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받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녹취자: 남궁지선
화평케 하는 자는 그냥 생각 없이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이게 평화인데, 그 평화라고 하는 것도 질서입니다. 다툼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와 질서가 충돌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무리 질서를 가지고 있어도 혼자 무인도에서 있으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또 다른 질서를 강요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이 사람은 이런 질서를 그려내고 이 사람은 이런 질서를 그려냅니다. 물이 파문을 그리면서 서로 만나면 간섭을 일으키면서 충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세상에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각자가 고집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해서 다음 주 사경회에 3일이나 이야기를 듣겠지만 화평케 하는 자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것을 끊임없이 확장해서 우주적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삶의 이유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네 원수라도 사랑하라.’ ‘한쪽 뺨을 때리면 또 한쪽 뺨을 돌려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은 평화라는 파문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질서 속에 한 물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박해라고 하는 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팔복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복이 있나니’하고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배치 같은 학자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팔복이 아니라 칠복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유가 뭐냐면 실제로 복이 일곱 개지 않느냐? 1번과 8번이 일치하니까 그러면 6번과 1, 8번 똑같은 거를 하나로 보고 더하면 7복입니다. 우리에게 8복이라고 알려진 거는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복을 기준으로 8개를 정한 것이 아니라, 조건을 기준으로 8개를 정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도의 문학적인 장치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이라고 문을 열고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이라고 문을 닫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복의 개수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리겐 같은 교부는 이것을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경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다.’라고 설명을 해요. 그러니까 자기의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자기의 인격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약간 곁길로 나가기는 하는데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윤동주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했던 사나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신 분이라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천상에서는 어떤 고통도 없는 행복을 누리겠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행복한 분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행복한 분이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왜 예수님이 세 번이나 우셨다는 기록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비명을 지르셨는데, 말이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행복론에 관해 하나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일체 고통이 없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 자체가 생각이 없이 살더라고 결국은 우리의 현실 그 자체가 끊임없이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의 구조라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행복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보면서 생각할 때 행복을 일체의 고통이 없는 것을 이 세상에서 꿈꾸는 것은 합당한 행복의 견해가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의 견해가 아니다. 그리고 만약에 고통이 없는 무 고통의 상태를 만약에 끝까지 밀고 나간다고 보면 결국 그것은 참 행복으로부터 이탈하게 될 것이다. 이런 디그레션(digression)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의’란 무엇이냐? 조직 신학에서 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성경 신학에서 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사뭇 다릅니다. 그 방법 자체가 그렇지만 내가 정리를 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의와 인간에게 적용된 의와 인간에게 적용된 의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의는 뭐냐면 의가 하나님 자신의 속성입니다. 속성은 하나님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니까 속성이 행사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속성은 곧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냐? 당신의 거룩함을 친애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거는 하나님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적용된 의는 그럼 무엇이냐? 크게 복음적 의와 율법적 의로 나뉩니다. 율법적 의는 뭐냐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율법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너무 길지만 가장 좁은 의미의 율법이 십계명이고 더 확장하면 구약이고 더 확장하면 성경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율법의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상태. 무결점의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기준으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복음적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덧입혀진 의입니다. 이건 이미 제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고, 안수를 하고 그의 죄를 짐승에게로 전가시키고 짐승이 대신 죽고 그러면 하나님과 평화를 회복한 효과가 헌제자에게 옮아가고 하는 그런 방식의 은총에 덧입은 의,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그 의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 의를 하나님에게는 정의와 사랑이 모순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공로를 부여하셔서 그래서 사람을 은총으로 덧입히셔서 의롭게 하시는 그것도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를 예를 들자고 하면 자기의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것이니 그건 주관적인 것이고 전혀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의를 위하여 그랬으니까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죠. 넓게 보면 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두 이루어진 사회가 의로운 사회, 그 의가 사랑과 완전히 일치된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의 질서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행실을 잘못하거나 교회에서 부도덕한 일을 해서 신문에 오르내리고 욕을 먹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건 박해가 아닙니다. 그건 마땅히 자기가 받아야 할 대가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세상의 질서와 충돌을 해서 그게 박해를 받고 거기에서 손해를 보고 고통을 받는 모든 것을 가리켜서 이것을 박해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냐면 만약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의 질서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있지 않다면 결국은 우리는 고생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 박해는 그냥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통을 박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자기가 사랑하고 그 질서대로 사람이 되고, 질서대로 행하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또 다른 질서로부터의 충돌입니다. 그 고통입니다. 그것이 바로 박해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구나.’라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를 받을 때 우리가 원하는 질서와 그리고 우리의 질서를 훼방하는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주 또렷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런 고통이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두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빛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악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돋보이는 거고, 못생긴 사람이 있으니까 예쁜 사람이 누군지가 확인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똑같이 결국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거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의 충돌 속에서 물결이 출렁거리면서 가는데 부딪힌다는 말입니다. 비로소 내 물결이 어디로 가고 있다는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박해의 경험을 안 주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박해의 경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박해를 오늘날은 우리에게 무제한의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나는 전 세계를 다녀 봐도 이렇게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국가는 없습니다. 진짜 없습니다. 미국? 어림없습니다. 교회 하나만 지으려고 하면 수십 번 공청회를 엽니다. 땅을 우리 후배가 샀는데 교회를 짓는데 공청회를 열 번도 넘게 하는 것입니다. 공청회에서 부결되면 땅 샀어도 교회 못 짓습니다. 공청회 할 때 얼마나 웃긴지 아십니까? 여기 이 나무, 이 나무, 이 나무는 베지 마시오. 그런 조건으로 우리가 동의를 할 수 있습니다. 온갖 까다로운 조건을 다 겁니다. 나무를 잘라내야지만 교회를 시원하게 짓는데 좋은 나무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 보기 좋으니까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고도 필요 없습니다. 미술학원 간판 떼고 거기다가 교회 간판 붙이면 내일부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는, 나는 확신합니다. 전 세계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로마가 기독교가 공인이 되면서 기독교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고 국교로 지정되었을 때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서 기울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박해를 안 받으니까 사람들이 핍박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박해라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박해에 너무 낯선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집안에서 예수 믿는다고 박해하고 우리 집사람은 중학교 때 교회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작대기를 가지고 막 두드려 패더랍니다. 중학교 애가 팰 데가 뭐 있습니까. 자매가 둘이 있는데 언니는 작대기만 들면 무릎을 딱 꿇고 난 안 갈 거라고 깨끗이 얘기하는데 둘째딸은 고집을 피우면서 난 갈거라고 작대기를 들고 쫓아오는 것입니다. 옥수수밭으로 도망가서 숨고 박해라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 한국사회에서 보면 집성촌이 있지 않습니까. 김씨들이 모여 사는 데 최씨가 들어간다? 그건 거의 고난의 연속입니다.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텃세라고 부릅니다. 김씨들이 이루고 사는 질서에 최씨가 들어가서 간섭을 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얼마나 이 박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면 박해가 없느냐? 아닙니다. 왜냐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면을 더 바깥으로 가져가 보면 반드시 박해라고 하는 현실을 만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담배 사 오라고 시키거나 술집에 가자고 갑질하는 사람 없습니다. 적어도 직장에서 그런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이게 좋은 환경이기도 하지만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랜드 박성수 회장이 직원을 뽑을 때 항상 절반은 신자, 절반은 불신자입니다. 왜? 신자들끼리만 모아 놓으면 그게 기독교 기업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망가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질서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역동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을 심하게 받을 때 ‘여기가 나의 본향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현세가 나의 영원히 있을 집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갔을 때 그 교회에 와서 클린턴도 예배를 드리고 그랬다는데, 오천 명 모이는 중국 교회인데 담임 목사님과 식사를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에 대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얘기해주는 겁니다. 문화혁명 때 젊은 신학생이었던 겁니다.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문화혁명이 닥쳤습니다. 피바람 나면서 수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15년 형을 받고 강제노동교화소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는 그냥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새벽부터 밤까지 죽도록 맞으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같이 15년 동안 가족들하고 통화한번 안되고 편지 한 번 왕래를 못하게 끊어 놓는 것입니다. 15년 형을 만기가 되어 출소를 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교회는 이미 벌써 폐쇄되었고 교인들은 다 흩어졌고 집에 가보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하나는 마약중독자가 되고 아내는 남편 끌려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고 아들 그렇게 되는 거 보면서 사모님은 화병으로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속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집을 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하면서 우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물으심이 자기 목회의 소명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통곡하면서 ‘예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불행해도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후에 그 두 아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게 공산주의자로 살다 마약중독자로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박해입니다.
신실하게 산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이 오는 것 같이 그런 식으로 공식을 만들어서 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 그런 사람도 너무 많아요. 영국에 이번에 갔을 때 이야기를 들으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 자녀들이 신앙이 없습니다. 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끝까지 자기 아들이 예수 안 믿어서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그랬습니다. 조형기 목사님 자기 아이 변화시켜주면 자기는 세상의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라도 주고 싶다고 그랬는데 다른 사람은 수십만 명을 회심하게 하면서 자기 자녀는 예수 안 믿습니다. 그런 아픔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결국 마치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산 모든 사람들이 대가를 이 세상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부패해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을 닫으면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 천국을 통째로 주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 복까지는 그 안에서, 천국 안에서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 뭐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핍박을 받는 사람은 내면의 세계의 특성 두 가지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우연히 똑같이 말씀하셨습니까? 글자 하나 안 틀립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똑같습니다. 하나로 문을 열고 하나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몇 가지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입니다.
뭐냐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전자는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의 마음의 결이 어떤가? 들여다보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파산선고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으면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내면의 결이 어떤가? 들여다보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뭐 때문에 가난합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파산선고 받은 자처럼 되어서 그 소원하나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는 마음의 결 내지는 내적인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가난함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세상에서 진정한 의미의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왜? 심령의 가난함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애끓는 한 질서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걸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박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주실 것임이요. 그래서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쁨을 함께 주지 않으시면 결코 박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거는 분명해요.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기쁨의 은사로 박해를 이기고 결국은 천국을 자기 안에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주님께 속해있다는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옛날 지나간 이야기지만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한국교회를 한 번 휩쓴 적이 있습니다. 윈 형제가 쓴 책인데 윈 형제의 멘토가 수 형제입니다. 우리 열린교회에도 왔었어요. 나하고도 대화를 하고 나한테 꽤 긴 편지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여기 우리 호텔같이 생긴 게스트룸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룻밤 묵으시면서 그러면서 수요예배 때 설교를 하셨나 그러고 가셨는데, 편지 내용을 나중에 번역해서 죽 읽어 보니까 구구절절합니다. 답장을 할 연락처가 없어서 답장을 못했지만 그걸 이야기해보면 박해를 받으면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이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풍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내적인 꿋꿋함. 그리고 경건한 긴장, 그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간 형제가 외국에 갔을 때 대화를 나누면서 마지막에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 수 할아버지가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줘도 되겠냐?’ 기도해 달라고 하고 무릎을 꿇었더니 자기를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를 해주는데 40분을 기도해 주더래요. 그게 바로 박해를 받아온 사람들만의 저력인 것입니다.
CRTS가 요새 박해를 많이 받고 있고 중국 목회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꼭 자기의 아픔처럼 생각하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하나님의 복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의 믿음은 더 순수해지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우리의 삶의 면적을 넓히면서 우리와 다른 질서 속에 하는 사람들과 함께 접촉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바로 그게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