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로 산다는 것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맡았노라”(고전 9:17)
녹취자: 김경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사명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때 사도 바울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였는데 고린도 교회를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개척했는데 자꾸 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들리는 소식은 도덕적으로 많이 타락했다는 소식입니다. 심지어는 계모와 통간하는 자들까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통분하였습니다. 세 번째 더 화가 나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 중에 무리를 지어서 다니면서 ‘사도가 우리의 진짜 사도가 맞느냐? 자칭 사도가 아니냐? 예수님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 혼자 사도라고 자칭하는 것이 아니냐?’ 이 이유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배척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명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돈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우리가 고린도 교회 너희들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쓰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막힘이 없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쓴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명이라는 말이 의외로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오이코노미암’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오이코노미아’의 목적어입니다. ‘오이코노미아’라는 것은 ‘오이코’라는 것은 ‘집’을 가리키는 ‘오이코스’에서 왔고 ‘노미아’라는 것은 기준, 통치, 노모스, 율법, 그런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 기준, 집을 다스리는 어떤 규범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Economy, 경제라는 말이 옵니다. 로마 시대로 돌아가 보면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은 원래에 가정경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경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에 가족이 모여 사는데 이 가족들이 모여서 어떤 방식의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이 가장의 머릿속에는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로마에서 자유인들이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3학 4과라는 것입니다.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이것이 3학입니다.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이렇게 4가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산술학이 왜 필요했습니까? 로마의 경제가 인프라가 잘 짜여있습니다. 굉장히 발전했기 때문에 이제는 주먹구구식으로 안 되고 상업에 있어서, 사업에 있어서, 사회의 거래관계에 있어서 이득이 되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산술학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기하학은 왜 필요했습니까? 기하학은 보이는 어떤 형태에 매이지 않고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기하학적 통찰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각, 둔각 합해서 세 각의 합이 180°이면 삼각형인데 뾰족한 삼각형으로부터 시작해서 뭉툭한 삼각형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삼각형이 있는데 기하학적인 사고 없이는 그것이 모두 삼각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발달하게 되었고 천문학은 그 당시의 천문학을 가지고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고 그랬기 때문에 수학적인 사고와 함께 그런 운명학적인 예측을 위해서 천문학적인 사고가 굉장히 필요했고 당연히 부분적으로 농사를 짓고 항해하다 보니까 별자리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수학적인 사실들이 잘 투영되어서 음률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음악 없이는 심미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해서 군대까지도 이 음악을 사용해서 사기를 높이는 일에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3학 4과 모두 7개 과목의 공부를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로마라는 사회에서 누구의 억압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주체로 사색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주 예외적으로 신분은 자유인인데 공부를 거의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이코노미아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집안이 아니면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가지고 있었고 크게 생각한다면 우리 집안을 어떻게 집안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만들 것인가? 로마에 충성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우리 가족 때문에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우리 가정이 국가의 발전과 마을과 사회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그런 가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부터 시작해서 아주 작게 내가 돈을 얼마를 벌어서 얼마를 사용하고 사용하는 것은 대개 이런 방면으로 지출해야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가정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자는 그중에서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음식과 의복을 공급하는 비용만 떼어주어서 생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좁은 의미의 이코노미아이고 넓은 의미의 오이코노미아는 가장이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했습니다. 가장이 하는 그 오이코노미아 속에 특별히 의복과 음식의 작은 부분들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결혼했는데 아내에게 경제의 권한을 전적으로 안주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살아야지 가정의 그것을 움켜쥐고 있으면 이 세계는 누가 지킵니까? 독수리 5형제에게 맡길 수도 없습니다. 안 맡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보 이번 달에 생활비 줘.’ ‘얼마나?’ ‘백만 원만 줘.’ ‘뭘 그렇게 많이 써?’ 그러면서 80만 원만 줍니다. 그러면서 어쩔 줄 모르고 자기의 경제적인 가정을 함에 있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왜? 차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세탁기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는 아내의 소관 사항이 아닙니다. 왜? 오이코노미아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껏 하는 것이 오늘 반찬은 무엇을 할까? 그런 스타일의 삶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오이코노미아라는 것이 나중에 신학 용어에서 경륜이라는 말로 발전합니다. 영어에서 Economy라는 말에 아예 경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단어가 아닌가 추측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 전체를 하나의 집안으로 보고 이 세계를 왜 만들었을까? 이 세계가 어떤 세계가 되었으면 좋을까? 등등의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를 경륜이라고 부르고 그 경륜이 접혔을 때 그 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경륜이 펼쳐졌을 때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경륜이라고까지 하게 되는데 이 킹제임스 버전이 가장 잘 번역했는데 이것을 Stewardship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Stewardship이라는 것은 청지기인 혹은 청지기직입니다. Steward가 노예가 아니라 집안의 충직한 집사나 하인들을 의미합니다. 종이기는 하지만 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집안의 충직한 일꾼 즉 노예이기는 했지만 보디발의 집에 있었던 보디 발에서 인정받았던 한창 리즈시절의 요셉이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임무를 가지고 있던 것을 가리켜서 오이코노미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의 의미입니다.
사명이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유기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아내와 남편이 함께 가정을 이끌어가는데 아내와 남편 사이의 갈등이 없이 물론 남성이 절대적 우위에 있어서 갈등이 있도록 허락하지도 않았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때리는 것도 가능했고 내쫓는 것도 가능했던 절대적 우위에 있었지만 어쨌든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가정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아내도 오이코노미아를 담당하는 사람이지만 남편의 오이코노미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서 조화롭게 움직여야지만 가정이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장의 입장에서는 가장이 나의 집안 식구 8명을 어떤 가족으로 만들고 어떤 가정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오이코노미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가 어떤 오이코노미아를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군인이 되면 그것은 자유민들만 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기 바그너 그룹처럼 죄수들을 불러서 하지 않았습니다. 군대에 갈 때 모든 무장을 국가에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준비하는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무기는 평소에 자기가 돈을 벌어서 시장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사서 준비하고 있다가 동원령이 떨어지면 그 모든 무장을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시대 때부터 있었던 전통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면 남자들이 계속 차를 사고 휴일이면 세차하듯이 그 당시에는 칼을 닦고 병기 수입하고 하면서 언제든지 국가가 부르면 멋있고 안전한 차림으로 전투에 나갈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자유인의 특권이었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쟁터에는 모두 귀족의 집안의 자제들과 자유인들이 나갔습니다. 노예나 상민들은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신들이 로마가 더 이상 정복 전쟁을 할 수 없게 되고 국경이 엄청나게 넓어지면서 로마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배에 기름이 끼기 시작하면서 용병들을 사기 시작하고 돈을 주어서 자기 아들 대신 남의 아들을 사서 군대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서서히 병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사명이라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 Stewardship, 오이코노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이 다 다릅니다. 이 사람은 출판일을 하고, 이 사람은 행정일을 하고, 이 사람은 비서일을 하고, 저 사람은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이 사람은 교회를 관리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만의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아니면 우리 팀만의 오이코노미아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오이코노미아는 모두 합해져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를 이루기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충직한 청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청지기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작게 이야기하면 우리 교회가 무슨 오이코노미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이코노미아를 일깨워주고, 그 오이코노미아를 위해서 헌신하게 하고, 그 오이코노미아를 위해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고 하면서 교회 전체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오이코노미아에 가슴이 둥둥둥둥 뛰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자신이 맡은 파트에서 그 오이코노미아를 생각하면서 더 작은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작게 보면 자기의 개인적인 오이코노미아이지만 멀리 보면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향하여서 가지고 계신 계획 중 우리 생애에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위대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오이코노미아가 쭉 깔때기처럼 연결되면서 마지막에 나의 개인적인 오이코노미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마지막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오이코노미아를 이루는 방법이 자의적인 것이 있고 타의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의적이라는 것이 해콘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쁜 뜻으로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의 경우에는 아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해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자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별로 내키지는 않는데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자의로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자의로 기뻐서 할 때도 있고 내가 사실은 마음은 내키지 않는데 해야 할 때도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부터 설명하면 해콘이라고 했는데 영어로 말하면 Willingly입니다. 기쁘게 의지가 솟아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 쉽게 이야기하면 나도 그 일을 하는 것이 신나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상 받을만한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설명하면 우리들이 사명이 있는데 사명이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 사명이 우리의 마음과 맞아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우리도 하고 싶은 일이 되고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나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장 이상적인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그 일을 할 때는 신이 나지만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일 때에는 신이 나지 않습니다. 같은 일인데도 주변의 모든 여건이 잘 맞으면 신이 나고 여건이 맞지 않으면 안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해콘의 방식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다 자기 성향에 맞는 일, 자기가 평소에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못하거나 자기가 하기를 꺼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이코노미아가 우리에게 항상 해콘의 일이 될 수 있는가? 해콘의 방식으로 우리가 일할 수 있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서 짤막하게 핵심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그 일에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 일이 내 마음에도 열정이 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결국은 사랑이 그 마음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애해서 너무 사랑하면 가장 행복한 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그 사람이 내가 뭔가를 해주었을 때 그것 때문에 그렇게 기뻐할 때 본인의 마음에도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거나 사이가 깨지면 나는 전혀 기쁘지 않은데 한없이 좋아할 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움은 불일치를 가져오고 사랑은 일치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입니다. 그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복음의 열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해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않고 자기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냥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일일 뿐입니다. 일은 당연히 일로써의 성질에 충실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고, 내가 원하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신나서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나는 그 일을 하기 싫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합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에게 합치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이런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본성적으로는 관심이 없는 일이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 너무 애착이 생기고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위해 쓰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가 내게 이루어진다는 그 뜻이 너무 감격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가장 좋은 사명을 감당하는 방식은 해콘의 방식입니다. 자의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의적인 방식으로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마음의 소원이 되어서 주가 눈물을 흘리시는 그곳에서 내가 울고, 주가 기뻐하시는 곳에서 내가 기뻐하고, 주가 죽으시는 그곳에서 나도 죽을 수 있는 그것이 내게 가장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그 해콘의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자신도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것이 상을 받을만한 일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천국에서만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 상급이 무엇입니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제가 게으름에서도 예화를 들었습니다. 영국에서는 MP라고 하는데 Member of Parliament라고 합니다. 국회의원입니다. 자부심이 굉장히 강합니다. 국회의사당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나라의 국회의원실인데 방이 이곳의 반보다도 작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강당처럼 만들려고 하는데 이곳 정도면 영국의 MP 사무실 세 개는 만듭니다. 과장하면 네 개는 만들 수 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4명 앉으면 꽉 찰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그곳에서 대영제국을 움직인다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국회의원인데도 아침에는 스트레스와 짜증이 섞인 얼굴로 출근하는데 누가 웃으면서 청소하는 것입니다. 차를 잠깐 세우고 문을 내린 다음에 ‘여보세요.’ 청소하는 분이 말하기를 ‘의원님 출근하십니까?’ ‘나는 한 나라의 의원인데도 행복하지 않은데 당신은 청소부이면서 아침마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합니까?’ ‘네 의원님 저는 청소부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오?’ ‘네 저는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큰 오이코노미아 속에서 자신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자신이 현재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굴 사면에 팔자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고통 가운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그 큰일을 이루고 계신다는 대체할 수 없는 기쁨과 직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여기서 이런 일을 한다고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을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물론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저를 낮추시기도 하고 높이시기도 하면서 살아왔지만 저는 원래 굉장히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세 사람만 모이면 말을 못 하고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는 누가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하면 밤 12시가 되더라도 그 사람 집에 찾아가서 용서를 빌든지 아니면 오해를 풀지 않고 집에 오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이 다루시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평가를 하든지 나에게는 이것이 사명입니다. 오이코노미아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필요하시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우주적인 오이코미아를 이룸에 있어서 나의 이 오이코노미아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기쁨 그리고 대체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윌리엄 토저라는 사람이 에이든 윌슨 토저입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세 천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임금의 지휘봉을 들려주면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천사에게는 주판을 주면서 너는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천사에게는 육군 철모에 막대기를 묶어서 너는 똥을 푸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각자 세 가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 세 천사의 마음이 같았겠느냐, 달랐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에 그것을 일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달라야 당연합니다. 어떻게 똥을 푸는 사람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으며 아니 똥 푸는 사람하고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회장님 소리를 듣는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토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천사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루시퍼 같은 천사나 그럴 것입니다. 왜? 조나단 에드워드가 루시퍼를 해석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루시퍼가 인간을 천사보다 높이는 것을 보면서 반역의 동기를 얻었다고 해석합니다. 어느 부분은 동의하고 어느 부분은 동의할 수 없는데 아무튼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똥을 푸는 일이나 왕이 되는 일이나 돈을 버는 일이나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를 이루어가는 요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누구로부터 받은 사명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이 그 사실에 천착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합니다. 신앙만이 그 사실에 천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고 은혜가 뜨거울 때는 사람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든 나에 대해서 어떻게 하든 심지어 나를 섭섭하게 하든 섭섭하게 하지 않든 나의 시선의 초점은 그 오이코노미아가 이루어지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봅니다. 전쟁을 합니다. 지금 전선이 밀리고 당기고 하면서 막 싸웁니다. 그런데 동료가 전투하러 나간다고 총을 휘두르다가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총구에 손을 다쳐서 껍질이 까지면서 뼈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시비 걸 시간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랬으면 ‘조심하지 살이 찢어져서 피가 나지 않느냐?’ 할 텐데 지금은 총알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데 그런 것을 탓할 시간이 아닙니다. 왜? 그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집중력이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것을 모두 참견하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남대문교회의 원로 목사님이시던 배명준 목사님이 참 훌륭하게 목회하신 분이었는데 그분의 반만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목회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으로 3년,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흘러야 목회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직 푯대만을 향하여 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너무 기뻐했던 이유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헐뜯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렇게든지 저렇게든지 결국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니 내가 이것을 통해 기뻐하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진짜 은혜받은 사람의 사명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런 뚜렷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해콘의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아콘이라고 나오는데 ‘자의로 하지 않을지라도’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항상 그렇게 은혜가 넘쳐서 모든 일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구차하게 변증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싶었겠습니까? 이것이 해콘의 편지였겠습니까? 아콘의 편지였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사명을 감당할 때는 스타 의식을 가지고 감당하면 안 됩니다. 나는 주인공이고 모든 사람은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조력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는 순간에 주님이 계셔야 할 오이코노미아를 자기가 손에 쥐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도자들이 굉장히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얼마큼 살다 보면 폭군처럼 변해있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미명하에 자기의 야망을 투사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폭군처럼 됩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특히 굉장히 영향력이 있고 영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일수록 유능할수록 항상 그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높임을 받을수록 그럴 위험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항상 그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고 항상 겸손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도에게도 해콘의 방식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은 없었습니다. 항상 아콘의 방식으로 감당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은 진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서 설교하기 싫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배 시간에 앞자리에 앉은 누구누구의 꼴을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경우가 없지만 어쨌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두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할 수 없이 아콘의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아콘의 방식으로 감당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 마음에 충만하지 않아도 사명에 대한 또렷한 의식, 그것이 나의 의무라는 Duty에 대한 인식 그것이 최상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차로 말하자면 칙칙폭폭 하면서 힘차게 달리다가 어느 순간 힘이 떨어져서 천천히 갈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철로에서 이탈하게는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 진짜 그래? 때려치우고 말지! 내가 전도사 사역지가 여기밖에 없어? 때려치울 거야!’ 이렇게 하면 그다음 교회에 가서도 똑같습니다. 그다음의 교회에 가서도 똑같습니다. 왜? 모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거의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떠납니다. 이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명자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오이코노미아 안에 있을 때 내가 가장 빛나는 것입니다.
미학적으로 더럽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Out of the place.입니다.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해변가를 날고 있는 아름다운 갈매기 끼룩끼룩하면서 날면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예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갈매기 4마리가 날고 있다면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닷가에 심긴 오래된 소나무는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여기 탁자 위에 놓였다면 어떻겠습니까? 거기에 있을 때 예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 안에서 자기의 오이코노미아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소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을 때 인생은 가장 쉽고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쓰러져도 제자리에 있을 때 빨리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탈해버립니다. 그럴 경우에는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다는 의미와 사명은 거의 동급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명과 내가 살아있는 것이 동급입니다. 왜? 이 오이코노미아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오이코노미아를 위해서 여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아콘의 방식으로 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역시 동일하게 은혜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부당하다. 이것은 너무 힘들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올바르게 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순수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수없이 매 맞고 욕먹고 비난당하고 모욕당하는데 그것이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한때 사도 바울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간이라고 빼줄 정도로 존경하지 않았겠습니까? 교회의 설립자인데 말입니다. 그랬는데 지금에 와서 ‘그 인간이 사도라고 할 수 있느냐? 자칭 사도 아냐? 사기치는 것 아냐? 우리를 속이는 것 아냐?’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이것에 흔들리지 않고 아콘의 방식으로라도 그것을 그대로 감당해나가는 그것이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겠습니까?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한 사람이 인생을 다 산 다음에 한 교회의 목회를 끝낸 다음에 하나님이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참 잘했다. 참 충성스러웠다. 그러지 못했다.’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해콘의 방식으로 일한 것과 아콘의 방식으로 일한 모든 것이 다 종합적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박수를 받을 때나 오해받을 때나, 칭찬받을 때나 욕을 먹을 때나, 잘했다고 인정받을 때나 멸시받을 때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오이코노미아가 그분의 오이코노미아 안에 있고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그분의 오이코노미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너무 구름에 떠가는 것처럼 하는 일이 신날 수도 있고 때로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서 외롭게 분투하거나 심지어 훼방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찢어놓기도 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는 내가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도둑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떠나지 않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것이 진짜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콘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해콘의 방식으로만 일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항상 해콘이 되면 천국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둘이 앉아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하고 못살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신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아, 이게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구나! 이 사람하고 살라고 맡겨주셨다.’ 그러면 아콘의 방식으로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아콘이 해콘이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사랑하게 해달라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자녀들을 기르는 문제, 남편과 아내를 대하는 문제, 부모를 모시는 문제, 형제들을 대하는 문제 동역자들을 대하고 심지어는 양 떼들을 대하는 문제들이 다 그렇습니다.
열린 교회를 짓고 나서 2년 만에 주일학교가 300명이 600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관을 어쩔 수 없이 마련했습니다. 교인들이 대놓고 나를 찾아와서 항의하지 않았지만 ‘우리 목사님은 부동산에 어쩌면 그렇게 욕심이 많으냐?’ 빚덩어리인데 또 빚을 진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다 들립니다. 속상합니다. ‘내가 내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을 사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 5년, 7년이 흐르고 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그때 목사님이 정말 선견지명이 있으셨어요.’ 그때는 가소롭습니다. 그런 것을 별별 이야기가 다 들립니다. 그것을 개의치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게 주신바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사명을 주셨으니 내가 목숨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행하는 것이 아콘에서 해콘이 되도록 그 기쁨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하면서 우리는 항상 자기는 완성된 인간이고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오이코노미아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자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오이코노미아를 해콘의 방식으로 감당하려고 애를 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깎으시고 다듬으시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오이코노미아라는 것은 없고 눈물이 없는 오이코노미아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가 너무 쉽고 행복하다고 하는 선배들이 있는데 목회에 그런 면이 있으니까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항상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듯이 하나님이 항상 그렇게 기쁘고 쉽게만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쓰라리도록 아픈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오이코노미아를 이룸에 있어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시고 나를 여기에 세우신 것은 인간 아무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신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여기서 받는 오해와 비난, 때로는 핍박과 고난, 때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은 억울함,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품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되기 전에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왜? ‘나를 여기에 세운 것은 내가 아니요 우리 주님이시니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오이코노미아를 받았노라.’ 그 마음을 가지고 비록 대우는 받지 못해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주님 앞에서 자기의 부르심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한없는 자유를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콘으로 아콘으로 오이코노미아를 끝까지 감당해서 마지막에는 그 오이코노미아를 감당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들에게 해콘으로 감당하는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크게 매 순간 인정받으며 사람에게 영향받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매인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