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한 사역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1~5)
녹취자: 송미옥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 복은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나 이런 것으로 주어질 테니까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복된 생활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확하게 말을 하면 성경은 우리를 그런 도구로 쓰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복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첫 번째 말씀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어다.’ 단순히 물질이나 권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것 그것이 구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이상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그 복이 훨씬 더 포괄적이면서 영적인 면까지 같이 들어오는 에쉐르의 복을 포함하는 그런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요셉이 노예로 팔려오게 됩니다. 일생 동안 가슴에 상처가 될 끔찍한 형들의 배신을 통해서 아빠도 몰래 이역만리 먼 곳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이제 요셉이 끌려왔는데 요셉은 샘 족입니다. 족속으로 볼 때 샘 족속이었고 샘 족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끌려온 애굽 땅은 함족들이 있는 곳입니다. 함족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글자를 에집티안 하이오그라피 라고 하는데 에집티안 하이오그라피와 가나안에서 쓰고 있었던 샘족어 문자 자체가 다릅니다. 거기는 상용문자입니다. 중국말하고 비슷하게 상용문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언어가 안 되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외국에서 저기 변방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우리로 말하자면 대통령 경호실장쯤 되는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보십시오. 당연히 사람 사는 사회이니까 사람대접 못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서 그 가정의 총무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요즘으로 말하면 집사가 된 것입니다. 높은 고관 대장집에 얼마나 많은 하인들이 있고, 출퇴근하는 종들도 있을 것이고, 나라에서 녹을 먹는 사람들도 있고 그 집안만 돌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인데, 어떻게 그 집안의 전체를 관장하는 집사 총무가 되었을까? 하는 것도 참 궁금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런 긴 이야기들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형통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애굽의 집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히브리에서 싼값에 팔려 온 노예가 그 집안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온 집안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형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짜라흐’라는 단어입니다. 길 같은 것들이 굳거나 혹은 굴곡이 지거나 하지 않고 대로처럼 쭉 펼쳐진 것을 이야기합니다. 옛날의 관습을 보면 ‘킹스 하이웨이, 왕의 길’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자주 나옵니다. 그것은 옛날에는 왕이 행차하게 되면 어느날 어느시 왕이 행차를 한다. 라고 하며 보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선포를 합니다. 외치는 자가 선포를 합니다. 선포를 하면 뒤에 곡갱이 삽 이런 도구들을 든 인부들이 쭉 따라옵니다. 그러면서 높은 곳은 깎아서 낮추고 낮은 곳은 흙을 부어서 돋우어 길을 빵빵하게 만듭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후 왕의 마차가 지나기 때문에 길이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덜컹거리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이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서서 외치는 선포가 바로 그런 장면을 마음에 대로를 내는 사람으로서 선지가가 온 것입니다. 그런 대로가 만들어져서 쭉 펼쳐진 상태를 ‘짜라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거침이 없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질서’입니다. 질서 정연하니까 모든 것들이 가장 좋은 질서를 따라서 쭉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이 있었지만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니까 그 집안에서 ‘짜라흐’되지 않던 것들을 다 제자리에 놓으면서 쭉 흘러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데 갈등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이 30~40%는 ‘금년만 일하고 사표를 내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직장 나오는 것도 너무 싫어하고, 이렇게 싸우고 갈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발령이 납니다. 리더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새로운 리더가 발령이 납니다. 그런데 6개월도 안 되어서 직원들의 사기가 살아나면서 사표 내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다 철회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새로운 리더가 와서 위에 건의해서 연봉을 올려주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쓸데없는 고통이 절약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비엔노우덴미’라고 해서 ’질서 지어진 선한 삶‘이라고 한 것도 바로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질서 있게 제자리로 돌아가면 에너지의 낭비가 없고 그 구성 요소들이 모두 적합하고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짜라흐‘입니다.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불도저를 밀듯이 한꺼번에 모두 다 쓸어버리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만이 형통이 아니라 질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하나님 앞에 형통하게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질서입니다. 불끈불끈 솟아나는 자신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거나 질서를 흐뜨러트리지 않는 사람은 그게 내면의 질서입니다. 그런 형통함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인생길을 가는데 에너지가 드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은 에너지가 안 듭니다. 그런데 가다가 난관을 만날 때 에너지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피 흘리고 눈물 흘리며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고통은 걸어온 길이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런 길이 있지도 않지만 꽃 길만 걸어온 사람의 10km와 뻘밭을 걸어온 사람의 10km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서 모든 사람들이 형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복을 주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에라카’라는 단어는 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세속적인 복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그런 의미의 광범위한 복입니다.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복을 받았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아서 중국어로 행복을 ‘신푸’ 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신’이 ‘어쩌다가’라는 뜻입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복이 흔한 상태는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 늘 시련과 역경을 만나는데 그렇지 않은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드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행은 무엇입니까? 불행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불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복이 임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특별한 복이 임하여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덩어리와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복덩어리가 바로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순간 여러분 모두를 아브라함처럼 ’너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네 안에서’라고 나옵니다. ‘베카’라고 나옵니다. 우리와 만나는 모든 사람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삶을 살면 본인 자신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 두 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면서 자신은 행복하다는 것은 사이코패스들이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통하게 한 사람이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이 애굽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의 가축들로부터 모든 가족들에게 이르기까지 논밭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은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복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 그래서 우리도 가끔 드물긴 하지만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이 정말 내 인생에 대박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로또였습니다. 밥 사줄 때 한 번만 말하면 안 되지만 두고두고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이렇게 할 정도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서 그렇게 형통하고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요셉 자신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선 학식이 그렇게 뛰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골에서 아버지의 사람을 받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상상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예로 끌려갔으니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후광을 입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심방을 갔다 왔는데 신입 직원 뽑는 이야기를 하는데 스펙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대기업에 원서를 내려고 하면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은 기본이고 UN에서 근무를 했고 스펙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네 회사가 모든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순위 1위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들어와서 1년 있으면 절반이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결국은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형통함을 가져다주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스펙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그것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향력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요셉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이게 원인을 나타내는 성경 구절입니다. 형통하고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비결은 단 하나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함께 하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다음 자주 나오는 말은 ‘히트 할라크’라고 하는 동사가 쓰여진 것인데 ‘동행하다’입니다. ‘다윗이 어디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니라’. ‘하나님이 그가 어디에 있던지 함께 하시니’ 라는 것이 교차적으로 쓰입니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의미는 크게 무엇일까요? 존 오웬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물질도 아니고 옆에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입니다. 완전한 평화라는 것이 이 땅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시비조로 물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천국의 이상을 가지고 그리는 완벽한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이 공기 속에서는 거리가 좀 떨어지면 공기의 농도 자체 때문에 물체가 잘 안 보이게 됩니다. 중간에 나무가 가리지 않아도 제니스 망원경 같은 것들이 우주 밖으로 띄우는 이유가 굉장히 비쌉니다. 그거 하나에 10조씩 그렇게 쏩니다. 그런데 허블 망원경보다 더 100배나 더 밝게 한다고 합니다. 공기의 파장이 없는 우주로 쏘니까 거기는 거의 수소 이외에는 물질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별 가까이 가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멀어서 작게 보일 뿐이지 물질이 있어서 어둡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완벽한 평화는 이 세상에 없겠지만 그것은 마치 죄가 없는 사람과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거의 완벽하다고 느끼는 하나님과의 평화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상태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셉하고 다니엘하고 비교했을 때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은 하나님이 두 사람 다 지극히 높여서 국무총리를 삼으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지휘에 연연하는 모습이 안 나타납니다. 특히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이 잘 못한 것이 아니라 보디발의 바람난 아내가 뒤집어 씌워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의 무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디발의 아내를 고발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럴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높은 지위나 명예나 부나 이런 것들을 얻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정신이 그것을 감당할 만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 낸다는 마음을 가지고 상처를 영광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인생의 고통스러운 순간 닥치는 환란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들을 괴롭히기 위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것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생각 없는 로봇도 아니고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완벽한 평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의 한 요소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이야기하자면 ‘그 뜻 이루어지리다.’ 분명히 무슨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을 테니까 그것을 믿습니다.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고 형들이 다 돌아왔을 때 자기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을 보면서 그때 ‘아’ 하고 감탄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많은 백성을 살리시려고 나를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시점에서는 그 목적을 자신이 보고 있었고 그전에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입니다. 영광이라고 해서 월드컵에서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고 나 자신이 먼저 그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삶의 사태들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하심입니다. 이루어진 것을 보는 것은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면 요셉은 형통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을 받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안에서 가족들이 여러분 때문에 위로를 얻고 여러분들이 자기 맡은 자리에서 떠나면 모든 사람이 여러분들이 그리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과 있었던 때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