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경회 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녹취자: 정은숙B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을 한 후에 자신이 왜 그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지를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것 때문에 그렇게 목자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계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종 팔레스타인의 광야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떼를 치는데 그 양떼들에게 꼴을 먹이는데 풀이 항상 모든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종종 여기에서 풀을 먹이고는 그 다음에 아주 먼 곳까지 이동을 해서 꼴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상당히 많은 거리를 이동할 때 때로는 그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깎아지른 듯한 계곡을 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냇물도 없고 풀고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정겨운 자연의 풍광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맹수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고 때로는 도적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계곡을 지날 때에는 목동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양떼들을 살피며 그 양떼들을 인솔해갑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양떼들을 이끌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골짜기를 여러 번 지났습니다. 그때마다 이목동 다윗은 마음을 기울여 양떼들이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돌보며 안전하게 이끌어 편안한 곳에 이르러 꼴을 먹이고 양떼들로 하여금 쉬게 한 것입니다. 똑같이 다윗은 자기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때로는 아, 여기가 이제 내 인생이 끝나는 죽음이구나. 아, 누가 이 깊은 절망, 그리고 수렁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게 할 정도로 아주 깊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영적인 절망의 때를 지났습니다. 이럴 때에도 살아온 인생길을 돌아보니 혼자 걸어온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지켜주셔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그 분께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리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 분과 언약관계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광활한 목초지로 인도하셔서 온갖 복을 부어주시는 것은 고사하고 왜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것일까요? 때로 시인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제 말씀드린 것 같은 자신의 죄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자신의 죄와는 상관이 없이 왜 그런지 원수들에게 박해와 고난을 당하면서 애매히 괴롭힘을 당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인생의 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윗은 한 번도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본 적도 없고 언감생심 자신이 사울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리라고 꿈꾸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를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셔서 일방적으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의 잘못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 밖에 없고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을 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길을 겪으며 그 이전에 살았던 평안한 삶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제 이새의 집안의 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기름 부음을 다윗이 세 번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시절 동안을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자기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지를 고백하면서 자기가 애매히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으니 자기를 건져달라는 애끓는 탄원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후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낸 이후로부터 사울의 눈에 가시가 되서 그 많은 핍박을 피하여 도망자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를 죽이면 사울은 자기의 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도록 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추격꾼들을 공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견딜 수 없이 고난을 받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괴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아무 연고 없이 죄인들을 통하여 당하는 괴로움이었으나 무엇 하나도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 속에서 이런 다윗의 고난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아주 소중한 임금으로서의 훈련의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애매히 당하는 이 끔찍한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랬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억울한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선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동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괴로움을 당하며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워주셨으나 늘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착한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회심하고 난 다음에 자신의 철학함에 전범으로 삼았던 인물이 이 다윗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그 시절 플라톤을 비롯하여 철학자들에게 흠뻑 빠졌으나 그들에게는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참회의 눈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참회의 눈물, 사랑, 그 경건을 마음을 녹이며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이 시인 다윗의 기도 속에서 자신의 철학하는 전범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의 제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희생의 제사를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주님은 이 시인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셨으나 이 시인은 사람의 영광을 찾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지혜와 겸손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을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에게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비밀스럽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이 어떻게 탁월하고 드높으신 지를 이 사랑하는 시인에게 어떻게 보면 독점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을 주의 영광을 주의 영광을 온 세계 위에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다윗의 눈에는 흐르는 구름하나, 발아래 구르는 돌 하나, 그리고 길가에 피어난 풀 섶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전하며 그래서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온 땅과 하늘에 가득 찬 주님의 증거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많은 경우는 우리가 지은 죄와 불순종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이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 주시면서도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혹은 가난으로, 질병으로, 혹은 핍박으로,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나 이별로 고통을 받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 생활을 안해서가 아니라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려고 몸부림치고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소명을 따라 살기위해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인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 내지는 부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깊이 바라며 당신만을 의뢰하며 살기를 바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마음이 부요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마치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을 스스로 주관하는 것처럼 교만해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과 마음을 깨달을 수 있지만 종종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을 때가 되면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골짜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내가 하나님 대신에 의지했던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버리게 만들어주십니다.
조지 스윗록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거룩한 외로움은 그를 많은 군중들 속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감정은 사랑의 감정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우리를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의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20년 동안 열린 교회를 하고 이 세상에 하늘 아래 교회가 모두 죄인들을 데리고 교회를 하는 곳이니까 이런 저런 사연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하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교인들에게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비결이 뭐냐고 후배 목회자가 묻습니다. 목사님, 우리 목회자들이 교인들 때문에 많이 실망하는데 실망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양떼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의지해야할 사랑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는 그 사랑이 그를 의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에게 베풀고 돕고 나를 죽이고 희생시켜 그를 복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혹은 죄가 없을 때에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 속에 역사할 수 있는 불결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14년 동안을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진짜 긴 세월동안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교수할 때에도 학교에서 실수로 저를 채용안 것입니다. 안수를 안 받았는데 목사인줄 알고 채용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때도 교육 전도사였습니다. 고신 측인 박희천 목사님 교회, 내수동교회에서 중. 고등부를 섬겼는데 정말 그 고통스러운 시절들을 지났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마음이 우쭐해지는데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너무 겸손해집니다. 아이들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엄마 아빠는 교회에 나오는데 아이들은 예수를 안 믿겠다고 뜻을 세운 아이들이었습니다. 난 지금도 그때 한 80명 데라고 목회를 했는데 절반도 회심한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이 아주 커다란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 아이들 중에서 목사 사모들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주일날 와서 설교를 하면 돌부처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요동도 안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예배가 끝나고 나면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너무 바쁘게 학생들하고 씨름하고 학위도 안 끝났기 때문에 공부하고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다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결심을 토요일이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교회에 가서 한 2년 정도 철야를 했습니다. 철야라 그러지만 새벽까지 기도하다 강대에서 엎드려 자고 주일날 아침에 아이들을 맞았습니다. 그때 좌석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문을 열고 한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양의 소명 나를 목자로 부르셔서 이 어린아이들을 맡기셨는데 이 아이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 지나는 것입니다. 그 일에만 매달리면 좋겠는데 수많은 일들이 나를 에워쌉니다. 밤바람을 맞으면서 토요일 날 한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면서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러면서 울면서 교회를 갔습니다. 그때의 마음은 아무 소원도 없고 오직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주님이 나의 걸어가는 길을 인정해주신다면, 하나님이 나의 목회에 복을 주신다면,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받는 대우와 지위와는 상관이 없이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순종하며 산다면 교회 뒤의 십자가에 못 박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골짜기를 지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심으로 고치시기 위하여 지나게 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곳에서 거룩한 고독을 느끼며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신앙의 동기로 정화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 앞에 주님을 덜 의지하고 살았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의도를 따라 주님의 명예를 위해 살기보다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던 불결한 삶의 동기들을 뉘우칩니다.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내 앞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을 통해서 나를 오래간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어 객관적으로 보게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도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역대 이스라엘 왕 중 최고의 영광을 누리도록 모든 것을 주셨으나 이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워주신 왕직, 즉 보좌에 있지 아니하고 이 다윗 왕국의 껍질을 깨고 새롭게 떠오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에 마음을 쏟으며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면서도 이 나라의 껍질을 깨고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진정한 나라를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외관적으로는 한 나라의 왕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나는 궁핍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쏟는 다윗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알 수 없는 탁월한 섭리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그런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히브리어 성경에는 재앙이라고 되어있는데 재앙을 당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기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동행하는 복을 누렸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에녹과 같이 죽음을 보지 않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walking with God,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샬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삶의 목적과 동기가 주님이 나를 살게 하시는 목적과 동기와 일치를 이루는 삶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과 합치를 이루는 삶,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복을 외적인 측면에서만 구하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시며 그 한없는 영광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전에 어느 교인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는데 그 분이 그런 간증을 글에다가 썼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는 정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말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대해주시는 것을 많이 느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느꼈느냐 했더니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기도는 응답을 해주시는데 당신 자신은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하나님이 저희의 구하는 바는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면서 깊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퀴나스는 가톨릭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땅을 내려다보시니 토마스 아퀴나스가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일 몸부림치면서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타나셨답니다. “아퀴나스야, 나의 사랑하는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뭣을 주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아퀴나스가 대답했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금식하며 간절히 나에게 매일 매달리며 부르짖느냐 내가 무엇을 주랴?”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게 무엇을 주시려면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저의 것이옵니다.” 그랬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자기를 소유함으로써 당신을 한 없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오늘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당신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가 나의 위로입니다. 이 지팡이와 막대기는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용도의 물건입니다. 지팡이는 그 당시에 아주 크고, 이스라엘 목자들이 사용한 것 중에 크고 끝이 이렇게 휘어있는 지팡이입니다. 그것으로서 목자가 자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걸어가기도 하고 그것으로 양떼들을 지휘하기도 하고 양떼가 길을 이탈할 때는 뻗어서 목에 겁니다. 이것이 지팡이의 용도입니다. 이 지팡이가 의미하는 바는 인도입니다. 그러나 이 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양떼를 노리는 맹수들을 지키면서 그들과 싸우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담력을 가진 용사이어야 합니다. 이런 담력과 용기가 없이 삯을 받는 사람들을 삯꾼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전적으로 양을 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양이 전적으로 기를 수 있는 숫자가 안 됩니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양들에게 표시를 해서 다 합칩니다. 이집은 엑스 표 동그라미표 세모표해서 합쳐서 많이 모은 다음 사람 한사람을 고용해서 양들을 먹이라고 맡깁니다. 이 사람은 어차피 월급 받고 고용한 사람이니 자기의 양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평온할 때에는 지켜줍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차이가 편안할 때는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맹수가 옵니다. 혹은 도적이 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버리고 도망갑니다. 삯꾼 목자는 용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는 모두 용사입니다 양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해 목숨도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목양의 전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 자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양을 지키며 맹수의 무리들이 와서 양떼들을 공격할 참이면 바로 이 막대기를 가지고 가서 맹수와 더불어 싸우고 쫓아내며 이 양떼를 지켰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까 수많은 개 같은 인간들한테 에워싸이고 늑대 같은 인간들에게 에워싸이고 맹수 같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자신은 거의 밥이 될 뻔했는데, 그때 자신은 항거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맹수 앞에 있는 한 마리 어린양 같은 처지에 불과했는데 알고 보니까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로 자기를 인도하시던 부드러우신 목자이신 하나님을 이번에 아주 사납게 덤벼드는 맹수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서 막대기로 찌르고 때리시면서 다투어 자기를 보호하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시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위기 속에서 자기를 지키시기 위해 싸우시는 광경을 경험하면서 이 시인이 무릎을 꿇으며 깊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나는 혼자인가,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는 주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주님이 나를 잊으셨는가?’ 라고 낙심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목자이시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인생길을 지났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는 아마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구나. 정말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시간을 지내고 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버리셔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관계를 끊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으로 하여금 돌이켜 당신 한 분만을 돌아보게 하시기 위하여 골짜기에 여러분을 들어가게 하셨으니 거기서 지극한 외로움 속에서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붙들어 여러분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