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서식 한글에서 작성된 문서입니다.
생명의 빛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녹취자: 양현정
여름이 왔습니다. 여름이 목회에서는 추수기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여름 수련회를 비롯해서 성경학교 등 교인들의 신앙을 북돋는 프로그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잘 농사를 지어서 그다음 하반기에는 그 사람들을 그 신앙을 계속 돈독하게 유지하게 하고 전도대원 모이는 사람들을 더 떨어지 않고 예수를 계속 믿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하반기 목회사역이고 11월에서 12월 정도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있는 사람들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를 옮기려고 작정을 하는 때입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이 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잘 붙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앙감정론, 다른 것들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회심의 중요성입니다. 중생과 회심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일대학교 다니던 대학원 시절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알미니우스 주의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말을 타고 산책을 하다가 디모데 전서 1장 17절 "권세가 영영 아버지께 영원히 있을지어다"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체험을 하면서 우리가 아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으로 신학적인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쩌면 진정한 지성적인 회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되고 난 다음에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은 바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지만 그 당시 사회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유아세례와 결혼과 장례, 이 세 가지는 교회에서 치르기를 원했고 교회가 그런 점에서 지역 사람들의 인구 행정을 도맡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중생하지 않은 사람, 회심은 그 중생을 최초로 의식 속에서 느끼는 것이니까 사실 중생과 회심을 그렇게 분리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든 중생을 포함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신령에 대한 것에 감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신령함의 핵심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 느끼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 느끼게 되니까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의 기호투성이이고 부분적으로 이해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와서 닿질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그 사람들은 선과 이런 것들이 세속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캇 팩이라는 정신과 의사이자 상담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글들을 많이 썼는데 수많은 악인들을 상담해 보고 결론은 '종교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악은 정신과적으로 정리는 안 되어 있지만 자기는 그것을 정신병적 증상으로 본다. 다른 정신병적 증상과 구별되는 증상은 끊임없는 자신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측면이 많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환경도 많지만 그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조사 대상에 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듯한 신앙인이었고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고 윤리적으로 굉장히 모범적인 삶을 살고 삶의 질서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통점은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자신의 악에 대해서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의 특징이다'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도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을 올바른 방식이라고 고집하고 남에게도 강요하고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식의 삶의 스타일을 취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결국은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결국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한 마디로 신령한 것을 하나님이 밝히 보여주셔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해의 빛이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도 숨기지 않으시고 온전히 드러내시고 심지어는 기적까지 행하셔서 그 기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여주려는 자기 현시입니다. 그런 것들까지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new sense', 신령한 감각, 하나님에게 속한 아름다운 것을 이해하고 알 수 있을 때 반대쪽으로 악을 혐오하고 선을 찬양하고 추한 것을 보며 자지러지듯이 싫어하는 것이 짝을 이루는 감정입니다. 디자인에 민감한 사람들은 좋은 점으로 치자면 디자인이 제대로 되어 있는 공간에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많이 느끼기 때문에 행복해하고 대접받는다는 느낌이라는 것인데 불리한 점은 많은 공간에서는 그 공간을 떠나고 싶고 학대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이 상반되는 것이 빛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모든 것이 다가옵니다. 예를 들자면 신경증세에 이상한 것이 일어나서 번쩍이는 빛이 눈을 감았는데도 느껴지는 사람이 빛이 비추어졌을 때 그것을 빛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 똑같이 시신경이 완전히 죽어서 불을 켜든지 끄든지 똑같이 깜깜한 사람이면 어두움과 빛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의 은혜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불렀고 집단적으로는 부흥이라고 불렀지만 성령 세례를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개인적이든지 집단적이든지 간에 부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밀하고 강력하게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마음의 심령에 역사해서 변화를 일으키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감각들이 영적인 감각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거나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실은 청교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윤리에 기들여진 짐승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 새로운 감각은 다른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수많은 다발과 같은 속성들을 느끼게 만드는 감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격을 보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이 많습니다. 그것이 반복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하나가 다른 이야기로 들리면서 마음속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역자들에게 늘 물어보는 것이 당신 설교합니까? 몇 명이 예배를 드리냐 100명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간에 너를 보는 사람이 몇 명이냐 하면 70명, 90명, 100명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배 시간에 당신을 보고 있지 않은 아이들은 결코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듣지 않기 때문에. 들어도 변화가 안 되는데 듣지 않는데 어떻게 변화가 일어납니까? 알려주는 사람, 전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깨닫겠으며 깨닫지 못하는데 어찌 믿겠느냐는 말입니다. 에드워즈가 시종일관 붙들었던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을 깨닫게 해도 결국은 못 믿을 수 있다. 깨닫게 하지 않고 믿게 하는 방법은 없다. 개인적인 존중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역자들에게 부탁합니다. 내 설교에 방해가 됩니다. 태도가 끊임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고개를 숙이고 필요치 않은데 돌아다닙니다. 예배 의원이 제일 산만합니다. 설교를 멈추고 얘기하려 했습니다. 강단에 서면 이쪽 구석에서 저쪽 구석까지 보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는 것까지 다 들어옵니다. 집중하지 않는구나 라는 것을 알면 설교자로서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저 사람이 집중해도 내가 설득시킬 수 없을 수도 있는데 집중하지 않는데 어떻게 설득을 시키나 합니다. 예배 자세는 부동자세입니다. 제가 예배드릴 때 산만한 거 보셨습니까? 똑바로 앉아서 무엇인가 깨달으려고 예배드릴 때 설교하면서 찬양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은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 꼭 만나고 가게 해주십시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딴 생각하고 핸드폰 보고 만지작 거리고 끊임없이 산만하게 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길길이 뛰면서 찬양하는 게 경배의 표가 아닙니다. 말씀하실 때 그분에게 모든 의지와 감정과 지성을 복종시켜서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행하겠다는 마음 전체의 헌신입니다. 그것이 예배 속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많은 교육을 받았기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학교 교역자들에게 말합니다. 설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자기를 쳐다보고 반듯하게 앉아서 그 설교 내용을 들으려고 하는 것부터 교육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5분밖에 안 된다면 5분 설교로 승부를 봐야 하고 그렇게 하는 시간이 3분밖에 안 되면 3분 안에 승부를 보려고 해야 한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길어지면 10분 안에 15분, 25분 45분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왜 그렇게 신령한 빛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냐 하면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영적인 생명입니다. 우리를 살게 만듭니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데 놀랍게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서 기적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인도 같은 데는 사람이 죽었다고 판정을 받고 관에 넣었는데 관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면 사람이 살아났더라는 이야기, 덜 죽은 사람을 넣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일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빛이 생명이고, 생명이 빛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육체가 연약하면 연민을 갖지만 형제가 배고픈데 도와주지 않으면서 배불러라. 아픈데 건강해지라고 말만 하면 진정한 믿음일 수 있냐고 야곱이 반박합니다. 열심히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쌍한 것으로 말하자면 영혼이 죽어있는 것보다 더 불쌍한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가족을 위해 자기가 맡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그 영혼을 바라보면서 울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안에 충만한 생명의 빛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불쌍하고 생명이 있으면 죽어있는 사람들이 차마 가엾어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신앙이며 믿음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어두움이 이 세상 전체를 덮고 있는 어두움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 각자의 마음에 덮고 있는 어두움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악이 자라고 빛 속에서 선이 성장합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악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 빛 가운데서 빛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니 저 나라는 분쟁하는 나라요. 이 나라는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가 하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근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죄를 짓고 영혼의 침체 속에서 들어가면 내가 다중적 인간이 된 것 같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그게 결국은 생명의 결핍이고 빛이 모자란 것입니다. 해체주의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유익과 고통이 있습니다. 유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 다양한 측면의 인간성이 있구나, 그리고 인간사를 이런식으로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구나, 그런 것들은 하나의 유익입니다. 인간이 기계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살아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어려운 점은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산산이 찢어진 통일성이 없는 해체된 존재인데 어떠한 통합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통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봅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서 까뮈가 이방인에서 사람을 쏴 죽이고 왜 그랬냐 하니 햇빛이 눈부셔서 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엇을 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선은 질서 잡힌 것입니다. 악은 무질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질서 잡힌 나라이고 그 질서를 규율하는 것이 매질이나 몽둥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나라는 어두움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질서가 없습니다. 무질서해서는 사회가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이익과 혹은 두려움, 공포, 형벌, 몽둥이 같은 것이 동원이 되어서 나름대로 질서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2차적인 사랑이 있어서 질서들이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확연히 구별됩니다. 이 여름은 바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예수의 진리의 말씀과 복음을 능력있게 전하고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의 은혜로운 터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러한 참된 생명과 빛을 얻게 하는 것이 여름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이 일을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고통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생명의 빛을 주시도록 간구하면서 이 여름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