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에 관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꼐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녹취자 : 변상윤
오늘날 가장 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용일 것입니다. 관용이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주는 행위를 관용이라고 합니다. 불어로는 ‘똘레랑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관용이 과거에는 보편적인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와서는 관용은 바보 같은 짓이 됐습니다. 경쟁과 다툼이 치열하기 때문에 관용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파고들 수 있는 틈을 준다는 것이고 그러면 여지없이 이용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칼 포퍼라는 사람이 「열린 사회와 적들」이라는 널리 읽힌 책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현대 사회의 위기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자유의 위기 그 다음에 관용의 위기 이 세 개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의 이 사회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는데 결국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그 사회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민주주의의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이승만 정권을 보면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가장 부패하고 독재를 하는 정권이 됩니다. 똑같이 히틀러도 국민 지지율이 93%라는 엄청난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지도자가 되고 그 다음엔 전례 없는 끔찍한 전쟁 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인데 모두 다 자기가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회가 갈등이 그치지를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민주가 된 것이 아니라 민노가 돼버립니다. 누군가에게 치어서 노예와 같이 취급 받아야 되는 사회가 됩니다. 관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용은 좋은 것인데 악한 자들은 끊임없이 관용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국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어떤 모순 때문에 열린 사회가 지탱이 안 된다고 보면 그 가치를 다 버릴 것인가? 그것은 진정으로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민주가 사라지고 자유가 사라지고 관용이 사라지는 그 사회는 감옥과 같은 독재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찍이 세네카도 관용에 대해서 꽤 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인문학자로서 등장하는데 파리 로얄 콜레주에서 우리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오를레앙으로 가서 알디아찌에게 법학을 배웁니다. 거기에서 법학을 배우고 그 다음에 자기 말로는 돈 좀 벌기 위해 그리고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쓴 첫 작품이 「세네카 관용론에 관한 주석」이었습니다. 매우 성공적이지는 않았는지만 그렇게 할 정도로 그 당시에도 관용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 관용하는 자들과 그 자체가 덕이라는 걸 부인 할 사람은 없는데 관용을 이용해서 사람을 가스라이팅하고 갉아 먹는 사람들 때문에 관용은 두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살아가면서 똑같은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사회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내가 자유를 존중하는데 다른 사람의 자유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는, 끊임 없이 관용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하고 그 관용 때문에 나를 심지어 가스라이팅까지 하게 되면서 그런 가스라이팅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관용하라고 그러시지 않았느냐 라며 가스라이팅을 하는데 나는 더 이상 관용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 모순 속에서 우리들의 관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관용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관용은 자신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으로 인해서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이것은 국어사전적인 의미고 성경적으로 볼 때는 관용이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에피오이캐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에피”는 “무엇에 관하여”라고 하고 “오이캐스”는 “비슷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관용이라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해서 비슷하다 혹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사랑의 개념하고는 좀 다릅니다. 사랑은 내가 뻗어나가서 누군가를 붙잡는 것인데 관용은 비록 그렇게 뻗어나가서 꽉 붙잡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손해나거나 힘들게 하는 일을 했을 때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수비적인 태도입니다. 그것을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유래가 모든 것의 어떤 것에 대해 비슷하다는 것인데 어떤 것에 대해서 비슷하다는 뜻은 무슨 이유 때문이든지 잘해주는 사람이나 어떤 사람이 나를 자극하여 못 되게 하거나 혹은 악을 행하거나 잘못하거나 해도 나 자신에게 전혀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대해줄 수 있는 것으로 그런 실천의 덕이 관용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실천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뭐라도 사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말이라도 하고 이렇게 하면 그것이 정이 되고 또 그걸 내가 받아들이면 그것이 참 고맙고 기쁘다 해서 그 사람에게 보답을 하고 이렇게 하면 관계가 참 좋아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문제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편을 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나한테 잘해주고 나도 잘해주는 사람 그리고 우리끼리는 서로 잘해주는 게 서로 통하는 사람이고 저기는 좀 싸가지가 없는, 뭘 잘해주는 건 받지만 나의 관용을 이용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사랑하고 저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고 하면 우리가 서로 선이 통하고 또 진리를 서로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반응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나 선을 악으로 갚는 나쁜 사람들을 모두 다 동일하게 대우하고 그들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항상 열린 마음 열린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이 선을 행하면 받고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인가요?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관용해야 될 것인가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칼 포퍼라는 사람은 관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관용하지 말아야지만 관용의 사회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관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관용하지 말아야지만 진정으로 관용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처럼 똑같이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에 대해서 억압하고 금하는 것을 못하게 해야지만 자유가 보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어떻게 정할 것이냐는 누구도 사실은 답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정도로는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을 관용으로 대하는 것과 어떤 깊은 인간관계를 계속하는 것을 등가관계에 놓고 생각을 하면 이 공식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다 똑같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가 한창 교회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여러 번을 잘못했습니다. 한 때는 나에게 목양을 받던 사람인데 다시 관계를 갖고 싶어서 끊임 없이 프러포즈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내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길게 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옛날 관계로 돌아가기엔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난 널 미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끊임없이 용서를 비니까 난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다". 그런데 지금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만나려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든 자기에게 제대로 해주지 않는 사람이든 혹은 심지어 자기의 원수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그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받아 들여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거의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일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사십시오. 그 대신 그것이 관계에 대해서 헌신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판단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로 끝낼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넘어서서 친밀한 친구의 관계로 발전시킬 것이냐 그것은 각자 자신의 판단의 몫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관용하는 정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가스라이팅하고 보복을 하는 그런 감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사람들에게 관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관용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나는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는데 관용을 못하겠는데 계속해서 양심이 가스라이팅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도 용서 못하고 관용을 못하면 네가 무슨 구역장이냐 네가 무슨 은혜 받은 사람이냐 그리고 매일 설교를 듣는 게 그런 내용인데 하면서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이 경험해 보시지 않습니까? 가스라이팅은 꼭 남이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는 경우에는 "뭐 어때 너 한 방 치면 나도 한 방 치는 거지" 하면서 사는 사람에 비해서 양심적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권할 만한 길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받은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읽고 젊은 시절에 정말 많이 울었고 대여섯 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의 품에서 죽습니다. 친한 친구의 품에서 죽으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의미를 아는 독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우리는 죽을 수도 없어." 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죽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결국은 죽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관계가 있어야지 죽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그런 사람들보다는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보여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이것이 관용의 비결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 그 기쁨은 항상 있는 기쁨, 왜 항상 있느냐?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엔크리스토"라고 하는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분과의 실체적인 연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라고 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연합입니다. 주님을 실제적으로 사랑하면서 완전한 연합 속에서 살아갈 때 그 안에서 솟아나는 작용이 기쁨입니다. 기쁨이 넘치면 그 기쁨이 사람들에게 관용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용할 수 있는 힘은 주님과 나누는 교제의 기쁨, 즉 사랑의 기쁨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관용을 하면 악을 용납하는 것 같아도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악에 대해 관용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해 관용하라는, 떼어놓기가 쉽지 않지만,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라, 그렇게 사람에 대해서 깊이 관용하게 하는 힘이 사랑의 기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기쁨 속에서 관용을 베풀면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관용을 베푸는 것과 관계를 계속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모든 사람과 아무리 나쁜 사람과도 다시 만날 수 없도록 헤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관용이 있는 삶이 아니고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헤어지고 만난 사람은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만나야 되는 그런 관용의 삶의 비결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이만한 (작은) 것도 관용하지 못하고 공중전화에서 앞에서 주차하는 문제, 전화 거는 문제 하나를 가지고 때려 죽이고 싸우는 끔찍한 상황은 결국은 자신 속의 깡 마른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기 안에서 사랑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삶이든지 신이면 더 좋고 신이 아니면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든지 세계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에게 강팍하게 강포하게 야박하게 행해서 결국은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를 제시하는 것은 주께서 (오실 떄가) 가까우시니라 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소망이 되지만 그분을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잠시는 조화가 깨진 것 같고 망나니들이 설쳐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주님이 모든 것을 판단 내려주시고 악인과 선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그런 날이 다가와도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덕대로 산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관용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