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근원을 잊은 세대에게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4-5)
녹취자: 이은정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교회의 상황은 핍박을 이미 직면하고 있었고, 당시 세상 사람들은 방탕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런 삶이 저기에는 종말은 없다. 그리고 세상이 지금 있는 것은 옛날부터도 그냥 이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이 세상은 계속 그렇게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이 이 사람들의 방종한 삶의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평가하기를, 저들이 일부러 잊고 있다. 뭘 잊어버리고 있냐면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로 넘어가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반드시 종말을 도입하신다는 것, 종말이 온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알게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제가 어제 이 부분을 이렇게 읽으면서 아,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오늘날의 사람들하고 너무 똑같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화책을 보던, 심지어는 드라마를 보던 뭐든지 간에 선한 것은 권장하고 악한 것은 징벌을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어떻게 보면 교리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권선징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종말이라는 것과 그다음에 죽음 이후라는 것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은 도입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도 결국은 인간은 너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자신의 행복과 양립되기 어렵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빵이 있는데 내가 배고파 여기 이 형제도 배고파, 그러면 내가 먹는 게 이게 만족입니다. 근데 덕을 베풀려면 고픈 배를 부여잡고 이 형제에게 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 형제의 배를 불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덕을 베풀면 베풀수록 자신은 계속 손해를 보고 만족을 못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근데 이게 만약에 이생이 전부 다라고 딱 끝나면, 이게 도덕이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가 내세를 요청한다. 그런 이치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베풀어주면 나는 행복이 덜하지만 이렇게 한 것에 대해서 사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을 해주실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악을 행했는데 끝까지 떵떵거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웃으면서 죽는 사람이 있고, 정말 선한 일을 했는데 계속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는 사람도 있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다라고 한다면 우리 보고 올바르게 살라고 하는 도덕 명령이 성립을 안 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시신을 요청하고 그다음에 내세를 요청하고 천국과 지옥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된다 이 얘기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니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현실에 충실하라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줬는데 문제는 양쪽 끝이 잘려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래 있었던 것, 그다음에 앞으로 종말이 찾아올 것, 다 필요 없고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행복 그 자체는 그 모든 상황을 초월하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자기완성에 (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이 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에 이 생각을 지금 처음 한 게 아니라 이미 2천 년 전에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의해서 기독교인들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다. 그리고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것이고 우리의 관심 밖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행복과 덕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이렇게 하면서 했던 것이 그때의 일입니다.
근데 지금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이 먹고 입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삶을 공정하게 보는 대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바라지 않는 것은 피하는 것입니다. 근데 피한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고,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똑같은 풍조 속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 너에게도 매우 가깝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의 풍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 인간이 끊임없이 현실에 골몰하면서 살면서 딴 데 정신을 팔고 살지 않으면 은 그런 인간의 어떤 마지막이 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대비가 마음속에 전혀 안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 사람들이 나이가 점점 들면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싫어할까? 의사소통이 안 되고 뭐 생각이 다르고, 그게 아니라 그런 나이 든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왜 싫으냐면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왜? 노인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고 죽음은 나를 외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근데 나는 달리 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싫은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싫어합니다. 피합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근거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표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교회가 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교회는 세상보다 훨씬 더 도덕을 많이 실천한다, 교회는 세상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돕는다, 그거를 보여주는 것이 본래의 임무가 아니라, 교회에 와 있는 동안에 교회에 딱 들어오는 순간에 여기는 아,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에서 회심하던 때를 돌아보면은, 나는 교회가 세상하고 너무 비슷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너무 다른 세계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간 것입니다. 근데 나중에 들어와서 보니까 교회는 정반대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무신론자들의 심리를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똑같이 여기에도 있다고 해서 교회의 담장을 높임으로써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 담장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그 육중한 문을 열고 교회당에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똑같았다면 나는 안 갑니다. 왜냐하면, 여기 세상은 이미 너무 많이 경험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뭐냐 면 어떤 도덕적인 삶이나 아니면 우리끼리 이렇게 살아가는 재미 나는 삶이나 그런 게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세상의 재미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교회 교육이 미디어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15초짜리 광고 찍는데 10억씩 들이는 그 영상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근데 뭘 보여줘야 하냐면은 이 사람들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 그것입니다. 그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아주 갑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30년 동안에 되게 많았잖습니까. 어떤 사람은 떠나고 어떤 사람은 남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사역자가 되기도 하고 하겠지만,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진실하게 회심했을 때 가장 충격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목회자가 아니라 가족입니다. 가족.
그래서 한 가족의 얘기가, 그 아들이 회심을 깊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밥 시간에 부인은 신실하게 믿는데 남편은 약간 좀 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근데 어쨌든 식탁에 앉아있는데 “오늘 네가 좀 기도를 해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기도하는데 대학생이었습니다. 기도하는데 기도가 길어지더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침 먹는 기도를 하라 그랬는데 그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가 막 우는 것입니다. 이 회심을 하지 않은 아빠의 얘기가 갑자기 큰 두려움이 밀려오더랍니다. 그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서 자기가 해석하지는 못했는데 그 두려움의 근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하나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셔서 가까이하기에 먼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종말을 도입하시는 하나님이고, 그리고 그 큰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하는 큰 두려움입니다.
이 똑같은 고백을 아주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가족에게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도 안 하는데 맨날 술 먹고 들어오고 그러던 사람이 일찍 들어와서 딱 앉아서 성경을 펴고 아이들하고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하는 광경을 보면서 막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두려움, 하나님께서 계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모든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입니다.
한 구역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남성 구역인데 그 구역의 4분의 3이 비 회심자였습니다. 여러분 4분의 1은 좀 미끄러진 사람들이, 비율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이렇게 반골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데 뭉쳐 다니면서 교회를 해코지하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뭐라도 얘기를 하면 “우리 아무개 그 목사는 왜 설교가 그 꼴이야?” 이런 식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빌딩을 샀다는데 그건 또 왜 산 거야? 돈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항상 뭔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 일의 우두머리를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사경회 때 와서 주님을 진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가서 그 사람이 자기가 만난 주님을 이야기하는데 그 모임에서 확 밀려오는 게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결국은 이것입니다. 뭐냐 면 여기서 있는 우리가 창조는 우리로부터 너무 멉니다. 어두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종말도 우리가 너무 멀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환합니다. 너무 잘 보입니다. 여기는 너무 멉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특별한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사실은 창조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고 종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도 없고, 더욱이 그 창조의 위대하심을 지금 내가 느낀다든지 종말의 두려움을 내가 오늘 느낀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근데 그걸 하나님이 느끼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토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너무나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그사이에 서 있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좋은 것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대지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시로, 수시로, 내가 사멸할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온 곳이 지금 여기가 아니라 영원한 태초라는 것, 그리고 내가 여기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는 곧 사라질 죽는 존재이며, 그리고 나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수시로 생각을 하면서 이 하늘로 비춰 오는 초월의 빛과 대지 위에서 어우러지는 현실의 땅이 두 개가 같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가 비록 곧 사멸하고 영혼 속으로 먼지처럼 흩어질 존재지만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것이 한순간 한순간이 너무 감사한 시간이다. 그거를 생각하면서 언젠가 종말이 오리라는 것 때문에 오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기쁨과 감사를 누리면서도 자기 자신이 허무하게 사라져 갈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을 위해서는 이 하늘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지를 성찰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 이것을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초기 기독교는 윤리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윤리가 아니라 거룩함에 관해서 관심이 있었고 윤리는 거룩함의 열매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찬란한 빛과 이 땅에서의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거를 함께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어제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교인들의 출석이 줄었습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복음의 수용성에 대해서는,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다 딱딱 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복음의 수용성은 훨씬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그런 현대인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터치하면서 파고 들어가서 그런 전략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럴 때일수록 피상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진짜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우리의 삶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왜 이렇게 충만한 물질 그리고 이 번영만으로는 결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없는 가 하는 것을 깊이 성찰하면서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이 둘 사이에 내가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사이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을 종말의 빛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삶이 종말을 향해 가도 허무하지 않은 삶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 순간 얼마나 우리의 삶이 유한한 삶인가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누리는 큰 복락의 삶인가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