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뜻을 세우라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녹취자 : 김세나
Ⅰ.본문해설
시인은 앞의 두 절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온전히 쏟아 놓은 기도자의 호소를 주께 올렸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그 모든 사연들을 주님이 통촉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려움 속에서 시인이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중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고, 어디로부터 헤쳐나가야 할지 보이는 것이 없어도 시인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마음을 쏟은 후에 시인은 기도의 뜻을 세웁니다.
Ⅱ.기도에 뜻을 세움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기도의 뜻을 세우는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최소한 세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A. 하나님께 대한 믿음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시인의 가장 큰 위로는 주님이 자기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달래는 자기 암시가 아니었습니다. 허위나 숨김이 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쏟아 놓은 마음에서 오는 믿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고 자신이 미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든 것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는 이 시인의 기도는 거짓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것에 의해서도 방해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되었습니다. 자신은 기도할 것을 결심하였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음을 쏟아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한 상급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은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의 상급은 바로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 믿음은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나의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있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 주님의 손을 의지하고 있나이다, 라는 자신을 모두 쏟아 부은 그 믿음은 능력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능력있는 사람도 떠나는 적이 있으시지만,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쏟아 부으며 당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거짓없이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떠나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혹시 잠시 떠나셨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신자 마음 안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당장 한번의 기도로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음을 모두 주께 물처럼 쏟아 놓으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과 막혔던 모든 담장을 허무십니다. 그리고 오염된 찌꺼기들을 모두 다 치우십니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며 주님께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모두 쏟아놓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굳센 믿음을 주십니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오늘 기도의 뜻을 세울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믿음을 표명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종종 이러한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는 그렇게 잘 응답하시는데,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는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덜거려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단순히 사람을 차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차별하십니다. 지금 그러한 불평을 하고 있는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만을 들어주시는 것 같은 독점적인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이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시인처럼 마음을 모두 쏟아 놓고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매달리고 자신 안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할 모든 문제들이 모두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내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빌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최소한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빨려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은혜를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후에 오는 모든 것은 놀라운 평화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고 주님께 기도하고 나면 어떤 기도는 그것이 응답이 되든지 말든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밀려옵니다. 그리고 자신을 꽉 채웁니다.
(찬양)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늘 기쁘게 나 부르니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놀라운 평화. 밀려옵니다. 그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차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종종 당신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시고 그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게끔 일깨우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거짓된 것들에 대한 사랑이나 혹은 잘못된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차 있고 심령이 둔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콘크리트 바닥에 공을 던지면 튀기는 것처럼 어떤 말씀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번 그렇게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당신의 자녀가 말씀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갇도록 삶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 정말 내가 헛된 것을 의지하며 살았나이다.’ 하며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욱 강퍅해져서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고귀한 인생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인이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더니 이 사람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그 소리가 공교롭게도 히브리어 말로도 ‘콜’입니다. 나의 소리, ‘코리’라고 나옵니다. 코리는 목소리를 내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드문 경우에 속으로 들리는 소리도 코리라고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소리를 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마음을 쏟아 놓으며 간절히 부르짖는 그 소리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들린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확신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솔직히 견디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기도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만 할 수 있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시련으로 닥쳐와도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지금 듣고 계시다는 확신이 우리의 심령에 밀려오고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 우리가 왜 살 수 없겠습니까?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비밀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뜻을 세우고자 하는 여러분들은 제일 먼저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B. 하나님을 향한 정돈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정돈입니다. 왠 정돈 입니까? 오늘 우리말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기도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보케르 에라크 헤 카‘라고 나옵니다. 직역을 하면 “아침 때에 당신을 향해 나는 정돈할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의 직역입니다.
많은 번역본들이 3절을 번역하면서 고민을 합니다. 가장 권위있다고 여겨지는 킹제임스 버전은 이것을 할 수 없이 의역을 합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를 당신께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NIV성경은 “내가 나의 요청들을 주님 앞에 두겠나이다.”라고 교묘하게 번역합니다. 그러면 저의 번역은 무엇인가 하면,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주님을 향해 정돈하겠나이다.” 묘한 것은 뭐냐 하면, 목적어가 없습니다. 목적어 없이, “아침에 나는 당신을 향하여 정돈하겠나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돈하다’라고 번역하고, 킹제임스 버전에서 ‘향하게 할 것입니다.’ NIV에서 ‘두겠나이다.’라고 번역한 이 ‘아라크’라는 동사입니다. 1인칭으로 나오는데 이 동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 ‘아라크’라는 단어에 가장 흔한 뜻은 정렬하다입니다. 여러 개의 물건을 줄과 열을 맞춰서 정돈하는 것을 가리켜 아라크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많은 곳에서 사용되는데 그 중 하나가 시편 23편에서 주께서 원수의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할 때에 ‘차리다’라는 것이 바로 ‘아라크’입니다. 예전에 설교한 바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이 정렬되어 있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입니다. 한 개는 아라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는 ‘준비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당신을 향하여 준비하겠나이다라고 하는 번역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원래 이 ‘아라크’가 군대에서 전쟁에 관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동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4장 8절의 문맥에서 보면 이 ‘아라크’는 진을 치다라고 나옵니다. 전투 태세를 돌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음 속에 상상해 보십시오. 각 군인들 한 천여 명이 여기 저기 흩어져서 휴식도 취하고 담배도 피우고 낮잠도 자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축고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서 적의 기습이 시작된다고 하는 경보가 울립니다. 그러면 군인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지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포병은 각각 자신의 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기관총 사수들과 경계병들 모든 병력들은 각자 전투가 시작되면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로 빠른 시간 내에 돌아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돌아가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딱 준비된 그 상황과 아까 휴식시간이 되어 흩어져 있던 그 두 개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라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네 번째 용도가 있습니다. 네 개면 사실 ‘아라크’에 대한 성경에서의 용례는 다 말한 것입니다. 시편 50편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를 눈 앞에 펼쳐 보여 주시겠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안 보이던 것을 쭉 볼 수 있도록 쭉 늘어놓는 것이 바로 ‘아라크’라는 단어가 표현한 바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하여 정돈을 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시인이 기도한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내가 아침에 정돈하고 주를 바라리이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이 속에서는 기도라는 말이 표현되어 있지만, 시인이 열렬히 기도할 것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내가 새롭게 정돈할 것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서 하나님께 매달리니 나는 휴식을 취하거나 비상상태가 아니라 평상시의 군대와 같지 않고 전투에 돌입하는 군인처럼 제자리에 돌아간 것같이 나 자신의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정돈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말로 옮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제가 한 번역대로 ‘내가 당신을 향해 정돈할 것입니다.’라고 할 때 누가 이해 하겠습니까. 사실 엄밀하게 하면 기도한다고 하는 뜻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마음과 생활, 외적인 질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쏟는 사람답게 정돈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잘 곱씹어 보면 커다란 도전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림을 그려 보십시오. 천명이 되는 병사들이 각자 휴식시간이 되어서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상 사이렌이 울립니다. 그런데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 손에 담배를 물고 더우니까 웃통도 벗어 재껴 한손에 총을 들고 적이 오면 싸우리라, 모든 부대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전투를 한다고 할 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기습이 경보되면 전원 제 위치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 입니까? 전투 태세로 돌입하라고 하는 것은 각자 “전투 위치로!” 그것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전투가 벌어질 것을 수없이 예상하고 경험하면서 최적의 위치를 부대원들이 정해 놓은 것이고, 그 부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전투 화기와 시설들을 최대한으로 가장 빨리 돌릴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전투 위치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면서 싸움다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삶이 하나님을 향해 정돈되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떤 것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가 주님의 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이 정돈되지 않으면 간신히 수영하는 사람 위에 커다란 모래 배낭을 매어 준 것과 같습니다. 입술로는 아무리 부르짖고 손으로는 몸부림 치지만 물 위로 떠 오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도 읽었지만, 다시 설교 준비 하면서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서 번역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습니다. 아침에 내가 주를 향하여 혹은 주를 위하여 정돈하겠나이다. 진짜 기도할만한 태세로 돌입하겠나이다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것은 기도하기를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비록 현재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불순종과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끊어버리고서라도 하나님께 향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도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는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반대편에서 보면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다음 기도 시간에 짊어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이 줄 하나를 가지고 우리의 혓 바닥이나 입술을 잡아 당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마음 전체를 잡아 당기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향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을 여러분들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기도를 하려면 “부대원 전원 전투 위치로!” 지휘관의 음성을 위급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치로 가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모든 것들이 평상시 같으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그러한 것들이 구별이 되겠지만, 전투 사이렌이 울리고 확성기에서 지휘관이 다급하게 “부대원 전원 전투 위치로! 전투 위치로!”하면 다 필요 없습니다. 전투가 곧 벌어질 상황이기 때문에 자기 위치로 돌아가 정돈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돈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라는 전투를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써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다고 뜻을 세우고 실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얼개와 아예 그러한 기도를 잃어버린 채 방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의 얼개는 사뭇 다릅니다. 이 마음의 모든 것들이 전투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회개한 마음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정돈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깨우친 마음이 바로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뿐만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정돈되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마음이 정돈될 수 있으면, 정돈된 그 마음에서 해야 할 올바른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잠언 2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이탈되었던 질서에서 정돈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정돈이 됩니다. 그때 진실한 기도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외면적인 우리의 자리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지성과 감성, 의지, 이러한 것들의 위치를 바로 잡아 줍니다. 시인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 밖에 의지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향해 정돈할 것임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삶의 질서에 대해 하나님을 초점으로 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주님을 향해 정돈하겠나이다.” 목적어가 없는 이것은 기도 자체에 대한 결심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마음과 삶의 초점을 당신에게 향할 것이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의 초점과 기도의 내용이 일치할 때 그 기도는 간절해 지고 그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삶의 초점과 마음의 초점, 기도의 초점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고백과 다르게 되고,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삶의 초점과 맞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의 기도가 되고 맙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의 날들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초점과 삶의 초점이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 물을 쏟듯이 자신을 쏟아 놓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번 설움으로 어떤 일시적인 자극 때문에 질펀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께 어떤 열정을 느낄 수는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미끄러져 있는 것이 너무 가엾으셔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일시적으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과 삶이 보다 더 온전히 정돈되어 당신을 찾으라고 주시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정돈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관한한 각자 전투 위치로! 전투 태세로! 라는 이 소리를 생생하게 들으며 그 위치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합니다.
C. 하나님을 기다림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라리이다’라는 단어는 ‘에차페’라는 단어인데 우러러보다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서 look up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기대함으로 우러러보며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종이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에게 모든 희망이 있다고 믿고 그분을 우러러보며 기대함으로 고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어떤 기도는 간절히 기도하고나면 하나님이 즉시 기적적으로 그 기도를 실행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시간을 두고 실타래처럼 얽혔던 우리의 삶의 사태들을 풀어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 그때뿐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그 분만을 우러러보며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기도속에는 주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 때 그 응답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믿음도 그 기도의 믿음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한번의 화끈한 기도 속에서 모든 것을 물처럼 쏟아 놓고 심사를 통촉해 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번에 해결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주 많은 기도를 간절한 눈물 속에서 실망스럽게 전개되는 현실을 극복하고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리는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응답하도록 연장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망가졌던 관계들, 다시 그 관계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을 우리의 마음의 구조들을 수리하십니다. 그렇게 인내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주를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과의 먼 거리감을 좁혀 가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비록 눈에 띄는 기도 응답이 없어도 기도할 때마다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친근한 은혜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하나님과 느껴졌던 무한한 거리감, 그리고 하나님이 앞에 기도해봐야 주님이 나의 기도 같은 것에는 귀를 기울이시지도 않는다는 아주 깊은 소외감,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그러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해소시켜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계시고 비록 내가 원하는대로 몇 번의 기도로 모두다 혁명적으로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달라진 것은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주 내 안에 나 주 안에 있는 연합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러한 거리감을 치우십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그 거리감이 하루가 아니라 반복된 기도 속에서 모든 거리감을 치우시고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셔서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두 번쨰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거역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토라진 마음, 아주 귀엽게 이야기 하면 토라진 마음이고 나쁘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 속에서 자라납니다. 애들이 그렇게 까지 할 의사는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아이들이 어긋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관심을 끌기 위해서, 혹은 엄마와 아빠에게 섭섭한 감정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항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님이 해소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운 감정에 그만 두었다가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울끈 불끈 솟아 오르는 그러한 반항하는 감정을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저 깊은 자신의 인격의 밑바닥으로부터 그 고백이 나오게 하십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서 느꼈던 거리감, 소외감, 반항하는 마음,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의 반복속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씻어 버리십니다. 씻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예화) 요새는 잘 못 먹는데 가난하던 시절에 제가 좋아하던 요리가 있었습니다. 국인데 소의 양, 천엽이라고 하는 주름 있는 내장을 좋아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먹으면 비쌉니다. 시장에 가서 마음 먹고 삽니다. 부속물 시장에 가면 쌌습니다. 가격은 싼데 나쁜 것은 복잡합니다. 거기에 온 갖 지저분한 불순물과 기름이 달라붙고 냄새는 엄청나게 누린내가 납니다. 그것을 씻는 것이 일입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쇠 수세미로 잡아뜯고 난리를 쳤는데, 살짝 삶습니다. 그 다음에 수세미나 쇠 솔 같은 것으로 깨끗이 닦아 내면서 몇 가지 방법으로 완전히 깨끗이 씻습니다. 그 다음에 요리를 해 먹으면 냄새도 안 나고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된장과 배추를 넣고 끓이면 정말 맛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저분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음식을 깨끗이 하는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들을 주께서 그 피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끗하게 못 살아갑니다. 걸레 같아 집니다. 하나님이 휙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십니다. 씻으시는 방법이 그냥 씻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피의 감화로 우리의 마음을 닦아 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셔서 우리를 받으십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었고 자신이 정돈하겠다고 주님 앞에 고백하고난 후에 그리고 나는 주님을 우러러 바라볼 것입니다. 나는 나의 모든 기도가 주님 앞에 알려졌고 내 심사를 통촉하셨으니 나는 나의 소망을 어디에서 찾아보려고 다시 옛날처럼 하나님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고아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내가 당신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소망이 당신께 있다고 믿고 당신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일체의 떠들썩 함이 없는 일체의 평정한 마음으로 그 분의 주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결말을 얼마나 아름답게 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위기를 만나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은 위기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망가진 채로 살 수 밖에 없는 나를 모두 고쳐 깨끗이 씻으셔서 나를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로 우리를 그렇게 당신에게로 정돈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그 열렬한 기도로 돌아간 사람들, 정돈된 그 위치로 돌아간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십자가의 경험이 다시 반복됩니다. 나중에 깊이 깊이 깨닫고 나서 보니까 우리가 기도 못하였던 것이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완고한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가장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데,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기도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치료의 길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로 여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기도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모두 경험되고 아주 결정적으로 말해서 기도의 은혜에서 미끄러졌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함으로써 정돈되고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회복됩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긴 세월동안 우리에게 맞장 뜨자고 덤벼들고 극악하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주고 그러했던 사람이 한두번 사과한다고 마음을 열고 안아주겠습니까? 아마, 이 인간을 이렇게 받아들였다가 뒷통수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주님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기도를 회복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걸음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게 되고 인격적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Ⅲ.적용과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공보다는 기도에 뜻을 세우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한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정돈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보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존재했던 것처럼 현재와 미래, 모든 내 인생의 소망이 그 분의 손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깊은 웅덩이에서 주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러분들을 건져주실 것이며, 지난 날 그 웅덩이에서 많이 부르짖어도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의 메아리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이제 이러한 믿음으로 당신에게 나아가면 주님이 그 메아리가 마지막 메아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의 손을 여러분들에게 뻗치실 것이니 주님께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