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인턴십 종강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롬 16:12)
녹취자:문미경
로마서 16장은 부록처럼 붙어있어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안부의 인사를 전하는 내용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난 20여 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이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구절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생을 사역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각각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남겼을 겁니다. 여러분도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지만 각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이 있을 것이고 특히 오래도록 함께 사역을 하고나면 그 사역하던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우리의 뇌리 속에 아주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 한번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주관적으로 이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에 대해서 이런저런 인상을 갖고 있고 아마 사모인턴십을 하면서도 열린 교회와 그리고 다른 사모님들, 심지어는 저에 대해서도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여러분에 대해서 인상을 갖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어떤 사람으로 인상이 남겠습니까? 물론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러분에 대해서 인상을 갖는 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일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 같습니까? 또 어떤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까?
사도바울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고 버시도 그 많은 사람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 버시에 대한 3가지 정도의 인상이 남아있었습니다. 첫째는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들을 써보면 모두가 일합니다. 수고합니다. 그러나 많이 수고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데 누가 힘든 걸 좋아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두드려지고 나타나고 사람에게 존중히 여기는 일을 시키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기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화) 노회의 어떤 목사님을 우리 교회에 중요한 예식이 있어서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일주일을 남겨놓고 못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왜 오시기라도 했는데 못 오시게 됐냐고 여쭸더니 딴 교회에서 그날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축사보다는 설교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리로 가려고 했답니다. 보십시오. 누구든지 다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위해서 일하려 그러지 그렇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대부분 부교역자 생활을 하시겠지만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겠지만 그러나 담임목사나 교회의 눈에서 보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정말 많이 수고한다는 평가가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고 누가와도 그 정도 수고는 하겠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버시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사도바울의 마음에도 버시라고 떠오르면 참 많이 수고한사람이라는 그 인상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사도바울을 돕는 일꾼들이 많이 있었지만 버시의 이름을 특별히 기억된 것은 정말 많이 수고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한 교회에서 어떻게 섬겼느냐는 나중에 그 교회 있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린 겁니다. 여러분이 사역을 5년이나 10년하고 떠났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 교회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여러분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눈물이 나오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 어려울 때 와서 고생만 하다가 떠난 우리목사님, 밤이나 낮이나 수고 많이 한 전도사님.. 그렇게 기억이 남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버시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많이 수고한 동역자로 남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충성스럽게 부교역자로 섬기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충성스런 부교역자를 보내주십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돈은 많이 못 받았지만, 못 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또 하나님이 제 책도 쓰시게 해서 부족함이 없이 여태껏 살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게 주신 큰 축복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축복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목회의 동역자로 삼아주신 것에 대해서 참 감사드리고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부교역자 섬길 때 요령피우지 않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의미에서 상급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나는 회심한 이후에 세 교회를 섬겼고 한 교회는 평신도로 섬겼고 두 교회를 교역자로 섬겼습니다. 나는 세 교회 모두 내가 담임목사님보다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 고통도 많고 눈물도 흘렸지만 많이 수고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수동태 분사로 ‘사랑받는’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특징이 뭐냐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자매였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 저 말하고, 고자질을 하거나, 다재하긴 한데 박덕합니다. 그래서 수고를 많이 하는데 항상 자기가 수고한다고 울부짖는데 아무도 별로 인정을 잘 안 해주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힘들어하다가 어느 날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열린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교회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잡으면서 정말 생각을 잘하셨다고 한다면 이런 경우는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교역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교역자든지 일하는 사람들이 이 속에 노예의 DNA가 골수에까지 베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요일 날 교역자 회의를 대부분 하는데 토요일 날 교역자 회의를 하면 교구별로 돌아가면서 사다놓은 빵이나 간식거리를 나눠먹습니다. 이것이 유례가 있습니다. 예전엔 교역자 회의에 들어가면 항상 싸늘한 분위기에 차 한 잔 끓여서 나오는 법이 없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시키면 되겠지만 그런 거는 기쁜 사람이 해야지 지시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봤습니다. 그래도 안합니다. 그래서 3주를 거듭해서 사람 수 만큼 빵을 사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한사람씩 줬습니다. 첫 번째는 ‘이게 웬일인가?’ 하고 두 번째는 ‘어?’ 하면서 의아하고 세 번째는 ‘이러면 안 되겠다.’ “목사님 다음 주부터 우리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오게 된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 속에서 깊이 노예의 인자가 베여서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열 명이 모이면 나하나 때문에 열 명 모이는 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비결이 뭘까 생각하고, 내가 일찍 가서 깨끗이 닦고 청소하고 그리고 마실 것을 준비할까, 그리고 추우면 히터를 틀어놓고 사람들이 왔을 때 따뜻한 차라도 한잔 끓여놓으면 너무 좋지 않습니까? 먹을 것이 있으면 더 좋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길 했더니 누가 그럽니다. “목사님 그게요. 제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이용합니다. 네가 담당이니 네가 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도 이런 차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노예는 누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기의 신분이 노예이고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할 때 그 마음은 ‘두 번만 하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내가 미안하니까 내가 할게 그러겠지.’라고 생각하면 넷째 주부터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교회 떠날 때 까지 이걸 하라고 해도 내가 기쁘게 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DNA가 이 속에 쭉 배어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섬길까 하는 생각, 이게 진정한 노예의 정신입니다.
여러분,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해도 성도들이 말은 안 해도 동역자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어함을 당하는 사람은 남이 싫어함을 당하면 저 사람은 너무 성격이 이상하고 사람이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사람들이 저 사람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안 좋아하면 사람들이 뭘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워낙 진리대로 올바르게 하니까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교회가 잘 되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쓰기 때문에 진리를 양보했기 때문에 잘 되는 거고 자기네 교회가 잘되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다고 간증하고 싶어 하는 거고, 다른 교회가 안 되면 능력이 없어서 안 되는 거고 자기교회가 안되면 이 혼탁한 시대에 워낙 똑바르고 맑게 목회를 하니까 사람들이 잘 안 알아줘서 안 되는 거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입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 교회 부흥하셨어요?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자기가 부족해서 잘 안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말해야합니다. “정말 저는 맑게 진리대로 목회를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옵니다. 저처럼 순결하게 목회해서는 요즘 같은 세상엔 부흥이 안 됩니다.”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을 돌아봐야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어느 교회서든지 간에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서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뭔가 2% 다른 게 있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고, 특별한 결점이 없지만 그런데 같이 일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수고하는 사람들은 대게 거칩니다. 교회에서도 교인들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람은 11시에 왔다가 축도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돈 많이 내고, 기도 많이 하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에 휘두르는 사람들이 대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버시는 많이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수고한 사람, 또 다른 사람도 수고한 사람, 했지만 버시는 많이 수고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도바울에겐 분명히 차별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자매였습니다. 그런 걸 통해 볼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에 있어서만 헌신된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공감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그 무엇이 이 사람 마음속에 있던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수고하고 애를 쓰는 이 버시를 많이 사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교회를 떠날 때에는 많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전도사님이 지금 계셨더라면 그 목사님이 계셨더라면..이라고 생각될 수 있게 그리워지는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리에 관한 것일 때는 양보할 필요도 없고, 물어볼 필요도 없고, 타협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 때문에 옳은걸 선택해서 인간관계가 깨지면 그건 헤어져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우리 사역자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원인은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하거나, 혹은 이기심 때문에 그러하거나 사랑이 부족해서 그러하거나 대부분 그런 것 때문입니다. 자기가 희생하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버시는 수고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이런 모든 많은 수고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착한 인격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면 ‘주안에서’입니다. 이 ‘엔퀴리오’(ἐν κυρίῳ)라는 단어는 아주 신비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안에, 예수님 안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연합을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을 도와서 힘에 넘치도록 많이 수고할 뿐만 아니라 거기다 덕을 쌓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여자의 모든 말과 마음과 섬김과 헌신이 주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속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예수님께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섬김이 이루어지고 인격적으로 도야되었기 때문에 이 버시가 그렇게 많이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받은 사람이 된겁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었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로마교회도 로마교회가 됐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버시도 교회의 일꾼이 됐고. 그래서 있는 모습은 다르고 생긴 것은 다르고 모든 게 달라도 다 예수님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만나서 예수가 준 힘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될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많이 수고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덕을 쌓아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이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을 이뤄서 살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성경구절에 나옵니다. 버시라는 이름이 뭔가 해서 찾아봤더니 주석가들이 말하길 이것은 당시에 페르시아출신에 있는 여자들에게 아주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었는데 노예들에게 즐겨 사용하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단하기에는 어렵지만 조심스럽게 주석가들은 이 여자 출신이 페르시아의 노예일수도 있고 도망쳐 나온 노예일수도 있고 아니면 자유인이 되었어도 그 이름을 안 버려서 그냥 있을 수 있는 그런 여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정통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이고 높은 문화를 자랑하는 헬라 본국 사람도 아니고 그저 변방에 있는 페르시아 지역 출신의 아주 미천한 여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변해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잊혀 지지 않는 예수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된 겁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봅시다. 여러분은 결혼을 하셔서 남편이 목사이거나 전도사일겁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조용기 목사님 능가할 정도로 30년 후에 유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럼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열린 교회와 비교되지 않을 대형 교회를 이십년 후에 목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 중에 한둘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여러분 중 대부분은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목회자는 못된 채 인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성령운동을 한다고 해서 모두 순복음 교회가 되겠으며, 찬양 집회를 한다고 하용조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 온누리 교회가 되겠으며 사랑의 교회 부지런히 따라다녀 제자훈련을 배운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두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셔서 다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이 특별히 능력을 주셨다고 하여도 그 사람을 과도히 찬송해서는 안 됩니다. 그 주신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달란트의 비유에도 보듯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주님이 볼 때에 ‘충성스럽게 많이 수고한사람이구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구나. 그 모든 섬김과 사랑받음의 동기가 내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구나.’ 한다면 그럼 그것으로서 각자가 훌륭한 삶을 산겁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것이 신앙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자신의 일기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죽을 때가 다가온 것을 알고 천국을 묵상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간절히 천국을 원하는 것은 생명수 물가에서 과일이나 먹고 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천국에 보내 주셔서 그 한 모퉁이에다가 나를 있게 하신다면 그곳에서 나를 구원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신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겁니다.”라고 말입니다. 천국에 가서도 주님을 섬기기 위한 소망 때문에 천국을 앙망했던 겁니다. 여러분이 버시처럼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상 지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