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련하시는 하나님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욥 24:10)
녹취자: 최연희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고난받을 때 위로를 받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겠다고 왔습니다. 그런데 위로가 아니라 사실은 욥을 깨우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욥이 당한 고난이 반드시 그의 죄 때문이다 확신하는 고전적인 인과응보론을 가지고 욥의 염장을 질렀습니다. 욥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의 그런 지적에 뭐 어떻게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정직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자신도 믿었는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시고 왼쪽에서 일하시나 만날 수가 없고 오른쪽으로 돌이키시지만 내가 그분을 뵈올 수 없구나. 이 큰일이 일어나기 전 욥의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까? 깊은 밤 하루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을 뵙습니다. 그러면 하루의 모든 피로가 녹습니다. 슬픔과 고통, 어떤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그런 아픔이 있지만 그런 하나님을 뵈옵는 기쁨이 있기에 우리들이 다시 힘을 얻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욥이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환란을 당했고 자녀들도 다 죽었고 아내도 자기를 버리고 떠났고 홀로 남아서 기왓장으로 온몸의 헌데를 긁으며 저주받은 자의 표상이 되어 지금 이 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모르니 회개할 것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 반전이 바로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는 우리말의 역접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말을 반대로 뒤집는 것입니다. 어디 가도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다 그러니 이것은 절망인데 ‘그러나’라는 말로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위로의 근거를 하나님의 앎에서 찾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의 앎에서 위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앎이 어떻게 위로가 될까요?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렇게 했는데 그게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자신은 어둠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큰 고전적인 인과응보론의 창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쑤십니다. 그런 속에서 위로라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앎이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런데 자신도 모릅니다. 어디로 갈지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데 그게 위로가 됩니다. 무엇 때문이죠?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하시고 그의 선하심은 끝이 없기때문에 그가 아신다면 나의 이 고통에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여기에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어디론가 나를 이끌고 가실 것이다. 라는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앎이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냅니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서 산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행복이라는 것은 덜 불행해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더 큰 고통을 피하고 피하고 놀라서 다른 선택을 하고 하면서 최대한 덜 고통받는 길을 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마음으로 모든 일들이 잘 되고 좋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이상하게 세상의 일은 그렇게 뜻대로 펼쳐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 가슴앓이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은 저런 이유로 때로는 내가 왜 이 큰 불행을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게 누구도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그러나’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대로 남겨둡니다. 그리고 ‘그러나’의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가지고 위로를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그래서 언젠가 서가를 정리하다가 보니까 신학대학원 2학년 때인가 읽은 교과서를 발견했습니다. 펼쳐보니까 구약 이스라엘사라는 김희보 교수님이 쓰신 책이었는데 새카맣게 책에 필기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책 곳곳에 히브리어 문장이 머리 위에 여러 곳에 쓰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야다 아도나이 오티” 아마 제가 그때 작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그러니까 그것들을 썼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경제적으로 교회적으로 하여튼 오죽했으면 교회 지체가 “왜 전도사님은 기도만 하면 그렇게 서럽게 우세요?” 그때 유일한 위로가 “야다 아도나이 오티” “주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알고 계셨다.” 그 때 믿음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내가 압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로 갈지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이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붙드신 그 손을 결코 놓을 리가 없으며 그리고 살아오는 날 동안 걸어온 모든 길을 추억하면서 그분과의 인연이 일이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가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이끄셨다는 그 확신을 가지고 ‘그러나’의 믿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 ‘그러나’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옛날에는 ‘정금’이라고 번역했죠? 지금은 ‘순금’이라고 했는데 “순금같이 되어서 나아오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단련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에 ‘차라프’(tsaraph)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게 옛날에 금을 만드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금을 채취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제가 강원도에서 본 것은 사금 방식의 채취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금이 들어있는 광석이 나는 광산이 있습니다. 금 덩어리가 나오는 게 아니라 금의 성분이 섞여 있는 광석을 금광석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광석을 캡니다. 아랍 시대부터 이제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 화학과 과학에 몰두했는데 그게 인제 말하자면 연금술 혹은 야금술이었습니다. 야금술과 연금술은 다른데 금을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기계는 아마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과학자들이 나중에 왜 그렇게 어려운가 알고 보니까 어떤 원소가 H를 기본으로 해서 수소를 기본으로 해서 그 원소가 변형을 하는데 헬륨같은 것들은 한 3만도 정도면 헬륨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그건 어려운 게 아닙니다. 금으로 변하려면 50억도의 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 열을 낼 수 있는 것은 현재로는 불가합니다. 기껏해야 뭐 1억도, 3억도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정도의 열이기 때문에 못 내는데 그런데 인제 그런 금이 그래서 굉장히 귀합니다. 그것을 철광석을 가지고 이걸 기계로 빻습니다. 가루가 되잖아요? 그 다음에는 이제 물을 흘려보냅니다. 물을 흘려보내는 비중에 의해서 이게 이제 돌은 돌대로 금가루는 금가루대로 모입니다. 모인 그것을 거둬서 부유법이라고 해가지고 거품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으키면 그러면 다시 그 비중이 정교하게 구분이 되면서 다시 더 순수한 금가루들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그 골짜기에서 지금도 막 금을 줍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손톱만한 것도 주웠다고 하고 사람도 있습니다. 가지고 가서 성분 조사해보면 100% 99% 금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잖아요? 그것을 용광로에 넣습니다. 그 도가니입니다. 그리고 끓입니다. 그 용광로는 흑연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흑연이 가장 오래 열을 견디니까 그러면 이제 다시 끓이면서 찌꺼기들이 가라앉고 그 비중에 의해서 다시 이제 그 말하자면은 순전한 금을 부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할수록 이제 순전한 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겪는 모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자신은 가는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용광로 같은 곳에서 부어서 찌꺼기들을 끊임없이 걸러내면서 순수한 금 같은 존재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연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욥기를 시작할 때는 이 정도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받으면서 23장쯤 와서 이 정도의 믿음이 생기고 그 뒤에 가서는 더 큰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생기게 되면서 결국은 어디로 집중하게 되냐 하면 아 자신이 자신을 하나님이 더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런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이 그러나 신앙의 정체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놀라운 행복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나는 지금 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알면서도 인도하신다 나를 그렇게 정결하게 다듬으신 후에는 내가 순금처럼 될 것이고 거기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때로는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는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또 인간관계 때문에 그런 것들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시면서 마음속에 ‘그러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녹여내면서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나를 순금 같은 존재로 만들어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으로 나를 빚으실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내가 우리 주님과 더욱더 가까이하며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