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녹취자: 박나리
가난한 자의 복,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극렬히 여기는 자의 복, 다섯 번을 거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복에 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그리스어 성경을 직역을 하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복이 있도다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청결하다’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 히브리어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Tahor’라는 단어가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데, ‘청결한’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제의 문서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사와 관련해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에는 불결하다, 충족할 때에는 청결하다, 이렇게 불결한 죄인이 어떻게 정결함을 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다루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의 여호와의 종교가 바벨론 포로기가 지나고 나서 중간사 시대로 접어듭니다.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디아스포라 속에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책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유대교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의 여호와의 종교를 잘못 해석해서 그 나름대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확신을 가미시켜서 구약 종교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그리스도의 복음이 낯설게 느껴졌고, 구약 여호와의 신앙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것이 구약 종교와의 연속성 속에서 잘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순수한 구약 여호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복음의 신앙이 아주 놀라운 연속성을 가지고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거치면서 이 청결함이 다분히 제의적인 청결함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형식적이고 제의적인 청결함,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따라서 인간의 불결과 청결을 갈라놓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복이 있도다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이여’라고 하면서, ‘카르디아’라는 단어인데 3격 역격을 씁니다. 그것은 처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추가하신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 유대인들의 잘못된 정결에 관한 생각을 교정하시려는 의도가 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청결은 제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구약 속에 면면히 흐르던 청결 사상이었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훨씬 더 영적인 의미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령부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은 그 마음이 펼친 것입니다. 두루마리 같은 것이 뭉쳐서 있을 때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펼치고 읽어보면 그다음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두루마리에 세로글씨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두루마리를 펼치면서 그의 사연들이 전개가 됩니다. 한 사람의 삶은 마음의 펼침이고, 한 사람의 마음은 삶의 접힘입니다. 접힘과 펼침으로써 이 마음과 삶은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전혀 모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깐 봤을 때는 모를 수 있는데,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지켜보면 그 삶이 결국은 마음의 펼침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그 마음의 어떠함을 어린아이라도 드러내게끔 되어 있는 것이 접힘으로서의 마음과 펼침으로서의 삶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인간의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이 가능한가, 이게 ‘Katharos’라고 하는 단어인데 ‘Catharsis’라는 영어가 여기서 나옵니다. 물 같은 것으로 씻어내서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씻어내는 것이 ‘Katharos’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원래 깨끗했던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이렇게 씻어내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아무것도 깨끗한 게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씻어내심으로써 깨끗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제 우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청결한 마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특히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일평생을 살면서 청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됩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우선 중생한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될 때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시차를 둘 수도 있는데, 어쨌든 회심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적인 청결함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절대적이냐 하면 하나님처럼 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리 신앙이 어려도 회심하는 그 순간에 존 오웬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은혜의 샘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콸콸 솟아나고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져 내립니다. 노아 홍수에 하늘이 뚫리고 샘이 터진 것처럼 그렇게 은혜가 쏟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비록 주일학교 학생이라도 모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시간을 가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건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모든 죄를 미워하게 되고 모든 불결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회심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들이 최고의 정결함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메이첸이 얘기했듯이 부흥만 바라면서 매순간 그 일만 일어나기를 꿈꾸고 아이들은 교육하지 않는 그런 상황을 한탄했듯이, 이것은 매일 일어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다음에 우리 인간은 남아있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완벽하게 유지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불결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화를 통해서 매일 매일 죄와 싸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설득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매일매일 버리면서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채워가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얘기했듯이 내가 이미 거기 이미 도달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이루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매일매일 싸우면서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그럼 청결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속죄의 씻음’입니다.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됩니다. 만약에 그걸 안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사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거제를 드릴 때 화목제의 피를 뿌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들이 정결해지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큼 청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한 사람은 자신의 순결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을 한번 찾아봅시다. 김성구 목사님 읽어보십시오. 9장 14절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을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결국 속죄의 씻음으로써 우리가 청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여러분 한번 여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언젠가 굉장히 정말 순결해지던 때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처음에 부흥을 경험하고 3년 동안을 순교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1번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가족 생각은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진실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순결해지던 때가 있는데, 그때 보면 어떤 때였냐면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현재적으로 내 안에서 충만하던 때였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결해지는 비결입니다. 오늘날 갖다 놓고 성이 어쩌고, 그 피해가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그것도 좋습니다. 문화적으로 접근하고 모두 좋은데, 실제로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에 있어서 정결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그런 복잡한 사회심리학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가 내 마음을 감화시키고 있을 때 그런 걸 꿈꾸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더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순결한 삶을 꿈꾸었을 때 결국은 순결 하려고 애쓴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을 깊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은혜의 승리’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의 피로 단번에 정결하게 되었지만, 그 마음은 고정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물듭니다.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거 해주는 것이 다윗의 생입니다. 더없이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전쟁이 일어납니다.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전쟁을 누비고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이 경건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서 이제 나라가 어느 정도 컸으니까 아랫것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왕궁에서 편히 쉽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사라져가면서 마음속에서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정욕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라고 합니다. 두 개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게으름의 계획이 게으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정욕에 넘겨주어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자기 욕망대로 살게 합니다. 그것이 게으름이 그다음에 겨냥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산산이 파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갑자기 내일 그 기도를 때려치우지는 않습니다. 게으름이 엄청난 범죄를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게으름이 서서히 들어오면서부터 경건의 능력을 약화시키면서 마지막에 경건의 능력이 약화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죄에 대한 면역력이 사라지고 저항력이 사라지면서 결국은 그 죄의 삼킨 바 됩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매일매일 현대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순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됩니다.
스탠리 하우워스라고 하는 신학자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팔복의 조건 뒤에는 항상 보상이 따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정복할 것이라, 이런 식으로 보상이 주어집니다. 스탠리 하우워스는 말하기를 이거는 그런 보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팔복은 현상금을 건 과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것은 천국 백성들이 누릴 은혜의 선물을 서술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자 하는 동기가 천국을 소유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되어서 심령이 정결해지면 그는 현재적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누리면서 삽니다. 쉽게 얘기하면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만큼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급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천국 백성들의 사람 됨됨이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 백성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삶의 두 가지 양태를 이야기합니다. 소유냐 존재냐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유냐 존재냐, 그다음에 일이냐 이것입니다. ‘To be’, ‘To have’, ‘To do’, 삶을 ‘To do’에 두는 사람은 일에 미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보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딱 그만두게 됩니다. 신문에 나왔는데 삼성에서 아주 높은 임원을 했는데, 퇴직을 하고 나니까 아파트 경비원밖에 갈 데가 없더랍니다. 그때 삶의 깊은 좌절을 느낍니다. 삶의 지침 자체를 ‘To do’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have’입니다.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말을 보십시오. 돈도 젊었을 때 돈이 의미가 있지 나이 들면 돈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없어서 쓸 수도 없습니다. 활동 범위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운전도 못 할 정도로 기력이 없는데 좋은 차가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거기까지 갈 수가 없는데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돈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거 모아놔 봐야 자식들이 쌈질이나 하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 같은 사람도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To be’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짐, 그다음에 일함, 그게 아니라 됨됨이에 의해서 천국 백성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는 것, 마음이 깨끗한 자가 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사실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팔복 중에서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물이 아니시니까 우리가 육체의 눈으로 물건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본다고 하는 ‘Onsontai’라고 하는 이 자체가 일종의 눈높이 교육입니다. 우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끔 말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고는 살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단언하시면서 여기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개의 차이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으니까 ‘Opsontai’, ‘볼 것이오’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까. 마음으로입니다.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나는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세 가지로 범주가 나뉘는데, 하나는 ‘essential glory’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존재로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radiative glory’입니다.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청교도의 책들을 쭉 찾아보면 사실 이 발산적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됩니다. 그리고 대개 ‘essential glory’와 ‘effective glory’, 두 개만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radiative glory’를 이제 따로 범주를 두어야 된다 생각합니다. 여러분 다 아는 바와 같이 효과적인 영광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잘 살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거야 이 기독교 신앙 속에는 무엇인가 있구나,”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설교를 잘 했다, 능력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럴 때 그 사람도 돋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effective glory’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radiative glory’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시떨기나무 사이에서 보았던 그 불꽃으로 나타난 하나님, 이게 구약에서는 일종의 ‘Shekinah’입니다. 그래서 성소 위에 그 구름과 불기둥이 있다든지, 또 혹은 개인적인 체험이긴 하지만 사도바울이 특정한 장소에서 예수의 현연을 목격하면서 거기서 엎드려지는 장면이라든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하고 두려워 떨며 엎드려지는 광경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범주 상으로 ‘radiative glory’, 발산적인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적어도 최소한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에게 나타나 보여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라고 하는 이 말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시편 19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1절부터 4절입니다. 교역자들이 1절을 읽으시고 직원들이 2절을 읽으시고 이렇게 교독하겠습니다. 교역자들이 1절 읽으십시오. 시작.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 흔적이 흐려집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인간의 눈도 흐려집니다. 그래서 이중의 어두움이 겹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한 청교도들의 생각은 아주 명확합니다. 자연을 보면서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가기에는 둘 다 너무 어두워서 불가능합니다. 그다음에 자연을 통해서 양심을 포함해서 그 율법은 너무나 분명하게 새겨져서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핑계 댈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형태로 율법을 증거하는데 율법의 다른 측면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칼뱅이 사실은 16세기에 태어나질 않고 그분이 17세기에 태어났다면 더 위대한 신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칼뱅은 자기의 모든 신학적인 진술 속에서 너무나 많은 절제를 합니다. 대표적인 게 인간의 영혼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 실력이면 인간의 영혼에 관해서 굉장히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딱 절제하고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에 관한 탐구는 재미있기도 하다 그러니 한번 해봐라 정도로 끝냅니다. 더 이상 얘기를 안 합니다. 그 앞에 가톨릭이 그런 걸 한없이 전개해서 미친 그 폐해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1세대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모두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인 소양이나 철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만약에 그것을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 17세기에 활동을 했더라면 훨씬 더 괄목할 만한 학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지금 칼뱅도 유명합니다. 그가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에서 이런 단어를 씁니다. ‘bien ordonné, bien réglé’라는 단어입니다. ‘bien ordonné’는 쉽게 얘기하면 ‘good-ordered’, 혹은 ‘well-ordered’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질서가 잘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bien réglé’는 ‘well-regulated’, 그것도 역시 ‘규정된’이란 뜻입니다. 아주 광범위하게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일종의 ‘La vie bien ordonné’, 잘 질서 잡혀진 선한 삶, 잘 질서 잡힌 삶입니다.
무슨 질서냐면 영광의 질서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말하자면 구속 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구속 주를 만나고 구속 주를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가서 그 다음에 그 지식이 다시 하강합니다. 예전에는 질서 없게 보이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두 아름다운 질서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질서 속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삶이 ‘well-ordered’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신국론에서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기도입니다. ‘나의 사랑을 질서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랑을 질서 있게 하옵소서’ 그것이 천국, 하나님의 도성에서 부르는 신부의 노래입니다. 그게 그래서 이렇게 질서 있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의 목사의 설교를 읽어보면 핵심이 그것입니다. 그런 ‘radiative glory‘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설교자가 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많은 사람에게 낙심을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모든 만물 속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가 아주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져서 그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나 혹은 그 아시시의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새들에 관해서 한 설교로도 유명하지만 새들에 대해 설교들이 어떻게 보면 미친 짓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에게 신비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압도하는 이 자연을 통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넘치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야지 겨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사람은 삶 자체가 예배 안에 국한돼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사실은 그 예배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에서 마지막에 보면 말방울에도 거룩함이라고 쓸 것이며, 그리고 성전에서 쓰는 기구들만이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 쓰는 모든 도구들이 다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제의적인 거룩함이 이제 그 제의를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리시는 모든 세계가 그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가득 찰 것을, 그래서 결국은 성과 속의 구별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쓰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것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그런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을 경험하고 나서 이 지식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확실히 이 모든 세계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그런 심리적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실은 나의 개인적인 인간사와 관련지어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모든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배당 속에서뿐만 아니라 들길을 걸으면서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하나, 그리고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이 우주의 공간에 별들의 움직임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것이오’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든지 어른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가 친교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7편 15절 한번 펼쳐보십시오. 17편 15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배우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Panim Yahweh’, ‘야훼의 얼굴’이라고 하는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 얼굴을 표상하실 때 두 가지 의미입니다.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당신의 얼굴을 대면해 주시는 것과 그 다음에 의로운 사람을 복 주시기 위해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보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말고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렇게 행복할 리는 없지만 꿈에도 그리던 사람을 보는 건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가장 큰 고통도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는 그 이상의 고통이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너무 보고 싶으면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를 못 보고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서 이 보고 싶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이 괴로움을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기를 원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을 ‘면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얼굴 면’ 자입니다.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면회를 갔는데 얼굴은 못 보고, 이 아래만 보여준다는 게 만족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 얼굴이 복수로 사용이 됩니다. 복수가 신비의 복수입니다. 인간의 얼굴 자체가 매우 신비한 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조차도 ‘속히 내가 네 얼굴을 보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신체 가운데 얼굴은 일부가 아닙니다. 인격 전체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진수를 보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을 때 결국은 본다고 하는 것은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 우리가 한번 얼굴을 보자” 여기에서는 진짜로 생겨난 얼굴을 보자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특권을 주시는데 그 특권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뭐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수시로 뵙는 사람은 역경의 파도를 지나고 시련의 폭풍 속을 지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은 하나님께 맡겨졌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남이 칭찬하고 남이 인정해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허전함을 가져다줍니다. 허무함을 가져다줍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와 홀로 고요히 있을 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가슴 깊이 차오르는 유열과 기쁨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경영 심리학적으로 칭찬이 가지고 있는 아주 커다란 힘을 강조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엄격하게 보면 사람에게로부터 칭찬을 갈망하는 모든 인간의 마음이 결국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만족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제사 속에서 얼굴을 가렸고 기도 속에서 교제가 막혔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외면하신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가 없습니다. 그런 친교가 없을 때 일은 일이 돼버리지 결코 섬김이 될 수 없고 의무는 의무일 뿐이지 그게 사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친교의 사귐이 깊어질 때 일은 섬김이 되고 의무는 사명이 됩니다. 삶 자체는 자신을 태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람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삶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혼의 변화가 없이 목회자와 교회의 방침을 잘 따르게 되는 단정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걸 가리켜서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중동지방 같은 데에 가 보면 참 색다르기도 하고 나도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자 같은 걸 기르는 것입니다. 집 안에서 어릴 때부터 사자를 기릅니다. 이렇게 두 마리씩 양쪽에 놓고 이리 와라 그럽니다. 그 누가 감히 그 사람을 해칠 수가 있겠습니까. “물어” 그러면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있습니다. 그렇게 길들여진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변화 없이 도덕적으로 다듬어진 사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짐승인데 뭔가 길들여졌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주는 먹이, 훈련, 때로는 공포심 때문에 야수의 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목회를 통해서 만들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서 자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 그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된다면 결국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힘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할 때 모든 사람을 낱낱이 다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발동을 걸어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자신의 불결과 싸우며 청결한 사람이 되어가고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가진 것 아무것도 없어도 저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우주와 도시의 공간 속에 꽉 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별만을 보고 찬송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니라, 사실은 길가에 구름은 가을에 낙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그 오묘하심을 찬송하고 맑은 하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 끝까지 가득 찬 것을 보면서 ‘bien ordonné‘, 하나님의 잘 질서 잡힌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것을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 기쁨을 발산하면서 살도록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입니다. 이웃을 향한 최고의 선교는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그 기쁨을 자기의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표현하면서 사는 그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한 집사님이 미국 유학을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 그러니까 “목사님 그 사람들은 아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었어요.”라고 합니다. 그게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질서 잡혀진 행복, 특히 평화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데 자신과는 완전히 종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캠퍼스에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내가 믿고 싶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부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와 친교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