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도 살리신다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골짜기의 환상 (겔 37:1-2) 1995.9.3 주일예배 1
2.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겔 37:3-4) 1995.9.10 주일예배 10
3. 제 2의 창조 (겔 3:5-6) 1995.9.17 주일예배 24
4.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 37:6下) 1995.9.24 주일예배 32
5. 골짜기의 큰 군대 (겔 37:7-10) 1995.10.1 주일예배 39
1. 골짜기의 환상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마른 뼈도 살리신다 (1995.9.3 주일예배 1)
아시다시피 이 에스겔 선지자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나라가 이미 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다음에 그발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샛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고 하늘이 열리는 큰 영적인 은혜를 받고 선지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겠지만 에스겔 선지자가 쓴 이 에스겔서를 읽어보면 가장 하나님께서는 참담한 시기에 그리고 소망이 없는 것같이 정말 캄캄한 시대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그렇게 캄캄한 시대에 오히려 놀라운 소망의 말씀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에스겔서에는 여러 가지 환상과 이상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대개 무엇을 겨냥하고 있냐면 미래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나라의 영적인 회복입니다. 아주 복된 메시지들을 수없이 많이 담고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 나와서 그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나면 이제는 육체에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할례를 행하시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된다는 그러한 새언약에 대한 말씀도 이 에스겔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37장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런 회복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그 시대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꼭 국가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할게 아니라 우리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받는 메시지,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있지 않다면 그러면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언제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받기위해서는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이 환경을 떠나고 상황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상황에 적합하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많이 어려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때는 언제나 무슨 말씀을 들어도 그것은 자기하고 별로 상관이 없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주 마음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만하게 돼면 그러면 무슨 말씀을 하더라도 그것이 기가 막히게 자기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도전들을 우리들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에 끌려와서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부분의 많은 시간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환상을 보았는데 그때 여호와의 권능이 그에게 크게 임하는 사건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에스겔서에 보면 특별히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였다고 하는 기록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1장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그 장을 넘길 때마다 말씀과 권능이 임한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 에스겔이 그 선지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동안 얼마나 뛰어난 영적인 삶속애서 쉽게 이야기하자면 신령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의 땅에서도 요나와 같이 어떤 우세한 메시지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의 땅에서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던져주기 위해서 메시지를 전해주는 메신저로서 보냄을 받았을 때 그에게는 정말 바벨론 땅에서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그리고 권눙이 아니면 매순간마다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희망적인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상황과는 관계없이 말하자면 희망적인 메시지를 중거 하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필요한 말씀을 당신의 뜻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의 메시지를 원할 때는 심판의 메시지를 주셔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시던 하나님이 지금은 심판아래에 있어서 이미 심판이 실행되어서 바벨론 땅에서 기약도 없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웅장한 미래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에 관한 비전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애를 쓰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들으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총체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먼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큰 권능으로 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신령한 사람이 됐고, 신령한 사람으로서 신령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무엇이냐 여호와의 놀라운 큰 권능이 임하고 그러자 여호와의 신이 에스겔을 데리고 어느 골짜기를 데리고 갔습니다. 이건 모두 현실 속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제 말하자면 비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실도 아니고 꿈도 아닌 그런 신비한 이상의 세계를 하나님이 그이상의 세계를 통해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큰 권능을 받고 여호와의 손에 이끌려서 골짜기 가운데 갔는데 거기에 보니까, 마른 뼈가 가득했습니다. 나는 이 본문을 보면서 뼈가 가득한 곳에 서보지 못한 것이 이 본문을 전하는데 한계가 되는데 아무리 돈을 줘도 뼈 있는 골짜기에서 볼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그림이나 킬링필드 같은 것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시켜서 뜨거운 지방이니까 속히 썼습니다. 아마 여름날에 길거리에 실제 내놓으면 아마 일주일도 채 못 갈 정도로 그렇게 빨리 썩을 것입니다. 확 썩어버리는데 그래서 세월이 지나서 가죽은 썩어버리고 마른 뼈들이 해골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말하자면 이쪽 언덕서부터 저쪽 언덕까지 잔뜩 깔려있는 말하자면 해골의 골짜기 거기에 딱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사방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쪽도 다녀보고 저쪽도 다녀봤는데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어디를 가든지 보이는 것은 사방에 지나가는데 전부다 보이는 것은 뼈뿐이고 그 뼈는 너무너무 많고 그 뼈는 심각할 정도로 말라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고, 그리고 교회 잘 다니는 것 같고 그리고 다 예수 잘 믿는 것 같고 나도 잘 믿는 것 같고 사람들이 모이고 주일이면 부쩍부쩍 한 것만 가지고도 ‘야, 이제 뭔가 되가는구나. 야, 참 좋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교회에 모이니까 언젠가는 세상은 변화하고 말겠구나. 야, 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에 많이 모였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 하시겠는가.’ 그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정말 마른 뼈와 같았던 자신이 살아나는 놀라운 영적인 은혜와 기적들을 경험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은혜를 크게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그리고 내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셔서 그래서 내가 정말 살아있는 영적인 삶을 이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보니까 나는 맨날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가서 예배도 드리고 모였는가 했더니 주일을 다 돌아보니까, 전부다 마른 뼈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고 그 신이 에스겔 이끄시기 전까지는 에스겔은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신이 그를 이끌어 골짜기 가운데 두셨을 때 그는 수많은 마른 뼈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마른 뼈가 누구입니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겻입니다. 포로로 끌려와있고 혹은 본토에 남아 있는 흩어져서 나라가 망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뼈와 같아서 어디에 가든지 말하자면 그들이 이방의 땅에 와서 고달프게 노역을 하고 큰 건물을 짓고 혹은 다리를 놓고 혹은 길은 닦고 또 바벨론 사람들을 섬기고 그래서 거기서 세경을 받고 또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살고 이렇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장면 전부다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른 뼈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화) 예수 믿기전 목사님 좋아하시던 취미 - 새벽 재래시장 가는 것.
아무리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역사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생명을 보는 시각이 인간의 시각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고 애쓰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것이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와서 어떻게 몸부림 쳐야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일제시대에 살아남았던 것 같이 그렇게 몸부림쳐야 되지 않습니까? 불과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위해서 밤새워 일하고 장정들은 세끼만 먹여주면 하루 종일 돌짐을 지던 시절이 있었단 말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평안할 때는 놀고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구라파에 있는 나라들의 고민꺼리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으니까 일해야 할 도전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곳에는 몸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고난과 위기에 직면해서 정말 몸부림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에게 비상한 힘이 생기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먼 땅에서 줄줄이 굴비처럼 역어서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언어가 통했겠습니까? 물론 아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국사람 중국에다 갔다놓은 것하고 똑같은 것 아닙니까?. 언어가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아니면 문화에 익숙해있겠습니까? 종교가 같습니까? 그 속에서 사람들 섬기면서 온갖 천한 노역에 봉사하면서 살아가고 거기서 그 사람들과 더불어서 생존하고 먹고 살기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저녁때가 되면 강변에 나와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던 시절은 무엇 편했습니까? 수없이 외적의 침략에 시달리고 그렇게 나쁜 왕을 만나서 바르게 신앙적으로 나라가 이끌려 가지 아니하면 왕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책망 말미암아 여러 가지 고난을 받고 위기를 당하고 그러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거기를 그리워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왜? 거기 하나님의 집이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이방의 땅에서 몸부림치며 이 사람들이 생존하기위해 살았습니다.
(예화) 수산시장에서 어항에서 나온 물고기의 퍼덕거림.
그렇게 위기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사람의 시각이고 하나님의 큰 신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에스겔이 눈을 뜨고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니까, 이건 죽어있는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생명의 증거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열심히 사는가 하는 것들이 생명의 증거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에스겔 선지자가 이 사실을 보게 된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이 그에게 크게 임하고 그 권능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이끌려서 이전에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이면의 영적인 삶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게 되니까 이세상이 바로 캄캄한 어둠속에서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과 같이 누워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뼈와 같이 누워있는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역사들이 희망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영적인 눈이 열리기 전에는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필요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이 환상을 봤을 때 직감적으로 이 골짜기에 깔려있는 이 헤아릴 수 없는 수십만 개의 마른 뼈들이 무얼 의미하는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한 번도 오락을 위해서 영화구경 시켜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선지자에게 임하는 비전은 뭔가 항상 역사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택한 백성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쫙 비쳐주었는데 수많은 마른 뼈였습니다. 그때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도전을 받기위해서는 이런 것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에스겔 선지자가 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소명을 주셔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이 에스겔을 데리고 깊은 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을 확 보여주시는데 그 모습이 완전히 마른 뼈들이 수백만 개들이 나뒹구는 그 끝없이 펼쳐진 마른 뼈의 장엄한 광경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이 슬펐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예화) 전에 있던 교회 어느 권사님의 꿈 - 교회 강단에 거미줄이 끼어있는 것.
저는 에스겔의 심정을 백퍼센트 이해를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깊이 이해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상을 보여주셔서 여러분들의 다니고 있는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강대상위에서 해골바가지가 나와 가지고 번쩍번쩍하는 금 빛나는 성경을 가지고 말을 하는데 입술도 없고 코도 없고 뼈다귀만 움직여서 말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동일한 마른 뼈들이 수백 개가 앉아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덜거덕 소리를 낼 때 그 광경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에스겔의 목양지가 아니였습니까? 에스겔은 34장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이스라엘 양떼들을 뜨겁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에스겔이 이스라엘이 마른 뼈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에스겔에게 있어서 이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였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느 날 여러분에게 꿈을 꾸게 하셔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셨는데 여러분 자신이 마른 뼈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마른 뼈 꿈은 못 꾸었는데 시험이 오거나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고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꼭 벌거벗은 꿈을 가끔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뭔가 많이 잘못 되가고 있구나 그런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자신을 여러분 가정을 보여주셨는데 교회 잘나가는 우리 아빠도 마른 뼈, 권사님이신 우리 엄마도 마른 뼈, 주일학교 반사하는 우리언니도 마른 뼈 그리고 나도 마른 뼈, 한 번 그런 광경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고 아픔이였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이것을 왜 에스겔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에스겔에게 이것을 보여주신 것은 “야, 봐라. 이스라엘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백성들을 내가 진노하여 심판했으나 심판받은 백성들이 애굽의 땅에서 와서 놀랍게 회개하였느냐 그것이 아니였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후회하고,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을 인하여 슬퍼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그 아픈 마음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민족적인 회개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살리리라’ 그러지 않습니까? “인자야.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물으니까 무엇이 그럽니까? “주님께서 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곤란할 때 꼭 그럽니다. 못하신다고 그럴 수도 없고 하신다고 그럴 수도 없을 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고 그러자니 쑥스럽고, 안 그렇다고 하자니 곤란하고 그러니까 무엇이 그럽니까?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 노래를 이 에스겔에게 배운 것인가 봅니다. 에스겔이 이 노래를 벌써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아시옵나이다.” 그이야기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이 본문을 몇 번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건 아무래도 부정적인 대답인 것 같습니다. ‘어휴, 한두 개도 아니고 이태산과 같이 산등성이를 두덮고 있는 이 수백만 개의 마른 뼈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하나님 앞에 야단맞을 테니까,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런 대답을 알 때 에스겔의 마음속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이 가득히 고였을 것입니다. 내 목양지에서 내가 목회하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느 날 보여주시는데 마른 뼈와 같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목양하는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양떼들이 내가 섬기고 있는 기관이 이렇게 들어 난다면 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생명과도 바꿔야할 가치입니다. 여러분 벽돌은 생명을 주고 바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생명을 주고 바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어느 교회를 축복하셔서 그 교회가 죽어있는 영혼들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고 생기를 힘입은 군대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교회가 있나? 거기는 목회자가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생명을 걸고 이 가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드려야 될 정도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암담한 역사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젠 믿던 애굽도 물러갔고 유능한 왕도 끊어졌고 어디를 봐도 도움을 받을 만한 그러한 다른 나라의 원조도 기대할 수 없고, 다윗과 같은 용맹스러운 전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육신적으로 소망이 다 끊어진 상태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데 그거 역시 처참하게 죽어있는 마른 뼈와 같은 상태가 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상황을 보여주셨는데도 그 민족을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연구대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른 뼈와, 이게 이스라엘시대의 그림자가 아니라 오늘 바벨론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그림자가 아니라 번영한 한국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그림자가 아닌가 하는 것은 한 번 보십시오. 보십시오. 주일날 이천 명 삼천 명씩 모이던 교회가 밤이 되면 이백 명 삼백명 도 안 모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장로님들이 모여 있는 예배당이 되어가고 있다는 그 시간에 무엇하고 있습니까? 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있었을 때는 사람들이 세상을 더 이길 능력을 사모하고 매일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 초등학교 시절까지 오일예배가 있었습니다. 기도회는 그다음입니다. 똑같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가 점점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살 수 있는 기운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마른 뼈와 같을수록 하나님의 생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들어야 될 텐데 사람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부어지는 이런 생기에 대한 그리움들을 잃어버리고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런 마른 뼈와 같은 때가 너희들의 시대에도 올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무엇을 위해 살고 너희들이 어떻게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며, 너희 자신들을 경계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키고 이렇게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교회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도구가 될 수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춤추면 무엇하고 먹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말하는 그림책을 보니까, 헌금은 성도들의 주머니에서 나와서 입으로 다 들어 간다고 합니다. 마른 뼈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가 낸 돈으로 자기가 먹고 그 돈 가지고 쓰고 교회를 사교단체처럼 만들어서 그런다고 생명이 나옵니까? 교회가 세상을 이기고 그리고 교회에 대해 도전해오는 세력들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승리의 소식을 알려주는 도구가 되었을 때는 이를 위해 힘쓰고 하나님의 생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잃어버리고 마른 뼈와 같았을 때 그런 것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마른 뼈로 남아 있기를 자족하게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호와의 생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마른 뼈가 백날 모여서 주문을 외워보십시오. 그 마른 뼈 위에 힘줄이 쏟고, 가죽이 돋아서 변하여서 군하를 신고 철모를 쓰고 수백만의 군대가 되어서 저벅저벅 걸어가는 소리가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은혜를 받고 보니까 평범해 보이던 역사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른 뼈들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입니다. 여러분 눈을 떠서 사람들이 왜 잔치를 차려나도 오지 않고 집회를 준비해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눈을 한 번 열어주셔서 얼마나 자신들이 마른 뼈와 같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이 거의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막 슬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 오늘 열린 교회 군대를 계수 하겠다. 하나, 둘, 다섯” “아니, 주님 왜 저를 빼놓습니까?”
여러분,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시대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리고 마른 뼈들이 모여있는 세상에서 생기를 부여받고 군대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은 언제나 유별나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를 거절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살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의 믿음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뜻을 세기면서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마른 뼈가 온 땅에 가득한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른 뼈들을 가지고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뼈가 되어서 이상 가운데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선민의 의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여러분, 이번 집회에 이르기 전에 기도하면서 여러분 우리자신이 얼마나 마른 뼈와 방불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그 이방의 백성들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가족과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바라보면서 그 골짜기에서 슬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번 고요히 묵상해보십시오. 마른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는 어떻게 왔습니까? 온갖 마른 뼈가 가득한 교회 혹은 살아있는 생기라고 하나라도 없는 죽음과 같은 과정위에서 어느 한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것이 마른 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뼈가 가득 찬 고요한 골짜기 어두움 속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여! 이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부어주시옵소서.’ 부르짖는 그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생기를 주는 그 도구가 되게끔 만드셨든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사 되리. 나는 주의 군사 되어 충성을 맹세하리.” 다른 사람이 어찌든지 우리는 마른 뼈와 같이 세상을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지. 어두운 밤 골짜기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마른 뼈들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른 뼈들은 교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기가 있는 사람들은 겸비해집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나를 살게 하고 이 동족을 살게 하시도록 그렇게 사모하시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이 집회에 대해서 아주 깊은 열망을 가지고 이 집회를 이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집회를 엽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이 집회를 통해서 역사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그 골짜기에서 무릎을 꿇고 해골을 흔들흔들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그게 지금 급한 것입니까?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른 뼈는 눈물도 흘릴 수도 없습니다. 울부짖을 일도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피를 흘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살이 붙고 힘줄이 붙고 그리고 피가 흐르기 시작할 때,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가슴에서는 피가 the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으며 승리하며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날이 더디 온다고 교회를 다 떠나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두는 그 순간까지 나는 이동일한 사실을 외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고 이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을 앙망하고 바라보며,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 주님만이 아신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선지자 앞에 마른 뼈들을 위대한 군대로 만들어 주셨던 놀라운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이 많음을 인하여 애통하고 자신의 마른 뼈됨을 인하여 슬퍼하며 진정한 하늘의 생기와 여호와의 신령한 은혜와 그 은혜의 기운으로 생기있는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고 패배를 숙명처럼 아는 대신에 진정으로 환경을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내가 계속해서 설교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 말이 뼈인가봐. 그리고 노려보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럴까 생각하고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밀어주십시오. 안 밀어 주시면 어떻게 내가 여기서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 대신 살리실 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 말고 그런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을 살리셔서 그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 위대한 일들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정말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에게 큰 은혜가 임하고 에스겔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자 그는 포로로 끌려온 그 땅, 희망이 끊어지고 좌절과 슬픔과 실패밖에 약속된 것이 없는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를 마른 뼈로 보여주시는 하나님 앞에 좌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사람의 허물을 들어낼 때는 책망하고 미워하기 위해서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허물을 드러내실 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도 여호와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기를 입고 깨어난 군대와 같이 불꽃과 같이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을 들어 주위를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른 뼈와 같은 상태를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마른 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능숙하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이 하나님의 큰 권능과 영광을 입은 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마른 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뼈들 가운데 에스겔은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 옆에 살아있는 자 곧, 인자, 사람의 아들로서 마른 뼈들을 지켜보며 하나님과 대화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마른 교회, 하나님께서 생명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에 관한 계획을 누구와 의논하겠습니까? 마른 뼈와 함께 마른 뼈에 관해서 의논하겠습니까? 죽어가는 자와 함께 죽어가는 자에 대해서 의논하겠습니까? 죽어서 생명이 없는 자와 함께 생명이 없는 자들이 살아나는 계획에 대해서 말하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에게 수백만의 마른 뼈를 보이실 때 에스겔은 그 뼈 가운데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인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마른 뼈에 대해 앞일을 의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우리가 예수의 향기를 볼 수 있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겠습니까? 마른 뼈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는 죽음의 장송곡밖에는 어울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속에 찬송이 들리고 마른 뼈들이 춤을 출 때 여호와께서 그 노래와 춤을 받으시겠습니까? 문제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바로 일생에 이 마른 뼈와 같은 세상에 여호와의 생기를 주시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얼마를 살던지 그렇게 하나님의 참된 부흥이 아니면 누구의 말로도 소생할 길이 없고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도 살아날 수 없는 메마른 땅에 그 가득히 덮인 마른 뼈들이 일시에 살리시는 여호와의 거룩한 손으로 살아나는 그날을 기대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참 신기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려고 세상을 그렇게 살아갑니까? 무슨 훌륭한 것이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즉시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마른 뼈를 볼 수 있고 생명이 없는 들판에서 생명이 없음을 직시할 수 있는 이런 통찰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여호와의 생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비록 온 땅이 모두 뼈로 뒤덮였다 할지라도 현실을 보는 사람들은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생기가 ‘후’ 한 번만 불면 놀랍게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화) 포항에서 누렇게 말라가던 벼가 하루 비가 딱 오니까 그 다음날 새파랗게 다시 올라오는 벼.
이 세상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비도 죽어가는 생명들을 그렇게 순식간에 수많은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기가 그 마른 뼈들이 모여 있는 계곡에 불 때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일어날까하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언제나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우리는 이런 외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그 사람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사모하던 위대한 일들을 보이실 것입니다. 이번 집회 아무런 욕심 없습니다. 원하는 것은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교회에 가득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 무엇 있습니까?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정말 살아나서 여호와의 생명을 누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때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는 살아납니다. 그래야지만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려야 그래야지만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2.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3-4)
마른 뼈도 살리신다 (1995.9.10 주일예배 2)
골짜기에서 본 에스겔의 환상은 거대한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 골짜기에 깔려 있는 그 크고 거대한 마른 뼈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을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보이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마른 뼈와 같은 환상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삶의 내면을 볼 수 있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여호와의 큰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할 때 가능해졌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변화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아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지만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통찰들이 생겨난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드디어 마른 뼈가 잔뜩 있는 골짜기의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아나겠느냐 이렇게 인제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먼저 본문의 메시지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절망적인 것을 보이실 때는 절망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절망적인 것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절망을 통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깨닫게 해서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를 바꾸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들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낙담시키거나 좌절시키기 위한 그 목적 자체로 우리들에게 절망스러운 상황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골 골짜기에 있는 이 수많은 마른 뼈들 그 마른 뼈들을 보여주시면서 그 골짜기 가운데 있는 그 수많은 마른 뼈들이 지면에 많고 뼈가 힘이 많고 아주 말라있는 이 거대한 마른 뼈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어떠한 영적인 상황을 하나님 앞에 맞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선지자는 깊이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지자는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영적인 상태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보여 주셨을 때 선지자는 깊이 낙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 마른 뼈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물으셨던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인자야 뼈들이 능히 살아나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이 질문을 통해서 그렇게 영적으로 마른 뼈와 같이 그렇게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기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른 뼈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기를 소원하시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있을 때만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들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흥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양적으로만 팽창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몸집이 커지는 방법이 두 개가 있는데 먹고 계속 비개가 끼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먹고 계속 운동을 해서 살이 잘 찌지는 않는데 안으로 뼈가 튼튼해지고 근육이 생겨서 두부살이 아니라 탄탄한 근육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바디 빌딩을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남자인 우리들이 볼 때도 징그러울 정도로 힘살이 서 있습니다. 꼭 조각을 해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 무게 달아봐도 그런 사라들이 한 칠 팔십 키로 나가는 것과 아무 운동도 안하고 맥없이 밥 먹고 살만 쪄서 팔구십 키로 나가는 것이 킬로수는 똑같아도 그것이 똑같은 무게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살만 찌면 그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럽니다. 교회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럽니다. 처음에 개척교회 때는 내 마음대로 교회가 움직였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보니까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져도 교회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가 내 손을 떠난 것 같다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살이 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최대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을 통해 보여주든 삶을 통해 보여 주든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섬김을 통해 보여주든 무엇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때 그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기운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는 일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나은 게 무엇이 있냐?” 맨날 그럽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럼 더 나은 것이 있냐고 하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귀 따갑도록 많이 듣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소유하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셔서 그 생명이 내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보면 바보 같은 짓이고 어리석은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을 기꺼이 행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생명의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잠시 세상에 살면서 눈물을 흘려도 우리는 이 세상 나라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며 그 하나님의 나라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건강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때 즉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 살아있는 생명을 지니고 살 때 그 때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을 해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그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고 역사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남다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네가 이거를 믿느냐”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생명을 얻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어떤 생명과 생기의 원동력을 우리가 다시 받는 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값지고 고귀한 것이며 그것 없이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신약적인 표현으로 한 것이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시니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시니 그래서 그 그리스도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명의 기원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마른 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삶 생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마른 뼈와 같이 심히 냄새나고 부패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소유하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삶과 말과 태도와 그 모든 것으로 보여주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힘과 생기가 없이 살아가는 것 많은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거기는 수많은 인간의 더러운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런 예가 없어졌습니다만 가끔 날 잡아서 온 동리에 반장이 통지표를 들고 돌아다닙니다. “몇월 몇일에 하수도 공사가 있으니 한 집안에서 한 명씩 일꾼을 보내라. 안 보내려면 일꾼 살 돈을 보내야 된다.” 이런 통지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저도 불려 나가 봤습니다. 가운데에 땅을 파고 하수도를 전부다 뚫고 이제 집집마다 물 나가는 구멍을 전부 다 쑤십니다. 그럴라치면 중간 중간에 파 놓은 간이 맨홀이 꽉 차가지고 온갖 더러운 악취 나는 것들이 그 속에 썩어서 여름날에 꽉 차 있습니다. 물이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그 심히 더러운 악취를 빠져가지고 온 몸에 뒤집어쓰고 나오면 목욕을 해도 그 냄새가 한 이 삼일이 지나도록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시궁창 냄새입니다.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교회에서는 이런 냄새가 안 나는 것 같아도 교회에서는 이 시궁창 냄새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시궁창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더러운 냄새가 교회 안에서도 가득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하고 거룩한 교회를 너무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늘 아래 교회가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인간이 모이면 피할 수 없이 그 시궁창 냄새가 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더러운 탐욕과 비참한 냄새가 그 교회에 가득해집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 가지고 무엇 실망했다. 사람들이 무엇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더러운 냄새가 날까요? 그 사람은 무엇 좀 나으냐?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무엇 묻었다 무엇 묻었다 그러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변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 속에 들어갈 때 놀랍습니다. 여러분, 시체 썩는 냄새 못 맡아보셨지요? 죽을 때도 잘 죽어야 됩니다. 여름날 오뉴월 더운 날 죽으면 시골에서는 옛날에 무엇 대갓집이라고 그래가지고 삼일장이 아니고 오일장 칠일장 무엇 이러고 또 허풍을 떠는 집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당시에 무슨 냉장고가 있어요? 무엇이 있어요? 그러니까 싸가지고 놓으면 뒤에 한참 있다 보면 관 밑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구 시체 썩은 물이. 그런데 그 냄새를 한 번 맡은 기억이 나는데 상상만 하면 지금 맡지 않고 지금 상상만 해도 지금 먹은 게 다 올라오려고 합니다. 아주 이 세상에서는 나지 않는 아주 독특한 냄새입니다. 어디서도, 향수 제조 기술자도 아마 그런 것은 못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여튼 아주 창자 밑바닥까지 뒤집어 놓는 아주 해괴한 시체 썩는 물의 냄새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시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런 냄새가 납니다. “표범이 그 반점을 없앨 수 있겠으며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희게 할 수 있겠으며 비누로 닦고 양잿물로 닦아도 그 시커먼 피부를 깨끗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의 죄악도 비누로도 재물로도 씻겨지지 아니하리라.”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면 왜 냄새가 나겠습니까? 늘 건강하게 살아 있는데 왜 냄새가 나겠습니까? 씻고 닦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병들기만 해도 벌써 노인들은 냄새나기 시작합니다. 건강하면서도 냄새가 나는 사람은 생활 습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늘 닦고 정결하고 깨끗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생기를 잃어버리면 이런 냄새가 온 교회 안에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려면 보통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막 눌리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에스골 골짜기가 그런 골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뼈가 능히 살겠느냐? 살아날 수 있겠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소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시체를 아무리 깨끗이 닦고 화장을 씌우고 귀한 향료를 뿌리고 하면 무엇합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재물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보화를 얻는 것보다 이 생명을 사모하고 이 세상에 있는 값진 것들을 손에 넣는 것보다 이 영적인 생명을 사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생명 없이 살아가는 일들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 말은 내 말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한 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어디 가든지 죽음의 그림자는 가득 드리워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몇 주만 교회 안 나오고 말씀 안 듣고 깨닫는 것이 없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여러분의 욕심과 그리고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들을 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신앙의 감격도 없고 변화에 대한 사모함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도 없는 사실상의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정말 설교하러 올라가거나 집회 가면 실감나게 느낍니다. 난 여러분들이 여기 한 번 서봤으면 좋겠습니다. 민방위 교육을 받으러 나온 건지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생명을 향한 갈망도 살아있는 흔적도 없습니다. 외쳐도 꼭 아무도 없는 빈 골짜기에서 외치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메아리 없는 생명이 없는 죽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그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의 상태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지 못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없으니까 주님을 위해 살까 말까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인생을 드려 볼까 말까 그러다 세월 다 가니까 하나님이 “관두게 이 사람아 됐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우리 안에 없을 때 생명이 없는 것만큼 죽음이 우리들 위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깊은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그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알지 못 하니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로 가고 알아도 순종할 길이 없으니까 힘이 없으니까 생명 없이 더욱 죽음에 복종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런데 물으실 때 이 에스겔 선지자는 대답하기를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에서는 꼭 할 말이 없을 때 이런 말을 잘 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쑥스러우니까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이 뼈들을 살리겠느냐?” “오직 주께서 아시나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스겔은 과연 이 뼈가 정말로 살아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말씀은 “얘야 내가 이 뼈들을 능히 살릴 수 있으리라고 믿느냐” 그 뼈들에게는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뭔가 밖으로부터 어떤 영향이 주어져서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살리지 아니하면 살아날 그런 가망성이 없는 상태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상태였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능히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하시면서 선지자에게 한 또 다른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엇 그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살아나라” 그러고 살리시면 되지 않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뼈와 같은 상태라고 하는 것을 모두 보여 주시기만 하고 하나님은 이상 가운데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라고 하십니까? “에스겔아 네가 가서 살려라.” 아니 하나님이 직접 일어나라 후욱 하고 살리시면 되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마른 뼈가 되었는지를 보여만 주신 다음에 떠나면서 에스겔에게 “네가 해라.” 하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살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에게 이 뼈들을 살리는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런 평범한 신앙의 사실과 평범한 신앙의 원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그 사랑하는 종이 붙잡혀 있을 때 그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볼 것이 없고 훌륭한 가문에서도 태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내 놓을 만한 현란한 학식이 없어도 하나님의 생명의 손이 그를 붙들고 여호와의 기운이 그의 말씀 가운데 역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교회를 살리시고 나라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민주국가에서 다수결에 익숙해서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하나님의 뜻은 요행에 따라 바뀌고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당신의 교회를 살리시기도 하고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고 이 세상의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도 하고 세상에 찬란한 하나님의 나라가 꽃피게도 하고 혹은 당신의 촛대를 옮기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셔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되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 교회를 새롭게 하셔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한가 저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저는 교회를 세운지 이 년이 흘렀어도 오늘 겨우 이 자리가 꽉 찼습니다만 아직도 여기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히 부끄럽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제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또 제가 정말 영력있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늘 자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또 한 편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아서 그래서 바뀐 사람들 속에 여호와의 생명의 기운이 역사함으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는 기가 막히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이백 명을 넘길까 말까 하게 서울 시내 변두리에서 고생을 하면서 이십년 가까이 보냈는데 어느 아파트 단지로 딱 옮겼는데 이삼 년 사이에 천명으로 불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 하면 우리 교회 특징은 주차장이 끝내준다고 합니다. 삼백 평이 넘는 주차장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 주차장이 없으면 아마 교회가 그렇게 커지지 않았을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러 나오는 곳입니까? 오죽 했으면 로이드 존즈 목사님이 “주일 낮에 사람들이 왜 열심으로 교회에 오는 줄 아십니까? 빨리 예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했을까요? 여러분, 생명의 말씀을 찾아서 그리고 거기서 마른 뼈와 같은 자신의 신앙이 변하여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충족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교회의 내면의 변화가 없이 삼백 명 사백 명 늘어나면 목회자들은 대우는 좋아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교회가 목회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을 가져도 쓸데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전부다 폐결핵에 걸려가지고 완전히 다 말라비틀어져서 이제는 불과 몇 달밖에 못 살 생명의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패션의 옷을 입고 빼닥 구두를 신고 얼굴에다 알록달록하게 색깔을 칠하면 무엇하냐 이것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목회자의 교회를 향한 최선의 소망은 사람들이 수없이 모이고 모이는 족족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여호와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런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누가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음을 보였나니 이제 너는 가서 살려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한 두어 권의 그 책을 살펴보는 가운데 정말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커다란 능력을 끼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있는 설교자들이나 신학교 선생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중보기도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이유가 무엇 때문이든지 목회자가 쓰러지면 그 교회는 함께 쓰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살리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되 죽은 자와 방불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혼 속에 새로운 여호와의 생기를 불어 넣어서 여호와의 백성답게 살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드는 이 모든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늘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당신의 종들을 돌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도의 의무라고 하는 사실들을 오늘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의 역사를 이끌고 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들이 살아있는 그 때 그 선지자들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그 선지자들 속에 여호와의 기운이 역사할 때 불모지와 같은 땅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변화를 주심은 죽은 자들이 가득한 골짜기와 같은 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칠 때 생기를 받고 살아나는 영적인 군대들로 주의 종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특별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고뇌와 외로움과 그리고 투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느낍니다. 어느 한 순간에 섬뜩하게 느낍니다. 악한 세력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그리고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마지막 사단의 카드는 무엇이냐 하면 나로 하여금 이 설교단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좌절로 어떤 뼈저린 좌절감 같은 걸로 그런 카드를 내미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유혹으로 그런 카드를 내밉니다. 어떤 원인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이 밀려들고 주위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밀려들어서 그런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마다 저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며 얼마나 우리들이 남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세력들에 둘러 싸여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매주일 저와 여러분이 만나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 이 좁은 공간에서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적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저는 여러 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매일 매일이 기적의 연속이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붙드시는 기이한 손이 당신이 세운 종들을 붙들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인가하는 것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문 닫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운 제도들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속에서 참된 생명 그리고 당신의 종들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고 마르게 될 때 그 훌륭하게 지은 교회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수없이 모이는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의 그 틀에 박힌 예배의 의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들이 내는 연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먹고 마시는 일들에 마른 뼈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쓰여질 것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매순간 순간 느낍니다. 종종 생각합니다.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이번 주간에도 고요히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한 없이 주님을 찬송하고 싶지만 그리고 우리의 온 삶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지만 우리의 심령은 부르다 멎는 노래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고 싶지만 수많은 도전들이 이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 때 시골에서 먼 곳에서 누구를 부르면 바람결에 흩어져서 들렸다 그쳤다 들렸다 그쳤다 이런 것들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에 있어서 신앙생활이 바로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죽했으면 “떠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가장 좋으니”라고 했겠습니까? 그 세계에는 그렇게 그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 없이 천국의 한 구석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고 우리의 사랑이시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부르다가 늘 멎는 때도 있었지만 늘 찬송하기를 원했던 그 하나님께 이제는 누구도 방해하는 이 없고 세상의 사악한 물결이 그 찬송을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며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매우 심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을 어둔 그늘 외치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다 알면서 우리들을 여기에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시험 비바람과 유혹의 물결과 환란의 시련을 기꺼이 감당하고 때로는 입술을 깨물며 때로는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때로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며 그렇게 일생을 살아 온 사람들 그렇게 이긴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어떠한 방해도 없이 하나님 앞에 영광과 경배를 돌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는 그 곳으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오늘 생명이 없다면 여호와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가장 훌륭하고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을 지라도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다 기억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생명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생명을 호흡하며 살기를 거절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고통인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을 이길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배짱인지 주일도 수시로 빼먹고 그렇지 않으면 주일날 나와서 간단하게 예배드리고 오후 예배도 안 나오고 삼일 예배도 안 나오고 뭘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사단에게 목을 짓밟힌 채 그런 식으로 순종하면서 죄의 노예가 되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새롭게 살리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진정한 사랑 이 세상에 역사하시기를 소원하는 정말 진정한 기도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이들이 마른 뼈와 같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접 이들을 살리지 아니하리니 너는 가서 이들을 살려내라. 대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저하고 헤어지더라도 어느 목회를 만나든지 교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그가 어떠한 허물이 있든지 그것이 성경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최대한 그를 편안하게 해주고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고 정해진 순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남김없이 쏟아서 전해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최대의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생활도 책임지고 모든 것도 책임져야 되겠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언제든지 이렇게 눈을 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여호와께서 이상을 보이시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을 인하여 절망하게 하시고 사람들이 모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여호와의 소망을 발견하게 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참된 소망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나타나서 여호와께 속한 기이한 비전들을 보이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게 할 수 있는 기이한 힘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그 말씀이 “너는 마른 뼈에게 대언하라” 말했습니다. “대언하라.” 얼마나 훌륭한 말입니까? “내가 한 말을 네 입에 주노니 너는 가서 말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때 말씀을 전하며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든 편안히 설교할 수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간절히 엎드려 기도할 때 오늘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들에게 요즘 이 동네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대언하기를 원하시는가 그런 것들을 깊이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모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정말 교회가 쓸 데 없는 일을 벌려가지고 목회자가 거기에 사활을 걸고 뼈가 마르고 피가 마르는 그런 일들을 하지 말고 엎드려서 기도할 때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도록, 그런 것들은 어때요? 수시로 공격을 당하고 차단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백 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요즘과 같이 발달된 시대에는 핵무기를 사용하면 가장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한 방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곡창지대 몇 곳이 기가 막히게 흉년이 들게 만들어 버리면 세계는 완전히 굶주림으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백성이 범죄 하였을 지라도 기도할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하늘이 닫혔어도 이곳에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너희에게 비를 내리리라.” 여러분, 이 세상의 비도 내리는가 하면 혹은 오랫동안 가뭄에 시달리는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 삼년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엘리야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가 오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바꿔서 말하고 싶습니다. 말씀이 없던 시대에 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기근을 인하여 견딜 수가 없사오니 하늘을 열고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풍성한 말씀을 내리시옵소서. 우리가 그 말씀으로 살겠나이다.” 했겠냐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언하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이 말이 첫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것이 두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선지자에게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무엇라고 말하라는 것입니까? 너희 마른 뼈들아 외치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고 율법을 읽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올 해도 오늘도 자기의 자식들을 데려다가 할례를 시키고 할례를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언제든지 이 말씀은 다시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는 바는 먼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고 그 생기가 부어지는 일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되는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전혀 은혜도 없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 하면서도 예배에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을 자리를 만들어도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입니까? 생명보다 죽음이 좋기 때문입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른 뼈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가 어떻게 이렇게 씩씩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겠느냐? 마른 뼈가 어떻게 이렇게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가 있겠느냐? 마른 뼈가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교회 생활 할 수가 있겠느냐?”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오늘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살아있느냐? 너희의 심령은 살아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증거를 내게 다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첫 번째 메시지는 “너희 마른 뼈들아”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에스겔에 골짜기에서 비참하게 널려있던 그 마른 뼈들의 환상을 볼 때 절망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는 거의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깊은 좌절과 깊은 고뇌를 경험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호와가 내가 너희의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은 후에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이 말씀을 향해 감격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값진 것이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암환자들이 가득 모여 있는 병원에 문병을 갔습니다. 한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해 주고 있는데 우연히 옆의 침대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소고기를 두 근 씩 먹어 치우고 그리고 보리 한 섬도 거뜬히 들던 사람인데 나를 보고 사람들이 다 황소라고 그랬는데 내가 이 몹쓸 병에 걸려서 이제 죽음을 앞에 놓고 있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누가 얼핏 이야기하는데 주사가 좋은 주사가 있다는데 그것을 맞으면 나을 수 있다는데 완전한 실험은 아직 안 끝났지만 임상시험처럼 할 수 있다는데 그것이 안전도가 확인되면 한 병에 천 오백만원이래.”(몇 병을 맞아야 될 지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던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 좀 구할 수 없을까?”
여러분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사업이 중요하면 생명보다 중요하겠습니까? 시간이 없으면 죽을 시간도 없겠습니까? 여러분, “바빠. 사업이 중요해. 무엇이 중요해. 내 계획이 중요해. 긴급한 일이 있어.” 주께서 “오늘로서 네 인생이 끝났으니 오늘 저녁에 너는 올라오라.” 말씀하실 때 “주님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뭔가 가치체계가 많이 잘못되어 있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거리며 살다가 하나님이 한 번 눈 똑바로 뜨고 “안 되겠다. 이 사람은 계속 이런 식으로 놔두면 안 되겠다. 내가 어떻게든지 살려내고야 말겠다.” 그러면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바다처럼 말입니다. 왜 그래요? 주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간절히 말씀하시는 바는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바는 심판이 아니요 너희가 나를 향하여 다시 사는 것이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나 세상의 명예나 이 세상에서의 사업을 중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너희 안에 있는 생명이니라. 어찌하여 생명이 아닌 것들을 위하여 금을 달아주며 어찌하여 목숨이 아닌 것들을 위하여 너희의 옷을 달아주느냐 은을 달아주느냐?” 하나님이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 맞아 우리가 거의 죽어있었구나. 아니 거의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죽음의 잠을 잤어. 아 그렇구나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그것이 바로 영적인 각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생명이 있으면 내가 잘못 되었어도 내 생명이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면 내가 잘못된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내게 생명이 없으면 내가 사망의 길로 가면서도 이 길이 사망의 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의식할 수 없습니다. 내가 혹시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그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내가 압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주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도우시는 그 도움을 위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매달릴 수 있게 됩니다. 생명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치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마른 뼈라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여야 할 두 번째 메시지를 주셨는데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 사실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는 하나님이 마른 뼈들을 직접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하늘의 하나님의 권능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일시에 살아나라” 그래서 살아나게 하시지 않은 일이 기이하고 또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큰 권능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 권능이 임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서 손을 높이 들고 “여호와여 이들을 살리소서” 할 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말부터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년 가까운 세월동안 늘 반복되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바는 제가 반복하는 이 말이 매 듣는 순간마다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것이 되기를 원하고 매 순간 들을 적마다 이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마른 뼈들을 살리실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 마른 뼈들을 살리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수없이 나와도 이미 초점이 눈에서 간 사람들은 아무리 나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평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그 말씀이 때로는 징계의 말씀과 같고 우리의 무거운 인생에 한 번 더 보따리를 얹어주는 무거운 부담을 주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를 쇄신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어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 외치는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살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 그 다른 신기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기를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살아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야지만 살아갈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가만히 보면 그렇게 불과 예배 시간이 한시간 사십분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시간에 그 말씀을 전하는 시간 우리 교회는 좀 길기는 하지만 짧으면 사십오분 길면 그래도 두 시간 된 적은 별로 없는데 그 한 구십분 백분 정도 되는 그 시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뭔가 하면 말씀의 큰 은혜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보다 병은 한 번 나아보고 안수 기도 받아 가지고 등은 뜨거워졌을지 몰라도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자아가 깨트려진다든지 아니면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속에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그런 어떤 부분들을 드러내서 하나님 앞에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런 것이 바로 아까 말씀 드린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서 그 말씀으로 깊은 웅덩이와 수렁과 같은 자신의 상태에서 자신을 건져 내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와 변화들을 깊이 체험하고 받았던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하는 갈망과 그 은혜를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을 때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얼마나 커다란 아픔이 되었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지금 37장입니다. 1장이 아닙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굉장히 긴 세월동안 그는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37장까지 왔습니다. 누구에게 보냄을 받았습니까? 에스겔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명 받은 이후로 계속해서 예언 사역을 삼십 년 사월 오일 이후로 예언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렇게 예언 사역을 하는 동안에 핍박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고 죽음의 고비도 넘기면서 예언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 앞에 드러내 보여 주신 자기의 계시의 증언의 청중들은 모두 마른 뼈들로 드러났습니다. 이게 에스겔에게 얼마나 비참한 좌절을 주었겠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들이 아무리 마른 뼈와 같다고 할지라도 에스겔이 증거 하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그 마른 뼈와 같은 상태로부터 소생함을 입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교회, 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회복은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한 사람과 교회가 갖고 있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교회가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고치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요일마다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수요일 날 어디 가 계십니까? 주일 낮에 한 번 묻고 싶은데 저녁도 안 나오는 사람들한테 물어봐야 나올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데 수요일 날 어디 가 계십니까? 교통이 막혀서. 여기에 수요일이 주일 저녁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 아십니까? 요새 오십 명씩 나옵니다. 여기 모인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날아왔겠습니까? 땅을 파고 왔겠습니까? 제트기로 실어다 낙하산으로 떨어트려 놨습니까? 설교자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막히는 교통을 뚫고 씩씩대며 그러며 두 번 세 번 차를 갈아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수요예배가 제일 은혜롭습니다. 앉아서 듣는 사람들의 눈빛이 제게 주는 메시지가 다릅니다. 저는 수요일이 가장 기다려집니다. 왜 그래요? 사람들이 두 시간 씩 심지어는 두 시간 반 씩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그냥 만원 버스에서 밀리면서 직장에서 밥도 못 먹고 종종 걸음을 치며 그러고 온 사람들 그 중에 상당수가 우리 열린 교회가 식구가 아닌 다른 교회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고 갑니다. 그 다음 주엔 또 옵니다. 여러분, 수요일 날 무엇 합니까? 수요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냐? 그런 을것 따질 필요 없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수요 예배를 안 드려도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이게 어디서 생겨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보니까 안 되더라 이 이야기입니다. 주일 하루를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고 새 힘을 얻는 것 가지고는 일주일을 사는 것이 역부족인 것을 느끼겠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수요일에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새 힘을 받으면서 삼 일 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남은 삼 일을 하나님의 능력을 불꽃처럼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해보니까 그것 갖고 안 되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만족스럽지가 않더라는 말입니다. 겨우 세상에서 견디며 사는 것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는 특별한 믿음의 증거와 간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던 날 밤 금요일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땡그렁 종을 치면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금요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게 삼일 예배 오일 예배의 기원입니다. 무엇 복잡하게 계시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때보다 더 가난하고 핍절한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커가고 사람들은 많아지지만 그러나 언제나 우리들은 이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이 도시에서 결핍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일날 충만했던 우리들이 복잡한 사업과 도시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매몰되어 갈 때 우리의 영적인 삶이 질식되는 것 같은 위기를 느낄 때가 수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가 막혀서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디게 되는 것 같다고요? 더 빠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해 봤지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것 밖에는 해 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은 영혼들을 살리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이런 것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속에 여호와의 생기가 가득하게 될 때 그 때 하나님의 교회가 생기로 가득 차게 되면 사람들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 한 분이 옛날에 경험한 일입니다만 하나님이 놀라운 생기를 교회 속에 부어주시면 사람들 속에 물론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그런 고백을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자기는 처음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자기는 무엇 간절히 구원받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친구 손에 이끌려서 그냥 들어왔는데 그러나 딱 들어오는 그 순가 아무도 자기에게 너는 죄인이다 그렇게 말해 주지 않는데 그 때 사람들이 일어나서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 찬송을 죽 부르는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깊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회개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그 모임 속에 감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를 변화시키고 변화시켜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서로운 기운 서기가 깃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 각 지체들이 이 속에서 죄를 버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버리고 생명의 기운을 소유하고 있을 때 이러한 서기를 소유하는 특별한 모임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다른 어떤 모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어떤 커다란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운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얼굴빛을 비추시고 그리고 여호와의 생기가 모여있는 각 사람 속에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본질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교회의 원동력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하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 안 다녀 본 사람 있습니까? 문제는 그것의 상황이 되고 여건이 되면 수요예배에 나오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는 안 나와도 되는 날인데 나온다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나와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서 내가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힘 생기로 내가 무장이 되지 안 된다 그런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실망시키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우리가 생기를 소유하여야지만 그 생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교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번 집회를 일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이 집회는 여러분들이 나오지 않으면 설교자 혼자서 떠들다가 끝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만큼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일로 고통을 받았으면 이제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주여, 그 생명을 내게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집회를 확신 가운데 열면서 나는 여러분들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위한 생명입니까? 그리고 누구를 위한 생기입니까?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에 재물이 없어도 여호와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요셉과 같이 우리의 처지가 낮아져서 한 집안의 종이 되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인물이 훌륭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운이 여호와의 생명이 우리를 떠났다면 우리가 어떤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 어떤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 집회를 여시고 그리고 개최하는 사람들은 우리지만 하나님이 이 기간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집회에 앞서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기를 사모하는 그리운 마음들이 정말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애들을 데리고 오면 애들을 봐 줄 테니까 데리고 오십시오. 저 멀리 편안한 데다 갖다 놓고 마음 껏 뛰놀고 먹을 거 먹고 재미있게 놀게 해주고 여러분은 와서 충분히 은혜 받게 해줄 테니까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환경을 떨쳐 버리고 나와서 “여호와여 생명의 기운을 내게 주소서. 이것이 저의 유일한 기도 제목이옵나이다.” 부르짖을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제 2의 창조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마른 뼈도 살리신다 (1995.9.17 주일예배 3)
지난 시간에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서 주님이 에스겔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이 뼈들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눈에는 마른 뼈들과 같아서 모두 깊이 생명을 잃어버린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에게 “이 뼈들이 살아나겠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선지자는 “아멘” 하고 말하는 대신에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 자신도 어떻게 이미 시체처럼 되어버린 이 엄청난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 과연 이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될 수 있겠는가?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는 말하기를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가서 대언하라, 그러면서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마른 뼈들에게 이 에스겔이 가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오늘도 바로 그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에 마지막 이야기 나왔던 것이 그 마른 뼈들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래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10년,20년을 해도 눈동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생명과 생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살리지 않으면 살자가 없고 주님이 살리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마른 뼈도 군대가 되게 하시고 살아 있는 자 같으나 하나님이 생명을 주지 아니하시면 그는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갖기를 원하시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지 아니하시면 살아날 힘이 없다. 여호와께서 새롭게 일으키시지 아니하시면 일어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간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에스겔에게 이 선지자가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장면 무엇이냐 하면 “에스겔아 너는 가서 또 이런 말을 하라” 그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내가 생기를 너희 안에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이 우리는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이 가서 말하는 그 대상은 사실상 생명이 없는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완전히 마른 뼈라고 하는 것은 뼈만 있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덤 속에 들어가서 7년이 지나면 인간이 완전히 부패합니다. 그리고 뼈만 남습니다. 그 뼈를 가리켜 우리는 시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었으나 몸이 붙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뼈만 남은 것을 가지고는 우리는 해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른 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마른 뼈들에게 이 에스겔을 보고 가서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에스겔이 가서 이 마른 뼈들에게 말하는 장면을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옷을 잘 차려 입고 얼굴이 확 펴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도 거의 없는 완전히 미이라처럼 마른 뼈가 되어 있는 그러한 것들이 더부룩하게 쌓여 있는 그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죽음의 그림자밖에는 감도는 것이 없는 그런 곳에 가서 에스겔에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향해서 외치라고 말씀하실 때 과연 이 뼈들이 이 여호와의 선지자 에스겔의 외치는 음성을 듣고 반응할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할 때 말씀대로 사는 것은 힘이 있고 살이 있고 뼈가 있어야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도 하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면서 살고 헌신적으로 살고 이런 일들이 가능하지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고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밖에는 깃들이지 않는 그런 적막한 골짜기에서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곳에서 마른 뼈들이 과연 그 외치는 음성에 대해서 순종할 힘이 있으며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며 깨달아 안다고 할지라도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죽음과 방불한 생명 없음 이것이 죽기 직전의 상태, 에스겔의 골짜기에 깔려 있는 사망의 기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아 가서 그 마른 뼈들에게 말하라”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에스겔아 네가 보기에는 에스겔의 골짜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것이 뼈다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에 나의 생기만 들어가면 그것은 군대가 되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또 이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살아오고 사람들에게 온전한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가능성이 없고 앞으로도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만한 여력이 있겠는가? 완전히 이 세상에서는 신앙이 끝난 것 같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더 살 수 있을 것 같이 죽음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생기를 넣어 주시기만 하면 그 마른 뼈가 살아나 군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그 마른 뼈들이 옛날에 얼마나 덩치 큰 마른 뼈들이었으며 옛날에 얼마나 많은 마른 뼈들이었으며 옛날에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이었으며 얼마나 등치가 있고, 완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지 성경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오로지 지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 바르게 살고 충만하고 생명을 누리며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 오늘 성공한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야지 모레는 또 모레 가서 오늘 나는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 우리는 현재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에스겔의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이 어느 가문 출신이면 무슨 의미가 있고 또 그들이 어느 집안에서 자랐으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의 상태는 마른 뼈와 같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지식과 그 문벌과 그 권세로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만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니까 마른 뼈가 또 마른 뼈에게 가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고 하는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실은 우리 영적인 삶에 있어서 절망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또 원인이 무엇 때문이든 우리가 어떠한 영적인 어려움에 있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살리고자 하면 누구든 그 생명의 기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그리고 비참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포로 되어 끌려 간 그 민족적으로 암울한 시기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만방에 알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살리시는 역사를 온 민족에게 보이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사모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살리시는 손, 온 땅을 두루 헤치시며 잠자는 마른 뼈들을 향해 생기를 보내실 때 죽음의 계곡에 생명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골짜기로 변할 것입니다. 절망과 암흑의 구렁텅이가 참된 생명의 빛과 보좌에서 들리는 찬송소리로 가득 찬 영광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결국은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분투하며 쓰러졌다가는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면서 결국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 찬송할 말은 “아버지여 나의 나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인해서 절망하는 것은 어떤 마음이 포함되어 있냐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영적인 삶이 내 힘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고 내가 이 모든 영적인 삶을 책임지고 내 스스로 이끌어 간다고 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이런 불신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오늘 신앙을 따라서 믿음을 따라서 결심하고 남다른 결심과 새 힘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힘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리시고 병들어서 썩어 문드러져서 여름날의 물고기와 같이 깊이 부패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지경에서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장면을 경험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남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인해서 우리의 개인적인 환경이 가져다주는 우리의 신앙의 부자유함을 인해서 과도하게 낙망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절망대신 여호와의 생기 없음을 하나님 앞에 깊이 탄식하고 주께서 진실로 생명이 없어서 죽은 자와 방불한 나의 영혼 속에 여호와 손에만 있는 참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셔서 나로 내 인생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나왔습니다. 생명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아 왔기 때문에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슬기로 가득 찬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거나 때 따라서는 역겨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길은 오직 생명이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생명 없는 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요 근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님이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냐 하면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을 에스겔이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하는 말씀을 전하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하는 이것은 단순히 성경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아는 공부시간이 아닙니다. 지식을 쌓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가운데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이 나가고 영적으로 눌린 자들이 자유함을 받게 되고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인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들이 여호와의 생기가 아니면 어떻게 일어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보이는 이 시간에는 말씀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변화를 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생기로 생명을 잃어버린 마른 뼈들에게 닿는 그 통로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말씀 증거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언제나 깊이 생각하고 또 반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준비된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준비된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성경을 통해 준비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는 먼저 성경을 펼 때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이 먼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된 말씀으로 준비된 마음에게 예정하신 방법대로 말씀하시기 시작할 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의 영혼 속에 생기가 부어질 때 그 때 죽음이 감돌던 땅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배우든지 또 설교를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든지 우리는 언제나 이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서 여호와의 놀라운 생기가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지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놀라운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하시고 그리고 잠자던 자들을 깨어나게 하고 무기력한 자들로 강한 힘을 공급받게 역사해 주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고 특별히 그 능력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온전히 드러내 주기에 성공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 말씀이 단지 우리의 지식을 쌓는 것이나 알지 못하던 사실을 깨달아 아는 지식을 축적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고 말씀을 들었고 성경을 폈고 주님의 진리를 묵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여호와의 진리가 그들 속에 생기로 역사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화) 돌멩이 앞에 설교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생각나게 하던 집회-이틀 후 몇 명이 변화되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남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다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러 왔는데 사람이 이렇게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으로 만든 덩어리들이 여기 가득 와 앉아 있고 사람처럼 똑같이 만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옆에서 “자매님 안녕하셨어요?” 툭 툭 치니까 통 통 소리가 납니다. 때는 밤 11시 갑자기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섬뜩하죠?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 놓고 그 때는 흙덩어리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작정을 하셨다 할지라도 다양하게 빚으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겉보기에 아담과 똑같아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드디어 주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까 아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생기를 너에게 들어가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생기가 곧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니라 그래서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로 새롭게 태어나서 군대와 같은 사람들로 만드는 것 이것은 가히 두 번째 창조인 것입니다. 첫 번째 창조는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흙으로 들어가 그 아담이 생기를 받고 역사하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태어날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생기가 우리 가운데 그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생기가 끊어지면 아무리 말 잘하고 아무리 찬송을 잘하고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해도 속에서 생기가 떨어지고 그리고 마른 뼈와 같이 되어 버리면 여호와를 향하여 교제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 기도하면 되잖아? 기도가 되어야죠? 심령이 마른 뼈와 같이 되었는데 무슨 기도가 되겠습니까? 충만하게 생활을 해라, 생기가 있어야지 충만하게 생활을 하죠? 하나님을 믿어라 생기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죠? 두려워 말라 무슨 배짱으로 두려워 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결국 여호와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생기로 역사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부끄럽고 비참하게 비겁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늘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의 눈치를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도 축복받지 못하는 그러한 불분명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색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여호수아 단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그 이방의 신을 너희가 섬기든지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생명은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생기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죽은 것과 방불한 삶입니다.
(예화) 350명 모인 집회. 설교 후 기도할 때 조용함. 공동묘지와 같음.
여호와의 생기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원천적인 자산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값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힘이 없고 어두운 세상에서 참된 하나님의 지혜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일 이렇게 교회 나오고 예배드리고 헌금 하고 봉사하고 목회자의 말을 잘 순종하면서 따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런 일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전면적으로 내가 잘못되었다하는 전제하에 전체적으로 나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밑바닥부터 한 번 뒤집어엎는 역사가 종종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여호와의 생기로 충만한 삶을 늘 살려고 하더라도 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건강하게 즐겁게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예화) 중풍에 걸린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남. 건강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너무 애처로움. 정수기, 공기청정기를 사용하고, 인삼, 녹용을 복용하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질병에 시달려 죽게 됨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공기가 오염이 되어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히말라야 산꼭대기나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태어난 보람이 없습니다. 인간들 속에서 부딪히면서 그 속에서 뭔가 사회와 국가와 이 세상과 그리고 역사가 원하는 일들을 이루고 자기를 성취해 가며 이웃을 위해 기여하고 가정을 위해서 기여하고 자기의 지역사회를 위해서 기여하고 자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서 자기가 이 어두운 세상을 건너가는 그런 다리가 되는 역할을 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문제가 많은 이 세상, 풍랑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어서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러나 또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이 세상의 모든 공해가 우리를 건강하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영적인 생활도 똑같습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나면 주 뜻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노력도 합니다.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범죄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통성기도하고 즉석에서 범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여 능력 주시옵소서하고 범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은혜 받고 그렇게 살아 보려고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순결한 삶을 방해합니다. 위협합니다. 도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육신, 우리의 연약한 자아가 깊이 영향 받고 고통하며 그러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해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깊이 짓눌리고 오염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생기가 아니면 어떻게 이 일들을 우리들이 감당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들을 구속하신 것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눈물만 머금고 가까스로 견디다가 주께서 부르실 때 “주여 어찌하여 이제 오라고 하시옵나이까?” 하고 자기만 홀랑 도망치는 이런 삶을 위해서 주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주께서 오라고 하실 때 영광 가운데 나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흠 없는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간신히 고통을 견디며 시련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생기가 없어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세상에 나아가서 손을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여호와의 생기가 나의 섬김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한 사람이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마른 뼈들로 가득 찬 에스겔의 골짜기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놀라운 찬양으로 역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또한 오늘 우리들도 부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생기가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여호와의 생령의 기운이 우리를 감싸서 그 기운이 우리에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겨 승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마른 뼈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하고 숙명적인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이 여러분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왜 에스겔에게 골짜기에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른 뼈의 환상을 보여 주셔서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에게 예언을 하시게 하는지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른 뼈를 살리시는 역사의 궁극적인 계획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강해하면서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대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대가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안수기도해서 병을 고쳐줄 테니 오백만원을 내놔라 전부 다 사기입니다. 병 고쳐서 나아서 감사해서 내면 내는 것이고 안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얼마를 내놔라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졌습니다. 거저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어도 도무지 우리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되게 만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새롭게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을 생각나게 하시는 이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에는 하나님이 보상을 바라는 것은 없지만 그러나 그 은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그 계획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가 매일 그 은혜를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문제이지만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셨을까? 그리고 그 은혜를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그 계획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 없이 그냥 살아가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어도 그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은혜를 주실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계획을 위하여 사용할 때 더욱 (테이프 끊김)
하나님이 오늘 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오만하고 방자하고 교만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 드려야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광과 그 놀라운 은혜 앞에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만 홀로 영광을 받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너무 자주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를 알리라. 너희가 비로소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 말이 특별히 언제 많이 나오냐 하면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서 애굽을 출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열두 가지 재앙을 행하실 때 “내가 이 일을 행하리니 온 땅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너희가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인 것을 알게 되리라.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이 말씀이 바로 출애굽을 위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실 때 풍성하게 드러났던 계시였습니다.
오늘 그 익숙한 계시를 다시 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땅에서 오랜 노예살이를 하였지만 그에 앞서서 자기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을 숙명처럼 알았지만 그러나 열두 가지 재앙을 통해 여호와가 누구이신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바로의 수하에서 고깃 국물을 먹던 삶을 버리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앞길이 어디인지 모르는 광야를 향하여 아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위해, 그 백성들을 건지시는 놀라운 일들을 계시로서 보여주기 위하여 그 가나안 땅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일어설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어두운 땅의 여호와가 당신이 누구이신 것을 알려 주는 일들이 일어나자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일어나서 여호와를 따르고 여호와께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그 여호와께 충성하고 살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일하지 아니하는 모든 신앙생활은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버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새롭게 생각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진흙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감정이 없던 신앙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해 감격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수 없었던 손과 발이 생명과 힘줄을 얻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주실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생기를 받을 때 하나님을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른 뼈와 같은 몸속으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실 때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기가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두 번째 하나님의 창조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마른 뼈로 골짜기에서 썩어 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여호와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든지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좋으시면 생기를 거절하고 에스겔의 골짜기에 누워있거니와 생명을 사모하거들랑 하나님 앞에 나아와 생기를 불어 넣어 나를 군대 만드시기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여호와인줄 알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6)
마른 뼈도 살리신다 (1995.9.24 주일예배 4)
지난 시간에 생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이제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한 환상을 보여주신 다음에 세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네가 이것을 가서 말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성령의 은혜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또 하나 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른 뼈의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이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기를 부어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그들을 살리시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렇게 백성들을 살림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많지만 이 세상에서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영혼을 하나님 앞에 데려오는 것,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 이것보다도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주일학교에 몇 명 나왔느냐고 물어보면 오늘 열심히 봉사를 하고 집사님들이 실어와서 마흔여 섯명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사람이 늘어나면 왜 좋아합니까? 주일학교 학생들이 헌금을 하면 얼마나 하겠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오면 교회에 낙서나 하고 가지 좋은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나왔다는 이야기는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 영혼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우리가 정말 귀중한 일이고 기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최대 경사는 무엇입니까? 기도원 지으려고 부지를 사거나 건축하려고 빌딩을 사는 것이 교회의 최대 경사가 아니라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더라 할 때 교회는 기쁨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 천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도 일어나셔서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이게 최대의 경사입니다. 우리가 나가서 전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게 만들기 위해서 전도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예수 믿게 만들면, 그래서 다 예수 믿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좋아합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 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가장 많이 믿느냐 하면, 아주 절친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신앙에 대해서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외치는 예수 믿으라는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에 초대 교회에 김익두 목사님이 깡패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코쟁이 여편네가 예수 믿어야 산다고 하면서 무엇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코를 확 풀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선교사가 담대하게 “당신, 하나님 말씀을 코로 풀었으니 당신 코를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웃기고 있네.” 하고 집에 갔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밤이 깊을수록 자꾸 손이 코로 가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귀신이 붙어서 코가 동화에 나오는 딸기코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멀쩡한데 불안해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게 동기가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 김익두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더라. 고 하니까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동네 돌아다니며 횡포를 부리더니 이제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욕을 해도 겸손한 사람이 되어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김익두가 은혜를 받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태평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너지고 깨뜨려지는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보여지지도 않고 예수 귀신이 만져지지도 않는데 저렇게 기가 막히게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그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냐? 하고 하나님이 알려지게 됩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니라.”
저는 음식 중에서 진짜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 하면 ‘더덕’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 강원도에 살았거든요. 그 때는 더덕이 참 많았습니다. 어린애 팔뚝만한 더덕을 시장에서 사다가 쭉쭉 까서 방망이로 두들겨가지고 고추장에 절였다가 마당에다 화롯불 켜놓고 그 위에 접어서 구워먹으면 옆집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면, 사람들이 더덕을 캘 때 무엇을 보고 더덕을 캐는지 아십니까? 계곡에 한 뿌리만 있어도 그 싱그러운 더덕 냄새가 확 퍼집니다. 500년 정도만 묵으면 산삼 500년 묵은 것보다 더 비쌉니다. 그것을 자르면 속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게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산을 누비면서 더덕을 캐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수입한 더덕은 어린애 팔뚝만한 더덕을 한 소쿠리씩 쌓아두고 3만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야, 정말 싸다.’ 하고 살까 말까 하는데 전부 다 수입품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두들겨도 냄새가 나지 않고 믹서에다 갈아도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 땅에서 토종으로 자란 그것이 말하자면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알리는 향기를 보면 사람들이 “와, 축복과 심판이 한꺼번에 오는구나” 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 어떤 사람들은 그 향기로 말미암아 상급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사형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로마 시대에 전쟁을 이기고 난 다음에 개선문을 지나서 개선합니다. 그 때 제일 먼저 군대를 총 지휘했던 장군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맹호부대가 돌아왔을 때 별 네개가 맨 앞에 서서 구보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뒤에 병사들이 쭉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렇게 묶인 사람, 칼 쓴 사람, 그 다음에 사슬 묶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적들을 포로로 잡아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벌을 많이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끝까지 싸우자고 했던 주전파들, 그런 사람들이 다 전범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전범은 이긴 나라에는 없습니다. 꼭 진 나라에만 전범이 있습니다. 줄줄이 사탕처럼 쭉 오는 것입니다. 그 때 왕 앞에는 향로가 있고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향기가 확 납니다. 그 향기가 경기장에 진동하면 이제 상급과 심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려 싸우며 나라를 지키고 먼 나라 땅에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승전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 장수들에게 상급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너는 방배동을 다 준다.” “너는 서초 구청장을 준다.” 이렇게 상이 주어지고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의 향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쓰인 편지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판처럼 살아가면 ‘아, 하나님은 개판 같은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은 ‘아,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여름 수련회를 할 때 손양원 목사님이 딸을 재판장에 보내서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그 살인자를 아들로 삼아야겠다는 소식을 그 딸이 재판장에서 증언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재판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지금 누구에게 감격하는 것입니까? ‘손 목사님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손 목사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그것을 알고 사람들이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고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맨날 부흥, 부흥 하는데 부흥이 무엇이냐? 부흥은 하나님이 확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흥이 일어날 때 확 알려지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하나님일 때 떨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이 확 알려질 때 사람들은 그 사랑에 마음이 녹아지는 놀라운 역사와 은혜들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말로 알리고 삶으로 알리고, 삶으로 보여주고 또 말로써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알려주는 때가 있었고 못 알려주는 때가 있었습니다. 잘 알려주는 때는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잘 못 알려주는 때이거나 혹은 잘 알려줘도 세상이 강퍅할 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부흥회를 하고 기도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은혜 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주의 성령이, 여호와의 생기가 우리와 함께 할 때 그 때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 지가 4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30년을 거꾸로 치면 1560년인데 그러면 아마 임진왜란, 그 때쯤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으면 잊혀져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백성들 속에서도 잊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잊혀져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430년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430년 되는 그 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200-300만 명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땅에서 종살이를 하던 수많은 족속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우리가 거기로 하나님을 따라가리라.” 하고 광야 길로 들어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신앙 때문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단번에 확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 주실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열 번이나 재앙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강도를 더하다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애굽의 하수가 피가 되고 개구리가 올라오고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애굽에서는 온 백성들이 하나님이 과연 여호와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 보내신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 때 사람들 속에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탕하게 살 때마다 “얘들아, 그러면 안된다” 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얘들아, 나 여호와는 거룩한 하나님이란다” 그리고 당신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그렇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변화를 받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신앙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가 여기 서 있고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전도를 하고 사람들을 이 곳에 불러 모으고 우리가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여호와의 생기가 이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생기와 힘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신이 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동네에 깨끗한 가게가 있습니다. 음식점도 마찬가지로 깨끗해야 먹을 게 있습니다. 지저분하면 거기에는 먹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갑자기 평소와는 달리 너저분하고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습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와서 “아줌마, 뭐가 어디에 있어요?” 하니까 선반을 턱으로 가리키고 “설탕 좀 주세요” 하니까 “알아서 퍼 가슈.”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불과 한 일주일 전에 죽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 살 맛이 안 나는 것입니다. 인생이 살 맛이 안 나니까 장사도 할 맛이 안 나고 돈 벌어 무엇 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꼭 살아야 하는 당위성,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필연성,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역사할 때 예수 믿는 생활이 생기가 돌고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동작이 벌써 다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우리 속에 역사하고 생기가 움직이면 우리가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섬기고 주를 위해 봉사하는 원동력이 이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또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표는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것은 누가 알겠다는 것입니까? 마른 뼈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고 그래서 신앙이 변화되고 생기를 사모하게 되고 생기를 주신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여호와가 주인이신지를 충만하게 알게 될 때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인가, 여호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제일 전도를 잘 하느냐 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제일 잘 합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제 학생 하나가 제 방에 와서 저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교회에 집회를 와 달라고 목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토요일 이틀만 나가겠다고 했는데, 800명이 모이는 교회를 지었는데 150명이 나온다고 하니까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 앞에 있는 교회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교회는 참 열심히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다르냐고 했더니, 자기네 교회는 주일학교 선생들이 예배 시간이 되어야 오는데 저쪽 교회는 잠도 안 자는지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하다가 7시가 되면 선생들이 애들을 깨워가지고 세수 시켜서 데리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한 선생이 뒤에 줄줄이 사탕처럼 해 가지고 찬송을 부르면서 앞으로 나란히를 해서 교회에 오는데, 예배 시간이 임박해 오면 선생 하나 하나가 뒤에, 적으면 다섯 여섯, 많으면 이십 명, 삼심 명씩 달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흉내를 내 보려고 해도,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생기가 교회를 섬기는 것을 그렇게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기 없는 사람들은 쥐꼬리만큼 봉사하면서 매일 하는 말이 “아이구 피곤해. 아이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 사람을 소개시켜 줬더니 전화가 와서 “거 말이야, 공부 잘 한다고 해서 썼더니 매일 한다는 소리가 ‘피곤합니다. 피곤해요’하는데 도무지 뭘 하길래 피곤한지 모르겠다”
생기가 없이 주를 섬기려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기가 들어가니까 그 영혼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지고 그 영혼들을 만나는 것이 진짜로 설레는 것입니다. 정주영씨가 구멍가게를 할 때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만나는데 설레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른 새벽에, 누가 시켜서 되겠습니까? 안 일어나면 가서 깨워가지고 세수 시키고 코 닦여서 옷 입혀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기입니다. 이런 생기가 내 안에서 역사하니까 그 섬기는 사람을 보면서 “야, 저 교회에는 딴 게 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없는 그 무엇이 거기에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뭔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변화의 능력이 교회에 있어야지만 가서 데리고 오는 것이 의미가 있지, 데리고 왔는데 ‘재미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다섯 번 여섯 번 나갔는데도 ‘아무런 감각도 없더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데리고 오는 것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든지 찬송을 통해서든지 말씀을 통해서든지 교제를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왔을 때 ‘이 곳은 인간이 평범하게 모인 자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이 교회 속에 역사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변화되고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아는 신령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해 주는 것이 생기를 통해서입니다. 그 생기가 교회에 역사하고 교회에 역사할 때 하나님이 뭔가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왜 에스겔에 나타난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굳이 복잡하게 살려내시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군대로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뼈와 같이 잠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커다란 손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손해가 무엇이입니까? 그 마른 뼈를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힘이 없도다. 여호와는 자기의 백성을 마른 뼈와 같이 버려두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 이 마른 뼈들이 큰 군대와 같이 되어서 그들이 광야를 지나가고 시온과 바산의 왕들을 쳐부수고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을 정벌해 갈 때 그들은 군대를 본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간담이 서늘하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알려져서 결국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내 인생도 거두어 가시는 분이시구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삷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이고 여호와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잠깐 살펴보았던 요셉을 통하여, 태양신을 섬기는 것 이외에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던 나라의 바로와 모든 사람들이 요셉을 통하여서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 세상에 여호와의 신에 이와 같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디에서 만들 수 있겠느냐.” 흉년을 주고 풍년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을 캄캄한 이방의 땅에서 받아냈던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 일을 만드셨습니까? 여호와의 생기가 역사하여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과 빛을 드러내던 한 사람 요셉을 통해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이 사는 애굽의 땅에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라는 그 놀라운 신앙 고백을 이방의 사람들로부터 받아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성경에 얼마든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에베소 지방에 맨 처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때는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마술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책을 다 불태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가 누구이신지 그들에게 알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니까 마술하던 책을 다 불태우고 우상 단지들을 다 깨뜨려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캄캄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죄로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 받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한 분 선교 보고를 하는데 가족 중에 누가 병이 나면 병을 고칠 생각을 안 하고 제일 나중에 태어난 막둥이, 갓난 아기를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입을 벌리고 모래를 처넣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병마가 물러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또 하나는 죽었다는 판정을 내리는데 눈만 감고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죽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손발이 움직이는데도 장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의 사단이 그런 사단입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에스키모인들이, 나이가 먹으면 슬며시 집을 떠납니다. 들판으로 나아가서 고요히 앉아서 기다립니다. 곰이나 맹수가 와서 자기를 잡아먹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식량이 모자라는 고통을 덜어주고, 자신들이 그렇게 죽을 때 짐승들이 살찌고, 짐승들이 번성하면 자식들이 그 짐승을 잡아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는 부모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덕이 무엇이고 우리의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아이를 나뭇잎에 싸서 땅 속에 묻고 흙을 퍼 붓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잘 노는 애를 갑자기 손목을 끌고 바다로 달려가서는 입을 찢고 거기에 몇 삽씩 퍼 넣어서 결국에는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한 고통이 어떻게 해결이 됩니까? 예수의 복음이 전해져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니까 하나님이 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한 인간을 향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어린 아이에게 모래를 처넣는다고 해서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쫓아내실 때 귀신이 물러가고 여호와의 참 신이 그 백성들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알게 될 때 어둡던 땅에 빛이 비추고 죄로 말미암아 칠흙 같은 어두움이 깃들여 있던 어둠과 악마의 동산이 빛의 동산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가 알려져야 할 필요한 이유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개인들에게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면서 인생을 원망하고 자기의 처지를 불평하던 사람들이 변화되고 은혜를 받고 인생의 새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인생이 빛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주실 때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인생이 바뀌는 역사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서 군대와 같이 생기를 머금고 강한 힘살과 가죽과 살을 가진, 뼈가 맞추어진 강한 군대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죄악 된 세상 한 가운데를 행진하며 걸어갈 때 사람들은 군대를 보고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참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5. 골짜기의 군대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7-10)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는 백성들이 되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 드디어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쫒아서 대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언하기 시작할 때 그때 즉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골짜기에 있는 수많은 마른 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고 뼈들이 서로 연락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뼈는 단순히 인간의 모양을 갖추고 그대로 누워있는 그런 뼈가 아니라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뼈대로 해골은 해골대로 목뼈는 목뼈대로 이렇게 사방에 뒹굴던 것이 각자 자기의 짝을 찾아서 이제 커다란 사람으로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그 선지자에게 충격적인 광경이겠습니까? 얼마나 오래됐는지 마른 뼈라고 했습니다. 핏기도 마르고 물기도 마르고 습기도 하나 없는 마른 뼈 말입니다.
마른 뼈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마른 뼈가 다시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 변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하게 될 때 쉽게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야 정말 살아나게 되겠는가. 이런 마른 뼈가 살아나겠는가. 하나님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예배할 줄도 모르고 그리고 기도할 수 있는 힘도 없는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나겠는가.’ 어제도 어느 목사님 와가지고 잠깐 이야기하는 가운데 교회를 바라보는 절망이 생겼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왜 교회에 나오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그런 마른 뼈들 사이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더니 마른 뼈들이 함께 붙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다리뼈가 휙 움직이더니 무릎 뼈에 가서 툭 붙고 무릎 뼈가 엉치 뼈에 가서 붙고 등뼈가 서고 갈비뼈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하더니 수백 개의 뼈들이 모여가지고 드디어 사람의 모습이 되기 시작합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뼈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뼈들이었는데 그 뼈들이 줄줄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군대를 크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뼈들이 모여서 군대를 이루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뼈들 하나하나가 맞추어지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역시 저는 이속에서 교회가 영적으로 회복될 때 그 회복의 질서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회복되어질 때 먼저 질서를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서 질서가 회복되는 것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몸입니다. 그 몸이 마른 뼈와 같이 신앙적으로 깊이 타락하고 영적으로 모두 메말라 있을 때 교회 속에서 진정한 연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하나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큰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연합을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기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지체로서 연합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것을 한번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뒤에 그 포스터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경기도와 충청도에 있는 교회들이 한 20여개 교회들이 연합을 했는데 장로교 합동측이 주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감리교도 오고 순복음도 오고 줄줄이 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70회 기도회라고 그렇습니다. 제가 70번째로 그 기도회에 강사로 갔는데 요즘 같은 때 누가 모이란다고 모입니까? 자기네 교회서 모이라고 그래도 안 모이는데. 그런데 20개 넘는 30개 가까이 되는 교회들이 충청도에서 경기도에서 꾸역꾸역 모이는데 그 매월 마지막 주에 모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족히 한 400명 될 것 같습니다. 기도원에 아주 차가 무엇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이 가득 모였습니다. 거기 모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대단합니다. 서로 교회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열심입니다. 그것도 무엇 밤새도록 기도하는 건 아니고 한 열시쯤 와가지고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팀이 찬양을 쭉 인도하니까 인제 찬양 한 30분 한 다음에 열심히 기도를 하고 그리고 강사가 올라가서 한 시간 반 설교한 다음에 한 시간 정도 설교한 다음에 그다음에 바로 통성기도로 기도를 제목을 쭉 주면서 그냥 간절히 기도하고 열두시 반쯤 되니까 딱 마치고 돌아가더라구요. 더 깊이 기도할 사람들은 그 산에 남아서 기도하고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연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체험을 한 신앙의 성도들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가 마디마디가 연락을 잘 합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이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삐그덕 거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갈라지고 상처내고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다. 예수를 믿고 잘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모인거지 실지로 잘사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처럼 살고 싶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 정말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려져서 교회가 영적으로 회복되어질 때 그때 교회가 질서가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뼈와 뼈가 연락하고 마디와 마디가 연락하며 그것이 한 지체인 것을 깨달아 아는 성도의 연합이 영적인 회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이 은혜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렇거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고 나면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교회의 무너진 질서들을 은혜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뒹굴며 생명이 없어도 서로 잘났다고 하던 이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선지자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니까 이 마른 뼈들이 연합을 하면서 하나의 큰 진정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선지자가 순종함으로 대언할 때 한 사람의 순종과 대언은 이처럼 수많은 마른 뼈들을 서로 연락하게 만들고 그 뼈들이 서로 맞아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몸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개인의 신앙이든지 교회의 신앙이든지 신앙을 영적으로 회복시키시는 질서로운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른 뼈에게 무릎 뼈에만 생기를 불어넣어서 무릎 뼈 하나만 살이 털썩 붙어가지고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면 그건 회복이 아닙니다. 회복이 아닙니다. 또 해골에게만 생기를 불어넣어가지고 갑자기 살도 붙고 피도 흐르고 해가지고 눈을 멀뚱 멀뚱 뜨는 그 인간의 머리가 될 것 아닙니까? 그게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소리소리 지르면 회복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맞출 것을 맞추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기를 받고 그리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이렇게 깨어진 신앙생활의 질서와 형식을 새롭게 회복해야 됩니다. 형식이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도 안 나오면서 ‘이렇게 억지로 교회 나가면 무엇하나. 나갈 마음도 없는데 억지로 나가면 무엇하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 내가 교회를 나가지.’ 교회를 나와야지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든가 야단을 치시든가 합니다. 형식이 회복되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고 있어서야 진정한 영적인 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보십시오. 오늘 이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신앙생활의 침체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그다음에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의 리듬을 다 깨뜨리고 그리고 위에 와야 할 것들이 아래로 가고 그리고 아래로 와야 할 것들이 밑으로 가고 좌에 와야 할 것들이 우에 가고 우에 가야 할 것들이 좌에 가며 혼돈과 무질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정리되는 역사가 오늘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 뼈는 자기 뼈 찾아가서. 남자의 머리에 여자의 어깨뼈가 붙는 법도 없었고 여자의 등뼈에 남자의 갈비뼈가 붙는 법도 없었습니다.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대로 각자 자기의 뼈를 찾아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형식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 자신의 뼈를 찾아가자 인간의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이 뼈들이 이렇게 연락하고 상합하며 각자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위치를 찾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커다란 몸인 이 교회 속에서 각자 자신의 맡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뼈가 서로 연결을 하고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어서 그래서 든든히 서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이렇게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서 생기와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일들이 없이는 교회는 결코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설수가 없습니다. 누구 한사람의 목소리 가지고 든든히 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돈 가지고 교회가 든든히 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각 지체로서 은혜를 받고 질서를 회복하고 신앙의 형식을 올바로 갖추고 자신의 자리에서서 생명 있는 삶을 살아갈 때 보이지 않는 교회가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든든히 설 때 보이는 교회가 든든히 섭니다.
난 엊그제 굉장히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핏 길거리에서 부목사님이 이야기를 하길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미국사람 이야기를 쭉 하면서 교회를 15년 동안에 57번을 이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사 목회를 하느냐? 그랬더니 그게 아니라 천막을 치면서 교회를 했다고 합니다. 공터 있으면 텐트치고 하다가 또 나가라고 그러면 다른데 얻어서가고 해가지고 15년 동안에 57번을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까 60번이라고 치고 그럼 얼마입니다. 일 년에 4번씩 이사를 간 거니까 길면 3개월 버텼고 빠르면 무엇 2-3개월에 한 번씩 교회를 옮겨 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하나님나라다.’ 교인들이 모여서 은혜를 받았는데 20,000명쯤 모였다는데 도저히 이제는 이사다니기도 그 목사님은 지친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어야겠다. 그래서 900만불 정도만 모금하자. 70억쯤 됩니까? 70억쯤 모금을 해서 이제는 교회당을 하나 지어야겠다. 그랬더니 헌금을 했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2,700억이 나왔데요. 2,700만불. 상상이 안가시죠? 72억 모금하려고 했는데 200백억 이상 헌금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서면 보이는 교회는 하루아침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걱정할게 무엇이 있습니까? 탁하니까 교회가 하나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서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가 든든히 서게 될 때 그때 보이는 교회는 순식간에 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돈이 있으면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교회가 든든히 서지 않고 교회를 지으려고 할 때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렇게만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였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질서로운 방법입니까? 우선 뼈를 다 맞추시고 그다음에 힘줄을 넣으시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을 덮으셨습니다. 가죽먼저 덮었다면 얼마나 재밌겠습니까? 뼈에 가죽만 남았겠지요? 그런데 차례대로 힘살을 넣으시고 근육을 붙이시고 기름도 붙이시고 마지막에 도배를 하신 것입니다. 그게 스킨 피부입니다. 피부를 딱 입히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인제는 옛날의 시체와 같은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의젓한 군인의 한 모습으로 바꿔져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꿔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는 생기는 없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르되 “인자야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마지막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빚으실 때 흙으로 빚으신 다음에 그 후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듯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인간의 육체를 만든 다음에 그 속에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방에서부터 생기야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하라.” 그러니까 결국은 이 마른 뼈가 그 모든 가죽과 힘살과 모든 피부를 잃어버리고 가죽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물기하나 없고 습기 하나 없는 핏기 하나 없는 그런 마른 뼈들이 되어서 온 땅에 가득하게 골짜기에 뒹굴게 되었던 것은 무엇이 떠났기 때문입니까? 생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기가 떠나면 그러면 초상집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생기가 교회를 떠나면 여호와의 생기가 개인을 떠나면 그래서 다윗은 무엇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했습니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자신은 비록 범죄 했을지라도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나의 심령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생기가 모두 떠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거대한 뼈들이 집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들은 거대한 뼈의 집단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기는 떠나갔고 생기가 떠나가고 나자 이렇게 살들이 마르고 힘줄들이 사라지고 가죽들이 사라지는 것은 순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우리의 신아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나와 함께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할 때는 그 신앙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기쁘고 즐거움이 됩니다. 내가 은혜를 받고 내안에 성령이 함께 계시면 교회에 신앙생활을 위한 모든 형식들이 내게 즐거움이 되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이 떨어지고 내안에 여호와의 참된 생기가 모두 말라버릴 때 그대에 나에게 신앙생활은 너무나 고달프고 그리고 이 신앙생활의 형식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망을 당한 자, 사망을 당한 자, 사망을 당한 자, 그래서 생기가 사라지고 죽음 밖에는 남지 않는 이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여호와의 생기는 죽었던 사람을 살려냅니다. 마비되었던 신앙의 양심을 다시 살려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된 마음이 없어서 죽어버린 사람들의 심령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주님을 위한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이처럼 생명이 없고 죽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신앙생활에 생명과 생기를 불어넣어서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바로 생기가 다시 부어질 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10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 세상에서 마른 뼈들로 남아있어서는 마땅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군대로 태어나길 원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지는 것은 이러한 군대가 되어서 이 군대가 싸우고 투쟁을 하고 승리를 하고 이기는 승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 승리하고 이기는 이스라엘 통해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기위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기가 들어갈 때 살아 일어났습니다.
10절을 중간을 보십시오. 무엇라고 되어있습니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한참 있다가 살아났더라.” 그것이 아니라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마른 뼈로 누워있던 모든 뼈들이 강한 생기가 속에 들어가자 그들이 곧 살아서 일어나고 벌떡 일어서서 싸울 차비를 갖추는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누워있을 때는 골짜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뼈들이 군대가 되어가자 여기저기서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는 소리가 났고 구령소리가 났고 군화를 신은 병사들이 걸어가는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죽음으로 가득 찼던 온 골짜기에 가득 메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생시키시는 놀라운 역사가 에스골 골짜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환상을 에스겔에게 이렇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망이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우리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이처럼 우리가 혹시 에스골 골짜기에 누워있는 마른 뼈들이 아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이웃과 교회의 지체를 변화시키셔서 이렇게 강한 군대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도 살리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