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인턴십 개강예배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못 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사 6;1~8)
녹취자: 허혜숙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것처럼 목회는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1993년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국민소득이 약 12000~13000불이 되던 시대였고 지금은 4만 불을 바라보는 시대이니까 사회도 많이 발전했고 그 30년의 시간 동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사회가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1993년도에 목회할 때는 아직 한국 교회의 부흥의 기운이 남아있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갈망이 식지를 않아서 비교적 목회가 쉬웠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때 모두가 목회를 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운 때였습니다. 그리고 개척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인구도 훨씬 더 많았습니다. 1985년을 기점으로 기독교 인구가 줄기 시작했는데 내가 개척했을 때로부터 8년밖에 안 되었던 시기였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기독교 인구가 많고 웬만하면 교회를 개척하면 그래도 열 교회 중에서 여섯 일곱 개 교회는 살아남았습니다. 지금은 열 교회를 개척하면 두세 개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집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특별한 준비를 위해서는 어떤 두 기둥이 필요한데 하나는 우리가 여태껏 고전적으로 알아왔던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학문적으로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 기둥이고 또 하나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에 대한 공부를 끊임없이 하면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인가 여러분들도 아마 젊은 20대들이나 지금 10대들 하고 이야기를 하면 통하지 않은데 옛날에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심합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준비를 철저히 하고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가져서 현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가고 어떤 식으로 살기를 원하는가를 함께 공부해 나갈 때 그때 비로소 그들에게 알맞은 목회의 방식들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그런 점에서 시대라기보다는 고전적으로 목회자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는 웃시야 왕 때였고 그리 훌륭한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유능한 임금이었고 웃시야가 죽던 때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 선지가가 성전에서 선지자로 소명을 받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부르실 때 똑같이 이 네 가지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성전에 들어가서 스랍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스랍은 하나님의 왕명을 받드는 천사들인데 그 스랍들이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아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데 그럼 도대체 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장 흔하게 많이 사용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그분의 이름이 좋은 평가를 받게끔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효과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순수하게 목회를 잘하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통해서 ‘아,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시구나’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이름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뭐라고 하던 변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하나님의 이름은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욕 먹이는 삶을 살아가면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뚝 떨어져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안 믿으려고 하고 하나님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구약 같은 곳에서 보면 하나님이 어떤 한 장소를 선택하셔서 나타나십니다. 모세가 타지 않은 가시떨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거나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사도바울이 만나는 장면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어느 한 장소에서 특별한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나타나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데 어쨌든 그것이 너무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에 다른 것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에서 경험한 것은 바로 그 장소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발산해주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직접 보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장소를 구별하셔서 특별히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누구인지 알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그것이 목회자의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가 부른 사람도 아니고 혹은 자신의 야망이나 비전이 부른 사람도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그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에게 나타났을 때 모든 사람이 그 영광을 알기를 바라는 열망을 갖는 데서 목회의 사명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이런 것들이 매우 옅어집니다.
제가 신학대에 입한 것이 1981년도입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채플을 드렸는데 채플 시간이 온통 눈물바다였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 설교하러 올라오는 목사님들 중에서 설교를 제법 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어떤 분들은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채플 실이 눈물바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들이 성경을 잘 해석하지는 못해도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간증을 한 토막 해도 사람들에게 깊은 도전을 주어서 약 천 명씩 모인 채플 실이 눈물바다가 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신학생이었을 때 내가 설교를 해도 학생들이 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 밭이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생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심지어는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한 다음에도 다른 사람의 곤고함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교역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닭이 병아리가 되어서 계란 속에 있을 때는 계란 속이 자기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알지만 부리로 알을 깨고 밖에 나온 다음에는 처음에는 한참 동안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서 있습니다. 모든 병아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지금 눈앞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씩 그 세계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알에서 깨어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중에는 그 소리가 이해가 되시는 분들도 있고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의 목회의 소명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의 첫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이런 영광을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냥 그런 것을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나타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 바울 같은 경우입니다.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갑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타나십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목회자 아내 인턴 십은 지금 11기인데 목회자 인턴십은 제 생각에는 30기 정도 한 것 같습니다. 모두들 굉장히 열심히 배웠습니다. 제가 아파서 조금 쉰 적이 있는 외에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중에 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을 낳았습니다. 어려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을 낳았는데도 아내가 서른 살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간암 말기였습니다.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전까지 아내에게 맨날 듣는 소리가 당신은 어떻게 전도사나 되어서 그렇게 게으르냐? 기도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느냐? 아내가 오히려 주님을 더 깊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늘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깊은 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선고하기를 6개월 이상 못 산다고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면을 다 돌아보아도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했습니다. 매일 밤 열두시에 숲속에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밤 11시 반쯤 되어서 방석 하나 들고 그때가 2월쯤 됐으니까 추울 때였습니다.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까 결심을 하고 방석을 가지고 밤 11시 반쯤 가서 12시부터 숲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6개월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의사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6개월 만에 아내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이 형제의 고백이 결국 하나님이 너무 너무 변화되지 않은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내를 데려가셨다 이것이 그가 6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6개월 동안 사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을 텐데 아내가 가고 나면 아이들 둘 네 살 두 살인데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없이 답답한 마음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아내는 안 살려주셨는데 죽었던 그 전도사의 영혼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자기가 살았던 삶을 비교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목회를 하면서 살아야 될지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면 두 번째로 어떤 단계가 오느냐 하면 비로소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면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 성령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남부의 알라배마라는 주에 가면 마스터 이지트 관광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곳은 헬렐켈러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이었습니다.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가서 보면 저택의 규모가 약 2천 평 정도 될 정도의 넓은 정원을 가진 집이고 하인들이 살던 집들도 있고 2층으로 된 집에 헬렐캘러가 살던 본가가 있습니다. 그때가 1800년대인데 펌프 중에서도 밀펌프가 있었습니다. 물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이 오를 때도 나오고 내릴 때도 나와서 보통 펌프는 잡아당길 때만 물이 나오는데 이 밀펌프는 항상 물이 계속 나오게 되어 있는 그 당시에는 최신 기계였습니다. 그런 펌프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헬렌 켈러는 눈도 못 보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벙어리인 채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을 붙여주었는데 이 설리반이 헬렌 켈러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포기했을 텐데 헬렌 켈러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Water라는 글자를 가르치고 그것을 손에 써 주고 점자로 읽을 수 있게 해 주고 그 다음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펌프 가에 가서 물을 퍼서 그 물을 손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사물 하나하나를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미국을 움직이는 훌륭한 작가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미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데 가 보니까 헬렌 켈러의 사진이 있고 그림이 있고 그 밑에 헬렌 켈러가 자기 손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의 구절이 쓰여 있습니다.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처럼 헬렌 켈러가 아무리 설리반 선생님이 water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를 못 할 텐데 물이 손에 닿는 순간 여태까지 선생님이 설명했던 설명이 살아나고 그 다음에 이 경험은 그 설명이 무엇인지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설명이 없이 이 물이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기만 샜더라도 부족했고 물을 직접 경험하지 못해도 부족했을 텐데 이 두 가지가 온전하게 되는 것처럼 성령을 경험한다 라고 하는 것이 그런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입니다. 죄도 똑같습니다. 죄에 대해서 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은 성령의 작용이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때 그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니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그 영광의 빛 아래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햇빛이 찬란해야지만 그림자가 뚜렷하듯이 그렇게 죄를 보게 되고 그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보면 설교를 하거나 아니면 기도회를 하거나 하면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계속 눈물을 흘리지 어제까지는 눈물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오늘 처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주 희귀합니다. 드믑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또 만나는 것이지 못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입니다. 이것이 생애에 한 번밖에 없는 회심의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목회자도 사모도 모든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것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깊이 애통하게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면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도다,’ 하면서 탄식을 합니다.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재앙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것이 재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재앙스러운 상태에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과 자기가 진심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교회에서 있었던 한 일입니다. 제 책에 영향을 받은 어느 목사님이 주님을 깊이 경험하고 자기가 진짜 목회를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죄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났는데 어느 유력한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이 이민교회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둘러앉아서 도시락 같은 것을 먹는데 정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사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일주일 동안 너무나 힘들게 살다가 교회에 왔는데 교회에 와서 주일 날 스트레스를 훨씬 더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로를 받으려고 교회에 왔는데 교회 오면 계속해서 자기를 긴장시키는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이고 왜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진노하시는지를 설교하는 그 설교가 자기는 너무 지겹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발 그렇게 설교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항의를 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영광을 경험하고 죄를 회개하면 회개하는 그 순간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고통이 사실은 그 여자가 느끼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라 즉시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아파하는 통증을 느끼는 것만큼 즉시 하나님이 놀라운 기쁨을 그에게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기는 한데 그것이 그냥 살을 찢는 것같이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몰랐던 놀라운 기쁨을 하나님이 함께 주시면서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즉시 고통과 함께 놀라운 위로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통회할 때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아픈 것만큼 즉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이 선지자 이사야가 만약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식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별명을 저는 하나님 영광의 신학자라고 봅니다. 관심 자체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했더니 그 영광을 자기의 선포의 주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깊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명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성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애통하면서 괴로워할 때 천사가 날아와서 재단에 핀 숯불을 들어서 선지자의 입술을 지집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며’ 사실은 입술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을 자신의 온 인격을 대표하는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입술을 제시하는 이유는 이 순간이 이 사람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될 텐데 입술은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고 인격 전체를 이야기하는데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만한 선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입술을 지으시는데 그 입술은 하나의 모든 인격과 마음과 영혼을 대표하는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이고 예를 들면 ‘혀는 칼보다 강하다’ 이것은 언론이 독재보다 훨씬 더 힘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제유법적으로 입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을 지져버리심으로 하나님이 이 선언을 하십니다. 너의 죄가 사하여 졌도다. 세 번째가 용서의 경험입니다. 우리 중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 자기가 완벽하게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일반적인 섭리의 복이 있고 특별한 섭리의 복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섭리의 복은 다른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서 방황을 하고 있는데 큰 교회에 발탁이 되어서 담임목사로 가게 되었더라, 이것은 일반적인 섭리입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너무 똑똑하고 잘 났더라, 최근에 영재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IQ가 204로 측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네 살 다섯 살에 미적분을 풀었던 것처럼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아이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해서 열네 살에 외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했다더라. 이런 것들은 일반 섭리입니다. 딸을 낳았는데 너무 예쁜 아이가 태어났다더라, 아주 재능이 있다더라, 아니면 시아버지가 생각보다 일찍 죽고 많은 유산을 남겼다더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특별 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복입니다. 사죄 같은 것들은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들은 특별히 사모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영적인 복을 받음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 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고 누구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자랄 때 그때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의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에 의해서만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거기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경의 뛰어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뛰어났기 때문에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뛰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어떤 식으로 경험했느냐 하면 모두 죄의 용서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이사야 선지자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봉과 같은 인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를 용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서 드는 것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입니다.
목회의 소명에 대한 중요한 증거는 신학교에 붙거나 아니면 남편이 좋은 교회에 청빙을 받는다고 해서 나의 목회의 소명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의 소명에 대한 증명은 영혼에 대한 연민에 있습니다. 영혼이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저 사람들이 너무 불행하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도와줘야 되는데 이 일이 너무 시급해서 도저히 내가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그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수있는 모든 기회를 포기하고 마치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놀이를 할 수도 있고 소꿉장난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지금 돈을 벌 수도 있는데 사람이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피를 쏟으면서 쓰러졌을 때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고 저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성도들도 다 느끼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심지어 좋은 직업을 가졌는데도 그 직업을 버리고 열심히 영혼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자매 하나가 아주 똑똑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어느 학교에 최종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좋은 보수와 좋은 집이 보장이 되어있는데 면접에서 마지막 조항에 이 학교에 오려면 학교에 있는 교회로 옮겨야 된다 그러니까 이 자매가 저는 못 합니다. 저는 열린 교회 구역장이기 때문에 제가 교회와 구역장을 버리고 교수가 되기 위해서 이 교회로 옮길 수 없습니다. 결국 안 됐습니다. 그 학교에서 너무 아까우니까 강의만 하는 교수로 불렀는데 엄청난 손해입니다. 그런데 일반 평신도 중에서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정도가 훨씬 심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이 너무 가엾기 때문에, 이것이 비상 상황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포기하고 다른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도록 내 마음이 허락을 하지 않은 것,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불행에서 건져주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강제력을 마음속에 느끼는 그것이 목회의 소명이고 선교의 소명입니다. 그것을 사죄의 경험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니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죄를 깨닫고 용서받는 깊이만큼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Amazing Grace’의 가사를 만든 사람이 존 뉴턴 목사입니다.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목회자로 일생을 삽니다. 마지막에 나이가 들어서 자꾸 깜박깜박합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치매를 염려합니다. 그 때 존 뉴턴 목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늙어서 정신이 흐려져도 두 가지 사실만큼은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 죄를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사죄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 반복되어야 할 그것입니다. 모두가 목회를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것은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교회의 순수함입니다. 칼빈도 이야기 했습니다. 등대의 불빛이 봉화대의 불처럼 몇 트럭의 장작을 피워야지만 등대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등불 하나 켜져 있어도 주위가 어두우면 충분히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폭풍을 만난 배들이, 태풍을 만난 배들이 항구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교회가 아니라도 비록 50명 100명 200명 모이는 교회라 하더라도 그 교회에서 이런 정신을 드러내고 그 정신을 교인들에게 심어주면서 목회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소명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갈망을 품게 하셨을 때 말씀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할 때 “here am I”,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잘난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아니면 누가 일하겠는가? 라고 하는 헌신의 마음,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된 것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부교역자로 혹은 담임목사로 일하시지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사람한테서 좋은 목회가 나올 수 없고 좋은 목회를 하는 사람이 망가질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니까 조금씩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일은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를 그런 식으로 하는 그 사람이 망가집니다. 내면의 세계가 망가지고 성품이 망가지고 굳어져 버립니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역자가 ‘목사님, 열린 교회 오니까 살 것 같아요’ ‘왜요’‘여긴 그래도 선배들이 때리지는 않잖아요’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전에 있던 교회 교역자로 있을 때 자기 말투가 선배에게 조금 거슬렸던 것 같습니다. 수석 목사가 ‘쟤 좀 데려가서 손 좀 봐’ 그러더랍니다. 진짜 선배 목사가 자기를 교회 뒤로 데려가서 정신없이 두들겨 패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했더니 그 교회에서는 그랬는데 열린 교회 오니까 아무도 때리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자기가 정말 소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야단을 맞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폭력을 교역자들 사이에서 행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얼마나 그 사람의 인성이 망가졌는가를 보여주는데 망가지는 계기는 어느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사람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한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시체가 있었던 것처럼 결국은 내면의 세계가 바뀌지 않을 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망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래전에 이 책을 썼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하실 교회였는데 교회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자세히는 밝힐 수 없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천에서 목회하는 어느 교회 사모인데 이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이 있어서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통화해도 되겠습니까?’‘네 그러시죠.’‘목사님, 저희 교회는 그렇게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1700명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170명 모일 때 1700명이면 엄청 큰 교회입니다.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기도로 일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답니다. 특별히 아프거나 병원에 가거나 하지 않고 살았는데 목사님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뭐가 이상하냐고 했더니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먼 동네를 심방하러 가게 되었답니다. 먼 동네를 심방하러 가게 됐는데 목사님이 성인 오락실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성인 오락실이라고 옛날에 돈을 집어넣으면 드르륵 돌아가는 슬럿 머신이라고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동네에 1층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속이 다 보이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목사님이 담배를 입에 물고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상상하지도 못한 목사님의 행동을 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겠느냐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뭐냐면 결국은 사는 것과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함께 흐르면서 가잖아요? 물론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때는 낙심을 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목사님들은 소명을 받고 굉장히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이것을 그만두고 일반 직업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있는데 담배를 피우는 것이 꼭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상반된 모습을 갖고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두 개가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만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만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확실하게 소명을 받으면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이 최초의 훈련을 통해서도 아들이 목사인데 늘 빼놓지 않은 기도가 박사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그 기도가 첫 번째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가장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소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소명을 가지고 할 때 그가 무엇을 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남의 교회에 청빙을 받아 가든지 개척을 하든지 아니면 어느 교회에 가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어느 기관에 가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든지 간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봐야 알 것입니다. 왜? 그가 그렇게 확실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주위를 의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소명을 받아서 정말 이슬같이 짧은 일생동안에 하나님께 깊이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이 교회를 개척했을 때 서른아홉 살이었고 이 교회로 이사 왔을 때 마흔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것이 아주 잠깐 지는 해의 볕과 같은 잠깐 깃드는 시간입니다. 급히 지나갑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동안 소중하게 쓰임을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