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우신 하나님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 하는 자들을 멸망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니이다”(시 5:4-6)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많은 악인에게 에워 쌓인 고난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세계를 통해서 밖을 내다 보았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를 괴롭히는 많은 악인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린 후에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안팎에 많은 악인들이 에워 쌓여 있고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 주시길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삶의 상황을 높이 뛰어넘어 하늘높이 오릅니다. 마치 새가 이 땅에 있는 건물과 땅, 논과 밭을 내려다보듯이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봅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과 많은 역경과 시련들이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속에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보고자 하는 신앙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악악 거리는 대신 그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은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를짖어서 아침에 자신의 소리를 듣게끔 기도올리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마음에 있는 소원을 하나님께 온전히 고하는 기도의 아침이 되리라고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Ⅱ. 의로우신 하나님
A.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심
제일 먼저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이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절에서 말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시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혹은 악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악인 혹은 악을 행하는 자가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대적자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하고 시인은 그들에 의해서 억압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악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을 이길 힘도 부족하고 그들처럼 똑같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악으로서 악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사악한 담대함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시인은 조용히 하나님의 한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에 대한 묵상은 시인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 묵상은 바로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시인을 죽일 듯이 괴롭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기 때문에 악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바탕 자체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는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악인이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악은 그들의 악한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더욱이 그 악을 담대히 행하는 죄인을 즐거워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움과 고통을 만나면 그 어려운 상황을 붙들고 씨름하느라고 우리의 진이 모두 빠져 버립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과 만나 다투고 그 악에 악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악을 이겨보고자 인간적으로 애를 쓰고 그 악에 맞서 싸우다가 자신도 그 악에 물드는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들로서 악과 싸우다가 그 자신도 똑같이 악에 빠지는 사악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도 되지 않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는 조용히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악인들이 자신으로서 자기를 능히 이기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아니시라는 것에서 큰 위로를 얻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악이나 개인적인 악에 대해서 즉각 징벌을 내리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이 될 리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차서 주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노예적인 복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종종 그 악이 행해져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혹은 옳고 의로운 사람들이 큰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은 그들을 멀리 떠나계신 것처럼 그렇게 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진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그 상황을 통해서 무게로 달아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자기 원하는대로 자신의 삶의 현실이 전개될 수 없습니다. 모두 그것을 원하지만 원하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현실이 전개될 때 그렇게 자신에게 현실이 전개되게 했던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마음속에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영력히 드러내고 때로는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혈기로부터 온 것이고 악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 악을 악으로 갚는데 있어서 그 악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 지겠습니까. 시인은 가장 고통 받는 그 날에 악인들을 주목하고 원한에 사묻혀 복수의 칼날을 가는 대신 가장 위급한 시간에 너무나 원통해서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부르짖는 시간에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악을 기뻐하실 수 없고 악인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이 평범한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인은 이 사건 말고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잠시 번성한 것같지만 그 악인들이 어느 순간에 모두 소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벤 풀이 말라서 지푸라기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악인들이 번성하고 힘을 발휘하고 큰 위세를 떨쳤으나 그러나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을 시인은 보았습니다. 무엇이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일이 질력이 났겠습니까? 그 악인들이 모두 자기가 하는 악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로 바뀌었겠습니까? 그랬을리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장 고통 받는 시간에 잠시 그 현실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시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죄악을 기뻐하실 수 없고 악인들과 함께 머무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악인은 잠시 힘을 얻어 자신에게 고통을 주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벤 풀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심령에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인생에서 언뜻언뜻 만나는 상황을 통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이 스스로 대면하게 해 주십니다. 마치 어떤 상황을 만나자 주님께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그 본인이 보는 눈앞에서 저울에 달아 보이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이 정도인줄 알아라, 그리고 네 인간이 이것 밖에 감량이 안 되는 줄 알거라,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깊이 회개하고 낮아집니다. 그러나 이미 교만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달아보실 때 그 하나님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깔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토라집니다. 그리고 삐칩니다. 그것은 귀여운 표현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행동한 결과는 마음속에 오래토록 영향을 미쳐서 결국 하나님의 공의에 판단을 받게 하십니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악인에게 가장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이 이 시인의 믿음을 달아 보셨습니다. 그러자 이 시인은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묵상하면서 악인들은 번성하나 잠깐 사라지는 존재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디에 누구와 함께 계시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의를 행하는 사람 가까이에 계실 것이며 또한 선하고 의롭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인의 모습을 자신의 원수들에게 발견하면서 시인은 새삼 마음에 깊이 결심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며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원치않는 현실이 전개되고 그러한 현실의 배후에 누군가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나가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이 이 시인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용기를 받으십니까?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때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죄악을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속에서 그것들 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끔 하나님이 사람들의 인생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이 죄악을 기뻐하신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은 죄악과 배치되고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그 죄를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죄인은 불쌍히 여기시나 죄인이 끝까지 그 죄에서 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하심으로써 돌이키지 않는 그 죄인과 함께 악을 제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마음 깊이 경험하고 그 성품을 매순간 순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마치 죄악을 기뻐하시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는 성품으로 죄를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악을 미워하시고 그 죄를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과는 화해할 수 있어도 죄와는 화해하실 수 없습니다. 파멸시키는 것만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사실이 위로가 됩니까?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위로가 되려면 나의 양심에 불의하다고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시는 않지만 자신안에 죄악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기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주 여호와는 내 편이시로다, 시인처럼 고백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에 은혜를 받으며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생명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죄악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로 가득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시면 그 부어진 은혜는 새로운 삶을 살기는커녕 이미 마음안에 건재하고 있는 이 죄악들을 소멸하기 위해서 소진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도 흘리고 은혜는 받고 하나님을 종종 느끼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받는데 왜 그런지 은혜가 자신의 삶 속에서 힘이 되어서 솟아 오릅니다. 생명이 되어서 자신의 삶 속에 역사하고 그 은혜가 사랑이 되어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실제적인 삶으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느끼며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종류가 다르지만 또 다른 악이 자신속에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그 빛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 빛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독특한 죄악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고 악인들에게 에워 쌓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담대하고 환란을 만나도 마음에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 발견되는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그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시고 자신의 대적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번영하는 자 같아 보이고 하나님이 버린 사람과 연약한 자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중 누가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겠습니까? 믿음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다도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두려워하며 거기에서 용기와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B. 오만한 자들이 서지 못함
마지막 두 번째는 오만한 자들이 서지 못할 것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오만하다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홀렐링’이라는 단어로 복수입니다. 이것은 그냥 교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함으로써 교만해진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교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종교적인 것에 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조금 더 낫게 보이려 하는 그러한 교만이 아니라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모든 나만 못한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과 그리고 커다란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 같아도 후 하고 불어 버리면 날아가 버립니다. 사라져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겸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겸손합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수 있는 한 진리를 거스리지 않는 한 일체의 온유함으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사랑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용감하고 집착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라도 잃어버릴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운 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괴롭힘으로써 이 세상에 잠시나마 악이 선을 이기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오만한 자들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그것 자체가 이 시인의 마음에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만한 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과 권력, 육체의 힘을 믿고 자기만 못한 사람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비한 사람들은 낮아집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알고 미천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오늘 이것을 입증하듯이 오늘 시인은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말하면 ‘당신의 두 눈에 마주하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당신의 두 눈에 마주하여 서지 못하리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견디지 못하리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두 눈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견디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두 눈에 불꽃과 같은 직시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오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악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전에서 이 악을 견딜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타는 물건이 강렬한 불 앞에 타버리고 마는 것처럼 연약하게 서 있는 깃발들이 강력한 태풍 앞에 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분질러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서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인들은 오만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와 불의 사이에 분간을 못하고 자기 욕심이 원하는 대로 의보다 불의를 좋아하셨고 악을 선보다 더 기쁘게 행했습니다. 아무 잘못없는 시인에게 악을 행하고 그의 목숨까지 노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그들에게는 시인을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고 그를 도와주고 그가 선한 사람인가를 알아보고 선을 베풀려고 하지 않고 정반대로 행하였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회개하고 깨어진 심령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시고 부어주신 그 은혜 때문에 그 속에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힘이 솟아나는 이 영적인 비밀, 은혜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자신 안에 생명이 없는 증거를 오만하게 행하고 하나님 목전에 끝까지 견디지 못함으로써 모두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행악자는 악이 인격적인 특징이 되어 버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선하게 살고자 하다가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악을 행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하나님을 멸시함으로써 악 자체가 인격적인 특징이 되었고 그 악이 그의 마음은 물론 그의 말과 모든 행동거지를 좌우하는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사람이 바로 행악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오늘 이 본문에서 시인은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왜 거짓말이 나오겠습니까. 진실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고 진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진리에 기반으로 하여 생겨나는 미덕입니다. 선은 진리를 엄정히 따라가야지만 온전한 선에 도달할 수 있지만 악은 구지 어떠한 목표를 삼지 않고 그 진리 없이 살아가면 그 모든 것이 악이 됩니다. 과녁에 있어서 중심은 오직 하나의 정이고 나머지는 모두 과녁을 벗어나간 것입니다. 그 벗어나간 모든 것이 악인이 사람이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겠습니까?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겠습니까? 행악자는 진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욕망이 그 진리를 이겨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거짓말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으면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정신병 가운데 하나인데 거짓말을 할 때 자신의 모든 생각과 심리 작용이 그 거짓말 할 때 말과 딱 일치가 되어서 자기 자신이 진실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정신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거짓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물 흐르듯 무슨 악과 거짓을 말하든지 인격과 합일되어서 흘러나옵니다. 마치 진리의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 비록 준비되지 않았어도 진리에 대해서 말하면 자신의 마음이 전하는 그 진리에 부착이 되어서 진리가 분명하게 하면 분명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면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게 하면 기쁨이 솟아나듯이, 그 거짓에 대해서 악인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아주 멀리 있는 남의 나라의 일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거짓말 하는 자는 신실함이 없는 자입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거짓의 기반 속에서 신뢰할만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뢰할 때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특징은 피 흘리기는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여기에서 피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것, 그것도 자신이 직접 찌르거나 베어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그 마음 속에 있는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잔인한 것을 보며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긍휼과 사랑이 모두 사라져서 돌맹이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죽음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악인입니다. 죄에는 미친 기운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담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과 죄는 아주 흡사합니다. 둘 다 그 자리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강렬하게 사로잡힐 때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주는 담대함입니다. 그것은 영원과 이 세상의 차이에 대해서 눈뜬 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죄는 이 사랑의 흉내를 냅니다. 죄에 강력하게 사로잡힐 때 이 죄는 담대함을 줍니다. 그리고 미친 기운을 줍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담대함이 솟아나고 존재하는 것과 없어지는 무 사이에 큰 차이를 못 느끼는 비이성적인 것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보지는 못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특별히 영화를 통해서 조폭들을 다루는 영화에서 인간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는 것인가. 그리고 두목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맞추 었을것인가. 어떤 때에는 돈을 던져주고 조금 있다가는 야구 방망이로 뒤통수를 때려죽이고 칼로 찌르는가 하면 금덩어리를 던져주고,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렇게 거기에 단련되어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죄가 주는 미친 기운과 담대함, 맹렬함 이 세 가지가 죄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잔인하게 행하면서도 일체의 거리낌이 없습니다.
(예화) 제가 청년부를 지도할 때 있었던 한 형제가 시골에 살았는데 자기네 동네 닭집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조금 연관이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닭을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도계장에서 반드시 위생시설이 된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닭집이 있어서 즉석으로 잡아 주었습니다. 그 형제 이야기가 자기 동네에 닭집이 생겼는데 그 닭집을 개업하였는데 남편이 닭을 잡고 털을 벗겨서 생닭으로 음식을 만드는 음식점은 아니라 닭을 잡아서 생닭으로 주는 닭집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몸이 안 좋아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자기가 직접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너무 심약한 여자라서 그러한 것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남편을 도와서 죽은 닭은 만져 보기는 하였지만 살아있는 닭을 죽일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닭도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죽지 않습니다. 두 날개를 완전히 한손에 틀어쥔 다음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대각선으로 한 번에 가슴뼈사이로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도 못 쉬고 한번에 죽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못하였습니다. 찔러 넣는데 닭이 반쯤 살아서 뛰어다니고 생난리를 치고 여자는 울고 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6개월 후 시장 나온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농담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닭을 잡고 피가 탁 튀니까 피를 닦으면서도 웃으면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와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잔인한 것에 대해서 인간의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단련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시인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갈 때 즐겨보는 것이 박물관이고, 그 나라 초기 역사를 봅니다. 오늘날 선진국이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국가라고 불리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초창기에는 정권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혹은 사회적인 악을 행해서 사회를 혼란케 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이 너무 너무 잔인한 것에 대해서는 나라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다 설명하면 여러분들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행했습니다. 일체의 티끌만한 긍휼도 거기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양, 서양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공통적입니다. 그렇게 잔인한데, 여기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반복되는데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결국 거짓말은 말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지만, 속이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여기에는 자기의 이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행동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악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는 일이었고, 그 모든 것의 뿌리는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겸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잠시 오만하여 그렇게 거짓말하고 잔인하게 행하고 주님이 싫어하는 속이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한 미래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신자들을 종종 믿음의 저울에 달아보시기도 하시지만, 악인들을 영원히 참지 않으시고 그 악인들을 어느 한순간에 당신 앞에 세우셔서 심판하십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 국가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에서 멸시하였던 오만한 자들은 서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면서 시인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인들이 비참한 형벌을 받음으로써 시인이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던 자들이 사라지게 될 것으로 말미암아 시인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 이상 모욕을 받지 아니하고 존귀함을 받으리라는 그 기대되는 현실 때문에 시인이 위로를 받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고난을 당하고 혹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악인들이 나에게 악을 행함으로써 고통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악을 악으로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악자들의 악만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악도 동일하게 미워하십니다. 시인은 오히려 그와 같은 때에 하나님의 한 성품을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멸시하는 자들이 행하는 교만하고 거짓된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온 땅과 모든 하늘에 있는 것들을 당신의 두 손으로 장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큰 시련을 당하면서 더욱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기를 깊이 다짐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이 커다란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계기가 되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혹은 시련과 고난 사람들로 말미암는 고통을 당하면서 이 시인처럼 의로우신 하나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보며 그 죄인들에게서 오는 악을 악으로 이기며 자신도 함께 악에서 떨어지는 것은 바로 사단이 원하는 일이고 우리의 육신안에 있는 혈기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믿는 대신 자신이 그 심판을 대행하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선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의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고 당신의 공의를 햇빛처럼 비취게 할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성품을 가르치십니다. 이 시인이 만약에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셔서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마음을 쏟지 않았다면 부르짖는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주님 앞에 간절하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침마다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의지하며 기도드리겠다고 결단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 시인도 아마 악속에 함께 미끄러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달아보실 때에 그는 함량 미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고통을 통해서 사람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기보다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결고 크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는 의인의 편에 서겠으며 주님이 함께하실만한 사람에 속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악인에게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을 찾았습니다. 악인의 번성함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으니 모든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며 사는 모든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매순간 주님의 손으로 붙드십니다. 주님은 이 순간에도 당신의 거룩하심과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시고 특히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십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악을 악으로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 악을 선으로 이겨서 결국 승리한 것 같은 악이 그 선 아래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공의를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들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시련과 고통의 문제를 악으로 행하다가 원한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져 악인들과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의 되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마음이 이 현실의 모순이 가져다 준 부정적인 인상으로 가득차는 대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서 이 악을 신앙으로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