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앞에 옷을 찢은 요시야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대하 34:19-20)
1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유다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아주 빛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몇몇 왕들이 있습니다. 많은 왕들이 왔다가 사라져갔지만은 참 왕의 자리만큼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에 어려운 자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이 요시야 임금은 주전 620연대니까 유다나라가 망하기 약 40년 전에 마지막 유다의 말하자면 거룩한 신앙의 개혁을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이루었던 인물입니다. 이 요시야와 그 다음에 여호사밧, 히스기야, 물론 아사도 있습니다만 특별히 이 히스기야, 여호사밧, 그 다음에 요시야 이 세 임금이 성경에서는 대표적인 다윗의 길로 행한 임금이었습니다. 이때는 유다 나라가 이제 마지막 쇠퇴기에 접어드는 때입니다. 상황은 이제 이 유다나라를 두고 새로 일어나는 세력인 바벨론과 그 다음에 오래전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애굽세력이 팔레스타인의 지배를 놓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그런 때였습니다. 이미 유다 나라는 썩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앞에는 악하기로 소문난 므낫세 임금이 있었고 그 다음에 암몬왕이 있었고 다 패역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시야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것이 8살 밖에 안 되었다고 했으니까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지 8년, 그러니까 16살 밖에 안 되었는데 처음으로 그 때 그가 뭘 구하기 시작하였느냐면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암몬, 그 앞에 므낫세 왕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철이 들면서 16살 밖에 안 되었을 그 때에 벌써 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하는 세상의 정치술수를 통해서 나라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다윗시대에 다윗과 함께하여 주셨던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셔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다윗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열조의 하나님을 찾은 아사 임금과 같은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이나 또 이 요시야의 개혁이나 공통점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한 가지는 개혁을 쓰자고 하였는데 그것이 철저하게 자기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아래로부터 시작된 개혁이 아니라 위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습니다. 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하자면은 자신부터 개혁해 나가는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동기가 된 개혁과 정치적인 의도가 동기가 된 개혁은 같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것들이 동기가 된 개혁은 언제나 자기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동기가 된 개혁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 개혁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내면적인 이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를 바꾸고 싶어 하고 자기 집안을 바꾸고 싶어 하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데도 결국은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은 바뀌지 않고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하니까 바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을 바꾸고 싶어도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 아무리 분칠을 해 놓아도 병든 사람입니다. 그니까 우리의 속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혁되고 바뀌는 일들이 일어나야지만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처럼 우리의 가정도 내가 먼저 바뀌어야지만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면 얼마나 많은 관계가 바뀌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뀌는 가장 결정적인 비결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꾸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안 바뀌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자신부터 바뀌지 않으니까 교회와 가정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요시야는 철저하게 자기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이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통점이 뭐냐면 우상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이 우상을 타파하는 개혁이 어디로부터 출발하였느냐 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또 요시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을 위해서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 저는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이지만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인격이 정말 고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어려도 무릎을 꿇고 배우고 싶은 고결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공통된 특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들을 아주 깊이 사랑하면서 겸손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말씀이 머리에서는 있는데 심령을 적시면서 자신을 바꾸어 놓지 못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가도 결국은 철저하게 바뀌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가 중에 드 네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 기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 제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 ‘하나님 이 도시를 제가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다음에 ‘우리가정을 바꾸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 바뀌지 않는 저를 좀 바꿔주십시오.’ 이것이 죽을 때 마지막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요시야 역시 말하자면 다윗의 하나님을 찾아야겠다고 하는 결심들을 16살 때 합니다. 중등부 3학년 때입니다. 16살 때.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여기서는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뻔한 것입니다. 역사를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접할 수 있는 최고의 역사가 책입니다. 많은 책들을 읽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토대가 되었던 많은 책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다윗 시대에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기가 왕이 되면서 8년 동안 전개되어 오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뭘 발견하게 되었냐면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왕국에 함께 계실 때이다. 다윗의 시대에 큰 왕궁도 없었고 훌륭한 성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이 되자 솔로몬에 의해서 왕궁도 지어지고 그리고 여호와의 전도 지어진 것이 아닙니까? 훌륭한 왕궁도 없고 훌륭한 여호와의 전도 없었지만 그러나 이 어린 요시야는 역사를 읽으면서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셨던 다윗왕국의 그 위대함을 본 것입니다. 그 위에서 하나의 비밀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왕국에 함께하실 때이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읽으면서 그 어느 시대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이 더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다윗시대를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시야는 결코 다윗이 이루어 놓은 커다란 경제적인 부나 아니면 그 놀라운 영토의 확장에 매료되어서 다윗의 역사를 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 다윗과 동행하셔서 함께 해 주신 그 하나님을 오늘 비로소 구했다고 그랬으니까 이것은 다윗의 하나님을 보면서 감탄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바로 3절 이하서부터 오늘 우리가 읽은 그 앞부분까지 쭉 나오는데 말하자면 신앙의 대대적인 개혁입니다. 이것들이 말씀의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철없는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물론 그 때에는 그 요시야라고 하는 어린 임금 주위에 말씀 중심의 충성스런 일꾼들이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렇지만은 하여튼 8년 동안 그렇게 다스리다가 16살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감화를 얻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시대에 필요하다고 하는 아주 깊은 신앙적인 통찰을 갖게 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 중심의 역사였다는 것, 두 가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의 공통점이 뭐냐면 유월절입니다. 히스기야 때도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요시야 때는 유월절을 아예 기간까지 연장하면서 35장에서 지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결국은 구속사적으로 무얼 바라보냐면 유월절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후에 오셔서 우리를 애굽의 종살이와 같은 죄의 멍에서 구원해 내실 말하자면 예표적인 사건으로서 일어난 것이었거든요. 유월절을 두 왕 모두 개혁의 과정 속에서 유월절이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은 기독론 적으로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는 곳,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아가려고 하는 그곳에는 가장 크게 부각되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애굽에서 자신들을 건져준 사건,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런 신앙의 대대적인 큰 개혁이 부흥과 함께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로 돌아가는 것. 그게 뭐냐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굉장히 깊이 있게끔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개혁, 부흥으로 말미암는 변화,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어제, 오늘 우리가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은 그런 모든 이야기가 아니고 여호와의 전에 연보를 하였던 모양입니다. 연보 돈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꺼내는 과정에서 제사장 실기야가 거기서 우연히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였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어쨌든 그것을 발견을 했는데 그 발견한 것을 가지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그 율법을 쭉 읽으니까 이제 19절과 20절 이하에서 이 요시야 임금의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으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대하 34:18-19) 그랬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 왕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자기의 옷을 찢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시야는 발견된 율법책을 꺼내어서 사반이 읽어주는 그 동시에 즉시 영적인 감각으로 이것이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말씀 앞에서 자기의 옷을 찢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옷을 찢는 것이 결국은 옷이 존귀의 상징이니까 그것을 찢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통분히 여기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도 똑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 자기의 옷을 찢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반이 율법 책을 읽어주는 그 순간 이 요시야는 거울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몰랐었는데 신명기의 말씀이 쭉 들려오면서 말하자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기의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눈앞에 어떻게 여김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암몬과 므낫세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성당들은 훼파되고 성전은 아주 아름답게 수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성대하게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두 왕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신앙의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유다 백성들 중에 경건한 많은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군주가 이 땅에 나왔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이 우리 가운데 오셨구나.’ 경건했던 사람들은 이런 시대에 신앙의 기지개를 켜면서 한없는 기쁨과 자기가 신앙의 본고장인 유대 땅에 태어난 것, 그리고 나라가 갈라졌어도 유다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 것에 대해 한없는 긍지와 보람을 느꼈을 시기가 바로 이런 시기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은혜가 역사하고 있었을 그때에 얼마나 이 요시야 임금이 백성들 앞에 신앙적으로 돋보이고 아름다워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그는 자기 옷을 찢으면서 심히 고통하며 슬퍼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개혁을 하고 놀라운 신앙의 개혁을 이루고 유월절을 지키고 말씀에 따라서 개혁을 한다고 믿고 그리고 다윗의 하나님을 찾는다고 믿는 그런 신앙생활 속에서 자기가 이 유다 백성들을 위해서 이 위대한 개혁에 아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쭐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그는 즉시 자신과 그리고 온 백성들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읽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0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 선생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말씀의 대면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발전과 변화가 없습니다.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섬뜩할 충격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나를 비추어 주는 내 모습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이 이것이라고 알려주시고 계시는구나.’ 섬찟섬찟한 말하자면 충격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은 자극을 받고 변화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요시야가 다윗의 역사를 읽으면서 다윗의 하나님을 찾으려고 크게 결심을 하고 그리고 얼마나 다윗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써왔겠습니까? 그러는 가운데 사반을 통해 들려오는 여호와의 율법을 들을 때에 자기와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하고 그리고 범죄 한 백성들인가 하는 것을 거기서 깊이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때 발견된 말씀이 신명기의 말씀이었다면 그는 조용히 가나안 정복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설교하였던 이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를 다시 한 번 듣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서로 교통하고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 사람하고는 관계가 좀 적을 줄 모르지만 잘 하면 그 사람하고 닮아갑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다윗의 하나님이 자기시대도 그렇게 다스려 주어서 다윗의 하나님이 요시야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던 이 임금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그리고 다윗을 닮아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도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개혁을 주도해 나가면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오는 사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가 깊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에게 들려오는 모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유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잊지 말아라. 잊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주신 것과 하나님이 너희에게 지키며 살 수 있는 복들을 주신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 이것이 너희를 이 세상의 모든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영원한 표니 늘 모세는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할 그러한 필요성을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을 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위로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너는 참 잘 살고 있다, 넌 참 훌륭하다, 임금 중에 너만큼 하는 임금이 어디 있느냐, 주위를 돌아보라, 너 같이 열심히 교회를 다닌 사람이 없다.’ 수없이 말하는 것이 마음에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남의 인생을 위한 예증이나 본보기나 그런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고, 모든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이해해 주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높여준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심은 그리고 외식하는 신앙심은 바로 여기에서 손을 서로 놓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심은 사람의 수많은 판단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확인되기를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인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많은 생각과 내 많은 꿈보다는 하나님이 내 계획을 기뻐하시는가, 그리고 이 일이, 내 마음의 계획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이것이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증인 것입니다. 그는 많은 신하들 앞에 있었습니다. 신하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옷을 찢을 정도였으니까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였던 다윗과 같이 위에서 비천하게 내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자기의 옷자락을 찢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왕의 옷이 찢겨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모였던 수많은 신하들이 얼마나 커다란 도전을 받았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이 요시야의 임금 앞에는 사반도 없고 실기아도 없고 많은 신하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뢰와 같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만이 자기의 이런 모습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비록 산당을 헐고 수많은 아세라 목상과 바알신상을 쳐부수고 그리고 내가 성전을 새롭게 수축하였다고 할지라도 나와 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도다.’ 이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무엇 때문에 살려고 합니까?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최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끝없는 줄다리기를 벌인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내 뜻대로 살고 싶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도 내가 아는 상식의 범위 안에서 내가 아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제가 제2계명을 하면서 오늘날에도 유행하고 고등한 우상숭배에 대해서 여러분께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날은 구약에서 보는 그런 의미의 우상 숭배를 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복을 준다고 그러니까 부처상이나 아니면 남여호랑계교의 그 상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보다 훨씬 더 고도로 발달한 그러한 교묘한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속에서 그려내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내 이름은 여호와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어쩌면은 혹 잘못하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섬긴 인생이 아니라 부지런히 우상을 섬긴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비추어 질 수도 있습니다. ‘네가 열심히 섬기었다마는 그러나 네가 섬긴 자는 내가 아니었노라. 나는 그런 여호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우리의 뜻대로 사느냐?, 주님의 뜻대로 믿느냐, 우리의 뜻대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얼마든지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공경하고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들은 얼마나 우리가 인색한 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헐떡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망의 줄이 자기를 두르고 수많은 핍박자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헐떡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사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율법을 간절히 그렇게 헐떡거리면서 사모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지식이나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기 위해서 아니면 우리가 진심으로 그 뜻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 하는 것인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말씀, 말씀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믿어야 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구호처럼 외치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헐떡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너무 소수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심으로 살고 싶어 하는 사모하는 마음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반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 왕은 하나님 앞에 순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혹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과 같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후우~ 하는 소리가 나지만은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들은 것이나 안 들은 것이나 그렇게 지나가고 있지나 않은지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하는 말이 삶의 방식을 바꾸면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뛰어난 효능은 무엇이냐면 무작정 능력을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작정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보다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인 무엇이냐면 우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을 길러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많은 대화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이 여인은 무얼 느꼈냐면 자기가 이 허름하게 생긴 유대 땅에서 온 이 선지자와 같은 선생 한 사람 앞에 벌거벗겨지는 것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문제를 찔러 내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을 지적해 냄으로써 이 여인이 일시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아하,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이었구나.’ 다섯 번이나 면사포를 쓰고, 그리고 지금의 이 남자도 사실은 내 남자가 아니고 생각을 하면서 그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하, 나의 살아온 모든 길은 죄밖에 없었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 여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예수께서 주시는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진심으로 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수련회를 앞두고 우리의 최대의 기도의 제목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게 어제도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배가 고플 때 시장에 가면은, 음식점에 가면 이것도 시키고 싶고, 저것도 싶고, 막 시키고 싶습니다. 꼭 음식이 남습니다. 근데 배가 부를 때 가면은 조금만 시키게 되잖습니다. 마찬가지로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없으면 아무리 잔치를 벌여놓아도, 여러분, 바울이 누구였습니까? 그래도 바울도 인간이니까 어쩐 때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설교 시간 때운 적이 있었겠지.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서 열심히 졸다가 떨어져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함께 아래서 졸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은혜를 받는데 한 사람은 위에 올라가서 졸다가 떨어져서 죽은 것입니다. 마음에 가난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림의 떡입니다. 원하지 않는데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심령의 가난함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심령의 가난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 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남으로 가는 어느 교회에서 그렇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를 하고 나오는데 설교 중의 한편이 제 기억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은 그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가 설교 한 편 속에 있었습니다. 설교를 다 듣고 그리고 다 집에 돌아갔는데 11시가 훨씬 넘었는데 자기네 교회 전도사님에게 이 자매가 전화를 했습니다.. 전도사님, 오늘 집회를 하고 나니까 계속 자기 마음속에 파고드는 고민이 있는데,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오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자기가 바로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거울로 비추는 것입니다. 그 때 고민도 하게 되고, 그 때 무언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갈망이 괜히 생겨나게 되겠습니까? 말씀이 자기를 비추어서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절망적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게 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잖습니까? 어느 분은 그런 고백을 합니다. 성경에는 죄보다는 은혜가 훨씬 더 많이 나왔으니까 죄를 너무 많이 설교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를 합니다. 은혜를 설교하는데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를 보호해 주신다, 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야지 할 텐데 하는 마음의 고통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다.’ 나는 그런 용서 필요로 한 적도 없는데 감격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확신하지 못하는데 사죄의 확신이 그에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이제 너를 용서하시고 이제 너를 안아 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그에게 기쁨이 되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뛰어난 효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의 이 요시야가 16살이 되던 때에 ‘나는 이제 다윗의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 결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영적인 변화는 그 이전에 벌써 일어났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면서 우리민족의 소망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혀버린 다윗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을 때에 뜻 있는 정치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왕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해 줄 리가 있었겠습니까? 큰 도전을 느끼면서 다윗시대에 살아계셨던 그 하나님을 찾기로 깊이 맹세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찾으신 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생 사는 동안에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의 자리를 떠났을 때에 하나님은 결코 삐치시거나 우리를 향해 돌아서신 적이 없습니다. 사명의 길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멀어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우리가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산 속에 숨을 지라도 우리를 기필코 찾아내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는 우리들은 우리의 일생의 신앙생활 가운데 정말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찾고 갈망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의 시간동안을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안 되겠다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때가 있는지 한번 합계를 내보면 몇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제가 부산인가 대구인가 어딘가 설교를 하러 갔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비행기를 놓쳤으니까 우리는 그냥 측은한 얼굴로 다가가서 다음 비행기 대기 순서에라도 올려놓아 달라고 최대한 긍휼을 구하는데 거기 젊은 처녀 하나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그 비행기 표 파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카운터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면서 우는 거야. 자기는 비행기를 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이 자매 눈에는 비행기 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막무가내야. 자기는 비행기를 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막 목 놓아 우는 것입니다. 내가 조종사라면 화장실에라도 태워가지고 가고 싶은 심정이더라고. 그렇게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야할 그 곳, 만나야 할 사람을 제 시간에 만나지 못하니까 그만한 이유를 가지고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비행기 매표구를 붙들면서 한번만 태워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그런 애원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적이 얼마나 있느냐 이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을 해봐야 정말 이 세상의 계산으로 따져보면 정말 수지가 안 맞는 장사입니다. 구원시켜 놓으면 그때부터 잠깐 그 자리에 앉아서 무얼 좀 잘하나 그러다가 즉시 마음에 딴 생각이 들어서 세상 그리워하고, 그리고 세상에 가서 살려고 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안 드리고 몸만 교회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다가 또 깨어지고, 이러면서 사는 것이 태반인데 이 세상의 계산으로 보면 하나님 장사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사람을 건져내어서 그래서 우리를 구속해 주셔서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이 일을 계속하시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간절히 찾으시고 하나님에게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고 즐거움이 되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 하나님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찾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참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 요시야는 마음속에 늘 다윗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임금이 되기를 원하는 사모함이 분명히 그에게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윗이 지은 시들도 즐겨 애송하며 읽으면서 고난과 위로와 슬픔의 때를 지났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던 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그는 그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악 덩어리인 것처럼 발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거시는 기대, 하나님이 내 백성, 내 나라를 향해 거시는 기대가 이렇게 크고 놀라운데 내가 이제껏 산 것이 정말 산 것이었던 것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심령이 깨뜨려진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통회하고 심령이 깨뜨려져서 상하고 문드러진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고 다윗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깊은 죄 가운데 사함을 받고 다시 한 번 회복해서 하나님이 거룩한 은혜의 세계를 맛보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스러운 은혜의 세계의 어떠함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 주었던 놀라운 영적인 사람,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왔던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요시야를 보십시오. 그는 다윗의 하나님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다윗처럼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요즘 말로 말하자면 정말 부흥을 꿈꾸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 모든 악한 아세라 목상과 아로새긴 우상을 그냥 철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깔아 뭉개가지고 그냥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 상들을 찍어 버리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그 대대적인 우상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실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새롭게 수축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모아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바로 이 힐기야에 의해서 발견된 하나님의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의롭다 할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은혜 받는 일에 최고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역사가 흘러가도 변함이 없는 은혜 주시는 법칙을 가지고 계셔. 그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잠시는 높은 곳에 고여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기회만 생기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오고야 맙니다. 가득 차면 넘쳐서라도 흘러 내려오고야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손이 자기의 심령을 만지고 지나가 주셔야할 간절한 필요를 느끼는 그러한 상한 심령을 가진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바로 무엇이냐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 그리고 실패를 운명처럼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러한 삶들을 미워하면서 나를 얽어맨 죄악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이런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옷을 찢으면서 주저앉았습니다. 옷을 찢으면서 그는 분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 무릎을 꿇은 요시야의 모습이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 받은 사람들과 간증을 나누다 보면 아주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가난해져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되게끔 만들어 주시는 과정이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기 전에 항상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매우 여러 번 집회를 다니고 또 제가 이렇게 수련회를 데리고 가고, 또 여름집회를 계획을 하고 그러면서 저는 하나의 감각이 생겼습니다. 이전에 교회 섬길 때도 보면 수련회를 이렇게 갈 때가 되면 비록 어린 학생들이긴 하지만 오래 전부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그 모습을 보면 거의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올 여름 수련회에 어느 영혼을 위해 역사해 주실 것인지 찾아냅니다. 수련회 광고를 듣는 순간 왠지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어느 형제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삶과 죽음을 오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간절해지겠는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후일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은혜를 받고 내 앞에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너에게 주었건만 너희는 그 기회를 어떻게 살았는가 하나님께서는 물으실 것입니다. 헐떡거리며 한모금의 물을 구하는 사슴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하나님이 오셔서 내 심령을 만져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수련회를 앞두고 준비하는 최대의 준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은 지금 제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나를 보시면서 기쁨을 느끼신다면 그 기쁨을 나도 느끼게 해주시고, 주님이 내 모습을 보고 아픔을 느끼신다면 혼자만 아파하지 마시고 그 아픔을 나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그 증거가 뭐냐면 어느 한 순간에 우리가 회개를 하게 되잖습니다. 자기가 전체적으로 살아온 삶에 대해 깊은 회개를 하게 되잖습니다. 그 깊은 회개를 하게 될 때 가슴에 파고들어오는 것이 뭐냐면 아픔입니다. 아픔. 그 다음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런 감정들이 결국은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니까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불쾌하고 아픈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어느 한순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각성과 하나님의 마음은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그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지 짧은 순간이라도 즉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간절한 갈망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늘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비추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나 그렇게 살 힘이 없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고자 하지만 어느 길이 길인지 알지 못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마귀가 조롱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조롱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그곳으로 돌아가는 변화되는 역사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들을 갈망합니다. 그런 간절한 갈망들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죄의 깊이와 상관없이. 죄의 높이와 상관없이, 침체의 깊이와 상관없이, 그의 어떤 도덕적인 결함의 넓이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에게 만져주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그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정도에 절대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변함없는 법칙들을 우리에게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하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이러한 반론을 제기하고 계실 지도 몰라요. 나도 목사님이 말하는 것 같은 것 많이 해 보았습니다. 열심히 찾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습디다.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다고 생각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감격이 없으면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반항심 같은 것이 생겨납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과 하나님에 대한 패역한 반항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은혜와 변화를 경험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셨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지내오면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품는 것이 백지장 한 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은혜 받고 나서 한참 후의 일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인데 객관적으로 누가 보던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사람인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자꾸 본전 생각을 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아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는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자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찬송)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정말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꼭 해보고 싶은 스포츠가 하나 있는데 활 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망원경 달린 것은 별로 재미가 없고 안 달린 것, 국궁. 이렇게 쭉 겨누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어느 잡지의 인터뷰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활을 쏘기 전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고 그러니까 시위를 잡아당길 때에 그때 그 표적 하나만이 눈에 들어오는데 내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들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몰아의 지경으로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은 것만큼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찾으셨습니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내기 위해서 하늘의 별을 넘어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시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지 않나봐, 하나님의 은혜는 이제 다 하였는가, 하나님의 긍휼은 이제 다 끝이 났는가, 이런 생각들, 마음에 스쳐가는 한두 가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일들이 좌절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자들을 결코 거저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 속사람에게 계속 일깨워 줘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반역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아에 대해서 엄하게 책망해야 됩니다. 격렬한 감정을 가지고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미워해야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속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패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충족한 은혜가운데 생활하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다양한 핑계들을 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 보기를 거부하고 그리고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하려는 이러한 생각을 얼마든지 유혹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이러한 생각을 죽일 수 있습니다. 격렬한 감정을 가지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히 네가 내 속에서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이러한 생각을 하다니 죽어라 그러면서 칼을 겨눌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요시야 임금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얼마나 애통하고 슬퍼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요시야 임금이 바라던 바였고 꿈꾸는 바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맛보고 싶어서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야지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모르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반을 통해서 들려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과 같이 우뢰와 같이 이 요시야 임금을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세워다 주었습니다. 자신과 그리고 그 백성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위대한 종교적인 개혁과 위업을 이루었고 오랜만에 유다나라에는 히스기야 이후에 끊어졌던 신앙적인 분위기가 되살아났지만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요시야 그는 믿음의 임금이요, 다윗과 같은 군주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은 그러나 이 요시야는 그런 모든 칭찬과 사람의 모든 인정에는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옷을 찢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백성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도전받는 기도의 제목은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우리는 눈멀어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 보여 주시옵소서. 꿈에라도 보여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누구의 음성을 통해서라도 알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처럼 말씀 앞에 드러나는 내 모습을 통해 아파할 수 있는 그런 가난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어떤 놀라운 일이 나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