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녹취자: 장미연
제사장들은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우리가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예수님 시대 때에만 해도 예루살렘에 1만 8천 명 정도 제사장들이 있었다는 학자의 견해를 본 적이 있으니까 지파별로 굉장히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교번제로 돌아가면서 제사장의 일을 했는데 대제사장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한 차례 대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냐.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로써 들자면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차이는 하나입니다. 대제사장만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대제사장은 어마어마한 직분을 맡았지만 자신 역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의 모습이 결국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을 제사 드리심으로써 우리 모든 구원받을 인류를 대속하시는 모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가 전개되는데 아침에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위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오늘 읽은 15절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특이하게 눈을 끄는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고 떠나실 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렇게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주가 되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이 표현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매우 큰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을 때나 모르고 있을 때나 그리고 우리가 느낄 때나 느끼지 못할 때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에게 계시다.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계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제사를 드리신 분으로서 그 제사를 아직도 유효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계시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얻었고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나만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시고 그 제사를 유효하게 하시는 유일한 분이신데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있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런 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깊은 위로를 받는 것이 복음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예수 믿은지 얼만 안 됐을 때 제 마음을 절절히 울린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또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함께하사 시시때때로 나를 생각하시네.’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다.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glory of Christ.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책에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를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대제사장이 계시옵나이다.’ 그렇게 고백하게 될 때 깊이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어떤 점에서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느냐. 성경이 이어서 “그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랬습니다. 인간 대제사장이 있고 예수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인간 대제사장은 그냥 인간들 중에 뽑힌 제사장이고 제사장 중에서 뽑힌 대제사장입니다. 인간의 처지를 잘 이해합니다. 이해하는데 그 역시 죄인입니다. 죄가 우리를 못 하게 하는 것이 공감을 못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에서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사랑이 없음 거기에서 나오는 무자비함, 무관심함 그리고 대적, 포악, 폭행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공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이웃에게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막아놓는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이 비록 대제사장이 되었지만 대제사장도 역시 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죄인으로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고통을 모두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영혼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절절히 저며져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안 될 때가 많잖아요. 그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 대제사장이 계신데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 못 하실 분이 아니요.” 여기에서 ‘동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공감하는 것입니다. 같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도 연약하셨다’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죄의 비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비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세상에는 죄가 있었기 때문에 남의 죄 때문에 비참한 환경에 처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멸시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결국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비참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누군가를 비참하게 하는 사람은 이미 그 비침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는데 그런 죄가 있는 세상에서 그걸 모두 다 맛보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이 겪어야 하는 그 비참을 모두 공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이 겪어보니까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는 마음이 예수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서 우리가 두 번째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있으신 대제사장. 그리고 두 번째로는 동정해주시는 대제사장. 그분이 계셔서 우리가 겪는 죄의 비참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시면서 함께 아파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이 마음에 참여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는 모든 비참에 대해서 공감을 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아프다고 할 때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할 때 수술을 한다고 할 때 가족의 문제로 어떤 고통을 겪는다고 할 때 그때 우리의 마음에 결결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공감을 우리에게 주는데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에서 큰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가와 도요히코라고 하는 일본의 가난한 자와 고아, 창녀들을 위해서 자신을 다 버리면서 산 희생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사선을 넘어서”라는 고전적인 책이 있는데 가가와 도요히코가 비참한 사람들에 대해서 전후에 눈물을 흘리며 애를 쓰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비참은 크고 그런 노력은 아주 작으니까요.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많은 비참함이 해결되겠습니까?” 그때 가가와 도요히코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사람들과 내가 울어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게 공감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개인적인 슬픔을 공감해주어도 위로가 되는데 대제사장은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셔서 이 세상의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를 그렇게 공감해주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물처럼 녹는 것입니다. 아침에 제가 위로를 받았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신앙의 향기도 보지만 도처에서 우리는 불신앙의 악취도 봅니다. 도처에서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시는 생명의 기쁨도 보지만 도처에서 죽음의 악취도 경험합니다. 비참합니다. 더 가슴 아픈 건 그 비참을 내가 어떻게 개선해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을 깊이 공감해주시는 우리 주님이 계시고 우리를 동정해주시는 주님. 그러니까 그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비참에 대한 슬픔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잘해서 지은 죄라는 건 있을 수가 없잖습니까? 잘했는데 내가 비참해지게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죄로 말미암는 비참은 나 자신의 책임인데 그 원인을 보는 대신 결과를 보면서 아파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다 돌멩이를 던지고 감옥에 끌려가는 그 사람도 가족들은 울면서 작별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관계가 없으니까 그의 죄 만을 가지고 돌을 던지지만 가족은 이제 이 추운 겨울에 저 차림으로 겨울을 보낼 생각을 하면서 부자유와 고통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게 긍휼이고 동정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계시다. 이게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있으신 대제사장. 동정하시는 대제사장. 마지막의 위로가 시험받으신 대제사장입니다. 그분도 시험을 당하셨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죄는 없으신 분인데 똑같이 시험을 당하십니다. 그 시험은 안에서 우러난 시험이 아니라 밖에서 밀려오는 시험이었습니다. 그것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시험을 받는 것을 보시면서 주님이 신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충분히 공감하십니다. 왜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시험을 당하셔야 했느냐는 것은 히브리서에 말하길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 어떤 사람은 그 구절이 이해가 안 된다고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이 순종을 배우실 수 있느냐 하는데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신이신 예수로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었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스스로 자기를 버려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처럼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인성에 관한 한.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언제 마지막 날이 될지 모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도 모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성 안에서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더욱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을 인성 안에서 배워가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불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신 불완전하심인데 이것을 통해서 불완전하고 죄 있는 인간이 어떻게 고난을 받으며 순종을 배워가는가 하는 것을 당신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험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더 이해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주리셨다. 주님도 때로는 배신을 당하셨다. 주님도 이유 없이 핍박을 받으시고 맞으셨다. 주님도 친구도 없이 혼자 버려지신 때가 있었다. 이것이 무한한 위로를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고난에 투사하는데 매우 커다란 유익과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있으신 대제사장 그리고 동정하시는 대제사장 마지막으로 시험받으신 대제사장. 이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 그런 분이 우리를 왜 돕지 아니하시겠느냐. 여기에 인간의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는 것인데 우리를 스스로 설득할 수 있는 그 희망을 우리는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권에서도 꽤 알려진 학자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피, 예수의 피’ 이렇게 강조하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걸 보면서 뱀파이어 신앙이라고 아주 날려버렸습니다. 내 마음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굉장히 씁쓸했습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시 ‘예수의 피, 예수의 피’만을 이야기하다가 자기의 삶에 게으르고 인간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변호 수단으로 예수의 피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바로 잡아줘야지 그것을 뱀파이어 신앙이라고까지 일격을 날릴 필요가 있을까? 앤드류 머레이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라는 책을 씁니다. 성화론에 있어서는 전 동의하지 않지만 정말 깊이 있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말하길 “우리의 모든 능력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사람들 바라보며 갖는 희망은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동정하시는 대제사장 그리고 시험받으신 대제사장 그분이 우리를 능히 어떤 처지에서도 도우실 것이기 때문에 공감하실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그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시는 그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누릴 수 있으니 우리는 주님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으며 날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어떤 처지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이런 희망이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지체들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 그래서 눈앞에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사자가 으르렁거려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일체의 평정심의 마음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남의 일처럼 생각하기도 하며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력이 대제사장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역경 속에 큰 능력이 되고 슬픔 속에 큰 위로가 되고 배신을 당했을 때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사랑이 되고 고통 받았을 때 여러분들에게 용기를 주는 대제사장의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