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상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녹취자: 장미연
여덟 개의 복에 대해서 모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11절과 12절은 팔복의 부록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덟 번째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의 복에 대한 부연적인 설명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저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많은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팔복까지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면서 3인칭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11절과 12절에는 2인칭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때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록은 8절에 대한 연장이 아니라 팔복의 마지막 복에 대한 연장이 아니라 팔복 전체의 사람을 설명하고 나서 그다음에 전부 다 통틀어 요약을 하면서 팔복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운명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팔복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는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팔복의 사람은 참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잖아요. 지난번에 두 시간에 걸쳐서 설명을 했듯이 오르겐이 이미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자기표현이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애통하는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한다든지 이런 것은 해당이 안 되지만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해서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청결하고 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인격 안에서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참사람의 모본으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두 가지 보여주심. 하나님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을 보여주신 그 일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쉽게 이야기하면 인격의 내적 구조가 그 결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를 위해서 사시고 진리를 선포하시고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 모든 확장된 외연의 삶이 안으로, 안으로 응축되어서 들어오면 마지막에 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팔복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 팔복의 개념에다가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는 세상적인 행복의 개념을 여기다가 결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통해야 하는데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세속적인 관념에서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없어야 하고, 그리고 가난한데 천국을 누리고 있다라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아주 독특한 행복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책을 쓰고 준비하면서 제 마음을 많이 쿵 하고 울렸던 것이 행복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행복을 논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상당히 세속주의적인 것들이 많이 섞인 가운데 행복을 이야기하고 팔복의 사람은 그것과는 별다른 것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팔복의 사람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면 팔복의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 이 기독교의 행복론 속에서 두 가지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마음의 이 내적인 구조에서 시작이 되고 그것이 삶으로 펼쳐져 나가면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 여덟 가지의 복을 모두 정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거슬려 악한 말을 할 때 복이 있나니 상이 있나니 선지자들도 이와같이 박해했느니라”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이 세상의 사람들 속에서 섞여 살 때에 그 때에 그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라이브하게 이야기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순결한 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심지어 프루타크 같은 사람, 요세프스 같은 사람도 그때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고 사람들을 이렇게 훌륭하게 생각했는지 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는데 라이브하게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감화력을 느꼈던 소수의 사람들이 받은 인상이지 모든 사람이 받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렇게 신앙을 지키고 정결하게 살았던 기독교도들에게 왜 그렇게 끔찍한 박해가 가해졌겠습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사실은 그것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 하는 것에 달린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면 우리가 보기에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인데 어떤 이기심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해코지하는 것들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기심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명예욕 같은 것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남의 행복을 짓밟고서라도 자기가 행복을 누려야 되겠다는 그러한 자만심 같은 것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사람을 미워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이 자기들이 펼쳐져 나아가는 질서와 이런 팔복의 사람들이 그려가는 이 파문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화) 열린교회를 시작할 때 이수 초등학교 맞은편 지하실에서 했어요. 여러분들 교역자들은 다 아마 거기에 방문했을 겁니다. 나중에 들어오는 우리 직원들도 한 번 내가 한 번 시간나면 점심때 성지순례를 시켜줄게요. 가끔 갔습니다.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거기가 엄청난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교회의 뿌리에 대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어떤 일이 있었냐면 맨 처음에 교회를 그 자리에 잡은게 아니라 오산당 병원이라고 아십니까? 한국전력인가? 있는 그 맞은편입니다. 사당 사거리 교차로 그 위쪽에 골목이 있는 오산당 골목이고 그 골목을 쭉 지나가면 방배역 사거리 골목이 나옵니다. 오산당 병원이 있었는데 오산당 병원에서 약간만 성민교회 쪽으로 가다보면 하얀 건물이 있었습니다. 지하실이 마침 비어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형편에 지하실 밖에 갈 처지가 안됐으니까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건 뻔한 거였고 비어있는 건물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주 적당한 크기의 비어있는 건물이 나온 겁니다. 저도 가봤습니다. 옆에 있는 가게에서 종업원들이 나오면서 “여기 얻으시려고 그러세요?” “네” 그러니까 “저희가 여기 새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너무 잘하셨어요.”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기 사람들도 많이 들 왕래가 있고 뭘 하든지 참 잘 되실 거예요.” 너무 예쁘장한 아가씨가 둘이서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처음 만난 사인데 그래요. 고맙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아저씨 여기 오셔서 뭐하실려고 그러세요?” “교회를 하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안색이 싹 변하더니 “여긴 교회 하시면 안돼요.” “아니 주인하고 계약하는데 무슨 상관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네가 여기 교회 하겠다고 들어오면 우리는 건물 주인에게 방 빼달라고 해서 나갈 거예요.” 그러고 문을 쾅 닫고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퇴폐 이발소였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무슨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퇴폐 이발소가 만들려고 하는 파문의 결과 옆에 새로 들어온다는 교회가 만들려고 하는 파문의 결이 너무 다른 것입니다. 조금 아까까지 내가 그 밑에서 도넛 가게를 했더라면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두 파문의 결이 너무 다른 겁니다. 그 자체가 아주 격한 반감을 자아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당신은 왜 여기서 젊은 나이에 이런 직업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얘기를 했어요? 아니면 이 동네에 여기 퇴폐 이발소가 있네요? 얘기를 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교회 목사고 여기 교회 들어옵니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이유와 상관없이 내가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 또 내가 어떤 성격인지 자기네를 어떻게 대우할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싫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팔복의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자기 자랑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하는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거기서 말하는 너희가 이 팔복의 사람들을 염두해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빛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인은 모두 빛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부패한 역할을 하면서 사는데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평화를 깨뜨리는데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야기했다고 그걸 일률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은 동의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상적으로도 사실이 아니고 논리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너희” 하는 것이 뭐냐하면 모든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어도 이 사람 여기서 퇴페 이발소라고 하는데 옆집에다가 만약에 고급 양주집이나 술집을 차렸더라면 너무 손잡고 환영을 했을 겁니다. 퇴폐 이발소와 바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퇴폐 이발소와 양주집. 술, 술꾼들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여기서 이야기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하신 그 사람들은 결국 그런 것입니다.
소금이 됩시다. 아니면 무슨 빛이 됩시다. 운동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문장으로 직설법입니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이 세상의 빛이다.’ 그냥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너희가 누구입니까? 팔복의 사람입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 그러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퇴폐 이발소와 교회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만둔건 아니지만 이런 데서 이 사람들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교회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전화를 거는 겁니다. 여기 교회 들어온다는데 교회 만약에 세를 주면 우리는 방 빼겠습니다.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들어간 장소가 지금 이수 초등학교 그쪽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고 나면 행복합니다. 행복한데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완벽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었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줄 모르는 상태에서도 순수하게 사랑했습니다. 그 많은 여인들이 특히. 존경과 사랑을 예수님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까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게 팔복의 사람의 운명입니다. 최소한 여기서 어떤 걸 깨닫냐면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인간의 모형인 팔복의 사람으로서 마음의 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구조가 워낙 간고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구조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결이 그러니까 그 결을 거스른다는 것. 마음의 결이 확고하지 않을 때는 거스르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결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절대로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그게 마음의 결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확신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지금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보가 아닌 한 이미 2년 전에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것까지는 모르지만 나는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1인당 2천 달러씩 돈을 3억 5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헬리콥터 밴이라고 했잖아요. 달러를 마구 찍어내고 일본에서 전 국민에게 한 사람 앞에 백만 원씩 던지고 우리나라에서 30만 원, 20만 원, 10만 원, 5만 원 지방자치에서 돈을 막 뿌릴 때 그때 이미 이 모든 것들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무슨 생각을 못 하고 경기도에서 주는 10만 원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머리를 했습니다. 이발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동사무소가서 네 식구인데 백만 원을 받아가셔야 되는데 이 아저씨는 이름을 안 올렸냐?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아저씨는 자기 신념이 있어서 안 받는답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한 분도 계시네요. 준다는데 왜 안 받아요? 그러고 75만 원을 주더랍니다.
나는 받은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의 이 신념이 용납하질 않습니다. 정당하지 않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는 받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건 압니다. 나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일단 무엇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딱 갖고 나면 그것을 꺾는 것이 그런 이익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사람마다 다 각기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와 관계된 것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팔복의 사람이 이렇게 그런 내적인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그리는 파문하고 다른 파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세상에 대해서 뭘 괴롭히고 그러는 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만 의지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게 싫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 통치가 이루어져서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눈물을 쏟습니다. 그런데 그 꼬라지가 세상 보기엔 싫은 것입니다. 그 마음의 구조와 이 마음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까닭 없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냥 온유하게 살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리는 사랑의 파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존재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 못 만나봤습니까? 그냥 존재 자체가 싫은 사람. 왜 싫으냐 말할 수는 없는데 그냥 하여튼 설명할 수 없는데 존재 자체가 싫은 사람. 그냥 싫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향하여 그런 존재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봉사 많이 하고 기부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 많이 도와주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인이 세금 잘 내고 그렇게 하며 살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좋아할 거다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려내는 사랑의 질서가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게 거짓입니다. 불공정과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이니까 잘못할 수 있잖아요. 잘못한 것 만큼만 비난을 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많이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신문을 한 번 오래전에 봤는데 이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잘못해서 뭔가 누구를 속였던가? 폭행을 했던가?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사람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잖아요. 앞에 직업이 나오잖아요. 회사원 김○○ 29살 이런 식으로 괄호 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신문에 장로 김○○ 오십몇 살 이렇게 나온 겁니다. 장로가 직업입니까? 사업가, 정치인, 회사원, 업체 사장 이런거지 장로가 무슨 직업입니까? 처음부터 기사 쓰는 기자의 머릿속에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무얼 하는가 하는 것보다도 뭘 믿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장로라고 써놓고 이러이러한 나쁜 짓을 했는데 그 사람 이름이 누구이고 장로이고 몇 살이다. 그게 뭡니까? 그런식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부당하게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거의 집단 린치를 당하듯이 조금 잘못했으면 그 조금한 것에 대해서 정당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되잖아요.
여러분들 학교 가서 잠깐 아이하고 떠들었는데 기절할 정도로 대걸레로 때리면 여러분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교사 한 사람이 아이를 그렇게 때려서 1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붕붕 소리가 나면서 때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애가 뭘 잘못했는데 너 왜 그랬어?” 그러고 선생님이 “그러지마” 그러고 야단을 치고 이놈하고 했으면 징역 안 갔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잘못한 것에 비해서 너무 과다한 처벌을 몽둥이를 휘둘리면서 때린 겁니다. 1년 징역형에 처해진 겁니다. 교사 자격도 박탈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세상의 정의 원칙인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것들이 무자비하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는 박해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구를 비교하냐면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선지자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 선지자 이야기를 보태셨을까요? 굉장히 심오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그야말로 당 시대의 사람들에게 박해를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모세오경을 기준으로 오늘날 시대에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된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그러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박해가 없었느냐? 말 안 하고 숨어있어도 찾아내서 죽이고 박해하고 고문했습니다. 그런 존재인 것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구조를 표현을 안해도 그런 선지자로서의 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에 빠져서 그려내는 파문과 선지자들이 밖으로 발설을 안 해도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이 파문이 그 존재가 주는 파문 그 자체가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선지자들을 선지자라는 이유 때문에 미워한 것입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중에서 가장 비참하게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왕이 순교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대게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일어나는 이 일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너희는 나를 닮아라. 그것이 너희의 진정한 행복이니라. 그런데 너희가 나를 닮으면 행보하겠지만 세상에서의 박해는 따놓은 것이다. 너희들이 그것을 각오하라. 그런데 세상이 주는 박해의 고통은 나를 닮는 이 팔복이 주는 행복의 비견될 수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천국에서 상이 크다”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상급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이것은 하나의 ‘accomodation’으로서 수준이 낮은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상이라고 계속 말씀하시지만 ‘천국에는 상 같은 것은 없다. 그건 인간의 탐욕이 이 세상에서의 지위와 영광을 하늘 나라에다가 투영한 것이지 천국은 완전한 만족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칸트 이후에 이런 해석들이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그런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 의하면 천국에는 분명히 상급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모든 사람이 다 도달하는 상급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받는 상급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상급이 각각 다르다. 단, 그 영광이 각각 다르고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천국에서 다시 이 땅에서처럼 서로 시기하고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고 상실감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끼고 우월의식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는 그런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것이 개혁 성경에서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놓고 보면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진정한 기쁨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인격이 마음의 내적인 결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깊이 닮아서 그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누리던 그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박해를 통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입니다. 보면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어제 설교한 것처럼 가족 구성원들 간의 결속력이 강하고 특히 존중히 여김을 받던 사람들은 대부분 멘탈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되어있는 사람들이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평화를 깨뜨리는 그러한 열등한 성격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상처도 잘 받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상처를 받아서 낙심하시거나 이러한 장면을 본적 있으십니까? 제자들이 다 배반할 걸 아셨는데도 예수님은 별로 관심도 안 가지십니다. “네가 나를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돌이키게 될 거다. 그러고 나면 너는 형제를 굳건히 하거라.” 남의 말 하시는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당신은 사랑하셨지만 당신은 누군가의 사랑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 생애의 그 성경 구절은 중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너 아무리 그래봐야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거야.’ 그런데 그걸 남의말처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도 널 용서해주겠다. 이런게 아니라 ‘너 나 세 번 부인할거야. 그런데 돌이킬거거든. 그 다음에는 형제들을 네가 굳게 하게 될 거다.’ 그러고 남의 말처럼 말씀하시는데 일체의 상처를 안 받으십니다. 상처는 부당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에게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적인 구조에 순종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시인 윤동주씨도 예수를 행복했던 사나이라고 묘사한 의미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보람은 그를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서는 결국은 우린 두 가지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존재만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지를 막 꽂았는데 교회에 전화를 해서 육두문자를 막 한 30분쯤 욕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전도지를 보고 화가 난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화가 원래 나 있는 사람입니다. 전도지는 그 구실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게 바로 팔복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우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고 주눅이 될 필요도 없고 더욱이 세상 사람들에게 막 신문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칭찬을 받는다고 희망을 갖거나 우쭐해 할 필요도 없고 욕을 먹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성은 하지만 그 장단에 춤을 출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을 감동시킬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라 아니라 내적인 인간의 정신의 구조가 팔복의 사람들로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팔복의 사람으로서 일체의 윤리적인 결함이 없이 사랑만 하셨던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이 미워했는데 그러면 거기에 윤리적인 흠들이 많이 묻어있는 새벽에는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아침에 가서 청소하고 1시간 했는데 2시간이라고 그렇게 시간을 거짓말로 쓰는 그런 상반적인 비윤리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그런 모순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직면해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소화해내고 자신이 믿는 신앙과 삶의 윤리의 일치를 이루어낼 것인가? 그리고 내 마음에 내적인 구조가 간고해져서 그래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내적인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숙제로 남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는 행복의 어떤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번영 신앙의 시대를 지났습니다. 나중에는 신번영주의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번영하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행복해진다라는 생각으로 번영주의 복음이 시작이 되고 그다음에 그런 관점을 물질적인데서 정신적으로 옮기는 신번영주의적인 생각들이 다시 또 고개를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행복관과 여기서 팔복이 이야기하는 행복관 사이에 조화를 이루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설명이 굉장히 안 됩니다. 더군다나 완전히 행복을 누렸던 그리스도 예수조차도 그런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행복하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분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건 무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잖아요. 그분은 완전한 행복으로써 이 세상에 오셔서 고통을 당하셨지만 행복하셨고 또 모든 사람에게 그 행복을 주시고 싶으셨는데 그럼 그 행복을 물려받은 사람도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던 것처럼 박해를 받는다고 지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처음 받는게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이 다 그렇게 받은 것이다. 그들이 행복의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팔복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내리는 결론은 우리의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삶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가장 큰 기쁨이 내가 하나님 가까이에 있다는 기쁨입니다. 가까이 있다는 기쁨의 정체가 인격적인 닮음입니다. 인격적으로 닮고 그 닮은 인격 속에서 느끼는 교화감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만나서 사귈 때에도 성격이 비슷하고 관심사가 비슷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합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관심이 똑같이 경제입니다. 그리고 취미생활도 비슷합니다. 그러면 끝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8시간 거리를 벌써 왔나? 할 정도로 그렇게 교감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그런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간고한 내적인 결들을 형성하게 될 때 세상으로부터 받는 그 박해 같은 것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가치관과 인격에 대한 항의가 정말 올바르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확인하면서 이 세상에서 ‘아, 역시 나는 나그네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기도 했지만 오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하면서 그런 거룩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