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행복론의 역사
녹취자: 박나리
감사합니다. 많이 모이지 못했지만, 인터넷으로 들어와 있는 분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빨리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주제 강연이라는 것은 운만 띄어놓고 나머지 세부적인 것은 전문 강사들이 하는데, 저는 기술적인 학자는 아니고, 기독교 행복론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것이 또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되는 한 사람입니다. 또 행복에 대해서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로서 기독교 행복론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행복론의 역사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 행복론과 기독교 아닌 일반 영역에서 행복론이 많이 겹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부에서는 서구 철학사에 나타난 행복 철학, 그것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다룹니다. 중세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거의 주도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사상사 속에 나타나는 행복 신학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것은 다른 데는 그만두더라도 중국 역사에서 어떻게 행복을 다루었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취급하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그런데 너무 분량이 많으니까 우리가 대체로 익숙한 서구 사상사만 가지고 우리 한번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헬라 철학에서 보면 목적론적인 행복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사는 삶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삶이 되려면 어떤 원칙에 입각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보고 무엇인가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최고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런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복을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습니다. 그다음에 현세에서 삶에 그래도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이걸 ‘헤도니아(Hedonia)’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양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는 ‘테오리아(Theoria)’와 그다음에 ‘에티카(Ethica)’의 문제인데, ‘테오리아(Theoria)’는 그 무엇인가 최고선을 지성적으로 관조하는 것 없이는 우리들이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결국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나 하나만의 완전히 주관적인 문제도 아니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주관과 객관 사이를 걸쳐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에티카(Ethica)’의 문제도 대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고대 철학에서 보면 도덕과 도덕을 따르며 살고 그러면서도 뭔가 자신의 것을 생산하는 즐거움, 이것을 우위에 둘 것이냐 아니면 우주적인 질서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선, 그것에 기초한 행복을 우선으로 둘 것이냐 하는 것 사이에 논쟁들이 있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좋음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삶,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행복에 관한 것은 소위 얘기하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잘 개진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해설하는 것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배경이 되는 철학적인 역량을 과시하던 것이 17세기에도 이미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여섯 가지 지성의 덕이 있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봤는데, 그것이 ‘에피스테메(Epistēmē)’,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 그다음에 ‘누스(Nous)’, 그다음에 ‘소피아(Sophia)’, ‘테크네(Techne)’, 그다음에 ‘프로네시스(Phronesis)’입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프로네시스(Phronesis)’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걸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몸에 배어서 성형되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저것이 신약 성경에서는 ‘프로네마(Pronema)’로 등장을 하게 되고, 그것이 존 오웬의 신약에서는 ‘더 프레임 오브 하트(The Frame of Heart)’라고 해서 마음의 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서는 ‘프로펜시티(Propensity)’나 혹은 ‘텐던시(Tendency)’, ‘디스포지션(Disposition)’, 이런 용어를 가지고 나타나는데 대개 ‘프로네시스(Phronesis)’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합리한 감정과 욕구를 다스림으로써 품성적인 덕인 ‘중용’에 이르게 되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았습니다. 플라톤하고 다른 것은 덕스러운 삶의 부수적인 요건을 너무 초월적인 데로만 가져가지 않고, 육체적인 선, 외부적인 선의 필요성까지도 제시하는 그런 융통성을 보였다고 우리가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일원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유물론적인 세계, 영혼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덧없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인간의 감정이 기쁨과 슬픔의 격동을 계속 겪는다면 안정이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이 ‘아파데이아(Apatheia)’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재밌는 것이 어떤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스토아 철학이 융성하면서 결국은 로마는 말로에 접어들었고 하며, 그런데 이상하게 요새 미국에서 스토아 철학이 유행한다고 해서 별로 안 좋은 조짐이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스토아 철학은 굉장히 어떻게 보면 우리로 보면 불교적인 사유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성적인 정념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이렇게 봅니다. 운명을 겸손하게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 스토아 철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휴먼 네이처(Human Nature)’입니다. 그런 그것을 어디서도 데피니션(Definition)을 잘 안 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키케로의 ‘피니부스(De Finibus Bonorum et Malorum)’에 봐도 결국은 시종일관을 강조하는 것이 ‘휴먼 네이처(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데피니션(Definition)을 안 합니다. 그것이 동양철학에서 말하자면 도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도를 스토아 철학에서는 저렇게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현자의 도덕적인 삶이 행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시면 에피쿠로스가 등장합니다.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평안함. 그리고 그런 신을 상정하고 도덕적인 심판 섭리 이따위 개념들은 다 거부하고 ‘헤도니아(Hedonia)’ 안에서 ‘아타락시아(Ataraxia)’를 찾는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니냐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니체의 생각에 많이 다가가고 있는데 또 이상하게 니체는 에피쿠로스를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그래서 결이 좀 다릅니다. 비이성적인 두려움이나 걱정, 근심, 이런 것들을 그냥 근절해 버리고, 감각을 포함하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느냐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그런 정도의 행복론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플로티누스에 와서는 훨씬 생각이 아주 깊어집니다. 그리고 일자와의 합일, 그리고 특히 그의 ‘엔네아데스(Enneades)’에서 개진하는 사상들을 보면 인간이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은 일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혼과 세계정신, 그다음에 이 인간의 영혼과 이러한 모든 위계질서를 따라서 제자리에 있을 때 그때의 불변하는 영혼이 신과 교통하고, 그런 속에서 초월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신약에서 ‘심플리키다스(Simplicitas)’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단순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좀 어려운 개념이긴 합니다. 하나님의 단순성의 개념이 크게 세 가지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가 심메트리(Symmetry)의 ‘심플리키다스(Simplicitas)‘입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어떤 심메트리(Symmetry)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프로포션(Proportion)과 질서들을 가지고 참 아름답다 이렇게 보는 그 원천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플로티누스적인 말하자면 빛의 개념입니다. 그 빛이 비침으로써 그 빛 때문에 심메트리(Symmetry)들이 생겨나지마는, 그러나 그 자체는 심메트리(Symmetry)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보는 초월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아름다움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미학적 원천이 어거스틴에게 골고루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돌아가서 세계적으로 우리가 아는 어거스틴이 될 때 두 가지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하나가 암브로시우스의 만남을 통해서 기독교 유산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플로티노스하고 만나고 심플로턴주의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서 아직껏 허술했던 철학의 체계들을 아주 탄탄하게 배열해 놓을 수 있는 기제들을 갖게 되고, 어거스틴의 철학적인 만족도 얻게 되면서 서양 사상으로 나아가는 바다의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거스틴이 유일하게 더 티얼로지언(the theologian)이었고 더 필로스소퍼(the philosopher)였습니다. 그래서 뒤에 나타나게 되는데, 사실은 박승찬 교수에 의하면 90% 정도는 거의 사상이 같다고 합니다. 다만 어거스틴의 위대한 이야기들을 당대에 이미 밀려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하는 그 사상의 맥락에서 소통하지 않으면, 현대인과 당시인과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그런 점에서 시도한 것이라고 봅니다. 금욕적이고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아우구스티누스보다는 약간 덜 엄격하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그래서 뒤에 전공하는 손 박사님 계시지만 좀 훨씬 더 끌리고 어거스틴의 그런 금욕적이고 그런 요소들은 저로서는 어떤 부분들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넘어가 보겠습니다. 중세는 건너뛰었습니다. 그리고 근대 철학으로 넘어오면 이성주의적인 행복론이 있습니다. 계몽주의가 일어납니다. 계몽주의가 일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에 놓는 건데, 당연히 행복도 인간 이성 중심의 행복관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행복의 기준과 방법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윤리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성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전에 이미 르네상스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자체가 결이 하나가 아니라 아주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맨 위에 오른쪽으로 가면 하나님을 철저히 믿으면서 르네상스를 이야기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있었고, 맨 이쪽으로 가면은 아예 고대 루크레티우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아예 신이고 뭐고 다 없이 완전 유물론으로 간, 그러한 르네상스 정신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냥 딱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래도 말할 때는 어떤 기준을 정해야 하니까, 마더레이트(Moderate)한 정도의 르네상스 주의자들은 어땠겠습니까. 그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신관이 이미 고전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속에 간섭하시고 하는 그런 종류의 신관이 아닌, 훨씬 다른 종류의 신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네상스에서도 피렌체나 바도바나 이런 데서 일어났던 정신을 보면, 기본적으로 깔린 것, 숙제는, 그들이 철학 활동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심지어 예술 활동을 통해서라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어떻게 내가 신 앞에서 순수한 사람이 되는가, 순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어떻게 내가 이웃과 함께 어울려서 사람다운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뿌리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중국어, 한자어에서 행복을 신푸(幸福)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신푸(幸福) 자체가 푸(福)는 복인데, 신(幸)는 뭐냐 하면 어쩌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행복은 당연한 권리라든지 자연적으로 누리게 되는 게 아니라, 어쩌다가 굴러오는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행복 자체가 퍼지티브(Positive)한 것입니다. 언제든 잡았는가 하면 놓치고, 또 놓쳤는가 하면 잡을 기회도 있는, 그러나 모두에게 공정하게 허락되지는 않는, 그런 개념의 상태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 이성주의에서 윤리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성적인 만족으로 행복을 얻는다고 봤는데, 그래서 심리적인 에고이즘도 등장합니다. 이기심의 문제를 여태까지는 정죄하고 극복의 대상으로만 기독교권에서 생각했는데, 이기심의 문제를 훨씬 긍정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심리적 에고이즘을 어느 정도 용납을 합니다. 그건 무엇 때문이냐면 중세 교회에 대한 반감, 그리고 개인 자유의 창달, 자유로운 주체로 사는 것 등에 있어서는 사실은 저런 심리적인 에고이즘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정신은 규범적인 시선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했고, 이러면서 인간이 최소한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통제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 사회계약론의 배경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도덕과 행복의 통합을 이루어야 하겠는데, 사실은 그 통합에 실패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원래 체스터턴이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체스터턴이 그 전집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싸우지 말자고 하는 것은 우리 합의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싸우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 우리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도덕과 행복을 통합해야 하는데, 이때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이걸 통합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덕 감각이 있고, 그 도덕 감각을 발현할 때 인간은 만족하기 때문에 도덕과 행복이 통합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칸트 같은 사람은 반대합니다. 그것이 양립될 수 없다, 이렇게 봅니다. 내가 배가 고픈데 내 빵을 나보다 더 배고픈 사람에게 줄 때 그게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러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행복을 어떻게 느끼겠냐, 그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토마스 홉스는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원시 상태의 인간은 매우 위험에 노출된 존재이고, 그래서 사회계약이 필요한데 이것은 재앙적인 요소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육, 그다음에 강력한 중앙집권제적인 그런 통치를 요구하는 그런 것들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아시다시피 범신론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둘로 나눠서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되는 자연, 능산적인 자연과 수산적인 자연으로 나눕니다. 모든 사물에게 신은 내재적인 원인이고, 자연은 목적이 없는 필연성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신도 인간과 함께 계속해서 운명을 함께 하며 변화되어 가는데, 과정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스피노자에서 많은 단서를 얻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에게는 굉장히 그 과정 철학 같은 것들이, 화이트헤드나 이런 사람들의 담론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신조차도 끊임없이 인간과 상호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신이 있고 인간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인간이 어떻게 그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신에게 영향을 주면서 그러면서 신과 인간이 함께 더 나은 모습으로 진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현대인에게 많은 관심을 끌고 있고, 오늘날은 스피노자의 부흥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스피노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성으로 자연의 법칙을 따르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얘기합니다. ‘코나투스(Conatus)’의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코나투스(Conatus)’는 쉽게 얘기하면 기분 좋음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본질로서의 존재를 계속 바람직하게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 강의하고 났는데, ‘아, 교수님 강의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의문점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강의였습니다. 한 편의 시 같았습니다.’ 이러면 기분이 좋습니다. ‘코나투스(Conatus)’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강의라고 합니까. 그건 신대원 선생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그러고 비판을 하면, ‘아, 나도 열심히 했는데 왜 이것 밖에 안 되나’ 생각이 듭니다. ‘코나투스(Conatus)’가 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존재의 보존을 위해서 욕구하는 것은 선이다, 이것이 기쁜 것이다, 그 반대가 악이다, 이렇게 보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선악 관념을 많이 흔들어 놓고 주관적인 결정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보겠습니다. 칸트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칸트를 우리가 비판 철학자라고 부르는데, 비판했다는 건 무슨 뜻이냐면 그 당시에 내려오는 두 가지의 커다란 철학적 전통이 인식론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는 대륙의 합리론이고, 그다음이 영국의 경험론입니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칸트는 소위 얘기하는 대륙의 합리론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이 부여한 본성에 내재적인 본유 의식, 본유 관념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들을 판단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론은 인간은 ‘따빌라 라사(Tabula Rasa)’, 백색 서판의 상태에서 태어나고 모든 것들은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결론적으로는 칸트가 둘 다 결함이 있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합리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모든 것을 정향화하면서 설명을 잘합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냐면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험주의는 반대입니다.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증진하는 데는 아주 훌륭한 툴(Tool)을 제공하는데, 어떤 것들을 전체적으로 놓고 설명하는, 카테고라이즈(Categorize)하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경험주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론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그걸 밀어붙이게 될 때 지성적 독선주의에 빠지게 되고, 경험주의는 적절하게 통제가 안 될 때 회의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비판하면서, 비판 철학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유 관념이라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자체를 예전에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주 탁월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공간에 대해서도 라이프니치나 이런 사람들은 공간 그 자체가 사물에 대한 관계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또 뉴턴 같은 경우는 공간이 절대적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하나의 틀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이것은 본유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경험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머지를 비판하면서 경험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을 만들면서 범주론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안을 내놓습니다. ‘순수이성 비판’이 나오고, 3대 비판서가 나옵니다. 사실은 칸트 철학에 있어서 80% 내지 90%의 비중은 1권, ‘순수이성 비판’이 차지한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자,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행복을 설명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도덕 법칙이 행복보다 더 중요하다, 이렇게 봅니다. 정언 명령을 따르는 도덕 법칙을 수행하는 것이고, 덕과 행복의 결합이 굉장히 어려운 철학적인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실천이성 비판’과 ‘판단력 비판’에서 정리를 합니다. 칸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1권을 읽어야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할 때는 1권이 도움이 안 되고 2권이 더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덕의 완전한 실현은 현세에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행복과 윤리적 실천이 정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완벽하게 이게 조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손해 본 것을 어디선가 보충을 받아야 하고, 덕에 비례하는 행복은 이것을 보상해줄 수 있는 신의 존재를 실존을 요청하게 되는 겁니다. 마지막에 학자들의 평가는 ‘실천이성 비판’, 그 이후에 ‘판단력 비판’에 넘어가서 말기에 가서는 결국 낭만주의에 물든 것이 아니냐,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칸트는 그 정도로 정리를 하고, 그다음에 넘어가면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배경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전에는 경험할 수 없던 엄청난 물질 물질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이 폭발하게 되고, 산업 재화가 어마어마하게 생산되고, 부의 불균등이 일어나고,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의 욕구가 훨씬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다음에 벤담이 제시한 거는 공리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다시 이것은 밀의 질적인 공리주의와 쌍벽을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에서 기이하게 판매 부수를 올린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를 기억하실 것 같은데, 처음에 담론을 시작할 때 인간에게 있는 것이 과연 공리주의 하나만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기차가 지나가고 저쪽에 사람들이 있는데, 그 기차를 내버려 두면 많은 사람을 치어 죽이게 생겼고, 기차를 멈추게 하면 한 사람만 죽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때 기차가 지나갔는데 그 육교 위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굉장히 뚱뚱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확 밀어서 떨어뜨려서 치어 죽는 대신, 기차는 더 못 갔습니다. 그때 그것이 옳으냐고, 그 한 사람이 죽고 철로에 있는 여러 사람을 살리게 됐을 때 이게 좋으냐 그러면 공리주의에 의하면 그게 좋다, 이렇게 돼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대답을 못 합니다. 그래서 샌델 교수가 얘기하는 게, 그거 봐라, 인간의 마음속에는 공리주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도덕 원칙이 존재하는 게 아니냐 그게 무엇이냐 합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 그 훌륭한 예화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공리주의적인 접근은 행복에 대한 임시방편이지, 그것이 궁극적인 설명은 안 됐다 이렇게 봅니다.
그다음 넘어갑니다. 현대철학으로 넘어옵니다. 이야기하면서 저는 알랭 바디우가 생각이 났습니다. 2009년에 프랑스에서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아마 ‘첫 번째 선언’이 발표되고 한 20년 후에 나온 책입니다. 이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에서 알랭 바디우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20년 전에도 철학은 위기였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철학은 위기라고 얘기하는데, 20년 전에 왜 철학이 위기였냐면 실존주의부터 이런 사상으로 해서 철학 자체가 아예 쓸모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탈철학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이 위기가 왔다면, 20년 후인 2000년대에 와서는 개나 소나 다 철학을 한다 그런다 이겁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왔다는 겁니다. 행복론에서도 똑같습니다. 실존주의가 등장하면서 인간에 대한 행복의 담론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행복론의 위기가 왔습니다. 지금은 뭐냐 하면, 개나 소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먹방에 가면 거기에 행복론이 나오고, 그다음에 길방, 여행하는 방에 가면 거기 또 행복론이 있습니다. 무슨 되지도 않는 실험, 예를 들자면 계란에다가 물감을 풀고 물감에다가 설탕을 넣고 설탕에다가 조청을 넣고 거기에다 구두약을 집어넣어서, 마이크로웨이브에 돌리면 어떻게 될까, 그런 실험 하는 게 막 몇백만 뷰씩 나옵니다. 애들 보고 물어보면 엄마한테 혼난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다 행복을 얘기하는 겁니다. 3만 원짜리 오마카세, 35가지 츠키다시가 나오는 것을 먹는 행복부터 시작을 해서 쫙 깔리고, 거기에 사람들은 정신을 팔고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알랭 바디우가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에서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행복론의 위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성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깨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악랄해지고 비참해질 수 있는가를 깨달으면서 마지막에 이성이 은총을 끌어내려서 상위에 등극했는데 등극시켜놓고 보니까 마지막 역사적인 결과가 너무 비참합니다. 그러니까는 이성을 다시 보좌에서 끌어내려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끌어내린 게 누구였냐, 이성이 끌어낸 것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이성이 끌어내고 그다음에 감정과 욕망을 앉혔다고 그러는데, 앉힌 것도 이성이고 끌어내리는 것도 이성입니다. 혼란의 시대가 시작된 겁니다. 결국 회의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 그리고 인간은 뿌리가 없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잉여적 존재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존재의 의미 같은 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 이런 식의 것들이 유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행복에 관한 질문은 실존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 가능하겠느냐 이렇게 보면서 정치, 사회, 경제, 심리학, 그리고 물질, 과학 기술, 이런 쪽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자유에 대한 담론도 예전에는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에는 결국 자유에 대한 개념은 유물론적 사유로 흐르게 되고, 제도와 그리고 정치, 독재 권력, 그리고 신체, 자유, 이런 것들로 축소되게 됩니다. 그다음 넘어가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 삶의 목표라고 보진 않았습니다. 그런 것 자체는 아니라고 이렇게 보았고, 그리고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당하는 삶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불교적인 사유를 도입해서 그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그래도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봤습니다.
다음 넘어가겠습니다. 니체는 아주 괴짜입니다. 그래서 고대적인 목적론적 행복관을 한 방에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근대 쾌락주의적인 행복관을 모두 날려버립니다. 플라톤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심지어 파스칼, 토마스 아퀴나스, 전부 다 니체에겐 비인간적인 인간들입니다. 그다음에 에피쿠로스,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 아닙니다. 신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주 자유롭게 살고 아무것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도덕의 반도덕성을 이야기하고 반도덕의 도덕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유로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디오니시오스적인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보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굉장히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서전에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일평생 여자와 돈과 명예에 연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그럴 정도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행복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차원으로 행복을 이해하는 것도 거절합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위버맨쉬(Übermensch)’입니다. 그래서 초인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초인이 아니라 번역할 수가 없습니다. ‘위버(Über)’는 ‘오버(Over)’, 그리고 ‘맨쉬’는 그냥 ‘맨(Man)’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또 ‘오버맨(Overman)’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굉장히 오버스럽습니다. 심지어 슈퍼맨으로 번역을 해서 그랬는데, 아니고 그냥 ‘위버맨쉬(Übermensch)’입니다. ‘위버맨시(Übermensch)’는 인간 자체는 힘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 힘을 상승 강화하고자 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게 인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권력의 의지, ‘빌레즈마흐트(der Wille zur Macht)’라고 하는데 권력의 의지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건 오역입니다. 권력이 아니라, 한 개체로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고 그것을 상승 강화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치론적으로 해석이 돼서 서로 부딪혀서 나치 독일을 가져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거는 너무 오버한 겁니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라, 힘의 상승을 통해서 오케스트라처럼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생명의 충만한 기운을 누려간다고 봅니다. 그래서 ‘선악의 저편’ 같은 데를 읽어보면 기존의 선악의 개념들을 다 버린 무너뜨려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 개나발이다,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은 각자가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 같은 경우에는 산업 문명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생산물들, 여기에 순응하는 현대인들이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 이렇게 봤습니다. 마르쿠제 같은 사람들도 그런 일차원적인 행복론을 폐기하고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서 비평적인 견해들을 가지고 행복을 논하게 됩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기독교사 쪽으로 넘어옵니다. ‘비에티튜도(Beatitudo)’, 그다음에 ‘펠리키티(Felicity)’, ‘펠리키타스(Felicitas)’, ‘델렉타티오(Delectatio)’ 등 이런 것이 있는데, 영혼의 완전함,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지성적인 관조, 그 즐거움이 성취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기독교 행복론의 전개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하나님과 하신 일들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건 공통적인데, 교부 시대에는 강조점이 지복적인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보는 것, 그래서 그 ‘베아티픽 비전(Beatific Vision)’, 이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박해의 시대였기 때문에 행복을 현세에서 찾기보다는 피안에서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가톨릭에 저항하면서 일어났기 때문에, 복음을 행복과 바로 연결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당시대의 맥락에서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종교개혁 시대의 행복을 저렇게 바라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후에 이 행복을 논의함에 있어서 일반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철학적으로 소통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 와서 그런 것들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다시 플라톤이나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불러 들여오면서 조화를 시도해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때 경건을 다시 강조하면서 그런 행복론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다음 넘어가겠습니다. 교부들의 행복론은 필멸할 인간의 비참함, 그다음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구원에서 시작이 됩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전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행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세에서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세 교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철학을 도입하게 되고, 그러면서 피안에 치우쳤던 행복론들이 약간 조정이 되면서 차 안에서의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 것, 그것이 중세 교부들의 발전이었다고 봅니다. 아퀴나스가 일조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공자가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함부로 말을 못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가 그래도 많이 읽었는데, 아퀴나스는 더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행복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딱 정리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론의 역사를 쭉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말이 되는 이야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에 대한 관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조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정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가 스토아 사상이었습니다. 그건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회심 사건, 모멘텀이 뭔지 아십니까.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모멘텀이 되어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굴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안토니우스에 대해서 얘기한 겁니다. 극단적 금욕론자였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수도원을 세우고 그분은 평생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있다가 설교해달라고 아주 (많이) 사정하면 잠깐 내려왔다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의 생애를 쓴 사람이 아다나시우스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분들이 훌륭한 기독교의 교부들이지만, 그 시대의 아들들이었음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 중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것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떤 행복론을 이야기해도 그걸 빼놓고는 행복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요소, 두 개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질서의 개념입니다. 하나는 인식의 질서 개념이고, 그다음에 또 하나는 사랑의 질서 개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식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충분조건입니다. 그래서 인식으로서 세계의 질서를 인식하고, 그 질서를 거스르는 것을 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악, ‘말룸(Malum)’이 그 질서, ‘오르도(ordo)’를 거스르는 거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초기에 회심하고 카시키오쿠마에 있을 때 쓴 것이 ‘데 오르디네(De Ordine)’라고 하는 질서론에 대한 작품을 쓰는데, 말하자면 디렉터리 같은 그런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 무엇이 가장 위에 있고, 그다음에 아래에 있는가 하는 인식론적인 구도를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사랑의 질서를 가질 수 있는 이 내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인간의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철학적인 견해는 보태고 뺄 수 있는데, 이 두 개는 행복의 양대 축과 같아서 두 개를 빼놓고는 기독교적인 행복을 말할 수 없다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베로에스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주지주의적인 행복론과 능동지성을 얘기하면서 현세에서 실현 가능한 행복론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주지주의적인 입장을 수용하고, 은총에 의지하지 않는 지복의 성취는 확고하게 거부를 하는 신본주의적 행복에 대한 사색을 보여줍니다.
그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행복론으로 넘어가면, 종교개혁자들의 화두는 인간의 타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복음에 의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곧 그들에게는 행복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행복론은 다분히 구원론적이고 기독론적인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강점도 가지고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기독교 토양에서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확 심어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다 기독교 사회에 있었습니다. 지금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것 같은 행복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너무 전제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일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귀납법적으로 시작을 해서 사실 행복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가 줘야지만 공감을 얻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연역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부터 내리고 그다음에 설득해 가하니까, 사실은 행복에 관한 담론에 있어서 오늘날의 기독교 사역자들이 매우 취약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야 행복합니다. 예수 빼고 행복이 없습니다. 얘기하는데 우리끼리는 아멘, 아멘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왜 4대 성인 예수가 행복의 조건인가 하는 것인 사람들에게 설득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행복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제가 열네 살 때부터 스물한 살까지 무신론자로 살다가 기독교에 귀의했는데,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적 없습니다. 신실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 믿은 적 없습니다. 안 믿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믿는 게 행복할 것 같아서,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도 기독교는 나에게 행복을 줘야 합니다. 어떻게 그걸 줄 것인가, 그걸 지금 오늘도 고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넘어가겠습니다. 잠깐만 보면 복음이 주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이야기한 겁니다. 중세가 애덕을 추구했다면 이 사람은 신덕을 추구한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주는 유익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이 주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 안에 행복이 있다고 하는 것들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카빈총으로 넘어가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칼빈도 물론 급격한 회심을 경험했습니다마는, 루터보다는 훨씬 더 좀 조화를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형상 개념을 가지고 등장을 합니다. 법학자였습니다. 알티치아치 같은 사람에게서 법학을 배우고, 이름 잊어버렸는데 또 하나 구시대의 법학 이론과 신시대의 법학 이론을 같이 배웁니다. 그래서 법학적 사고가 아주 훌륭합니다. 그것이 신학을 펼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알티치아치 같은 사람에게 법학을 배우면서 칼빈은 그 행복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그 존엄성이 인간이 행복해야 하는 어떤 근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고, 그 형상 때문에 결국 인간은 존엄성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했다는 것은 아주 굉장한 업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굉장히 많은 것들을 했다고 봅니다. 그다음에 칼빈은 좀 조심한 게 뭐냐 하면, 지복적 행복, 지복직관의 행복, 소위 얘기하는 ‘베아티피카치오 비지오니스(Beatificatio Visionis, Vision Beatifica)’라고 하는, 그 지복직관의 행복에 대해서 부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그에게서 강조됩니다. 그런데 너무 이것을 강조하다가 탈현세적으로 되고 너무 중세에 기울까 봐 염려는 좀 했습니다. 그래서 조정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시한 것이 ‘모티피케이션 오브 신(Mortification of Sin)’, ‘비비피케이션 오브 그레이스(Vivification of Grace)’라고 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결국 우리가 이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는 죽이고 은혜는 계속 우리 안에서 살아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의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할 그런 노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 행복이 달렸다고 이렇게 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여기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중세의 지복직관의 행복론을 다시 소환합니다. 이유가 뭐였냐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뭔가 잘못되었을 때 개혁이 일어나면 항상 반대로 튑니다. 그런데 항상 약간 지나친 성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세기 정도 흘러가고 나니까, 그다음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보다 더 깊은 뿌리 있는 행복론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지복직관 행복론도 소환하고, 그 사람들은 또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심지어는 스콜라주의의 유산들을 다시 도입하면서 행복론을 훨씬 깊이 있게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복음적인 행복론도 강화하면서 경건의 행복론까지 조화를 시키면서 좀 더 심도 있게 행복론을 전개합니다. 그다음에 여기에서 지복직관의 행복론이 부활이 되고, 시간이 너무 많이 가서 넘어가겠습니다. 근현대의 행복론으로 넘어가면, 참 이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근현대의 기독교 행복론이라는 것이 진짜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처럼 그런 신관을 가지고 행복론을 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이신론에 이미 깊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 심리주의, 도덕적 회의주의가 등장하면서 17세기의 정치 이론과 함께 등장한 도덕 심리주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이기심도 부정하고 싶지 않고, 사회적인 호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런 낙관론을 믿었고, 그런 낙관론을 믿으면서 세속적 이신론의 도덕적 냉소주의, 즉 폐기론, 이런 것들도 반론하고 그러면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이 애덤 스미스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도덕 공감론’이나 이런 책들 보면 경제 이론가이기만, 도덕가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17세기 말과 18세기를 휩쓸었던 하나의 학풍이 있었습니다. 심플로턴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것이 기독교의 파도가 치면서 소위 얘기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Scholar Augustinia Moderna)‘라는 운동을 일으킵니다. 오늘날의 스콜라, 어거스틴학 운동이라는 게 펼쳐지면서 도덕 심미주의와 만나게 됩니다. 샤프트베리라든지, 칼스 월드라든지, 그런 케임브리지의 그 도덕 미학론자들이 등장을 하게 되면서 플라톤적인 사유에 의한 직관론과 자연 상태에 근거한 힘, 이런 것들이 함께 설명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심리적인 작용이 있어서 도덕적인 결정을 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미학 개념과 관련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플라톤이 이미 고민했습니다. 왜 선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느냐,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것에 대한 어떤 답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자료를 한 번 흥미가 있어서 찾아봤는데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굉장히 참고할 만하고, 거기에 기초해서 힌트를 많이 받은 것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 감정론’이라는 책입니다. 정동 이론이 나오면서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다, 이건 버리고 이걸 사랑해라, 그러는데 사랑이 잘 안 되는 겁니다. 변심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걸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게 하겠느냐 그러면서, 뉴센스 이론도 나오고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걸 참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다 넘어가겠습니다. 끝내겠습니다. 그냥 다 끝내겠습니다. 결론을 정리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의 견해입니다. 다 살펴본 결과,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이 뭐냐 하면 기독교에서의 행복론은 사실은 지금 오늘 시대에서는 거의 논의가 안 되고 있고 정리가 안 되어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너무 물질 중심적이고 세상에 복 받는 것들을 중심으로 했고, 그 행복론이 안 됐기 때문에 기복 신앙 같은 것들이 미신적인 신앙이 한국 교회를 휩쓴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이고 뭐고 모든 나라를 다 강타합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대륙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의 이야기는 이 세계에 있는 기독교 교파 중 가장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교파가 오순절이라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것이 행복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고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독교적 입장에서 행복론을 정의할 것이냐 하면,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니체의 말을 빌려서 간단하게 비유를 하자면,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니체는 사실은 하늘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대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그렇게 동의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판단할 때는 그렇습니다. 치우쳤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엄격하게 말하면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사물들의 질서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멸할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영원히 있는 영혼과 사라질 육체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하는 인식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그 질서에 맞게끔 사랑도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되어야지만, 이중적인 생활이 안 되고 인식과 사랑이 일치하는 행복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생각하는 겁니다.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에 와서는 별로 그런 행복도 없지만, 17세기 개혁파 1750년의 개혁파 정통주의가 끝날 때까지의 기독교 행복론에다가 반드시 보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만 잠깐 1~2분 말씀을 드리고 끝내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물질과 현실에 대한 이것을 어떻게 행복에 연관시키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20년 전을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생활의 수준이 17세기에 왕족이 누리던 수준의 소비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 벌어진 것이고, 이것이 20년, 40년 후에는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장자가 고민했던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그 꿈이 현실이냐, 내가 사람으로 있는 게 현실이냐 라고 하는 리얼리티의 문제가 나옵니다. 지금 가상현실과 그다음에 진짜 현실 사이가 도치되어서 더 많은 시간을 가상현실 속에 보낼 수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복을 이야기할 때, 그냥 17세기까지 논의되었던 행복론만 가지고 이 현세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회의적이고,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목한 건 아니지만 제가 ‘염려에 관하여’라는 책을 심혈을 기울여서 썼고 17교를 본 책입니다. 진짜 링거를 다섯 번을 맞으면서 썼는데 거기서도 행복을 정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문학과 대화를 하면서 보태야 할 사상이 뭐냐 하면, 성경에는 항상 행복을 피안으로만 미루는 사상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카르페 디엠(carpe diem)’ 같은 사상이 성경에는 분명히 제시되고 있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와 즐겁게 살아라,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훨씬 낫다, 그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분복이니라, 이러면서 시간 안에서 누리는 인간의 행복을 성경이 충분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그냥 완전히 단절해 버리고, 사실은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그 행복을 피안으로 다 밀어버리고 영혼에만 치중해서 사는 것, 그 자체를 가지고는 현대인에게 적용을 줄 수 있는 그런 행복은 아닙니다. 답을 제가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칼빈도 이런 걸 열어놓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 기호품 같은 것은 우리 건강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보완하고 싶은 것은 이런 설명을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즐거운 사람들과 만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하는 이것들을 행복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 안에 어떻게 복종시키면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 그런 불행이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죽어야 하는 것, 필멸의 존재,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해서 바꾸며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고, 그리고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용감하게 받아들이기를, 니체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면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면서, 그러면서 살아가고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늘의 의미와 연관시키면서 자유로운 한 주체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 이런 요소들이 감히 된다면 현실에 적응 가능한 기독교 행복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