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 6
포도주와 소주를 먹지 아니하며(눅1:15)
“이는 저가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말씀 증거자로서 보내시기에 앞서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시는 가운데 특별히 그에게 세 가지로서 하나님께서 준비를 시키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경이 오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먼저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평탄케 하는 것, 이사야 40장에 나온 데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내가 무엇이라고 외치리이까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마침내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영광을 보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그리고 낮아진 마음은 돋우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평탄케 되어지는 일들을 이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뭘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그 입을 통해 증거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 그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받은 마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캄캄하게 400년 동안 하늘이 닫히고 주님의 음성은 그쳤습니다. 선지자들의 선포가 있을 때도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을 살았는데 400년 동안 하늘이 닫히고 그리고 계시가 그쳤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와서 이 세상에 증거해주는 선지자의 선포가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400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말씀하신 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닮고 싶은 사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윗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흐르다보니까 요나단이 훨씬 멋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바울을 한때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오히려 바나바가 더 훌륭한 사람 같았고 바나바를 좋아하다가 또 마가가 훨씬 훌륭한 사람 같고 오락가락하다가 한 7년 전에 정착했습니다. 그게 누군가 하면 세례 요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았지만 그러나 요한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말씀 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우리들의 모본이 다른 성경에는 없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그것은 이 사람은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처럼 이적을 행하므로 커다란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직접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했다는 점에서 모든 선지자들 위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세력을 규합한 것이 아니라 오직 준비한 말씀을 외치다가 그 외친 말씀 때문에 죽어갔던 그런 선지자의 모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을 보면 참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는 이 놀라운 일을 예언하는데 있어서 세례 요한을 세 가지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첫째는 주 앞에서 큰 자로 남게 되었다. 이게 작년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인가 하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으셨다. 세 번째 것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만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며” 한 것은 요한이 누가복음 1장 80절에 보면 갓난아이 때 광야로 보내집니다. 그래서 거기서 30년 가까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거기서 영력을 쌓고 거기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듣게 되는 하나의 영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말씀 선포자인 세례 요한의 영적인 권위의 준비에 대해서 증거 해주는 것이라면 오늘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이 말씀 증거자, 마지막 증거자 세례 요한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 증언자로서의 요한의 삶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토록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준비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능력 있는 선지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과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포도주는 물대신 마시는 음료였습니다. 소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되어있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시케라이’ 약간 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합니다. 알다시피 자연적인 포도주 속에서도 숙성된 포도주에는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아주 귀해서 옛날에는 우비때 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두고 음료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물이 귀한 지역이었습니다. 수질도 아주 좋지 않아서 땅을 파도 그 물을 계속 먹으면 다리가 퉁퉁 붓고 그 다음에 쓴물이 되어서 먹을 수가 없는 그런 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주를 만들어왔고 그것을 음료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난받으신 일이 “너희 선생은 어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랬습니다. 마신 것이 포도주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포도주나 소주의 용도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제재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영적인 인물로 준비시켜서 주 곧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요한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는 삶이었다. 하였습니다. 주님도 거침없이 드셨던 그 포도주와 소주를 왜 요한은 안 마실 것이며 그 안 마시는 것이 주 곧 하나님께로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을 이루는데 중요한 준비가 되는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대답을 위해서 그가 사도들과는 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에 마지막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율법 아래 태어난 선지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신약이 뭐라고 가르치는지를 가지고 설명해서는 안 되고 율법이 뭐라고 그러는지를 가지고 설명해야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6장을 보지 않고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민수기 6장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포도나무 소산의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 것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만 드려진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이 왜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되는지 그런 것까지도 따져볼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나실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이 나실인들은 하나님 앞에 특별히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율법이 모든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명하는 것들을 나실인들은 혹은 지켜서는 안 되거나 혹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 하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엇입니까? 성경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부모가 죽었을 때도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나실인들은 하나님께만 드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는 이 요한에 대한 예언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어떠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언인 것입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질 재물과 같이 살아가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실인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자신의 인생을 드리기 위해 몸을 구별하였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시신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생이 그럴 것이라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그 일만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되어야 할 인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역자 된 말씀의 증인된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 되어야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로 요한의 인생은 하나님께만 드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꿈도, 그의 소망도, 그의 모든 기대도, 그의 마지막 목적도 모두 하나님 한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만 드려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먼저 그는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이 ”나자르“라는 말입니다.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파도시와(?)비슷한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이 쟈르다. 짤라내다. 라는 동사 카도시에서 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헌신된 인생이 되기 위해서 먼저 세속과 구별되는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 위한 좋은 비전과 훌륭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를 위해 살기를 원하는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늘 찾으시지만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 이것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나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에 있어 보여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완전한 헌신으로서의 삶을 나실인과 다름없이 요한이 살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속된 것과 완전히 구별된 진정한 거룩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따로 떼어놓은 일에 익숙해져있습니다. 헌신을 익숙하게 알고 있으나 거룩함은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출생에 관한 예언과 그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갔던 그의 생애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집을 떠났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며 도전하는 광야의 선포 사역으로 보건데 우리는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뒤에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요단강에서 주의 진리를 증거하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로부터 사랑하는 부모와 그리고 이웃과 그리고 친지의 곁과 그리고 화려한 예루살렘 곁을 떠나서 모래바람이 불고 있는 황량한 유대벌판에 서서 그곳에서 훈련받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고독과 씨름하고 그곳에서 외로움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모든 기대와 사랑을 끊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모래바람이 귀에 친구가 되어주었고 광야에서 일어나는 외로운 흙먼지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속에 들리는 이 거룩한 진리에 자기의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 자라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증거하는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매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갔습니다. 온전한 거룩함을 위해서 그의 모든 생애를 붙잡힌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자가 없고 요한이라는 그 이름은 어렸을 때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이제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그는 누가 한사람에게도 명함을 내밀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이 많은 세월을 광야에서 외로운 훈련과 연단으로 그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 광야에서 수염이 더부룩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리고 약대 털옷이나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모래바람 날리는 황량한 벌판에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영적인 훈련과 연단을 받았을까요?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 그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떠나서 외롭게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말씀과 기도로 광야의 생활을 지내어야 했습니까? 외롭고 피나는 광야의 훈련이 끝나면 그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의 생애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인생이었고 그 짧은 시간동안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몇 편의 설교를 위해서 그의 인생이 철저히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오직 우리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매어있었습니다. 우리처럼 목회의 성공의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학위를 목표로 세우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었고 꿈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고 소망은 오직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져야 하리라. 그는 결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적지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 다리를 지나 강을 건넌 후에는 다시 그 다리를 돌아보고 그리워하지 않는 것처럼 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를 원했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의 선포에 귀를 기울여주기를 원했지만 일단 자기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서는 잊혀지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선포와 증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의 생애는 어떠해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는 온전히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의 완전한 헌신은 세속과 구별됨으로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요한의 인생에 대해서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 나실인의 구별에 대한 예언을 기초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초라한 들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흔히 누리고 있던 모든 문화적인 해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토록 좋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인생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그 사실을 빌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그것이 그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로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메뚜기, 석청 그리고 약대 털옷, 어떤 사람에게 요한이 이렇게 살았다고 하니까 화려한 삶을 살았군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천연모피에 무공해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교수님 자연 꿀이 얼마나 비싼 줄 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지금이야 천연모피가 비싸지만 들판에 죽어간 약대 가죽을 벗겨서 입은 그 옷, 그것은 자색 옷도 아니었고 고운 베옷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조건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역사적인 선포를 시작할 때 누가 그의 옆에서 목회의 동역자가 되어주었을까요? 누구의 소명을 받았나요? 누구의 추천서를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광야에서 요단 강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일생을 살았을 때 성경은 말하기를 유대와 요단강 사면에서 예루살렘과 요단강 사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왔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백성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단번에 그의 선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권세 있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의 설교를 그렇게 능력 있게 하였습니까?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기에 그 시대에 흔히 통역되었던 세리들이 늑징하는 것,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군병들이 강포하던 것,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탄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 그의 마음에 분노와 아픔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돈을 빌미로 첩을 삼고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는 헤롯왕의 축적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으로 떠올랐기에 그 설교를 하면 죽을 텐데 그 설교를 하고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비명에 갔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의 풍조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세속과 구별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안일한 그 시대의 종교계의 풍조와도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과 그 시대로부터 그를 구별해놓았던 것입니다. 헤롯은 그의 정치적인 적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받음이더라. 이것이 바로 패역한 헤롯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한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웠습니다.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와 그 시대의 교계의 풍조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경건을 빼놓고는 요한의 인격을 생각할 수 없고 의로움을 떼놓고는 그의 삶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품은 그의 내면속에 자리하고 있는 거룩함과 구별시켜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웠기에 (?)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경건했기에 그 시대의 타락은 그로 하여금 도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탈 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졌다고 말했습니다. 도덕적인 사회가 되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그가 마음 아파하고 책망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순결했기 때문에, 그의 심령이 거룩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불의가 그에게는 유독 아픔으로 다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직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직이 성직자를 만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직은 성직이고, 성직자는 성직자입니다. 성직이 결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거룩하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 거룩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일들도 그 말씀의 사역자들로 저절로 거룩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 들어와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그분과 빈들에서 외로움 속에서 세상에 대한 모든 소망을 끊고 그분의 거룩함 앞에 마주할 때 우리가 비로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헌신에 있어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나실인은 부모 형제가 죽을 때도 그 시신에 가까이 갈수 없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일반원칙에 비추어볼 때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율법과는 다른 특별한 율법 아래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시대가 아무리 변화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이렇게 나실인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하나님을 믿는 평범한 성도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불러내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내신 것은 여러분들이 바로 마음과 삶과 인격이 다른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과는 구별되도록 나실인처럼 구별된 헌신으로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야 하고 혼탁한 이 교회의 풍조로부터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약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 주께서 이런 나라를 바벨론의 심판의 칼 아래 붙이기 전에 예루살렘의 상황입니다. 거룩한 도성, 율법이 시온에서 나게 하는 그 예루살렘의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타락한 도시를 보십시오. 무엇이 그때 예루살렘과 다릅니까. 우리가 이 같은 도시의 정신과 시대의 풍조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불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고민하고 고통해보지 아니하는 설교자가 어떻게 민족의 죄악을 가슴에 쓸어안고 가슴을 찢으며 거룩한 성전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거리 사이 성전 문 앞에 주저앉아 가슴을 찢고 고통하며 수염과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였던 에스라와 같은 선지자가 될 수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서 누가 이 민족을 향하여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를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어리석은 시대가 누구의 말을 듣고 가슴을 칠 것이며 누구의 음성을 듣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타락한 죄악의 물결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흘러들어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모든 풍조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지은바 된 새사람을 입어야 될 것입니다. 결코 이 시대 속에서 여러분들을 통하여 증거 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 주 오실 길을 예비 하고 거룩한 구속의 십자가 앞에 강철같이 굳어졌던 이 백성의 뺨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구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초라했습니다. 외모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요즘에 이토록 탐내는 학위도 없었습니다. 훌륭한 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장도 없었습니다. 길목이 좋고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목회지가 그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노회장의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동역자도 없었고 개척멤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외로운 광야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처음 외치는 그 음성은 광야를 휘돌아 지나갔지만 그 말씀은 살아서 예루살렘과 요단강 건너와 모든 사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선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고 외침은 회중들의 영혼을 두드리는 강한 설교였습니다. 유대백성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모두 무릎을 꿇고 굴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할 것도 없는 짧은 인생은 자기의 목을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에게 선물거리로 주기 위해서 잘라졌습니다. 소반위에 담겨져서 하나님 앞에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포는 살아서 그 시대를 뒤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 오신 그 앞길을 사람의 마음속에 예비했고 400년 동안 닫쳤던 하늘의문을 열고 하늘로부터 그 빛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오신 그 빛을 사람들에게 믿어지게 만드는 위대한 일들을 함으로 750년 전 피를 통하는 아픔으로 외쳤던 이사야의 메시지를 이루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요한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까?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기에 그것이 그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살기를 원합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액자에다가 어떤 사람이 “하면 된다.” 이렇게 써놓은 사람은 ‘매일 해도 안 되는 사람이 그 집에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실하자” 그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이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성실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에도 액자가 하나 있습니다. 커다랗게 하나 걸어놓고 매일같이 하루에 세 번 정도 그 앞에서 그 액자를 읽습니다. “설교자의 기도” “하나님이여 면류관이 쓰일 내 머리끝부터 복음을 신을 이 발끝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흐르고 있다면 그 피를 출혈시켜주옵소서. 내 몸에 있는 살 중에서 단 한 점이라도 주를 위해 찢기기를 싫어하는 살점이 있다면 예리한 칼로 그 살을 도려내어주시옵소서. 나의 몸과 나의 모든 영혼이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은 이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두운 한 시대를 하나님께서 깨우신 그 손에 붙들린 요한은 삶을 모두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마음이 열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일, 이것이 그가 살아있는 이유였으며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공경하며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에 녹아지고 마침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온 땅을 덮는 이것이 요한의 소원이었기에 그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하나님 앞에 소원했던 것처럼 그는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름은 빛났고 그의 이름은 쇠하여갔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그의 생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혔습니다. 자기가 다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것, 그것이 그의 유일한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