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6._교직원예배
생명보다 나은 것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3-4)
녹취자: 최연희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었을 때라고 했으니까 뭐 십중팔구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때에 쓴 것 같습니다. 되게 그렇게 다들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제 고통받는 시인의 아주 독특한 마음에 결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간절히. 히브리어로 ‘바카쉬’라고 하는 단어인데 ‘찾는다’라고 하는 일반적인 그 뜻도 있지만은 그 이제 여기에서 사람이 정신으로 ‘찾는다’라고 할 때는 그냥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둘러보는 것 같은 그런 동작이 아니라 집중입니다. 집중. 그러니까 ‘찾는다’라고 하는 그것은 그것만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카쉬’의 의미입니다.
여기도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자기의 찾는 그 심경을 마치 그 사람이 그 물이 없어서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그 물을 찾는 것처럼 거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기가 주님을 간절히 찾는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신앙생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정말 공정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그는 만나주시지만 아무리 오래 하나님을 믿고 그 아이와는 비교 안 되는 신앙의 경륜을 가지고 있어도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그를 피해가시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어린 아이를 만나주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섬기고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일이 아니라 성도로서 교회를 찾았을 때에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자주 들었는데 목회를 하고 일을 하고 그 일이 교회와 얽히고 자기 정신과 이 마음에 관련되고 하면서 사실은 몸으로는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신을 이제 이 시인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어떻게 보면은 성경 전체의 속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겉을 보면은 피부가 보이고 몸이 보이지만 그런데 사실 속을 보면은 그 사람의 내적인 구조가 드러나듯이 마찬가지로 이 시편은 인간을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러한 그 신앙의 내밀한 세계들을 우리에게 많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교구들 어거스틴은 물론이고요 어거스틴이 사랑한 성경이 진짜 시편이었고 루터도 시편을 엄청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제롬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히에로니무스도 시편을 아주 사랑했고 그 위대한 교구들이 그렇게 시편에 천착했던 이유가 그런 깊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 정신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2절에서는 우리에게 뭘 보여주냐 하면 이러한 간절함이 성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소와. 그래서 하나님의 집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당시에 성전이 없었으니까 성막이었습니다. 거기에 수시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또 멀리서나마 그 성소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거룩한 날을 지키고 하던 그 회상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할 때 이 시인을 비롯한 구약의 경건한 인물들 가운데에는 항상 한 장소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장소에 대한 개념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영혼의 고향의 개념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지키는 거룩한 주일 거기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교제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은혜, 감격 이런 것들을 유지하면서 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3절로 넘어오면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인자는 뭐 헤세드에서 하도 수없이 설명했으니까 제가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헤세드는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과분한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헤세드가 결국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인자 이 속에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다발과 같은 성품들이 모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단 말입니다. 사랑하면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그냥 사랑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이상하지만 무색무취의 기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너무 사랑하는 그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연민이 확 솟아나는데 그것은 무색무취한 색깔이 아니라 또렷한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자면 그 뭐라 그럴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뭔가 뭐라 그럴까 그릇된 길로 가요 오류에 빠집니다. 그러면은 그 사랑은 무색무취한 기체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선명한 빛깔을 띠면서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를 진리로 지도해서 그 오류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대충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환하게 그래서 사랑이 무색무취의 기체라면 그 성품의 다발과 같은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확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자는 그 모든 것의 총계입니다. 총계, 총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있는데 속성을 다발처럼 묶어놓은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 베품 그 사랑을 받음, 이 모든 것이 인자라는 헤세드로 다 통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가장 큰 제목이 뭐였었냐 하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무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송 절대적인 그 격차에 대한 하나님의 찬양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그 인자를 베푸신다는 것 그 인자는 각각 사람마다 너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로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미끄러져서 죄를 향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나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다발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의 개념이.
그러니까 다윗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주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습니다. 이 인자는 주님의 인자고 생명은 자기의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이 시절에 이제 아마 왕으로 소명을 받고 그리고 유대광야를 헤매면서 사울의 자객들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육체의 생명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인자가 더 나았습니다. 더 훌륭합니다. 더 좋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런 경우에는 자기의 육체의 이익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거나 버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니까.
그래서 결국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욕망에 있는 것입니다. 욕망에. 그러니까 자기의 육체를 하나님의 인자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그네와 행인같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 앞에는 끊임없는 고뇌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면 자유로워질수록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작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아 그렇구나. 인간이 자유롭게 자유로운 주체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외부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은 아니구나.’ 그래서 오히려 이제 그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코액션(coaction),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강제에 의해서 인간이 부자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서 주체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환경과 싸우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과 함께 그렇게 환경과 더불어 악착같이 싸우면서 자기 자신 안에 아주 사악하게 얽매인다고 하면 그는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더욱 속박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을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악과 싸우기 위해 종교개혁의 기치를 넣어 비틀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개혁을 외쳤던 사람들의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그 끔찍한 악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르라치게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안에 생겨나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이 결국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의 육체의 생명보다 낫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리느니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다윗이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영혼의 자유를 얻을 때 ‘나의 입술이 주를 찬송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입술’이라고 하는 것, ‘입’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몸 전체가 꽃다발이라면 그 성경에서 입은 꽃송이입니다. 꽃송이. 그런데 그게 악인의 경우에는 모든 자신의 악을 자기의 마음 안에 묻어 두지 못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것입니다. 밖으로, 입술을 통해서 말로 쏟아내고 그다음에 행위를 통해서 바깥으로 끊임없이 표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어떻습니까? 의인은 끊임없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의 충만한 경험을 입술을 통해서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자기 속에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경험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다음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인자가 평화를 추구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할 때에 그 사람에게 푹 빠지게 되는 게 무엇 때문에 빠지게 됩니까? 무엇 때문에 빠지게 됩니까? 아름다움 때문에?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인지하게 됩니까? 최성기 목사는 결정적으로 남녀가 이렇게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푹 빠지게 되는 게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푹 빠지게 됩니까? 빠지게 된다는 것은 여기서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보면 뭐 얼굴이 예쁘면 일방적으로 풍덩 빠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근데 뭐냐 하면 건져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사랑이 성립하지 자기 혼자 투신했는데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에 빠지게 됩니까? 어떻게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마음속에 불꽃처럼 터지게 됩니까? 이유를 말하기가 어렵습니까? ‘말’입니다, ‘말’. 그러니까 말을 할 때에 그 때에 사랑으로 들떴던 좋은 감정들이 확 방향을 정하고 거기에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말에. 그런 말이 생략돼 있으면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바로 들어간다든지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입니다, 말. 그 말 때문에 사람에게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경에서 이 입술이라고 하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냥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라 아주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입술의 열매를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 심지어 신약으로 넘어오면 ‘입으로 네가 시인을 하면’ 입, 입, 입, 입. ‘입’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성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악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입과 이 내면의 세계가 아주 쉽게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에 오는 말을 막 쏟아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경우에 하나님께 감동이 없는데 입술만 계속 떠드는 것입니다. 그게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항상 진실한 사람은 입술과 이 마음 자체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세 번째 도달하는 작은 결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의 생명보다 소중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사랑할 일을 잃어버린 생명은 사실은 영혼의 생명을 상실한 육체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생명은 우리의 영혼이요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사모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일에 익숙해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충만해져야 한다 이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에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나의 평생에’ 그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이제 ‘나의 살아있는 날에’, ‘나의 생명의 날들 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을 이제 ‘평생에’라고 번역하는데 그냥 이것은 그 히브리어의 표현인 ‘아드 올람’이라고 있는데 그것이 ‘영원히’라는 뜻입니다. 그거하고 거의 똑같은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차이점은 ‘아드올람’은 이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베이야밈하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와 관련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아있는 모든 날들 안에 그래서 앞에 콜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의 모든 날들 안에 내가 주를 송축할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단순한 시간의 길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째로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그 시인들의 그 아주 흔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나 자신을 공짜로 통째로 당신께 드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하나님을 향해 숨겨놓은 것 없이 모두 하나님께 바치는 그 동작을 이런 식으로 부사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곱씹으면서 읽으면은 시편이 어떤 맛이 되냐 이런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소고기를 먹는데 A, A+, A++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A+++, A+++++까지 갑니다. 그리고 1등급 안에도 아홉 개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A++안에도 아홉 개 등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등급을 이제 먹는 것과 아주 싸구려 고기를 먹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가격부터가 벌써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씹지 않고 먹으면 어차피 두 고기 다 똑같습니다. 씹을 때 질감도 느껴지고 식감도 느껴지고 거기서 나오는 육즙과 모든 신선한 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냥 이렇게 뚝뚝 잘라서 꿀꺽꿀꺽 삼키면 우리 코코가 먹듯이 그렇게 삼키면 그러면 아무 고기 먹어도 다 똑같습니다.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기 직원들은 별로 해당 사항이 없지만 여기 교역자들에게 얘기하는데 힌트를 하나 주자면 깊이 있는 설교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뭐냐 하면 공부를 많이 해서 모르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게 깊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렇게 사람들이 계속 꿀꺽꿀꺽 삼키던 고기를 자기가 이렇게 꼭꼭 씹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있는 의미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도 충고했지만 워드(word)스터디를 많이 하라고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단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라, 그 단어에 신학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라, 그러면 굉장히 설교가 깊어진다. 그런 의미를 많이 알고 있으면은 설교를 한 시간에 한 절을 하기가 너무 버거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 평생에’ 라고 하는 것도 시편에 굉장히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뭐 역사 속에서도 많이 나옵니다. 그가 평생에, 평생에, 평생에 그러면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의미들이 다양한 문학적인 뉘앙스의 층차를 가지고 있지만 하여튼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분량적으로 자기 자신을 통째로 하나님께 모두 드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것도 사사로이 감추는 것이 없이 그렇게 자신의 평생에 유일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겠습니다.’ 송축한다는 것은 뭐 특별히 모를 게 없는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겠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이제 ‘손을 듭니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이렇게 추측합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찬송의 의미와 두 번째 이제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뭐 둘 중에 하나만 생각해도 되고 둘 중에 하나를 생각하고 하나로 그냥 말한다면은 송축한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이게 병행법입니다. ‘주로 말미암아 손을 듭니다’라고 할 때 기도라기보다는 찬송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보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굳이 누가 찬송만이 아니라 기도도 포함된다고 이야기하면은 굳이 반대할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문학의 흐름으로서는 ‘찬송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병행법의 표현으로서 이제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 송축하며 손을 들리다.’ 두 개가 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가 손을 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신나니까 그냥 너무 기뻐서 손을 들면서 주님을 함께 높이는 것입니다. 시인의 소망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영광 그것을 보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여기 구역장들도 많이 있고 순장들도 많이 있고 교역자들도 있으니까 같은 심정일 거 아닙니까? 최고의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우리 구역에 우리 순에 형제자매가 뭐 몇 년 동안을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그랬었는데 사경회 때 주님을 깊이 만났다고 하더라 그럴 때 이제 그런 회심을 통해서 높아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지명수배 받아서 도망을 다니는 유다 광야에서 이런 정신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이 사람을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데 그럴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기 딱 좋은 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기 너무 좋은 때인데 내가 언제 기름 부어 달라고 했습니까? 기름 부음만 받지 않았어도 내가 사울하고 원수질 일이 없었는데 내가 이러고 다니는데 이게 도대체 언제나 끝나는 것입니까? 뭐 말할 수 없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육체적으로? 안전을 위협받으면서 그렇게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자객에 쫓기는 가운데 도망을 다닙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기 전에 이런 도망의 시간을 통해서 철저히 하나님 앞에 세우시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훈련을 시키시면서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께서 왕위에 앉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합당한 그릇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달하는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환경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을 불꽃처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불꽃으로 시련들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큰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도한테 편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자녀가 암에 걸렸는데 그래서 너무 불쌍해서 이제 편지도 써주고 간절히 기도해줬는데 아주 정성들여 쓴 그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론이 뭐냐 하면은 살면서 이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르더라고 합니다. ‘이런 시련 없이 옛날처럼 살고 싶으냐, 이런 시련과 함께 하나님과 특별히 동행하고 싶으냐?’라고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질문 앞에 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을 받아도 주님과 함께 특별한 길을 가고 싶습니다.’ 이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련에 휘둘리거나 어려움에 억눌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불꽃처럼 자신의 믿음을 살라서 믿음의 불꽃을 발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녹여내는 찬란하게 빛이 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걸어갈 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네 가지를 기억하면서 사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