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6._교직원예배
신앙과 관용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녹취자: 황인준
사람은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온갖 일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말할 때, 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기도 하지만 온갖 것을 겪으면서 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태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겪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중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겪는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겪으면서 살아오는데 좋은 일만 겪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매우 힘들고 나쁜 일도 겪게 됩니다. 때로는 그 겪은 것이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뿌리고 거둔 것일 수도 있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당함으로써 겪어야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자기 잘못도 있고 또 나쁘게 당하는 것도 있고 섞여서 어쨌든 고통을 겪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지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한 것은 만족스럽고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나쁘고 힘든 일도 반드시 겪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가슴이 터질 것같이 행복하고 좋은 일들은 정말 예외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애에 단 한 번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떤 사람은 나쁘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것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주제는 굉장히 많은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요구하지만 거두절미하고 성경의 진리로 단순하게 돌아가 보면 요셉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형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팔려서 보디발의 집 노예로 끌려 옵니다. 그리고 정들었던 부모와 생이별하고 남의 땅에서 온갖 구박과 설움을 받으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당시 언어학적으로 보면 요셉이 원래 있었던 곳은 셈족 계열입니다. 그리고 이쪽 애굽에 끌려 왔을 때는 하미틱 세미토라고 해서 거의 함족 계열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사한 면이 있어서 옛날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아랍어가 필수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당연히 말이 안 통했을 것입니다. 통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자들 사이에서는 언어소통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시골에서 자란 청년에게 소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조선족은 한국에 와서 의사소통하면서 좀 대접받을 수 있는데 말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 여기에 와서 신분이 팔려 온 노예라고 한다면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험악했겠습니까. 그것을 다 겪고 주인에게 인정을 많이 받았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해서 죄수들과 함께 갇혀서 고생합니다. 대하드라마와 같은 일을 겪게 되면서 고생을 했고 오죽했으면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잊고 싶다고 지었겠습니까? 므낫세인데 잊고 싶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제까지 일어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싶다. 므낫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슬픔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다 돌아오고 가족도 돌아왔는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형들 입장에서 보면 ‘아! 이거 큰일 났구나. 우리가 한 일이 있는데 요셉이 우리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수준에서 남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인생관입니다. 그게 형들이 보는 인생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관점은 이중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중적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계가 있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자기들이 겪으면서 살아온 세계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요셉이 자기의 인생을 생각해 왔던 그 수많은 사유가 뭉치고 뭉쳐서 신앙화 되어 오늘 이 형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습니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이 자식을 떼어내는 것이었고 그리고 본래 죽여버리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팔아버리는 것으로 끝이 난 것입니다. 만약에 말리지 않았더라면 죽였을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팔았습니다. 결국 원하는 것은 요셉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부존재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부존재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미움, 살인입니다. 살인은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열망입니다. 그래서 미움이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살인의 동기가 미움이다. 그 마음이 극도에 다다르면 자신이 제거해서 부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게 이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을’이란 ‘당신들이 행했던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과 같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나이다.’. 인과관계를 보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더라면 흉년에 대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만약에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보디발 아내의 간악한 계교가 없었더라면 안 들어갔을 것이고 그리고 형들이 팔지 않았더라면 애굽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형들이 해하려고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팔렸을 리가 없고 결국은 하나하나의 고리가 좋은 일만 일어나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속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섞어서 그렇게 볼트, 너트 처럼 연결해서 마지막에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나쁜 사람이 되는 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더 좋은 사람이 되는 때도 있고 좋게 된 사람 가운데에도 어두운 그늘이 있고 어둡게 된 사람에게도 밝은 빛이 일부는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의 신학대전이 200페이지 책으로 약 60권 정도 되는데 그것 중에 30권이 윤리학, 책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그런데 그 윤리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은 맞지만 마지막까지도 윤리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이 그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주체성을 길러가면서 윤리를 증진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가 남게 됩니다. 재밌게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문제에 대한 부분인데 너무 철저한 양심도 좋은 것이 아니고 너무 느슨한 양심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한 양심이 왜 안 좋은 것이냐면 그것을 자신에게만 적용하게 되면 좀 덜하지만, 남에게 그것을 적용하게 되면 이 세상을 흑백논리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별로 좋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죄인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기에 지나치게 결벽에 가까운 양심도 완고해서 좋지 않고 너무 이완된 양심은 부도덕하게 만들고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라 중용의 덕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토대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신앙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나쁜 일을 만났는데 나쁜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왜 나쁜 일을 만났는데 좋은 사람이 되는지 그 대답 중의 하나가 끊임없는 매 순간 자신의 도덕적 결정이라는 점입니다. 주체자로서의 결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인의 경우에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끊임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함당하고 마지막에는 선하게 행했는데도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보통 사람의 경우 우울증에 걸리거나 울화병에 걸려서 자살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 요셉이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게 했느냐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시고 그 모든 사물을 그분이 당신 손을 붙들고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를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견디고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때로는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지만 필요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그 일의 의미는 뜻밖에도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야 알 수가 있고 여전히 어떤 일은 죽을 때까지 왜 내가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 안에서 소화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내 인생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확신 속에서 그분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 그때 악인을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현실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결국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아실 것이라는 확신도 생기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상처를 너무 받아서 사람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해석할 힘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