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새벽예배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 14)
녹취자 : 이민희
이제 징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고 그리고 새로운 교훈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앞에 보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고 그 많은 증인들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사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첫 번째 교훈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좆으라. 여기서 ‘좆으라’라는 말은 추가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살기를 힘쓰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추구하라는 의미는 그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것들을 그것을 위해서 희생을 하면서 살아라는 의미입니다. 이 서신이 씌여진 배경자체가 커다란 박해를 앞두고 부분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상황에서 씌여졌습니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그렇게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라는 둥지 속에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 대해서는 로마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었고, 유대교의 종교적 성향 자체가 아주 배타적이고 쉽게 억압에 의해 굴복시킬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입장에서도 적당히 유대교와 타협하고 있던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종교에 대해 두 가지만 반대하지 않으면 상당히 관용적인 정책을 썼습니다. 한 가지는 세금을 잘 내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황제를 숭배하라는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세금은 모르지만 황제를 종교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았고 실제 로마가 가지고 있는 정책에 상당히 저항하는 집단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로마도 마찰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핍박이 점차 조직화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기독교가 확산되고 유대교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유대교와 다른 커다란 세력으로 확산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조직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고 2세기에 사상적인 박해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어쨌든간에 이렇게 조직적인 핍박을 앞두고 있을 때 국부적으로는 핍박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런 상황에서 사도는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화평함을 좆으라고 하였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주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까지 포함하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이루라.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그것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는 양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얼핏 보면 그 사람들이 전투적이고 파괴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진정한 강함은 온유함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창 하나, 칼 하나 가지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제자들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분이셨지만 그 온유함으로 창칼로 정복할 수 없었던 로마를 정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온유의 감화력으로 온 땅을 지배해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오늘 그 핍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이미 부분적으로 핍박이 시작된 이 삶의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심지어는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로 더불어 할 수 있으면 화평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화평을 위해서 화평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렇게 화평하게 살 수 있도록 방해가 되는 다른 것들을 희생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이 좋아질수록 사람이 온유하고 착해져야 합니다. 전투적이고 투쟁적이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하게 요소들과 싸울 때만 그렇게 되는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착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에게 끼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도 그런 착한마음으로 굴복시키고 감화를 받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외유내강이라고 할까요? 사람들에게 아주 착하고 부드럽고 은혜 받고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구름 같은 세상에서 무엇이 정말 가치있는 지를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고 화평하길 원하고 이런 자세를 갖게 되면 자칫 야합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야합과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화평한 것과의 차이는 ‘야합’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의 주변의 불신세계를 끌어안는 것이고,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할수 있으면 화평을 누리고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하지만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불신자나 불신자가 있는 직장이나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부딪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뿐인 경우가 얼마나 희소한지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은 우리의 인격적인 미성숙과 이기심, 착하지 않은 마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분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있고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복음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지만 또 한편으로 세상은 동시에 하나님에 관해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 받는 삶을 꿈꿉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 죄인들의 마음 속에 주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주님을 만나고 싶은 영원을 향한 갈망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되 오직 그 이유 때문에만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 일은 사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되지 못한 삶, 착하지 않은 삶, 이기적인 마음,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계산적이고 자신의 생각 마음, 그런 것 때문에 복음도 평가절하 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존재와 삶으로 보여주는 이 일이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화평을 좆으라하는 이 말은 신앙의 본질을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외의 자신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까지 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좆으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본질은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뵈올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거룩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서 그래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고나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그 신령한 영적인 세계를 잃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화평을 좆으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지키게 만드는 거룩함에 대해서는 순전함을 사모하던 욥과 같이 자기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까지 내어버리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화평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화평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깊이 늘어 붙어있는 이기심, 우리 마음에 깊이 늘어 붙어있는 악,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우리 이기심 때문에 드러나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앞에 살아야 합니다.
(예화)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20년전만 해도 교회마다 ‘차임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시간마다 앰프를 틀면 찬송가가 나오고 멀리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시끄럽다고 다 들고 일어나서 정식으로 제소하고 그래서 그 때 교회가 핍박한다고 다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새벽에 잠을 자고 있는데 교회가 아니라 사회단체에서 그 새벽에 누군가 확성기에다 대고 ‘착하게 삽시다, 불우이웃을 도웁시다’는 좋은 소리를 한다고 해도 가만히 있겠느냐 싶었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미성숙한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이 자명종 맞춰서 일어나 교회에 오면 되는 것이지요.
(예화) 방배동 교회에 있을 때 너무 힘들었던 것은 4층 사택 앞 횡단보도에 장애인용 횡단보도(삐릭~삐릭~)였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경찰서에 이야기 했지만 그 새벽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애인도 없을 텐데 삐릭삐릭하는 소리는 너무 듣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그리고 양보할 때 희생의 당사자가 자기 자신뿐일 때에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집안에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많이 양보하고 화평을 좆으려고 할 때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때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따지기 좋아하고 까탈스럽고 자기이익에 밝고 위선적이고 이중적이고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면 우리의 선교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흘러가는 삶을 통해서 혜택을 받게 만들어주면서 신앙의 본질을 굳게 붙들며 나아가는 그런 삶이 핍박을 앞둔 로마제국 아래에서도 사도가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