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 4단계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사 6:1~8)
녹취자: 황인준
이 장면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전체는 한 가지 주제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외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그 시작점이 바로 이 6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소명 단계를 보여주는데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로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선포에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게끔 만들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스랍’, 곧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이 스랍들이 영어에서는 ‘체로빔’이라고 희랍어에서는 ‘그룹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천사들 가운데 스랍이라는 천사가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6개의 날개가 있는데, 두 날개로는 눈을 가리고 두 날개는 다리를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는 날아다니면서 찬송을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광경을 보면서 이사야가 깊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넓게 보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사전에는 길게 나오는데 사실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하나는 이 하나님의 영광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영광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대청봉이나 설악산의 아주 높은 봉우리를 올라 서 보면 땅 아래 있는 것들이 시시하게 보이듯이 또 로키산맥에 올라갔을 때 3,000미터 되는 봉우리들이 천 킬로씩 이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저 아래 있는 새카만 동네들이 하찮게 보이는 느낌. 그리고 웅장한 자연 앞에 섰을 때, 한없이 자신이 쪼그라들어 보이는 느낌을 받는 것의 무한한 연장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때 느끼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그 영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자기는 정말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니 이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의 거룩함의 경험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영광을 보여주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하는 찬송이 세 번이나 삼위일체를 암시하듯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의 소명을 받는 것도 역시 똑같은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그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그들을 옥에 가두기 위해서 그는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되었습니다. 옛 설에 의하면 그의 안질도 그때 그 영광을 경험하면서 생긴 질병이 아니냐는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튼 그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며 자기가 한없이 미천한 존재고 자기가 불결한 존재임을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의지하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었으니 그 말이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하고 묻는 회심의 장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러한 영광을 깊이 경험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소명이 목회의 소명이나 선교사의 소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이 있습니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목회자의 사명과 신자의 사명의 수준의 차이이지 본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그 신자의 사명을 아주 많이 느낀 사람들이 결국은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영광에 압도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 경험이 바로 자신의 인생의 관점이 자기가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천동설 지동설이 있을 때,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제 이후에 있었던 인물 중에 프톨레이마오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의 시대에 이미 학자들이 천동설에 대한 이론을 세웁니다. 그게 계속 지속되어 왔는데 지동설이 생겼을 때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왔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거나 혹은 자기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수많은 가변적인 것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죄로부터 떠나게 되고 자기 중심성을 버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데 그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심.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앞으로 달려온 역사와 현재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 달려 나갈 역사를 한눈에 보게 되면서 이전에 유대교 신자였었던 때에 갖지 못했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세상과 종말에 대해 교회의 운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던 것들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 영광에 깊이 압도당함. 그것이 말하자면 첫 번째 단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신자의 삶 전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나 혹은 이사야 선지자의 성전 안에서의 그의 생애 한 번뿐이었던 이런 종류의 체험이 365일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굳이 사람을 그렇게 하실 필요도 저는 없다고 봅니다.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을 위해 충격을 줄 때, 그 충격이 365일 계속되면 그것은 아이에게 충격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이사야의 인생 가운데도 이러한 경험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아주 작은 이 경험의 반복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그때 받았던 깊은 충격,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정말 소중한 인간이라고 하는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마지막 남은 개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소중하고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는 이 현대의 시민 사상도 결국은 그 인간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어디서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AI가 퍼졌습니다. 인공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류인플루엔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AI가 퍼지면 제일 먼저 경상도 지역 그리고 사방 30km 울타리를 칩니다. 그리고 차도 못 다니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닭들은 다 살처분해버립니다. 코로나가 서울에 퍼졌다. 서울 외곽 20km 전부 방어하고 안에 살처분하지는 않습니다. 살처분했다면 중국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짐승이 닭이 아니고 소라도 그렇게 죽일 것입니다. 광우병 사태가 났을 때, 영국에서 천만 마리의 소를 죽였습니다. 상상이나 가십니까? 6천만 명이니까 6명당 한 마리씩 먹을 수 있는 소를 죽여서 묻은 것입니다. 묻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엄의 근거를 갖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는 모순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정말 존엄한 자가 되었다는 이 두 가지는 결코 모순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후자가 있어야지만 전자가 생각이 가능한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너희의 제물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 우리의 제물은 돈이나 주식이나 빌딩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의 커다란 재산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처음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가면 그 영광의 경험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가 질서정연하게 다시 배열됩니다. 그래서 마치 동굴에 갇혀 있는데 구멍이 저 위에서 뻥 하고 뚫려 빛이 들어온다면 처음에는 조리개가 조절이 안 되어서 빛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굴 안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물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사물의 질서, 그 존재의 질서와 같이 그것을 뒤집으며 사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아들보다 강아지를 더 이뻐하고 자식에게는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편보다 강아지를 더 사랑하고 그래서 나이 든 남편들이 이사 갈 때 강아지를 꼭 안고 있으면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이사한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질서를 뒤집으면서 살고 최근에 보험이나 돈을 노리고 자기 부모를 죽이는 사태도 벌어지듯이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사물들의 질서가 바뀐 것입니다. 질서가 바뀐 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다시 질서가 정연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두 번째 요소는 그렇게 질서가 바뀐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그게 자신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게 너무 더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회개하게 됩니다. “화로 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배웠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않으면 기껏 생각나는 것은 윤리적인 죄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태도가 회개하는 것이 마치 형식적으로 쓰는 반성문을 쓰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런 정도밖에 회개가 안 되니까 그 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윤리적으로 회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열심히 인도 위쪽 지방에서 가난한 자를 도우며 살았던 사람인데 죽고 나서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가운데 유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어느 사제가 받은 그녀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개인적인 카운셀링을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여성들을 위해서 헌신하였는데 말할 수 없이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습니다. 왜 저에게는 내 영혼에 한 줄기 빛도 비추지 않는 것일까요? 기도는 할 수 없고 가슴은 답답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지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한 기록을 써 내려가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것을 읽는 순간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연설해야 했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였고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기부금도 들어왔을 것입니다. 바쁘게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바쁠수록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한다고 노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혼은 너무 곤고하고 어둠 속을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얼마든지 처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봐주는 나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사이에 차이는 나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모릅니다. 그나마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나 자신입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자신을 깨달으며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나니 하나님이 스랍 중 한 천사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 집은바 제물을 태우기 위해 타오르는 불이 있는데 그것이 숯이 되었는데 그 숯 하나를 집게로 집어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데게 됩니다. 그러면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용서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 세 번째 요소가 용서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이러한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얼마나 불쌍히 여겨 주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아니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오. 용서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빛나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식이 입술에 숯불을 지져서 죄를 사하여졌다는 데 왜 하필 수많은 몸의 백체 중에서 거기였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은 소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람이었습니다. 그 입으로 모든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함께 나온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 입술을 하나님이 할례 시켜 주듯이 불로 지지셔서 그 입술을 거룩하게 한 것은 하나의 제유법적 표현이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 전체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합당한 사람으로 삼아주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가 주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소서’ 하면서 응답함으로써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며 이사야 예언 시대를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순교 당해 죽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사야 같은 선지자한테 비유하자면 목회자들은 가장 앞세워야 할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해도 사실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습니다. 여태까지도 못 알아들었고 지금도 못 알아듣고 있고 앞으로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 그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말씀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는데 공부도 잘하고 인격도 뛰어나고 똑똑하며 세상도 너무 잘 아는데 인간도 잘 다룰 줄 알면 아주 큰 교회를 해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재능이 없으면 교인 20명을 모아 놓고 목회를 해도 목에 칼에 들어오더라도 그 메시지를 바꾸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다가 죽는 겁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교회의 가치는 교회의 순수성에 달려있습니다. 그 순수성은 사상적 순수성과 윤리적 순수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전파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 말씀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에게 적용하자면 삶 전체가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이 네 가지의 끊임없는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크게는 일생에 한두 번밖에 못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것과 나는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작은 낙엽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 가족의 생일이 있어 형제들끼리 만났는데 어쩜 그리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지 우리 삼 형제가 전부 환갑이 지났다. 엊그제 같습니다. 셋째가 청소년 때 뛰어놀고 “형 오늘 30대의 마지막 날이야”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저도 서랍을 뒤져보면 “교수님, 오늘이 교수님 30대의 마지막 날입니다.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이처럼 세월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결혼했다고 신방 온 게 엊그제 같은데 큰아들이 벌써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인간이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자신이 하찮은 인간이고 필멸의 존재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넷길과 같은 것이고 풀잎 끝에 달린 이슬방울 같고 추운 겨울에 창가에 맺힌 성애와 같아서 햇빛이 돋으면 모두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같은 그런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삶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용서해 주시고 깨끗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마음이 생기고 나면 ‘하나님 내가 오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태어나서 좋은 학교 가고 좋은 데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결국 세월이 지나서 자신도 죽고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놓고 보면 우리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깨달으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자기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사라져갈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