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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새벽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녹취자: 박은경
형제사랑과 음행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과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사도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이 이런 일에 있어서 어떻게 모본을 보였는지 기억을 하고 그것을 본받도록 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복음은 강력한 능력의 나타남 즉,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함께 전해졌지만 성화와 함께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교회의 시대는 얼마나 행복한 것 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중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관련해서 이중적인 의무가 있는데, 첫째는 그들에게 자신의 지성과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참된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무는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실제적인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 동안 우리 조국교회에서 깊이 반성해야 될 점은 이 두 가지가 절대로 나뉘어져서는 안 되는 진리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다분히 전자에 치우쳐진 면이 있고 그것이 심화되면서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멘하고 믿으면 구원이 주어지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의 선택인 것처럼 사소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뒤틀린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의 풍성한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것도 모두 두 가지 중 한 가지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성화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되겠다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때에 비로소 깊고 풍성한 복음의 교리, 해박한 복음 자체 속에 들어있는 지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쪼가리 난 복음밖에는 우리에게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 이후의 삶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복음의 핵심적인 사실 이외에 깊고 풍성한 진리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인식하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그리스도의 본이 내게 찍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서도 이러한 찍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할 때에 나오는 단어가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다는 단어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주조되어 찍혀가든지, 세상을 닮은 사람으로 찍혀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내놓으셨을 때 예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의 틀에 의해 찍혀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주조해서 내어 보내심으로 세상에 찍히면서 살아가는 삶이외에 또 다른 신령한 방식의 삶이 있다는 것과 그 원천은 영생임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의해 똑같이 찍히면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다만 밖에 버리워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생각해라.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앙을 따라 죽었는지, 그들이 끼친 본을 생각하라 그들로부터 너희는 복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너희가 보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깊이 도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사회를 고치는 하나의 중요한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첫째는 모든 권위와 권세의 머리이시고 에베소서 5장에 나와 있듯이 믿는 사람은 거기에 붙어 있는 신비한 몸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한 몸은 구원하시는 은혜에 의해 형성이 되어가고, 성화시키는 은혜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그 몸이 연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다고 할 때 이중적인데 첫째는 최종적인 권위와 권세로서의 머리입니다. 그 머리에 몸이 붙어서 계속 자라는데 구원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몸이 이루어지고 그 모인 지체들이 성화시키시는 은혜에 의해서 성화될 때 그 몸은 아주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권위와 권세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이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한 가지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이신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은혜의 구속적 사역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의 머리이신데 이것은 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자가 구속적 은혜라면 후자는 사역적 은사와 관련됩니다. 그 때 그리스도는 통치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지체로 묘사가 됩니다. 지체라고 하는 것은 몸의 여러 가지 각 부분인데 일하는 것을 염두고 채용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가 통치의 머리이시고 거기에 모든 성도들이 지체로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지체로서 붙어 있는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하기 위해서 사역하게 하시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교회로 하여금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역사하는 요인이 되고 은혜는 그 사람을 구원하거나 구원받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작용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역을 뛰어나게 한다면 은혜가 신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할 때 그 신자, 그 교회를 온전한 신자, 온전한 교회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탁월함이 우리의 사모하는 바가 되지만 개인적으로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감에 있어서는 탁월함보다는 온전함이 더 뛰어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칼빈이나 존 오웬이나 훌륭한 종교개혁자들이 입을 모아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도 필요하고 내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외적으로 주어지는 은사는 내적으로 불러 일으켜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은사보다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고, 그 사람을 온전한 신자로 만들어가고, 그 사람을 교회의 몸으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전하게 되어 진 신자에게 특별한 사람의 표로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은사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은사가 곧 그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있는 은혜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예가 사울이나 가룟 유다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볼 때에 오늘 편지를 받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신 있게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이 상당히 놀랍게 삶에 있어서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자신들이 전해 준 그 복음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게 역사하고 그들을 먼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이중적인 사명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말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닮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온 삶으로 보여주고 입증해 주어야 합니다. 또 그것만을 중시한 나머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옳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추구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모두 탁월함을 추구하고 온전함을 별로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나, 사역하는 사람들이나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성공을 이루고 업적을 이룬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탁월함은 어느 한 방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이고, 그것에 찬사를 보내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해도 용납할 수도 있다라는 한풀 접는 마음이 이 탁월함을 찬미하는 사람 마음에 이미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탁월함보다는 그 온전함, 즉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해서 그 사람 자신을 바꾸어 놓는 은혜롭고 순결한 역사의 과정 없이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깊이 사모하여야 하고 그렇게 가치가 전도된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아울러 동시에 그 온전함만을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겼던 사람과 교회의 삶에 대해서 우리들이 사모함과 부러움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이 너무나 수도적으로 내재화되거나 관조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같이 조화를 이루면서 온전하기를 추구하며 또 하나님의 은사에 목말라서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신 유한한 생명의 시기 동안에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다 죽을 수 있을지 하나님 앞에 고민하면서 우리를 탁월하게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은사를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이 ‘목사님 제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너의 구역장을 봐라. 멀리 갈 것 없이 너에게 복음을 전해 준 교회의 지체의 삶을 봐라. 그렇게 살면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교회생활이겠고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씀을 전해 준 사람의 본을 통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구나, 자신의 온 생명보다 더 소중한 그리스도를 만나고 가슴에 복음을 품은 사람들의인격과 생활이구나’ 이런 것을 깊이 보여주여야 합니다. 저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들은 사람들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매일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큰 사랑과 위로가 넘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