 너희는 나처럼 온유한 자들이 되어라.’
그런데 아무도 예수를 닮는다고 할 때 팔복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 ‘예수의 형상을 닮는다’라고 할 때 너무 추상적입니다. 예수의 무엇을 닮는다는 말인가? 일평생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져야 될 것은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 닮는 것만큼만 팔복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8개의 입면체 가운데 하나가, 자체가 8개의 입면체입니다. 하나하나하나가 따로 된 것이 아니라 8개의 입면체입니다. 상황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늘 웃습니다. 늘 좋습니다. 늘 호의적이고 남에게 관대하고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익의 문제가 딱 결부되어 보십시오. 1원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딱 개입이 될 때 비로소 이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인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게 뭐냐면 이게 8개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한 사람이 8각형으로 몸이 깎여있다고 생각하고 그 8개의 각각의 면들이 한 사람의 인격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말하기를 당신이 그렇게 애통하신 것은, 당신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애통하시기도 했지만 그런 자들이 받을 복에 기초를 놓기 위해서 애통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세계 교회사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최고의 많은 책을 쓴 저술가가 누군지 아십니까? 오리겐입니다. 몇 권쯤 썼을 것 같습니까? 2000권.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세계가 열려서 그냥 눈 감고 말만 하면 책이 돼서 쏟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2000권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매일 한 권씩 써도 6년을 써야 하는데 열흘에 한 권씩 써도 60년을 써야 하는데 오리겐은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한 60세 정도밖에 못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바로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는 불쌍히 여김을 안 받아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긍휼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고 긍휼 때문에 목회하게 되고 긍휼 때문에 죄를 용서 받고 긍휼 때문에 삶의 용기를 얻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