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모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 6-7)
녹취자 ; 정윤미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 앞에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훌륭하게 잘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들도 언젠가는 모두 작은 교회인 적이 있었고, 아무도 없는 벌판에 그 이전에 누군가가 눈물로 씨를 뿌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5년이고 10년 전 일수도 있고, 수십 년 전 혹은 100년 전 일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기 때문에 30년 전하고 지금하고는 시대가 다릅니다. 그리고 아마 목회도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목회 방법이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본질조차도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 혹은 교회가 굳건하게 서는 것이 무엇으로써 되는가? 아마, 한두 가지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이것은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보다도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은 예수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신약성경이 시작되면서 등장하지만, 구약 성경 말라기서가 끝나면서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 대한 예고로 구약이 끝나고, 신약은 세례요한의 출현을 알림으로서, 이제 신약성경이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하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오늘 말합니다. 우리 목회자가 하는 일들은 정말 많고도 많습니다. 사소한 일부터 시작을 해서 큰일까지 이렇게 다양한 일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수행 할 수 있는 직업도 이 세상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군인이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라고 월급을 주고, 무기도 사주고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군인 말입니다. 이 사람이 사람도 좋고, 인간성도 훌륭하고, 다른 사람과 친절하게 잘 지내고, 너그럽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아는 것도 많아 박식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못합니다. 그래서 싸우면 언제나 지는 군인입니다. 그런 군인이 나라에 필요하겠습니까? 좀 성질이 못되고,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일단 전쟁을 하면, 적군을 이기고, 승리해서 나라와 그리고 민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만,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또 이런 일에도 유능하고, 저런 일에도 유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지금 말씀드리려는 한 가지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하면, 그는 훌륭한 목사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다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또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와 있는 복음에 나와 있는 모든 내용을 네 단어로 요약을 하면,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입니다. 이 네 단어가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 네 단어가 더 이상 축약 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사람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했는데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그렇게 죽으신 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교인들이 아무리 많이 교회에 와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목회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목회라고 할 때에 이 회는 양 무리들을 의미합니다. 염소의 무리나 개들의 무리나, 맹수들의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가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될 때에 그 사람이 비로소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사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줄때에, 그것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거듭난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니면, 성경이 달콤하지 않고, 예배가 기쁠 수 없고, 목사님이 존경스러울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라고 일러 줄때에 거기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목회 사역은 바로 이 믿게 하는 것,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이 일이 우리의 사역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작은 채 있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인 사람들이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남에 수백 평짜리 커다란 주택이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사는 사람이 식인종들이라면, 그곳이 문화주택일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다 쓸어져가는 초가삼간 같아도, 거기에 인간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때에 그 주택이 진정으로 문화주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부름을 받은 주의 종들입니다. 이 일을 잘하면, 다른 일을 좀 못해도, 충성된 종이고, 이일을 안 하면, 다른 일을 잘해도, 충성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군인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기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에게 있어서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 이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우선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사람 두 사람 예수를 믿고, 진실하게 변화되면, 그 교회는 작아도 하나님 앞에 훌륭한 교회 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러한 본질에 충실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굳게 믿게 되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우선,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냥 생각으로 동의하거나 나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는 다는 것은 진실로 그 목적에 동의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믿되, 자기를 온전히 의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전에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예전에는 불신자였고, 불신자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행복할 수 있겠다고 믿어서 미친 듯이 돈을 벌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쾌락을 즐기면 그것이 내 행복이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높은 벼슬에 올라야지, 그러면 이 사람들이 나한테 꼼작 못하겠지, 그 사람에게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최종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이 아니라는 사살을 깊이 깨닫고 회개한 후에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나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 사는 길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목회 사역에 가장 중요한 일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고, 그 다음에 믿음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최고의 목회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이 믿는 것에 대해서 이런 놀라운 변화가 성도들에게 일어날까요? 첫째는 설교의 내용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설교하던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이어야지만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결코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혹시 믿음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믿음에 대해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비행기를 타는 것도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도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그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확률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도 비행기가 떨어져서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안 죽을 확률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외국을 오가는 좋은 비행기들은 얼마나 안전한지, 그 떨어질 확률이 횡단보도를 걸어가는데 차가 횡단보도로 뛰어들어서 사람을 치어 죽이는 그런 정도의 확률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횡단보도까지 차가 뛰어 올라와서 사람을 죽이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확률로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은 확률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일생을 모두 의지하여 그 분만을 의뢰하고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세상에서 확률을 믿는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그런 믿음과는 다른 믿음입니다. 아무튼 그 믿음은 목사가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와 예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 말씀을 전하여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면, 은혜 받은 교인들이 가서 전도하는 것이지 누가 전도를 해 오겠습니까? 혹시 우리의 명성이나 우리의 무슨 특별한 것을 보려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간혹 있는 일이고 몇 사람이지, 믿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이 모였던 세 명이 모였든 상관 할 것 없이 그 교인들에게 목사님들은 예수를 설교해서 그 믿음이 생겨나게 하고, 있었던 믿음에는 믿음이 더 강하게 생겨나서 그 믿음이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때에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서 그들을 교회에 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장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설교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만을 증거하겠다라고 마음먹고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잘 증거해서 이 분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만들어 줄까를 생각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 믿음을 굳게 갖도록 만들어 줄 때에 믿음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설교를 듣고, 다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 줄 때에, 여기에서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나씩 둘씩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당연히 목사는 성경과 씨름하고 그 속에서 설교를 잘 만들어 내서 눈물로 기도한 후에 주일날이면, 영적인 식탁을 충만하게 베풀 수 있도록 그렇게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에 교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에 독창성을 강조하는데, 물론 설교의 독창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무 책도 보지 않고, 누구의 설교도 듣지 않고 홀로 성경을 탐구해서 설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아주 그는 훌륭한 목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를 보더라도, 작곡도 하고 연주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가수는 드뭅니다. 그래서 남의 곡을 받아다가 다른 사람에게 연주를 시켜서 노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춤을 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성도들에게 깊이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러는데, 부흥사가 설교를 은혜롭게 하고 내려왔는데, 나가는데 설교 원고를 흘리고 갔습니다. 주워서 보니깐, 어느 목사님이 쓴 책을 찢어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것은 좀 아닙니다. 그것은 도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오늘 설교는 아무개 목사님이 쓴 책에서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 까지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용입니다. 시간이 급하니깐 그냥 찢어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사기성이 있습니다. 그렇게는 안하더라도, 자기가 좋은 목사님 로이드 존스나 찰스 스펄 전이나 칼빈이나 아니면, 우리나라 목사님 중에서도 깊이가 있고 뭔가 설교에 깊은 그 말씀의 도리가 있는 그러한 것을 읽고 자지가 은혜를 잘 받은 다음 자신의 말로 써서 그것을 잘 외워서 기도 많이 하고 올라가서, 원고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설교를 했는데,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자기 설교지 남의 설교가 아닙니다.
예화)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그 어느 예배에 가게 되었답니다. 설교를 듣는데, 분노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자기 설교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끝나고 나서, 그 설교자에서 물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몇 년 전에 내가 한 설교이고, 책으로도 나온 설교인데, 어떻게 이렇게 남의 설교를 똑같이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이 설교를 보고 한 것은 틀림이 없지만, 당신 것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서 봤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알고 보니깐, 스펄젼 목사님도 그 사람 것을 읽고 설교를 했는데, 세월이 너무 지나서, 그것이 그것인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설교의 대가도 세월이 많이 지나다 보면, 이것이 남에게서 읽은 것인지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목사가 책을 놓는다는 것은 장수가 칼은 놓는 다는 것과 같습니다. 싸움에 나갈 장수가 칼을 놓고, 화투장이나 들기 시작하는 순간서부터 그 군대는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꾸준히,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들이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목사가 되면, 단점이 무엇이냐 하면, 평신도 때를 뭐라도 하나 들으면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서 내가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데, 목사가 되고 나면, 항상 여기에서 갖다가 이리로 나누어줄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말씀에 은혜 받을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경우에는 모르겠습니다. 내 경우에는 제일하기 싫어하는 성찬식이 목사들끼리 모여서 하는 성찬식입니다. 눈물도 없고, 기도도 없습니다. 정말 무미건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마음은 상한 마음이고 깨어진 마음입니다. 우리가 목사이지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내려 보실 때에는 머슴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있을 때에는 어유! 저 남자는 어쩜 저렇게 키가 훤칠해 185cm에다가 아이고, 등치도 좋고, 저 여자는 어쩜 어떻게 얼굴은 좀 생겼는지도 몰라도 키가 150cm가 뭐야, 150cm가 조그만 해가지고 이이구 볼품이 없네, 어이구 저 여자는 다리도 길고 키가 170cm이나 되는데 땅에서는 보이지만, 한 50층 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전부다 개미새끼들이지, 그것이 무슨 키가 보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에,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에는 머슴에 불과한 것입니다. 머슴, 그러니까 부지런히 책을 읽으셔야 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일평생, 그래야지만, 이 속에서 무엇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설교의 중심내용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 가서 전도하기 전에 어디에서 전도하다가 갔는지 아세요. 아테네 전도하다가 갔습니다. 아테네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철학의 도시입니다. 그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있는데, 스토아학파와 에프쿠리어스 학파 사람들을 만납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사도바울도 누구에게 쉽게 지지 않는 최고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과 열심히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선교의 성과는 매우 미미하였습니다. 이때에 고린도 지방으로 전도하러 들어가면서 그는 심히 두렵고 떨렸다고 그랬습니다. 왜, 아테네에서 한번 깊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리고, 결심을 합니다. 무슨 결심하지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하고, 깊이 결심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큰 부흥이 일어났던 이유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tv에서 나오는 아침마당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그런 늘어놓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에 그 방식이 어때야 하는가? 성경에 보면, “증언하러 왔나니” 그랬습니다. 이것은 법정용어입니다. 법에서 재판 할 때에 학식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를 기울이고, 경험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귀를 기울입니다만, 이 사람들이 따라 올수 없는 결정적인 증언은 증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 사건 현장에 있어서야 합니다. 학식이 좀 모자라도,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증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들이 말하는데, 예수님이 이런 분이래요? 그런 이야기하면 안 되고,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서, 깊이 은혜를 받고, 자기가 만난 예수를 생생하게 증거 할 수 있을 때에 그때에 그의 설교가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설교가 그야말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래서 그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사무쳐서 목회의 길을 걸어가게 결심하였을 때의 그 감격이 새로워 져서 그래서, 변호자가 아닌 증인으로써 선서한 증인으로서 법정 앞에서 그것을 증거하는 증인의 자세로 말할 때에, 그때에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에, 어느 학생이 자기가 읽고 있는 책 귀퉁이에 이렇게 써났습니다. “나는 세상이라는 법정에 서있는 증인이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하여 이 세상에서 누명을 쓰신 예수그리스도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드리리라” 그렇게 써놨습니다.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두 명이 모여도 기죽지 마시고, 열 명이 모여도 약해지지 마시고, 이만명이 모인 것처럼 설교하면, 온 마음을 다해서 교인들이 울던지, 아니면, 설교하다가 내가 울던지 교인들이 깨지든지, 설교하다 내가 깨지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설교하게 될 때에 그때에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경을 탐구하고, 설교를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설교하기 전에 설교할 성경 본문을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때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