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년 주일오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10월 8일 - 11월 2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떠나라(창 12:1) 1995.10.8 주일오후 1
2. 가라(창 12:2-4) 1995.10.15 주일오후 10
3.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준 사람(창 15:1) 1995.10.22 주일오후 16
4. 실패 속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창 17:1) 1995.10.29 주일오후 23
5.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이 된 사람(창 18:16-19) 1995.11.5 주일오후 31
6. 최상의 것을 바친 믿음(창 22:12) 1995.11.12 주일오후 38
7. 여호와 이레의 믿음(창 22:13-14) 1995.11.26 주일오후 47
1.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0.8 주일오후 1)
지난 한 주간 동안에 몇 교회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대구에 있는 한 교회에도 갔었는데, 대단히 전통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교회에서 3대 교회 안에 꼽히는 2500명 정도 모이는 그런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저는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이틀 머물러 있었지만 두 번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원로 목사님인데 총 회장을 하신 분이시고 그 아들이 이어서 그 교회를 물려받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때 공부하던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들이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그런 진지한 몸부림들이 교회 가득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12장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최초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를 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에게 큰 기쁨과 감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사건은 성경에 역사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태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 사건은 이후에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한 사람을 부르셔서 회개를 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이런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고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시초로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라는 곳, 그 당시로서는 매우 발달한 문화를 누리고 있는 번영한 도시에서 우상을 만들며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이렇게 알고 있지만, 오늘 11장 성경을 보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아버지 데라 때의 일이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이미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데라가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갔다고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술들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은 분명하지 않고 신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을 수 있지만, 혹은 흉년을 피하거나 혹은 이민을 가거나 혹은 더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던 것과 결국은 가지도 못했지만 그것과 아브라함이 그 아비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들어간 것 사이에는 신앙에 차원에서 볼 때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많은 도로가 하란으로 연결이 되고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들은 그 하란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쉬어가곤 하는 곳이 바로 이 하란이었습니다. 그 하란에서 하나님은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때에 바로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에서는 역시 가정의 주권을 아버지인 데라가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 모든 가족들을 이끈 그런 정신적인 지주였을 것입니다. 그 데라가 이제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오래 동안 살던 정들었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란에서 이방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기둥처럼 믿던, 하늘처럼 믿던 아버지 데라는 졸지에 하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과연 이제 그 많은 친척과 이웃과 그리고 조상들이 기다리고 있는 갈대아 우르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가려다가만 그 땅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하란에서 그냥 눌러 살고 말 것인가. 그는 깊은 선택을 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을 하여야 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선택해야 할 바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놓여있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한 번에 선택이 10년이 아니라 평생, 나아가서는 영원에 운명을 좌우하는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과 믿음, 불신앙, 이 삼자 사이에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지할 곳이 없고 그리고 뭔가 기댈 곳이 없는 그런 처절한 외로움을 하란에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도 없고 그리고 식구들이 있었지만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아내와 그리고 어린 조카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본의든, 타의든 자기가 호주가 되어서 가족들을 어디론가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한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이웃과 사람들에게 전송을 받으며 떠난 그 갈대아 우르, 정들었던 땅을 아버지가 떠날 때는 떠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 사람의 취급을 받는 하란에서 잠시 머무는 정거장 같은 하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도 마음에 내키는 일이 아니었고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 가나안 땅은 어떤 곳인지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셋 중에 어떤 것도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기로에서 아브라함은 고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말로만 듣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커다란 어두움 속에 빛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도저히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할지 알 수 없는 절박한 기로에 놓여있을 때, 누군가 만나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큰 특권입니다. 한 일 년 전에 어느 날 학교로 제가 집회를 나갔던 교회의 한 지체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상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45분 동안, 한 20분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25분 동안 정리를 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떠날 때 25분밖에 안 되는 충고였는데 이 지체의 얼굴이 환하게 피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대단히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선택의 기로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인간이 그 사람에게 주는 충고도 빛이 되거늘 신이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아브라함이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나라가 국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뛰어난 국력의 요인으로 평가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이테크’의 시대입니다. 어느 군사 전문가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에는 군인의 숫자로 싸웠는데 이제는 군인의 숫자 같은 것은 싸움의 변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이제는 군인들은 전부다 펑크에 숨어서 기계를 조작하는 시대가 오는데 인공위성에서 떠오르는 핵폭탄을 적군의 땅에서 폭파시키는 시대가 오는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기자가 말했습니다. “백성이 많은 것은 임금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수치니라” 말했습니다. 백성이 많은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통해서 민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왕이 되게 해주겠다’라고 하는 것만큼 엄청난 충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도 명망 있는 가문에 속해서 그 고장의 유지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지로서 명망 있는 가문에 뿌리를 내렸다면 왜 오래 동안 살던 정들었던 갈대아 우르를 버리고 가보지도 못한 땅 가나안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겨야 했겠습니까? 그런 한미 한 가문에 사람, 더군다나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자기와 몇 명의 식구 밖에 없는 초라한 가정에 가장인 그러면서도 선택에 기로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만들겠다. 그리고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중동 지방에서는 신들이 와서 축복을 내린다는 것들이 매우 낯섭니다. 신들은 인간을 늘 괴롭히고 심술부리고, 그리고 삐치기 잘하고 그런 것이 바로 중동 지방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그 하나님이 오셔서 의외로 내가 너에게 큰 복을 주겠다. 그리고 내가 네 이름으로 창대 하게 만들겠다. 온 세상에 사람들이 아브라함 네 이름을 듣기만 해도 즉시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내가 만들어주겠고 뿐만 아니라 네게 복에 근원이 된다. 무슨 뜻인가 하면 너 때문에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너와 관계를 바르게 맺으면 하나님이 그에게도 복을 주고 너와 관계를 잘못 맺으면 그에게 화와 저주가 있게 해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네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들을 내가 너에게 알게 할 것이다. 하는 큰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이런 큰 축복을 주셨는데 이 축복은 아브라함의 생애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축복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아브라함과 관계를 바로 맺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화가 임하였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다 예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만, 그 중에 한 예를 들자면 롯은 아브라함에 조카였습니다. 한 식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이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싫어하고 제물에 눈이 어두워서 아브라함을 떠나고 나니까 롯 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축복도 끝이 났습니다. 다시 또한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롯이 잡혀갔을 때에 그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갔습니다. 롯과 관계를 맺으니까 함께 연합하였던 모든 나라의 왕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승리의 축복을 얻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을 주신 것이 사실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받을 그 축복을 가리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한 사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 그 사람을 축복 받지 못하도록 세상이 막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항상 축복이 굴러 들어옵니다. 대부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대게 누군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옆에서 늘 보고 그와 사랑하고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복에 근원이 되지 못하면 그러면 이번에는 그런 우리 때문에 요나를 배에 태웠던 사람들이 낭패를 당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축복에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에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세상에서나 엑스트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데 거기에서 가끔 나오는 엑스트라 그런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예화) 친구 중에 탤런트로 TV에 나오는 친구가 있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어린이 프로에 뭔가 뒤집어쓰고 나오는 발이 자기의 발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흥분하며 단막극에 자기가 나온다고 해서 보니까 비오는 날, 비닐우산을 파는 역할로 잠시 나왔다는 이야기.
제가 그 사람이 친구니까 그 사람이 거기에 나왔다는 것을 기억을 하지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 그 엑스트라를 기억할 리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서 우리를 엑스트라 의식을 버려야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이 교회를 축복해주신다.’ 그런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누가 뭐라고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우리의 가족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 직장도 ‘내가 비록 말단이지만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사업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이런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도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실 것이다. 이런 주연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매일 후줄근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 다 주연배우 하는데 그 옆에서 우산이나 들고 다니면서 “하나 팔아주세요.” 그러다가 인생 끝나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축복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주시면서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두 가지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첫째 명령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라. 가라” 우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겠다’라고 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황홀한 약속들을 주셨는데 그 약속을 주시면서 “떠나라,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뭐 그렇게 복잡합니까? 쓸려면 팍 쓰시지 뭘 또 거기다가 조건을 달고 토를 다십니까? 여기가 가나안이면 어떻고 갈대아 우르면 어떻고 메소포타미아 땅이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란 여기 있사오니 하나님, 그 축복을 미래로 미루지 마시고 지금 여기서 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철저하게 구별시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을만한 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축복해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떠나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 그리고 하란, 그리고 아브라함이 머물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땅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만한 땅이 아닙니다.
왜 그러면 그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대가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계획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 또 하나님께 은혜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은혜, 그것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이 임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셨을 때는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르는 땅 니느웨에 가서 설교함으로 그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고 그 이름을 창대 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축복을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저주를 받는 놀라운 은혜에 원천이 되게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대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이 대단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고 있었고 그는 그 일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그렇게 허랑 방탕하게 살고 그렇게 그 모든 부패한 도시 속에서 평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었습니까? 아브라함 옆집 사람은 왜, 안 되었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우리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이 세상에 수없이 많고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이 세상에 흔하지 않은데 하필이면 하나님에 그 구원에 은혜가 왜, 나에게 임해서 오늘 내가 여기 있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나를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운 것이구나. 그리고 저 사람이 왜 구원받지 못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저 사람이 왜 하나님을 아직 모르도록 하나님이 놔두시는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아는 것은 이것이니 내가 하나님에 은혜를 입은 것과 오늘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것이 순전한 하나님에 사랑인 것을 이것만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또 메소포타미아에서 건져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담긴 계획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모든 발달한 나라들이 모여 있는 중심부, 온 팔레스타인 온 땅에 중심부 그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고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이름을 창대 하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남다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은 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땅, 온 세계에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곳에서나 복을 받아도 관계가 없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이 아무 곳에서나 축복을 받아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놀라운 신앙의 간증과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대치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들에 대한 간증이 없는 사람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나를 축복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까지는 축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종종 본이 아니게 우리나라 땅을 떠났던 사람들, 예를 들자면 징용으로 끌려가거나 혹은 강도로 이주를 가거나 했다가 삼팔선이 막히고 혹은 사정이 어려워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땅에서 본토를 그리워하며 죽는 사람들에 이야기들을 가끔 접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토를 떠나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본토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그리고 그 향수가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한번 판문점 자유의 다리 앞에 갔을 때, 그 앞에서 어느 노인 부부가 그때는 무슨 추석도 아니고 광복절도 아닌데 북녘 땅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시골의 한 부부를 본적이 있습니다. 밭에서 그을어서 검은 그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리고 바람에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제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나는 이북에 두고 온 고향도 없고, 버리고 온 본토도 없고, 이북에는 내가 아는 친척도 없고, 아비의 집도 없습니다. 그러나 두고 온 그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그 노부부를 바라보면서 오늘 이 성경은 본토 하나도 어려운데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 이 세 가지를 떠나라는 것은 곧 그 당시 사회로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 씨족 사회에서 가장 처참한 형벌이 무엇이냐 하면 ‘이놈을 추방해라’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도 그 본적지에 가면 김 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 사는데 타성바지가 와 가지고는 견디지를 못 했습니다. 서러워서, 그러던 시대 훨씬 이전에 본토를 떠나는 일도 힘든 일인데 본토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집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보호해줍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본토를 의지하고 본토에 안주하려고 하고, 친척을 의지하려고 하고, 아비의 집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그 모든 아브라함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내가 자연적으로 기댈 수 있는 모든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리하면 너는 외로워질 것이고 그리하면 너는 하늘에 계신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하나님에 아브라함과 같은 놀라운 약속을 우리가 유업으로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유업을 누리면서 살고 이 약속이 우리의 인생가운데 성취되는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외로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 닭 보듯이, 닭 소 보듯이 그렇게 서로 무관심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런 신앙적인 무관심 때문에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우리가 약속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시련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축복을 미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 미래형일까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그때까지 미래형인 것입니다.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죽음과 방불한 이 명령을 눈앞에 놓고 아브라함은 고뇌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이제는 더 의지할 것이 없는 마음이 되어서 ‘고향으로나 돌아가볼까. 가서 아저씨들하고 어울려서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토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집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나만 바라 보아라. 왜냐하면 이제 너는 본토나, 친척이나, 아비의 집에 연줄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너와 관계를 맺는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도움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새 백성이니라.”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고 살아갔던 것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갈대아 우르 본토에서 주어지는 특권이나 친척의 집에서 부어주는 인간적인 후원이나 아비의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이런 특권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대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고 떠나 온 죄악 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거기로 돌아가서 거기서 위로와 위안을 얻고자 할 때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을 주셨어도 그 약속은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을 갈대아 우르로 갈 것인가 가나안으로 갈 것인가 왔다 갔다 방황을 하다가 후줄근한 인생을 세상과 교회 사이에게서 끝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들을 버렸고 또 하나님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여러분들을 길거리로 쏟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짠맛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쉽습니까? 힘듭니다. 그래서 맛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뭐 좋은 일이 있을까 하고 밖에다가 버리고 맛을 잃어버렸더니 사람들이 밟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만 선택을 하십시오. 세상과 신앙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교회에서도 버려지고 세상에서도 짓밟혀서 믿음의 역사에도 기록이 안 되고 세상의 역사에도 기록이 안 되다가 후줄근하게 죽다가 아니면 믿으려면 확실하게 예수를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라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기본적인 욕망이고 경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들이 가출하고 싶어 가끔 안달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애들, 막상 부모가 “야, 난 너 같은 놈 그 기를 수 없어. 책 보따리고 옷이고 다 싸서 팽개치면서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마.” 문을 쾅 닫아버리면 대문 앞도 못 떠나고 울고 있을 아이들입니다. 아비의 집을 떠나서 살수가 없습니다. 본토 친척을 떠나서 어디 가서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죽음을 의미하는 이 명령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결단할 때 날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시골에 다리가 없는 곳에 얼음이 얼어 그 위를 걸어가던 사람이 얼음이 금이 가서 깨어지려는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몸의 열기로 얼음이 녹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이 기도하고 있지 말고 빨리 반대편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이야기.
기도도 순간, 순간 이를 악무는 신앙의 결단이 있을 때 기도가 영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음 한가운데 있으면서 “주님 살려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주여 그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넌 왜 그러고 있는가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네가 기도할 때가 아니다. 이 백성을 믿음으로 인도할 때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의 손에서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비록 홍해 바다가 내 앞에 창일할 지라도 너희는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길을 내시리라. 손을 펼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에 계속 머물러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사는데 컬컬해서 기도하려고 나오고 다른 사람이 통성 기도 하니까 나도 한번 통성 기도 한번 해보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이 아닙니까? 기도를 세게 안 해서 하나님이 축복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가지고 계셔도 그 축복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따라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겠습니까? 생명과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본토가 너를 먹여 살렸고, 친척이 너를 보호하고, 아비 집이 너를 지켜주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인 내가 친히 너를 지킨다.’ 할렐루야! 그것입니다. 그것을 믿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 한 가지씩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에서 결단하고 떠나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다시 기도해보십시오. 힘이 생기고 강력한 기도에 영역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끝없이 수없이 중얼거리듯이 졸다가 깨다가 두런두런 하면서 중언부언하면서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만 아픕니다. 확실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주셨는데 그럼 축복가운데서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게끔 하나님이 해주시면 될 것이 아니냐. 모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니까 아브라함에 계속 떠나지 않으면 훅 불어가지고 날려 보낸다든지 아니면 큰 새가 와서 업어간다든지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죽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떠나는 것은 누가 떠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실어갔던 마차를 내려 보내서 아브라함을 실어다가 천국으로 올리신 다음에 가나안에 떨어트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가나안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때 가나안 땅을 주었습니다. 완료형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은 준 그 순간에 이미 가나안 땅은 누구의 땅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땅이었는데 그 이스라엘 땅이 실제로 이스라엘 땅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모든 축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못 보셨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 잘 믿어서 놀랍게 변화 받는 역사를 보셨지요. 내가 지난번에 영등포 구치소에 갔습니다. 거기는 정말 장로님도 죄수복을 입었고 집사님도 죄수복을 입고 강도사만 죄수복을 안 입고 다 죄수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이 기도하는데 나는 외국에서 초청 온 장로님인줄 알았습니다. 기도가 폭포수와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옥에 들어오셨는지 모르지만 감옥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살아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한번 구치소에 데려올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천 명이 예수를 믿는데 예배 참석할 수 있는 공간이 160명입니다. 들어오는 사람은 엄청난 선택을 받아서 주일 예배에 오는 것입니다. 못 들어온 사람들은 너무 가고 싶어서 나중에는 밥그릇을 집어던지고 그래서 징벌방에 들어가서 두드려 맞고 그랬습니다. 밥까지 먹여주면서 와서 예배드리라고 그래도 안 드리는 교회 밖에, 담밖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가서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구중에 하나는 주보를 보면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지존파 김현양 그 친구들 법정에서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 지른 사람들이 놀랍게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할렐루야 그 사람이 직접 수기를 썼는데 거듭난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가 왜 이전에 그렇게 어리석고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만 사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남은 생애를 살겠다고 합니다. 참 한번 살려주면 참 좋겠는데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못 갖고 사단의 손에 붙잡히니까 그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사람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아까 그 사람처럼 살리는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전도하는 여 집사님이 있답니다. 그 사람은 가망 없는 사형수 전담 전도자랍니다. 그 사람이 전도하면 하여튼 마음이 녹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니까 그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떠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얼음판 위에서 부르짖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나와야합니다. 기도는 나와서 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에 이 놀라운 축복은 희생에 결단이 있었습니다. 확실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들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것들을 붙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이것으로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떠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2-4)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0.15 주일오후 2)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소명의 장면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떠난 이야기를 주님이 두 가지 명령을 주셨는데 “아비 집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말하시지 않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니까 아직 아브라함에게 가라고만 말씀하셨지. 하나님께서는 어느 땅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시지를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 칭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 것을 명령을 하셨지만, 어느 땅인지도 알려주시지 않은 상태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 앞으로 지시하실 것을 믿고 그리고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 그것을 칭찬하고 있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높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식은 고요히 앉아서 헤아리고, 그리고 계산을 하고, 따져보고, 정확한 공식에 맞추어 보고 해서 어김이 없고 하자가 없이 모든 것이 맞은 다음에 그 일을 행해도 그것이 이루어질까 말까인데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는 땅으로 가라 명령하실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때로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인생에 길, 선택의 기로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해서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신앙의 영역에서는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때는 믿음이 작용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이러이러한 땅을 너에게 주는데 너는 가라’ 말씀하시지를 않고 ‘내가 앞으로 너에게 지시해줄 땅이 있는데 그리로 가라, 가라 그러면 내가 지시해주리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설득하기보다 먼저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 앞에 옳은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먼저 결단을 하고 그 일에 순종을 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문제들을 풀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그리고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며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이미 아브라함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정들었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이제 낯설고 물 설은 하란의 타관 땅에서 아버지도 잃어버리고 이제는 거기서 그 모든 식구들뿐만 아니라 또 조카의 식구들까지도 돌봐야하는 이런 처지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고, 나아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인 아는 길로 돌아가서 옛날 정들었던 고향에서 사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포기하게 하시고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먼저 가라 그러면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영역에서는 언제나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5장에서 고기잡이에 실패한 베드로의 배에 접근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깊은 곳에 가서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인간에 이치와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이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바닷가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깊은 데서는 지금도 고기가 모이지를 않습니다. 그 시간에는 그런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당신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는가 하는 그 믿음을 보시기 위해서 인간의 상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유무는 이런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직 내게 지시해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 있는데 너는 그리로 가라 그리고 거기서 내가 네게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성취할 것이다. 이것은 곧 경험이 많은 어부 베드로에게 고기 잡는 이치에 어긋나는 깊은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것과 똑같은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일일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세밀하게 설명하시기보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어떤 것들을 명령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명령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이 그 일들을 그렇게 명령하실 때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먼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비록 왜 어디로 어떻게 갈 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순종하리라. 이런 결단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바로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옛 세상에 속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와 목표를 찾아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를 믿고도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있으나 그러나 살아있는 자답게 살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것처럼 그렇게 나에게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시고 육체의 삶을 떠나게 하셔서 신령하고 그리고 영생을 얻는 삶을 위해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내 인생은 하나님이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이것들을 우리는 생각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목표가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시할 땅으로 너는 가라 그러면 거기서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불러내어서 모든 족속들에게 네가 나와 함께 하고 그리고 너와 함께 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겠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에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는 거저 주시지만, 그러나 그 은혜에는 반드시 하나님에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분명히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심하기 쉬운 마음을 고려하신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자세하게 설득하시고 그리고 믿어지게 만드시고 그래서 지시할 땅이 어딘지 그리고 지시해주는 땅이 어딘지 알려주시고 ‘앞으로 지시할 테니 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지시해 줄 테니 너는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을 하셔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믿음을 따라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너에게 지시할 테니 땅으로 가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지시해 주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 땅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말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계획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때에 신령하고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바닥도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셔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아직 지시 받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됐습니다. 아마 롯과 그리고 아내와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울었을 것입니다. “가자” “아버지 어디로 가” “주님이 지시해주시는 땅으로 가자.” “그 땅이 어딘데” “나도 몰라” 말이 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일단 떠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지시해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울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그러셔서 가나안 땅으로 갔더니 거기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 말뚝만 박혀있는 줄 알았더니 수많은 기라성 같은 거인들이 그 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쳐서 빼앗느라 처음 가나안에 들어갔던 그 세대는 그 가나안에 있는 수많은 요새와 발달한 병기와 덩치 큰 자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에 눈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40년 동안을 방황했습니다. 두 번째 세대는 여호수아와 함께 그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차피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라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진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은 전쟁과 그리고 요새로 준비하고 철저한 군사 지도를 가지고 계셨지만,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지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격하기만 하면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는 계획과 요단을 말리는 계획과 아이 성을 복종시키는 계획과 벧엘과 단을 치는 그런 전술과 산지를 점령하고 평지를 탈취하는 그런 계획들을 하나님께서 이미 모두 이루어놓으시고 그리고 거기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굳게 믿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모험적인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험적인 정신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살아서 믿음 때문에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놀라운 축복들, 그리고 당신에 그 놀라운 계획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은혜에 찬란한 보증들, 이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 깊은 은혜에 세계, 더 넓은 은혜에 세계, 가고 싶어 하나 그러나 찰랑거리는 바다물결, 작은 물결을 보고 마음이 조려서 배를 띄우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모험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놀라운 은혜와 그리고 축복을 받았고 경험했던 놀라운 사람들, 한결같이 이렇게 모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아버지 하나님에 명령에 복종하면 비록 그 상황이 이해될 수 없고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서는 모두 해명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명령에 순종할 때에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막힘이 없도록 예비하여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신 그 사실을 굳게 신뢰한 사람,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보여주시는 독특한 축복과 풍요한 은혜를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눈을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명령을 따라서 순종할 때에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떠나기는 떠났는데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떠나기는 떠났으나 더 이상 갈 수 없는 사람들, 앞으로 진전할 수 없는 사람들, 떠나기는 어떻게 떠났는데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두려움 때문에 약해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오늘 아직 자기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아브라함을 본받음을 오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은 비록 주님이 지시해주시는 땅은 아직 몰랐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갈 수 있었던 근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아브라함은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눈에는 가야만 할 상황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해줄 땅이 비옥한 땅인지, 척박한 땅인지, 산지인지, 평지인지, 얼마나 넓은 땅인지 그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러나 그가 믿고 신뢰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두들 이방 신을 섬기고 사면을 두루 살펴도 여호와를 의뢰하고 찾는 자가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아브라함에게 전심으로 당신이 나타나서 하신 그 말씀을 좇고 순종하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긴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과 그리고 감각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았습니다. 그가 나에게 가라고 명령하셨고 또 그가 명령하신 그 말씀이 바로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낼 그 말씀의 주인이신 여호와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았습니다. 그가 간 것은 비록 목표는 없었지만 그러나 분명히 자기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는 몰랐으나 그러나 눈에 보이는 땅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그런 말씀 중심에 사모함이 없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삶을 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부탁드리거니와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하란 땅, 집은 이미 떠났고 본토와 친척의 집은 떠나서 이미 타관의 땅에 있고 가야할 길은 어디인지 아직 알지 못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주어졌을 때에 아브라함에 유일한 불빛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아브라함에 앞길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어두운 때를 허락할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고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로는 말씀의 등불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이전에는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러나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에 약속에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심을 아브라함은 굳게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좇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이 오늘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지금 내게 주시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행하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들을 알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돌아가야 할지,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던 하란의 땅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시체를 묻으며 그렇게 가난해졌던 아브라함과 같이 그렇게 우리도 하란의 땅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폭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그리고 내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에 인도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사모해서 의지하던 아버지도 죽어서 땅에 묻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지만 아내를 의지할 수 없고, 조카를 의지할 수도 없고, 그리고 하란에 있는 사람들을 의지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은 실로 어두운 밤바다에서 등대의 불빛을 보는 것처럼 감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들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야하고,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롭게 말씀해주셔서 하란 땅과 같이 하란은 옛 삶으로도 돌아갈 수 있는 장소였고, 또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하란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게끔 하나님이 지시해주실 땅으로 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에게 마음속에 주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나아가자니 캄캄하고 뒤로 돌아가자니 떠나온 길이 너무 멀고 이런 때에 우리를 새로운 이정표를 우리 앞에 세우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좇아가며 살 수 있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가 75세라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가 75세이었습니다. 이미 젊고 패기만만하던 나이는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늙은 몸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직업을 바꾸는 것도 젊었을 때의 일이지 나이가 들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모험적인 정신이 그만큼 줄어들고 안정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일들이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연세 많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회에서 놀랍게 회개하고 변화되는 장면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너무나 본적이 드뭅니다. 그렇게 신앙을 향해서나 세상을 향해서나 나이가 많이 들면 결단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남들이 모두 편안한 길을 택하고 모험을 할 수 없는 나이인 75세에 위대한 신앙에 모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결단에는 나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75세나 되었습니다. 그에게 더 이상 모험을 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나이로 볼 때 그는 적합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자연의 이치 상 안정을 추구하고 그리고 안전한 길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험보다는 눈에 보이는 안전을 택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할 그 나이에 아브라함은 위대한 모험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땅을 주셨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너희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는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축복도 아닌데 자손들에게 주시는 그 축복을 유업으로 바라보며 그는 75세에 나이에 놀라운 신앙의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이나 우리의 여건이나 모든 것들은 결단하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결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초월하셔서 당신에게 순종하고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준 사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0.22 주일오후 3)
오늘은 12장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무대와는 전혀 다른 광경을 15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정확하게 몇 년인지는 알 수 없지만, 12장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른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다음부터 15장에 이르기까지는 굉장히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하면 롯이 그때는 비교적 어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롯을 데리고 이제 가나안 땅까지 드디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롯이 자기 재산을 가지고 점점 부해져서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짐승들을 먹이는 문제들을 가지고 다투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땅은 좁고 그때는 심히 많아서 아브라함이 ‘우리가 이럴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갈라서자 그리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 하겠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하겠다.’ 이런 너그러운 도량을 보이니까 롯이 불행히도 아저씨의 깊은 신앙을 본받지 못하고 자기의 눈에 좋은 데로 물이 많고 거나해 보이는 땅을 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고 그리고 같이 떨어져서 얼마를 살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큰 전쟁이 바로 롯이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유인즉슨 롯이 소돔 앞에 있었는데 그 소돔과 고모라 왕, 이런 왕들이 시날 왕, 엘라살 왕, 엘람 왕, 고임 왕, 이런 왕들에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식민지 비슷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 소돔, 고모라, 아드마 왕, 스보임 왕 이런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와중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런 와중에 위에 있는 그 왕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소돔과 고모라 인근 지역을 치기 위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쳐 내려오니까 단숨에 여러 족속들이 대파를 하고 그랬으면 아브라함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데 소돔과 고모라에 와서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가고 소돔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모든 가족까지도 잡아간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이 안 되겠다 하고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사병을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좇아가서 그래서 그 군사들을 나누어서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조카 롯, 그 다음에 그 부녀와 인민들을 다 빼앗아오는 이야기를 오늘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와서 아브라함이 전쟁을 하고 나면 대게 전리품을 나누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오히려 소돔이나 이 사람들에게는 그 전리품을 다 나눠주고 나는 실 올 한 오라기도 내가 취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전쟁에 동기가 재물을 탈취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조카 롯을 구원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게 이제 14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거느리고 간 사람들은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여기 나와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길리고 연습한 자”라고 그랬는데 히브리어 말로 ‘하닉’인데 아주 잘 숙달된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나 아니면 장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훈련을 잘 시킨 정예부대를 318명이나 먹이고 월급을 줄 수가 있었으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보따리를 들고 하란에서 나오던 사람에 비하면 지금 얼마나 축복하셨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벌써 12장에 예언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디가드만 318명이나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318명의 사람들이 이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잘 길리웠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지금 동리 싸움이 아니라 말하자면 적군은 명색이 아무리 나라가 작아도 왕들이 있고 군대가 있는 나라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318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려고 올라가는 아브라함을 놀랍게 축복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전쟁을 하려고 하는 동기를 인정해주시고 축복하시니까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나라를 무너트리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게 제 정신이 아니라 롯을 참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리 사랑이라고 위에 아저씨는 사랑을 했는데 롯은 참 버릇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저씨가 아버지처럼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와서 그만큼 키워주었는데 그러면 목자들이 서로 싸울 때 아브라함이 “우리 어떻게 해야 되겠냐” 그러면서 아저씨 아브라함이 “네가 우 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겠다.” 그러면 빈말로라도 “아저씨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저씨 좋아 보이는 땅을 모두 택하십시오. 그럼 내가 나머지를 갖겠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사람인데 인간의 안목을 가지고 물이 넉넉해 보이니까 목초지가 많겠구나 하고 소한들을 택해서 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소돔 땅이었습니다. 가서 재산은커녕 죽도록 고생하고 그런 결과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조카를 아저씨인 아브라함은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갔으면 괘씸해서라도 안 볼 텐데 ‘사로잡혔다. 롯을 탈취해서 롯을 잡아갔다. 생명이 위급하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였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318명을 거느리고 승산도 없는 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겼습니다. 엉겁결에 이겼는데 제 정신이 가만히 들고 나서 보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큰 두려움과 공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뿐만 아니라 아드마와 스보임과 세메벨과 벨라, 소알 이 땅의 왕들이 연합해서 싸워도 졌던 그러한 나라인데 그 나라가 아브라함 집안 하나를 겨냥하고 쳐들어오면 그 집은 그야말로 쑥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15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이후에 여호와에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로되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후에 언제 그런 큰 일이 있고 나서 이제는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깊은 공포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들어오고 있는 그 깊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여기가 고향 땅이 아니라 정들었던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친척들이 살고 있는 땅을 떠나고 그리고 아비의 집이 있는 본토를 다 떠나서 지금은 타관 땅에 외롭게 살고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동맹을 맺고 있는 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혈육이 아닙니다.
그렇게 외로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아브라함은 드디어 그 시날과 엘라살과 엘람과 고임 왕 등에게 커다란 눈에 가시와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있을 때 아브라함은 깊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누가 이 타국 땅에서 지금 이렇게 유명한 왕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눈에 가시가 되고 있는 자기의 처지를 그 처지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그 어떤 사람, 어떤 나라도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도 자신에게 이와 같은 적군들의 공격을 준비하고 대책을 세울만한 것이 자기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들어와서 오래 동안 뿌리를 내린 이 땅에서, 또 이 땅을 떠나서 어느 땅으로 또 이사를 간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이사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이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많은 우 양과 목동과 그리고 많은 종들과 거느리는 가솔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대책이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상 중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고,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자신을 구출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봐도 도무지 의지할 곳이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과 이웃을 돌아보아도 자기의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줄 수 없을만한 그런 때, 그렇게 외로워지고 절실하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때 우리의 인생에 문제를 해결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두려워 떠는 처지에서 안심시켜줄 수 있고 평안과 안정을 잃어버린 마음에 진정한 ‘샬롬’을 줄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아들에게 진정한 용기와 위로와 힘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제는 고향은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고 이 타향은 믿음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나 위태로운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두려움에 깊이 휩싸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브라함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큰일을 자기도 모르게 저질러놓고 그리고 돌아와서 가만히 앉아서 이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저쪽에서 무슨 소식이 들려오나. 이야기를 하고 있을 그때에 아마 저 지평선에서 먼지만 일어나도 아마 이 시날 왕과 엘라살과 엘람과 고임 왕이 거느린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아닌가 하고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브라함은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창세기 12장에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나도 저주하리라 너는 복에 근원이 될 것이라’ 하나님에 약속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날마다 찬란한 태양이 뜨고 아름다운 꽃밭이 있는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인생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풀밭과 그리고 기화 요 초가 피어있는 화려한 동산을 지나며 즐거워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폭풍의 비바람이 불고 언덕에서 내리치는 낙루에 거목들이 부서지는 이러한 폭풍과 위기와 시련의 때를 지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찬란한 태양이 뜨는 아침과 같은 아름다운 인생에 길을 걷는 때가 있는가 하면, 폭풍과 비바람과 환난에 회오리가 몰아치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야 되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찬란한 대낮을 지나서 폭풍이 감돌고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앞에 드리워지는 인생에 어두운 날을 지날 때 여러분들은 그 인생에 밤을 어떻게 지내십니까?
오늘 이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인생이 이렇게 폭풍과 같이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는 고요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끄시고 돌아갈까 나아갈까 주저하며 망설이던 하란의 길에 있을 때 내 마음에 나타나셔서 강하게 내 마음을 붙들어주시고 나를 축복해주시던 그 하나님, 아브라함이 오늘 이 깊은 시련과 인생에 어두운 밤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환난에 비바람과 인생에 어두움이 그 앞에 있을 때에 당황하고 방황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고요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전에 내게 주신 약속,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밤을 지혜롭게 지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그 약속에 우리의 믿음의 길을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의지할 바가 없고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방금 포로가 되었다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덜덜 떨고 있는 롯과 그 가족들밖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고요히 약속을 믿고 그 어두운 인생에 밤을 지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땅에 사는 이 작은 사람, 불과 몇 명 안 되는 군사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떨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몇 천 명의 군사에 공격 앞에 덜덜 떨고 있었고 아브라함을 불러주시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하신 말은 “두려워 말라”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브라함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없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그 삶에 정황을 낱낱이 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 약속을 기억하는 믿음에 마음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모든 인생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인생을 감찰하시고 모든 사람에 인생을 모두 살피시고 그리고 아십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는 위태한 공격 앞에 혼자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그때에 사실은 하나님이 그 옆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마음에 눈을 떠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기까지 자신이 혼자 서있다고 하는 그 큰 외로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가장 홀로 있는 것 같은 그때에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고 모두들 두려워하는 것 같은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모든 두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시련을 기회로 바꾸고 그리고 의지를 기회로 바꾸시는 모든 능력들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자 옆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는 우리의 믿음에 눈이 어두워진 현실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을 따라서 훌륭하게 주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며 사는 사람들과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있고 사실은 가장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옆에 가장 가까이 계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당신에 놀라운 은혜를 보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러 선교 지에 갔으나 도무지 선교가 안 되는데 풍토병으로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죽고 혼자 남아 자기도 자살하려고 절벽에 서서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했다는 이야기.
여러분, 깊이 휩싸여있는 아브라함, 두려워할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옆에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괜히 해보는 말씀이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아무리 ‘내 인생 잘 될 거야. 걱정 마. 잘 풀릴 거야. 나는 잘 될 거야. 꼭 하고 말 거야’ 아무리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해서 그 사람에 인생이 잘 될 것 같으면 최면술에 능한 모든 사람의 인생이 전부다 마음먹은 대로 다 성취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말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두려워해도 되지 않을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니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저 시날 왕과 엘라살 왕과 엘람 왕과 고임 왕에 군사들로부터 날아올 화살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휘두를 칼날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브라함아 나는 너에 방패니라” 옛날 고대 사람들이 쓰던 방패는 이렇게 조그맣게 손에 드는 방패가 아니라 엄청 커서 공격을 하다가 적군에서 화살이 너무 많이 날라 오면 방패를 이렇게 땅에 세우고 몸을 숨기면 몸 전체가 숨겨질 정도로 큰 방패입니다. 그러니까 그 방패가 내 몸을 가리고 있는 한 어떤 화살도 방패를 뚫고 내 살을 상하게 할 수 없고 어떠한 장사의 칼도 그 방패를 찢고 방패 뒤에 감추어져있는 내 뼈를 상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방패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방패니라 내가 너의 앞에 가서 내가 너를 막아주고 그리고 너는 내 뒤에 피하라 그리하면 화살이 너를 상하지 못하겠고 칼날이 너를 해하지 못하리니 너는 내 뒤에 숨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의 방패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사실들을 아브라함만이 경험했던 것이 아닙니다. 시인 중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감람산으로 도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다윗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압살롬은 3-4년 동안 면밀 주도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으면서 성문 앞에서 백성들에 마음을 꾀이면서 부왕을 멸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훈련하고 무기로 잘 갖추어진 병사들이 일시에 일어나서 쿠데타를 벌였습니다. 그때에 맨발로 도망가며 울면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어 가리켜 나를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내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니라” 다윗은 인생에 위기의 밤을 하나님이 자기의 방패 시라고 하는 믿음으로 위기의 밤을 지냈습니다.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뢰했고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방패가 되어주실 때에 적군의 칼날이 아무리 많고 수많은 적군들이 나 한 사람을 향하여 화살을 날린다고 할지라도 방패이신 하나님을 뚫지 못할 진데 동일하게 또한 그 하나님 뒤에 숨어있는 자신을 멸할 수 없다고 다윗은 굳게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방패가 되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가운데 또 다윗은 또 한 번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에 하나님이시오. 피할 바위 시며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에 뿌리이옵나이다.” 여러분, 그 다윗이 이번에는 사울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렇게 죽을 위협을 당하다가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하신 때에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여호와는 내 인생에 보호자시라”
여러분, 돈이 여러분의 인생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지위도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한때는 한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고 나는 새도 떨어트린 사람들이 이제는 두려워 떠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권세도 우리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두려워말라고 용기를 주시며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 그들에게 밝은 빛을 비쳐주심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방패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지금 이렇게 많은 왕들에 공격을 두려워하며 새 가슴을 가지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원했던 것이 이 세상에 많은 보화입니까? 땅을 넓히는 것입니까? 짐승들이 새끼를 낳되 낙태하지 않고 쌍 태를 배어서 그래서 그 짐승들에 숫자가 늘어나는 것입니까? 하인들에 숫자를 늘리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관심사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큰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잠재적인 큰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고 하는 보증을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그 약속을 믿고 바라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 지극히 큰 방패다” “나는 너의 방패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해결이 됐습니다. 아브라함에 문제는 백 프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의 방패니라”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또한 너에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할렐루야!
우리 교회는 그런 것을 안 하겠습니다만, 여러분, 열린 교회 나와서 1년 동안 봉사도 하고 충성도 했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가끔 가다가 1년 동안 가장 열심히 섬긴 사람들을 시상하는 것을 가끔 봤습니다. 주일 학교 선생 중에서 가장 충성된 사람을 뽑고 또 재직 중에서, 봉사부 중에서 제일 열심히 한 사람 뽑아서 시상을 하고 그래서 상을 주면서 오늘의 시상자, 그러면서 김 아무개 그리고 불렀을 때 나와서 상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그 상에 들었으면 뭐가 들었겠습니까? 성경책이 들었지 뭐가 들었겠습니까? 성경책 구천 원 짜리 하나 들어있는데 아니면 그것도 비싸서 하이타이 같은 것 하나 주는데도 사람이 평소에 어떤 성격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상만 받는다면 그냥 좋아서 입이 이만큼 나옵니다. 노회 가서 여전도회 성가경연대회를 하는데 8팀이 모였는데 상이 8개입니다. 그래서 1등, 2등, 3등 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다시 밑으로 내려가서 감투상, 인기상, 분투상, 하다가 마지막 8등이 참가상입니다. 그런데 그 참가상을 받으러 가면서도 여전도회장 입이 이만큼 벌어지는 것입니다. 상은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상을 받아봤어야지 알지. 상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상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받아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을 주는 사람이 학교 교장이나 담임 목사가 되어도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상을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나는 너에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러면서 그 상급을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의 몸에서 아들이 낳아서 그 아들이 네 씨가 되어 그리하여 네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하나님에 약속을 이루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 하는 보너스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인생에 어두운 밤을 믿음으로 지내면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두운 밤을 믿음으로 지내면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밤을 지낼 때 해를 받지 아니하심과 동시에 그 어두운 밤을 지날 때 한없는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를 한없이, 한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간증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 이야기하면 자랑이 될 까봐 말을 하지 않습니다. 듣고 싶으면 개인 적으로 찾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혜롭게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약속을 기억하며 지내기만 하면 하나님은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우리를 적들로부터 보호해주실 뿐만 아니라 큰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더할 수 없는 고독한 인생에 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외로운 인생에 그 칠 흙과 같은 어두움 속을 내 약속을 의뢰하고 내 말을 믿고 나를 의지하며 지냈던 날들을 내가 기억하리라 내가 너에게 상을 주리라‘ 하면서 주님이 큰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어떻게 여러분에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내렵니까? 어두움에 밤을 믿음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도 붙들지 못하고 방황하고 두려워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불신앙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두운 인생에 밤에서 자신을 파멸시키고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인생에 어두운 밤에 주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던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것처럼 또한 내게 나타나셔서 나를 구속해주시고 나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에 약속들을 기억하면서 그 약속을 붙들고 이 어두운 인생에 밤을 훌륭하게 지나서 상급까지 아울러 받는 여러분들이 되실 것입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4. 실패 속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0.29 주일오후 4)
지난 시간에는 15장을 통해서 방패요 상급이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에 방패가 되어주시고 또 그 방패 되신 하나님을 의뢰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상급이 되어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상당히 세월이 지난 다음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온지 약 십 년 후의 일이었다고 하니까 상당한 세월이 지난 다음인데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를 만나는 장면을 오늘 17장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약이 주어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것을 경험했는데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약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16장과 17장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13년 아니면 14년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이후로 가장 처참한 영적인 암흑기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인생이 물질이나 환경이나 사람으로 말미암아 곤고함을 당할 때는 그래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환난과 시련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을 때는 세상에 다른 것들이 잘 돌아갈 리도 없거니와 잘 돌아가도 그것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13년 동안이나 1년 3개월이나 13주가 아니라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은 하늘을 닫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을 빼놓고 아브라함의 인생가운데 가장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서 기이한 불을 보내셔서 아브라함이 바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과 기적적으로 동행해주시며 여기까지 왔는데 왜 하나님이 13년 동안이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붙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연합군을 공격해서 이겼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닥칠지도 모르는 열 왕들에 보복으로 말미암아서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안심시키셨습니다. 비록 고향을 떠나 타관 땅에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믿는 것이 있다면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이십니다. 그 땅이 비록 낯선 땅이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니까 그 땅이 남의 땅 같지가 않았습니다.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정해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응답하시니까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땅에서 아브라함은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자산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며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신다고 응답하실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홍해가 가로놓여 있는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자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최고 귀한 자산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아브라함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모든 정들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타관에 왔을 때에 하나님을 얼마나 의뢰하겠습니까?
그래서 한국에서는 대학 다닐 때까지 뺀질거리고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유학 가서 많이 회심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유학 보내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외로워서입니다. 그런데 신실한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학생들을 위한 부흥 집회를 보면 20일씩 차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 집회에 3일 참석하기 위해서 옵니다. 왔다 갔다 20일씩 차를 몰고 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유학 간 사람이야 내일이라도 가고 싶으면 비행기 표 끊어 타면 갈 수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이야 그럴 사정이 안 됐습니다. 그런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소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렇게 살았겠습니까? 굶주릴 때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악한 자들에 손에서 보호하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나이가 많아서 생산 할 수 없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여종이 있었는데 애굽 사람 하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시니까 원컨대 당신은 내 종과 동침해서 아이를 낳으라. 그러면 혹시 내가 내 무릎에 내 아들을 둘 줄을 누가 아느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습니다만 여자가 시집을 와서 아이를 못 낳는다는 것은 최대의 불명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 보면 ‘집을 세운다’라는 ‘바나’라는 동사와 ‘아들’이라는 동사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아야지 만 비로소 자신의 집을 세운다고 생각하는 사상은 옛날에 우리나라 조상이 가지고 있던 사고와 아주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시집와서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언제든지 쫓겨날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이방사람들의 풍속은 무엇이냐 하면 여종을 남편의 침실에 들여보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바로 이 여주인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여주인을 멸시하면 그 종은 쫓겨나게 되어있습니다. 또 그 여종이 아이를 낳았어도 이 안주인이 아이를 갖게 되면 여종과 그 아이는 무조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아니라 그 당시 세속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문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래의 사고방식은 신앙에 호소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 풍습에 호소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 풍습에 호소하여 남편에게 세상 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으라고 지금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3년 동안에 혹독한 영적인 침체의 시기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것은 불행히도 그 원인제공을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아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그 신앙 때문에 남편이 거룩해지고 남편이 신앙생활을 잘하면 그 신앙생활 때문에 아내가 거룩해진다고 고린도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래는 신앙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방법으로 아들을 낳아보려고 하는 욕망을 가졌습니다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일은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상처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종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 커다란 고통을 그 집안에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오순도순 하며 남편으로 아내로 여종으로 사이좋게 살 수 있는 그 집안에 사래의 불신앙에 선택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고통의 회오리로 접어들게 됩니다. 아내와 남편에 관계가 끊어지고 그 다음에 아내와 여종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여종과 남편에 관계가 파괴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의 불신앙의 선택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열매를 거두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원인에 제공은 사래가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이렇게 사래의 말을 듣고 여종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은 그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고 그럴 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셔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그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아브라함이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제물을 쪼개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도 하나님은 그 제물에 불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나날이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지났습니다. 1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이렇게 커다란 고통가운데 지내던 그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는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담장인 것입니다. 천사들이라도 깊음이라도 높음이라도 사망이라도 기근이라도 적신이라도 위험이라도 칼이라도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고 우리와 더불어 교통하시는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를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골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옵니다. 우리가 옥 속에 갇혔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 높은 담장을 넘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에 그 응답과 교통하심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끊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서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없으리 만치 물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물속에 내려가도 요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물고기의 배속에 들어가서 그는 깊은 바다를 헤맸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배속에서라도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에 물고기 배속도 그 캄캄한 바다도 파도도 요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참 좋은 세상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동전화를 누르면 캐나다가 바로 나오고 아프리카가 바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너무나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지하철보다도 더 깊은 곳, 우리가 지하 갱도 수천 미터를 내려가서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않아 사다리를 타고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주의 보좌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죄와 불순종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모든 통신을 두절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불순종, 인간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그럴 만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 온지 10년이나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속히 이루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내가 너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티켓을 주겠다. 그리고 네 자손에게서 네 씨가 바로 이제 너에 후손이 되고 그리고 너에게 주는 이 언약을 성취하게 해주겠다. 그렇게 티켓을 주었습니다. 받을 때는 감격에 차서 하나님이 이제 나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을 주셨구나.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 3, 4년이 지나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에 놀라운 응답을 주셔도 하나님은 언젠가 이 다음 미래에 이루어질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응답해주셨다고 할지라도 그럼 응답 받은 기도 앞에는 그러면 아무런 장애도 없고 그냥 짝 뚫린 평평대로가 보이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언제 아들을 달라고 그랬습니까? 뭘 원했습니까? 그런데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네 자손들이 400년 동안 다른 나라에 괴롭힘을 받지만 그러나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하리라 하면서 출애굽까지 예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놀라운 약속을 친히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형통하기는커녕 아무리 봐도 사래의 배는 불러오지 않았고 그리고 자식을 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기대는 보이지 않고 그래도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은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도 응답을 받은 그 앞에는 그 일이 안 이루어질 것 같은 장애물들과 유혹이 많이 나옵니다. 나타납니다. 그것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가 하는 것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가 응답 받고 걸어가는 그 길에 유혹과 장애가 일어날 때에 하나님 앞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뢰할 것입니다. 주님이 응답해주셨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주님, 쓸어버려 주시옵소서 하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길에 유혹과 어려움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할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처음 응답해주신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는 불신앙에 떨어질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거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믿음을 순전하게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것을 이용하시는 것인가 하면 잘 보십시오.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릴 때 은혜를 받을 때 그때에는 생각을 합니다. 아, 그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내 생각을 하나님께 모아야 되겠구나. 정말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겠구나. 그랬는데 그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예배만 드리고 나가면 먹고살기에 바쁘고 근심보따리 그 다음에 유혹의 물결, 해야 할 일들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입니다. 또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일에는 약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일들을 주목하는데 있어서는 선수입니다. 기도를 생전 안 하고 놀다가도 이제 11월 달부터 기도하는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학입시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매일 봉투를 갖고 와서 내면서 새벽 기도를 한답니다. 기도하는 자체를 누가 말리겠습니까? 만은 좀 진작 기도하면 안 됩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왜 고3 올라갈 때도 아니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도 아니고 왜 학력고사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그렇게 농축해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 것은 뭐입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니까 하나님은 주목을 잘 못해도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한 일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때때로 그렇게 하나님자신을 주목하기에 한없이 약한 인간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들을 하나님이 주목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 낚시 밥처럼 던져 가지고 그래서 그 낚시 밥을 덜컥 물었더니 그 안에 하나님이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낚아채시는 것입니다. 이런 낚시 바늘에 걸려서 오늘 여기 앉아있는 사람이 숱하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도 이렇게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관계 속에서 살았지만 그러나 죄와 그리고 그 불순종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파괴했지만 그러나 13년 동안을 지나면서 아브라함은 처참할 정도로 하나님 없이 살아갈 때에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기쁨이 될 리가 없습니다. 잠시는 기쁨이 될지는 모르나 그러나 기쁨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최초로 그 놀라운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깨지고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과 충성스러웠던 아내의 관계가 깨지고 모든 관계가 산산이 부서져서 아브라함은 영 육 간에 깊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마엘이 축복의 덩어리가 아니라 애물단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든지 좋은 것입니다. 고난을 주셔도 감사한 것입니다. 핍박을 주셔도 그것은 감사한 것입니다. 불통함을 주셔도 그것은 감사한 것입니다. 사업이 막히고 가족이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도 그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 풍랑을 인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훌륭한 돈, 많은 재산, 명예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인간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요즘에 TV에 빠졌습니다. 제 4공화국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전부다 총살감들이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과 돈을 얻은 사람들의 인생에 말로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돈보다도 더 큰 이전에는 그 계좌를 들고 마음 뿌듯해하고 노년을 보장받았겠지만 이제는 그 통장이 원수처럼 보이는 날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인생을 썩어 들어가게 만들고 총질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번의 불순종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커다란 고통을 안겼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13년의 세월을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이 13년의 세월을 지날 때 세월이 흘러가고 나니까 저절로 이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며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흘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내가 아이를 못 낳을 때 이 당시에 첩에게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는 것은 뒤 집에서도 있는 것이고 앞집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안 되는 것, 세상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다 이해해줄 수 있는 그 일이 이 사람에게는 인정이 안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에 백성이었습니다. 언약에 백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식 낳고 좋은 남편하고 재미있게 살다가 죽는 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그 씨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고 온 세상에 죄로 말미암아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건져내고자 하는 위대한 구원에 계획에 도구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의 40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양도 치고 약대도 치고 하면서 그는 목동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돌멩이도 많고 가시덤불도 많은 그 광야의 길에서 목 부 노릇을 하며 지낼 때에 그 발에 걸쳐진 가죽 샌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친구였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 있을 때는 그것이 문제가 안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가시나무 떨기 그 사이에 서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이전에는 문제가 안 됐는데 하나님 앞에 서니까 문제가 안 되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해결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13년 동안을 그 고통 속에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과에 끊어진 관계를 인해서 고통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교적 넉넉한 사람이었으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해외여행도 하면서 그 고통을 잊어보려고 했고 약대를 잡고 양을 잡아서 수많은 동리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벌이면서 고통을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혹은 비교적 그래도 젊은 여인이었을 하갈을 품에 안고 한번 그 여인의 몸을 품어봄으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그 갈등과 영혼의 고통을 잊어보려고도 했을 것입니다.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낙태하지 않고 불어나는 양떼와 소 떼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삼아보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인생에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런 식으로 인생에 문제가 우리의 고통에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은 것이나 안 믿은 것이나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을 주신 사람에게는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을 고치시는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단절을 경험할 때 세상에서 하던 방식으로 그런 것들을 잊어보고 어떻게 고쳐보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부터 다 빼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결국은 아브라함이 고통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13년 동안 그렇게 몸부림을 쳤으니 얼마나 다윗은 잠깐이었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몸부림을 쳤는데 아브라함은 13년 동안 얼마나 깊이 좌절하며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13년 여러분, 상상이 가는 시기입니까? 17세에 지은 죄가 30세가 되었는데도 해결이 안 되는데 20세에 하나님과 막힌 관계가 군대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하고 그리고 연애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자식을 둘 씩 세씩 낳는데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그렇게 살다가 60년 동안 해결이 안 되어 가지고 결국은 그렇게 어두운 그늘 아래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행수를 바라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에 은총으로부터 오는 기적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요행수는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13년의 세월동안 아브라함은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가난해 질대로 가난해져있을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99세 때 그러니까 이 성경의 이 나이가 얼마나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86세가 99세를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99세 때에, 이것은 아브라함에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전환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하란에서 만나주신 그 12장에 놀라운 만남보다도 더 커다란 의미를 갖는 장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에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은총과 호의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대신에 믿음이 없는 세속적인 아내에 충고에 순종하여 비통한 자리에 13년 동안 있게 된 죄인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13년 동안 가리웠던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두터운 담장을 허물어버리시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사래의 유혹을 받고 또 세상에 풍속에 유혹을 받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가운데 일어나는 사건과 사태들을 설명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설명해볼까요?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내가 언제 젊은 여자를 탐했느냐. 내가 언제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낸 적이 있었느냐. 나는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람이다. 나는 나의 아내 사래를 여지 것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아내 하나로 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게 둘도 없는 사랑하는 아내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애원하기를, ‘여보, 나에게 소원이 있는데 내 소원 좀 들어주시오. 아이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 당신은 나를 용납할 수가 있지만 당신을 위해 아이 하나 낳지 못하는 나를 나는 용납할 수가 없구료.’ 매일 눈물로 배게 잎을 적시며 나에게 간절히 애원하는 말이 내 사랑하는 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나에게 달라고 양자를 들이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지 않겠느냐 애원하는 그 소리를 듣다 드다가 내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사랑하는 아내의 눈물을 씻어주며 내가 그래 당신의 말대로 하리라 하고 딱 하루 잤고 아이가 잉태하여 낳게 되었다.” 인간적으로 아브라함은 이런 설명을 우리에게 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런 설명을 들을 때 나 같은 사람도 아브라함의 설명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을 수 있는 그런 기가 막힌 사정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1년을 기다렸습니까? 6개월을 기다렸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 온지가 10년이 지나도록 약속은 주어졌지만 약속은 이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몸을 보니까 이제는 점점 후패 하고 늙어가니까 몇 살까지 남자로서의 생식에 능력이 유지될지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래는 이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래가 능력을 잃어버렸는데 내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아이가 앞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까? 1년이나 6개월을 기다렸다가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는 1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 약속을 기대하며 바라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말할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아마 불순종 할만한 구슬픈 사연들이 마음 가득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일 밤 베게 잎을 적시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겨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문제에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불쌍한 아들아 나에 가여운 딸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야지 만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더 기가 막힌 사연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어찌하여 잊었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렇게 사래의 말을 듣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 속에서 13년의 세월을 흐르게 할 때 그는 인간적인 설명과 인간적인 묘사로서는 가슴 슬픈 수많은 사연들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소산이었다고 하나님은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신앙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막혔던 태도 열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끊어졌던 혈통도 다시 잇게 할 수가 있으며 집을 나간 자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떠나서 패역해진 마음을 감동감화 시켜서 그 심령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으며 10-20년 동안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고질화 되어버린 문제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해결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작은 불신앙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틈을 점점 더 깊이 내었고 결국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신앙에 길을 걸어가서 아들도 잃어버리고 아내와의 관계도 깨지고 여종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리는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이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신 내용들이 곧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조급한 생각이 들 때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오래 참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눈에 보이는 환경보다 더 굳게 붙들며 이겼던 것들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후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사람들을 통해 믿음에 위대한 결과를 보여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을 믿으며 속에 마음을 하나님 앞에 주께 간구하는 바를 이루시지를 못하실 것이라고 하는 불신앙이 여러분 속에 파고 들어오거들랑 여러분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기다리다가 결국은 인간의 방법을 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자식도 자기 자식이 될 수 없었던 결국은 이스마엘이 쫓겨납니다. 결국은 아브라함에 자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모든 불행했던 일들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방법으로 택해서 많은 잘못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는 이미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미 태어 낳고 많은 문제는 이 집안에 이미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가 도로 배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까지 낳고 가족들과의 모든 관계가 처참하게 깨어져 실패로 가득 찬 삶에 현장에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실패한 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기뻐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실패한 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실패한 자들이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 번 힘입어 고침을 받으니까 아브라함이 17장의 사건을 통해서 놀라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22장에 믿음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귀한 자식 이삭을 하나님에 재단 앞에 바칠 마음까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믿음에 장성한 분량에 까지 나아가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하나님께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같이 실패한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권고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완전하게 살면 내가 네 인생을 통하여 나에 전능함을 보여주겠노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닥친 그 모든 위기와 낙망과 좌절은 새로운 방향에서 해석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 나가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뭘 드러내시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과 같이 13년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와 막힌 영혼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평화롭던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서 이 불행한 아이에 태어남을 보고 온 가족이 고통에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오히려 인생에 위기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역경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처럼 실패하지 말고 오히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이 된 사람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6-19)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1.5 주일오후 5)
지난 시간에는 영적인 침체로부터 약 13년이라고 하는 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영적인 침체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회복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아브라함에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세월이 흘러가서 이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을 당하는 그때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롯이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서 구출을 받은 다음에는 물론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롯은 롯대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그렇게 따로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때 이미 18장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세 나그네가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세 나그네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 몸을 감추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사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타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참 고운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교회에 많은 사람이 스쳐가지만, 딱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형제”와 그 다음에 “나그네” 입니다.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믿고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그 하나님에 형제자매들, 그것을 형제라고 가리킵니다. 한 형제, 그들 속에는 끊임없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지만, 교회를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교회가 가져야 할 덕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온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왔든지 간에 항상 교회에 와서는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만남에 있어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된 교회고 또 복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게 나그네 대접하기를 늘 힘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늘 식사 때에는 밥을 한 그릇 따로 떠서 놓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빵입니다. 그렇게 누군가 한 사람 먹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몫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그네를 대접을 했는데 그 나그네가 사실은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온 사자들이었습니다. 그 사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함께 교통할 수 있게끔 이렇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접을 융숭하게 받은 다음에 일어나서 이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서 함께 나가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에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헤어지려는 직전에 “내가 하려는 것을 내 종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그러면서 그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보여주셨는데 내가 이 소돔과 고모라를 이제 심판한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당사자에게는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소돔과 고모라 성 밖에 사는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멸망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대접해주셨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뭔가 우리는 그 소돔 성뿐만 아니라 소돔성 밖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에 사자들이 가면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는 하나님에 말씀을 전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당사자로 부르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나에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러 가려고 하는데 네가 이렇게 나를 대접하고, 이것도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이것을 믿음으로 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너에게 내가 어떻게 숨기겠느냐. 하면서 두 가지를 보여주시는데 하나는 아브라함 개인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할 것을 보여주시고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또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12장의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게 되는 전대미문에 엄청난 재앙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쉽게 이야기하면 천기를 누설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누구에게, 아브라함에게 누설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 멸망을 알려주시니까 아브라함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고 있는 롯이 즉각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셨던 것도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하기보다 알려주시기보다도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는 롯을 기억하며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롯과 롯의 가족의 생명은 아브라함에게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에 모두 멸망할 때에 롯과 그 모든 가족들이 일단 살아남아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엎으시는 가운데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더라” 그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그 역사의 손길에 현장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붙들어주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 하는 현장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리저리 세상의 물결에 의해서 떠밀리고 환경이 발로 차면 이리 채이고, 여건이 발로 차면 저리 채이고, 이 사람에게 찢기고, 저 사람에게 처지면서 그렇게 떠밀려 사는 삼 등 인생이 되려면 우리는 인생을 그만 두어야합니다. 요셉이 비록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인 보디발에 집에서 마당이나 쓸고, 화장실이나 청소하는 비참한 하인 중에서도 애굽의 하인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하는 히브리 사람의 하인으로 그 집에서 봉사하면서도 그에게는 역사를 움직이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보디발에 집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나아가서 바로의 집과 애굽과 나아가서는 온 중동 지방을 움직이는 하나님에 위대한 역사가 나를 통해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뭔가 이렇게 좀 원대한 꿈을 꾸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좀 후줄근하게 살다가 죽지 마십시오. 믿습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면서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길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실 때 만나자마자 아브라함아 사실은 내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치러왔다. 말하지 않고 떠나가시는 장면에 전송하러 나오고 이제 손을 막 흔들고 인사를 하려는 아브라함에게 돌아서면서 “내가 어떻게 너에게 숨기겠느냐” 그것이 뭘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특별한 사람에게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당신의 계획을 사람들이 멀리 자기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에 뜻대로 알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까? 원하시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 둘러보아도 이야기 상대가 될 만한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많은 사람을 찾아가십니까? 아닙니다. 얼굴 잘 생긴 사람만 찾아가십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붙들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말상대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야기는 온통 하나님에 것과 그리고 하나님에 영광과 신령한 하나님에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뜻대로 살아갈까 하는 하나님에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가 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실 때에 그 아브라함에게는 내가하는 것을 어떻게 숨기겠느냐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전에 12장에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에 모든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니라”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강대한 나라가 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우선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 중공이 큰소리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3차 대전이 일어나도 만약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 나라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첨단 과학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라 백성이 많은 것이 나라에 강성함에 표본이 됐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백성이 많은 것은 임금의 영광이요 백성의 수가 적은 것은 임금의 수치라” 그랬습니다. 많은 것이 그 나라에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많으려면 자손이 많아야 하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사래는 늙어서 이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태에 능력을 상실하고 아브라함도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 씨가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나라가 강성하게 되고 사람에 눈에, 인간에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에 약속은 꿈꾸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너는 강대한 나라가 된다” 아브라함이 눈을 간고 고요히 강대한 나라를 한번 생각해봤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도 생각이 나고, 또 애굽도 생각이 나고, 주위에 걸어왔던 많은 나라들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낮이면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문을 드나드는 그 엄청난 인파를 보면서 저런 나라가 되게 해주신다 할 때에 쉽게 실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약속은 이처럼 우리의 눈에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한계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모든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그 아브라함에 나라뿐만이 아니라 천하에 모든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라고 하는 상황의 현장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주인공이 될 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이제 나라에 주인공이 되고 심지어는 천하만민이 지배하는 온 세상에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에 자손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될 것을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의 삶에 현장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현장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당신을 경외하고 그리고 그 언약을 붙들며 사는 사람들, 그를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전권 적으로 이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또 자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이 없는 세대가운데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을 때, 그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하나도 움직이지 못해서 쩔쩔매는 신앙의 생활을 은혜를 받고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가정을 움직이실 일들을 나에게 말씀해주시고, 우리의 자녀들을 움직일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교회를 움직일 일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될 때에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환경에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사용해주실 때 우리는 예수 믿는 맛이 납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나만 바뀔 뿐만 아니라 남편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내가 바뀌고 그리고 그렇게 때려도 안변하고 고액의 과외를 시켜도 안 변하던 자식들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을 그렇게 움직이는데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내 사업과 그리고 직장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주시려고 우리를 붙잡으실 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도구가 되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의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고통이 올 때에 그냥 와서 위로나 받고 시련이 있을 때 와서 잘 될 것이라는 그런 덕담이나 듣고 가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면 개척될 수 없는 미개척에 환경을 여시고 개척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이 힘이 있고 우리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이 역사 하시는 현장으로 불러내셔서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아주실 때에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고, 역사가 바뀌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룸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천하에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를 통해 실현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아니면 세상에 진정한 축복을 알릴 자가 없고 그 복을 나누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누군가로부터 공돈을 얻어 쓰거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서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노 대통령을 가리켜서 ‘조막손’이라고 그렇습니다. 난 그것이 무슨 말인가 했더니 펴지지 않는 손을 조막손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왜, 조막손이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이렇게 쥐어줄 때, 이렇게 못 쥐어주고 요렇게 쥐어주었기 때문에 조막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막손으로 쥐어준 돈이 몇 천 만원에서 몇 억이 됩니다. 그러니까 진짜 큰 손앞에 있던 사람은 얼마씩 줬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부를 하고 잘삽니다. 세상에서 사람 한번 잘 만나니까 그렇게 생각지도 않던 뭉치 돈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인생에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은 그것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 받았을 때는 즐거웠으나 이제는 저렇게 노태우씨가 고생을 하면서 구속을 내일 모레 앞두고 있고, 은행에 금고를 다 뒤져서 털어 내는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을 받았던 사람들이 오늘 편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세상의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비록 하루 세끼를 먹고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실 때, 그때 우리가 행복하면서 그 행복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러한 진정한 영혼의 축복,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권력이 도와줄 수 없고 해결해줄 수 없는 그때에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뭐 이상한 이야기지만, 저 노태우씨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오늘 예배 끝나고 저 사람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늘하고 나왔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그리고 자유로워지는 것밖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인생에 마지막 종점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늘나라에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몇 일전 신문 보니까 지존파 살인범들이 다 사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옥 속에서 예수 믿고 변화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짜 눈물이 나왔습니다. 마지막 유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유언하고 자기 장기를 다 기증해주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해주었는지 아십니까? 예수 믿는 어느 여 집사가 가서 면담하게 해달라고 해서 예수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콧방귀도 안 했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갈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그 흉악한 살인범이 인간을 잡아다가 토막을 내고 난도질을 내서 불쏘시개로 불태웠던 그 사람의 강철 같은 마음을 녹였습니다. 편지를 썼는데 그 사람이 쓴 편지를 보면서 이것이 살인범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유언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전에는 우리가 눈을 감았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 믿음에 세계가 있는지 모르고 어둠 속에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고 용서받기에는 너무나 큰 죄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대통령이 그 사람들을 용서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다시 살아간다. 그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생에 마지막 종점에서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죽어가고 세상을 원망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마지막 죽을 때라도 예수께서 못 박혀죽으실 때, 한쪽 편에 달렸던 강도와 같이 낙원에 이르는 이런 놀라운 축복을 돈으로 주었습니다. 금으로 주었습니다. 은으로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녀를 통해서 그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왔고 아브라함에 품으로 들어와서 아브라함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축복을 조금도 다름이 없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지금쯤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우리의 예배를 바라볼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만이 할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을 믿는 사람, 역사에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역사에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모든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집안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술만 먹고 예수를 안 믿어서, 어머니가 강퍅해서, 딸이 정신을 못 차려서, 아들이 속을 썩여서 그것은 하나님의 믿음에 역사에서는 비겁한 엑스트라들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누구를 원망합니까? 내가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을 경외하고 믿을 수 없는 가운데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굳게 붙들면서 하나님 앞에 그 모든 사람들을 움직이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셔서 당대에 큰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잠시 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바다가 되어서 멸망하게 될 것을 아직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지키며 그렇게 의와 공도를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왜 택하셨습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통스러울 때, 교회 나와서 눈물이나 찔끔 찔끔 흘리고 위로나 받고 그러다가 덕담이나 듣고 가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점쟁이 집에 예수 잘 믿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점괘가 헷갈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구대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뭘 하겠습니까? 집사가 되어서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 못 차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점괘가 맞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운명에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점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안 통합니다. 왜, 운명을 개척하면서 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손금이나 생명 월일을 하늘에 별자리에 새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는 믿음을 보시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운명에 매여 살고, 그리고 상황과 환경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환경을 개척하고 여건을 열고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으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운명과 같이 얽매였던 것에서 벗어나고 숙명과 같이 갇혔던 것에서 해방하는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간증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든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을 건져내어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게 하고 싶은 사모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이 놀라운 일들을 계획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정해주고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무릎을 꿇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향해 기도하니까 쏟아지는 엄청난 불비와 그리고 지진과 같이 무너지는 파괴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고스란히 롯을 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이 권세를 주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거시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게 만듭니까? 왜. 집안에서 서열로 보면 할아버지가 제일 높고, 그리고 몸무게로 보면 아버지가 제일 많은데, 몸무게도 많지 않고, 나이도 많지 않은 나를 하필이면 중간에서 나를 불러내어서 예수 믿게 만들어준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의 가정에 신앙의 호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에 주민등록표에는 여러분들이 세대주의 주민등록상에는 말하자면 호주로 기록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불러내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으로 살아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가정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여러분들에 이웃을 변화시키는 그런 주관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계획 아래 불러냄을 받은 우리들이 운명에 익숙하고, 환경에 익숙하고,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을 무슨 정신 휴양하는 것처럼 믿으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자손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 너를 택했노라” 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 인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약속하실 리가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과 만날 때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를 믿음의 장으로 불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서 이렇게 한번 여러분의 역사를 움직이고 그리고 불쌍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족과 주위에 많은 사람에 역사를 바꾸어놓는 주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최상의 것을 바친 믿음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995.11.12 주일오후 6)
젊었을 때는 그렇지가 않은데 어른들이 나이가 드시게 되면 손아래 사람들이 집을 방문을 하게 되면 그 자식들의 손을 쳐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계신 곳에 갈 때는 가깝든지 멀든지 그저 그 노인들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칭찬을 받고 싶거들랑 그냥 모든지 빈손으로 가지 말고 사 가지고 다니라. 그런 충고를 노인들로부터 몇 번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어른들을 향한 공경함이 눈으로 보이기를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아직 저는 노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심리에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지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뭔가 표시를 통해서 그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마 인간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마음을 인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오늘 한번 거론함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늘 응답과 교통함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지 한번 말씀을 나누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 선택 때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계속 살펴왔습니다. 아브라함에 인생 가운데 최대에 하나님 앞에 선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 이 22장에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인생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하나를 믿고 담대하게 모험을 건 최대의 모험이 있었다면 그것도 바로 22장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최대의 축복을 받은 장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22장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세대뿐만 아니라 이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새롭게 구속함을 얻는 그런 대적의 문을 얻게 된다고 하는 구속사적인 약속을 가장 확실하게 받은 곳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22장입니다. 따라서 22장은 아브라함의 사건에 있어서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그런 의미가 깊은 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많은 믿음의 후손들은 이 22장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훌륭한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에 생애를 우리는 추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있어서 이처럼 믿음이 인정을 받고, 그리고 그 인정받은 믿음 위에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을 부여받는 놀라운 은혜는 아브라함을 살을 에는 것 같은 깊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22장만큼 믿음에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해주는 성경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생산할 능력이 그친 아내와, 남자로서의 능력이 말라버린 자신 사이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분명하게 ‘태를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시련 하시고, 연단하시고, 더 순결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그 가정에 아이를 낳는 문제를 가지고 깊이 가난해지고 고민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오늘날에 맥락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둘이 잘 살면 좋은 세상입니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요즘은 자유로운 시대입니다. 하나 낳고 싶으면 낳고, 그저 화초 삼아서 하나나 둘을 길러보고 싶으면 길러보고, 그냥 둘이 신나게 살고 싶으면 그것도 집어치워 버리고 맘대로 하는 세상입니다. ‘아이를 못 낳아서 쫓겨났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다 40-50년 전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아이가 집에 없으면, 아브라함 자신에 표현대로 “내가 나이 많고 늙었으니 이제 내가 무슨 낙이 있으리요” 아무런 낙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재산이 늘어나고 그리고 땅이 점점 늘어나도 아무런 희망이 없고 미래에 전망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씨족사회에서는 아이가 없으면 이웃에 의해서 언제나 공격받을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연약한 가문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문에 드디어 100세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중국 고사에 ‘칠십 생남 비오자라’ 칠십에 아이를 낳는데 과연 내 아이일 것이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100세에 아이를 낳은 이 사건이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100세에 할아버지가 된 그 증조할아버지도 넘을 고조할아버지쯤 되는 그 할아버지가 금방 태어난 따끈따끈한 자식을 안고 그렇게 얼리면서 입을 맞추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죽 했으면 이름을 낳아서 ‘이삭’ 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이삭 오늘날에 영어표현으로 ‘이쓰하크’ 입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이란 뜻입니다. ‘웃다’ 하도 신나서 그냥 웃는 것입니다. 입이 한없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김승희 전도사님이 진석이 낳고 좋아한 것보다 백배는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리고 세월은 상당히 흘러가서 아이의 나이가 16-17세 정도 됐습니다. 그렇게 이미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한 사람을 다 불로 태워서 드릴 수 있는 양에 나무니까 그런 정도를 짊어질 때가 되면 이미 상당히 장성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다 태워서 드릴 정도에 나무니까 요만큼 해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짐,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커다란 짐을 짊어져야지 만 될 정도로 그런 정도의 힘이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22장이 시작하기를 그일 후에 많은 일들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시험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에 커다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가? 야고보서에 보니까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누구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그러셨는데 여기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그를 부르셨다 그랬습니다. 늘 있었던 일이지만, 그날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대답하는 말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명령이 참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들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번제라고 하는 것은 제물을 토막 내고, 내장을 꺼내고, 그리고 불을 피워서 그 위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죽지 않고 드릴 수 있는 제사가 없지만 단순히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각을 뜨고, 그 다음에 내장을 꺼내고, 그러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것도 동물에게 적용이 되어도 그 제사를 드리는 것이 끔찍하고 쉽지가 않은데 여러분은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화) 목사님 어릴 때 닭을 잘 잡으셨다는 이야기. 청년들을 데리고 기도원에 가다가 어느 곳에 들려 닭을 잡아 닭곰탕을 해주려고 시켰는데 닭을 잡는 아줌마가 능숙한 솜씨로 닭을 잡는데 하루에 이 백 마리의 닭을 잡는다고 했다는 이야기.
지금은 잡으라고 그러면 안 먹으면 안 먹었지 도저히 못합니다. 닭이 아니라 병아리도 불가능합니다. 계란도 못 깨트린다고 그러면 거짓말이지만 정말 닭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제입니다. 그런데 짐승이 아니라 이번에는 아들입니다. 아들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의 대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부인을 만나서 “여보,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는데 이거 어떡할까?” 혹은 “하나님,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등등의 이야기가 나와야 성경이 재미가 있을 텐데 그런데 일체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건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자기 아내를 더 이상 신뢰하지를 않는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해봐야 옛날에 하갈에게 동침하라고 했던 그런 사건밖에는 안 나올 것이다 그 수준에서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야기하면 아내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었으니까 그러면 아이고 식기 전에 얼른 가서 하나님께 드리세요. 그랬을 리가 있습니까? 그 귀한 자식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생각하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이삭을 달라고 그랬습니까? 이삭을 달라고 언제 하나님께 졸랐습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달라고 조른 것도 없고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줄 테니까 가져라 그러셔서 가졌을 뿐인지 자기가 언제 달라고 그랬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의할 것이 많은데도 아브라함은 조용히 밤을 보냈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시간에 밤이었을 것입니다. 밤에 자주 말씀하셨으니까.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밤도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적합한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이 아브라함은 다 듣고 난 다음에 그 밤을 침묵가운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말씀을 듣자마자 코를 골고 곯아떨어져서 눈을 뜨고 나니까 아침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 밤을 쭉 침묵 가운데 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침묵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언어가 머리와 가슴사이를 오고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삭과 함께 살아왔던 그 많은 날들, 그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어 다니고 그 다음에 까불고 한 날들, 아이가 많아도 그래도 하나가 없어지면 안타까운데 이 아이는 딱 하나, 그 아이가 희망이었는데 그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그러셨는지를 이미 암시해주셨습니다. 뭐라고 그러셨는가 하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이 독자 이삭에게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렇게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데리고 가서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바칠 그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삼 일만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이 보이니까 아브라함이 자기를 따라간 종자들에게 “너희들은 나귀와 함께 여기 있으라.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할 때에 그 “돌아오리라”고 되어있는 성경말씀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낫슈바’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돌아오련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팔목을 붙드시면서 안 된다 나둬라 그러리라는 요행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올라가고 그리고 그 아이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죽어도 하나님은 다시 살게 하시리라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이 아이를 바칠 때 요행을 기대하며 바친 것은 아니다. 이것을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12절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사실 하나는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머리터럭 하나도 헤아리시고, 그리고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의 별들을 모두 헤아리고, 그 운행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셨다고 하는 것이 말이 성립이 됩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제야” 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몰랐지만 마치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께 감추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로 아브라함에 마음을 파악하기에는 심리학적으로 아브라함에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고 그리고 지능이 높은 그런 생각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감추어져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혜가 모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으로 행위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지 않게끔 감추고 사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흉내 내며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이미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기꺼이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 마음이 실제의 삶으로 표현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제일 처음 아브라함에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낯설고 물 설은 하란의 땅, 그리고 거기서 사랑하는 아버지마저 땅에 묻어버리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지 가나안으로 갈 것인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깊은 인생에 시련에 그리고 위기에 빠져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왔고 또 그 이후로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고자 힘써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깊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이 독자 이삭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서 이전과 같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들이 똑같이 증가되거나 혹은 촉진되는 대신에 하나님보다 어린 아들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갔던 것을 우리는 오늘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에게 나를 경외하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하는 듯이 아들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머릿속으로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훌륭한데 삶이 믿음을 못 쫓아간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는 것입니다. 행위와 믿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리거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많은 것을 드리라. 귀한 것은 주를 위해 사용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우리의 실천을 통해 드러내 보여줌으로 말미암아서 주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마음이 만족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신 이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의미는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 말미암아서 커다란 신앙에 갱신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 이상의 뛰어난 삶을 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식어질 때, 눈에 보이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은혜의 말씀을 굳게 붙들며,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지하고, 그 관계 안에 붙잡혀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앞에 확인하게 하는 이런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사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너무나 자주 쉽게 우리는 주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떠올라서 거기에 주님께 바쳐야할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대신에 그런 잘못된 주님 이외에 것들에 바치고 드리는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갱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갱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갱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갱신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쇄신하고 새롭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한이 없고 놀라운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교회적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해 동안에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교회를 이끌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공간에서 말씀을 듣고 변화가 됐습니다. 기도하며 응답을 받았습니다. 고아와 같이 이 세상에 버려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이 결코 이 풍파 많은 세상에서 외로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하고 함께 함으로 외롭지 않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도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에 생활에 궁핍도 채워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많은 결정적인 어려운 문제들과 생각할수록 우리의 인생에 고난과 그리고 아픔이 되는 그 모든 결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셨거나 혹은 해결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을 일 년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셨고 우리는 그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그 풍성한 은혜의 증거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는지를 오늘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앞두고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하나님께서 증거를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번도 빈말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찬밥 보듯이 우리를 보고 지나가 버린 적이 없습니다. 괜한 말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 빈말로 한번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드러났습니다. 나타났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는지 증거를 보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질 정도로까지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증거를 대볼까요? 오늘밤이 다 지나도 다 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 다 몰라도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에 사랑을 빈말로 말씀하시거나 단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간간이 빛을 보내주심으로 길을 잃지 않게 하셨고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샘을 주셨습니다. 메마른 들판과 같이 여러분들의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주님을 찬송하고자 하되 여러분의 마음이 모두 마른땅과 같이 메말라버리고, 여러분의 입술은 굳어버리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찬송의 노래의 제목들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마른땅을 터트리며 샘을 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발견하게 하시고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은혜들은 마른땅과 사막과 같은 인생에서 만남, 무화과나무요 그리고 열매 맺힌 포도를 만난 것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처럼 빈말이나 마음뿐이 아니라 항상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의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가득 차있고 아버지의 집에서 부모와 함께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르는 자식들이 즐겨하는 말이 “부모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나.” 그러나 여러분, 그 관계를 붙들고 건강하고 생존해 계시는 부모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은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고 생각하는 겸손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가 언제나 가시적으로 드러났던 것처럼 한해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지낸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녀임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내 보여드리고 그것을 고백할까. 생각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가 될 아브라함을 향해서 “네가 이제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할 때 “이제야” 는 도대체 언제입니까? 아브라함이 의례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침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이제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어서 평상적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릴 때 “이제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제야” 라는 확신의 음성을 들었을 때 최상의 것을 드린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수많은 재산이 있었으나 그 재산과 오늘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하는 이삭을 비교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자신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그런 것들을 많이 받으심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로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것을 드릴 때, 그 이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것을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의 피를 목말라하십니까? 아니면 그 짐승의 기름을 목말라하십니까?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리시는 분이 아니오. 또 주리실지라도 너희에게 식물을 구하시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고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짐승의 피도 마다하신 하나님이 이삭의 피를 원하실 리가 없었고 이삭의 살을 원하실 리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셔도 그 하나님에 주신 것에 집착하면서 하나님보다도 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더 집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 아내를 사랑하는 것, 자식을 사랑하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상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죽이고자 하나님의 명령대로 불을 잡고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그런데 여기는 재미있는 것이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12절에서는 1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그랬는데 여기서는 “네 아들 네 독자” 가운데 빠진 말은 “사랑하는”이라는 말만 빠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브라함에게 확신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었을 때, 그리고 찌르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찌르려고 하면 하나님이 손목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찌르면 이 아이가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살리거나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즉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자신의 유업을 잇는 것도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 아들을 통해서 유업을 잇는 것이 아니요 그 약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요. 약속을 이루고 유업을 잇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삭은 깊이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고 눈을 감고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것은 곧 아브라함 아들 이삭에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 마음속에 있는 이삭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향한 사랑에 대한 죽음,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 사랑에 대한 죽음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와 은총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시간도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 앞에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한없는 하나님에 은혜를 입고 그리고 살아온 우리들이 주님 앞에 이제껏 우리가 드리지 못했던 귀한 것들을 이 감사절에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몇 푼에 헌금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예화) 부산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가셨는데 만 명 가까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교회가 좁아서 옆에 공장 부지를 사려고 하는데 사 백억 가까이 돈이 든다는 말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것을 걱정하시니까 그 목사님 말씀이 자기는 아무 걱정이 들 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며 ‘일억씩 사 백 명이 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며 돈을 걷으려고 하니까 돈이 안 걷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선착순 사 백 명만 받는다고 해도 서로들 먼저 하기를 원했기에 힘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니까 넘치도록 자신을 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가을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최상의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추수감사헌금을 그냥 대충하지 마십시오. “여보, 당신이 알아서해” 그러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말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사람을 살아야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하고 상의하지 마십시오. 아내는 아내대로 바칠 만큼 준비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준비해서 봉투는 합치든지 분리하든지 그것은 민주적으로 하되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최선의 헌금을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드리는 돈 그것보다 더 최상의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남편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제 이 감사절 그 19일부터 회개하고 주일을 지킴으로서 나의 사랑이 남편과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최고의 열매입니다. 여러분들이 생업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님, 내 생업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내가 주일에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또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못 살았다면 그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므로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최상의 분이심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큰 은혜가 넘칩니다. 그렇게 저는 거액의 헌금을 바쳐본 적은 없지만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바쳤을 때, 아주 귀한 것을 바쳤을 때, 그때 돌아서고 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예화) 예전에 학교를 다니며 교회를 섬기고 계실 때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느 어려운 지체를 도우라고 하시면 생활비보다 더 많은 돈을 그 지체에게 주려면 여러 번의 갈등 속에 순종하고 돕고 나면 마음이 기뻤다는 이야기
그렇게 돕기 전까지는 그것이 고통이 되는데 일단 딱 돕고 돌아섰을 때 그렇게 마음이 자유롭고 기쁩니다. 여러분, 자기 사랑 부여안고, 물질 사랑 부여안고, 그리고 이것저것 다 제해놓고 남는 시간, 남는 재물, 남는 마음, 남는 정성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여러분들이 하시다가 아브라함이 즐겨들었던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못 듣고 우리의 인생이 신앙생활을 마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새롭게 갱신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가 삶으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듣고 싶어 하시는 것, 우리에게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들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멀어지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상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서라도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를 사모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삶 안에서 한없이 즐거워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 된 우리의 삶, 이 속에서 우리는 추수감사절에 놀라운 은혜로 드리는 물질에 열매뿐만 아니라 여러분, 금년 동안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 혹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도저히 넘어설 수 없었던 신앙생활에 한계, 이것을 떨쳐버리고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참 주님을 존귀하게 해드리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추수감사절에 성찬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 모두 심령 속에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응답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여호와 이레의 믿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에는 추수감사 예배였지만 그 지난주에 우리가 아브라함 시리즈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주신 말씀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커다란 위기를 넘기게 된 다음에 칼도 있고, 불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때에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되겠는가. 아들을 바치라고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손도 대지 말라고 그러셨으니까 어떻게 하나 그래도 어떻게 제사 드리려고 칼도 들고, 불도 들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까지 올라왔다가 내가 그냥 내려갈 수가 있는가.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한 수양이 자기 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뿔이 수풀에 걸려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 이 수양이 계속 뒤를 따라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아들을 바치기 위해서 100세에 낳은 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다니 하면서 눈물을 삼키고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묻는 아들에 말에 심령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고 흐르는 눈물을 아들 모르게 닦으며 모리아 언덕을 올라가는데 아브라함이 볼 수 없게 뒤에는 제사에 쓰일 수양이 졸졸졸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올라가다가 ‘안 돼, 내가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나를 대신 죽으라고 그러십시오.’ 하고 만약에 제사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수양은 보였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도 드리지 못하고 그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불신앙과 불순종의 표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한 산으로 올라가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바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리려는 마음이 있는가. 이것을 관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 대신에 받으실 당신에 제물을 아브라함 뒤에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양이라고 하는 짐승이 수양이라고 하지만 산양일 것입니다. 높은 산을 뛰어 다니고 골짜기를 오르내리고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먹이를 구하는 짐승인데 아니 무슨 이 수양이 뿔이 오늘 생기고 어제 생겼습니까? 평소에 늘 달고 다니는 뿔인데 그 뿔이 나무 가지에 걸렸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산에 올라갔다가 손이 나무에 걸려서 못 내렸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양은 연구대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연구대상인 양이 여기에 나왔습니다. 누가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 양을 하나님께서 준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해서 공경하는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너무나 심령 속에 은혜와 축복이 넘치니까 그 땅 이름을 바꿔버렸습니다. 무엇이라고 바꿨는가 하면 “여호와이레” 여호와이레 라는 말은 히브리어 말로 원래 뜻은 “하나님이 보신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이 여기서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하는 추상과 같은 하나님에 명령을 받자옵고 이 아버지가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부부관계는 이렇게 말하면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꼭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양권의 사람들은 부부와의 관계는 ‘일륜’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아들 아들과 자식과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그래서 ‘인륜지대사’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에 관계를 끊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그렇게 사랑하던 하나님이 주신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그렇게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에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는 아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런 비극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저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아주 꽃 같은 나이에 불의에 사고로 자녀를 잃어버릴 때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산에다가 묻고 자식은 가슴에다가 묻고 죽을 때까지 산다.’ 그런데 그 아들을 불의에 사고나 아니면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낳은 자식에 목에 자기가 시퍼런 칼을 대고 각을 떠야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떡했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해석할 때에 그렇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이삭을 바쳐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즉시 ‘네’ 그리고 끌고 가서 ‘넌 죽어야 된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정도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그 이삭이 자라오면서 정이 들고, 사랑이 가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유업을 이을 자로서 이삭이 아버지 앞에서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랑이 이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바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 아브라함의 손목을 붙잡으시면서 “너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말씀을 하시고 그에게 이렇게 여호와의 산에서 예비해주시는 놀라운 신앙에 위대함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위기는 바뀌어서 기회가 되었고 그 기회를 하나님 앞에 믿음을 고백을 하니까 그 시련은 바뀌어서 하나님이 바로 그 저주가 된 것 같은 그 산에서 하나님이 손을 벌리고 그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적의 문을 얻고 그의 씨를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예언해주시고 그로 말미암아서 온 세상에 만민이 복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12장에 축복에 다시 한 번 인 쳐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의 일생에 있어서 이렇게 비참한 위기,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넘을 수 없고, 몸부림치고, 아내와 의논을 하고, 사람들의 중재를 모아도 넘을 수 없는 인생에 막다른 시련 앞에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위기의 시련에 그 땅에서 잠시 후 그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을 향해 경외하며 이 산은 여호와의 이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곳이라 감격적으로 외칠 수 있게끔 아브라함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처한 그 환경을 바꾸어 놓았던 위대한 힘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마지막에 자신을 파멸하고 많은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복을 받는 대신 재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사람,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삶이 어떤 자리에 처했던지 인생이 어느 상황에 왔던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 이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시험에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바꾸고 고난의 골짜기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만남에 장소로 바꾸어놓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만이 22장의 위기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동일하게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고, 제련하시고,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만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른 불순물들을 우리에게 씻어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시련 가운데 부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련의 위기를 바꾸어서 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고난의 그 언덕을 바꾸어서 여호와이레의 언덕으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그것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믿음이라고 그렇게 하지만 그건 너무 추상적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시련의 위기를 바꾸어서 축복의 기회로 만들게 해준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성경이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 믿음은 여러 가지 믿음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최선의 것을 드린 믿음이었습니다.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집에는 소도 있고, 양도 있고, 염소도 있고, 많은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했고, 제사했고, 예배했습니다. 한 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해서 소를 잡는 것이나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양떼를 잡는 것을 아까워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 100세에 낳은 아들 아브라함에 유업을 이을 유일한 후손 이삭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금을 드리고, 은을 드리고, 소를 드리고, 우 양을 드렸을 때 그것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그것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한 부분으로서 전체를 대표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비록 이삭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그것은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은 남은 모든 것을 여호와 앞에 바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바로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일부러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 하나님 앞에 만족을 줄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최상의 것을 원하실 때, 그 최상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더 이상 그것들을 받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는데 있어서 합격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손으로 찔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이삭의 피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드릴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지 않는 신앙생활에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향한 더 큰사랑과 우리의 인생을 향한 보다 완전한 계획을 이해하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여러분들을 하늘에 축복을 이 세상에 부어주는 문으로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특별한 우리를 향한 은혜는 언제나 ‘세상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고 주님만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이삭을 낳고 한참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6세쯤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긴 세월이 흘러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할 때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가는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여러 날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아브라함이 나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하는구나’ 하는 이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그 이삭 하나가지고 사랑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밖에 없는 흔들리는 바람결에 서있는 촛불과 같은 그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애지중지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이삭 하나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후손을 주시고 또 후손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에 은혜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그것 때문에 거기에 사랑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소월 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시험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거니와 하나님께서 “네 독자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깊이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위대한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삶 속에서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에 주님이 나에게 축복으로 주시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주셨던 그 하나님에 은혜들을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새롭게 말씀을 들으며 각성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저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신앙에 상태가 어떠한지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살던 세상을 잠시 떠나서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최선의 것을 드리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생을 미리 준비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난 사람은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유 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물질이 부족한 것이 우리를 노예 되게 만들고 때로는 권력이 없는 것이 우리를 노예 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심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을 때 좋았지만, 두 번째 은혜를 받고 정말 하나님이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데 정말 죽기보다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내 인생에 계획표에 예수를 믿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불현듯 내려오셔 가지고 내 인생에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표에 막 작대기를 그으면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예수를 안 믿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무슨 권리로 내가 믿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왜 내 인생에 계획표에 주인 허락도 없이 죽죽 긋는 것입니다. 한 줄그을 때마다 가슴에는 칼자국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결국은 사랑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가, 하다가 나중에 이제 포기를 했습니다.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 인생을 다 주님께 드립니다. 죽을 쓰시든지 호박 국을 끓이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인생에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그러기로 했습니다. 제가 인생을 어떻게 그렸는가 하면 최악의 상황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서 이제 채소밭이나 일구면서 시골 노인네 몇 분을 모시고 시골 교회를 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이층 교회에서 섬기면서 교회가 집세를 못 내서 목사님이 주인에게 혼이 나는 것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옆에다가 비닐 장판 깔아놓고 석유곤로 하나 놓고 밥 끓여먹으면서 살림하면서 목회를 하는 그 생각까지 하고 하여튼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인생에 대한 모든 꿈은 없어지는데 그 대신 하나, 무엇인가 하면 자유 함, 한없이 자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어차피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때 제가 잘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찬양)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그러면서 회사 복도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걸어갔습니다. 일을 하면서 왜 이제 누가 너 이다음에 뭐 할 것이냐. 아무 꿈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어느 신학교를 가야할지도 모르고, 학교를 다니면 직장을 다녀야하는지 더 다녀야하는지도 모르고, 장가는 갈 것인지 말 것인지도 모르고, 그런 사람한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옛날에는 신세 생각을 하면 가슴속에서 슬픈 눈물이 나왔는데 이건 슬픔이 아니라 그냥 자유 함입니다. 그 대신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 찬송이 하여튼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나에게 한없는 힘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최선의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긴 사람들에게는 자유 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뺏어 가시고 우리는 더 커다란 상실과 결핍에 시달릴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신에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에게 칼을 대고 목에다가 겨눌 때 하늘에서 하나님이 ‘찔러라 콱 죽여라’ 그렇게 소리가 들렸습니까? ‘대지 말라 대면 내가 가만히 안 두겠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원했던 것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에 피가 아니라 네가 독자 이삭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그렇게 사랑했다면 너에게 그 아들을 준 자가 누구냐 바로 나 하나님이 아니냐 네 사랑은 불안전하고 육신의 아비는 악할지라도 너를 불러주고 너에게 이삭을 준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고 그리고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잡으셨던 것입니다. 예비하신 것이 보였습니다. 이삭에게 칼을 겨누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칼을 댈 때에 시작이 된 것이 아니라 순종하여 아픔 가슴을 누르며 자신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모리아 언덕으로 올라갈 그때부터 하나님은 예비하신 것입니다. 뒤에서 살살 쫓아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생긴 놈이 살살 쫓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사실이 아브라함의 눈에 뜨이게 된 것은 언제인가 하면 주님의 인정을 받은 다음이었습니다. “이제야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여기서 “사랑하는” 이라는 말이 없어져버립니다. 1절에서는 “사랑하는” 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사랑하는 이라는 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당신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아노라”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해주실 때 예비하신 것이 눈에 보이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찔끔찔끔 신통치 않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뭐 복 받을 길이 없나’ 그렇게 하지 마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번 열심을 내어서 온전한 신앙의 생활을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시련의 위기를 바꾸어 축복의 기회로 삼아주신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경험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아브라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