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교회 사경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다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1-6)
녹취자 : 허혜숙, 최영순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였고 이어서 2절부터 하나님이 왜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를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가슴 벅찬 감격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마지막 6절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이 시인의 미래의 삶에 대해 결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단하는 장면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있겠습니다, 거하리로다’라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고백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는 확신을 표명합니다. 그것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것이 필연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이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또 따르리니’, ‘추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사일을 쏘면 미사일이 맞추고자 하는 비행체를 따라가서 그 물체가 회전하면 미사일도 같이 따라가면서 회전하고 결국은 가서 부딪쳐서 폭발을 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추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추격 하냐 하면 선과 인자하심이 추격할 것입니다. 이 확신을 고백을 한 그 토대위에 자신의 미래의 삶을 결단하는데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이 위대한 시는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우선 이 확신을 잠깐 다룬 후에 마지막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시인이 확신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자기를 끝까지 따라오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한 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2절부터 계속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이 있는 인격적인 체험의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게 된 과정 속에서 생겨나게 된 확신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나오는 ‘선하심이 나를 따르리라’에서 ‘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토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계속 반복이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혹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로 창조의 기록이 끝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좋았더라’라고 하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유상한 선에 대한 담론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자, 그럼 도대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선과 악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기준이 없으면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 지 알 수가 없죠. 그러면 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인류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해 온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도덕의 가치는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인류를 생존시키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을 분별할 수 있는 지각을 주셨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히 붕괴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치라는 것이 통하고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통하게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도 도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양심에 대한 설명입니다. 양심이 그것을 인식함으로서 사람들이 선과 악에 대해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선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선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선은 우리에게 이득이 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좋게 하는 모든 것은 다 선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아주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안목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것도 자기가 정말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기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선의 기준도 다분히 출렁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것들이 유행과 같아서 상당부분 움직이고 일관성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 사회 속에 아주 깊이 베어가고 있고, 오늘날은 기본적인 현대정신 자체가 이런 도덕 기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품거나 부정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보면 마이클 샌던이나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깊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마이클 세븐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작품이 수십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것도 들어보면 마지막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없다고 보니까 도덕이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 노상에 방뇨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피해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도덕률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이미 그 도덕률 자체를 그 기준이 되는 토대자체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달하게 된 것이 공동체가 합의를 이뤄서 분명한 합의를 세우면 그것이 하나의 정의의 기준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사회가 미국이나 이런 나라처럼 개방되어 있고 활발하게 토론이 이루어지는 민주적인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이런 논리가 통용이 된다고 보는데 이렇게 미개하고 민주주의가 발달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활발한 개방적인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동체 합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1936년도에 베를린 올림픽을 할 때에 국민 지지율이 93.7%였습니다. 이후 독일 정부 중 아무도 그 기록을 깬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칼을 갖다놓고 ‘지지하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그런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원해서 추대한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해서 정치적인 상징적인 조작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런 독재정권들을 정당화 하는 합의라는 미명아래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험한 논리와 요소들을 그 안에 갖추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보느냐, 결론만 이야기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이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좋게 대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고 살 때에 고통을 받게 하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운명적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당신의 계명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의 효과를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거기에 보상을 해 주셔서 명예를 보상해 주든지, 건강을 보상해 주든지 그런 것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비록 철학적으로 선이 무엇이고 선함이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인 담론을 이해는 못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향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계명입니다. 저는 이 계명을 징검다리라고 생각합니다. 시골에 가보면 다리를 놓지 못할 때 큰 바위를 갖다놓고 다리를 건너는 징검다리를 만듭니다. 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 특히 겨울에 건널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건너야 합니다. 잘 못 건너면 빠져서 겨울에 개울에 빠져서 쳐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리 안 보고 돌멩이 하나만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징검다리는 개울 권두로 만들어져야지 그러니까 하나씩 하나씩 건너서 마지막에 개울을 건너는 자신의 의지를
그러니까 머리 좋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는 머리가 나쁘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되고 이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보여도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복 받고 행복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한 걸음 한걸음 계명을 지켜서 가면 자기는 철학이나 거창한 사상은 없었어도 정확하게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이것을 믿고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것, ‘자, 내가 선하니까 내 뜻대로 살아라’ 하는 그 뜻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음심의 목적,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나를 지으신 목적,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지금 이 두레교회의 교인이 되게 하심, 태어나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이 지체들을 만나게 하시고 이 집안에서 내가 아들로 딸로, 어머니이고, 아버지이고, 자녀들이고 내 할아버지이고, 이런 하나하나에 대한 우리의 위치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모두 수렴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마지막으로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충만한 신성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술가들이 작품을 창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세계를 창조하셔서 당신의 지성과 의지가 이 창조세계 안에 어떻게 드러나는 지를 보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알고 그 분의 형상에 닮아 창조 된 것에 기뻐하며 그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들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살아갈 때 그 아름다움은 관계 속에서 추론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 같은 사람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우리 같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당신에게 손해가 되십니까? 마치 손해가 되시는 것같이 우리를 위협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정확한 구절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내용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보고 너희는 나를 사랑하라 하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으면 모자란 것이 되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충분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지만 행복해 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렇게 하면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면서 가치와 존재의 그물망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트웍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내 주위에 인류가 있고 공동체가 있으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용이 되는 것이지 이 그물망에서 나를 떼어놓고 어둠속에 던져놓고 내가 누구냐고 할 때에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신본주의적인 그 지점에서 그래서 거기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것은 하나님이 그 시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한 번에 보시면서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좋았던 것도 포함되어 있고 지금 좋은 것도 포함되어 있고 앞으로 좋을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이 자연을 경작하고 가꾸고 흙을 일구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사랑하면서 사는데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인류의 최종적인 모습은 우리 모두가 모두를 향하여 인간이 모든 인류를 향하여 너는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모든 인류가 이런 고백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의 세계에서 인류가 이렇게 자원을 소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연을 적절하게 가꾸어서 이 자연 속에 잠재되어진 아름다움을 인간의 노동을 보태서 이것들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그리고 인간 속에서도 인간의 노동과 지혜를 하나님 안에서 더하여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들을 실현하면서 더 아름다운 인류 공동체가 되어 가는 것, 이러면서 이 아름다움은 점점 더 증대되어 갑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창조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증대됩니다. 그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그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도 되었고 마지막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목적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결국은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인류와 다른 인간을 지으신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선이 되어서 하나의 기준에 부합될 때에 그 기준이 선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부합되지 않을 때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시편에 콩밭에 콩을 뿌린 것처럼 많이 나옵니다. 그 하나하나의 말이 어마어마한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 속에서 나오는 시인들이 창조의 제일 큰 제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의와 은혜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하심에서 비롯되는 지주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선하신 하나님은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나머지 작은 은택들은 거기에서 비춰오는 햇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그렇게 위대한 찬송을 드리고 가슴 벅차 하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평생토록 나를 추격할 것입니다. 미사일처럼 내가 어디로 가든지 그 선은 나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까? 왜 양식이 없어서 제사장밖에는 못 먹는 진설병에 손을 댈 정도까지 그렇게 배고프고 곤고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죽은 자와 간구한 자 사이에서 자기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다고 했던 이야기는 언젠가는 죽은 것 같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런 고백 자체가 우리에게 모순처럼 비춰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는 그 자체가 어두움이 되어서 거기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신 것이 많은 비췸입니다. 이 세상에서 궁핍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가 돈 못 벌고 궁핍해 졌어요. 그런데 궁핍한 것은 우리가 한 일이지만 그 궁핍 속에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정신 나간 사람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면 선하실수록 그것은 고통의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칼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주일날이나 수요일 날 목사님께서 올라오셔서 주의 말씀에 순종 합시다 하는 말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간절한 간청입니다. 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승진이 날 따라다닐 것입니다, 주식이 날 따라다닐 것입니다, 부동산 경기가 날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사업해서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증거가 될 수 있지만 그렇게 안 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증거가 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강가에서 헤엄쳐 보셨습니까? 물이 약간 빠릅니다. 그 때에 위에서 보면 빠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느껴집니다. 몸을 물에 띄우고 물에 떠있으면 물의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몸을 돌려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할 때 비로소 팔이 빠져라 저어 봐야 물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가 느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면 그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선하게 살라고 하신 그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못 느낍니다. 내가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면 그것이 신앙생활인가 보다 하는데 한 번 정신이 휙 돌아서 하나님의 배양하면서 살아가면 그 때 비로소 이렇게 꼬이고 한없이 고통을 받고 괴로움에 사로잡히면서 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하신 성품을 거스르며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오다가 계곡으로 굴렀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고 자기만 살았답니다. 간증을 하는데 생애 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깜짝 놀랄만한 충격적인 사건을 가지고 깨달았다는 진리는 너무 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된다, 하나님 명령 어기면 혼난다, 이렇게 아주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초보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애 적으로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항상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간증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돈 버는 비결은 이렇게 말로 할 때 깨닫고 깊이 느껴져서 살 때 이것이 돈 버는 것입니다. 목숨이 경각까지 가고, 사업을 다 말아먹고, 부부가 이혼 직전까지 가고, 암이 걸려서 죽니 사니 왔다 갔다 하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과외비를 지출하면서 깨닫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그를 거스르며 사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에게 악으로 돌아온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돈이나 성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단서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거슬러 살면 그것이 악으로 돌아온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시인이 이런 난관을 다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당신을 깊이 신뢰하며 사랑하며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이 파란만장한 세계를 지나면서 확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이웃에게 악을 행했을 때 이웃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기 전 제일 먼저 손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자식이’ 하면서 혈기를 못 누르고 한 번 주먹을 날렸을 때 옥수수가 서너 개 확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먹이 날라 가서 부딪혀서 옥수수가 빠졌지만 이 사람 마음속에는 주먹이 날라 가기 전 참지 못한 혈기가 확 솟구치면서 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고 이 후에도 같은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습성을 갖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최초의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 누군가가 이웃에게 선을 행했을 때 가장 먼저 해택을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믿는 확고하게 믿는 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혼 날까봐, 혹은 이렇게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뭔가를 주실거라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는 무제한의 순종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무제한의 순종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당신이 기르는 한 마리의 어린 양입니다’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과 복종하는 마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따를 때 청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 이하의 모습을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바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라’ 이 인자하심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헤세드’는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무제한적으로 베푸는 자비, 그런데 이 자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사람을 좋아할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얼굴이 예뻐서, 혹시 친절하게 해 줘서도 좋아할 수 있잖아요? 또 저 사람이 늘 오기만 하면 먹을 것을 챙겨주고 그래서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해요. 이런 것들은 물론 그런 것들도 사랑이지만 더 차원 높은 사랑은 저쪽에서 오는 어떤 대가를 혹은 나에게 오는 어떤 이익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높은 수준의 사랑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일주일에 동냥하는 거지들을 모두 모아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250명씩 모이는데 모이면 항상 점심 주고 돈 오천 원씩 줘서 보내고 겨울에는 내복 줘서 보내고 하는데 간혹 보면 행색이 너무 멀쩡하신 분이 그 거지 교회를 나오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연세가 많으시니까 그 사람한테 ‘아이고 댁은 신수가 멀쩡하시고 먹고 살만 한데 왜 여기를 나오시오?’그랬더니 그 사람이 옷은 이렇게 멀쩡하지만 자식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했답니다. ‘그 자식이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은 자기를 버렸지만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남아있어서 자신은 버림을 받았어도 자식이 부모를 버린 놈이라는 낙인을 이웃으로부터 받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일본에도 고려장 풍습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노인이 되면 갖다 버리는 것이 고려장 아닙니까? 에스키모인들은 부모를 업고 가서 묻는 것이 아니라 야생짐승들이 많은 곳에 재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조용히 기다리면서 맹수들의 습격을 받아 뜯겨 먹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자식들을 배부르게 하는 짐승의 먹이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풍습입니다. 동구 밖에 버리면 노인네가 금방 찾아오니까 못 찾아오는 곳으로 멀리 갖다 버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를 업고 아들이 가는데 어머니가 자꾸 위에서 장난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 제발 그러시지 말라고 하는데 위에서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계속 꺾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내려놓고 가려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길 잃어버린다, 길을 잃어버리거든 나뭇가지가 꺾어진 그 길로 가거라.’이런 것들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자식을 향한 사랑입니다. 자식 앞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베푸시는 사랑은 ‘헤쎄드’가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도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헤세드이고 그런 헤세드의 사랑을 언약관계 속에서 입은 사랑을 하씨드인데 이 하씨드가 성령입니다. 여기에서 이 ‘헤세드’라는 단어 자체가 1절에서처럼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른 것처럼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님이 자신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셔서 자신을 그 언약관계 속에 불러들여 주셨고 하나님은 이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사랑의 성품을 충분히 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선하심을 그 백성들에게 충만하게 베풀어주시는 그 언약관계 안에 있는 이 헤세드가 가장 찬란하게 나타난 것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시인으로서는 목이 메인 고백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순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신학자요 선지자요 정치가였지만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죄성을 모두 드러내면서 간음과 교만 죄까지 다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나의 죄악이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울먹이는 마음으로 마지막을 고백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기필코 나를 추격하고야 말 것입니다’ 왜? 그것은 나의 상태와 나의 조건 속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의 그 모든 사연들을 안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합니다.
(찬송)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여러분들은 분명히 여러분 마음속에 질문이 많을 것입니다. ‘목사님, 나쁜 일을 당했는데도 정말 좋을까요?’ 결국은 나쁜 일이다, 좋은 일이다 하는 것은 나의 행복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런 판단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제가 고난주간에 질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내내 심방을 합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이 혈액암으로 입원을 하셨는데 병원에 갔는데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지 구분이 안 되었습니다. 목사인 저를 계속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행복으로 꽉 차서 자기는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 동생이 있어서 예수를 안 믿는데 오빠도 나처럼 되어보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 지 알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을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곧 죽습니다. 라고 하는데 얼굴에는 놀라운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는 어떤 사람들에게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선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자비롭게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면서 그 인자하심의 계획에 부합하며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실제적인 자비하심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이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 세상의 저 자연이 파괴되었고 정치를 사람들이 거지같이 하는데 나도 가슴을 찢을 듯이 괴로워서 잠을 못 자겠어’ 솔직히 양심적으로 손을 얹어보면 아니잖아요? 나의 간절한 뜻이 있는데 이것들이 좌절이 될 때 깨끗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매달렸는지 안 매달렸는지는 상관없이 내가 이것이 안 됐다는 것이 괴롭고 자존심 상하고 내가 저 인간보다 안 됐다는 것이 가슴 쓰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정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정욕은 두 가지인데 좁은 의미에서 사용되면 성적 욕망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면 더 많이 쓰이는데 그 중심이 자기를 주인 삼은 삶입니다. 모든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자기 사랑과 자기 보호본능을 가졌는데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사랑은 아주 높은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양식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고 그 정도 이상입니다. 그 목적이 하나님을 배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날 때에 하나님의 선의 바다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 분께 모두 맡기고 자신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땅 따먹기 할 때 분리 작업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나니’ 왜? 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화를 너무나 찾고 싶지만 거기에는 평화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따라서 창조되었고 그 분의 계획과 목적을 따라 살아드림으로서 그 분이 나 한 사람 때문에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가 티끌만큼이라도 좋아진다면 하나님 앞에 이바지하며 사는 삶이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돈은 남 주려고 벌어야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는 말이 애들이 공부를 안 하면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는데 남 주게 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이웃을 이롭게 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도덕적으로 아름답게 하는데 이바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을 목자로서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에 항상 선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뜻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고 거역을 하면서 안 살 때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고통을 주십니다. 그리고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만드셔서 결국은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았던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던 방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안 방법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은 두 범주로 나뉘는데 하나는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일이 참 잘 되더라, 애를 낳았는데 머리가 참 좋더라, 같은 병원에서 낳았는데 저 쪽에는 공부도 못하는데 우리 애는 공부도 잘하더라, 저쪽 애는 견적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 애는 잘 생겨서 견적이 안 나오더라, 이런 것들은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주시는 복입니다. 그 영혼에 용서의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용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몰려오는 인생 말년에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흐느낍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하시려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쓰나미처럼 확 밀려옵니다.
(찬송)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도 너무 너무 강조하는 것이 마지막에 죽을 때도 유언하고 싶은 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우리 교인 중에 15년째인데 한 번도 집사로 임명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연말에 심사를 합니다. 교역자들을 다 모아놓고 이 사람은 집사를 시켜도 되느냐 심사를 해서 임명을 합니다. 그리고 벽보를 붙입니다. 다음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면 1년 동안 집사로 임명할 마음이 있다 원한다면 신청을 해서 한 달 동안 교육을 받아라, 광고를 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응답을 안 하면 우리는 임명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집사를 시켜놓고 교역자들이 ‘집사님, 요즘 왜 교회 안 나오세요?’물어보게 되는데 그것이 불신자지 어떻게 집사입니까? 5년씩 집사가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 밑에 있던 사람들도 다 집사가 되면 자기의 생각도 바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가 하기 싫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직분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도 인격적으로 자기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신앙은 안 들어갑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자기 반응이 있어야지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복이 되어서 내가 당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신앙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날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 최소한 이런 자세는 되어야지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티끌만큼 신앙을 가져도 좋으니까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적인 신앙이란 알아야 인격적인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사랑에 대해서도 아, 이런 사랑이 있나,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구나, 하나님이 없다고 했던 많은 날들이 알고 보니까 내가 하나님 가슴에 칼 꽂고 등 돌리고 나쁜 짓하면서 불순종하면서 죄 지으면서 내가 어려운 일 만난다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살았구나, 이것은 인격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거기에서 요만큼이 나와도 진짜 인격적인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신앙이 이 시인의 가슴속에 꽉 차서 터질 것 같아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이 하게 되었을 그 때에 이 시인이 이 세상의 흔들 수 없는 방식, 하나님의 선과 안지하심이 나를 추격할 것입니다. 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나를 바라볼 것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살다보면 인생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혼란스러워지고 상황이 막 복잡해서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두 가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악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시려고 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맑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인도하여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게 확신을 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시인이 결심한 것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런 노래를 합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전입니다. 그런데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 지어집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때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곳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성전은 필요했지만 늘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동식 성전을 지으라고 설계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대로 성전을 짓고 끝나고 나면 다 싸서 짐 보따리로 이동을 하고 다시 여기에 멈추라고 하면 다시 멈춰서 성막을 치고 주위에 진을 치고 생활을 하던 곳이 여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집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집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자리에 하얀 헝겊으로 울타리가 쳐지고 번제단이 있고 텐트가 있는데 열여덟 평짜리 텐트입니다. 그 열여덟 평짜리 텐트는 다시 두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서 앞에서 열 두 평짜리 앞에 성소가 있고 휘장을 지나면 여섯 평짜리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위를 싸고 있는 가죽이 있었는데 해갈의 가죽이라는 물 돼지의 가죽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물돼지의 가죽을 가공을 해서 천막을 만들었는데 끊임없이 햇빛이 내리쬐고 비가 오고 이 태양 빛이 비추고 하면 세월이 가서 색이 바래서 그것들이 거무튀튀한 색깔들이 됩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술람미 여인이 자기의 피부 빛을 가리켜 말하기를 성전의 물 돼지 가죽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남이 보기에 아름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부에 들어가 보면 아주 화려한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주일날 옆구리에 성경찬송 끼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보는 인간들이 참 많습니다. 이 좋은 공휴일을 그것도 하필이면 열 한 시, 그리고 교회에 가서 점심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데 뭐가 재미있는 삶이냐? 심지어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더 일찍 나와야 합니다. 더 일찍 나가서 밤늦게 까지 봉사하고 오는데 그것이 도대체 뭐냐?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공휴일 날 가족들과 야유회 가려고 하면 항상 공휴일은 교회에서 뭔가 행사를 만들어서 얽어매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아는 자매 하나가 등산을 하려고 돈 들여서 예쁜 등산 장비를 샀는데 한 번도 못 썼습니다. 그것을 사다놓고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된 것입니다. 변화를 받고 나니까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일이라서 못 가고 공휴일 날은 교회 행사가 있어서 못 가고, 그러면서 20대를 교회에서 다 보내고 나니까 추억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너무 한심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알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2주 동안에 480페이지짜리 책을 쓰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정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전도사 생활을 13년 동안을 했었습니다. 견딜 수없이 가난하고 고통 받고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물 돼지 가죽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찬송)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래서 그 물 돼지가죽 같은 껍질의 삶 말고 그것을 비집고 들어가 보면 많은 것을 느낍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삶, 이것은 우리 인생에 항상 맑은 날만 보냈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맑고 행복한 날은 그런 날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히시는 은혜와 사랑이 너무 많고 폭풍의 흑암 속을 지나는 것 같은 날은 또 그 폭풍과 흑암 속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혼자 헤쳐갈 수 없는 길이 될 때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의 손을 붙들 때 하나님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은혜로운 비밀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주셔서 인생의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와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인생의 길을 지나게 하심으로 결국은 인생에 주님을 붙들고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것들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빛바랜 앨범을 들추는 것처럼 회고를 해 보면 수십 년의 간격을 넘어서 ‘아, 그때는 그랬지,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셨지’ 하는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면서 다시 우리의 마음이 정동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실 그런 신앙생활의 기쁨을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기쁨의 비밀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면 신앙은 마치 신앙생활 하는것이 진짜 살 기 싫은데 애들처럼 못 헤어지고 억지로 묶여져서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부부의 행복, 어디를 가면 그립다 그런 말들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그렇지 못했는데?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외형적으로 교회 출석하고 십일조 하고 그냥 그렇게 끌려서 교회 다니는 이런 것은 신앙생활의 진수가 아니라 껍질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깊이 들어 가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님이 수박을 맛있는 것을 하나 사 다줬습니다. 제 동생이 그것을 하루 종일 기어다니면서 핥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수박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죠? 수박은 쪼개서 그래서 빨간 속살이 드러나고 풍성한 수박의 즙이 나오는 거기에 입을 대고 먹을 때 수박의 진수를 알게 되듯이 신앙생활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니라’ 그 속에서 깊이 체험을 하면서 남들이 보기에는 물 돼지가죽 같은 정말 재미없는 인생살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 그 안에 충만히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습니다’라고 할 때에는 단순한 장소적인 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 하나님의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뭐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 하늘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이 지은 이 전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겠사옵니까?’ 이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을 가둘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 하나님의 집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 때문이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일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당신을 경배하며 살아하며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그 모임가운데 함께 계셔서 당신의 친절과 자비, 사랑과 선을 충만하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셔서 언약백성으로 맺으셨는데 이 언약백성의 외형은 언약의 체결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체결된 언약 안에서 우리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실제적인 공동체 의식을 이루게 하는 것은 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한 장소에서 한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언약을 받은 함께 살아가야 할 한 백성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이 발달되어도 이것들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경배함으로서 한 순간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와 동일한 사랑을 경험하고 우리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을 안 하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꾸준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가뭄에 콩 나듯 나오면서도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자, 우리는 지금 여섯 절이나 달려왔습니다. 자, 이렇게 긴 시간동안 여섯 절을 달려왔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인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공급해 주시는 은혜에 감동하고 주님 때문에 영혼이 소생되어서 의의 길로 걸어가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실망하지 않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부음을 부으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한 몸에 받았을 때 우리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목회자로 소명을 받아 신학교에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역만리 선교지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집사로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삶의 모양이고 양식에 불과합니다. 실제적으로는 그냥 그렇게 하나님에 집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거대한 심포니를 마지막 소절에 와서 기타반주로 맞추는 것처럼 시시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이 지상생활에서의 최고의 아름다운 행복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여러분들이 자신의 집하고 교회를 별로 상관을 두지 않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통수단이 좋으니까, 안산에서 우리 교회에 오는데 25분밖에 안 걸리고 일산에서는 40분이면 옵니다. 그러니까 정말 좋은 세상에 있지요. 그러나 옛날에 보면 차를 타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다 걸어갔습니다. 목사님들도 차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심방할 때도 다 걸어서 다녔습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몰렸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어디를 찾습니까? 교회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너무 괴로운 일이 있으면 교회로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성소, 성전은 그들의 실제적인 삶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시집을 갔는데 애를 못 낳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정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10년을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게 그렇게 지냈습니다. 거창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그 비참한 가슴을 부여안고 성전을 찾습니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서 멸망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왕들도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울며 이 나라를 구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 희망, 좌절, 고통, 시련, 모든 삶의 상황을 짊어지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 신앙을 토해내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나쁜 신자가 된다’ 그것은 왜냐 하면 음식을 놓고 아주 맛있게 잘 만든 음식일수록 강한 랩으로 두면 썩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도 똑같이 좋은 신자들이 부패의 공격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안 하면 특별히 나쁜 짓을 안 해도 정말 부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에티누스라는 신학자는 자기의 책 속에서 ‘신자의 간절한 기도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정말 기도를 안 하려고 뜻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거의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통회합니다. 얼마나 수준이 높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물같이 쏟으면서 비느냐에 의해서 그의 영혼에 쇄신하는 작용이 일어나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대체해 나갈 수 있는 변화의 능력입니다. 인간이 고민하고 절망하는 것 중에 하나님 앞에 절반만 그 마음으로 기도를 해도 교회가 바뀌고 여러분들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를 간절히 하는 사람들은 이 기도의 위력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고 더 파괴적인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도전과 오기로 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상황에 만족하고 거기에 굴복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길들여진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매우 유치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중국에 갔습니다. 우리 집사람 동창이라고 해서 갔는데 ‘목사님, 이곳은 교회는 없고 구경이나 시켜드리겠습니다’ 해서 갔는데 호랑이만 보이는 산상이었습니다. 백호랑이만 있었는데 호랑이가 검은 줄이 가서 하얗습니다. 이것이 야생에서 멸종이 되어서 먹잇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 놀란 것은 호랑이가 200kg-300kg 되는 호랑이인데 어떤 비쩍 마른 남자가 들어와서 앞으로 취침, 뒤고 취침, 동작 그만 하니까 그대로 했습니다. 끝나니까 고기 한 덩어리씩 던져줬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아,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저렇게 이 세상에 길들여지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호랑이가 한 번 확 하고 소리를 지르면 온 산에 있는 동물들이 두려워서 오줌을 쌉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고깃덩어리 하나 먹으려고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하고 있으니 그것을 죽을 때까지 하다가 이빨 빠져서 죽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누가 생각나지요? 기쁜 일이 있으면 누가 가장 생각납니까? 남편이 예기치 않은 높은 지위에 승진하게 되었다, 그러면 누가 생각납니까? 시어머니 시아버지 생각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생각나고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모든 꿈과 희망을 교회에 두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제일 부러운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주일만 자기네 교회에 가고 나머지는 자기들 마음대로였습니다. 교회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수요일은 어느 교회에 가서 어느 유명한 목사님 강해설교를 듣는다, 금요일은 어느 교회에 가서 성령집회 참석한다, 하는데 저는 개척교회에 있어가지고 갈래야 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고등부, 구역 네 구역, 성경공부 두 클레래 맡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잘 하는 것이 있는데 난로피우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난로에 10분 에 연기 하나도 안 나고 피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것을 보편교회라고 하는데 우리가 정말 사랑해야 될 교회는 그 보편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그 보편교회를 모두 한 곳에 모으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두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아주 아름답게 주 앞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질 때 이 보편교회가 이 우주 속에서 아름답게 되는데 이바지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괴로운 날은 괴로워서 주님의 집에 나와서 눈물로 기도하고 기쁜 날은 기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에 나와서 눈물로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으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으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교회 개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꽃다운 자매들이 와서 ‘목사님 중매 서 주세요.’ 막 이렇게 하던 자매들이 지금은 권사님 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아, 쟤는 왜 저렇게 늙었냐?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많이 늙었구나,’ 그러면서 늙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마지막에 이 세상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살아가고 마지막에 이 교회를 깊이 사랑하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정말 실패한 인생을 살다 간 50이 넘어서도 자기의 갈 길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 머리가 하얘서 교회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을 할 때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종신하시오’ 라고 제가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든 삶과 꿈을 이 교회에 바치며 이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하고 그래서 이 세상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도록 이바지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으로부터 한 30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방에 있는 어느 기독병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하얀 의사선생님과 40대 후반쯤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원장실에서 옥신각신 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논쟁이라기보다는 옥신각신 하며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이야기 합니다. 그 사람 손에는 신문이 하나 들려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원장님. 신문보고 온 사람입니다.’ 신문에는 ‘눈을 삽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그런 것이 허용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눈을 산다고 했으니 내 눈을 사십시오.’ 이랬더니 원장님이 ‘아 이거야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산다는 거지 언제 산 사람의 눈을 산다고 했습니까?’ ‘눈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마찬가지 눈인데 당신은 사겠다고 하고 나는 팔겠다고 하는데 왜 안삽니까? 내 눈을 사십시오.’ 무슨 이야기인가 들어보니 의사선생님이 ‘당신은 젊고 멀쩡한데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그렇지 왜 눈을 팔려느냐?’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난 더 많은 돈도 필요 없습니다. 50만원만 주고 내 눈을 사십시오.’ 의사선생님이 기가 막혀서 안 된다고 하다가 대체 뭐 때문에 50만원이 필요하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길고 긴 사연이 나왔습니다. 시골에 조그만 교회가 있는데 교인이 열 서너 명 모이니까 목사님을 모실 능력이 안 되고 목회자가 와도 불과 1년도 못 버티고 다른 곳으로 부임해서 가고 가고 해서 결국은 목회자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교인이 흩어지지 않으니까 이 집사님은 날품이나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할 수 없이 자기가 예배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이면 이웃에 있는 목사님을 꾸어다가 설교를 들었는데 그것도 한 두 주이지 매주 그렇게 되니까 자기는 그럴 의지가 없었는데 하는 수 없이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예배도 인도하고 기도회도 인도하고 주석 갖다 놓고 다른 것을 베껴서라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교회를 돌아보니 자기는 편안한 집에서 자고 교회는 다 쓰러져가는 천막에 오두막집 같이 있는 게 너무 마음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을 기도하다가 열 서너 명 되는 교인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가난해도 이 교회보다는 좋은 집에 사는데 교회를 지읍시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당신 정신이 나갔습니까? 무슨 돈으로 교회를 짓습니까? 되지도 않습니다. 누가 도와준답니까?’ ‘그래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을 살살 달래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청년들하고 리어카를 가지고 개울가에 가서 모래를 퍼다가 시멘트를 사다가 이겨서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는 교회를 다니며 한 푼씩 두 푼씩 보조를 청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도 바쳐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벽돌로 예배당을 네모나게 만들고 문을 내고 나무를 짜서 기다란 의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거기에 앉혀 예배드리게 하고 위에는 목재를 짜서 얹어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습지만 옛날 천막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시련이 겹치는데 장마와 함께 엄청난 폭풍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바람이 불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새벽에 일찍 교회를 나가보니 지붕이 폭풍을 만나 찢겨져 바람에 날려 밭고랑에 쳐 박히고, 교회는 물이 들어오고 벽돌도 상당부분 물을 먹고 허물어졌습니다. 교인들이 깊이 낙심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교회를 짓자는 애기는 하지도 못하고 다시 무너진 벽돌위에 텐트를 치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눈을 산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부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나 사랑해?’ ‘사랑하지.’ ‘그럼 내가 장애가 와도 나랑 살거야?’ ‘여보 우리가 부분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러자 남편이 부인에게 그 신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50만원이면 고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 병원에 가서 내 눈을 팔게 해줘.’ 부인이 ‘그런 걸 내 허락을 받아요. 가서 팔고 오지?’ 부인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집을 팔아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많지만 눈을 뽑아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의 성화에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습니다. 부인이 견디다 못해서 ‘여보 당신이 기도 많이 했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그래서 집사님이 병원에 가게 된 것입니다. 원장님이 장로님인데 다 듣고 난 뒤 안경을 고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한 교회의 장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집사로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며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꼭 필요한 간호사만 남기고 점심시간에 회의실에 모여 눈물로 집사님의 간증을 원장님이 녹음했는데 그 자리에서 모금을 했는데 이백 만원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눈도 안 빼고 그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몸 바쳐서 희생했던 교회의 일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그것에 대한 깊은 보답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 인류는 추상명사이고 한 사람은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이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희생, 섬김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이만큼 성장해 오기까지 하나님이 가장 많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자를 비롯해서 여러분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희생 속에서 교회가 이만큼 성장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 옆에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점점 늙어갑니다. 우리 아들을 결혼 7년 만에 낳아 내가 다니던 교회에 가서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성찬에 참여하면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 달에 우리 아들이 신학대학원에 가서 우리 교회의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금년에 결혼합니다. 세월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우리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우리도 늙어갈 것입니다. 꽃다운 시절에 엄마 아빠 손잡고 예배당에 왔던 사람들이 장성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늙어갑니다. 세월이 더 지나고 나면 손자손녀들이 태어나고 우리는 더 늙어지고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합니다. 손자손녀들이 자라기 시작하고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겠다고 혼담이 오고갑니다. 역사는 흘러가고 우리는 지는 태양처럼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얘기치 못한 어느 한 순간에 우리 인생의 무대의 막을 내리고 마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 그 분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삶을 삽니다. 슬픔과 괴로움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토하고 그 분의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배우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성도들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죽는 그날, 우리는 관에 누워서 정 들었던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토록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과 가족들에 의해 운구 되어 갈 것이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교우들, 믿음으로 살다 죽은 우리들은 마지막 천국을 향한 환송식장에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들은 우리를 보내면서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간 저 성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신앙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예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나의 인생의 기억의 마지막 끝은 다섯 살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이전에 희미한 몇 장의 그림이 있지만 마지막 총 천연색으로 또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다섯 살 그 정도가 마지막 그림입니다. 그 때 저희 아버님은 강원도에서 사업을 하셨고 저는 온 집안에서 13년 만에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4년 전에 제가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의 유치원에 다닌 기억이 납니다.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하던 나무 벽돌도 생각나고 반질반질하던 예배당 마룻바닥도 생각이 나고 교회 마당도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뒷집에 사는 여자 아이와 손잡고 노란가방을 메고 함께 유치원에 다닌 기억도 납니다. 끝나고 오는 길에는 담장 아래 피어나는 풀을 뜯어 가방에 담으면서 이것을 가지고 소꿉장난하고 그렇게 하면서 신작로를 건너고 작은 개울을 건너오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은 너무 추웠고 토끼 귀마개를 하고 들판을 나가면 형들이 얼음을 지치고 하늘높이 연을 날렸습니다. 형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때 얼음을 지치던 아이들의 함성소리, 봄이면 얼음 사이로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그게 벌써 55년 전의 일입니다.
나에게만 인생이 살같이 빠르게 흐르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인생은 이렇게 물살의 살같이 빠르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이미 그 때쯤이면 죽고 사라졌을 저의 설교를 이 예배당에서 들었던 그 날도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오셔서 55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빠르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이제는 늙은이가 되었구나’ 라고 말입니다.
(찬양)
인생에 황혼이 깃들어서 땅 위에 수고함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다 검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모, 그것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패기만만한 능력, 물질소유, 이 세상의 권력 모두 함께 떠내려갑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것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지혜를 갖게 되고 그 때에 그렇게 사랑했던 것들이 사실은 허망한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아무리 사랑해도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고 아무리 자기를 버려도 영원히 있는 것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렇게 일평생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름을 내놓을 만한 거창한 명함이 없고 이 세상을 휘어잡을 만큼 권력을 누리거나 큰 재물 없이 살았다고 할지라도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밀한 성소에서 베푸시는 그 아름다운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들, 하나님을 매일매일 사랑하고 주님을 알아갔던 행복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 세상의 죽음의 기운이 그들의 육체를 삼키고 이 삶의 여정을 뒤로하고 죽음의 휘장너머로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온 날이 주를 위해 섬기며 산 날이었기 때문에 죽음의 휘장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라는 영원한 안식이요, 위로요,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만났던 아름다운 교회,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별로 기억해주지 않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의 신부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이신 교회에게 부어주시고 그 사랑의 분연 때문에 우리들이 참여하여 함께 사랑을 누리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믿음은 이루어지고 소망은 성취하고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때 우리가 지상에서 받았던 큰 하나님 사랑의 기억들이 우리의 인생에 파고를 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받았던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순간마다 주님의 발로 붙들어주셨던 그 은혜를 생각하며 천국에서 사랑의 기억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어둠속에서 방황할 때 주께서 그리스도의 뜨거운 피로 우리의 마음을 발라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셨던 용서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누린 하나님 사랑의 경험의 극치였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섬겼던 크고 작은 일들이, 아프고 쓰라렸던 모든 기억들은 마지막 날에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셨던 그 은총을 찬양하는 노래의 가락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끊어진 멜로디와 같이 이 세상에서 조각났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 끊어지지 않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무 것도 남기는 것 없이 이 세상에 가져온 것 없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갈 것이고 피붙이처럼 사랑했던 내 아내, 살같이 사랑했던 내 남편과도결국은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허허롭고 곤고한 날에 우리의 기쁨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었던 우리의 자녀들과도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눈물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겼던 나의 육신의 피붙이보다 더 소중한 사랑하는 지체들과도 잠시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그 날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만날 때 까지 우리의 육신은 잠시 이 세상에서 이불을 덮을 것이며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마주 대하며 보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날에 하나님 나라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거기서도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올려다보며 우리의 후배를 위해 기도할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 다 싸우지 못하고 남겨둔 싸움을 물려받아 우리의 대를 이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그 곳에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이 땅에서처럼 가슴을 찢는 비탄과 후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죽음과 같은 괴로움 속에서 탄원을 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일평생 주님의 교회 한 모퉁이를 이 모양 저 모양 섬기다가 그렇게 살같이 사랑하고 아끼다가 간 우리들의 교회를 천국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뀌고 이 세상에 세월은 흘러가고 교회의 성도들은 바뀌었어도 여전히 우리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지상에서 천상까지 한 가족으로서 하나의 영적인 끈을 이루며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면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자격이 없는 쓸모없는 우리 같은 죄인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로서 접붙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이 살아가시는 한 교회의 지체가 되어 눈에 보이는 이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우리의 코에 호흡이 있는 동안, 우리의 심장의 박동이 계속 뛰는 동안, 우리의 피가 혈관에서 굳어지기 전 까지 이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자기를 버리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살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며 살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일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께서 여러분을 친히 맞이하실 것이고 ‘수고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눈물 흘리며 우리의 인생길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사림이 되기로 다짐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